시그니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사실 제이는 ‘어른스러운 아이’가 어떤 아이인지 잘 알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냥 다 똑같은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그니와 다른 아이들의 차이점을 구분해 낼 수 있을 만큼 남의 자식들에게 관심도 없었다. 시그니가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것도 주변에서 그렇게 말을 해 준 덕분에 알았다.
그래서 처음 상담을 받던 날, 아이의 성격에 대해 묻는 닥터 헤이든에게 제이는 크게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운 편입니다.”
닥터 헤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 정도 시그니와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제이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요, 제이? 원래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건 없어요. 어른스럽게 굴기 위해 애쓰는 아이는 있지만요.”
그러면서 닥터 헤이든은 덧붙였다. 시그니가 어른스럽게 굴려고 노력하는 건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때 시그니는 네 살이었다. 고작 네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한다는 게 제이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가, 라고 생각을 해 보아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롯이 자신만을 담아내고 있는 회색 눈동자와, 어느 결에 입가에 맺힌 수줍은 미소를 보고 있노라면 그만 납득이 되곤 했다. 아아, 이 아이는 정말 나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아니,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 어제보다 오늘 더, 눈앞의 작은 존재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결국은 상대적인 거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오로지 열 달 배 속에 품고 있었다는 이유로 아이가 마냥 사랑스럽다는 건, 적어도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생겨난 아이였고 낳기로 결심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거듭해야 했으니까. 임신 기간 중의 고통과 불편함을 떠올리면 더욱더 그러했다. 부담감과 죄책감이 뒤섞인 부채감이 순수한 애정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뀌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직접 낳은 자신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리욘은 어떻겠는가. 그에게는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딸이었다. 유전자 감식 결과라는 빼도 박도 못 할 증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당장은 실감이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리욘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네 딸에 대해선 부러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다고. 한껏 점잖게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엔 미워했다는 이야기다. 어떻게든 아이 아빠를 찾아서 그 품에다 냅다 안겨 주고, 둘이서 살라고 멀리 보내 버리는 상상도 했을지 모른다.
애초에 리욘은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가올 때면 늘 다정하게 웃어 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서비스의 일환일 뿐이었다.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달래 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시끄럽다, 애 부모는 어디서 뭘 하나, 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자식만은 안 낳을 거라고. 갑자기 마음을 바꾸게 된 것도 단순한 질투의 발로였지, 정말 아이가 간절해서는 아니었다.
그래서였다.
“시그니에게는… 조금 천천히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아이에게는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전하와 좀 친숙해지고 나면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되도록,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에게는 어떤 식으로 말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리욘에게 당분간은 모르는 척 해 줄 것을 요청한 이유는. 두 사람 사이의 극명한 온도차가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시그니는 리욘이 자신의 친부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에게 막연한 호감을 드러내곤 했다. 이유도 없이 마냥 좋아했다. 심지어는 하루 종일 뉴스만 틀어 놓고 리욘이 나오길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 리욘이 자신의 아빠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며칠을 좋아서 잠도 못 자고 아빠가 되어 버린 전하 생각에 설렐 게 분명했다. 왜 말 안 한 거예요? 왜 그동안 날 만나러 오지 않았어요? 같은 질문은 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좋아서, 기뻐서 마냥 행복해하기만 할 게 분명했다. 이제 매일 자신과 함께 있어 주길 바랄 테고, 자신이 원할 때마다 품에 안아 주고 입을 맞춰 주길 바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큼, 리욘도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리욘에게는 그럴 터였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가능하겠지. 이 현실이 온전히 납득되고 실감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시그니가 원치 않아도 그렇게 해 주려 들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은 아무래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을 좀 벌어 볼 생각이었다. 천천히 두 사람의 온도차가 줄어들길 기다릴 심산이었다. 어쩌면 리욘도 그걸 바란 건지 모르겠다. 시그니에게는 천천히 알렸으면 좋겠다는 말에 곧바로 그러지, 라고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꽤 오랜 실랑이를 예상했던 제이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재차 물어보기까지 했다. 정말 그래도 되겠느냐고, 괜찮으시겠느냐고.
“아이에게 그게 더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리욘은 별수 있느냐는 듯 말했다. 말투가 워낙에 여상해서 제이는 더욱 얼떨떨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어쨌거나 시간을 벌었으니까. 이제 리욘과 시그니의 온도차가 줄어들기만 기다리면 되는 거였다. 혹시 또 모를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리욘의 집착이랄까, 열망도 함께 식어 버릴지.
리욘이 아이에게 집착했던 건, 그 아이가 존재하지 않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더욱 욕심나고 탐이 났던 거다. 그런데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그 아이가, 심지어 자신이 원하던 그 모습 그대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제 예상되는 반응은 둘 중 하나였다. 언제 그랬냐는 듯 집착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게 되거나, 반대로 더욱 집착하게 되거나. 리욘은 아마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 전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체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제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이마가 나랑 똑같이 생겼어.”
리욘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리욘이 “아, 물론 지금은 조금 다르지만.” 하고 정정했다.
“그런데 어릴 때 사진을 보니 정말 똑같더군. 비슷한 정도도 아니야. 정말로 똑같이 생겼어.”
“…….”
“코는 나보다 널 더 닮은 것 같고… 입매도 널 닮았군. 윗입술이 얇은 걸 보니 그래. 나보단 네 입술 모양과 더 비슷한 것 같아.”
괜찮아, 하고 리욘이 애써 마음을 달래듯 말했다.
“귀는 나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얼굴형도 그렇고. 무엇보다 눈매가 나와 아주 판박이야. 보통 눈매가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는 가장 큰 요인이니까.”
그렇지? 리욘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제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말없이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볼 뿐이었다. 새벽 네 시였다. 자다가 붙들려 나온 까닭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물론 맑은 정신이었다고 하더라도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벌써 사흘째였으니까. 사흘째 똑같은 질문만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네, 맞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런데 오늘도 또 똑같은 걸 물어보니 이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와는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하고 정반대의 말을 해 주자니 리욘의 표정이 또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모르겠다.
제이는 벽에 몸을 기댄 채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이젠 모르겠다. 내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은 아이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걸까. 그래, 아마 그런 거겠지.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사람이 돌변할 수는 없는 거니까.
“특히 눈동자 색이 아주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해.”
대답 없는 제이를 외면한 채 리욘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그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살며시 닫혀 있는 저 눈꺼풀 아래의 회색 눈동자를 떠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제 핀란드인의 피가 섞인 고조모의 이야기가 나올 차례였다.
“회색 눈동자는 발트해 근처 지역에서는 꽤 흔하지만 여기선 드물거든. 내 눈동자 색은 아마 고조모에게서 물려받은 걸 거야. 핀란드인의 피가 섞였다고 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특이한 경우긴 하지. 나 말고 다른 가족들은 다 푸른색이야. 친척들까지 다 살펴봐도 초록색이나 갈색은 있어도 회색 눈동자는 없었는데 바로 내 딸이,”
“전하.”
제이는 결국 못 참고 리욘의 말을 가로막았다. 응?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드는 남자를 향해 최대한 정중하게, 기분 안 상하도록 조심하며 말했다.
“애 깨겠습니다.”
그만 하고 나가시죠, 라는 말은 일부러 안했다. 안 해도 어련히 알아서 눈치채고 일어설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는 분명 그랬으니까. 하지만,
“깨면 안 되나?”
“…….”
“어쨌거나 수면 시간만 채우면 되는 거 아닌가. 늦게 잠들면 그만큼 늦게 일어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학교에 가는 것도 아니고.”
어제까지가 한계였던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사흘 내내 자정 넘은 시간에 와서 잠든 얼굴만 보다 갔으니까. 한 번쯤은 눈 뜨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겠지. 이야기도 나눠 보고 싶을 것이다. 그야 자기 자식이니까. 아빠 된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그것과 별개로 영 적응이 안 된다. 그 아빠가, 다른 사람도 아닌 리욘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내일 뭐 스케줄이라도 있나?”
은근슬쩍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대로 애를 깨우고 싶은 눈치다.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그래? 그럼 늦게 일어나도 되겠군.”
“안 됩니다.”
제이는 단호히 말했다. 어째서? 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리욘에게 잠시 고민 끝에 말했다.
“밤에 안 자면 키 안 큽니다.”
“키?”
“네. 밤에 자야 성장 호르몬이 활발히 분비된다고… 아무튼 뉴스에서 그랬습니다.”
제이는 대충 얼버무렸다. 말하다 보니 내가 왜 이 새벽에 이런 거나 설명하고 있어야 하나 슬그머니 짜증이 났지만 내색은 안 했다.
하지만 제이도 여기까지였다.
“키가 도대체 얼마나 크길 바라고 있길래. 아니, 여잔데 굳이 그렇게 커야 하나? 작은 게 더 매력 있지 않아? 얼굴이 예뻐서 어느 쪽이든,”
“전하.”
그냥 나오십시오. 결국 제이는 못 참고 리욘의 팔을 붙잡아 방에서 끌고 나왔다.
“벌써 새벽 네 십니다.”
응접실로 나오자마자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 월요일입니다.”
오전에 의회에 참석하셔야 하지 않느냐고 하자 리욘은 팔짱을 끼며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빨리 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리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그니는 아침까지 안 일어납니다.” 제이는 못 박듯 말했다.
“한번 자면 어지간해서는 깨지도 않고, 깨도 아마 금방 다시 잠들 겁니다. 그리고 자다가 중간에 깨는 거, 별로 안 좋습니다.”
“그래?”
“네.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수면 교육 중요합니다. 제이는 부러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잠자는 버릇을 제대로 들여야 한다고 해서 일부러 한번 잠들면 아예 푹 자도록 버릇 들여 놓은 겁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런 교육이 중요하다고 듣긴 했지만 크게 신경은 안 썼다. 시그니는 처음부터 알아서 잘 자고, 알아서 잘 일어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따금 밤늦게까지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있긴 했다. 그럴 땐 그냥 잠이 안 오는가 보다, 하고 잠들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억지로 재우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필요를 못 느꼈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늦게 자면 그냥 늦게 일어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방금 누가 했던 말인데, 이거.
뒤늦게야 깨닫고 제이는 조금 심란해졌다. 하필 이런 부분에서 리욘과 사상이 일치한다니,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수면 습관이란 건 중요한 거니까.”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한때 수면 장애로 고생을 한 전적이 있어서인지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그럴 걸 알아서 일부러 이 주제로 얘길 꺼낸 거지만 막상 저렇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미안했다.
“보통 밤 열 시에 잠이 드니까요.”
그 전에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제이는 한풀 꺾인 음성으로 말했다. 리욘은 대답 대신 짧게 웃었다. 제이는 그 미소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게 가능했다면 그렇게 했겠지, 라는 뜻이었다.
“오늘은 이만 가지.”
리욘이 코트의 깃을 세우며 말했다. 입구까지 따라나서는 제이에게 됐으니 병실로 들어가라고 손짓한 뒤 리욘은 입원실을 떠났다.
리욘이 떠나고 곧바로 응접실 안쪽의 방문이 열렸다.
“갔어?”
수잔이 푹 꺼진 눈을 하고 말했다. 워낙 잠귀가 밝은 탓에 사흘 내내 밤잠을 설치고 있는 수잔이었다.
“미안해요. 들어가서 자요, 수잔.”
제이의 말에 수잔은 괴로운 듯 문틀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어떻게 사흘 내내 이러냐고. 쟨 잠도 안 잔대?”
“이제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안 올 거예요, 아마.”
“그걸 어떻게 믿어.”
엉망이 된 머리를 긁으며 수잔이 짜증스레 말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정말.”
“예상을 했다고요?”
제이는 병실로 돌아가다 말고 멈춰 서서 물었다. 수잔이 미간에 주름을 새기며 “당연하지.” 하고 말했다.
“넌 쟤 이럴 거 몰랐어?”
“전혀요….”
“왜 몰라. 뻔할 뻔잔데.”
기가 찬다는 듯 말하는 수잔에게 제이는 “어떻게 알았어요?” 하고 물었다. 그리고,
“그야 시그니는 예쁘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말하는 수잔을 보며 제이는 그대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사랑스럽잖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어.”
“…….”
“하물며 그 예쁜 게 자기 딸이라고 하니까 더 예뻐 보이겠지. 하루 종일 물고 빨아도 부족할 거야.”
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수잔과 리욘은 정말 닮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할 뿐이었다.
“욕하지 마. 난 저런 팔푼이 아니야.”
“네… 그래요.”
당당하게 우기는 것까지, 아주 똑같았다.
***
말로는 애가 보고 싶으면 잠들기 전에 오라고 했지만, 그건 못 올 걸 알기 때문에 한 소리였다. 애초에 그게 가능했더라면 사흘 내내 그 늦은 시간에 병원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부터 스케줄을 조절한다고 해도 최소 이틀은 지나야 시간을 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워낙에 바쁜 시기다 보니 지난주에 세 번씩이나 병원을 찾은 것도 상당히 무리를 한 결과라는 이야기를 에이나르에게 들었다.
그러다 보니,
“맛있어?”
“네.”
“그럼 이것도 먹어 봐.”
응접실 소파에 앉아 시그니를 무릎에 앉혀 놓고 초콜릿을 먹여 주고 있는 리욘을 봤을 때, 다른 마음보다 걱정이 먼저 앞선 건 제이의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다.
“의회 끝나자마자 바로 오신 겁니까.”
제이는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뭐, 그런 셈이지.”
애매한 대답을 흘린 리욘이 “너는?” 하고 물었다.
“검사 마치고 온 건가? 아니면 물리 치료?”
“둘 다입니다.”
“어때, 뼈는 많이 붙었나?”
“네, 많이 붙었고 또 빨리 붙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마시고 전하의 건강부터 살피셨으면 합니다만, 이라는 말은 일단 삼켰다. 리욘이 준 초콜릿을 받아먹던 시그니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맛있어!”라고 외친 까닭이었다.
“맛있어?”
리욘이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물었다. 그 다정한 미소에 시그니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네, 맛있어요….”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이에게 리욘이 얼마나? 하고 물었다.
“엄청, 엄청 맛있어요.”
“그래? 여태 먹어 본 초콜릿 중에 제일 맛있어?”
시그니가 수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욘은 흐뭇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트룰스는 훌륭한 쇼콜라띠에지.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프렌치 셰프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디저트를 훨씬 더 잘 만드는 사람이란다. 특히 그가 만든 피가로(Figaro)는 최고지.”
“이게 피가로예요?”
리욘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가리키며 시그니가 물었다.
“그래. 이게 바로 피가로야.”
금색 포장지를 벗겨 내며 리욘이 말했다. 겹겹이 싸인 포장지 사이로 작은 초콜릿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콜릿의 표면에는 새하얀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제이는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 안에 확 단내가 퍼졌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던 초콜릿의 달콤함이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때 자신의 손에 쥐여 주었던 초콜릿을, 이제 리욘은 딸의 입안에 넣어 주고 있었다.
“꼭꼭 씹어 먹어야 돼.”
리욘의 말에 시그니가 입 안의 초콜릿을 열심히 씹기 시작했다. 입을 꼭 다문 채 한참을 우물거리던 아이가 불현듯 눈을 크게 뜨며 리욘을 쳐다봤다.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몸을 들썩이며 초콜릿을 씹어 삼키더니 이윽고 리욘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맛있어요!”
“다행이구나.”
트룰스가 널 위해 만든 거야. 아이의 입술에 묻은 초콜릿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며 리욘은 미소 지었다.
“왕실 요리사를 그만둔 뒤로는 한 번도 초콜릿을 만들지 않았거든. 그런데 네가 먹을 거라고, 십오 년 만에 특별히 솜씨를 부린 거란다.”
“맛있어요. 전하, 이거 맛있어요.”
몇 번이나 말하는 시그니를 보며 리욘이 그래? 하고 웃었다.
“트룰스를 다시 왕실로 불러야 하나?”
아예 네 전용 파티셰로 고용해 줄까? 리욘이 시그니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콩 부딪치며 말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 리가 없는 시그니는 그저 배시시 웃으며 리욘과 이마를 맞댄 채 몸을 꼬아 댈 뿐이었다. 제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리욘이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 드는 찰나 입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점심 식사하시… 어머나.”
트레이를 끌고 들어오던 간호사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리욘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얼른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는 간호사를 향해 리욘이 물었다.
“식사 시간인가?”
“아, 네.”
다시 트레이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간호사가 대답했다.
“전하의 식사도 지금 바로 준비를 하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난 지금 일어설 거라. 리욘의 말에 그의 무릎에 앉아 있던 시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전하, 가요?” 하고 물었다.
“아쉽게도 약속이 있어서.”
리욘은 시그니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아이를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는 리욘을 따라 일어서며 제이는 말했다.
“점심식사 약속입니까.”
“그래. 요 앞 바우사르 호텔에서.”
보아하니 취소는 못하고 약속 장소만 근처로 옮긴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없는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아이를 보러 온 것이다.
“나오지 마.”
언제나처럼 말한 뒤 리욘은 혼자 훌쩍 입원실을 나섰다. 제이는 다시 소파에 앉았다. 곧 트레이에 실린 음식들이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오늘, 보호자 분은 안 계신 건가요?”
디저트로 나온 푸딩을 내려놓으며 간호사가 말했다.
“아, 곧 올 겁니다.”
사실은 언제 올지 몰랐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안 그러면 꼼짝없이 간호사가 떠먹여 주는 밥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세요.”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잊지 않고 간호사는 입원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시그니가 말했다.
“수잔 어디 갔어?”
“물리 치료실에.”
“왜? 수잔도 아파?”
“아니.”
“안 아픈데 왜 갔어? 거기 아픈 사람이 가는 거 아냐?”
“그렇긴 한데, 안 아픈 사람도 갈 수 있어.”
제이는 대충 둘러댔다. 수잔은 요즘 물리 치료실의 안마의자에 푹 빠져 있었다. 이틀 전, 제이의 치료가 끝나길 기다리며 잠깐 앉아서 이용해 본 뒤로 하루에도 몇 번씩 물리 치료실을 들락거리며 안마의자에 자신의 온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젊을 땐 그런 거 있어도 쳐다도 안 보더니,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퇴원하고 빌라로 돌아가면 안마의자나 하나 사 줄까, 그동안 돌봐 줘서 고맙다고, 그 보답이라고 하면 받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시그니가 “근데 제이 있잖아아….” 하고 포크를 입에 문 채 말했다.
“나 이거 다 먹어야 돼?”
제이는 시그니의 몫으로 나온 음식들을 바라보았다. 딱히 평소보다 양이 많은 것도 아니고, 메뉴도 시그니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저렇게 다 못 먹겠다고 엄살을 피우는 건 결국 먹고 싶지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럴 만도 했다. 초콜릿을 엄청 먹었으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가 않을 터였다.
“못 먹겠으면 먹지 마.”
제이는 늘 그렇듯 시그니의 자율에 맡겼다. 그게 뭐든 강요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아도 시그니는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으니까.
“그러엄, 나 여기 있는 토마토랑 콩이랑 브로콜리만 다 먹을게.”
바로 지금처럼.
“억지로 먹지 마.”
그러다 체해.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아냐, 억지로 먹는 거 아냐.” 하며 열심히 야채들을 포크로 찍어 제 접시에 담기 시작했다. 평소엔 마지막까지 안 먹으려 들던 야채들을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인 양 꼭꼭 씹어 먹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입가가 누그러졌다. 수잔의 말이 옳았다. 이런 아이를 어떻게 예뻐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라도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 말할 처지가 아니구나, 나도.
고개를 숙인 채, 제이는 한숨처럼 웃었다. 어린 딸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져만 갔다.
***
리욘은 자정이 지나 다시 병원을 찾았다. 어차피 자고 있을 걸 알면서도 굳이 시간을 내서 온 걸 보면, 그냥 자는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라 제이는 말없이 방문을 열어 줬다. 마음껏, 만족할 때까지 보시라고 리욘 혼자 아이의 방에 두고 본인은 먼저 응접실로 나왔다.
잠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옆에서 맞장구 쳐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금방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아이가 예뻐도 잠든 얼굴만 주구장창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칠 수밖에 없으니까. 길어야 일이십 분 정도면 나오겠거니 했는데 리욘은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아이의 방에서 나왔다.
제이는 심란했다. 도대체 혼자 한 시간 반 동안 뭘 한 건지 궁금했다. 물론 자신도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며 밤을 샌 적이 있긴 했다. 많은 부모가 비슷한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리욘은, 리욘만큼은 그런 거 절대 무리라고 생각했다. 십 분, 아니, 오 분도 힘겨워할 사람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가도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하고 한숨 쉬며 일어설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 반 동안 잠자는 아이 얼굴만 주구장창 바라본 걸로도 모자라, 돌아가기 아쉽다는 듯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방문을 닫고 나오는 리욘을 보고 있자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혹 이 남자를 엄청 오해하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바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제이의 물음에 리욘이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걸치며 “그래야지.” 하고 답했다.
“괜찮으시다면 잠깐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하는데요.”
“이야기?”
“네.”
리욘은 무슨 이야기냐고 묻지도 않고 곧바로 제이가 앉아 있는 소파로 다가왔다. 그가 맞은편 소파에 앉길 기다려 제이는 차분히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도 리욘은 무슨 이야기인지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웃으며 반문할 뿐이었다.
“제가 여쭤봤습니다만.”
“굳이 대답 안 해 줘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순리대로 해야지. 리욘은 소파에 깊이 몸을 묻으며 말했다.
“내 딸인 걸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은 이대로 둘 수 없어.”
“…….”
“궁으로 데려가야지.”
예상했던 그대로의 답변인데도 새삼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전하.”
“내 성을 물려주고 왕가의 계보에 이름을 올려야지.”
제이의 부름을 무시하고 리욘은 말했다.
“미카엘이 왕세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시그니가 제1 왕위 계승권자가 될 거야.”
“제가 반대한다고 하면요.”
“상관없어.”
애초에 네가 찬성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으니까. 웃으며 말하는 리욘을 보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제이는 허탈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그는 한참동안 고민했다.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인 끝에 결국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럼,”
“하지만 네게 미안한 것과 내 딸의 권리를 찾아 주는 건 별개의 이야기야.”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말했다. 단호한 말투에 제이는 더는 뭐라고 할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미치겠군.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소리 없이 중얼거린 제이는 곧 가라앉은 음성으로 다시 “전하.” 하고 리욘을 불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그니에게 전하의 성을 물려주는 건 상관없습니다. 그러려면 출생 증명서에 부친의 이름을 전하의 이름으로 기재해야 할 테지만, 그것도 상관없습니다. 전하의 딸이니까요. 아그나르 왕조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는 것도, 다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거기까지입니다.”
제이는 단호히 말했다.
“서류는 뭐 어떤 식으로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왕궁에는 들여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들여보낸다는 표현은 뭔가 이상한데.”
소파 등받이에 깊이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하며 리욘이 말했다.
“너도 함께 들어오는 거야, 제이.”
“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은 도리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놀라는 거지? 그럼 설마하니 내 아이를 낳은 사람을, 내 아이의 엄마를 궁 밖에서 살게 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말도 안 되지, 그건. 리욘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었다. 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표정에서 뭔가를 알아차린 듯 리욘이 “제이.” 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건 명령이야. 궁으로 들어와.”
“죄송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제이는 차분히 말했다. 리욘의 미간에 깊이 주름이 새겨졌다.
“어명을 거역하겠다고?”
“저는 전하의 고용인이지 신하가 아닙니다. 에시르의 국민도 아니고요. 시그니도 법적으로는 미국인입니다.”
“법적으로는 미국인이라.”
리욘은 천천히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 법 좋지.”
고개를 끄덕인 그는 다시금 소파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럼 네가 좋아하는 법대로 하면 되겠군. 내 쪽에서 먼저 양육권 소송을 제기하면 되는 건가?”
“전하.”
“장담하는데, 이건 절대적으로 네가 불리해. 제이.”
리욘의 말대로였다. 이건 자신이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제노스에, 남자에, 심지어 직업은 용병이니까. 아이가 제대로 자랄 만한 환경이 못 된다고 법원은 생각할 게 분명했다. 속사정이 무엇이건 간에, 일단 눈에 보이는 요소들만을 가지고 따지면 확실히 미심쩍은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리욘은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비록 아이의 존재조차 모르고 6년을 지내 왔지만 지금은 그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 줄 생각이 만만이었고, 그럴 만한 능력도 충분했다. 게다가 리욘은 결합을 요구하고 있는데 이쪽에서 한사코 거절을 하고 있단 사실도 크게 작용할 터였다. 물론 양쪽에서 작정하고 덤비면 결국 아이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 아이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할 확률이 높겠지만, 시그니가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는 자체가 싫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전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
리욘도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도록 만든 건 너야.”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자신만 굽히면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였다. 물론 리욘이 굽혀도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이긴 했지만.
“일단 진정하고, 얘길 좀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드물게도 리욘이 먼저 진정하길 요구했다. 한 번 몰아붙이기 시작하면 끝까지 몰아붙여 기어이 그 자리에서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야 마는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퍽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게 웬일인가 생각하고 있자니 리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 이상은 너와 싸우고 싶지 않아.”
진심이라는 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 저도 그렇습니다.”
제이 역시 솔직하게 진심을 말했다. 아마 어렵겠지만요, 라는 말은 가슴속에 조용히 묻어 두기로 했다.
이야기를 하자고는 했지만 막상 판이 깔리니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리욘은 그의 입장상 더욱더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 터였다. 스스로도 죄인이라는 자각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시그니에 관한 문제와는 별개로 리욘이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건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싫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거나 아쉬운 소릴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늘 당당하게,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을 보여 줬으면 했다. 왕은 그래야만 한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먼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먼저 말하기로 했다.
“7년 전의 그 일은 이제 그냥 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아까는 욱해서 얘길 했습니다만, 네, 그건 제가 비겁했던 겁니다. 페어 플레이가 아니었어요. 다시는 언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이제 그만 잊으십시오. 제이는 시선을 내린 채 말했다.
“서로 운이 나빴던 거니까요. 저도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뭐, 그건 지난 7년 동안에도 늘 그랬던 거지만요. 그러니 전하께서도 아예 없던 일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정 그게 힘들 것 같다 하시면… 얼마 전에 제가 저질렀던 일도 함께 잊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네가 저질렀던 일이라면.”
“약, 복용했던 거 말입니다.”
제이는 최대한 에둘러 말했다.
“전하께 말씀 안 드린 상태에서 혼자 그렇게 했던 거… 잊어 주십시오. 그럼 쌍방이 한 번씩 주고받은 셈 치면 되는 거니까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리욘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 격앙된 어조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면 대충 적당한 합의점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하긴, 그때 리욘은 정말 많이 실망했으니까. 최대한 내색은 안 하려고 했지만 꽤나 상처가 큰….
“두 번 다 네가 피해자였어, 제이.”
제이는 네?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예상도 못 했던 말이 리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넌 두 번 다 다쳤다고. 첫 번째는 온전한 피해자였고, 두 번째에는, 그래, 가해자라면 가해자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거야. 너도 나만큼 힘들었으니까.”
아니, 사실 나보다 더 힘들었겠지. 리욘이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래도 직접 배 속에 품고 있었던 건 너니까. 상실감, 죄책감 같은 걸 다 차치하고라도 일단 육체적인 고통을 너 혼자만 겪었잖아. 결국 너만 두 번 다 다친 거야. 그런데 이대로 그냥 다 없던 일로 해 버리자고 하면 너 혼자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거라고.”
“아뇨,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아니,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제가 다친 건 다친 거고, 어쨌든 먼저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요.”
제이는 저도 모르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지금 리욘의 이 반응이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랑은 상관없어.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는 거니까. 넌 항상 힘들기만 했잖아. 상처받았고, 괴로워했단 말이지. 그게 싫은 거야, 난. 그 괴로움의 책임은 내게 있는 거니까. 결국 내 탓이 되는 거라고.”
“전 그렇게 생각 안 하,”
“네가 뭐라고 하건 간에,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야. 이건 내가 느끼는 부채감이야. 그러니 네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어. 내 스스로가 괜찮지 않으니까.”
“그럼 뭐… 보상이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제이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해야지, 당연히.”
리욘은 즉답했다. 제이는 더욱 심란해졌다. 시그니의 양육권을 포기해 달라고 해 봤자 그건 다른 얘기라고 쳐 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위자료를 요구하기에는 이쪽도 돈이 아쉬운 상황은 아닌지라 받으나 마나한 보상이었다. 오히려 이쪽이 빚진 기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보상을 해 달라고 해야 하나. 무엇을 요구하면 서로가 다 납득할 수 있을까.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찰나였다.
“왕비 자리를 줄게.”
“…네?”
제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심으로 자신이 잘못 들은 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제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리욘이 다시 한 번 정확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에시르의 왕비 자리를 네게 줄 거야.”
“…….”
“북유럽 연방 수장국의 왕비가 되는 거지.”
“저기, 전하. 죄송합니다만.”
그건 전혀 보상이 아닌데요. 제이의 말은 이어진 리욘의 목소리에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그래. 보상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지. 이 정도는 해야 나름 빚을 갚았다고 할 수 있는 거겠지. 안 그래?”
***
응접실 쪽에서 휘익, 나직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금세 멎을 거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이십여 초가 지나도록 멈추지 않았다.
“수잔, 물 끓어요.”
제이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수잔은 대답이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제이는 한 번 더 소리 높여 수잔을 불렀다.
“수잔.”
여전히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화장실에라도 간 건가. 제이는 책을 내려놓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수잔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이 없었다. 제이는 주방으로 가 인덕션의 전원을 껐다. 너무 끓어 버린 물을 식히기 위해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놓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다.
“커피 마실 거죠? 주전자 뚜껑 열어 놨어요.”
너무 식기 전에 커피를 내리란 뜻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은 건지 만 건지 수잔은 영 딴소릴 했다.
“그렇게 미인은 아니구나. 그리고 인상이 너무 사나워.”
누구 얘기냐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뉴스 화면에 답이 나와 있었으니까. 소르스테인 공작의 비리 의혹에 대해 설명하는 리포터의 모습 뒤로 리욘과 베아테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흐르고 있었다. 2년 전 왕세자 책봉식 때의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며 수잔이 말했다. 제이는 그녀의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뉴스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가 집중한 건 영상 속의 두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그 밑으로 깜박이는 자막의 내용이었다.
소르스테인 공작, 하트뢴 건설업체 비리에 이어 아르넨 은행 퇴출 저지에도 연루된 사실 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