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니는 제이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시그니. 울지 않기로 했잖아.”
수잔이 드물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제 치맛자락을 꽉 쥔 채 아주 서럽게 울어 댔다. 안아 달라고 조르면 안 된다, 매달려도 안 된다, 수잔이 몇 번이나 당부한 모양인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고 멀찍이 문 앞에 서서 엉엉 소리 내어 우는데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선 품에 꼭 안고 울지 말라고 입을 맞춰 주고 싶었지만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으니 그조차 어려웠다.
“이리 와, 시그니.”
제이는 시그니를 불렀다. 머뭇거릴 줄 알았는데 아이는 제이가 불러 주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울면서 달려왔다. 차마 제게 닿지도 못하고 침대에 엎어져서 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이는 울지 마, 하고 달랬다. 그 말에 오히려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 안 아프다고 했잖아. 제이, 안 아플 거라고 했잖, 아….”
제이 거짓말쟁이야. 흐느끼며 말하는 아이에게 제이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 하고 사과했다.
“나도 안 아프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대신 빨리 나을게. 웃으며 말하자 발딱 고개를 들며 “진짜야?” 하고 묻는다. 조그마한 얼굴이 눈물로 엉망이었다. 응, 진짜. 제이는 손으로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좀 있으면 이 붕대도 풀 거야.”
머리에 감긴 붕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딴에는 마음 놓으라고 한 소린데 가만히 바라보던 아이가 다시 흐엉,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서 “제이, 머리 많이 아파?” 하고 묻는데 제이는 당황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고개까지 젓고 말았다.
“아냐. 안 아파.”
“근데 그거, 왜 했어?”
“이건… 처음에 아파서 그랬어. 처음에만 아팠어. 이젠 괜찮아.”
“피, 많이 났어?”
“아니. 안 났어.”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그냥 머리 많이 움직이지 말라고 해 둔 거야.”
“진짜…?”
그래, 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건데 눈물로 흠뻑 젖은 회색 눈동자를 보자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만 해온 거짓말인데도 그랬다. 제이는 괜히 수잔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왜 벌써 왔어요. 붕대 풀면 오기로 했잖아요.”
“오늘 푸는 날 아니었어?”
“그렇긴 하지만 몇 시에 푼다고 정해 놓은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냥 마음 편하게 내일 오지 그랬냐고 하자 수잔이 팔짱을 끼며 “나도 그러고 싶었지.” 한다.
“그런데 계약한 날짜가 딱 오늘부터라.”
“계약한 날짜요?”
그래, 하고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자가 날 고용했거든.”
“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별로 험한 일도 아니라 수락했어. 널 감시하기만 하면 되는 거라.”
“수잔.”
농담이죠? 제이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농담이면 좋겠지만, 아니야.”
수잔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네가 앨런과 접촉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대. 그건 나도 동의하는 바고. 그래서 받아들인 거야. 어차피 너 머리에 붕대만 풀면 시그니랑 같이 여기 와서 지낼 생각이었으니까. 그런 거라면 돈이라도 받으면서 하는 게 낫잖아? 만약의 사태엔 서로 협조도 주고받을 수 있고.”
“수잔.”
“걱정 마. 말이 감시지 사실상 경호에 가까우니까.”
네가 하던 거 있잖아. 24시간 밀착 경호. 수잔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그렇다고 해도 네 행동 하나하나 다 리욘에게 고해바칠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러니 걱정 말고 그냥 편하게 지내. 앨런이랑 연락하거나 걔 신변에 대해 알아볼 생각만 안 하면 되는 거니까.”
…미치겠군.
제이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잔은 그런 제이에겐 개의치 않는 듯 시그니를 향해 “헤이, 아가씨. 여기 집 구경은 했어?” 하더니 곧장 병실 문을 열며 말했다.
“너 이제 여기서 사는 거야. 저기 방 보이지? 저 방이 네 방이야.”
“진짜?”
시그니는 울다 말고 벌떡 고개를 들더니 쪼르르 수잔에게 달려갔다. 들어올 때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방과 응접실을 한번 휙 둘러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수잔을 향해 물었다.
“나 여기서 사는 거야? 제이랑 같이?”
“그래. 퇴원할 때까지 여기서 제이랑 같이 사는 거야.”
“제이, 진짜야?”
돌아보며 묻는 얼굴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것만 같은 얼굴이라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 봤자 수잔과 리욘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이상 달라지는 건 없을 터였다. 제이는 겨우 웃어 보이며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 여기서 살래!”
제이랑 살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그니가 외쳤다. 그러고선 다시 쪼르르 달려와 침대 사이드 바를 붙잡곤 헤헤 웃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말갛게 웃는 아이를 보자 말로 설명하기 힘든 여러 감정들이 가슴을 쳤다.
“그렇게 좋아?”
“응!”
“여기서 살면 불편할 거야.”
아무리 호텔급으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병원은 병원이었다. 어디 할 것 없이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락거렸다. 병실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건물 전체를 감싼 병원 특유의 우울함과 비감에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을지도 몰랐다.
“아니야, 안 불편해! 난 제이랑 살 거야.”
하지만 그런 걸 알 리가 없는 아이는 무조건 저와 함께 이곳에서 살 거라고 말한다. 아마 그런 불편을 알고 있다 해도 같은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나마나한 소릴 왜 해? 나랑 같이 호텔에서 살래, 너랑 같이 길에서 노숙을 할래 물어도 너랑 같이 노숙을 하겠다고 할 앤데.”
하여간에 죽고 못 산다니까. 수잔이 끌끌 혀를 찼다. 아이를 키워 본 적이 없는 수잔이다 보니 이맘때 꼬맹이들은 모두 부모 없이는 못 사는 것처럼 굴어 대는 줄 알았단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시그니와 함께 놀이터에도 가고, 뿌뿌에서 카리나에게 이야기도 듣고 하는 사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긴, 당장 마트에만 가도 갖고 싶은 거 안 사 준다고 울고불고 구르고 떼쓰는 애들이 얼마나 많냐. 난 텔레비전에서 그런 거 볼 때마다 저런 애들이 어디 있냐고 그랬는데 생각보다 엄청 많더라. 그냥 시그니가 순한 아이였어.”
수잔의 말대로 시그니는 유난히 순한 아이였다. 갓난아이일 때부터 그랬다. 어지간해서는 잘 울지도 않았고 어쩌다 한 번씩 울음을 터뜨릴 때에도 제이가 품에 안기만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긋 웃곤 했다. 조금씩 자라면서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자기 기분을 표현하게 되어 이따금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부루퉁한 얼굴로 심통도 부리고 대놓고 삐진 티를 내며 토라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제이가 사과하면 도로 울망울망한 얼굴이 되어 품에 안겨 오는 아이가 시그니였다. 말을 곧잘 하게 되면서부터는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제이 사과하지 마, 하고 몇 번이나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아이가 제게 준 사랑만큼 못 돌려주는 기분이라.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으면 온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더 예쁘게 자랄 수도 있었을 텐데. 평범하지 못한 가족 구성이나 평범하지 못한 능력 등, 제대로 된 걸 하나도 못 안겨 줬다는 사실에 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 갖고 싶어 하는 게 있으면 뭐든 다 사 주고 싶었지만 이 아이는 그런 것조차도 없었다. 장난감이나 인형을 가지고 놀기보다 자신과 나란히 앉아 시간을 보내길 더 좋아했다. 더 많이 안아 주길 원했고 잔뜩 키스해 주길 바랐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고, 네가 원하지 않더라도 해 줄 거라고 늘 품에 안고 입을 맞춰 댔는데 이제는 그조차도 할 수가 없다. 아이가 원할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건 벌써 몇 달이 되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시그니와 함께 아이슬란드로 가 버릴까, 거기서 다른 건 다 팽개쳐 두고 시그니만 보면서 살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아이의 회색 눈동자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또 마음이 흔들리고 만다. 올곧게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 회색 눈동자가, 그 눈동자에 가득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결국 자신은 평생 리욘을 잊기란 무리였다. 시그니가 있는 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니 차라리 확실히 매듭을 짓는 게 낫다고, 해줄 수 있는 만큼만 다 해 주고 가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하게 된다.
“왜애.”
왜 그렇게 쳐다봐아.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끄러운지 시그니가 몸을 이리저리 꼬며 말했다.
“예뻐서.”
제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예쁘다는 말을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한껏 예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 예뻐? 정말?” 몇 번이나 되물었다.
“응.”
“어디가 제일 예뻐?”
눈을 깜박거리며 묻는 걸 보니 저도 이미 답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늘 품에 안고 입을 맞추며 얘기했으니까. 네 눈동자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이렇게 아름다운 눈동자는 본 적이 없다고.
“눈이 제일 예뻐.”
원하던 대답을 들려 주자 아이는 수줍은 듯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쑥스러운지 사이드 바를 붙잡고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제이 눈도 예뻐.” 하고 말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수잔이 나직한 한숨과 함께 팔짱을 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아이슬란드로 돌아갔으면 좋겠지만.”
넌 절대 안 그러겠지? 수잔은 병실 문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가면 전하께 보고하게요?”
부러 농담조로 말하자 수잔이 피식 웃으며 그럴 리가, 한다.
“나야 네가 이 나라를 뜨겠다고만 하면 어디로 간다고 해도 돕겠지만.”
“정말요?”
“그래. 그런데 어차피 넌 안 갈 거잖아.”
수잔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아서,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널 지키려는 거야.”
“고맙지만 안 그래도 돼요, 수잔.”
“미안하지만 이 건에 있어서 네 의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수잔은 단호했다. 제이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전하께서 먼저 수잔에게 연락한 거예요?”
“그럼 내가 연락했겠니? 걔 연락처도 모르는데.”
그건 그렇다.
“몇 시쯤 연락이 왔나요.”
“글쎄. 어제 오후 다섯 시? 아니, 여섯 시쯤이었던가.”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왕세자 비서라는 사람이었단다.
“수잔 맥나이트가 본인 맞냐고 그러기에 맞다고 했지. 그랬더니 전하께서 통화하길 바라신다고, 연결해 드리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한 거고.”
먼저 전화를 건 왕세자 비서라는 사람은 에이나르였을 것이다. 아마 지레 겁먹고 먼저 리욘에게 실토를 했겠지. 제이가 하도 이야기해 달라고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대충 설명을 해 주고 온 참이라고. 리욘이라면 자신이 다음에 어떻게 행동할지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수잔에게 연락을 한 것일 테고. 그는 왕궁에서 수잔을 소개받았을 때부터 그녀가 슈퍼 프로바이더임을 짐작한 눈치였다. 그야, 자신과 함께 살 정도면 오래 알고 지내 온 제노스일 확률이 높으니까. 게다가 동양인 여자였고, 연령대로 추측해 보자면 2세대임이 분명했다.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하려면 그 정도 능력자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그가 옳았다. 게다가 수잔 역시 자신과 앨런이 엮이는 걸 원치 않고 있으니 이 이상 적임자가 없을 터였다.
점점 용의주도해져 가는구나.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도 그런 편이었지만 이번 일 이후로 더욱 치밀하고 과감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네가 걔 뇌관을 건드린 거야.”
수잔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정답이었다.
***
저녁시간을 앞두고 주치의와 간호사가 병실을 찾았다. 머리의 붕대를 풀기 위해서였다.
- 고작 붕대 하나 푸는 데 의사까지 올 필요가 있어?
사람들이 못 듣게 머릿속으로 말을 거는 수잔에게 제이는 같은 방식으로 답을 돌려줬다.
- 가끔 상처에 소독약도 직접 발라 주더라고요.
수잔이 기가 찬다는 듯 지켜보는 가운데 닥터 페르난은 조심스레 제이의 머리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부종은 며칠 전에 다 가라앉았고 찢긴 상처도 이틀 전 마지막으로 붕대를 갈 때 거의 다 아문 걸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닥터 페르난은 몇 번이나 더 꼼꼼하게 상처를 살펴보고 고개도 이리저리 돌려 보게 한 뒤에야 안심한 듯 “좋습니다.” 하고 말했다.
“흡수도 빠르고 재출혈도 없는 거 보니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습니다.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금방 회복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환자 본인보다 더 깊이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걸 보니 모르긴 해도 그간 리욘에게 많이 혼이 난 모양이었다. 대신 사과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모르는 척하기도 미안해 제이는 먼저 악수를 청하며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닙니다. 고생이야 저보다 환자분께서 더 많이 하셨죠.”
말은 그렇게 하지만 표정은 감개가 깊다 못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이러다 퇴원이라도 하는 날에는 12층의 온 의사와 간호사가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긴, 수술실에까지 쳐들어오는 환자 보호자가 어디 흔하겠는가. 심지어 그게 내년 즉위식을 앞둔 왕세자라고 하면 웬만한 의사들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를 칠 것이다.
“그럼 제이, 이제 머리 움직여도 돼?”
의사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시그니가 달려와 물었다.
“응, 움직여도 돼.”
일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그래도 내심 불안한지 몇 번이나 “진짜 안 아파? 움직여도 괜찮아?” 하고 묻는다.
“오전에는 움직이면 조금 아팠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
시그니가 와서 다 나았나 보다. 제이의 말에 시그니가 “진짜?”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제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시그니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낑낑거리며 끌고 오더니 냅다 올라가며 말했다.
“그럼 여기도 빨리 나으라고 호 해 줄게.”
시그니는 붕대가 감긴 제이의 어깨와 가슴에 호오, 호오, 하고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프지 않게 가슴을 살짝살짝 어루만지며 “빨리 나아라.” 하고 주문처럼 읊조리기도 했다. 그런 딸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제이는 웃으며 시그니, 하고 불렀다.
“이리 와.”
다리 사이에 공간을 만들며 말하자 시그니가 머뭇거리며 수잔을 쳐다봤다. 절대로 침대에 올라가면 안 된다, 안아 달라고 조르면 안 된다, 하고 수잔이 신신당부를 한 까닭이었다.
“괜찮아, 이리 와.”
제이는 자신의 다리 사이를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망설이는 시그니에게 수잔이 “조심해서 올라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시그니가 신발을 벗고 살금살금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이는 최대한 제이의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그머니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이는 자그마한 몸을 뒤에서 끌어안고 몇 번이나 뺨에 입을 맞췄다. 시그니는 까르르 웃으며 함께 입을 맞추다가도 이내 제이를 밀어 내며 “하지 마, 제이. 움직이지 마. 아파.” 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안 아파.”
“진짜?”
“응.”
“거짓말. 아프면서.”
그러니까 그거 하고 있지. 깁스 대신으로 온 상체에 단단히 동여매 놓은 붕대를 보며 말한다. 그런 딸의 뺨에 다시 한 번 웃으며 입을 맞추자니 밖에서 똑똑 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수잔의 말에 병실 문을 열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저녁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끌고 들어오던 간호사가 침대 위에 앉아있는 시그니를 보고는 “어머나.” 하며 미소 지었다.
“따님이세요?”
“네.”
“많이 닮았어요.”
간호사는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베드 테이블이 침대 위에 펼쳐졌다. 시그니가 깜짝 놀란 얼굴로 “제이, 식탁이 생겼어!” 하고 외쳤다.
“그래. 식탁이 생겼단다. 여기서 식사를 하는 거야.”
젊은 간호사는 귀엽다는 듯 시그니의 뺨을 살짝 어루만진 뒤 들고 온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어떻게, 식사를 도와주실 분이,”
“아, 내가 할게요. 바쁠 텐데 가 봐요.”
수잔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간호사는 그럼, 하고 병실을 나섰다.
“흠, 이제야 좀 먹을 만한 것들이 나오네.”
에피타이저부터 메인 디쉬에 디저트까지, 테이블 위에 가득 차려진 식사를 보며 수잔이 휘파람을 불었다.
“꽤 됐어요. 이렇게 나온지.”
“하긴, 위장에 탈이 난 것도 아니니까.”
무조건 잘 먹어야지. 수잔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의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메인 디쉬인 양고기 스테이크를 써는 동안 시그니는 디저트로 나온 콜스콜(Koldskål)만 바라보았다. 손가락 반 마디 만한 작은 쿠키와 작게 썬 딸기, 바나나 등이 담겨 있는 커다란 보울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아이는 곧 고개를 돌려 제이를 향해 물었다.
“이건 뭐야?”
“콜스콜이라는 거야.”
“콜스콜?”
“그래. 여기에 이 버터밀크를 부어서 먹으면 돼.”
부어 줄까? 병에 들어있는 차가운 버터밀크를 가리키며 말하자 시그니는 아아니, 하며 고개를 저었다.
“왜? 먹어도 돼.”
“아니야. 제이 거잖아.”
제이가 먹어. 짐짓 의젓하게 말하는 딸을 보며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건 너무 달아.”
웃으며 말하자 시그니가 달아? 하고 눈을 깜박인다.
“응. 엄청 달아. 난 단 거 안 좋아하잖아.”
“우웅.”
“그러니까 네가 먹어. 다 먹어도 돼.”
그 말에 비로소 아이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보울에 담긴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고 가만히 씹더니 휙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맛있어!”
“맛있어?”
“응, 맛있어!”
“많이 먹어.”
버터밀크 부어 줄까?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아니,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쿠키의 바삭한 식감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애 먹는 거 그만 보고 너도 좀 먹어.”
수잔의 타박에 머쓱하게 웃으며 포크를 집어 드는 찰나였다. 벌컥, 노크도 없이 병실 문이 열리고 리욘이 들어왔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리욘은 그런 제이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시그니에게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시그니.”
하루 종일 텔레비전만 보면서 전하 타령을 해 대더니, 막상 그 전하가 눈앞에 나타나자 시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손에 들고 있던 쿠키도 내려놓고는 습관처럼 자신의 품에 파고들려는 아이에게 제이는 당황한 목소리로 “시그니, 잠시만.” 하고 말했다. 응?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시그니는 제이의 가슴에 매어진 붕대를 보고는 그제야 허둥지둥 몸을 떼며 사과했다.
“미안해, 제이.”
많이 아팠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묻는 시그니에게 제이는 겨우 웃어 보이며 아냐, 하고 말했다.
“괜찮아. 안 아팠어.”
“미안해. 미안해, 제이.”
시그니는 울먹이며 말하더니 다시 제이의 가슴에다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댔다. 그런 시그니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욘이 툭 한마디 했다.
“딸 생각해서라도 그만 다쳐야겠군.”
그리고 그는 곧바로 침대 옆에 서 있는 수잔을 향해 말했다.
“뭐 필요한 건 없습니까.”
“음, 글쎄요. 당장 생각나는 건 없네요.”
팔짱을 끼며 말하던 수잔이 아, 하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여기 폐쇄 회로 카메라 있죠?”
“네.”
“좀 떼 줄 수 있나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수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영상만 보이는 거죠? 소리는 안 들리는 거고?”
“맞습니다.”
“따로 소리 녹음 중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감청 장치를 말하는 거라면, 병실 내에 그런 건 없습니다.”
“믿어도 되나요?”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 수잔에게 리욘이 “믿어도 될지 말지는 직접 판단하시죠.” 하고 말했다.
“어차피 지금 다 읽고 계시지 않습니까.”
“죄송해요. 직업병이라.”
수잔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일이 일이니만큼 어쩔 수 없죠.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수잔의 일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게 아닐 텐데요.”
“그건 그렇죠.”
“일에만 집중해 줬으면 합니다만.”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요구는 명백하고 직접적이었다. 한 마디로 내 생각은 읽지 말라는 뜻이었다. 수잔에게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뭐, 그러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와중에 제이에게 리욘의 흉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난 역시 쟤가 싫어.
두 사람은 병원 내 보안 시설과 차후 배치될 경호 병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건에 있어 네 의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던 수잔의 말처럼 제이에게는 아무런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았다. “저기요.”, “제 말 좀 들어 주시죠.”, “이보세요들.”, 두 사람을 향한 제이의 말은 허공에 메아리처럼만 울릴 뿐이었다. 철저히 제이를 배제한 채 두 사람은 제이를 보호할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 리욘을 넋 놓고 바라보던 시그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슬그머니 다시 보울에 손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쿠키 하나를 집어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와삭, 과자 씹는 소리에 리욘이 시그니를 쳐다봤다. 시그니도 리욘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눈이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미소 지은 건 리욘이었다. 그 미소에 시그니도 수줍게 웃으며 혀를 내밀었다.
헤헤 웃으며 쿠키를 집어 먹던 시그니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제이, 하고 작은 소리로 저를 부르는 아이에게 제이는 응? 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거 전하 줘도 돼?”
손에 쥐고 있던 쿠키를 들어 보이며 묻는데 제이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쎄, 그건….”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전하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뭘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예법이 뭔지 알 리가 만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드려도 된다, 고 말을 하려니 리욘이 그걸 어떤 식으로 받아 줄지가 걱정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제이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야 주면 고맙지.”
그 조그마한 속삭임을 용케 또 들은 모양인지 리욘이 웃으며 말했다. 시그니는 제 말소리가 그에게 들렸다는 사실에 무척 부끄러워하면서도 보울 안에서 쿠키만 골라내기 시작했다. 어느 샌가 가까이 다가온 리욘이 아이 앞에 손을 펼쳐 보였다. 시그니는 작은 주먹에 가득 쥐고 있던 쿠키를 조심스레 리욘의 손바닥 위에 떨어뜨렸다.
“이렇게 많이 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쿠키들을 보며 리욘이 웃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들며 그는 “카메융커.” 라고 말했다.
“나도 아주 좋아하는 과자야.”
“카메융커?”
시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 말을 따라했다.
“그래. 계란으로 만든 과자야.”
그러고 보니 시그니는 모르겠구나. 리욘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에시르와 덴마크에서만 먹는 디저트란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못 먹어 봤을 거야. 파는 곳이 없으니까.”
“이거 이름이 카메융커예요?”
리욘의 손바닥 위에 놓인 쿠키를 가리키며 시그니가 물었다. 리욘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그니는 헤헤 웃으며 “맛있어요.” 하고 말했다.
“맞아. 맛있지.”
웃으며 말한 리욘은 손에 쥐고 있던 쿠키를 입에 넣었다. 부러 와삭, 큰 소리가 나도록 씹던 그는 삼킬 때도 꿀꺽 크게 삼켰다. 네가 준 쿠키를 이렇게나 맛있게 먹고 있다고, 시그니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달콤한 걸 좋아하나보구나.”
시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도 좋아해?”
“좋아해요….”
수줍은 듯 말하는 시그니를 보며 리욘이 다시 한 번 깊게 미소 지었다. 나도 네 나이 땐 엄청 좋아했지. 미소 지은 채 그는 말했다.
“다음에 올 때 맛있는 초콜릿을 가지고 올게. 카메융커를 나눠 줬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시그니는 신이 난 얼굴로 제이를 돌아봤다. 제이는 자꾸만 굳어지려는 입매를 억지로 느슨하게 만들어 아이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수잔에게 인사를 빙자한 당부의 말을 전한 뒤 리욘은 병실을 나섰다.
“웬일이니. 너한테 말 한마디 안 붙이고 그냥 나가네.”
별일이라는 듯 중얼거리는 수잔에게 제이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용서 안 한다고 했거든요.”
“흐음, 뭐. 이번엔 네가 심하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는 수잔을 보며 제이는 힘없이 웃었다.
“벌써 편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아까 얘기했잖아. 난 여전히 저 녀석이 싫다고. 수잔은 팔짱을 낀 채 낯을 찌푸렸다.
“저 녀석은 널 힘들게 했단 말이야. 그것도 엄청나게.”
수잔의 말에 시그니가 깜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며 물었다.
“전하가 제이 힘들게 했어?”
그래서 지금 제이 아픈 거야? 눈을 크게 뜨며 묻는 아이에게 제이는 얼른 “아냐, 그런 거 아냐.” 하고 말했다.
“전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진짜?”
“진짜지 그럼. 전하는 오히려 내가 다쳐서 속상해하고 계신걸.”
맞아, 하고 수잔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번엔 그거지. 제이가 전하를 힘들게 한 거지.”
“수잔.”
“왜, 사실인데.”
그야 사실이긴 하지만…. 제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나도 이번만큼은 리욘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 주려는 거야. 물론 네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결과적으론 걔한테 상처를 준 셈이 돼 버렸으니까.”
그녀의 말이 옳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어쨌거나 이번에는 자신이 리욘에게 상처를 입혔다. 중요한 건 늘 그렇듯 결론이었다.
“싸우지 마….”
시그니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싸워. 내가 혼내는 거지.”
“혼내지 마.”
삐죽거리며 말하는 시그니를 향해 수잔이 “또, 또.” 하고 부러 과장된 어조로 서운한 척을 했다.
“또 제이 편만 들지? 야, 너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제가 귀여워서 하는 말인 줄도 모르고 시그니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수잔을 쳐다봤다. 제이 아프잖아. 아이는 울먹이며 수잔에게 말했다.
“안 아플 때 혼내….”
“싫어. 지금 혼낼 거야.”
팔까지 걷어 부치는 수잔을 보며 기어이 시그니가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 마. 제이 혼내지 마.”
아프단 말이야. 서럽게 우는 시그니의 모습에 수잔이 얼씨구,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수잔을 향해 그만하라는 듯 웃어 보인 뒤 뒤에서 시그니를 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혼내는 거 아냐. 수잔이 장난 친 거야. 봐, 지금 웃고 있잖아.”
제이가 말해도 시그니는 우느라 수잔을 쳐다볼 생각도 안했다. 제가 혼났을 때보다 더 서러워하며 우는 아이를 안고 제이는 몇 번이나 뺨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응? 울면 수잔이 속상해해. 뺨에 흥건한 눈물을 닦아 주며 말하자 그제야 시그니는 끅끅 울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울음이 잦아들자마자 훌쩍거리며 말했다.
“싸우지 마. 싸우면 싫어….”
“안 싸운다니까. 장난이었대도.”
“전하랑도, 싸우지 마.”
생각도 못한 말에 제이는 놀라서 어? 하고 되물었다.
“전하랑은 싸운 적이 없는데….”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시그니가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전하가, 제이 힘들게 했잖아.
“제이도 전하 속상하게 했잖아.”
“아….”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듣고 하는 말인 모양이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
제이는 변명조로 말했다.
“힘들게 하고 싶어서 힘들게 한 건 아니야. 나도, 전하도.”
그냥 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하자 아이는 우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서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건 납득한 눈치였다. “그럼 제이랑 전하랑 아직 친한 거야?” 눈물을 닦으며 묻는 걸 보니 그랬다.
“그럴… 그렇겠지, 아마.”
자신 없는 듯 말하는 제이의 옆에서 수잔이 단호한 목소리로 “친해. 엄청.” 했다.
“너무 친해서 문제지.”
혀를 차며 말하는데 제이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수잔의 말대로 그녀가 제이의 경호를 맡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수잔이 생각하는 24시간 밀착 경호란 결국 ‘같은 공간 안에서 24시간 내내 함께 있기만 하면 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블라스트에 있을 때도 굵직한 전투 건에만 투입되곤 하던 그녀였다. 요인 경호 업무 같은 따분한 일에는 관심 없노라고 처음부터 잘라 말했던 만큼, 요인 경호 관련 교육이나 실습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방법이라든가 기본 철칙 같은 걸 알 리도 없었다. 요인 경호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수잔은 뭐 별거 있냐는 듯 말하곤 했다. 그거 그냥 24시간 동안 안 떨어지고 같이 있으면 되는 거잖아, 라고.
덕분에 거창하게 네 경호를 맡았다, 고 해도 그녀의 하는 일은 하우스 메이트로 함께 지낼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이의 상태가 상태다보니 거기에 간병인의 역할이 추가되긴 했지만 그나마도 어지간한 건 간호사들이 다 도와줬기 때문에 수잔은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그니만 돌보면 됐다. 이따금 제이의 입에 강제로 음식들을 집어넣는 것도 그녀의 주요한 일거리 중 하나였다.
첫날에는 그래도 제법 날카롭게 제이의 움직임에 반응하곤 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기만 해도 “왜? 어디 가려고? 뭐하려고?” 하며 침대 옆에 붙어 서서 눈을 부릅뜨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날뿐이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둘째 날을 맞이하는 순간 수잔은 확 풀어져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경계 경호라는 건 보통 상황이 긴박할수록 더 엄격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법이었으니까. 시간 단위로 일이 터지고 습격이 이루어져야 경호하는 입장에서도 더 바짝 정신을 차리게 된다. 반대로 평화로운 나날이 며칠씩 이어지면 경호하는 사람도 풀어질 수밖에 없었다. 심할 경우엔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수잔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굳이 24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어제는 종일 병실에 함께 있더니, 오늘은 종종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관은 없었다. 뭐가 됐건 그녀의 임무는 제이가 앨런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가 이 병실을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잘 감시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수잔의 경계가 느긋해지면 느긋해질수록 제이는 자신의 생각을 더 단단히 통제하기 위해 애썼다. 아닌 척하면서도 수잔이 틈틈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는 아침 일찍부터 병원 내 서점에서 어린이용 동화책 여러 권과 자신이 읽을 만한 소설책을 구입했다. 직접 가기가 힘들어 제일 먼저 병실을 찾은 간호사에게 부탁했더니 다행히 꽤 적당한 것들로 사다 주었다. 제이는 시그니를 침대에 앉혀 놓고 그 책들을 함께 소리 내어 읽었다. 책은 영어로 된 것도 있었고 노르드어로 된 것도 있었다. 이따금 두 버전이 모두 함께 수록된 것도 있어 두 언어를 모두 어설프게 구사하는 시그니에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오후가 되면서부터 시그니는 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오후 두 시부터 시그니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연달아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제이는 시그니와 함께 나란히 침대에 앉아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과 <마법사와 요정, 그리고 영웅들의 이야기>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마법사와 요정, 그리고 영웅들의 이야기>는 켈트 민화를 비롯한 북유럽의 설화와 신화를 아이들 눈높이로 각색해 만든 시리즈였는데 오늘은 엘프 여왕의 아이를 구한 어부의 아내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애니메이션이 끝나자 시그니가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낮잠 잘 시간이었다. 아이가 자는 동안 제이는 간호사가 사다 준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다. 집중하기 쉬운 추리 소설을 부탁했더니 무려 60페이지 만에 피해자가 네 명이나 발생한 무시무시한 책을 사다 주었다. 제이는 100페이지를 조금 넘긴 시점에 범인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 후로 흥미가 반감됐지만 머릿속에 딴생각이 피어오를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꿋꿋하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다.
그렇게 잠시도 쉬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신의 사고를 통제한 덕분일까.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아, 정말 못 먹겠다.”
수잔이 못 참겠다는 듯 포크를 내려놓았다.
“여긴 다 좋은데 밥이 맛이 없어.”
물로 입을 헹구며 수잔이 말했다. 옆에서 시그니가 맞아, 맛없어, 하고 입술을 내밀었다.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는 세 사람분의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지만 식사 시간이 끝나가도록 음식은 거의 줄지 않았다.
“그야 병원이니까.”
제이는 심상하게 말했다. 그래도 왕가 전용 병실이랍시고 산지에서 직접 공수한 귀한 식자재에 유명 호텔의 셰프가 직접 짜 준 레시피를 참고해 만든 식단이라고는 하는데, 그래 봤자 병원 식당에서 환자를 위해 만드는 음식이었다.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만드는 건강식 기반이다 보니 대체로 간이 심심했다. 수십 년을 정크 푸드에 의지해 살아온 수잔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게 당연했다.
“여기 카페테리아는 그나마 먹을 만하던데.”
“가 봤어요?”
“너 의식 없을 때.”
아하.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햄버거도 괜찮았고 토마토 파스타 같은 것도 그럭저럭 먹을 만했어. 아, 미트볼도 맛있었다.”
수잔의 말에 시그니가 “미트볼!” 하며 눈을 반짝였다. 시그니가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였다.
“나 미트볼 먹고 싶어.”
“먹으러 갈까?”
“응응!”
“좋아. 그럼 네 접시에 있는 브로콜리만 다 먹어. 그거 다 먹으면 맛있는 미트볼 먹게 해 줄게.”
수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그니가 접시의 브로콜리들을 포크로 콕콕 찍어 제 입안에 밀어 넣었다. 웬만하면 싫은 표정 한 번이라도 지었을 법한데, 제꺽 입에 집어넣고 숨도 안 쉬고 씹는 걸 보면 지금 먹고 있는 밥이 어지간히도 맛이 없었던 모양이다.
“음, 좋아. 확실히 다 먹었군.”
수잔은 시그니의 입안에 남아 있는 브로콜리가 없는지 확인까지 한 다음에야 아이에게 일어날 것을 명령했다.
“넌 어때, 뭐 사다 줄까?”
수잔이 카디건을 집어 들며 물었다. 제이는 말없이 손을 저었다.
“너도 거의 안 먹었잖아.”
“난 그럴 만하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는데 뭐 그리 배가 고프겠냐고 하자 수잔이 하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바로 누울 거야? 데려다줘?”
“음, 부탁할게요.”
제이는 부러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수잔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 오른 뒤에도 곧바로 베개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피곤하다, 졸린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같은 말을 되뇌었다.
“피곤할 만하지. 하루 종일 시그니랑 같이 놀아 줬잖아.”
푹 쉬어. 수잔이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제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잔이 병실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수잔이 병실을 나서고도 한참 동안 제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천천히 시간을 헤아리다가 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 옆에 놓인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나서다 마침 식기를 수거하러 온 간호사와 딱 마주쳤다.
“외출하시게요?”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네. 잠깐 1층에 좀 다녀오려고요.”
“어, 하지만… 전하께서 혼자 나가시는 일 없도록 하라고….”
“잠깐이면 됩니다. 금방 돌아올게요.”
웃으며 말한 제이는 간호사가 자신을 붙잡기 전에 얼른 복도로 나갔다.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1층에 도착한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중전화를 찾아 휠체어를 움직였다.
다행히 오늘도 공중전화 부스는 텅 비어 있었다. 제이는 어제의 그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전화기에 몸을 반쯤 기대다시피한 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동전을 넣은 다음 빠른 손놀림으로 해리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떨어지고, 익숙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해리 필드입니다.”
“해리, 나예요. 제이.”
제이? 수화기 너머에서 해리가 외쳤다.
“뭐야, 이 번호는. 너 지금 어디서 전화하는 거야.”
“병원 공중전화예요.”
동전 떨어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제이는 들고 온 동전을 모조리 집어넣으며 말했다.
“해리, 바쁘니까 바로 용건부터 말할게요. 앨런 소재지 파악 관련해서 에시르에서 협조 요청 들어왔죠?”
“들어왔지.”
“혹시 그쪽으로 벌써 넘어간 정보 있습니까?”
“이봐, 정보가 있어야 넘겨주지.”
감감무소식이야. 해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 자식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조차 보이질 않아.”
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곧 수화기를 고쳐 잡으며 그는 해리, 하고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상사를 불렀다.
“소식 들어오면 나한테 먼저 알려 줘요.”
“너한테 먼저 알려 달라고?”
글쎄, 하고 곧바로 해리가 난색을 표했다.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어려울 것 없어요. 그냥 나한테 먼저 전화 한 통만 해 주면 돼요.”
“제이. 왕세자가 앨런 목에 얼마를 걸었는지 알고 하는 소리야? 자그마치 5천만 달러야.”
“…….”
제이는 수화기를 쥔 채 신음했다. 돈 많은 나라에, 돈 많은 왕실이니 현상금을 높이 불렀을 거라고 짐작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금액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제이가 알기론 지난해에 카타르 여객기를 폭파한 테러범에게 내걸린 현상금이 4천2백만 달러였다. 단일 사건 현상 금액 중 역대 최고가라고 한동안 뉴스에서 꽤나 시끄럽게 떠들어 댄 덕분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리욘이 그 기록을 가뿐히 갈아치운 것이다.
“그리고 돈이 문제가 아니야. 아, 물론 돈도 문제지만. 아무튼 그 일 때문에 요즘 그쪽에서 계속 연락이 온다고. 심지어 전화 거는 사람이 국방부장관도 아니야. 왕세자가 직접, 그것도 자기 개인 번호로 바로바로 걸어 온다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고 하긴. 계속 소식 들어온 거 없는지 확인하고 있지. 생포가 힘들면 바로 죽여도 상관없으니까 시체만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래. 생포할 경우엔 지금 걸어 둔 현상금의 두 배까지 지급할 생각 있다더라.”
“안 돼요, 해리.”
제이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돈 내가 줄 테니까, 나한테 먼저 연락 줘요.”
“무슨 소리야. 네가 그 돈이 어디 있어?”
네 전 재산 다 털어도 그거 십 분의 일도 안 돼. 기가 찬다는 듯 웃는 해리에게 제이는 “안 되면 몸이라도 팔 테니까.” 하고 말했다.
“해리 계속 나한테 언제 복귀할거냐고 닦달했잖아요. 이참에 종신 계약서 써 줄게요. 나 어떻게 굴려도 상관없으니까, 그걸로 대충 합의 봐요.”
“그건 좀 솔깃하긴 하네.”
근데 그래 봤자야. 해리는 웃으며 말했다.
“너 평생 굴려도 5천만 달러까진 못 뽑아 내. 제이 너 한창 날아다닐 때 몸값이 하루 육천이었어. 지금은 일 쉰 지 7년 됐고. 설마 앞으로도 그 몸값 계속 유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해리. 그러니까 지금 부탁하는 거잖아요. 좀 봐 달라고요.”
우린 같이 일한 정이 있잖아요. 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벌어 준 돈도 생각해야죠.”
“글쎄. 난 과거에 연연하는 남자가 아니라.”
“아뇨, 이 경우엔 의리 따위 개나 준 남자라고 하는 겁니다.”
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거 참.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린 그는 잠시 침묵 끝에 “알았어.” 하고 말했다.
“너한테 먼저 연락하도록 하지.”
대신 시그니 사진 좀 자주 보내 줘, 라고 해리는 새 조건을 걸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보내 줘야 해. 알았지?”
“…알았어요.”
“스무 장이야. 한번 보낼 때마다 최소 스무 장씩 보내야 한다고.”
“알았다니까요.”
“좋아, 어디로 연락할까. 네 휴대폰 지금 먹통이야. 알지?”
“알아요. 내가 전화할게요. 매일은 힘들고, 이틀에 한 번씩은 하도록 할게요. 시간대는 장담 못 해요.”
“알겠어.”
해리는 짧게 대답했다. 그대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찰나 “아 참, 제이.” 하고 해리가 불렀다. 제이는 내려놓으려던 수화기를 도로 귀에 갖다 댔다.
“왕세자가 이상한 걸 묻더라고.”
“이상한 거라니요?”
어떤 거요? 제이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앨런에 관한 건 아니고 시그,”
불쑥, 뒤에서 손 하나가 뻗어왔다. 놀란 제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손이 전화기의 훅 스위치를 쾅! 소리 나게 눌렀다. 순식간에 통화가 종료됐다. 제이는 뒤를 돌아봤다. 리욘이 공중전화 부스에 반쯤 몸을 기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건가?”
여전히 훅 스위치를 누른 채 그렇게 묻는 남자에게 제이는 더듬거리며 “아, 그게….” 하고 말했다.
“가벼운 산책 정도는, 괜찮다고 해서요.”
“그래? 그럼 산책이나 할까.”
제이의 손에 들린 수화기를 빼앗듯 받아 들며 리욘이 말했다. 철컥, 거치대 위에 수화기를 내려놓자 동전 몇 개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필요해?”
웃으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쉰 목소리로 “…아뇨.” 하고 말했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가지.”
리욘이 손을 내밀었다. 제이는 잠시 망설인 끝에 그 손을 붙잡았다. 도움을 받아 천천히 휠체어에 앉았다. 자신이 제대로 휠체어에 앉은 걸 확인한 뒤 손잡이를 붙잡는 리욘에게 제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어차피 전동식이라 그냥 제가 하는 게 낫습니다.”
“이 정도는 하게 해 줘.”
그렇게 말하며 리욘은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아직, 용서 안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느리게 돌아가는 회전문을 통과하며 제이는 말했다.
“용서 안 해도 휠체어 정도는 밀 수 있지.”
리욘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건물을 빠져나오자 쌀쌀한 저녁 공기가 온몸을 덮쳤다. 9월도 중순을 넘어서면서 해가 더욱 빨리 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색이 짙어질수록 바람이 차가워졌다. 리욘은 입고 있던 수트를 벗어 제이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최대한 바람이 들지 않도록 앞을 여며 주며 그는 말했다.
“앨런은 내가 처리할 거야.”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네게 넘겨 줄 수도 있겠지. 몸을 일으키는 리욘에게 제이는 잠시 고민 끝에 말했다.
“제가 당했으니 제가 처리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유라면 기각이다.”
리욘은 단호했다. 어째서냐고 제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네가 당했으니까 더더욱 내가 잡아야 하는 거야.”
“…….”
“너보다 내가 널 더 아끼니까.”
리욘은 다시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너보다 나한테 더 소중한 존재야. 너도, 네 배 속에 있던 아이도. 그러니 원한이라고 하면 내 쪽이 훨씬 더 크겠지.”
제이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리욘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자신보다도 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가 바로 리욘이었다. 죽은 배 속의 아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녀석은 내 형을 죽였어.”
내 개도 죽였고, 친구도 죽였지. 말투는 담담했으나 말하는 내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리욘의 분노는 타당했다. 세상에서 앨런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리욘일 것이다. 그를 대신해 복수의 기회를 가로챌 자격 따위, 자신에게는 없었다.
저녁 시간임에도 병원 앞 산책로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리욘을 알아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그래도 환자와 함께 있어서인지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고 멀리서 손만 흔드는 정도였다. 리욘은 그들을 향해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환자복을 입은 어린아이 하나가 말을 걸고 싶은 모양인지 근처까지 와서 기웃대다가 리욘과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웃으며 제 부모에게로 달려갔다.
“시그니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군.”
엄마의 품에 안기는 아이를 보며 리욘이 말했다.
“아마 미카엘 저하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제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리욘은 어째서인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고.”
휠체어는 산책로 한가운데에 위치한 인공 연못 주위를 천천히, 크게 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대가 드리운 수면이 조용히 흔들렸다. 곳곳에 모여 앉은 연잎들이 말없이 흩어졌다 다시 모였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어지간한 거짓말쟁이야.”
휠체어 미는 속도를 조절하며 리욘이 말했다.
“내 경우엔 그게 일이기도 하니까. 적당히 듣기 좋은 말로 사람들을 달래고 위로해 줘야지. 속으론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도.”
하지만 그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야. 리욘은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 같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면 사실 난 굉장히 솔직한 편이야. 적어도 내 욕망에 대해서는 그런 셈이지. 내가 원하는 것, 갖고 싶은 것에 대해선 양보가 없으니까.”
리욘의 말대로였다. 그는 본인의 욕망과 그 욕망의 실현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의 거짓말은 그 수많은 수단과 방법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리고─
“너는 어떻지?”
예상대로, 질문이 자신을 향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날 속이고 네 자신까지 속이려 드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론 넌 말하지 않겠지만. 기대도 않는다는 듯 리욘이 웃었다. 그 허탈한 웃음소리가 가슴을 쳤다. 보이지 않아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훤했다. 뭐라도, 무슨 대답이라도 돌려줘야 했다.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어서는 안 된다.
“저는….”
한참만에야 제이는 입을 열었다.
“저는,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는 게 보고 싶습니다.”
늘, 가장 원한 건 그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내가 왕위에 오르길 바라는 이유는?”
“애초에 그 자리는 전하의 것이었으니까요.”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는 건 싫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원래 내 것이었으니 빼앗기면 안 된다, 라.”
리욘은 곱씹듯 그 말을 중얼거렸다. 휠체어를 미는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어느새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산책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병실로 돌아간 건지 산책로가 아까와는 다르게 한적했다.
“네가 만약 원래 내 것이었다면.”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며 리욘이 말했다.
“그럼 누군가가 내게서 널 빼앗으려고 들 때마다 네가 말했을까.”
“…….”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말라고. 빼앗기는 건 싫다고.”
그럴 리가 없겠지.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소리에 가슴이 욱죄는 것만 같았다.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의 개수만 헤아렸다. 가로등의 개수가 하나씩 늘어날수록 병원 건물과의 거리는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내일부턴 병실 앞에 경호원들이 배치될 거야.”
건물 뒤쪽으로 휠체어를 밀며 리욘이 말했다.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들어갈 생각인 듯했다. 그쪽이 전용 엘리베이터와 더 가깝긴 했다.
“전하, 어차피 이 몸으론 어디 가지도 못합니다.”
“미안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물론 제이 너부터도 그렇겠지만. 웃음 띤 리욘의 목소리에 제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솔직해진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지.”
그 말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따뜻하고 건조한 공기가 단숨에 온몸을 감쌌다.
“게다가 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휠체어는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전용 승강기 앞에 멈춰선 리욘은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그가 제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제이.”
네 딸을 위해서라도. 리욘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리욘은 휠체어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밖에 서서 그대로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 남자에게 제이는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전하께서는, 하고 말했다.
“이대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럼? 이라는 표정이었다.
“제 병실에, 아니 그러니까, 수잔에게 볼일이 있어서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제이의 말에 리욘이 곧바로 아니, 하고 답했다.
“오늘은 내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볼일… 병원에 말입니까?”
“그래.”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아니면 혹, 국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물어보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다시 문을 열기도 뭣한 상황이라 제이는 어쩔 수 없이 12층 버튼을 눌러야만 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야 재킷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제이는 혀를 차며 다시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제이는 결국 1층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12층에 도착하자마자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잔에게 붙들린 탓이었다.
“아니, 정말이에요, 수잔. 옷만 돌려주고 올 거라고요.”
“글쎄, 아직도 거기 있겠냐고. 일찌감치 돌아갔다니까.”
그리고, 네가 자기 옷 입고 있다는 걸 걔가 모를까 봐? 휠체어를 병실 안으로 밀어 넣으며 수잔이 말했다.
“다 알고 있다니까. 알고도 그냥 너 걸치고 가라고 보낸 거라고.”
수잔의 말이 옳았다. 리욘은 아마 본인이 옷을 돌려받지 못했단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야 두 눈으로 뻔히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아무 말 않고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낸 건, 눈치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떨고 있다는 걸. 추위에 약하다는 사실을 아마 그는 진즉에 눈치챈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건물을 나서자마자 수트를 벗어 준거겠지. 산책로의 절반도 채 다 못 간 상태에서 휠체어를 돌려 버린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추위를 타는 주제에, 옷도 얇은 환자복 한 장만 걸친 주제에, 산책 나가자는 본인의 말에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따라나선 이유도 알아차렸을까. 춥다는 말 한마디를 못 하고, 추우니 이제 돌아가자는 말 한마디를 못 하고 가만히 그 시간을 버틴 이유도 알아차렸을까.
“알았으면 좋겠어?”
휠체어에서 일어나는 걸 도와주며 수잔이 물었다. 제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남자는 휠체어를 끌고 나오는 제이를 보며 몸을 숙여 물었다. 옷깃의 배지가 위협적으로 반짝였다. 에시르의 국화이자 불멸을 상징하는 아타나시아 꽃은 영관 장교급 이상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의 상징이었다.
“제이?”
남자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새겨질 찰나 뒤늦게 병실 문을 열고 나오며 수잔이 외쳤다.
“아, 8층으로 갈 거예요. 오늘 검사하는 날이라.”
“8층, 말입니까.”
남자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그의 부하가 재빨리 너스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간호사에게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맞다니까, 참.”
수잔이 혀를 찼다.
“압니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합니다.”
남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사실을 확인하러 갔던 부하가 간호사와 함께 돌아왔다. 간호사는 스무 명 남짓의 경호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겁먹은 얼굴로 카르테를 넘기며 말했다.
“네, 맞아요. 오늘 오전 열한 시에 CT 촬영 후에 전자기파 치료 받을 예정입니다.”
“그럼 8층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그렇죠. 8층 방사선과로 가셔야죠.”
간호사의 말에 남자가 부하들을 향해 눈짓했다. 복도에 서 있던 경호원들 중 정확히 절반이 제이의 휠체어 주위로 따라붙었다. 경호원들의 감시에 가까운 호위 속에서 제이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침대도 들어갈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만들어진 엘리베이터인데도 2미터의 거구 열한 명이 들어서자 꽉 찬 느낌이 들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벌써 지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제이에게 수잔이 말했다.
- 자업자득이다.
제이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리욘의 말대로 어제부터 병실 앞에는 경호원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제3 특별 경호 중대의 대원들이 올 거라 예상했던 제이는 아침 일찍 병실을 찾은 한 무리의 대원들을 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브 링헤임입니다. 왕실 특별 경호 부대의 총괄 장교이며 제1 특별 경호 중대의 지휘관을 맡고 있습니다.”
무리를 이끌고 온 남자가 말했다. 그의 옷깃에는 은색 아타나시아 꽃이 두 송이 피어 있었다. 그의 직급이 중령이라는 뜻이었다.
제1 특별 경호 중대는 국왕의 경호를 맡고 있는 경호부대였다. 5개 소대 150명의 인원으로 이루어진 이 경호 중대는 국왕이 뇌사 상태에 빠진 후에도 변함없이 그가 입원해 있는 9층 무균실 앞과 이 병원 건물을 24시간 3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리욘이 그중 절반을 12층으로 올려 보낸 것이다.
내심 다루기 쉬운 푸벤 상사나 페르들란 하사가 오길 바랐던 제이로서는 당황을 넘어 황망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이들은 부사관 출신들로 이루어진 타 경호 중대와는 달리 전원이 장교 출신이었다. 그러다보니 제3 특별 경호 중대 대원들과 나이는 비슷하고 직급은 그보다 한참 높았다. 영관급도 몇 명이나 있어 가짜 신분이든 뭐든 일단 대위 직급을 달고 있는 제이로서는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총지휘관인 유브는 제이가 부임 첫날 직접 발령 보고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리욘이 국왕의 병실에서 의회 회의 내용에 대해 보고하는 동안 제이는 병원 로비를 지키고 서 있는 유브를 만나 발령 보고를 했다.
“이거 하나만 명심하도록 하게. 자네가 목숨을 바쳐 지켜 내야 할 유일한 가치는 바로 전하일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신임 대위의 어깨를 두드리며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던 그 남자는 이제 본인의 목숨을 바쳐 그 대위를 지켜내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위에서 기라고 하면 길 수밖에 없는 게 군인이라지만 이건 제이의 입장에서도 여간 민망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물며 얼마 전까지 새파란 부하였던 자를 깍듯한 경어까지 써 가며 모셔야 하는 유브의 속은 말이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네 자업자득이라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수잔이 말했다. 제이는 대꾸도 없이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대답할 여력도 없었다. 원래 검사를 마치고 오면 피로가 몰려오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했다.
“그런데 리욘도 정말 모르겠다. 국왕의 경호부대라니. 나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거 이래도 되는 거야?”
이래도 될 리가 있나. 아무리 뇌사 상태라고 해도, 회생 가능성 따위 없다 해도 국왕은 국왕이었다. 그런데 그 국왕의 경호 인원 중 무려 절반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나마 왕세자 본인의 안위를 위한 결정이었다면 다들 이해라도 했을 거다. 지금 제3 특별 경호 중대의 절반이 왕비궁에 가 있으니까. 인원 충원이 필요한 시점이니 국왕의 경호원들을 그쪽으로 편입시켰다면 딱히 반대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하지만 지금 왕세자는 본인이 아니라 본인의 경호대원을 위해 국왕의 경호부대를 움직인 것이다. 그 경호대원이 사실은 신분을 위장한 제노스였고 왕세자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고 해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난 여론만 거세질 게 분명했다. 고작 정부를 보호하기 위해 국왕의 경호부대를 움직이는 거냐고 지탄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욘은 의원들의 지탄 따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자신을 지탄해 봐야 그 이상 어찌할 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관식 날짜가 확정되고 왕비와 그 일파가 몰락한 지금은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이제 헌법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 이상, 도의와 예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왕은 좀 그렇게 무뢰한처럼 굴 줄 알아야 하거든. 질질 끌려가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낫지.”
수잔은 아무래도 점점 더 리욘이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놀랍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성향이 매우 비슷했으니까. 이럴 경우 서로가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은 둘 중 하나다. 막연한 호감, 혹은 동족 혐오. 수잔은 후자로 시작해 서서히 전자로 기우는 중이었다.
“아니라니까? 말했잖아. 난 여전히 걔가 싫다고.”
의자에 걸쳐 둔 코트를 집어 들며 수잔이 역정을 냈다.
“그냥 끌려가는 것보단 끌고 가는 게 낫다는 것뿐이야.”
“그렇군요….”
“진짜라고!”
네, 네. 적당히 대답한 제이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을 돌렸다.
“지금 바로 출발하는 건가요?”
“그래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수잔은 오늘 시그니와 함께 빌라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급하게 오느라 미처 못 챙겨 온 옷가지들과 필요한 물건들을 마저 챙겨 오기 위해서였다.
“9월이라고 방심했는데, 안 되겠어. 다음 주면 이 코트도 못 입게 될 거야. 아휴, 벌써 이런데 한겨울에는 도대체 어떻단 거야.”
수잔이 투덜거리며 코트의 허리끈을 묶는 사이 병실 문이 열리고 시그니가 들어왔다. 미리 챙겨 준 대로 두툼하게 옷을 껴입은 시그니는 수잔을 향해 “이렇게 입으면 되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래. 그렇게 입으면 되는 거야.”
“지금 가는 거지?”
수잔이 고개를 끄덕이자 시그니가 쪼르르 침대로 달려왔다.
“갔다 올게, 제이.”
“그래. 조심해서 다녀와.”
“응.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쪽, 쪽. 제이의 양쪽 뺨에 키스를 한 뒤에야 시그니는 다시 수잔에게 달려갔다. 수잔은 옷에 달린 모자를 시그니의 머리에 씌워 주며 제이를 향해 당부했다.
“쟤네 국왕의 경호대원들이야. 지금 네 상태로 쟤네 상대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누워 있어.”
“그러니까… 저 사람들이 없어도 어디 못 간다고요.”
“못 가기는. 1층으로는 잘만 내려가면서.”
“…….”
“알지? 너 때문에 이 병원 사람들 이제 공중전화도 못 쓰게 된 거.”
제이는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굳이 항변하려면 할 수도 있었다. 리욘이 멋대로 공중전화 회선을 끊어 버린 걸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거냐고, 반박하려면 충분히 반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건 리욘이 회선을 끊어 버린 이유가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었다. 그걸 다 알면서도 시치미를 뗄 만큼 뻔뻔한 성격이 못됐다.
“그러니까 얌전히 있어. 어차피 지금 네 몸으론 앨런이 어디 있는지 알아도 걔 만나러 가지도 못 해.”
한번만 더 멋대로 나가 봐. 그땐 리욘이 뭐라고 하건 침대에 그냥 묶어 버릴 거야. 엄포를 내린 뒤 수잔은 시그니와 함께 병실을 나섰다.
제이는 5분 정도가 경과한 뒤 침대에서 내려왔다. 병실 문을 열고 나가자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이는 뭔가 말하려는 간호사를 향해 쉿, 하고 검지를 입에 대는 시늉을 해 보인 뒤 복도로 이어진 문을 향해 다가갔다. 문을 열지 않고 문 너머로 느껴지는 기척만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의 수를 가늠해 보았다. 여전히 스무 명 남짓의 인원이 병실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문에 몸을 기댔다. 이대로라면 이 병실을 벗어난다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사실은 벗어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으면 됐다. 해리에게 전화해서 이틀 사이에 새로 들어온 소식이 없는지만 물어보면 되는 거였다. 이틀 전 통화 말미에 그가 하려다 끊긴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중요한 용건이었다면 아마 자신의 전화를 받자마자 해리가 얘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통화가 다 끝날 즈음에 뒤늦게야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는 건 크게 심각한 사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밖에… 용건이 있으신 건가요?”
간호사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뇨, 아닙니다.”
제이는 그제야 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병실로 돌아가려는 그를 간호사가 얼른 달려와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정중하게 거절한 뒤 혼자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제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간호사에게 물었다.
“죄송하지만 혹 휴대 전화,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저희는 근무 중에 개인 휴대 전화는 사용할 수 없어서요.”
“그렇군요.”
예상했던 대답인데도 한숨이 나왔다. 제이는 병실로 돌아갔다.
침대에 눕고 얼마 안 돼 바깥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노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리고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끌며 간호사가 들어왔다. 경호원 두 명도 함께 들어왔다.
경호원들은 병실 문을 양쪽에서 지키고 서 있었다.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면 아까처럼 복도만 지키고 있는 걸로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병실까지 따라 들어온 걸 보면 간호사와 이야기 자체를 못 나누게 할 심산인 듯했다. 응접실의 간호사에게 휴대 전화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어본 게 그새 유브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식욕이라곤 없는데 경호원이 둘씩이나 들어와 지켜보고 있으니 음식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었다. 평생 누군가를 지켜보기만 하다 처음으로 지켜봐지는 입장이 되고 보니 이만저만 어색한 게 아니었다. 다들 용케 이런 시선 속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잤구나 하고 생각하자 그간 자신의 경호를 받아 온 모든 요인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스프만 조금 마시고 테이블을 치워 줄 것을 부탁했다.
“조금 더 드셔야 하지 않을까요.”
간호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식욕이 없어서요.”
“그럼, 메뉴를 다른 걸로 바꿔 올까요?”
평소 같았으면 군말 없이 치웠을 텐데 계속 “뭔가, 드시고 싶은 게 있으세요? 스튜 종류라면 드실 수 있으실까요?” 하고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뭔가 지침 같은 게 내려진 모양이었다. 물어 봤자 대답해 주지도 않을 거라 조용히 머릿속만 들여다봤다. 다행히 지침까지는 아니고, 이틀 전에 리욘이 주치의에게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식사는 잘 하고 있는 건가?”라고 한 마디 한 걸 가지고 자기들끼리 놀라서 식단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는 눈치였다. 죄 없는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스트레스 받는 게 미안해서 스튜의 고기와 감자 몇 조각을 더 입에 넣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속에서 받아 주질 않아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속이 안 좋아서.”
“오, 저런. 무리하지 마세요. 그럴 필요 없어요.”
혹 이러다 탈이라도 날까 간호사가 부랴부랴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음식이 그대로 담긴 식기를 치우는 동안에도 경호원들은 묵묵히 병실 문 앞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화제 가져다 드릴까요?”
테이블을 접으며 간호사가 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벨 누르세요.”
“그러죠.”
제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웃는 얼굴에 조금 안심한 듯 간호사도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호사와 경호원들이 병실을 떠나자 그제야 답답했던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제이는 욕실로 가 입을 헹군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아무래도 오늘 중으로 해리에게 연락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내일이나 모레쯤 수잔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봐야지. 그녀가 잠든 사이에 어떻게든 휴대폰을 손에 넣어야 한다. 수잔은 휴대폰에 잠금을 걸어놓지 않으니 일단 기계만 사수하면 그 후는 어려울 것도 없다.
문제는 수잔의 휴대폰을 어떻게 손에 넣느냐 하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원체 예민한 사람이라 조금만 낌새를 채도 금방 일어날 게 분명했다. 게다가 종일 머릿속의 계획을 들키지 않고 버티는 것도 일이었다. 이젠 책으로 눈속임해 봤자 속지도 않을 터였다.
“미치겠군….”
그야말로 미치겠군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는 찰나 누군가가 병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
십니까─라는 말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삼켜지고 말았다.
“제이.”
오스카였다.
“제이, 이게 무슨 일인가.”
오스카는 잔뜩 안타까운 얼굴을 하고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경호원은 없었다. 급하게 달려 들어오느라 문도 제대로 못 닫은 오스카는 곧장 제이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제이가 침대 사이드 바에 부착된 리모컨을 더듬자 오스카는 “아닐세, 아닐세.” 하며 두 손을 저었다.
“그냥 누워 있게. 일어나지 말게.”
“아뇨. 저도 누워 있는 것보단 앉아 있는 게 편해서요.”
“그래? 하긴, 어깨를 다쳤으니 누워 있어도 힘든 건 매한가지겠지.”
오스카가 안타깝다는 듯 쯧쯧 혀를 찼다. 그는 제이가 매트리스의 각도를 조절하는 사이 코트를 벗고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아직 리모컨을 쥐고 있는 제이의 손을 붙잡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래도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말했다.
“머리를 다쳤다고 해서 걱정 많이 했다네. 큰 부상은 아니라고 해도 그쪽은 워낙에 후유증이 무서워서 말이야.”
“뭐… 괜찮습니다. 재출혈도 없었고.”
제이는 붙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며 말했다. 오스카는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하고 말했다.
“그만하길 천만다행이지. 참, 어깨는? 어깨는 어떤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습니다.”
“부러졌다고 들었는데, 나쁘지가 않다고?”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 오스카에게 제이는 “네, 이정도면.” 하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골절도 종류가 있어서요. 분쇄 골절이라고, 말 그대로 뼈가 조각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만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뼈는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붙게 돼 있으니까요. 다행히 이번엔 뼈도 깨끗하게 부러졌고 수술도 잘된 편이라서요.”
아마 11월 초면 뼈는 다 붙을 겁니다. 제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회복 속도도 빠른 편이라 곧장 재활 훈련 시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봄쯤에는 복귀 가능하겠죠.”
“무리하지 말게나. 당분간은 무조건 쉬도록 해. 지금 자네는 어깨만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다시 슬그머니 손을 붙잡으며 오스카가 말했다. 그냥 말해도 될 걸 굳이 또 손을 붙잡는 걸 보니 대충 무슨 말을 하려는지가 눈에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산도 아이를 낳은 것만큼이나 몸에 큰 무리를 준다고 들었네. 하물며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으니 어디 몸이 성한 구석이나 있겠나. 당분간은 아무 생각 말고 무조건 쉬도록 하게. 전하께서도 그걸 원하실 걸세. 다른 것보다 자네 안위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분이시니 말일세.”
애통한 얼굴로 그렇게 말을 하는데 제이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슬그머니 손을 빼내며 “네, 뭐….” 하고 대충 얼버무리려는 찰나였다.
“그래서 말인데 제이, 이번 기회에 전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지 않겠나. 내 생각에는 지금이 가장 적기인 것 같은데 말일세.”
느닷없는 오스카의 말에 제이는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뭘… 말입니까?”
제이는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라니 도대체 뭘….
“시그니 말일세.”
“…….”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런 제이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오스카는 몇 번이고 그의 메마른 손등을 쓸며 말했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 아니겠나. 이제 그만 솔직하게 말씀드리게. 전하를 위해서도, 시그니를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게 나아.”
아마 전하께선 시그니가 당신 핏줄이란 걸 아시면 많이 기뻐하실 걸세. 오스카는 흐뭇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물론 놀라기야 하시겠지. 왜 여태까지 속인 거냐고 화도 내시겠지만,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전하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걸세. 암, 그렇고말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오스카를 보자 어쩐지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제이였다.
“그러니까 제이. 이미 이렇게 된 거,”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오스카가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할 수 있는 한 시치미를 뗄 생각인 듯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럴 작정으로 출생 신고를 일 년 늦추라고 한 거였습니까.”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베아테가 아니라 전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제이.”
“그래야 왕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 테니까요. 왕비가 죽고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나면 그때 전하의 핏줄임을 내세워 데려가겠다고 할 생각이었겠죠. 지금처럼.”
“제이, 오해일세.”
오스카는 진정하라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난 어디까지나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자네에게 조언했던 것뿐이야.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자네도 동의하지 않았나. 그러니 내 말대로 출생 신고를 일 년 늦게 했겠지.”
오스카는 한껏 부인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솔직하게 털어놓을 법도 한데 끝까지 시치미를 떼는 게 수상했다. 게다가 목소리는 큰데 비해 어투가 지나치게 차분한 것도 부자연스러웠다.
설마.
제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녹음 중인 건가.
오스카라면 능히 해 내고도 남을 짓이었다. 다짜고짜 리욘을 찾아가 시그니가 당신 딸이라고 해 봤자 미친 소리 취급당할 게 분명하니, 이 대화를 그대로 녹음해 리욘에게 증거랍시고 들이밀 생각인 것이다.
“…….”
헛웃음이 나왔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런 얕은 수를 쓰는 건지.
“제이, 오해하지 말아 주게. 나는 정말로….”
제이는 오스카의 말을 무시하고 이불을 걷어냈다. 사이드 바를 붙잡고 침대에서 내려갈 준비를 하자 오스카가 벌떡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왜, 왜 그러나. 자네.” 하고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그렇게 움직이면… 이보게, 제이. 제이!”
진정하게. 오스카가 뒷걸음질로 도망치며 말했다. 제이는 그런 오스카를 말없이 따라가기만 했다.
“제이, 진정하래도!”
연신 뒷걸음질 치며 외치던 오스카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몸을 돌려 병실 구석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두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벽에 걸려 있던 시계가 날아와 그의 정강이를 강타한 것이다. 오스카가 제 다리를 끌어안고선 병실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제이는 그런 오스카의 몸 위에 올라탄 뒤, 그의 왼쪽 팔을 붙잡아 뒤로 꺾어 돌렸다.
“아아아악!”
오스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제이는 아랑곳 않고 그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잡아 뜯듯 벗겨 냈다.
“자, 자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녹음기 어디 있습니까.”
“녹음기라니 무슨…!”
“가지고 온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어디 있습니까. 재차 물으려던 제이는 머릿속에서 들려온 오스카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 순진하기는. 겨우 녹음기라니. 그런 걸 증거 취급이나 해 줄 분이신가, 어디. 그 정도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것을.
겨우 녹음기, 라니. 그럼 설마….
“노인이야. 그쯤 해 둬.”
생각이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
제이는 차마 뒤로 돌아보지도 못했다. 돌아볼 수가 없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인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는 게 고작이었다.
“그리고 너도.”
어느 순간 바로 옆으로 다가온 리욘이 제이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직 환자야. 환자답게 굴어.”
환자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건지 모르겠지만. 혀를 차며 말한 그는 제이의 몸을 일으켜 그대로 자신의 품에 안았다.
“저 혼자… 갈 수 있습니다.”
혼자 가겠습니다. 제이는 겨우 그렇게 말하며 리욘을 밀어냈다. 그러나 리욘은 그런 제이의 말을 무시하며 더욱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결국 제이는 리욘에게 반쯤 붙들리다시피 한 채 침대로 향했다.
제이가 리욘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앉을 무렵, 오스카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절뚝거리며 리욘을 향해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런 추태를,”
“이거 때문이었습니까.”
오스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말했다.
“네…?”
“꼭 같이 병원에 가야만 한다고 호들갑을 피우신 이유가 이거였느냔 말입니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리욘을 보며 오스카가 당황한 듯 “전하, 그게 무슨….” 하고 중얼거렸다. 더듬거리는 오스카를 향해 피식 웃어 보인 리욘이 자신의 수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손을 뺐을 땐 반으로 접힌 종이봉투 한 장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것을 오스카를 향해 던지며 리욘이 말했다.
“선물입니다. 기념으로 벽에라도 붙여 두시죠.”
“이게… 이게 뭡니까?”
발끝에 떨어진 봉투를 주워 들며 오스카가 물었다.
“유전자 감식 결과표입니다.”
“네…?”
오스카가 뒤집어진 목소리로 외쳤다.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 알고 있었구나….
“아, 알고 계셨던 겁니까?”
봉투 안에서 검사지를 꺼내며 오스카가 잔뜩 흥분해서 외쳤다.
“도대체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그걸,”
“그건 나가서 보시고.”
자리 좀 비켜 주시죠. 리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 아아,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 나누십시오. 오스카는 검사지를 품에 안은 채 후다닥 병실을 나섰다.
콰당, 문이 닫히고 잠시의 적막이 병실 안에 감돌았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리욘이었다.
“서로 궁금한 게 많을 듯한데.”
누가 먼저 물어 볼까.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리욘이 말했다.
“물어 보기 귀찮다면 읽어도 상관없고.”
리욘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벗겨 냈다. 벗겨낸 시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남자를 향해, 제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다시 몸을 일으켰다. 느린 걸음으로 침대를 돌아 창가로 다가가며 그는 말했다.
“나이를 속였다는 건 꽤 전에 알았지.”
촤악─소리와 함께 커튼이 젖혀졌다. 병실 안으로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어. 나이를 속였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아이 아빠에게 아이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겠지. 강간이라고 했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곧 잊었지. 정확히는 잊으려고 했다, 는 표현이 맞는 거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네 딸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리욘은 창문을 열며 말했다.
“네 딸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애 아빠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까. 안 그래도 머리 복잡한데 굳이 싫은 것까지 떠올려 가며 고통 받을 필요 없잖아? 매저키스트도 아니고.”
참으로 리욘다운 이유였다. 그래. 싫은데 굳이 계속 생각해 가며 괴로워할 필요는 없겠지.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어쩌면 그 덕분인지도 몰랐다. 저 눈치 빠른 사람이 이렇게나 오랫동안 아이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건.
“그런데 왜 굳이 또 생각하신 겁니까.”
이유를 묻자 리욘은 짧게 답했다.
“봐 버렸거든.”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봐 버렸다니. 도대체 뭘?
묻기도 전에 리욘이 먼저 말했다.
“과자든, 딸기든, 뭔가를 손으로 집어 먹고 나면 반드시 냅킨에 손을 닦는 버릇이 있더군.”
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라면 별거 아닌 버릇일 수도 있지만.”
내가 어릴 때 그 버릇 때문에 강박증 검사까지 받았거든. 어느샌가 제자리로 돌아온 리욘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 나잇대 애들은 손가락에 뭐가 묻으면 빨기 바쁘지, 그렇게 열심히 닦지는 않거든. 닦아 봤자 옷에다 문지르는 정도지. 그래서 내 어머니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다더군.”
리욘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께선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왜 그리 깔끔을 떨어 대느냐고 몇 번인가 한숨도 쉬셨고.”
“…….”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제이 네가 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교육을 시킬 리는 없을 테니까.”
제이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교육이야 시키려면 얼마든지 시킬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렇게 말을 해봤자 리욘이 믿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네 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봤지. 눈동자색이 똑같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외에도 전체적인 이목구비 같은 게 어릴 때의 나와 제법 많이 닮은 것 같단 생각이 들더군. 너는 아이 아빠가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지만, 글쎄.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
리욘이 시그니에 대해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는 지극히 간단했다. 아이가 생길 만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리욘이 기억하는 한은 그랬다. 그건 아이가 다섯 살이 아니라 여섯 살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여섯 살이라는 건, 결국 아이가 생긴 시기는 7년 전이라는 얘기가 되니까. 7년 전이라면 당연히 비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겠으나 그래 봤자, 였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적어도 리욘에게는 그랬다.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네가 했던 말이 생각나더군. 상대방 역시 심신 상실 상태에서 자각 없이 저지른 일이었다던 그 말이.”
난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했거든.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애 아빠를 감싸기 위해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
리욘의 말대로였다. 제이는 자신이 그 말을 했을 때 가소롭다는 듯이 웃던 리욘의 표정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경멸조로 말하기까지 했었다. 핑계 한 번 좋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기억이 없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리욘은 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 싫었던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서 그는 곧장 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나처럼 앨런의 소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통화 마지막 즈음에 시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병원에 왔다고 하자 해리는 기다렸다는 듯 시그니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정말 사랑스럽지 않느냐,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사랑했다, 그렇게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도 한 번을 멋대로 구는 일이 없었다, 아마 제이의 영향이 큰 것 같다, 그래 봬도 상담도 주기적으로 받고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쓰는 눈치더라. 해리가 떠들어 대는 내용을 적당히 받아 주며 듣고 있던 리욘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심신 상실 상태에서 벌어진 강간이라면, 아이 아빠는 아직도 시그니의 존재에 대해 모르는 겁니까? 해리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제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뭐, 상관없지 않습니까? 제이가 혼자서 잘만 키우고 있는데요.
“…….”
리욘과 해리의 대화 내용을 훑던 제이는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해리가 말하려던 게 바로 이거였구나.
물론 그때 리욘의 방해 없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들었다고 해도 딱히 뾰족한 수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때쯤 리욘은 이미 친자 감식 검사를 마친 뒤였을 테니까. 그래, 분명히 ‘내 볼일이 있어서 병원에 온 것’이라고 했다. 볼일이란 건 아마도 친자 감식에 필요한 DNA를 제출하는 거였겠지. 시그니의 DNA는 그보다 더 먼저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 침대며 베개에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 한 올만 있으면 얼마든 검사가 가능하니까.
“그럼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인가.”
리욘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며 말했다. 곧바로 질문이 쏟아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리욘이 고개를 든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사실 네 거짓말에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하나씩 따져 보니 거짓말을 한 건 하나도 없더군. 여전히 팔짱을 낀 상태로 리욘은 차분하게 말했다.
“심신 상실 상태의 강간이었다는 것도, 아이슬란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지금 잘 살고 있다는 것도. 모두 다 사실이었으니까.”
원래 알던 사이였다는 것도 그렇고.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닮았다는 것도…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거기까지 말한 리욘은 다시 침묵했다. 뭔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아이라서 지우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겠군.”
“…….”
“날 많이 닮은 아이이길 바랐다는 것도.”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해 봐, 제이.”
사실인가?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로 남자는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니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라고 해야만 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되돌릴 수 있다. 시그니가 친자인 건 친자인 거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고 못 박을 유일한 기회였다. 그러니까 말하면 되는 거다. 그 말을 믿었느냐고, 이렇게 순진하신 분인 줄은 미처 몰랐다고 웃으며 말하면 된다.
그런데.
솔직하게 굴면 용서해 주겠다던 리욘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네가 해 내면 나도 그리 하겠다고,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웃던 그의 얼굴이 잊히지가 않았다. 어쩌면 이건 그가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제이.”
아니, 아니다. 마지막은 아닐 거다. 리욘이라면 언제고 또 자신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말로는 용서 못 하겠다고 하면서도 몰래 이 병실에 자신을 입원시켰던 것처럼, 아무리 마지막인 듯 굴어도 결국엔 다시 한 번 더 자신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리욘은 그런 사람이니까.
“제이, 대답해 봐.”
그러니까, 그래서 더더욱 진실을 말해야 한다. 이제는 자신도 그의 마음에 답해야 한다.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용기 내어 말해야 한다.
“사실인가?”
재차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회색 눈동자 안에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얼굴이 가득 들어 차 있었다. 리욘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제이는 입을 열었다.
“…네.”
사실입니다. 제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목이 메었다. 회색 눈동자에 비친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군.”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마른 손등을 꽉 움켜쥐며 그는 말했다. 고마워.
“솔직하게 말해 줘서.”
“용서… 해 주시는 겁니까.”
손을 붙잡힌 채 제이는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묻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웃었다. 아픈 미소였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전에 리욘이 먼저 말했다.
“이제 내가 용서를 빌 차례니까.”
“…….”
“미안해, 제이.”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리욘이 사과했다.
“진심이야.”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만 같아서는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전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평소처럼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것도 결국 거짓말이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사소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만 붙잡힌 손을 오랫동안 빼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붙잡고 있는 이 손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그것이 이 순간의 유일한 진심이자,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