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자신의 손가락을 꼭 잡고 있었다. 무척이나 따뜻한 손이었다. 아마 시그니겠지. 아주 잠깐 의식이 든 순간 제이는 생각했다. 아이는 체온이 높으니까. 그리고 의외로 쥐는 힘이 제법 셌다. 옹알이도 못하던 갓난쟁이 무렵부터 그랬다. 다섯 손가락을 있는 힘껏 쫙 펴 봐도 어른 손바닥의 반의반도 되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꽉 쥘 때면 제이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필사적인 느낌이어서. 갓난쟁이조차도 아는구나 싶었다. 제가 이 세상에서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그렇게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잠드는 날이면 항상 꾸는 꿈이 있었다.
“파비(Pabbi)라고 부르면 돼.”
올레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파비. 제이는 소리 없이 그 말을 뇌까렸다. 아이슬란드 어로 아빠, 라는 뜻이었다. 스스로를 아빠라고 부르라 한 그 남자는 제이의 첫 공식 임무의 파트너였다. 두 사람은 부자로 위장해 시위대와 함께 움직일 예정이었다.
시위대는 시청 광장에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시청 광장의 잔디밭에 앉아 나머지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날은 아이슬란드의 여름이 시작되는 날(Sumardagur fyrsti)이었다. 여름의 시작이라고 해도 오전은 내내 영하권이었다. 새파란 잔디 위로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오후가 되자 기온이 3도까지 올랐다. 햇빛에 녹기 시작한 눈 때문에 광장의 잔디밭은 금세 질척해졌다. 올레그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얇은 잡지 두 권을 제이에게 건넸다. 겹쳐 앉으렴. 한 권으로는 안 될 거야.
두 사람은 잡지를 깔고 앉아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동안 올레그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빈말로라도 과묵하다고는 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연구소가 폐쇄된 직후 러시아로 향했다고 했다. 그곳에서 마샤라는 이름의 여자를 만났다. 마트 계산원인 마샤는 올레그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았다.
“착한 여자야. 남자 운은 별로였지만.”
마샤에게는 아빠가 다른 두 아들이 있었다. 작은 아들은 선천적으로 다리가 약했다. 마샤는 성실히 일했지만 그녀가 벌어 오는 돈만으로는 세 식구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도 버거웠다. 병원에서는 밀린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더는 아들을 치료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만 믿어, 마샤. 올레그는 제법 믿음직스러운 말을 남긴 뒤 집을 나섰다. 블라스트의 용병 모집 공고가 실린 신문 한 장을 들고, 그는 무작정 텍사스로 향했다. 다행히 해리는 반갑게 올레그를 맞아주었다. 올레그는 정신 감응 능력은 없었지만 염동력이 B급에 준했다. 간단한 훈련을 마친 후 그는 아프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반년간 주둔하며 러시아로 3만 달러의 돈을 보냈다. 하지만 두어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자 보수는 덜해도 좀 더 안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컷 돈 벌어 봤자 죽어 버리면 말짱 꽝이잖아.”
그의 말이 옳았다. 실컷 돈을 벌어 봤자, 죽어 버리면 말짱 허사였다.
“열여섯 살이라고 했지?”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레그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막심이 열여섯 살이야.” 막심은 그의 큰아들이었다.
“이렇게 어린데도 벌써 실전에 투입되다니 굉장한걸. 하긴, A급이니까 당연한 건가.”
나, A급이랑 조를 짠 건 처음이거든. 올레그는 조금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늘 일이 있을 때마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나갔는데, 오늘은 어쩐지 그런 생각도 안 들어. 제이 네가 있어서 그런가 봐.”
그는 어쩐지 신이 나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은 평소 그가 맡았던 일에 비해 안전하기도 했거니와, 한 번도 본 적 없는 A급 제노스가 그와 조를 짜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이 어린 제노스의 명령에 따라 적당히 엄호만 하면 되었다. 일은 두 시간 정도면 끝날 예정이었고, 약속된 보수는 평소와 비슷했다.
올레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사이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어느덧 광장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부자처럼 손을 잡고선 인파 사이로 섞였다.
“춥니?”
문득 올레그가 물었다.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떨고 있길래.”
그는 설마 제이가 긴장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야 A급 제노스니까.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용병이니까. 긴장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손이 차가워.”
제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아 주며 올레그는 말했다.
“막심도 항상 손이 차가운데.”
그 말은 아들의 손도 이렇게 자주 잡아줬다는 뜻일까. 제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의 아들이 처음으로 부러워졌다. 올레그의 손이 무척 따뜻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추운 나라니까, 그의 아들은 이렇게 손이 따뜻한 남자가 새아빠가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네 아버지가 맞니?”
하얀 천을 걷어 낸 의사가 올레그의 얼굴을 확인시켜 주었을 때, 제이는 말없이 그의 손부터 잡아 보았다. 그 따스한 온기가 꿈이었던 것처럼 올레그의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차가운 감촉에 소스라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보면, 항상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잠에서 깨어나지지가 않았다. 아아, 그렇구나. 제이는 올레그의 차가운 손을 붙잡은 채 생각했다. 이건 내게 내려진 벌이구나. 지켜야 할 사람을 지켜 내지 못한 벌이야.
그렇다면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이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남자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 손에 조심스레 입김을 불어 넣으며 작은 소리로 올레그, 하고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하는 마샤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만들어서 미안해. 너의 아들들이… 그 아이들이, 다시는 아빠의 따뜻한 손을 붙잡을 수 없게 만들어서, 그래서….
“정말 미안해.”
제이는 남자의 손을 붙잡은 채 말했다. 용서해 달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런 걸 비는 것조차 죄라고 생각했다.
제이는 올레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두 손을 곱게 포개어 그의 가슴 위에 내려놓은 뒤 천천히 돌아섰다.
영안실을 빠져나오자 복도는 온통 아비규환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울부짖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빈 병실로 향했다. 이제 자신은 이곳에서 침대에 앉아 신원 보증인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왜 우는 거야?”
언제나처럼 한 아이가 다가와 물었다. 반짝이는 금발이 너무도 아름다운, 마치 인형처럼 생긴 사내아이였다. 아이를 보는 순간, 제이는 자신이 어째서 이 꿈을 꾸게 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어째서 늘 깨던 순간에 깨지 못하고 이곳 병실에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아파?”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울어?”
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울지 마.”
그 상냥한 목소리에 제이는 더욱 눈물이 났다.
아이는, 자신을 닮아 있었다. 리욘보다도 자신과 더 닮은 아이였다. 머리색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신기할 정도로 자신과 닮아 있었다.
“왜 울어….”
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까맣게 부풀어 있었다. 아이에게 손을 붙잡힌 채 제이는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사과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제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악문 잇새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울 자격 따위 없다는 걸 알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투둑, 툭. 바지 위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아니야.”
너 때문이 아니야.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울지 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아이가 말했다. 제이는 참지 못하고 아이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자그마한 몸은 너무나 여리고 꿈결처럼 보드라워서, 제이는 더욱 눈물이 났다.
“울지 마. 네 잘못이 아니야.”
응? 울지 마. 제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아이가 말했다. 흐느끼며,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안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 제이를 달래듯 아이는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그만 울라는 뜻이었다.
“…….”
꽉, 손을 붙잡아 오는 힘에 제이는 눈을 떴다. 눈을 떴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희부연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시그니는 아니었다. 까만 머리가 아니었으니까. 겨우 그 정도의 구분만이 가능한 정도였다. 덩치가 큰지 작은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직 꿈속인지도 몰랐다. 그러면 좋겠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이가, 꿈속의 그 아이라면 좋겠다고. 그럼 한 번 더 안아 줄 수 있을 텐데. 품에 안고,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사죄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어째서인지 좀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앞에 아이가 있는데도, 자신을 보고 있는데도 안아 줄 수가 없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과를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고, 한 번 더 말해 줘야 하는데.
문득 따뜻한 온기가 뺨을 감쌌다. 상대방의 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물기가 묻어난 까닭이었다. 그럼 역시 이건 꿈이겠구나.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제이는 생각했다. 이상할 건 없었다. 꿈속에선 종종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인 걸까. 제이는 애가 탔다. 한번만 더 안아 보고 싶은데. 딱 한 번만 더, 안아 주고 싶은데.
어느 샌가 다시 눈이 감겼다. 눈동자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아이는 말없이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손길이었다.
***
“어땠니, 연옥에서의 5일은?”
그게 의식을 되찾은 제이에게 건넨 수잔의 첫마디였다.
“연옥인가요?”
지옥이 아니라? 제이는 웃으며 물었다.
“지옥은 여기가 지옥이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도대체 어딜 어떻게 다친 건지 말을 할 때마다 온몸이 다 아팠다.
“어때? 어디 불편한 곳 있어?”
안 불편한 곳을 묻는 게 더 빠를 듯했지만 일단은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부터 말했다.
“눈앞이 좀 뿌연데요.”
“머리를 부딪치면서 망막 쪽에도 출혈이 생겨서 그래. 며칠 있으면 그대로 다시 흡수돼서 괜찮아질 거라더라.”
역시 그런 거였나. 제이는 한숨을 쉬며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예상은 했지만 예상보다 더 심하게 부딪친 모양이었다.
“나, 수술했나요?”
“아직.”
아직, 이라는 건 조만간 하기는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머리는 괜찮아. 외상에 비해 내상은 가벼운 수준이라. 뇌출혈이 있긴 했지만 출혈량도 그렇게 많지가 않고 그나마도 흡수가 빠른 편이라 부종도 곧 가라앉을 거라고 하더라. 재출혈만 없으면 굳이 수술까진 안 해도 될 거래. 대신 박살난 뼈에 나사 박는 수술을 해야겠지.”
“그렇군요….”
하긴. 그렇게 세게 부딪쳤는데 한 군데도 부러진 곳이 없다면 그거야말로 기적이겠지. 묘하게 숨쉬기가 거북한 걸 보면 아마 갈비뼈나 쇄골 쪽이려나. 예상되는 치료 기간을 가늠하던 제이는 이어진 수잔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신음하고 말았다.
“견갑골 골절이야. 당분간 상반신은 못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돼.”
여기가 지옥이라던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앞으로 두 달 정도는 꼼짝없이 병원 신세를 져야할 판이었다.
“전에 부러진 데가 쇄골이었던가?”
“…마지막으로 부러진 데가 쇄골이었죠.”
그래 봤자 그것도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그나마도 수술까진 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몇 달간 물리 치료만 받고 말았다. 그 후에 재활 겸,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휴가를 받아 아이슬란드로 떠났던 것이다.
“뭐,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젊으니까 회복은 빠를 거야. 네 유일한 장점이 그거잖니.”
걱정 말라는 듯 수잔은 말했다. 이정도 부상에도 이렇게 다행이란 투로 말하는 걸 보니 지난 닷새간 엄청나게 마음을 졸인 모양이었다. 조금 격하게 말해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뱃속의 아이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제이도 굳이 물어 보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굳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 건 니나였다. 주치의보다 먼저 제이의 병실을 찾아온 그녀는 주치의인 닥터 페르난과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뇌출혈은 후유증이 무서운 거라 좀 더 두고 봐야겠지만 이대로라면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것도 같아요. 골절은 제이 컨디션만 괜찮다면 금요일에 바로 수술 들어갈 거예요.”
그리고, 하며 그녀는 시선을 조금 내린 채 말했다.
“소파 수술은 안 해도 될 거예요. 태반이랑 다 워낙 깨끗하게 흘러나와서요. 초음파 상으로 확인했을 때도 그랬구요.”
“그렇군요.”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상황에 그게 맞는 말인가 고민하고 있자니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니나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알고 계세요.”
어디까지, 라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니나가 이렇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걸 보면 뻔했다. 배란 유도제를 복용했다는 사실까지 다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죄송해요.”
착잡한 음성으로 니나가 말했다.
“닥터가 미안해 할 일이 아닌데요.”
제이는 쓰게 웃었다. 아마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이 일로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까 걱정만 될 뿐이었다. 다행히도 니나는 그런 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보고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추궁은 있었지만 그것뿐이었어요. 어쨌거나 앞으로도 대위님이 왕궁에 있는 한은 제가 진료를 봐야 하니까요. 다만 이제 진료실에 감시원이 붙겠죠.”
“글쎄요. 앞으로 닥터가 날 진료할 일이 있을까 싶은데요.”
제이의 말에 니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무슨 뜻이죠?” 했다.
“말 그대롭니다.”
난 이제 경호원 노릇은 못하니까요. 제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뼈가 다 붙는 데에만 두 달은 걸릴 겁니다. 석 달이면 일상생활은 가능하겠지만 경호 활동은 무리죠. 재활까지 마친 뒤 복귀 가능 판정을 받으려면 못해도 내년 봄은 돼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대관식이 치러진 이후일 테고.
“그러고 보니 계약 기간이 대관식 때까지라고 했던가요.”
고개를 끄덕인 니나는 곧 가운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대위님.”
그녀는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그건 다 구실일 뿐이란 거 대위님도 아시잖아요.”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구실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리욘에게는 그깟 구실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자신에게는 그 구실이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그 구실 하나에 기대어 지난 두 달을 달려왔으니까. 리욘을 위해서, 리욘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무슨 짓이든 했다. 그런데 이제 그 구실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구실은 구실일 뿐이에요. 전하께서 애초에 그런 이유로 대위님을 부른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그럼 더더욱 내가 왕궁으로 돌아갈 일은 없겠군요.”
“대위님.”
“그리고 이제 전하께서도 알았을 겁니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리욘도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아니, 인간이라고는 생각을 할까.
“…….”
문득 가슴 한가운데가 아파왔다. 제이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힘들어요, 제이? 니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긴,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 붙잡고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했네요. 쉬어요. 닥터 페르난에겐 내가 말해둘게요.”
니나는 제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발소리에 섞여 문이 열리는 소리,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 제이?”
일어나 봐. 수잔의 목소리에 제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식사해야지.”
침대 사이드 바에 부착된 리모컨을 집어 들며 수잔이 말했다. 버튼을 누르자 소리도 없이 침대가 움직였다. 비스듬히 상체가 일으켜 세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등이 아파왔다. 물론 어깨와 가슴도 다 아팠다.
“나 생각 없어요, 수잔.”
제이는 겨우 그렇게 말했다.
“알아. 하지만 먹어야 돼.”
수잔은 완고했다. 베드 테이블을 펼친 그녀는 간호사가 직접 가져다 준 식사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 5일 동안 물 한 모금도 안 마셨어. 이대로 평생 침대 위에만 누워 있을 생각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눈 뜨고 있을 때 뭐라도 먹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해.”
수잔의 말이 옳았다. 하루라도 빨리 제대로 움직이고 싶으면 눈 뜨고 있는 동안 뭐라도 계속 먹어야 했다.
“자, 얼른.”
아직도 김이 피어 오르고 있는 포타주를 스푼 가득 뜨며 수잔이 말했다. 제이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바싹 마른 입안으로 따뜻한 음식물이 들어오자 혀가 아렸다. 감자와 단호박으로 만든 포타주였다. 향은 좋았지만 맛은 느낄 수가 없었다. 약 때문인지 입안이 써서 뭘 먹어도 그저 쓰기만 할 뿐이었다.
“미안한데, 수잔. 못 먹겠어요.”
결국 제이는 네 스푼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왜, 토할 것 같아?”
“더 먹으면요.”
“그럼 안 되지.”
수잔은 혀를 차며 수프가 담긴 식기를 내려놓았다. 리모컨을 누르자 금세 간호사 하나가 달려왔다. 그녀가 식기를 치우고 정리하는 동안 수잔은 제이가 입을 헹구는 걸 도와주었다.
“수잔, 이제 그만 집에 가요.”
간호사가 병실을 나서자마자 제이는 말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오지 말아요. 난 간병인을 부르면 되니까.”
아니, 사실 간병인도 필요 없었다. 이동할 때에는 간호사의 도움을 받으면 됐고 그 외 식사를 포함한 잡다한 일들은 혼자 염동력으로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상황실에서 cctv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좀 놀라긴 하겠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병원 관계자들은 자신이 제노스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임신이 가능할 정도면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대충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와서 굳이 쉬쉬하며 감출 필요도 없었다.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일 있으면 전화할 테니까, 그 전까진 그냥 오지 말고 시그니와 함께 집에 있어요. 언제까지 카리나에게 맡길 수는 없잖아요.”
“나야 그래도 상관없지만.”
넌 정말 괜찮아? 수잔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참을 수 있겠어? 안 봐도 돼?”
“어쩔 수 없죠.”
제이는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말 그대로 어쩔 수가 없었다. 시그니에게 이런 꼴을 보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놀라는 건 둘째 치고 자기가 그런 꿈을 꿔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했다.
“그래. 나도 그거 때문에 너 다쳤다고 안 하고 그냥 일 때문에 텍사스에 가 있다고만 했는데, 그래 봤자 며칠뿐이야. 넌 못해도 최소 한 달은 병원에 있어야 할 텐데 그 정도로 길게는 못 끌어. 애 말라 죽는다고.”
“그건 나도 그래요.”
제이는 힘없이 웃었다.
“머리 붕대만 풀면, 그때 데리고 와줘요.”
가슴 붕대야 옷만 입으면 어떻게든 가려지지만 머리는 그럴 수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붓기도 덜 가라앉은 상태라 시그니는 보자마자 울면서 도망을 가 버릴지도 몰랐다.
“그나마 다른 외상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필 그런 꿈을 꿔서는. 수잔은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그대로 잠시 바닥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우연이겠지?”
“아마도요.”
“4세대에게서 예지력 같은 게 발견됐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 봤으니까, 그렇지?”
그 전에 4세대는 아예 능력치에 대한 연구 자체가 진행된 게 없었다. IART 폐쇄 이후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에 대한 연구는 잠정 중단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나마 블라스트에서 자사 소속의 용병들을 위해 꾸준히 약을 만들어 내며 각종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긴 했지만 그것도 3세대까지의 이야기였다. 4세대는 아직 나이도 차지 않았을 뿐더러, 워낙에 수가 적다 보니 연구를 진행한다 해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 이야기를 수잔에게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녀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끔찍한 능력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니까. 시그니만큼은 평범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수잔이었다. 애초에 그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덧없는 소망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잔이 돌아가고 제이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외롭다는 생각보다 낯설다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온전히 혼자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보다 이 침묵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따금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소릴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곗바늘이 움직일 때마다 제이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로 침잠해 버릴 것 같았다. 퇴적된 시간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다.
창밖으로는 어느새 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9월이 되면서 거짓말처럼 해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저녁 8시면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 9시가 지나면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제 매일 조금씩 더 짧아지겠지. 11월이 되면 오후 네 시만 돼도 어두워질 것이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오후 두 시에 해가 진다. 극야(極夜)가 시작되는 것이다.
백야가 강제로 며칠씩 현실에 붙들려 있는 느낌이라면, 극야는 반대로 종일 꿈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나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깨어 있기 위해 커피를 물처럼 마신다. 거리의 악사들은 흥겨운 곡을 연주하고 네온사인 불빛은 더욱 화려해진다. 극한의 밤을 견뎌내기 위해, 다들 필사적이 된다.
제이는 그런 북구의 겨울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여름에 비하면 훨씬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졸리면 언제든 자면 되는 거니까. 종일 몸이 나른하고 자면 잘수록 더 잠이 오는 게 조금 지겹긴 했지만 그래도 며칠씩이나 잠 못 드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동면하는 산짐승이 됐다고 생각하면 나름 마음 편하게 겨울을 즐길 수 있었다. 깨어 있는 동안엔 뭐든 먹어 두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잠이 들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올해의 겨울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 왠지 막연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주 길고, 혹독한 겨울이 될 것만 같았다.
또다시 가슴 한가운데가 아팠다. 고통에도 뜨거운 고통이 있고 차가운 고통이 있다면 이건 명백히 차가운 고통이었다. 한겨울에 휘몰아치는 북풍마냥 차가운 바람이 텅 빈 가슴을 아프게 훑고 있었다. 한기에 몸이 떨렸다. 이불을 끌어 올리고 싶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을 쓰지 않고 이불을 끌어 올릴 수도 있었지만,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도 전에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혼곤한 의식 속에서도 느껴지는 통증에 제이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자신의 몸 곳곳을 도끼로 찍어 대는 느낌이었다. 다른 곳도 다 아팠지만 등이 너무 아팠다. 제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침대 사이드 바를 더듬었다. 리모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왜, 아픈가?”
불쑥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말했다. 제이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리욘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침대 옆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파서 그래?”
재차 리욘이 물었다.
“네, 등이 좀….”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욘이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너스 콜을 누르자 잠시 후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손에는 진통제가 들려 있었다. 이쯤 약효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미리 챙겨 온 눈치였다.
“아시죠? 모르핀 성분이 들어 있어서 많이 맞으면 안 좋다는 거.”
참을 수 있으면 참는 게 좋다는 간호사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리욘이 물었다.
“지금 진통제를 많이 맞고 있는 편인가?”
“아,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이 정도면 굉장히 잘 참고 계신 편이긴 한데… 그래도 웬만하면 안 맞는 게 좋아서요.”
간호사가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리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야가 흐려 잘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너무도 뻔했다. 제이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서자 공기는 더한층 무거워졌다. 리욘은 여전히 침대 옆에 서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이도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겨우 그렇게 묻는 게 고작이었다. 리욘은 대답하지 않았다. 제이도 굳이 다시 묻지는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남자는 꽤 오랫동안 이곳에 서서 잠든 자신을 바라봤을 것이다.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막연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좀 덜 아픈가?”
한참만에야 리욘은 그렇게 말했다.
“주사는 약효가 빨리 드니까요.”
“그래. 다행이군.”
그 말을 끝으로 리욘은 돌아섰다. 쉬라는 말도, 다시 오겠다는 말도 없이 병실을 나서려는 그를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붙잡았다.
“전하.”
문의 손잡이를 붙잡은 채 리욘이 돌아봤다. 막상 불러놓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제이는 리욘에게 공을 넘기기로 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그래서 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이번에도 리욘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침대에 앉아 있는 제이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할 말이 뭐가 있을까.”
한참만에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리욘은 정말 알 수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 전에 지금 너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떤 건지도 모르겠어. 담담한 목소리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제이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미운 건지, 안쓰러운 건지. 그게 아니면 원망스러운 건지. 그것도 아니면 안타까운 건지, 그냥 죽이고 싶은 건지.”
그걸 알고 싶어서 잠든 네 얼굴을 몇 시간 동안이나 바라보았노라고,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도 역시 모르겠어. 그러니까.”
리욘은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벗었다. 그것을 제이의 침대 위에 툭, 소리 나게 던지며 그는 말했다.
“네가 읽어. 제이.”
그리고 말해 봐, 내게. 리욘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내가 지금 어떤 상태지?”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야.”
알고 있다. 그런 말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걸. 잠든 자신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서 있었던 이유가 그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란 건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았다.
리욘의 시선이 오랫동안 아프게 꽂혀 왔다.
“그럼 하나만 묻지.”
한참 만에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아이를 지울 생각이었나?”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제이는 다시금 가슴이 저려 왔다.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 그는 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지금 의미가 있습니까.”
“대답해.”
정말로, 처음부터 아이를 지울 생각이었나? 낮은 목소리에 섞여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발 아니라고 해.
리욘이었다.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아닙니다. 아이를 지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설령 거짓이라 해도 그렇게 말해 주길 리욘은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만은 해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 리욘은 더욱 슬퍼할 게 분명했다. 당장은 위안을 얻더라도 앞으로 평생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괴로워할 게 분명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분노하는 쪽이 나았다. 분노하고, 원망하고, 잊는 게 나았다.
“네. 지울 생각이었습니다.”
어차피 모든 슬픔과 죄책감은 자신이 다 짊어지기로 했으니까.
“내가 아이를 원한다는 걸 알면서도?”
“네.”
“어째서?”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가진 아이가 아니었으니까요.”
제이는 리욘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전하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가진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전하를 지키기 위해서 가졌던 아이죠.”
“그렇군.”
리욘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처럼 웃음을 흘렸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이나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너는 절대로 내 마음 같은 건 생각 안 하지?”
가슴이, 더는 아플 수도 없을 만큼 무너져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절대로 내 마음은 생각 안 하지.”
제이는 처음으로 흐려진 자신의 눈에 감사했다. 지금 리욘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봐 버리면 못 견딜 것 같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 게 분명했다. 다시는 그런 짓 저지르지 않을 테니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매달릴지도 몰랐다. 그만큼 슬픈 목소리였다.
“그런 거라면, 제이. 어차피 내 마음 따위 생각 안 할 거라면, 네 마음이라도 생각해.”
그렇게 슬픈 목소리로 리욘은 제이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너는 왜 항상 너만 생각하느냐고, 네 마음대로만 행동하느냐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남자는 오히려 정반대의 말을 했다.
“어차피 내 마음 따위 무시하기로 한 거라면, 그냥 네가 좋을 대로 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란 말이야. 솔직하게 행동하라고.”
처음부터 지울 생각이었다고? 리욘은 조금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울지 말았어야지.”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리욘이 웃었다. 흐릿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괴로운 미소였다. 안 그래?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애초에 지울 생각으로 가진 아이였으면 울지도 말았어야지.”
“제가… 말입니까?”
아뇨, 하고 제이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운 적,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저는,”
“아니면.”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소리를 높였다.
“꿈속이 아니면 울지도 못하는 겁쟁이든가.”
“…….”
“어느 쪽이지?”
리욘의 물음에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느 쪽이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들켜 버렸는데. 리욘이, 다 봐 버렸는데.
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주 어렴풋이나마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그 손 때문이었다. 자신의 손을 잡아 주고, 눈물을 닦아 주던 손길이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만약 꿈이 아닌 현실이라면 이 손의 주인공은 한 사람일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상냥한 손길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아는 한은 한 명밖에 없으니까, 차라리 꿈이길 바랐던 거다.
“그렇게 울 거면서,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그래. 그 사람이라면 분명 이렇게 물어 올 테니까. 울 거면서, 그렇게 울 거면서 왜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말해 봐, 제이. 도대체 누굴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그래서 차라리 꿈이길 바랐던 건데.
“저는….”
한참만에야 제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뒷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전하를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마음만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도 리욘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오로지 리욘만을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리욘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날 위해서라면 넌 절대 그런 선택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고, 그는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노라 말한다면, 이번에도 리욘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널 위한 선택이었다면 울지 말았어야지.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자신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이런 선택을 했다고 말해야 할까.
결국 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용서해 달라고 했지?”
침묵을 깨고 리욘이 말했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러도 딱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그 언젠가의 약속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그게 이 순간을 위한 약속이었다는 것도 이제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면 솔직해져 봐.”
그래서 더 치밀어 오를 수밖에 없는 분노를 억누르며, 그는 웃었다.
“네게 가장 어려운 게 그거니까, 어디 한 번 해봐.”
그걸 해 낸다면 나도 널 용서하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리욘은 말했다.
“지금 내게도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리욘은 병실을 나섰다. 이번에는 제이도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틈조차 없었다.
다시금 혼자 남겨진 병실에 금세 적막한 밤이 찾아들었다. 초침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침묵 속에 매몰되기 싫어서, 이 적요한 밤 속으로 침잠하는 게 두려워서 제이는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다. 맹세코 눈물을 참기 위해 그런 건 아니었다. 혼자인 밤을 버티기 위해서였다. 그 뿐이었다.
***
찻잔을 들던 에이나르는 멈칫했다.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온 까닭이었다. 그는 당연히 바깥에서 들려온 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이 집 안에서 그런 비명소리를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물론 내려면 얼마든지 낼 수야 있겠지만, 그럴 사람들이 아니었다. 앨런도, 제이도. 발데마르 공작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예 비명소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노 공작은 그저 눈앞에 있는 왕세자의 비서를 구슬리는 데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바로 쾅! 하고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을 때에는 두 사람 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거실 쪽이었다. 쾅, 쾅! 연달아 큰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우당탕 뭔가가 무너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서재의 문을 박차고 나간 건 에이나르였다. 문을 열어젖히며 그는 제이를 불렀다. 제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평소였더라면 에이나르도 그다지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피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확, 피비린내가 풍겼다고 에이나르는 회상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거실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 피투성이 거실 한가운데에 앨런이 서 있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를 보고 있었다.
“잠시만요.”
제이는 에이나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요?”
“네.”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뭐가 잘못됐나요?”
불안한 얼굴로 묻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잠시 생각 끝에 아뇨,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요?”
“어, 그래서… 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이에게 달려갔죠. 어떻게 된 거냐고 앨런에게 물었는데 앨런이 아무 말이 없는 거예요. 이 사람도 너무 놀라서 넋이 나갔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그때만 해도 전 앨런이 제노스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그래서 우선 구급차부터 불렀고요.”
그런데 구급차를 부르고 나니 앨런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더라는 이야기다.
“발데마르 공도 놀라서 앨런을 붙잡을 생각도 못했던 것 같았어요. 그분, 거실에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었거든요.”
그 길로 저택을 빠져나간 앨런은 그대로 종적을 감췄다. 에시르 전역을 포함하여 주변 국가들에까지 수배령을 내린 상태지만 사건 발생 후 2주가 되도록 유효한 제보는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에이나르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그때 앨런의 상태가 당장 병원에 안 가고는 못 버틸 상태였거든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할 듯싶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왕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이는 리우지엔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왕비궁에 구금 중입니다. 사건 당일로 제2 특별 경호 중대는 잠정 해체 명령을 내린 상태고요. 현재 제3 특별 경호 중대와 제4 특별 경호 중대가 합동으로 왕비궁의 경계 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사건 이후 아직까지 앨런과 접촉한 흔적은 없고요.”
멀리 보내지 않고 그대로 궁에 가둬둔 건 아마도 앨런을 불러들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순순히 응하던가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아마 녹취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신과 앨런의 관계를 입증할 만한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믿고 있는 눈치예요.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죠. 만에 하나라도 리우지엔이 증거를 요구하면서 버텼다면 곤란할 뻔했거든요. 제이와 앨런의 대화 내용 중에 두 사람 사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앨런이 제노스라는 증거만 있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잠깐, 에이나르.”
제이는 다시 한 번 에이나르의 말을 잘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와 앨런의 대화 내용이라니요?”
에이나르가 압, 하고 입을 다물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떨어뜨리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와 앨런의 대화가 녹음된 게 있었나요?”
“아, 그… 저, 그게….”
“괜찮으니 말해 봐요.”
어서. 제이는 시그니를 어를 때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에이나르는 결국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제이, 발데마르 공작의 저택에 가던 날 출입증 새로 발급 받았죠?”
제이는 설마, 라는 표정으로 에이나르를 바라봤다.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도청 장치가 붙어 있었어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거냐고 물을 것도 없었다. 출입증을 새로 발급받을 수밖에 없게끔 만든 사람─리욘이었다.
“전하께서는 그 전부터 짐작하고 계셨던 모양이에요. 만약 왕궁에 또 다른 제노스가 존재한다면 앨런일 수밖에 없다고요.”
출입증에 도청기가 붙어 있었단 사실보다 이쪽이 더 놀라웠다.
“무슨 근거로요?”
제이의 물음에 에이나르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나… 말입니까?”
제이는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전하께선 제이가 앨런이랑 같이 있는 모습을 몇 번 보셨잖아요.”
그런데 사실 둘이 같이 있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에이나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이 성격상 동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과 친밀하게 지낼 리는 없다고 생각하신 거죠. 물론 앨런도 그렇고요. 그리고 또 친밀한 관계라고 하기에는 앨런과 같이 있을 때마다 제이 표정이 좀 미묘한 느낌이었다고… 항상 긴장해 있거나 어딘가 불안해하는 느낌이었다고, 전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표정….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제이는 곧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그게 리욘의 눈에는 다 보였던 거구나.
확실히, 앨런과 함께 있을 때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늘 불안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해도 앨런과 함께 있는 모습을 리욘에게 보인 건 겨우 두세 번 정도밖에 없었다. 그 두세 번의 만남으로 거기까지 다 간파했다는 건, 눈썰미도 눈썰미지만 직관력이 보통이 아니란 얘기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이 성격상 왕비가 제노스가 아닌 걸 알았으면 진짜 제노스를 찾기 위해 한참 열심히 뛰어다녔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 달 가까이 그런 기미가 안 보였던 게 제일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그렇다는 건, 제이는 이미 제노스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얘기가 되는 거니까요.”
그럼 한 명밖에 없겠죠. 앨런 최.
에이나르의 말에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전하께선 아마 곧바로 12년 전 만찬회와 사냥 대회 기록을 찾아보셨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앨런이 발데마르 공작의 보좌 자격으로 두 행사에 모두 참석했던 사실을 확인한 순간, 리욘의 의심은 확정으로 굳어졌을 것이다.
“…….”
제이는 더 이상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자신의 완패였다. 이제 리욘이 앨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단 사실은 놀랍지도 않았다. 그걸 다 알면서도 끝까지 모르는 척, 태연히 숨기고 있었다는 점이 더 경악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과 말투에 드러나곤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걸 못 숨기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못 숨기는 게 아니라, 안 숨기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감쪽같이 숨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까지도.
그럼 그때 베아테의 말에 그런 반응을 보였던 건… 나와 앨런의 관계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앨런이 제노스임을 확신해서 그런 거였나.
“하….”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베아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리욘이 앨런에게 질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 누구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치정에 휘말리게 되었다고 혀까지 찼었다. 심지어 리욘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전하의 생각은 틀린 것일 수밖에 없다고. 그러니 그런 생각 마시라고.
하지만 리욘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앨런의 정체에 대해서도,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미치겠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왠지 모를 허탈함에 혼자 피식피식 웃고만 있자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에이나르가 “저기, 제이. 그래도 그 도청기 덕분에 제이가 좀 더 빨리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던 거예요.” 하고 필사적으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공작가 근처에 병력을 준비해 두셨던 모양이더라구요. 그리고 계속 듣고 계시다가 제이에게 일이 생기자마자 바로 출동 명령을 내리셨던 거고요.”
덕분에 빨리 병원에도 옮길 수 있었던 거라고, 에이나르는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구급차를 부르긴 했지만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으면 제이는 아마 위험했을 거예요. 머리를 세게 부딪친 상황이었으니까요. 뇌출혈까지 있었고요. 아, 그리고, 그 대화 녹취본 덕분에 앨런이 제노스라는 사실도 입증할 수 있게 됐잖아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발데마르 공은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을 거예요.”
에이나르의 말이 옳았다. 그렇게 명백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면 발데마르 공작은 끝까지 앨런이 제노스임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모함이라고 길길이 날뛰며 리욘에 의해 구금된 왕비와 손을 잡고 왕세자가 패륜을 저지르려 든다, 왕좌에 눈이 멀어 끔찍한 짓을 꾸몄다 하고 반격에 나섰을지도 모른다.
“발데마르 공작은 지금 어쩌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자택에 구금된 상태예요. 일단 앨런이 제노스라는 사실을 몰랐던 건 확실한데, 이건 사실 우리 쪽에서 몰랐을 리가 없다고 몰아붙이면 그만이거든요. 그쪽에선 자신들 결백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으니까요.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죠.”
전하께서도 지금 고민 중이세요. 에이나르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반역죄를 적용해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사안인데, 발데마르 가문의 존재 자체가 에시르 왕가에 큰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서요.”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일에 대해 묵인해 주는 대가로 협정서 같은 걸 받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그렇죠. 전하께서도 차라리 발데마르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유효 카드를 얻은 셈 치는 게 낫겠다고 그러시던데… 사실 지금 발데마르 공작의 상태가, 뭘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요.”
왜인지는 안 물어봐도 알 것 같았다. 발데마르는 지금쯤 세상을 다 잃은 사람마냥 실의에 빠져 있을 게 분명했다. 앨런에게 갖은 정성을 다 쏟아 붓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차라리 자진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발데마르 공작이 본격적으로 왕위를 넘보게 된 데에는 앨런의 영향도 크지 않았나 싶어요.”
에이나르의 말에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발데마르는 어느 날 자신의 품 안으로 굴러 들어온 영특한 아들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비록 몸은 약했으나 다른 두 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명석하고 사리 파악도 정확했다. 그의 기지를 빌려 왕이 되고 나면, 최대한 발데마르 왕조의 기틀을 잘 다져 다시금 그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그 아들이 알고 보니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면부지의 남이었다는 거다. 심지어 왕비의 명으로 잠입해 들어온 제노스였다고 하니, 발데마르 공작의 입장에선 어느 대목에 먼저 충격을 받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제이, 전하께는 절대로, 절대로 내가 말했다고 하면 안 돼요. 약속한 거예요.”
에이나르가 다시 한 번 신신당부했다.
“걱정 말아요. 에이나르에게 들었다고는 안 할 테니까.”
“정말요?”
“네. 그냥 내가 멋대로 읽었다고 할게요.”
“제이… 제발 그러지 말아요.”
에이나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해 줘요. 전하께서 함구령을 내리신 이유가 뭔데요.”
더는 제이가 이 일에 관여하길 원하지 않으신다고요. 에이나르가 우는소릴 하며 매달렸다.
“절대 관련 소식들을 접할 수 없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니까요.”
“그러셨다면서요.”
제이는 여상히 말했다. 덕분에 의식을 되찾고도 일주일이 다 되도록 앨런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러다간 퇴원 때까지 아무런 소식도 못 듣겠다 싶어 병실 이동 요청을 신청한 게 오늘 오전의 일이었다. 일단 신청을 해 두면 연락을 받은 에이나르가 병원으로 달려올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이 지나자마자 병실 문이 열리고 에이나르가 들이닥쳤다.
“제이, 갑자기 입원실은 왜 바꿔 달라는 거예요? 뭐 불편한 거 있어요?”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묻는 에이나르를 붙잡아 침대 옆에 앉혀 두고 앨런의 행방부터 물었다. 절대 말해 줄 수 없다며 고개를 젓던 에이나르는 결국 ‘전하께는 절대, 절대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에이나르. 어차피 전하께 오늘 들은 이야기를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있어야 하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자니 가방을 챙겨 들며 에이나르가 말했다.
“그나저나 제이. 병실은 정말 바꾸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아, 네.”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능하면 그러고 싶어서요.”
“왜요? 뭐 불편한 거 있어요?”
“그렇다기보다는….”
제이는 말없이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지나치게 호화로운 병실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다. 지금 자신이 누워 있는 이 공간도 그렇지만, 저기 보이는 문을 열고 나가면 펼쳐지는 풍경이 더욱 그러했다. 커다란 응접실 한가운데에는 열두 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최고급 물소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고 안쪽에는 24시간 대기 중인 간호사를 위한 간이 너스 스테이션이 설치되어 있었다. 주방에는 조리대와 함께 홈 바가 갖춰져 있었고 보호자와 간병인을 위한 것으로 추측되는 두 개의 방에는 각각 샤워 부스가 달린 욕실이 붙어 있었다.
“난 간병인도 없는데 굳이 이런 병실을 쓸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게다가 특실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간호사들이 지나칠 정도로 친절한 것도 부담스러웠다. 간병인이 없다 보니 본인들이 그 역할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돌아가며 수발을 들었다. 괜찮다, 혼자 할 수 있다, 몇 번을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안 돼요, 아직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러다 큰일 나요.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숟가락도 혼자 못 들게 했다. 상처 부위 드레싱을 할 때에도 두 명, 세 명이 달라붙어서 갓난아이 다루듯 조심조심 붕대를 풀고 약을 발랐고 몸이라도 닦을라치면 그 두 배 인원이 와서는 수건을 열 장, 스무 장씩 바꿔 가며 과할 정도로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관리를 해 주었다. 나름 많이 다쳐도 봤고 입원 생활도 몇 번 해 봤지만 이렇게까지 유난한 간호사들은 처음이었다.
“고맙긴 한데 좀 많이 부담스러워서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기도 하고요.”
그래서 웬만하면 일반 1인실로 옮겼으면 한다고 하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이나르가 으음, 하며 미간을 좁혔다.
“글쎄요.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그리고 간호사들 문제라면… 그건 제이가 병실을 옮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제이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에이나르를 쳐다봤다. 에이나르는 조금 망설인 끝에 제이를 향해 말했다.
“제이, 이 병실이 어떤 병실인지 알아요?”
“특실 아닌가요?”
“그냥 특실이 아니에요.”
그럼? 이라고 묻기도 전에 에이나르가 먼저 말했다.
“이 병실은 얼마 전까지 국왕 폐하께서 입원해 계셨던 병실이에요.”
“…….”
“뇌사 판정이 내려진 이후 무균실로 옮기셨지만, 그 전까지는 계속 이 병실에서 지내셨어요.”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어쩐지. 아무리 특실이라도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호화로울 필요가 있나 했더니.
“왕가 전용이었던 건가요.”
“맞아요. 왕가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에요.”
그 말은 즉, 일반인들은 절대 이용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 병실은 국왕 폐하와 왕비 전하, 두 분의 아들딸들, 며느리와 손자들이 입원해 있지 않은 이상은 늘 비워져 있어야 해요. 설령 병원에 병실이 모자라서 환자를 내보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절대 이 병실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일은 없다고 보면 돼요.”
“그 룰을 깨고 입원한 최초의 일반인이 나란 소리군요.”
영광인데요. 제이는 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글쎄요. 이 병원 관계자들 중에 제이를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에이나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의 경호원이 큰 부상을 입어서 병원에 실려 왔는데, 전하의 명령으로 왕가의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병실에 머무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경호원이 제노스에다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고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요. 심지어 그 경호원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전하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에 들렀다면….”
에이나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이내 살짝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 병원 사람들이 그 경호원을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대충 답이 나오지 않나요?”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히 할 말도 없었거니와,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병실을 바꿔 달라고 했을 때, 자신을 바라보던 간호사의 표정을 떠올리며 한숨만 쉴 뿐이었다. 사색이 되어서는 몇 번이고 불편하신 점이 있느냐, 무엇 때문에 그러시느냐 하고 물어본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하고 생각하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무튼 병실을 바꾸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이유는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해요. 대신 간호사들에게 말은 해 둘게요. 환자가 피곤해하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요. 그럼 무슨 뜻인지 알 거예요.”
곧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에이나르는 병실을 떠났다. 문을 열고 나서는 에이나르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제이는 잘 가라는 인사조차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마음은 더욱 그랬다.
이대로라면 또 한없이 가라앉게 될 게 뻔했다.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해서 자신의 주의를 돌려야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게 좋을까. 제이는 눈을 감은 채 골몰했다. 그래, 앨런. 제이는 피투성이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앨런의 모습을 떠올렸다. 동시에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나를 죽이지 않았던 걸까.
에이나르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당연히 죽이지 ‘못했던’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죽이려는 찰나에 에이나르와 발데마르에게 발각되어 급하게 도망을 가야만 했던 게 아닐까, 혼자서 추측을 해 봤다. 하지만 에이나르가 거실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앨런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고 했다. 주저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쓰러져 있는 것도 아니고 두 발로 멀쩡히 서 있었다고. 그렇다는 건 자신을 죽일 힘 정도는 충분히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딱히 시간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통을 박살내거나 심장을 터뜨릴 수 있었을 테니까.
“…….”
제이는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침대 옆 테이블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소리도 없이 공중에 떠올랐다. 화면이 밝아지고 키패드가 멋대로 숫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숫자는 해리의 전화번호였다.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됐다. 하지만 제이는 그러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대신 액정에 뜬 숫자들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았다.
리욘은 더 이상 자신이 이 일에 관여하길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관련 정보들도 모두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렇다면 분명 자신의 휴대폰에도 뭔가 장치를 해 놨을 것이다. 사고 이후 해리에게서 한 번도 전화가 걸려 온 적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해리 성격상 소식을 접했으면 어떻게든 연락을 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한 통 온 게 없다. 그렇다는 건 해리가 연락을 안 한 게 아니라, 자신이 못 받았다는 이야기다.
아마도 막아 뒀겠지. 특정 번호를 막은 건지, 특정 지역으로부터의 수신을 막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장치를 걸어 놓은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거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발신까진 막지 않았다고 해도 최소 통화 내용은 기록되게끔 해 두었을 것이다.
휴대폰이 원래 놓여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제이는 침대의 사이드 바를 붙잡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와 등의 통증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키며 그는 겨우 침대에서 내려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지갑에서 동전을 있는 대로 꺼내 환자복 바지 주머니에 넣은 뒤 천천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병실을 나서자 응접실에서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일어났다.
“어디 가시려고요?”
“답답해서 잠깐 산책 좀 하려고요.”
평소 같았으면 펄쩍 뛰며 산책은 무리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아직은 조심하셔야 한다, 우선 응접실을 한 바퀴 돌아 보시면 어떻겠느냐, 제가 도와드리겠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얌전히 시선을 내리며 그러세요, 라고만 할 뿐이다. 확실히 에이나르가 뭔가 언질을 주긴 한 모양이었다.
“그럼,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직은 그렇게 많이 걸어 다니실 만한 상황은 아니거든요.”
간호사가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것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이 넓은 병원 안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를 공중전화를 찾을 생각에 벌써부터 온 몸이 아파 오던 참이었다.
“고마워요.”
제이는 간호사가 가지고 온 휠체어에 앉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수줍은 듯 미소 지은 간호사는 잘 다녀오시라며 복도로 이어진 문을 열어 주었다.
복도로 나가자 마침 지나가던 몇몇 간호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럴 만도 했다. 검사를 받기 위해 이동할 때를 제외하곤 병실을 나선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옆에 따라붙은 사람하나 없이 혼자 휠체어를 끌고 나왔으니 다들 어어, 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른 달려와 도와드리겠다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에이나르의 당부가 꽤 잘 먹힌 듯싶었다.
덕분에 제이는 느긋하게 엘리베이터로 향할 수 있었다. 마침 청소부 하나가 엘리베이터 문을 마른걸레로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잘됐다 싶어 제이는 그녀에게 공중전화의 위치를 물어봤다.
“공중전화기요? 1층 로비에 있죠. 출입문 바로 옆에 있어요.”
제이는 신음했다. 지금 자신은 병원 건물 최고층인 12층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층에는 없습니까?”
청소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1층 로비에 있는 것도 네 개 중에 두 개는 고장 난 상태예요. 그런데도 몇 년째 고치질 않고 있어요. 아무도 안 쓰거든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요즘 누가 공중전화를 쓴다고 병원 층층마다 그걸 배치해 두고 있겠는가. 1층 로비에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고맙습니다.”
청소부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제이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행히도 전용 엘리베이터라 단번에 1층까지 내려갈 수 있었다.
1층에 도착하자 드넓은 로비가 그를 반겼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몇 번을 가다 섰다 하며 출입구로 향했다. 청소부의 말대로 회전문에서 4, 5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공중전화 네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두 대에는 고장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제이는 고장 나지 않은 두 대의 전화기 중 한 대의 앞에 가서 멈춰 섰다. 환자용이 아닌지라 전화기의 높이가 높았다.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는 제이로서는 아예 일어서는 것 외엔 답이 없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는 전화기에 몸을 반쯤 기대어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넣고 외우고 있던 번호를 차례대로 누르자 곧 신호음이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재발신 버튼을 누르고 한 번 더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제이는 혀를 차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워낙 바쁜 사람이다 보니 한 번에 연결되는 게 더 드문 경우긴 했지만 그래도 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제이는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텍사스와 에시르의 시차는 7시간. 지금이 오후 3시니 텍사스는 오전 8시 정도일 것이다. 해리는 새벽같이 일어나는 사람이니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을 확률은 적었다. 혹 텍사스가 아니라 다른 나라에 가 있는 건가. 다른 시간대에 전화를 걸어 봐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했다. 문이 완전히 다 열리길 기다려 휠체어를 움직였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간호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 하고 간호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다.
“어디에 다녀오시는 길이신가요?”
설마 혼자 다녀오신 거예요? 수행 간호사도 없이? 혼비백산해서 묻는 걸 보니 아직 에이나르의 전언을 못 들은 모양이었다.
“잠깐 1층에 다녀오는 길이라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간호사가 1층이요? 하며 눈을 크게 떴다.
“1층이면 사람도 많았을 텐데… 어디 부딪치거나 하지는 않으셨어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네, 괜찮습니다.”
대충 말하고 병실로 가려는데 간호사가 얼른 뒤에서 휠체어 손잡이를 붙잡으며 “모셔다 드릴게요.” 했다.
“아뇨, 괜찮….”
말하다 말고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하긴 이 사람 입장에선 혼자 가라고 내버려 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
“그럼 부탁할게요.”
제이의 말에 간호사가 기쁜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곧바로 휠체어의 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간호사가 환자의 휠체어를 밀어 주는 거야 특별할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묘한 기분이 드는 건 아마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일 것이다.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실이 어떤 병실인지를 알고 나자 간호사들의 친절이 새삼스레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이 사람들은 자신을 왕세자의 정부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데 그 정부가 왕세자의 아이까지 가졌던 데다가 왕가의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는 병실에 입원 중이다보니 어떻게 대해야 하나, 어느 정도까지 예우를 해 줘야 하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왕세자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둘 사이의 자식인 왕세손까지 존재하고 있는데, 한낱 남자 정부에게 이렇게까지 극진한 대접이라는 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임신 중이었다면 배 속의 아이 때문인가 했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도 요원했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중혼이 가능해 제2 왕비로 책봉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왕세자비가 소식이라도 전해 듣는 날엔 고작 정부 따위를 왕가의 사람마냥 모셨다고 책임자를 질책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온 간호사들은 물론 의사들까지 아침저녁으로 들락거리며 상태를 살피고 사소한 기분 변화 하나까지 체크하려 드는 걸 보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뭔가 언지가 있었거나, 아니면 이 사람들이 단체로 뭔가 오해를 하고 있거나.
생각하는 사이 병실에 도착했다.
“침대에 누우실 거죠?”
“그래야죠.”
제이가 대답하자 간호사는 침대 옆에 휠체어를 세웠다. 당연한 듯 도와주려는 손길을 거절하고 제이는 스스로 침대에 올랐다.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자 매트리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쯤 세워진 매트리스에 등을 기대며 제이는 말했다.
“혹시 일반 1인실 중에 빈 병실이 있습니까?”
“1인실이요? 아마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갑자기 1인실은 왜요? 눈을 깜박이며 묻는 간호사에게 제이는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병실을 옮기려고요.”
“네? 병실을요?”
“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 뭐지…? 전하께서 직접 이 병실에 입원시키라고 명령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혼란스러워하는 간호사에게 제이는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여긴 왕가 전용 병실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아닙니까?”
“아, 네. 맞아요.”
“그럼 제가 있으면 안 되죠.”
그렇지 않습니까? 웃으며 말하자 간호사가 “어, 하지만….” 하고 중얼거리더니 슬그머니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미리 봉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막아도 머릿속의 생각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으응? 뭐지. 지금 말 많은 왕세자비와 이혼하고 이 사람이랑 결혼하려는 거 아니었나? 당연히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잘못 알고 있었나? 하긴,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구나. 그냥 우리끼리 눈치가 그래서 그렇게 생각했던 거지….
역시.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예상대로였다. 리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들끼리 멋대로 오해해서는 어떻게든 이쪽의 비위를 맞추려고 든 거였다.
이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이 간호사에게 이야기를 하면 알아서 적당히 소문을 퍼뜨려 주려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찰나였다.
- 아냐, 그래도 그냥 애인이면 그랬을 리가 없어. 전하가 어떤 분이신데. 폐하께서 입원해 계실 때에도 딱 필요한 경우 외에는 찾아뵌 적도 없던 분이었잖아. 그런 분이 매일 밤마다 오셔서는 의식도 못 차리고 있는 환자 얼굴을 거의 한두 시간씩 보다가 가실 정도면 뻔한 거 아니겠어? 게다가 매일 주치의와 직접 통화하며 상태 보고 듣고 계시지, 수술 전날에는 의사들 모아 놓고 브리핑까지 받으셨잖아. 수술실에도 들어가셨고.
속사포처럼 뇌리에 꽂혀 오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제이는 몹시 당황했다. 하나같이 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의식이 없던 닷새간 리욘이 매일 찾아왔던 건 에이나르의 말 때문에라도 대충 눈치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다 금시초문이었다. 특히 수술 관련 이야기들은 상상조차 못 한 내용이었다.
원체 믿기지 않는 이야기다보니 사실 확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제이는 침착한 목소리로 간호사를 향해 말했다.
“참, 아까 수석 비서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전하께서 제 수술실에 들어 오셨다던데 사실인가요?”
“아, 네.”
“무슨 문제라도 생겼던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간호사가 다급히 손을 저었다.
“전하께선 수술 끝나기 두 시간 전쯤에 오셨어요. 원래 참관 예정은 없으셨는데, 그때 수술이 예상 시간보다 조금 길어졌거든요. 바깥에서는 상황을 알 수 없으니 불안하셨나 봐요. 그래서 직접 들어가시게 된 거예요. 다행히 문제없이 수술 잘 끝났고, 전하께서도 결과에 만족하셨어요. 그때 회복실로 옮기는 것까지 보고 가셨던 걸로 기억해요.”
- 덕분에 의사들만 죽을 맛이었지.
한숨짓는 간호사의 목소리에 민망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제이는 “혹시….” 하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날에도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이삼 일에 한 번씩은 꼭 오고 계신데요.”
당연한 걸 왜 묻지, 라는 표정이었다. 의아해하는 얼굴 위로 다시금 당황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지나갔다.
- 으응? 혹시 병실에는 안 들르셨던 건가? 뭐지, 정말 우리가 생각한 그런 관계가 아닌 거야?
간호사는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다. 하지만 제이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줘서 고마웠다고 하자 간호사는 얼른 표정을 바꾸며 아니에요, 하고 미소 지었다.
조심스레 병실을 나서는 발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눈을 감았다.
열흘이었다. 그날 그렇게 돌아간 뒤 리욘은 열흘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용서받지 못했으니까. 솔직한 태도를 보여 주기 전까진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그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그 후 열흘이 되도록 한 번도 연락이 없기에 뒤늦게야 아, 그런 거였구나, 하고 깨달았다. 애초에 날 용서해 줄 마음이 없었던 거였구나, 라고. 그야 솔직해지면 용서해 주겠노라 말하고선 솔직한 모습을 보여 줄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그 사람은 날 용서할 생각 따위 없었던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자신의 병실에만 오지 않았을 뿐이지 그 동안에도 병원에는 꾸준히 들렀다니,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매일 의사에게 직접 상태에 대한 보고를 듣고 수술 전날에는 브리핑까지 받았다고.
“도대체….”
제이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열흘간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리욘이 마음을 풀 기미가 보인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이럴 거면 그때 왜 그렇게 모질게 돌아섰던 걸까, 새삼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을 위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절실하게 와 닿는 감정은 그리움이었다.
보고 싶었다, 리욘이. 의식도 없는 자신을 보기 위해 닷새간 꼬박 이 병실을 찾았을 그가, 행여 밤사이 아픈 곳은 없었을까 매일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보았을 그가, 그렇게 자주 병원을 찾으면서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던 그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제이는 웃었다.
그랬다. 자신에게는 자격이 없었다. 아직 솔직해지지 못했으니까. 말로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고 하지만 기회가 있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가슴이 아플 정도로 보고 싶다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와 마주하게 되면 시선을 피하고 말 거다. 무서우니까. 마음을 들키는 게 무서우니까, 늘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소리만 한다.
솔직해진다는 건 바닥을 드러낸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밑바닥까지 모두 내보이며 이런 날 허용할 수 있는지 묻는 행위였다. 생각해보면 크게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다. 받아들여진다면 고마워하면 되고, 거절당하면 돌아서면 되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상대가 리욘이 되면 힘들어진다. 받아들여지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모두 무섭다. 어느 쪽도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다. 몸은 얼마든지 솔직해질 수 있는데, 밑바닥의 밑바닥까지도 다 보여 줄 수 있는데 마음만은 그게 안 된다.
어쩌면 자신은 평생 그에게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건 분명 슬픈 일이다. 하지만 리욘을 생각하면, 그를 위한 결정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자기기만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겁쟁이니까.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해질 수 없는 겁쟁이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니까.
하지만, 그래서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신은 혼자서 버텨야만 한다. 그러려면 몸은 물론 마음에도 단단히 갑옷을 두르는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아픔도, 슬픔도 침범할 수 없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