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2)

그럼 그렇지.

제이는 손에 들린 테스트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예상대로였다. 양성일 경우 선명하게 드러난다던 선은 3분이 지나도록 나타날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제이는 망설임 없이 테스트기를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설명서에는 5분 정도 기다리라고 돼 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첫 번째 테스트의 결과로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임신, 안 됐을 거라는 거.

처음 테스트기를 사용해 본 건 나흘 전이었다. 첫 관계 후 정확히 10일 째 되던 날이었다. 설명서에서 권장하는 사용 시기는 관계 후 2주 이상이 지난 시점이었지만 열흘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는 사용 후기들을 더러 봤기에 열흘이 지나자마자 테스트를 해 봤다. 결과는 실패. 선은 고사하고 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임신의 조짐이 있었다면 그때 흐리게라도 선이 나타났을 것이다.

알면서도 굳이 나흘을 더 기다려 한 번 더 테스트를 해 본 건 혹시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역시나, 였고.

“…….”

제이는 변기에 주저앉은 채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오히려 임신이 됐더라면 더 놀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패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실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래도 주사를 맞아야 하나.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제이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걸로 안 된 걸보면 아마 주사를 맞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시그니의 경우가 특별했던 거다. 아마 다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이러고 있는 이유가 뭘까.

베개에 얼굴을 묻고서 제이는 생각했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엉덩이만 높이 치켜든 자세로 남자를 받아들이고 있자니 몸 전체를 뒤흔드는 쾌감과 자괴감이 적절히 뒤섞여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임신 가능성이 가장 높다던 사흘의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그런데도 그날 이후 단 둘이 됐을 때 리욘이 자연스럽게 키스해오면 거절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정말로 앨런 때문에 섹스를 하는 건지, 아니면 섹스를 하고 싶어서 앨런 핑계를 대는 건지도 모르겠다.

“집중해.”

말하며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박아 넣는다.

“허윽!”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양손으로 제이의 골반을 붙잡은 채 리욘이 연거푸 쳐올리기 시작했다. 제이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신음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젖꼭지가 시트에 비벼졌다. 전희 단계에서 실컷 만져지고 빨려 퉁퉁 부은 젖꼭지에 닿는 섬유의 거친 감촉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큰 자극이었다. 커다란 성기로 깊은 곳을 쑤셔질 때마다 제이는 시트를 움켜쥐며 허리를 비틀었다.

“가만히.”

한쪽 팔로 제이의 허리를 감으며 말했다. 그대로 팔에 힘을 주자 허리가 잔뜩 조이며 남자의 성기를 품고 있는 안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부푼 내벽에 굵은 성기가 마구 문질러졌다. 배 속을 헤집을 것처럼 날뛰어대는 남자의 성기에 제이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챘다.

“전하, 그만, 숨 막히… 아윽, 전하!”

“그만하라는 거야, 더 하라는 거야.”

그 와중에 정액을 쏟아내는 제이의 성기를 만지며 리욘이 웃었다. 괴롭다면서 사정해 버린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리욘의 두 손이 다시 골반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으스러뜨릴 듯 단단히 움켜쥐고는 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살결이 마찰할 때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커다란 고환이 젖은 회음부를 사정없이 때려 댔다. 그 날카로운 고통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때마다 직장 벽이 꿈틀거리며 리욘의 것을 더 꼭꼭 물어 댔다. 리욘이 허리를 잡아 뺄 때마다 그의 성기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점막도 함께 딸려나갔다. 싫다고,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고, 좀 더 마음껏 내 안을 쑤셔 달라고 온 몸이 애원하는 것만 같았다.

음탕하기 짝이 없는 몸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런 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의 치부를 한껏 드러내도, 밑바닥까지 다 내보여도 이 남자는 질려하지 않으니까. 도리어 기꺼워하며 안아준다. 여자처럼 물을 쏟아내며 벌름거리는 그곳을 정성스레 핥아 주고, 만져 준다. 뜨거운 열기로 몸 안을 가득 채워 주고는 그걸로도 부족한 듯 끝없이 입을 맞추어 준다. 임신이 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의미 없는 행위란 사실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건 그 때문이었다. 이어져 있는 동안에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리욘이 얼마만큼이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비록 끝난 후에는 그 몇 배의 죄책감이 밀려온다고 해도 말이다.

“으윽, 읏! 전, 전하… 하윽, 너무, 너무 깊은, 으읏….”

자신의 침으로 흠뻑 젖은 베갯잇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한 채 제이는 연신 신음을 토해냈다. 연결된 곳에서는 이제 찔꺽거리는 소리마저 날 지경이었다. 안에서 잔뜩 치대어지고 문질러지는 동안 더욱 끈적해지고 끈끈해진 체액들이 조금씩 흘러나와 허벅지와 회음을 적신 까닭이었다. 음낭에 수차례 얻어맞아 얼얼하게 부은 회음부에서 더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 즈음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이끄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자 입술이 포개어졌다.

“…응.”

제이는 눈을 감은 채 신음했다. 언제나처럼 깊게 키스하며 리욘은 제이의 안에다 토정했다. 체위 때문인지 유난히도 정액이 꿀럭거리며 배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느껴진다는 건 한 번에 사출되는 정액의 양이 엄청나다는 뜻이었다. 웬만한 여자였으면 열두 번도 더 임신하고도 남았을 텐데. 조금 씁쓸한 생각을 하며 침대에 엎드려 숨을 고르자니 뒷목덜미에 뭔가 따뜻한 게 닿았다. 리욘의 입술이었다. 그는 제이의 목에다 입을 맞춘 뒤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뜨려 등에까지도 입을 맞추어 댔다. 척추를 따라 천천히 키스한 뒤 다시 등에 가슴을 딱 붙이고 끌어안았다.

리욘의 심장 박동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그대로 다시 또 움직이려는 남자에게 제이는 당황해서 “전하, 잠시만요.”하고 말했다.

“또 할 거면 자세를 좀 바꾸는 게….”

“힘들어?”

고환에 얻어맞은 밑이 얼얼해서 그렇단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제가 올라가겠습니다.”

좋을 대로. 웃으며 말한 리욘이 제이의 안에서 자신의 물건을 빼냈다. 쑤욱, 커다란 성기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주르륵 쏟아졌다. 이러면 혹 임신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세 바꾸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것도 없었다. 어차피 임신은 안 될 거다. 정액이 허벅지를 타고 흐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으며 제이는 리욘의 위로 올라갔다. 사정 후에도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는 남자의 성기를 붙잡아 그 끝을 자신의 구멍에 갖다 댔다. 그대로 천천히 허리를 내렸다. 애액과 정액으로 흠뻑 젖은 구멍 안으로 커다란 성기는 무리 없이 쑥 들어왔다.

“아….”

너무 매끄럽게, 한 번에 뿌리 끝까지 들어오는 바람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떨며 신음했다. 배 속이 뜨거웠다. 두 손으로 리욘의 가슴을 짚은 채 살짝 몸을 들어 올렸다. 기둥이 절반쯤 보이게끔 들어 올렸다 그대로 다시 내렸다. 최대한 천천히 움직여 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과 다르게 벌써 심지에 불이 붙기 시작한 몸이 멋대로 들썩이며 남자의 물건을 삼켰다, 뱉었다 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몸이 들썩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너무 빨라.”

그러다 다친다고. 눈썹을 찌푸린 채 웃으며 리욘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배 속이 날카로운 것으로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몸무게가 가중된 만큼 평소보다 더욱 깊이 연결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해 보는 체위도 아니고, 오히려 제이가 선호하는 자세였지만 상대가 리욘이라는 게 문제였다. 성기가 지나치게 굵은 데다 길기까지 해서 말 그대로 내장이 들쑤셔지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자궁 경부에까지 닿기도 했다. 그때마다 번쩍하는 쾌감과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내달렸다. 소리는 어떻게든 참았지만 얼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리욘은 그 모습을 보고 한 말인 듯했다.

“좀 천천히 움직이고, 허리를 약간 숙여 봐. 그렇지.”

제이는 리욘의 말대로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그 상태로 천천히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내리자 방금 전까지 안쪽 깊은 곳만 쑤셔대던 성기가 직장 벽에 부드럽게 문질러지며 약한 곳을 건드렸다.

“으음….”

제이는 무의식중에 허리를 비틀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리욘의 가슴을 단단히 짚은 채 제이는 다시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의 그곳에 대고 문지른다는 느낌으로 몸을 앞으로 숙인 채 계속 허리를 들었다 내렸다. 이미 한 번의 정사로 한껏 부풀어 민감해져 있는 내벽을 굵은 귀두가 긁듯이 문질러 댔다.

“하윽, 아으읏….”

허벅지가 덜덜 떨렸다. 바짝 선 성기에서 프리컴이 튀었다. 정신없이 허리를 들썩이며 제이는 열에 들뜬 사람처럼 리욘을 불렀다.

“아, 전하, 전하… 으으응, 전, 하, 흐으….”

리욘은 대답 대신 손으로 제이의 가슴을 애무했다.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가슴을 부드럽게 문지르듯 어루만졌다. 젖꼭지에 그의 손바닥이 스칠 때마다 정수리가 저릿했다. 몸속에서 둑이 터진 것처럼 애액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남자의 성기를 물고 있는 아래는 질척거리다 못해 이제 거품이 일 정도였다.

“허억, 헉, 흐응, 흐으으으…!”

순식간에 절정이 밀어닥쳤다. 어떻게든 이 감각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고 싶었다. 제이는 허벅지를 넓게 벌린 채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제기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욘이 못 참겠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경련하듯 떨고 있는 제이를 끌어안고 밑에서부터 쳐올리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한계까지 부푼 제이의 페니스가 리욘의 배에 짓이겨질 정도로 세게 문질러졌다.

“아윽, 전하, 흐으으, 전하아… 아아아!”

울음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제이는 사정했다.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자지러지듯 고개를 저어대는 제이를 끌어안고 리욘은 더욱 세게 쳐올렸다. 한계까지 밀어 넣자 사정 직후의 여운으로 뜨겁게 경련하는 내벽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리욘은 제이의 입을 틀어막듯 키스했다. 그 상태로 내벽의 떨림을 충분히 즐긴 뒤, 그는 제이의 안에다 사정했다.

“흐읏….”

리욘이 입술을 떼자마자 제이는 쓰러지듯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자 리욘이 진정하라는 듯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겨우 떨림이 멎기 시작한 몸을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눕힌 뒤, 리욘은 제이의 몸 안에서 성기를 빼냈다. 다리 사이로 미지근한 것이 쏟아져 나왔다. 그 느낌에 진저리치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제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데 호르몬 수치는 도대체 언제 정상이 되는 거야.”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통째 집어 들며 리욘이 말했다.

“그야… 저도 모르죠….”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제이는 헐떡이며 말했다. 그 사이 리욘의 손이 허벅지를 붙잡았다. 티슈를 거칠게 뽑는 소리가 들렸다. 직접 닦아 줄 모양이었다. 하지 말라고, 알아서 하겠다고 하려다 가만히 구멍을 벌리는 손길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안쪽에 고여 있어 미처 다 흘러나오지 못한 정액과 애액이 소리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쌌는데도 안 되다니.”

혀를 차며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지친 목소리로 “그냥 포기하세요….” 하고 말했다.

“호르몬 수치랑은 관계없습니다. 어차피 임신은 안 될 거예요.”

인공 수정도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자연 임신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전히 팔로 얼굴을 가린 채 제이는 말했다.

“그럼 딸은?”

딸은 어떻게 가졌느냐는 소리다.

“원래 강간의 임신 확률이 좀 더 높습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째서지? 이유를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조금 망설인 끝에 대답했다.

“공포 배란이라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면 몸이 어떻게든 내 DNA를 세상에 남기게 하려고 애를 쓰니까요.”

아아, 하고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메커니즘인지 알겠다는 듯 그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인간의 본능이라는 건 잔혹하지.

“그래서 본능이라고 하는 거겠지만.”

엉망이 된 다리 사이를 닦아주며 리욘이 말했다. 표정을 보니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쯤 되니 조금 안쓰러워졌다.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 그 강간범이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도 걱정스러웠고. 물론 알릴 마음은 전혀 없지만 말이다.

“아….”

불현듯 손가락 하나가 파고들었다.

“지금 뭐 하시… 으음.”

말을 채 다 끝내지 못하고 제이는 나른한 신음을 내뱉었다.

“뭐하긴. 긁어내야지.”

그렇게 말하며 리욘은 손가락을 살짝 구부렸다. 긁어낸다면서 정액이 고여 있는 안쪽은 건드리지도 않고 잔뜩 부어있는 전립선 부근만 살살 간질이듯 손끝으로 문질러댄다. 속셈이 빤히 보여서 반응 따위 안 해 주고 싶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민감한 곳인데 막 정사를 끝낸 후다 보니 한껏 예민해져 있어 살짝 스치기만 해도 저절로 발가락이 오므라들며 비명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으응… 전하, 그, 만, 아… 아아, 하… 후으.”

제이는 시트를 움켜쥐며 더운 숨을 뱉어냈다. 리욘의 앞에서 한껏 다리를 벌리고 누워 신음하는 자신의 꼴이 얼마나 추잡하고 음란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귀가 뜨거워질 정도였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리욘이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오히려 그의 시선에 범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온몸이 뜨거워졌다. 리욘의 손가락을 삼킨 아래가 젖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날 때 즈음 리욘이 손가락을 빼냈다. 애액과 뒤섞여 한껏 묽어진 정액이 주륵 흘러나왔다.

“딱 넣기 좋게 벌어져 있어. 엄청 젖기도 했고.”

조금 전까지 자신의 손가락을 물고 있던 구멍을 엄지로 살며시 쓸며 리욘이 말했다. 그럼 넣으면 되지, 왜 어울리지도 않게 뜸을 들이는 걸까. 천장을 보며 숨을 몰아쉬던 제이는 “혼자 해 봐.” 라는 리욘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네…?”

“혼자 해 보라고.”

웃으며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도대체 왜 그래야 합니까?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고 싶어.”

“싫습니다.”

제이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번에는 리욘이 왜? 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도로 침대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전하가 있는데 제가 왜 혼자 해야 합니까.”

그런 대답은 생각도 못했던 모양인지 리욘이 잠시 멍한 얼굴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선수야, 선수.”

제이는 부인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충분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실 앞에서 자위하는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서비스 플레이 치곤 가벼운 축에 속하기도 했고, 자신도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종종 하곤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서비스를 하기에는 너무 피곤했다. 손도 하나 까딱하기가 싫었다. 차라리 삽입 섹스를 한다면 임신 확률이라도 올라가겠지만 자위는 임신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하긴, 삽입 섹스도 도움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구나.

리욘이 삽입하기 쉽게 무릎을 세워 허벅지를 벌려 주며 제이는 생각했다. 삽입 섹스건 뭐건, 백날 해 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는 건 마찬가진데. 그런데도 요구하면 요구하는 대로 응하고, 때로는 먼저 아닌 척 유혹도 하는 건 그냥 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이어져 있고 싶어서, 이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아….”

빠듯하게 안을 채우며 밀고 들어오는 열기에 제이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거칠게 들썩이는 목울대에 입을 맞추며 리욘이 곧바로 추삽질을 시작했다. 손 하나 까딱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리욘을 끌어안고는 그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제이는 조금 웃고 말았다. 리욘도 리욘이지만 자신도 참 대단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

“대단하다, 정말.”

수잔이 아주 질려 버렸단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제이는 괜히 머쓱해져서 자신의 배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시그니의 머리만 쓰다듬었다.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팔짱을 끼며 수잔이 물었다. 어젯밤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들어온 거라고 솔직하게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자니 먼저 답을 알아낸 듯 수잔이 “미쳤구만, 진짜.” 하고 웃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결혼을 해라. 앨런 핑계 대지 말고 결혼해서 시그니 데리고 왕궁 들어가서 살아. 이 나라 어차피 동성 결혼 합법이잖아.”

“동성 결혼은 합법이지만 중혼은 불법이에요.”

“뭐라고?”

“그 사람 유부남이라고요.”

웃으며 말하자 수잔이 팔짱을 낀 채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유부남이랑 결혼은 도저히 못 하겠고 섹스만 열심히 하시겠다? 애는 가져야 하니까?”

제이는 조용히 시그니의 귀를 자신의 두 손으로 막았다. 어차피 들어 봤자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꿈에서라도 이런 이야기는 안 들었으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그 잘난 왕세자 전하께서는 자기가 유부남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있긴 해? 아니, 그 전에 왕세자비를 진짜 자기 부인으로 생각은 하고 있는 거야? 아들도 친자가 아니라며.”

“누가 그래요…?”

“카리나가.”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핀란드 출신의 카페 여주인까지 알 정도면, 이제 몇몇 호사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뜬소문도 아닌 셈이었다.

“농담이 아니야, 제이.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결혼해.”

이 정도 해도 안 되는 거 보면 임신 안 된다는 거야. 거실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수잔이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짓거리 할 생각 말고, 그냥 리욘을 설득해. 설득해서 왕위 포기하게 하고 아이슬란드 가서 살아. 넌 어차피 앨런을 못 이,”

“그건 안 돼요.”

제이는 수잔의 말을 잘랐다.

“왜 안 되는데? 넌 걔 때문에 네 인생의 절반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걘 널 위해서 그 정도도 못해?”

“수잔, 그 사람이 날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내가 싫고요.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싫은 거냐고.”

“왕이 돼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내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요. 시그니의 까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제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사히 왕이 될 수 있게 해 주려고, 그러려고 온 거예요. 그러니까… 날 위해서라도 반드시 왕이 돼야만 해요.”

수잔은 그런 제이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모르겠다, 정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어. 한숨을 쉬며 수잔은 몸을 일으켰다. 그 기척에 시그니가 잠에서 깨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제이, 제이….”

“그래.”

나 여기 있어. 제이는 시그니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며칠째 새벽에 들어와 일찍 나가느라 잠든 얼굴밖에 못 본 딸이었다. 주말인 오늘만큼은 하루 종일 같이 놀아줄 생각으로 시간을 통째로 비웠는데, 아이는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어딜 가고 싶냐, 뭘 하고 싶냐 아무리 물어도 수줍게 웃으며 품에만 안겨 올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지 잠깐 사이에 곤하게 잠이 드나 했더니, 깨자마자 눈도 못 뜨고 확인하듯 자기 이름부터 불러 대는 아이가 안쓰러워 제이는 품에 꼭 안은 채 등을 토닥여줬다.

“나 어디 안 가. 그러니까 더 자도 돼.”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제이, 아프면 안 돼….” 하고 중얼거렸다.

“내가 왜 아파. 안 아파.”

뜬금없는 말에 제이는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시그니는 훌쩍거리며 그치마안, 하고 칭얼거렸다.

“제이 피 났어….”

“내가?”

“응… 피 엄청 났어.”

그래서 나 막 울었어. 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시그니는 훌쩍거렸다. “어디서, 꿈에서?” 제이가 묻자 아이는 으응,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꿈이잖아. 난 안 다쳐. 피도 안 나고.”

“진짜…?”

“그래. 안 다칠 거야. 아프지도 않을 거고.”

그러니까 걱정 말고 자. 제이는 시그니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 손길에 겨우 안심이 된 건지 아이는 곧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꿈을 꿔도 하필 그런 꿈을 꾼대.”

“수잔이 그런 말을 해서 그래요.”

괜히 애 앞에서 내가 곧 아플 예정이라는 둥, 그런 소릴 해서 이렇게 된 거 아니냐고 하자 수잔은 “그런가.” 하며 미간을 좁혔다.

“정말 애들 앞에선 말도 함부로 못 하겠네.”

아무튼, 하고 수잔은 도로 테이블 위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당분간 앨런이랑은 안 부딪치도록 해.”

“그건 무리예요.”

오히려 이제부턴 더욱 자주 앨런과 만나야했다. 그동안은 생각을 읽히면 안 되니 일부러 피해 다녔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임신은 안 될 게 분명했다. 그러면 지금이라도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다른 방법이라는 게 설마 앨런을 설득시켜 보겠다, 뭐 이런 건 아니겠지.”

“설득까진 바라지도 않아요.”

애초에 설득한다고 설득 당할 인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뭔가 틈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굳이 치명적인 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작은 틈을 발견해 내기만 하면 파고 들어가 크게 벌려 놓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 통하긴 하는 인간이야?”

“일단 저한테 호의적인 건 맞아요.”

“그래? 같은 한국계라 그런가.”

“자기 말로는 그렇다는데… 모르죠.”

그보다는 오히려 본인과 닮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수잔은 이해가 될 듯 말 듯 안 된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뭐, 아무튼 설득이고 뭐고 다 좋은데, 그러다 일부러 임신하려 했다는 거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상관없어요. 그걸 읽어 낼 정도면 이젠 내가 포기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테니까.”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볼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글쎄. 걔가 아무리 너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정도로 무르게 대할 거 같지는 않은데.”

“아뇨, 솔직하게 말하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거예요.”

“확신할 수 있어?”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앨런을 직접 만나보면 확실히 느껴지는 그런 감정이 있었다. 전적인 호의.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앨런은 이상할 정도로 자신에게 호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연민에서 비롯한 감정일 테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필요하다면 연민이 아니라 동정심이라도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언제 만나려고?”

“내일이라도 만날 수 있으면 일단 만나서 얘길 한번 해 봐야죠.”

마침 월요일이니 의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발데마르가 사원으로 올 것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앨런도 함께 동행할 것이고.

“그렇군.”

수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앨런을 설득하는 것보단 차라리 리욘을 설득하는 게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일단은 네가 임신하는 걸 포기했다니까. 그거면 됐다는 듯 수잔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진 어떻게든 되겠지. 뭐.”

제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잔이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환한 미소였다. 그렇게 좋을까. 주방으로 향하는 수잔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는 쓰게 웃었다.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서운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

앨런은 언제나처럼 사원의 입구 돌 계단에 앉아 있었다.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햇살 아래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제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했더니.”

오랜만이군요. 늘 그렇듯 미소 띤 얼굴로 앨런이 인사했다. 바로 곁에 다가갈 때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데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누구인지 몰랐다는 건 읽지 못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속단하기는 일렀다. 전에도 한번 이런 식으로 모르는 척하다 막판에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낸 적이 있으니까. 제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다가갔다.

“설득은 잘 되어 가고 있나요.”

바로 앞에 선 제이를 올려다보며 앨런이 말했다.

“열심히 하고 있어.”

“몸으로요?”

…역시 읽고 있었나. 속으로 혀를 차던 제이는 이어진 앨런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온 왕궁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뭐…?”

“전하께서 매일 밤마다 집무실 안에서 경호원과 낯 뜨거운 행각을 펼치신다고요.”

사실인가요? 웃으며 묻는 앨런에게 제이는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굳이 사실이냐고 묻는 걸 보면 자신의 생각을 못 읽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게 더 난감했다. 차라리 먼저 읽고 알아차렸다면 굳이 자신의 입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이런, 사실인가 보군요.”

설마 그런 방법까지 쓸 줄은 몰랐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던 앨런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쁘지 않죠.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요.”

다행히도 임신이 목적이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긴, 보통은 그런 생각 쉽게 못 하지. 제이는 쓰게 웃었다. 그 앨런조차 쉽게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극단적인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새삼 자신이란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다.

“열심히 해 보세요. 그런 식의 설득이라면 아주 승산이 없지도 않겠군요. 애초에 왕이 될 생각도 없던 리욘을 여기까지 끌고 와 앉힌 건 당신이니까.”

앨런의 말에 제이는 “뭐?”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제이의 반응에 오히려 놀란 듯 앨런이 “몰랐나요?” 하고 눈을 크게 떴다.

“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물론 리욘이 왕이 돼서 당신을 왕비로 맞아들이겠다던가, 뭐 이런 거창한 목표를 잡고 시작한 건 아닙니다. 그럼 정말 세기의 로맨티스트겠죠.”

하지만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앨런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그런 로맨틱한 발상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어요. 그냥 궁에 들어와서 왕세자 신분으로 적당히 할 일 하며 지내다가, 메이를 핑계로 당신을 왕궁으로 불러들일 생각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 다음 적당한 시기에 왕세자 자리도 반납할 셈이었죠.”

그런데 막상 왕세자 신분으로 국정에 참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맡아서 처리하고 하다 보니 의외로 몰랐던 사실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민생이란 걸 알게 되면서, 그때까지는 크게 관심 없었던 에시르라는 국가의 민낯과 마주하게 된 거죠. 이를테면 GDP로 환산되는 국가 경제 수준은 북유럽 국가들 중 최고지만 복지 수준은 그에 현저하게 못 미친다든가, 그걸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국민들의 인식이 형편없는 수준이라든가 하는 것들이요.”

연방 출범 이후 에시르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기형적인 정치 형태를 고수하고 있었다. 입헌 군주국을 표방하고 있으나 실상은 그 어떤 전제 군주국보다 강력한 왕권으로 국민들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왕가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애정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래야만 아스갈 연방의 수장으로서 그의 권위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연방의 수장국이라는 사실에 한껏 도취되어 스스로 왕가의 신민이길 자처하는 에시르 국민들을, 연방의 국가들은 은근히 깔보며 비웃고 있었다. 리욘은 무엇보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몇십 년째 국제 인권 단체들의 유효 레퍼토리로 이용되는 것도 지겨웠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 인식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죠. 그래서 차라리 제도를 먼저 바꾸기로 한 겁니다. 그럼 인식은 따라오기 나름이니까요. 그러려면 본인이 왕이 돼야만 했죠.”

다 젊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생각이라며 앨런은 웃었다.

“미안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요. 리욘은 훌륭한 왕은 될 수 있지만 사랑받는 왕은 되지 못할 겁니다. 업적에 대한 칭송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아마 그가 죽고 난 뒤의 일일 겁니다.”

슬프지 않습니까? 앨런은 한껏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에시르 국민들은 리욘의 속뜻을 헤아릴 만큼 성숙한 인식을 갖추지 못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질서를 한 방에 무너뜨리려는 리욘을 원망할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로운 삶을 버리고 스스로 왕좌라는 족쇄에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리욘은.”

그러니 어서 빨리 말리라는 거다. 그가 왕위를 포기할 수 있게끔. 결국은 그 얘길 하고 싶어서 이렇게도 장황한 서론을 펼쳤던 건가 하고 생각하자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본인도 다 알고 택한 길일 거야. 사서 걱정해 줄 필요 없어.”

제이는 앨런의 맞은 편 기둥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 전에 리우지엔의 처분부터 걱정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리욘은 왕이 못 될 거니까. 앨런은 웃으며 말했다.

“앨런.”

제이는 기둥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리우지엔을 생각하지 말고 에시르를 생각해. 누가 왕이 되는 게 에시르 국민들을 위해 더 나은 건지를,”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에요.”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앨런이 말했다.

“이 나라나, 이 나라의 국민들이나 다 내 알 바 아니라고요.”

그리고, 하며 앨런은 조금 웃었다.

“누가 왕이 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면 난 아마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을 거예요.”

“…….”

“그러니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난 그냥 메이가 원하는 걸 이루어 주면 되는 겁니다. 여전히 차분한 미소로 말하는 앨런을 향해 제이는 한참 만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야?”

무슨 뜻이냐는 듯 앨런이 시선을 들었다.

“네 목숨을 걸 만한 일이냐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습군요.”

고개를 숙이며 피식 웃는 앨런에게 제이는 “아니, 나는 아니야.” 하고 말했다.

“나는 목숨은 걸지 않았어. 물론 앞으로도 걸 마음은 없고.”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그럴 거야.”

제이는 단언했다.

“난 그 사람 말고도 지켜야 할 존재가 있으니까.”

“딸 이야긴가요?”

“그래. 그리고 죽기 전에 만나야 하는 사람도 있고.”

앨런이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게 누구냐는 표정이었다.

“동생.”

“동생이 있었나요?”

그래. 제이가 대답하자 앨런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둥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어떻게 알았죠? IART 안에서는 혈연관계를 철저히 비밀에 붙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래. 그래서 나도 연구소가 폐쇄된 뒤에나 알았어.”

아마 열다섯 무렵이었을 것이다. 블라스트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니까. 해리에게 볼일이 있어 그의 방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급한 마음에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는데 마침 연구소 출신의 직원들이 모여 해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중 몇몇은 자기들끼리라고 마음 편하게 칩도 착용하지 않고 있었다. 들어갔더니 허둥지둥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데, 그 사이 유효한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모친이 생전에 두 명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막달이거나, 못해도 8개월 이상은 된 시점이었을 것이다. 이미 반쯤 숨이 끊어진 모친의 배를 가르고 아이를 꺼냈다는 걸 보면.

“그래서 연구소 직원들이 다 돌아가자마자 해리에게 물었지.”

내게 동생이 있었던 거냐고.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하는 것도 잠시, 이내 해리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래. 왜, 궁금하니? 만나 보고 싶어?

“그래서, 동생을 만나게 해 주는 대가로 블라스트의 개가 될 것을 요구했나 보죠?”

그 작자도 참 어지간한 족속이야. 이죽거리는 앨런에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대위.”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리욘이었다. 수행원들이 함께인 걸 보니 막 회의를 마치고 왕궁으로 가기 위해 걸어 나오던 참인 모양이었다.

“같이 있는 건 앨런인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리욘이 물었다.

“네, 전하.”

어느 틈에 자리에서 일어선 앨런이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래. 자네 다음 주에 공작의 성을 받기로 했다지? 축하하네.”

리욘의 말에 앨런이 다시금 허리를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리욘은 그런 앨런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럼,” 하고 말했다.

“다음 주에 보도록 하지.”

곧이어 리욘은 대위, 하고 제이를 불렀다.

“네.”

제이가 대답하자 그는 말없이 고개를 까닥였다. 이제 그만 이쪽으로 오라는 뜻이었다. 제이가 다가가자 그는 곧바로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앨런과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었나.”

사원 건물을 빠져나오며 리욘이 물었다.

“별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이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오랜만이라고… 안부 정도만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 정도로 친했던가?”

의외라는 듯 중얼거린 리욘은 이내 “하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도 대위가 내게 할 말이 있노라고 앨런이 대신 전해 준 적이 있었지. 그때도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타이밍도 좋게 바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렸다. 평소였더라면 당연히 무시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제이는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꺼내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겠습니다.”

그리고 리욘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돌아서서 휴대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제이? 지금 어디야?”

곧장 묻는 수잔에게 제이는 작은 소리로 “어디긴요.” 하고 말했다.

“왕궁이죠.”

“그래? 잘됐다. 좀 나와 봐.”

나와 보라니? 어디로요? ─라고 물어볼 겨를도 없었다.

“여기 정문인데, 신분증이 없으면 못 들여보내 준대.”

제이는 하마터면 맙소사, 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수잔, 설마 지금 왕궁이라는 거예요?”

“그래. 정문이야.”

태연하게 대답하는 수잔에게 제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기다려요,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수잔.” 하고 당부한 뒤 휴대폰을 닫았다.

“죄송합니다만, 먼저 왕궁에 가 있겠습니다.”

제이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로 리욘에게 보고한 뒤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원을 벗어나자마자 광장을 가로질러 왕궁 정문까지 달려갔다. 하필 점심시간이라 광장에 사람이 넘쳐났다. 인파를 헤치고 나타난 제이를 먼저 발견한 건 수잔이 아닌 시그니였다.

“제이!”

소리 지르며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들고 제이는 수잔에게 다가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신분증 없이는 못 들어간다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엔 왜 온 거냐고 물어보려던 제이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남의 눈치 따윈 보지 않는 수잔이 경비대원들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몰랐다. 우선은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야했다. 제이는 목에 걸고 있던 출입증을 경비대원들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가족이야.”

“아, 네.”

경비대원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총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신분증이 없다고 그러셔서….”

“아니, 잘했어. 그런 건 철저히 해야지.”

수고했어. 짧게 칭찬한 뒤 제이는 시그니를 안고 먼저 정문 안으로 들어섰다. 수잔이 그 뒤를 따랐다. 조금 걷던 제이는 주변을 둘러본 뒤 한숨을 쉬며 수잔을 향해 말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수잔.”

여긴 왜 온 거냐고 묻자 수잔은 태연한 얼굴로 “산책”이라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앨런 때문에 온 거잖아요.”

“아니야. 정말 산책하러 온 거야. 그렇지, 시그니?”

수잔의 말에 시그니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잔….”

제이는 시그니를 안은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앨런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에요. 자칫하다간 모두 다 위험해진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놔둘 리가 없잖아.”

“수잔.”

당신 곧 있으면 환갑이에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제이는 하릴없이 한숨을 내쉬며 시그니를 고쳐 안았다.

- 시그니는 도대체 왜 데리고 온 거예요.

아이가 들을 수 없게 정신 감응 능력을 이용해 말을 걸었다.

- 혼자 놔두고 올 순 없잖아.

-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고 와도 됐잖아요.

“제이.”

진정해. 수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앨런을 어떻게 하려고 온 게 아니야. 그냥 어느 정도인지만 보려고 온 거야. 보면 대충 능력치가 감지되니까. 걔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야 대책을 세우든 뭘 하든 할 거 아니야.”

그리고, 하며 수잔은 조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걱정인 거야? 설마 내가 앨런에게 당할까 봐 그래? 뭣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덤비다가 걔한테 정체나 들키고 다칠까 봐? 이런 말하긴 미안한데, 제이. 너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다 내 덕분이야.”

내가 너 몇 번이나 구해줬냐? 웃음 섞인 수잔의 말에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하긴, 하고 중얼거렸다.

수잔의 말이 옳았다. 그녀를 상대로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블라스트 최고의 용병 중 한명이었으니까. 타고난 능력 자체도 엄청났지만 실전 경험도 자신의 몇 배로 많았다. 은퇴했다고 해서 단 몇 년 만에 그 실력이 녹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전에 시그니를 데리고 왔다는 건, 아이가 위험에 노출될 만한 상황은 애초에 만들 생각도 없었다는 뜻일 거고.

“미안해요.”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이해해. 말 안 하고 왔으니까.”

사실 너 모르게 잠깐 앨런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놈의 신분증 때문에. 수잔이 팔짱을 끼며 혀를 찼다.

“앨런은 왕궁에 없어요.”

“왕궁에 없다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사원에서 바로 퇴근했을 거라고 하자 수잔이 이런, 하며 혀를 찼다.

“타이밍 한번 더럽게 안 맞네.”

“그냥 온 김에 점심이나 먹….”

말하다 말고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리욘의 차가 막 정문을 통과하는 걸 봐 버린 까닭이었다. 이대로 쭉 왕궁 건물을 향해 달려간다면 아무런 상관없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는 제이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경호 차량도 함께 멈춰 섰다. 우르르 경호대원들이 먼저 내리고 그 중 한 명이 재빨리 달려와 리욘의 차 문을 열었다. 제이는 최대한 시그니의 얼굴을 자기 가슴에 묻게 했다. 하지만 그다지 소용은 없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나 했더니.”

리욘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는 제이의 품에 안긴 시그니를 보며 조금 씁쓸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곧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시그니.”

이름을 불리자마자 아이는 홱 고개를 돌려 리욘을 쳐다봤다. 그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제이가 말릴 틈도 없었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리욘은 약간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안간 시그니의 얼굴이 빨개졌다. 뭐가 그렇게 수줍은지 아이는 도로 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시그니를 보며 리욘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전에 한 번 봤지?”

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시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리욘이 더 뭐라고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망설이는 사이, 그의 뒤에 서 있던 경호대원들이 조심스레 한마디씩 던졌다.

“대위님 딸입니까?”

“이 아이가 그 아이예요?”

“생각보다 크네요. 한 서너 살 정도인 줄 알았는데.”

“이름이 뭐예요?”

제이가 “시그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아이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나 불렀어? 라고 하듯 제이를 올려다보는 그 모습에 여기저기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감탄사들이 터져 나왔다.

“뭐야? 대위님이랑 똑같이 생겼는데요?”

“야 인마, 그거야 당연하지.”

“아니, 이렇게 예쁜데 왜 그동안 한 번도 안 보여 주신 겁니까!”

제이는 자신이 집에서 출퇴근하는 이유를 일찌감치 대원들에게 밝혀 둔 상태였다. 혼자 딸을 키우고 있는데, 아이가 아직 어리다고. 요즘 세상에 미혼부가 드문 것도 아니어서 대원들은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가끔 아이 사진은 없느냐, 보고 싶다, 하고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제이는 한 번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가지고 다니는 성격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이의 입장일 뿐이었고 옆에서 보는 입장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휴대폰에조차 사진 한 장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 모르긴 해도 딸이 엄청 못생겼나 보다, 대위 얼굴을 보면 딸이 못생길 수가 없는데 여자가 얼마나 박색이었다는 걸까, 하고 자기들끼리 제법 쑥덕거린 눈치였다.

“아까워서 안 보여 줬던 겁니까? 아, 너무하십니다, 정말.”

“아니 그런데, 진짜 예쁩니다.”

“천사 같은데요. 아니, 요정 같아요.”

잔뜩 흥분한 경호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시커먼 곰 같은 사내들이 그렇게 에워싸고 있으면 어지간해선 무섭다고 칭얼거리며 숨을 텐데 시그니는 마냥 수줍은 듯 웃기만 할 뿐이었다. 블라스트의 훈련 센터에 있을 때부터 원체 시커먼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이는 데에 익숙해진 탓이었다. 게다가 그 아저씨들이 하도 예쁘다고 물고 빨아 대는 바람에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게 덩치 큰 어른 남자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시그니였다.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니 딱히 무서워 할 이유도 없었다. 아이는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제이의 품에 반쯤 얼굴을 묻은 채 헤헤 웃었다. 그러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수줍은 듯 웃으며 냅다 제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여기저기서 숨넘어가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시그니는 몇 살이지?”

그라이든이 흐물흐물 녹아버린 표정으로 물었다. 시그니는 제이의 품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말없이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다섯 살?”

“그것 밖에 안 됐어?”

“여섯 살은 된 줄 알았는데. 딱 미카엘 저하 또래로 보여서.”

로겐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제이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옆에 있던 푸벤이 시그니의 뺨을 톡톡 건드리다 말고 “어라?” 하며 소리쳤다.

“전하랑 눈동자 색이 똑같아.”

“그러네. 슬레이트 그레이(Slate-grey)네.”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대원들의 목소리에 제이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리욘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는 재빨리 옆에 서 있는 수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하. 이쪽은 제 친구 수잔입니다.”

아아, 하고 리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전에 빌라 앞에서 봤던 그분이신가?”

“네, 맞습니다.”

제이의 말에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잔에게 악수를 청하며 그가 말했다. 그 손을 마주 잡으며 수잔도 짧게 인사했다.

“수잔이에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같이 식사라도 하시죠.”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웃으며 말한 수잔은 제이의 품에 안긴 시그니를 자연스럽게 받아 안았다. 읏차, 하고 아이를 추어올려 안으며 그녀는 제이에게 말했다.

“먼저 갈게. 이따 보자.”

“아, 그래요.”

더 뭐라고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수잔은 그대로 휙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제이는 불안해졌다. 왜 저렇게 급하게 돌아가는 거지.

설마… 라고 생각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수잔의 목소리가 말했다.

- 리욘이 시그니 나이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어.

예상대로였다. 짐작했던 바임에도 불구하고 제이는 눈앞이 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

- 심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냥 혹시 나이를 속인 거 아닐까, 하는 정도니까 그냥 아니라고 하면 돼. 애 아빠가 자기일수도 있다거나, 뭐 그런 생각은 아직 안 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고.

제이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리욘을 바라봤다. 그는 아까부터 멀어지는 수잔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 무심하기 짝이 없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

잠깐 사이에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제이는 퍼뜩 눈을 떴다.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승강기를 빠져나왔다.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다 402, 숫자가 새겨진 현관문 앞에 멈춰 섰다. 번호 키를 누르기 위해 손을 들자마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래? 별말 없어, 오늘도?”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수잔이 물었다.

“전혀요.”

제이는 고개를 저으며 현관으로 들어섰다. 옥스퍼드화를 벗고 실내용 로퍼로 갈아 신는 제이에게 수잔이 재차 물었다.

“뭐 이상한 낌새도 없고?”

이번에도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단 말이지….”

“이제 그만 신경 써요.”

제이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일주일째 아무 말 없다는 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겠지?”

영 찝찝하단 표정을 지으며 수잔이 말했다. 이 정도면 시원하게 털어 버릴 법도 한데 벌써 일주일째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괜히 애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는 바람에 리욘에게 의심의 여지를 남겨 주게 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수잔의 입장에선 충분히 마음이 쓰일 만한 상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도 지난 일주일 간 노심초사하며 리욘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리욘은 그 후로 단 한 번도 시그니 이야길 꺼내지 않았다. 자신에겐 비밀로 한 채 뒷조사부터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사실 뒷조사를 해 봐야 나올 내용도 없었다. 병원 기록도 시그니의 출생 신고일에 맞춰 모두 바꿔 둔 상태였으니까. 아이 아빠에 대한 기록 같은 건 애초에 남아 있지도 않았고. 결국 자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 한 리욘이 새롭게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냥 마음 놓고 있어요.”

거실 소파에 앉으며 제이는 말했다. 사실 수잔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당부에 더 가까웠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 문제로 너무 골머리를 썩였다. 내내 바짝 긴장해서는 리욘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까지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오늘이 최고조였다. 혹 주말 사이에 뭘 알아내진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종일 긴장한 상태로 리욘의 뒤에 서 있었다. 덕분에 퇴근 시간 즈음부터는 머리가 지끈거려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안색도 좀 안 좋은 거 같고.”

스트레스 많이 받았나 봐? 미안해하며 묻는 수잔에게 제이는 이제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일주일동안 별말 없었던 거 보면 앞으로도 그럴 거 같으니까, 그냥 신경 안 쓰려고요.”

“그래. 뭐든 알아낼 거였으면 진작 알아냈겠지.”

이제 그냥 신경 끄자며 수잔이 한숨을 쉬었다. 그럴 거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입이 안 떨어졌다. 요 며칠간 리욘만큼이나, 아니, 리욘보다 더 제이를 심란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다!”

시그니였다.

“제이, 전하야! 전하 나왔어!”

시그니가 텔레비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리욘의 얼굴을 보며 제이는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래, 전하네.”

옆에서 수잔이 “또, 또.” 하며 혀를 찼다. 그야말로 또, 또, 였다.

일주일 전, 그러니까 수잔과 시그니가 왕궁에 다녀간 날 저녁이었다. 식사가 끝난 뒤 시그니는 언제나처럼 스케치북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수잔은 늘 그렇듯 뉴스 채널을 틀어 놓고는 시그니의 옆에 앉아 아이가 그리는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시그니가 수잔의 팔을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전하야, 수잔. 전하.”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하던 수잔은 곧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텔레비전 화면에 가득 리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제이는 크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방금 전에 본 사람이 떡하니 텔레비전에 나왔으니 아이 입장에서야 어지간히도 신기했겠지. 하지만 그 후로도 시그니는 뉴스에 리욘이 나왔다하면 “전하다, 전하!” 하며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최근에는 아예 집에 있을 때면 종일 텔레비전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수잔의 말에 제이는 심란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쬐끄만 게 벌써부터 얼굴을 밝힌다니까.”

복잡한 제이의 심경을 눈치챈 듯 수잔이 부러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이해는 간다. 평생 시커먼 것들만 보다가 처음으로 반짝반짝하는 거 봤으니 혹할 만도 하지. 하여간에 지도 기집애라고. 아주 웃겨.”

어떻게든 다른 핑계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수잔을 보며 제이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웃었다. 다소 표현이 투박하긴 하나 그녀 나름의 마음 씀이라고 생각하자 고마웠다.

“그런데 어린애들이 벌써 그런 걸 아나요.”

“말도 마. 카리나가 그러는데 애들이 서너 살만 돼도 예쁜 베이비시터 말을 더 잘 듣는대. 애들도 다 알아.”

하긴, 오히려 어린 아이들이기 때문에 더 솔직하게 반응하는 걸지도 몰랐다.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애초에 왜 눈치를 봐야하는 건지도 모를 테니까. 마치 지금의 시그니처럼.

“헤이, 이제 그만 봐.”

뚫어져라 화면 속의 리욘을 쳐다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인지 수잔이 텔레비전 화면을 온몸으로 가리며 말했다. 시그니는 비키라고 떼 부리는 대신 수잔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있잖아아.” 하고 말했다.

“나랑 눈동자 색이 똑같다고 했어.”

“아니야.”

수잔은 딱 잘라 말했다.

“네 눈동자 색이 훨씬 더 예뻐.”

수잔의 말에 시그니는 수줍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그러더니,

“정말?”

눈을 깜박이며 그렇게 묻는 아이를 수잔이 예뻐 죽겠다는 듯 와락 끌어안았다. 요 앙큼한 것. 수잔은 아이를 끌어안은 채 얼굴에 마구 키스를 퍼부어 댔다. 수잔의 품에 안겨 까르르 숨이 넘어가도록 웃는 아이를 제이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보고만 있어도 흐뭇해야할 모습인데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여전히 리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킬피르 대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그를 향해 국민들이 손을 흔들며 환호를 보냈다. 어린 아이 하나가 달려가 그에게 꽃을 건넸다. 꽃을 건네받은 리욘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참으로 상냥하고 다정한 미소였다.

***

“마지막으로 테스트한 게 언제라고 하셨죠?”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들여다보며 니나가 말했다.

“열흘 전입니다.”

“오늘이 8월 30일이니까… 8월 20일이면 셋째 주 금요일이고, 첫 관계 후 정확히 14일째니까, 맞네요.”

그럼 그 후로는 전혀 안 해 보셨나요? 니나의 물음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요?”

“아닐 걸 알았으니까요.”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네, 모르는 일이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런 건 어느 정도는 감이란 것도 작용한다고 생각해서요.”

적어도 시그니 때는 그랬다. 그 일이 있고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던가. 이상하게 며칠 내내 몸이 나른하고 피곤했다. 그래봤자 약한 몸살 기운 정도도 안 되는 수준이었건만 어째선지 병원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임신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는데도. 그런데도 막연한, 일종의 예감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텍사스행 비행기 티켓까지 다 끊어 두고, 출발하기 전날에야 시판 테스트기를 사서 테스트를 해 봤다. 5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는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몇십 초 만에 두 줄이 아주 선명하게 떠올랐으니까.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저 역시, 라고.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대위님, 혹시 스스로 운이 나쁜 편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야기를 듣던 니나가 말했다.

“글쎄요. 운이라는 건 원래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거라서.”

하지만 주변의 평은 대체로 운 좋은 녀석, 이라는 것 같았다. 특히 수잔은 자신만 보면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너는 운이 좋은 아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는 말도 아니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면 애초에 이런 몸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굳이 말하자면 악운에 강한 편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군요.”

“낙관적 비관론자군요.”

뭐, 좋아요. 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그럼 이왕이면 좋게 생각해 봐요, 우리. 임신이 안 돼서 다행이라고. 수술할 필요가 없어진 거잖아요.”

“그리고 적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없어진 거고요.”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글쎄. 그런 게 있을까.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생각했다. 지난번의 대화로 확실히 알았다. 앨런은 설득이 먹힐 타입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오래 살지 못할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리우지엔을 위해 희생하길 망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욱 마지막까지 그녀를 위해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런 사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제이는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가망도 없는 일에 매달려 언제까지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니란 걸 잘 알았지만….

“그럼 약을… 한 번만 더 먹어 보실래요?”

니나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더 먹는다고 효과가 있을까요.”

“모르죠. 하지만 그렇게 한 번에 다 되면 난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왜 있겠어요. 불임 센터는 왜 있고요.”

그래도 대위님은 불임은 아니잖아요.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며 니나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미리 챙겨 둔 약 한 통을 건네며 그녀는 말했다.

“혹시 모르는 거니까, 약 드시기 전에 테스트 한 번 더 해 보세요.”

“그러죠.”

건성으로 대답하며 제이는 약을 받아 들었다.

수트 주머니에 약을 넣고 진료실을 나섰다. 거의 동시에 맞은편 진료실의 문이 열리고 베아테가 나왔다. 미카엘의 손을 잡고 진료실을 나서던 그녀는 제이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

“당신이 여긴 어쩐 일이죠?”

미카엘의 이마에 작은 반창고가 붙어있는 걸로 봐선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주치의 진료실을 찾은 모양이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지나가려는 그를 붙잡으며 베아테가 다급한 목소리로 “제이!” 하고 외쳤다.

“설마 당신, 임신한 건 아니겠죠?”

그 와중에도 한껏 목소리를 낮춰가며 묻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와는 다르게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랬다가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묻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거 놓으십시오.”

“대답해요, 빨리.”

“놓으십시오.”

“대답하라고!”

그새 인내심이 바닥난 듯 베아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의료실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됐다. 그래 봤자 간호사들 몇 명이 다였지만 그들이라고 눈이 없고 귀가 없는 게 아니었다.

“결국 이러려고 돌아온 거였어?”

베아테는 아랑곳 않고 소리쳤다. 그런 모친과 제이를 번갈아 바라보는 미카엘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제이는 짧게 혀를 찼다.

“이거 놓,”

“나한테 명령하지 마.”

더러운 남창 주제에. 이를 갈 듯 말하는 베아테를 보며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웃음이 나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래진 안색으로 베아테가 말했다.

“그럼 울까요?”

베아테를 내려다보며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마음이 풀리겠습니까. 베아테 양.”

“제대로 예를 갖춰서 불러. 비전하라고.”

“비전하.”

베아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베아테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제이도 고개를 돌렸다.

“이쯤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앨런이었다.

“더 다그치셨다간 대위님이 아니라 저하께서 울 것 같습니다만.”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며 앨런이 말했다. 그제야 베아테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붙들린 미카엘을 내려다보았다. 앨런의 말대로 미카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아, 저하.”

미카엘의 앞에 멈춰선 앨런이 허리를 숙여 아이의 눈을 들여다봤다.

“어머니께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남창이니 뭐니 하는 추잡스러운 단어는 입에도 올리지 말아 달라고요.”

무척이나 상냥하고 다정한 말투였다. 그래서 더 위압감이 느껴졌다. 특히나 전에도 한 번 앨런에게 혼이 난 전적이 있는 미카엘로서는 오금이 저릴 정도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금세 울음을 터뜨리며 베아테의 뒤로 숨었다.

“왜 우는 거야!”

그만 그치지 못해? 베아테는 아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런다고 그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이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듯 베아테가 얼른 아이를 안아 들었다. 최대한 울음소리를 가리려는 듯, 억지로 가슴에 아이의 얼굴을 파묻게 하며 그녀는 앨런에게 말했다.

“고작 공작의 비서관 주제에 윗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명령이라니. 발데마르 공께서 그리 하라 이르던가요?”

“고작 공작의 비서관에게조차 이런 취급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계신 겁니다. 비전하께서.”

“뭐….”

베아테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뭔가 말하려는 그녀를 가로막으며 앨런이 낮은 목소리로 “알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상대방이 비전하께 예를 갖추길 원하신다면 그럴 만한 위엄을 보여 주십시오. 적어도 왕궁 안에서 이렇게 소란을 피우며 낯 뜨거운 언사를 입에 올리지는 마셔야 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저하께서 다 보고 듣고 계신데 말입니다.”

제 얘길 하는 걸 알았는지 미카엘이 끅끅거리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베아테는 품 안의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앨런을 노려봤다. 그리고 다시 옆에 선 제이에게 시선을 던진 그녀는 곧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 놓고선 잘났다고 떠들어 대는 꼴이라니.”

그 노골적인 혐오에 제이가 웃음을 흘리는 사이 앨런이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인종 차별적인 발언도 모두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하께서 뭘 배우시겠습니까.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앨런을 향해 베아테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 따위가 걱정할 문제 아니니 신경 꺼.”

레이시스트로서의 면모를 아낌없이 드러낸 뒤 그녀는 돌아섰다. 의료실을 나서는 베아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앨런이 말했다.

“여자의 질투라는 건 참 무섭죠? 자식 앞에서 저렇게까지 이성을 잃다니.”

안 그래요? 웃으며 묻는 앨런을 무시하고 제이는 빠른 걸음으로 의료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주머니에 들어 있던 약이 소리도 없이 주머니 밖으로 슥 빠져나왔다. 제이가 붙잡을 틈도 없이 허공으로 솟아오른 약은 뒤따라 나온 앨런의 손바닥 위로 사뿐히 내려 앉았다.

“배란 유도제라….”

상자 표면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앨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요.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던 거군요.”

그래서, 날 죽이려고요? 앨런이 웃으며 약을 흔들어 보였다. 그의 손에서 약을 빼앗으며 제이는 말했다.

“그럴까 했는데 관두려고.”

그대로 복도 창문을 열어 후원의 화단 위로 약을 던졌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앨런이 “잘 생각했어요.” 하고 웃었다.

“몸 망치면서까지 그럴 필요 뭐 있습니까. 그냥 리욘을 설득하세요.”

“네가 리우지엔을 설득하는 방법도 있지.”

“제이.”

앨런은 피곤한 얼굴로 창틀에 몸을 기댔다.

“의외로 답은 쉬워요. 당신이 너무 어렵게 돌아가려고 하는 것뿐이지. 그냥 리욘이 왕위를 포기하면 됩니다. 그럼 모두가 행복해져요. 당신도, 리욘도, 그리고 당신 딸까지도요.”

“나는 아니야.”

제이는 단호히 말했다.

“리우지엔이 원하는 걸 이뤄 주고 싶은 게 네 욕심이듯, 내게도 그 사람을 왕으로 만들어 주고 싶은 욕심이 있어.”

“그래서 남창 소리를 들어가면서까지 그의 곁에 있는 건가요? 배란 유도제를 복용하면서까지 임신하려고 애를 쓰고?”

거기까지 말한 뒤 앨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의 화단을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적당히 해요, 제이.

“사람이 원하는 걸 다 가지며 살 수는 없어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하나씩은 다 있죠. 대신 가장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거예요.”

리욘이 가장 원하는 게 왕위일까요? 앨런은 제이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하고 그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원하는 건 당신이에요. 설령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당신을 가질 수 있으면 그는 그걸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리욘을 가지는 걸로 만족하세요. 그럼 다 해결되는 거예요. 약을 먹어가면서까지 아이를 가지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해서 생긴 아이를 지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죠. 그런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요. 아, 물론 리욘을 보려고 하루 종일 뉴스만 들여다보고 있는 딸 때문에 심란해 할 필요도 없겠죠. 바로 옆에 아빠가 있는데 뭣 하러 텔레비전을 보고 있겠어요.”

“어이.”

작작 좀 읽지 그래. 제이가 혀를 차자 앨런은 미안해요, 하고 웃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잘 들리네요. 그 말은 당신이 그만큼 고민하고 있단 얘기겠죠. 물론 제 컨디션이 좋다는 얘기도 되겠지만요.”

“그럼 어차피 오늘은 못 죽이겠군.”

먼저 가지. 제이는 돌아서며 말했다.

“죽이지도 못할 거 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생각을 읽히는 것도 싫고요.”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큰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천천히 돌아보자 그때까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앨런과 눈이 마주쳤다.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얼마든지, 라고 하듯 앨런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다 있다고 했지.”

“그랬죠.”

“그럼 리우지엔은 뭘 포기하는 거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그녀는 왕위를 얻기 위해 무엇을 포기하기로 한 건지가 궁금한데.”

그녀만 잃는 것 하나 없이 모두 가진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건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앨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무척 쉬운 질문이라는 듯 그는 여유로운 어조로 답했다.

“그야 물론, 저겠죠.”

***

2층에 도착하자마자 제이는 후회했다. 조금만 더 천천히 올 것을. 경호대원들 사이를 온통 휘젓고 다니는 미카엘 때문에 복도가 난리도 아니었다.

“아, 대위님. 오셨습니까.”

싫다고 발버둥치는 아이를 붙잡아 억지로 목마를 태우며 로겐이 말했다. 미카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신이 나서 온 몸을 들썩이며 이랴 이랴! 소리쳤다. 제이는 대답 대신 반쯤 열린 문틈으로 비서실 안쪽을 들여다봤다. 에이나르가 보였다. 그는 바짝 긴장한 얼굴을 하고선 의미 없이 비서실 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제이는 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

에이나르가 작은 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 제이는 비서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비전하께서 오셨나보죠.”

“아, 네. 그런데 지금 좀, 분위기가….”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바라보며 에이나르가 말끝을 흐렸다. 안 들어 봐도 안에서 오가고 있을 이야기의 내용은 뻔했다. 바로 조금 전에 밑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그 길로 곧장 아이의 손을 붙잡고 이곳으로 달려온 거라면 베아테가 리욘에게 할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을 궁에서 내보내라는 이야기였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제이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쨌거나 이 상황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소문의 진원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도 집무실을 청소하는 이들일 것이다. 일전에 너무 피곤해서 리욘의 침대 위에서 깜박 그대로 잠이 든 적이 있었다. 의회 회의가 있던 날이었으니 아마도 지지난주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늘 그렇듯 청소 관리인은 왕세자가 회의에 참석하러 간 사이에 청소를 하러 들어왔다가 안쪽 방에서 자고 있는 알몸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을 가 버렸다. 안 그래도 벌써 며칠째 정액으로 엉망이 된 시트를 갈면서 도대체 누굴까, 이번엔 남자일까 여자일까 자기들끼리 어지간히도 입방아를 찧어댔을 터였다. 그런데 새로 부임해온 경호 중대 소속의 대위가 그 정액 투성이의 침대 위에서 알몸으로 자고 있는 걸 봤으니. 그녀 본인이야 이건 절대 비밀이라고 동료 한두 명에게만 말했을 뿐이겠지만 그 정도 이슈라면 온 왕궁 안에 소문이 퍼지기까지 이틀도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쪽이 아닐 수도 있었다. 전혀 의외의 곳에서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거니까. 책임도 함께 지는 게 옳았다. 하지만 지금 집무실로 들어가는 게 과연 리욘에게 득일까,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게 문제였다.

다행히도 고민의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고 베아테가 나온 것이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집무실을 나서던 그녀는 에이나르와 함께 있는 제이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대위.”

싸늘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어쨌거나 다른 비서실 직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왕세자비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 베아테가 아니라 리욘의 입장을 생각해서 제이는 고개를 숙였다.

“대위의 본분은 뭔가요?”

“전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어머, 그랬나요?”

난 또 전혀 다른 건 줄 알았네. 한껏 비아냥대는 베아테의 말투에 에이나르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제이를 눈치를 살폈다. 물론 제이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리욘의 비서들이 보고 있다고 나름 점잖게 말하는구나, 그나마 다행인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게 본분이라면 본분에 맞게 행동하세요. 괜한 추문으로 전하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 따위 없게 하란 말입니다.”

“…명심하겠,”

습니다, 라는 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제이.”

사람들 앞에서 이름으로 불린 건 처음이었다. 제이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커다란 손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대로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다시피 하며 리욘이 말했다.

“의료실에 다녀왔다고?”

왜, 어디가 안 좋아서. 한껏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당황한 나머지 “아, 그게.” 하고 더듬거렸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요.”

“그래?”

리욘은 직접 손으로 제이의 이마를 짚어 열을 재기 시작했다.

“확실히 뜨겁긴 하군.”

“아뇨, 그 정도는…. 그보다 전하.”

좀 놔 주시지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굳이 베아테 앞에서 이런다는 건 일부러, 라는 거였으니까. 대위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숨기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숨길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고.

베아테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더욱 그녀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리욘의 비서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한 셈이니. 이제 이 사람들 앞에서는 명목상의 왕세자비 노릇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리욘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내가 한 말 듣기는 한 건가요, 대위?”

분노한 기색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베아테는 외쳤다. 그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왕세자비로서 제이에게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권리 행사였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걸 그냥 두고 보고 있을 리욘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마치 베아테가 그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야말로 조금 전에 내가 한 말 알아듣기는 한 거야?”

리욘의 말에 베아테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떨리는 두 손을 꼭 쥔 채 새빨갛게 핏발선 눈으로 리욘을 노려볼 뿐이었다. 분노와 수치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리욘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쐐기를 박을 생각인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경고야, 베아테.

“한 번만 더 주제넘는 짓 하면 그때는 허울뿐인 왕세자비 자리마저도 빼앗기게 될 거야. 명심해.”

그리고 제이, 너도. 리욘은 곧바로 자신의 품에 안긴 제이에게도 말했다.

“다시는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고개 숙이는 일 없도록 해.”

예상도 못했던 명령에 제이는 “네…?” 하고 되물었다.

“말 그대로야. 다시는 이 왕궁 안에서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마. 그게 왕세자비건, 왕자건 누구건 간에 말이야.”

“…….”

“대답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리욘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이는 시선을 반쯤 내린 채 대답했다. “좋아.” 흡족한 듯 웃은 리욘이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말했다.

“두통에 잘 듣는 약을 주지.”

따라오도록. 짧게 말한 뒤 그는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 사양하기엔 온몸에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나 따가웠다.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리욘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베아테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앨런과 많이 친해진 모양이더군.”

자신의 책상을 향해 걸어가며 리욘이 말했다.

“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이 상황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멍하니 리욘을 바라보던 제이는 설마,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설마가 아니다. 지금 이 타이밍에 이런 얘기를 꺼낸다면 이유는 뻔했다.

“비전하께서 뭐라고 하신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베아테라고 불러.”

책상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며 리욘이 말했다.

“얘기했잖아. 너까지 왕세자비 취급해 줄 필요 없어. 너는 안 그래도 돼.”

너는 안 그래도 된다니. 차마 겁이 나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마디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며 제이는 다시 말을 이었다.

“베아테 양이 뭐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다 의료실에서 마주친 것뿐입니다. 그것도 베아테 양과 제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 앨런이 온 거라….”

이야기하다 말고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꼭 치정 싸움에 휘말린 것 같지 않은가. 물론 그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튼 생각하시는 그런 관계는 아닙니다.”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만 말하고 말았다.

“내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하는 줄 알고?”

“뭐든 말입니다.”

뭐라고 생각하건 간에 리욘은 틀릴 수밖에 없었다.

리욘은 의자에 앉은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 다시 길게 내뱉으며 그가 말했다.

“둘 다 같은 한국계였지?”

“네.”

“그럼 아무래도 좀 더 친밀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을 거고.”

“아무래도, 그런 게 없지는 않겠죠.”

제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앨런이 제노스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는 자신도 충분히 그런 감정을 느꼈으니까.

“그렇군.”

담뱃재를 털며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뭐가 아니라는 거냐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건 간에, 그건 아니라고요.”

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알겠어.”

“표정을 보니 전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담배는 갑자기 왜 피우시는 겁니까. 제이의 말에 리욘이 손에 쥐고 있던 담배를 들어 보였다.

“이거?”

“네.”

리욘은 웃으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대며 그는 제이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이쪽으로 와 봐.”

제이는 조금 망설인 끝에 시키는 대로 했다. 책상 가까이 다가가서 멈춰 서자 리욘이 “좀 더 가까이.” 라고 말했다.

제이는 딱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더 가까이 와 봐.”

또 한 걸음.

“좀 더.”

또 한 걸음 다가가자마자 손목을 붙잡혔다. 그대로 확 끌어당기는 바람에 제이는 어쩔 수 없이 리욘의 무릎 위에 앉게 됐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전개에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전하… 하고 말했다.

“방금 전에 비전하… 아니, 베아테 양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괜한 추문으로 전하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일은 없게 하라고.”

“내가 내 경호원을 아낀다는 게 추문이 되나?”

“어떤 식으로 아끼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래? 그럼 이런 식은 괜찮은 건가.”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리욘이 어때?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제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제이의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니면, 이런 건?”

“하지 마십시오.”

재빨리 리욘의 손을 붙잡으며 제이는 말했다.

“왜?”

“왜라니요.”

밖에 사람들 있습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말하면서도 참 궁색한 핑계라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는 없었던 것처럼 말하는군.”

가소롭다는 듯 웃는 리욘에게 제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항상 있었다. 그야 리욘의 비서들이고 경호원들이었으니까. 어떠한 상황에서건 리욘이 오롯이 혼자인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는 거였고.

“왠지 갑자기 의식이 되기 시작해서요.”

“한 달 내내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갑자기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넌 아냐. 여전히 웃으며 리욘은 말했다.

“이런 부분에선 묘하게 리버럴하다고 해야 하나. 과감하다는 말도 안 어울려. 말 그대로 남의 시선 따윈 신경도 안 쓴다는 느낌이라.”

제이는 적잖이 놀랐다. 리욘이 정확히 본 까닭이었다. 자신은 한 번도 이런 문제로 남의 눈을 의식한 적이 없었다. 아니, 의식하고 신경 써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자신에게 있어 생식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늘 공유되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의사들에게 관계 횟수나 방식에 대해 설명도 해야 했다. 항상 임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모든 행위들이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다.

센터에서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랬다. 늘 남들이 보는 앞에서만 섹스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섹스도 아닌 성적 학대일 뿐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원래 이런 건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해야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다들 서로가 보는 앞에서 하고, 보여 주고, 보여졌다.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표정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저 녀석들이 끝나고 나면 내 차례겠군.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리욘은 싫어할 게 분명했다. 새삼스러운 혐오감에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른다. 그게 자신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자신이 처했던 상황에 대한 혐오라고 해도 싫은 건 마찬가지다. 분명 가슴이 아플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이는 살짝 눈을 내리깐 채 웃었다.

“조신한 타입은 아니라서요.”

“잘됐군.”

나도 그런데. 능청스럽게 말하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하긴, 하고 생각했다. 이 방면으로는 리욘도 할 말이 없긴 매한가지였다. 학생 때부터 아주 요란하게 놀았던 사람이니까. 그때야말로 스스로 평판을 깎아내리기 위해 부러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던 거지만 그런 속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쨌거나 왕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리욘의 사생활은 난잡함 그 자체일 뿐이니까. 이제 와 고작 집무실에서 경호원과 섹스한 정도로는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그 경호원이 같은 사관학교 출신의 신임 대위라는 사실은 조금 흥미롭겠지만, 그래 봤자였다. 겨우 그 정도를 추문이라고 하기에는 리욘의 전적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만하시죠.”

제이는 자신의 허벅지 안쪽으로 향하는 리욘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근무 시간 중에 이러는 건 역시 내키지가 않았다. 어떤 이유로든 리욘의 일에 지장을 주는 건 싫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늘 그의 공식적인 스케줄이 모두 끝난 뒤에야 개인적인 시간을 갖곤 했다. 그 전엔 가급적이면 단 둘인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기도 했고.

“그러니까 왜.”

리욘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봤자 내가 괜찮으니 그냥 하자, 는 말이 나올 게 뻔했다. 게다가 그는 벌써 반쯤 발기한 상태였다. 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제이는 달래듯 리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입으로 해 드릴게요.”

리욘은 꽤 놀란 눈치였다. 입으로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제이가 자진해서 하겠다고 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리욘의 성기가 너무 커서 조금만 입에 물고 있어도 턱이 아파 꺼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또 우쭐할 게 분명했다. 제이는 말없이 리욘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 사이 완전히 발기한 페니스 때문에 지퍼를 여는 것조차 힘들었다. 겨우 지퍼를 내리고 속옷 안의 그것을 꺼내려는데 리욘이 “잠시만” 하고 몸을 숙였다. 그는 제이의 가슴 포켓 안에 들어 있던 출입증을 밖으로 꺼냈다.

“흠, 제법 괜찮은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리욘에게 제이는 약간 당황해서 “이게 뭡니까?” 하고 물었다.

“모처럼 책상 앞이니까. 보스와 비서라는 느낌으로.”

“고작 이걸로요?”

제이는 자신의 목에 걸린 출입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거면 충분해.”

표정을 보니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참 별스럽다고 생각하며 제이는 속옷 안에서 리욘의 성기를 꺼냈다. 기다렸다는 듯 불쑥 튀어나와 꺼떡거리는 걸 보자 벌써 턱이 아려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먼저 말을 꺼낸 건 본인인 것을.

제이는 단단하게 발기한 리욘의 페니스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기둥 부분을 붙잡고 먼저 귀두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런 자신을 보며 리욘이 귀엽다는 듯 웃는 게 느껴졌다.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주제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조금 얄밉기도 하고 도리어 사랑스럽기도 해서 제이는 당초의 다짐보다 더욱 정성스레 그의 것을 빨기 시작했다.

목구멍 안쪽에까지 닿을 정도로 크게 물고 입안 전체를 이용해서 세게 빨다가 막대 사탕을 핥듯이 소리 내어 혀로 기둥을 핥기도 했다. 이로 아프지 않게 표면을 긁기도 하고, 혀끝으로 구멍을 간질이기도 했다. 흘러나오는 프리컴을 삼킬 땐 일부러 츕,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빨아들였다. 그럴 때마다 리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로지 그를 만족시켜 주기 위해 시작한 행위일 뿐인데, 열중하다 보니 어째서인지 본인이 더 고양되기 시작했다. 성적 흥분과는 조금 달랐다. 그저 리욘이 기분 좋아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에 마음이 들떴을 뿐이었다.

혀를 넓게 펴서 귀두를 감싸듯이 한 채 느리게 핥아 올리자 리욘이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제이는 다시 한 번 안쪽까지 깊숙이 남자의 성기를 삼켰다. 세게 빨아들일 때마다 성기 끝이 목구멍을 찔러댔다.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삼키며 제이는 정성껏 남자의 페니스를 빨았다. 곧 표면의 굵은 혈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정의 전조임을 깨달은 제이가 더욱 깊숙이 그것을 삼키려는 찰나 리욘이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당연히 입안에다 사정할 거라고 생각했던 제이는 의아한 시선으로 리욘을 올려다봤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보며 웃더니 그의 하얀 뺨에 자신의 성기를 갖다 댔다. 다음 순간 끈적한 것이 얼굴에 뿌려졌다. 속눈썹에까지 튀어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박거리는 사이 하얀 뺨을 타고 흘러내린 정액이 툭, 허벅지 위에 떨어졌다. 곧바로 투둑, 하고 또 한 덩어리의 정액이 흘러내렸다. 이번엔 목에 걸린 출입증 위로 떨어졌다. 코팅된 종이 위로 주르륵 미끄러지는 자신의 정액을 보며 리욘이 말했다.

“그건 새로 발급받아야겠군.”

그는 책상 위의 티슈를 뽑아 제이에게 건넸다. 제이가 얼굴에 묻은 정액을 닦아내는 사이 리욘은 속옷과 바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느슨해진 넥타이까지 바로 맸다. 그리고 얼굴을 씻기 위해 일어서는 제이를 붙잡아 다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전하….”

제이는 지친 목소리로 리욘을 불렀다. 이어질 말을 알았는지 리욘이 먼저 “아니, 안 한다니까.” 하고 웃었다.

“그렇게 피곤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겠어.”

“모두 전하 덕분입니다.”

“그래. 만족스럽다니 다행이군.”

전혀 딴소리로 받아치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말했다.

“두통은 좀 어때.”

아직도 아픈가? 걱정하는 목소리에 제이는 아뇨, 하고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애초에 심하지도 않았고요.”

“열은 있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입안도 평소보다 더 뜨거웠던 것 같아. 리욘의 말에 제이는 기가 차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십니까.” 하고 웃었다.

“아니, 정말이야.”

리욘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앞머리를 쓸어 주던 손을 거두며 리욘이 말했다.

“내일까지 안 나와도 되니 푹 쉬도록 해. 그리고 모레 에이나르와 함께 발데마르 가에 다녀오도록.”

“모레면, 금요일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날 앨런이 발데마르 성을 받기로 돼 있어.”

아. 제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날이구나.

“일단 축하 서신은 보내야 하니까.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아도 수석 비서관 정도는 가 줘야 그쪽에서도 만족하겠지. 수석 비서관이 가는데 경호대원 하나 안 따라간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이왕이면 친분 있는 네가 가서 축하해주는 게 모양새도 낫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을 거기까지 보낼 리가 없다. 그렇게까지 앨런을 생각해 줄 사람도 아니었고. 아니나 다를까, 더러워진 출입증을 벗겨 내며 리욘이 말했다.

“그리고 간 김에 발데마르 가 장남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와. 특별한 위험 요소가 없으면 하루라도 빨리 그 녀석이 공작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해야 하니까.”

역시 그런 거였군.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하며 제이는 몸을 일으켰다. 벗겨낸 출입증을 책상 밑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리욘이 말했다.

“이건 재발급 받도록 해.”

***

거창하게 성을 받는 날, 이라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정해진 식순에 따라 행사를 치를 일도 아니었고 그저 앨런의 출생 증명서에 기재된 원래 성 Choi 위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오늘 날짜와 더불어 새로운 성인 Valdemar가 기재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아마 오늘 오전 무렵, 성실한 시청 직원의 안내 하에 5분도 안 되어 처리가 끝났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걸로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겠지만, 에시르 최고의 명문가라 불리는 발데마르 가이다 보니 한 가지가 더 남아있었다. 자그마치 책 세 권 분량에 달하는 발데마르 가의 족보(Family Genealogy)에 앨런의 이름을 올리는 일이었다.

에이나르는 왕세자의 대리인 자격으로 그 장엄한 의식에 참관하게 되었다. 발데마르 가의 족보는 그 이름값에 걸맞게 최고급 벨럼지로 만들어져 보관되고 있었다. 발데마르 공작은 얇게 펼쳐진 양가죽 위에 깃펜으로 앨런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오늘을 위해 그는 무려 세 군데 도시를 돌며 수십 마리의 백조를 살펴봤다고 했다. 앨런의 이름을 새겨 넣을, 가장 완벽한 깃펜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북유럽 신화에서 백조는 발퀴리의 현신으로 묘사된다. 발퀴리는 전투에서 승리자를 예정하는 오딘의 뜻을 받들어 가장 용맹한 자를 골라내는 역할을 수행했다. 발데마르 공작은 자신의 아들이 발퀴리가 고른 예정된 승리자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헨릭 니칸델 발데마르라는 자신의 이름 밑에, 자신의 뒤를 이어 새 왕조를 이끌어갈 그 이름을 적어 넣었다. 앨런 퀴리노 발데마르. 퀴리노는 발데마르 공작이 직접 정해 준 앨런의 세례명이었다.

세례명 하나조차도 직접 골라 줄 정도로 앨런에게 쏟아 붓는 그의 정성은 참으로 극진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욱 이 자리가 고역인 제이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가짜 아들을 위해 저토록 온 정성을 기울이는 미래의 반역자라니.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었다.

마침내 앨런의 이름이 발데마르라는 성과 함께 가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펜을 내려놓은 발데마르 공작은 자신의 아들을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간 마음고생 많았다는 듯 발데마르 공작은 눈물을 흘리며 앨런의 등을 토닥이는 동안 제이는 입술을 깨문 채 바닥을 내려다봤다. 와중에 찔끔거리며 함께 눈물을 훔쳐 내는 에이나르 때문에 더욱 힘이 들었다.

에이나르는 얼른 눈물을 닦고 왕세자의 축하 서신을 낭독했다. 발데마르 공작은 에이나르가 읊어 대는 문장 한 줄, 한 줄마다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전하께서 직접 오시지 않은 거냐고 볼멘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수석 비서관의 행차가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제이는 축하 서신 낭독이 끝나자마자 에이나르를 붙잡고 연행하듯 자신의 서재로 데려가는 발데마르의 뒷모습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왕세자의 협조를 얻어 내어 앨런에게 공작위를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면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은 왕세자 본인보다는 차라리 그의 비서를 먼저 어르는 편이 나았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전하를 설득해 보라고 회유할 작정인 것이다.

차라리 잘된 셈이었다. 제이는 서재로 끌려가는 에이나르를 못 본 척 먼저 거실로 나왔다. 그가 발데마르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임무를 수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찾는 사람은 지금 이 집 안에 없어요.”

발데마르의 장남, 루트의 방을 찾기 위해 복도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이었다. 제이는 뒤를 돌아봤다.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은 채 앨런이 웃고 있었다.

“일주일 전부터 나가서 들어오고 있지 않아요. 첫째도 둘째도.”

“발데마르의 부인은?”

“부인이 데리고 나간 겁니다.”

제이는 혀를 찼다.

“합의가 제대로 안 됐나 보지.”

“될 리가 없죠. 양쪽 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요.”

하긴, 어느 쪽으로든 이미 합의가 된 거라면 발데마르가 굳이 에이나르를 구슬리기 위해 애를 쓸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다들 끝까지 포기란 걸 모르는군.”

“우리도 그렇잖아요.”

그래. 우리도 포함해서. 낮게 중얼거리며 제이는 발데마르의 서재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안쪽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발데마르는 특유의 화법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듯싶었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다시 거실로 나왔다. 어쨌거나 에이나르의 경호원이라는 명목으로 동행을 했으니, 이제 와 먼저 돌아갈 수도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하나. 너무 넓어서 마치 홀 같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고민하자니 앨런이 말했다.

“집 안 구경이라도 시켜드려요?”

“내가 이 집을 구경해서 뭐하게.”

제이는 무심히 말했다.

“그냥 있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됐어.”

피곤해. 짧게 말하며 제이는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평소보다 안색이 안 좋은 것 같군요.”

“신경 꺼.”

“리욘도 참, 자기가 그렇다고 남들도 다 체력이 넘쳐나는 줄 알죠.”

“그러니까, 신경 끄라고.”

아니면 읽지를 말든가. 제이는 혀를 차며 말했다.

“미안해요. 노력해 볼게요.”

앨런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그 말을 믿으면 바보였다. 차라리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듯했다. 제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그럼 언제쯤 돌아오는 거지? 루트는?”

“글쎄요. 공작위 건에 대한 합의가 마무리되기 전까진 안 돌아오지 않을까요.”

“합의가 가능하긴 한 건가?”

“합의를 빙자한 일방적 양보는 가능하겠죠. 그래서 공작이 왕세자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저렇게 용을 쓰는 거고요.”

결국 열쇠를 쥐고 있는 건 리욘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리욘도 그리 쉽게 공작 부인의 편을 들진 못할 것이다. 공작 부인의 편을 들어 루트에게 공작위를 물려준다는 건, 결국 발데마르에게 정면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건 너무 위험했다. 당분간은 이 동맹을 지켜 나갈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본인이 나서지 않는 선에서, 루트가 공작위를 이어받도록 해야만 했다.

“루트는 어떤 인물이지?”

“지금 제게서 루트에 대한 정보를 얻어 가겠다는 겁니까?”

앨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안 될 게 뭐있어. 어차피 진짜 앨런 최도 아니면서.”

“그렇긴 하지만 어쨌거나 공작위를 받아 두면 일이 쉬워지니까요.”

무슨 일? 이라고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 해 봤자 온통 리우지엔을 돕는 것뿐일 테니.

“됐으니까 말해 봐. 루트는 어때, 야심가야?”

“전혀요.”

애초에 야망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에요. 앨런은 고개를 저었다.

“공작위에도 그렇게 큰 욕심이 없고요. 그냥 공작 부인이 그렇게 휘둘러 대니 휘둘리며 끌려 다니는 것뿐이죠. 루트는 앨런이 공작위를 이어받는 게 가문에 더 도움이 되는 거라면 그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에요.”

“그래? 의왼데.”

제이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하며 말했다.

“친동생이 아니라 이복동생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이야?”

“성격 자체가 그렇습니다. 모진 편은 못 돼요. 오히려 앨런에 대해 약간의 부채감이라고 해야 할까… 쉽게 말하면 같은 핏줄인데도 타지에서 힘들게 살아온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더군요. 그래서 병이 들었다고 믿고 있어요.”

아마 동생이라 더 그런 거겠죠. 앨런은 심상한 투로 말했다.

“당장 차남인 필렌은 앨런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까요.”

“필렌이 앨런보다 어렸던가?”

“올해로 서른넷이니까요. 앨런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죠.”

그렇구나. 제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같은 혼외자식이라고 해도 상대가 내 형이냐, 동생이냐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뭐?”

“동생 말입니다.”

동생이라 더 그리운 게 아닐까요. 앨런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나보다 어린 존재라면 더 애틋한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니까요. 형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글쎄.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만약에 형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식의 가정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할 필요도 없었고. 왜냐하면 동생은 처음부터 동생이었으니까. 그건 자신이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그렇게 정해진 거였다.

“목소리요?”

“그래.”

제이는 살짝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배 속에 있을 때, 어머니 목소리를 들었어.”

마치 새가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작고 가녀린 목소리로 모친은 아직 배 속에 있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빨리 나와, 아가야. 너무 보고 싶다─라고.

“그리고 태어난 뒤에도 분명히 들었고.”

아마도 태어난 직후였을 것이다. 눈이 초록색이야. 너무 예뻐. 제이드(Jade)라고 부를래. 여전히 새가 지저귀듯 작은 목소리로, 모친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렇게 말했으니까.

“죽은 사람이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적어도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살아있었다는 얘기겠지.”

“그렇군요. 그럼 확실히 제이가 형일 수밖에 없겠네요.”

앨런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을 만나면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나요?”

물어오는 말에 제이는 별로, 하고 고개를 저었다.

“딱히 그런 건 없어.”

“그럼 왜 만나고 싶은 거죠?”

앨런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만나고 싶으니까 만나고 싶은 거지.”

자기가 말하면서도 참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다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만나고 싶으니까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먼저 물어볼 생각은 없고. 얼굴을 보여 주기 싫다면 안 보여 줘도 돼. 그냥… 살아있다는 것만 알면 되니까.”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의 동생이, 혈육이란 존재가 이 땅 위에 두 발 딛고 서서 분명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딸이 태어나기 전까진 나한테 피가 이어진 존재라곤 동생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앨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곧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목이 좀 마르군요. 뭔가 마시겠습니까?”

“사양하지.”

“독 같은 건 안 타요.”

말했잖아요, 그런 번거로운 짓은 안 한다고. 어깨를 으쓱이는 앨런에게 제이는 됐어, 하고 혀를 찼다.

“네가 주는 걸 마셨다간 체할 거야.”

앨런은 그런 제이를 보며 웃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느린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가는 찰나였다.

- 태내 기억(Memory of Mother’s Womb)이라는 건가. 하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니까.

문득 들려 온 목소리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뭐지?

아니, 뭔지는 알고 있었다. 앨런의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그의 머릿속 생각의 목소리겠지만. 뭐라고 표현하든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게 절대 자신에게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라는 사실이었다. 들릴 수가 없었다. 앨런은 칩을 차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들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물론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뇌가 멋대로 꾸며낸 환청 같은 거라면, 그래,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혹시 몰라서 당신 것도 준비했어요.”

마셔요. 테이블 위에 라임수 병을 내려놓으며 앨런이 말했다.

“아니, 사양할게.”

제이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은 안 탔다니까요.”

웃으며 말한 앨런은 제이의 앞에 놓인 병을 도로 집어 들었다. 마개를 열고는 보란 듯이 그것을 들이켰다. 제이는 그런 앨런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사이 반 병을 비운 앨런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어때요? 라는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제이드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해.

확실하다. 이건 앨런의 목소리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제이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앨런의 손목을 확인했다. 예외 없이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이는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아랫배로 향했다. 임신한 게 틀림없었다. 이 배 속에, 아이가 있는 것이다.

“아이…라니요?”

소파에 몸을 내리다 말고 앨런이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찌푸리던 그는 이내 굳은 얼굴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의 동시에 제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호도, 먼저 공격할 마음은 없었다. 우선은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앨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퍽!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아아아아악!”

앨런이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 시뻘건 피가 마구 솟구쳤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어떻게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 자신의 짓이었으니까.

맹세코, 맹세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애초에 공격할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앨런이 도망치려는 듯 몸을 돌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의 심장의 위치를 찾고 말았다. 아니, 그건 본능이라기보다는 거의 기계적 반응에 가까웠다. 그나마 앨런이 차고 있는 칩이 컨트롤을 방해해 조준이 빗나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앨….”

떨리는 목소리로 앨런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제이는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는 걸 느꼈다. 다음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덮쳐왔다. 꽝, 꽝! 연이은 굉음과 함께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사방이 무너져 내렸다. 아니, 무너져 내린 건 자신이었다. 쿵. 무거운 소리와 함께 제이는 바닥 위로 쓰러졌다. 앨런이 자신을 벽으로 내던졌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이명으로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머리가 심하게 울렸다. 굉음의 정체는 자신의 머리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다리 사이로 뭔가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 끔찍한 감각만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생생했다.

몇 번인가 눈을 깜박이는 사이 희미하게 시야가 트였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다시 천천히 닫히기 시작하는 시계 너머로 피투성이의 앨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 제이는 생각했다.

끝이구나.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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