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의 복약 지도는 매우 간단했다.
“하루에 한 알씩 드시면 돼요. 이왕이면 일정한 시간대에 복용하면 더 좋고요.”
뒷말은 거의 모든 의사, 약사들이 약을 처방해 줄 때 하는 말이었다. 물론 제이는 그 말을 지킨 적이 거의 없었다. 병원에 여러 번 오가기 귀찮아 일주일, 열흘 치 약을 한꺼번에 처방받아서는 늘 하루 이틀 정도 먹다가 방치해 버리곤 하던 그였다. 시간에 맞춰 약을 챙겨 먹는다는 건 입원하지 않은 다음에야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매일 저녁 9시에 정확히 시간을 지켜 약을 먹었다. 기상 후에는 항상 첫 소변으로 테스트를 했다. 테스트 선이 대조 선과 색이 같아지거나 더 짙어지면 배란이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보통 나흘째부터 테스트 선이 짙어져 닷새째면 확실히 대조 선보다 진해진다고 했지만 그건 월경 주기를 정확히 알고 배란 예정일에 맞춰 약을 먹은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제이의 경우 눈에 보이는 월경 증상이란 게 없는 몸이다 보니 당연히 본인의 배란일 같은 걸 알 리가 없었다. 텍사스에 있을 때는 블라스트 소속의 의사들이 알아서 챙겨 주고 체크해 줬지만 여기선 그런 걸 해 줄 사람도 없었다. 무작정 먹다 보면 색이 진해지겠거니, 하고 일단 약부터 먹었다. 다행히도 8월 첫째 주 목요일에 테스트 선이 진하게 나타났다. 약을 복용한 지 정확히 8일째 되던 날의 아침이었다.
내일이면 아마 테스트 선이 더 진해지겠지.
다행이란 생각과 동시에 어딘가 착잡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제이는 테스트기를 휴지통에 버린 뒤 손을 씻고 욕실을 나섰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주방 식탁 앞에 서 있던 수잔과 눈이 마주쳤다.
“멍청이.”
머그잔에 커피를 따르며 수잔은 짧게 한 마디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그랬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었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을 텐데. 마주칠 때마다 싸늘한 얼굴로 저렇게 한 마디씩 툭 던지고 가 버리니 오히려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이는 주방으로 가 수잔의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수잔.”
그대로 거실로 향하려던 수잔은 제이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 웃더니 탕, 소리가 나도록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게 네 말처럼 쉬울 것 같아?”
아니. 절대 아니야. 수잔은 고개를 저었다.
“넌 이번에 앨런을 죽여도, 십년 후에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서 리욘을 위협하면 또 이럴 거야. 내가 장담해.”
“안 그래요. 맹세할게요.”
“아니, 넌 그럴 거야.”
단호한 말투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본인보다 더 확신에 차서 말하는 수잔도 그랬지만, 그녀의 말에 제대로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양새가 웃겨서 그저 맥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어차피 연구소에선 다들 밥 먹듯이 하던 건데, 뭐. 제이는 부러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했다.
“블라스트에서도 할 사람들은 다 했고요. 나도 두 번이나 시도했었어요. 실패해서 그렇지.”
너 말 잘했다는 듯 수잔이 “그래!” 하고 외쳤다.
“그래서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넌 운을 타고난 거라고. 운 좋아서 그런 일 당하기 전에 연구소 망했고, 운 좋아서 블라스트에서 했던 인공 수정 시술도 두 번 다 실패했어.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데 굳이 자기가 나서서 그 꼴을 겪겠다고 하니 내가 기가 차, 안 차?”
애써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수잔이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슈퍼 프로바이더였던 수잔은 IART에 있는 동안 모두 네 명의 아이를 낳았다. 사산아까지 포함하면 일곱 명이었고, 총 임신 횟수를 헤아리자면 두 손으로도 모자랄 정도였다. 낳자마자 얼굴도 못 보고 헤어져야 했던 자신의 아이들이 생각나서였을까. 수잔은 팀원들 중에서도 유독 제이를 아꼈다. 그런 마음을 드러내기가 쑥스러워 유독 험상궂은 말투로 그를 다그치고 혼내던 그녀였으나 제이가 다치거나 위험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잠도 자지 않고 지켜볼 정도로 그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러니 남자에게 강간당해 생긴 아이를 제이가 낳겠다고 했을 때, 절연이란 단어까지 입에 올려가며 수술을 종용한 것도 그녀의 입장에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네 몸을 못 망가뜨려서 안달이야? 애 낳는 게 쉬워? 절대 아니라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낳을 생각 없어요. 일 끝나면 바로 지울 거예요.”
“그것도 몸에 안 좋긴 마찬가지야. 그리고, 네가 그 자식 애를 지울 수 있을 거 같아? 시그니 때도 못 했는데 이번엔 지울 수 있을 거 같냐고!”
“그래도 그렇게 해야죠.”
제이는 수잔의 눈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수잔은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더니 이내 바짝 독이 오른 목소리로 “좋아.” 하고 말했다.
“정 네 고집대로 하겠다면, 차라리 그 자식 말고 다른 남자 애를 가져. 그럼 앨런 처리하는 대로 수술 받겠다는 말, 믿어 줄게. 아니면 아예 정자 은행에 가든가. 인공 수정 시술 받으면 되잖아?”
“수잔, 내가 인공 수정 시술을 받으려면 텍사스까지 가야 해요.”
“그래? 그래도 다른 남자 애를 가져.”
수잔의 말에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그럴게요.” 하고 대답했다. 수잔의 얼굴이 더욱 굳었다. 말없이 제이를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미치겠네.” 하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었다. 그리고,
“너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기어이? 울분에 차서 묻는 수잔에게 제이는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 “그냥,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려는 거예요.” 하고 말했다.
“진짜 임신이 될지 말지도 모르는 거고요. 알잖아요. 시그니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케이스였다는 거.”
“그래. 시그니 때는 임신이 된 게 기적이었어. 그땐 배란 유도제고 뭐고 먹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며칠째 그 잘난 약까지 먹어가면서 아주 임신하려고 작정을 하고 있잖아. 너 이제 겨우 서른셋이고, 그 자식은 스물여섯이야. 임신이 안 되면 그거야말로 기적이겠지.”
수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방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제이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그니가 침대에 앉아 울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잠에서 깼다가 고함 중에 자기 이름이 들리자 덜컥 겁이 나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었다.
“왜 울어? 꿈 꿨어?”
제이는 부러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시그니를 안아 들었다. 울면서 제이의 목에 매달리던 시그니는 뒤늦게 방으로 따라 들어온 수잔을 보더니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싸우지 마, 제이한테 화내지 마아….”
제 입으로 말하기도 서러운지 말하다 말고 꺽꺽 숨이 넘어가게 울기 시작하는 시그니를 보고는 수잔이 기가 찬다는 듯 “얼씨구?” 하고 웃었다.
“피붙이라고 편드는 거 봐.”
쬐끄만 게. 중얼거리는 수잔의 목소리에는 서운해 하는 마음보다 대견스러워하는 마음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 와중에도 아이가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웃고 있는 수잔을 보자 더욱 그녀에게 미안해지는 제이였다. 그는 시그니의 등을 토닥이며 “싸우는 거 아냐.” 하고 말했다.
“수잔이 날 너무 좋아해서 걱정하느라 그러는 거야.”
제이의 말에 시그니가 훌쩍거리며 왜…? 하고 물었다.
“왜 걱정해…? 제이 어디 아파?”
“곧 아플 예정이란다.”
잔뜩 비꼬며 말하는 수잔에게 제이는 “수잔, 제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애한테 안 해도 되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너야말로 애한테 말 못 할 짓은 하지 마.”
짧게 내뱉은 뒤 수잔은 아이의 방을 나갔다. 금세 또 험악해진 분위기에 겨우 울음을 그쳐가던 시그니가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괜찮아. 별일 아니야. 울지 마.”
아이의 등을 쓸어 주며 제이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반복했다. 그래, 정말 별일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러니까 울지 마….
***
“오늘이 약 복용한 지 며칠째 되는 날이죠?”
검사지에 기록된 호르몬 수치들을 확인하며 니나가 물었다.
“9일째 되는 날입니다.”
“9일째라. 오전에 테스트기 사용했을 때 확실히 테스트선이 더 진하게 나왔다고 했죠? 그리고 지금 황체 형성 호르몬 수치가 평소의 14배 정도로 나오니까….”
맞네요. 니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늘부터 내일, 내일 모레까지. 이 사흘 안에 관계를 가져야 해요. 확률을 높이려면 사흘 내내 갖는 게 좋겠죠.”
“…….”
“대위님?”
니나의 부름에 제이는 네, 하고 대답했다.
“제 이야기 들으셨죠?”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세요.”
혹 내키지 않아서 그러는 거라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니나에게 제이는 아뇨, 하고 고개를 저었다.
“내키지 않는다기보다는.”
“내키지 않는다기보다는요?”
“그냥… 이게 정말 되기는 할까란 생각이 들어서요.”
니나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아,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제이는 하릴없이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꽤 오랜 시간 망설인 끝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런 말하긴 뭣하지만 닥터, 난 열네 살 때부터 남자와 잤어요.”
“조숙했군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니나에게 제이는 글쎄요, 하고 웃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한 거라. 그냥 해야 한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한 거죠.”
니나의 표정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다면 연구소 안에서 벌어진 참상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까. 물론 연구소 폐쇄 후 삼백여 명의 아동 청소년들이 옮겨간 애틀랜타의 보호 시설과, 그 안에서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학대에 대해서도.
“어릴 때 이야깁니다. 그리고 난 열다섯 살에 그곳을 나왔으니 그렇게 심한 꼴을 당할 겨를도 없었고요. 그 후로는 내가 남자와 자고 싶어서 잔거니까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제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최대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보려는 그의 노력을 받아 주기로 한 듯 니나도 금세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말했다.
“그 말은 즉, 남자와 자고 싶으면 얼마든지 잘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단 소리군요.”
하긴, 대위님은 딱 봐도 인기 많았을 것 같아요. 니나의 말에 제이는 피식 웃으며 글쎄요, 했다.
“그리고 용병대에선 그런 거 의미 없어요.”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제로 별 게 아니긴 했다. 그냥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상대에게 말을 걸고, 거절하지 않으면 그대로 적당한 곳을 찾아 관계를 가지곤 했으니까.
그리고 제이는 어지간해서는 거절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컨디션이 별로일 때나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웬만해선 수락했다. 특히 상대를 가려서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욕구 해소는 해야만 했고, 그런 거라면 혼자 하는 것보단 둘이 하는 게 낫지 않느냐는 주의였으니까.
“음, 이를테면 테니스 게임 같은 거군요. 쉬는 시간에는 테니스를 한 게임씩 해야만 했는데 단식보다는 복식이 더 취향에 맞았단 거죠?”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고 싶었는지 니나가 테니스 게임을 예로 들며 이야기했다. 나름 적절한 비유였던지라 제이는 그렇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어차피 자주 하는 게임이니 그때그때 파트너 고르는 문제로 굳이 까다롭게 굴 필요도 없고요.”
“그렇겠네요. 그냥 이번 한 게임 가볍게 즐기고 끝내면 그만이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그 테니스 게임은 제이가 블라스트 소속이 된 이후 아이슬란드로 휴가를 떠나기 전까지 거의 십 년간 계속 되었다.
“그런데 저는 그동안 한 번도 임신을 한 적이 없어요. 콘돔을 사용하건 사용하지 않건 말이죠.”
심지어 인공 수정 시술도 두 번이나 받았지만 두 번 다 실패했다고 하자 니나는 “하지만 딸이 있잖아요?”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딸은 어떻게 갖게 된 거죠?”
제이는 잠시 망설인 끝에 말했다.
“혹시 공포 배란이라는 거 압니까?”
“공포 배란이라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니나에게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간이었거든요.”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배란일이 아닌데도 배란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뜻하는 말이었다. 종족 번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몸의 작용으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성행위의 임신 확률이 통상 3.1% 인데 반해 강간 임신 확률은 6.4%나 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공포 배란이라…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니나는 이내 미간을 좁히며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원래 몇 년씩 난임 치료 받던 부인들이 첫애 낳고 일 년, 이 년 사이로 둘째 셋째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그러니까, 몸이 바뀌는 거죠. 대위님도 아이를 갖고 낳는 과정에서 어떻게 몸이 바뀌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니까… 일단은 해 보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안 되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더라도요.”
“다른 방법이라는 게 있긴 한가요?”
“간단하게는 약의 종류를 바꿔 보는 방법도 있고… 아, 과배란 주사도 있네요. 아무래도 경구용 약에 비해선 효과가 더 확실한 편이죠. 몸에 부담은 더 주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니나는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이윽고 제이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대위님. 정말 아이를 지우실 건가요?”
“…….”
대답하지 않는 제이를 보며 니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위님, 전 사실 잘 모르겠어요. 물론 에시르는 낙태 합법 국가고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선 무조건 임산부의 선택을 따르고 존중해 줘야 한다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초에 지울 걸 염두에 두고 아이를 갖는다는 건, 그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괴롭다는 듯 말하는 니나를 향해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많이 이상합니까?”
묻자마자 터무니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질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하긴, 이상하겠죠.”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는 바로 사과했다.
“내가 살아온 곳에선 이게 당연한 거라서요.”
오히려 연구소에선 아이를 제대로 낳는 경우가 더 드물었다. 처음부터 2세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유전자를 조합하여 계획적으로 임신시킨 경우가 아닌 다음에는 단순한 연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원하던 연구 결과를 얻고 나면 당연히 수술을 시키는 게 수순이었다. 블라스트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능력치 측정을 위해서, 혹은 단순히 임신 가능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인공 수정 시술 받기를 권유했었다. 거절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블라스트에 모인 제노스들은 대부분 자신의 능력치를 끌어올려 몸값을 올리고 싶어 했기 때문에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제이의 경우엔 그때 이미 제노사이드 중에서도 가장 몸값이 높은 부류에 속해 있었지만 자신의 임신 가능 여부가 궁금했기 때문에 시술을 받기로 했었다. 물론 해도 안 될 걸 알았기 때문에 큰 고민 없이 수락을 한 것도 있었다.
그런 동네다보니, 누구든 아이를 그대로 낳겠다고 하는 이가 있으면 오히려 별종 취급을 받았다. 도대체 왜? 뭣 때문에? 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왔다.
“무슨 이야긴지는 알겠어요, 대위님.”
하지만 여긴 블라스트가 아니에요. 니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IART도 아니고요.”
“그렇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다가도 가끔 이렇게 한 번씩 뼈저리게 느끼곤 했다. 결국 이 세계에서 자신들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음을.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당연히 지울 생각이었습니다. 애초에 그걸 전제로 이 방법을 떠올렸던 거니까요.”
하지만 며칠간 약을 먹으며 고민하다 보니 막상 아이를 갖게 되면 그렇게 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시그니 때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어제 수잔이 말한 대로 차라리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질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그럼 결정이 조금이라도 쉬워질 테니까.
“정말 쉬울까요?”
니나는 회의적인 반응이었다.
“대위님.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냉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적어도 내가 봤을 땐 그래요.”
“이런 상황에선 칭찬이 아닌데요, 그건.”
제이는 힘없이 웃었다.
“내가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이에요.”
별로 기분 좋으라고 하는 소리도 아니라며 니나는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어차피 대위님이 결정할 문제지만… 난 그래요, 대위님. 당신이 최대한 덜 후회할 수 있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어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니나의 표정은 진심이었다.
***
의료실을 나온 제이는 곧장 2층으로 향했다. 2층에 도착하자마자 비서실이 아닌 경호원 대기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고 미리 말해 둔 참이었다. 일찍 퇴근이라고 해도 벌써 저녁 일곱 시였다. 8시가 조금 안 돼 출근했으니 못해도 11시간은 채우고 가는 셈이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었다. 오늘 집에 들르지 않을 생각으로 미리 챙겨온 옷들이었다. 그래봤자 늘 입던 대로 블랙진에 티셔츠, 그 위에 재킷이었다. 마지막으로 칩이 내장된 시계를 손목에 찬 뒤 대기실을 나섰다. 특별할 것도 없는 옷차림인데도 늘 정장 차림만 보다 처음으로 사복 입은 걸 봐서인지 복도에 서 있던 경호대원들이 일제히 호들갑을 떨었다.
“대위님, 오늘 뭔가 느낌이 다르십니다?”
“약속 있으십니까?”
“설마 데이트는 아니겠죠!”
제이는 아우성치는 대원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인 뒤 비서실 앞에 서 있는 그라이든 중사에게 다가갔다. 오늘 자정까지의 일정을 확인하고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있는데 벌컥 문이 열리고 비서실 직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이 모두 나오자 마지막에 느긋한 걸음으로 에이나르와 리욘이 걸어 나왔다. 제이는 에이나르에게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 오랜만에 비서실 직원들 회식하기로 했습니다. 전하께서 저녁 사 주겠다고 하셨거든요.”
싱글벙글 웃으며 에이나르가 말했다. 예정에 없던 스케줄에도 경호대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대열을 갖춰 출발 준비를 마쳤다.
“대위는? 퇴근인가?”
움직이지 않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말했다.
“네. 오늘은 일찍 들어가 보겠다고 미리부터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군. 사복 차림, 오랜만인데.”
리욘의 말에 푸벤이 뒤에서 “데이트 있으시답니다!” 하고 외쳤다. 몇몇 대원들이 웃음 섞인 환호를 보내는 사이 리욘이 “그래?” 하며 제이를 향해 물었다.
“일찍 퇴근한다는 게 데이트 때문이었나?”
“아닙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일찍 마친 김에 지하철이나 타고 갈까 해서 갈아입은 겁니다. 아무래도 정장 입고 타기는 좀 불편해서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짧게 인사한 뒤 그는 돌아섰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며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웃겼다. 본인 스스로가. 그냥 그렇게 알도록 내버려 두면 될 것을,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런 거짓말까지 해 가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한 건지. 어차피 흔한 농담 중에 하나였고 리욘도 그렇게 생각하며 흘려 넘겼을 텐데.
뭣 때문에, 라고 했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농이라도 싫었던 거다. 그의 앞에서 그런 식으로 다른 남자, 혹은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다루어지는 게.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리욘이 떠올리는 게 싫었다. 그의 상상일 뿐이라고 해도 그런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게 웃겼던 거다. 그 가소롭기 짝이 없는 자신의 마음이. 이제 곧 그의 상상보다 더한 행위를 할 거면서. 이름도 모르는 남자 앞에 다리를 벌리고 누워 갖은 음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애원할 거면서. 리욘에게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들을 잔뜩 할 거면서.
“…….”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안 좋았다. 하지만 고작 이런 이유로 힘들게 만들어 낸 기회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 순 없었다. 제이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왕궁 정문을 빠져나가자마자 광장 부근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클루비 거리로 가주십시오.”
뒷좌석에 올라 문을 닫으며 말했다. 택시는 곧장 광장을 벗어나 도로로 진입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의 끔찍한 정체를 견뎌낸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스바르트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유흥가답게 길 양쪽으로 라이브 바와 펍, 클럽과 모텔 등이 즐비해 있었다. 미리 알아 두었던 바로 향하며 제이는 생각했다. 그게 누구건 간에,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과 함께 나가자고.
행인지 불행인지 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옆에 앉아도 돼?”
제이는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금발에 파란 눈. 전형적인 북유럽 사내였다.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니즈?”
바로 옆자리에 앉으며 남자가 말했다.
“아마도.”
“이름이 뭐지?”
제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추이(翠)라고 부르면 돼.”
“추이? 무슨 뜻이지?”
“뜻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제이가 웃으며 말하자 남자도 멋쩍은 듯 따라 웃으며 그건 그래, 했다. 기세 좋게 말을 걸어온 데에 비해 약간 숫기가 부족한 성격 같았다. 그냥 내버려뒀다간 언제 본론을 꺼내올지 몰랐다. 제이는 바텐더가 건네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자마자 남자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는 남자에게 살며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갈래?”
제이가 먼저 제의를 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놀란 듯 입을 벌리더니 이내 신이 나서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
택시가 왕궁 앞 광장에 멈춰 섰다.
“잔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제이는 언제나처럼 잔돈을 받지 않은 채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자동차의 바퀴 소리를 들으며 왕궁 정문으로 향했다. 이제 얼굴을 익힌 경비대원들은 제이가 왕궁 출입증을 꺼내기도 전에 총을 바로 세우며 경례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는 왕궁 안으로 들어섰다.
사위는 여전히 대낮처럼 밝은데 정원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종일 물줄기를 뿜어 대던 분수도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고요한 정원을 가로질러 왕궁 건물로 향하며 제이는 생각했다. 이 시간이면 아마 퇴근을 했을 거라고. 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관성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으니까.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한 건 왕궁 건물 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기척은 분명히 느껴졌다. 이 시간까지 왕궁 안에 있을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마, 라고 생각하며 제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는 순간 설마 하는 마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복도 곳곳에 경호대원들이 서 있었다. 리욘이 아직 집무실에 있다는 뜻이었다.
“대위님?”
비서실 앞에 서 있던 그라이든은 제이를 보자마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쩐 일이십니까. 이 시간에 다시 오시다니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제이가 말하자 그라이든이 어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술 드셨습니까?”
제이는 대답 대신 웃으며 비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 있던 에이나르 역시 놀란 얼굴로 제이! 하고 외쳤다.
“웬일이에요? 아까 퇴근했잖아요.”
“일이 좀 있어서요.”
안에 계십니까? 집무실 쪽을 가리키며 묻자 에이나르가 “아, 전하께 볼일이 있는 건가요?” 하더니 잠시만요, 하고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제이는 그 사이 자기가 먼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연히 서류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리욘은 책을 읽고 있었다.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두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무표정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던 그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뭐야.”
아마 에이나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제이는 집무실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독서 중이셨습니까.”
그제야 리욘이 시선을 들어 문 앞에 선 방문객의 얼굴을 확인했다. 제이를 본 그의 반응은 그라이든과 에이나르와는 사뭇 달랐다. 딱히 놀란 표정을 짓지도, 그렇다고 해서 당연하다는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할 뿐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냥요.”
집무실 안쪽으로 걸어가며 제이는 말했다.
“그냥 근처를 지나다가… 아직 계실 것 같아서 한번 들러 봤습니다.”
“왕궁 근처를 그냥 지날 일이 있었다고?”
이 시간에? 리욘은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곧 읽고 있던 책을 덮어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설마 진짜 데이트가 있었던 건 아니겠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려 하지만 표정이 굳는 건 어쩔 수가 없는 듯했다.
“불발됐어요.”
애초에 데이트도 뭣도 아니었지만.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그럼 헌팅이었나.”
“비슷합니다.”
“남자, 아니면 여자?”
“어차피 불발됐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소파에 앉으며 말하자 리욘이 “그래도” 하고 답을 재촉한다.
“남자였습니다.”
“그래. 그런데 자네 술 마셨나?”
“조금요.”
아니, 조금은 아닌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제이는 생각했다. 두 시간 동안 혼자서 계속 마셨으니 조금은 아닐 거다. 맥주와 보드카를 번갈아 마셨고 마지막엔 브렌빈도 반 병 정도 마셨다.
“그렇게 입고 있으니 꼭 7년 전 그때 같군.”
그래, 그 브렌빈이 문제였다. 브렌빈만 아니었어도 이렇게까지 취기가 오르진 않았을 텐데.
“그렇습니까.”
한숨처럼 말하자 그때까지도 책상에 발을 올리고 있던 리욘이 자세를 바로 하고 앉으며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헌팅을 하러 간 이유가 뭐야.”
“남자가 헌팅하러 갈 땐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습니까.”
“명쾌하군.”
리욘이 의자 팔걸이에 팔을 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네게도 그런 욕구 정도는 있을 테니까.”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거리는 리욘에게 제이는 글쎄요, 하고 웃었다.
“욕구가 있는 정도가 아닐 텐데요.”
“그렇겠지.”
리욘이 놀랍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7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 쪽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묘하게 여유로운 태도였거든. 그래서 눈치챘지. 엄청 놀았던 인간이구나 하고.”
“전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한 적은 없잖아.”
안 그래? 퉁명스레 말하더니 다시 책상 위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래서, 굳이 여기로 다시 온 이유는 뭐지?”
“글쎄요. 뭘까요.”
제이는 소파에 몸을 묻은 채 웃었다.
“날 열 받게 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달성했다는 걸 알려 주지.”
더 있으면 강간해버릴지도 몰라. 책을 펼치며 리욘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강간은 안 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안 할 거야. 그러니 이만 돌아가지, 그래.”
“전하.”
제이는 소파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했다. 그 바람에 살짝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그는 리욘을 향해 말했다.
“지금이라면 뭘 어떻게 해도 화간입니다.”
“그렇겠지. 헌팅 나갔다 차이고 돌아왔으니 지금은 상대가 누구든 욕구만 충족시켜 준다면 감사하겠지.”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리욘이 말했다.
“차이고 온 건지 차고 온 건지는 모르시지 않습니까.”
책장을 넘기던 리욘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제이를 쳐다봤다. 그래서, 어느 쪽이지? 그렇게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금발이었습니다.”
제이는 자신의 뒷목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헌팅했던 남자?”
“네.”
“별로 놀랍지 않군.”
“그렇죠.”
“그런데?”
리욘이 책을 덮으며 물었다.
“그런데… 머릿결이 너무 별로였어요.”
“머릿결?”
“네. 조금 거친 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저분해 보이더군요. 자세히 보니 색도 약간 어두운 금발에 가까웠고요.”
전하처럼 예쁜 금발이 아니었습니다. 제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머리카락처럼 반짝이지도 않았고요.”
“그리고?”
그리고… 제이는 중얼거리며 또 다른 이유를 떠올리려 애썼다.
“저는 사실 파란 눈동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컨디션이 별로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미안할 짓 했군.”
리욘의 말에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숙였다.
“많이 미안했습니다. 굉장히 기대하는 눈치였거든요.”
그래서, 하고 리욘이 의자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말했다.
“설마 나한테도 미안할 짓을 하려고 온 건 아니겠지.”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웃었다. 그리고 곧 몸을 일으켜 리욘에게 다가갔다. 허락도 없이 멋대로 왕세자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곧 리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왜.”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느냐는 뜻이었다.
“신기해서요.”
“뭐가.”
제이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리욘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꼭 태양 빛을 녹여서 만든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뗀 사이, 도로 태양 빛에 녹아 사라질까 봐. 반짝이는 머리카락도, 반짝이는 아이도.
“…….”
리욘은 말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제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제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손바닥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입술보다 먼저 따뜻한 숨이 손바닥을 간질였다. 이어 부드러운 입술이 손바닥 가운데를 지그시 눌렀다. 여전히 리욘의 시선은 제이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천천히 입술을 미끄러뜨리기 시작했다. 손목에 리욘의 입술이 닿는 순간 제이는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입술과 함께 그의 이가 닿은 까닭이었다. 아프지 않게 깨문 뒤 리욘은 입술을 뗐다. 그리고 더욱 세게 제이의 손목을 붙잡으며 그대로 확 끌어당겼다. 제이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듯 리욘의 품에 안겼다. 자신이 남자의 허벅지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그 남자가 입을 맞추어 왔다. 제이는 두 손으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을 열고, 그의 뜨거운 혀를 받아들였다.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혀를 얽어가며 넘쳐흐르는 타액을 삼켰다. 그의 고른 치열을 훑고 입술도 깨물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응하는 제이가 신기한 듯 리욘은 키스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입술을 떨어뜨리며 웃었다. 그때마다 제이는 리욘의 뺨을 감싸 쥐고 자신이 먼저 입술을 겹쳤다.
어느 순간 자신의 엉덩이 아래 남자의 성기가 단단히 팽창한 게 느껴졌다. 제이도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뗐다. 한창 키스 중에 고개를 숙인 채 곤란하다는 얼굴로 웃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왜? 하고 물었다.
“젖었어요.”
리욘은 금방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애액을 흘리는 경우는 본 적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자신의 품에 안긴 이가 제노스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도 제이가 한 말의 뜻을 알아차린 듯했다. 곧장 바지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축축해진 속옷 안으로 파고드는 리욘의 손길을 느끼며 제이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군.”
젖은 구멍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리욘이 말했다.
“제법 흥건한데. 원래 잘 젖는 편인가?”
그런 편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겨우 키스만으로 이렇게 속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젖은 건 처음이었다. 상대가 상대라서인지, 아니면 아이를 낳고 몸 자체가 이렇게 변해 버린 탓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라고 해도 리욘 때문인 건 마찬가지였지만.
“미끌거려.”
신기하다는 듯 리욘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애액인데 이거.”
“그럼 가짜겠습니까.”
리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피식 웃던 제이는 곧 자신의 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의 손가락에 미간을 좁히며 신음했다. 젖은 내부가 뜨겁게 수축하며 남자의 손가락을 조였다. 직장의 주름이 꿈틀거리며 그의 손가락에 달라붙는 게 고스란히 느껴져 제이는 살짝 귀가 뜨거워졌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리욘이 손가락을 빼냈다. 그대로 바지의 버클을 풀려는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제이는 약간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여기서 말입니까?”
리욘이 소파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건 좀, 하고 제이는 웃었다.
“우리 둘이 눕기엔 많이 좁아 보이는데요.”
“그럼 안으로 들어가지.”
제이는 먼저 몸을 일으키는 걸로 동의의 뜻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집무실 안쪽의, 세면실과 나란히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리욘이 업무 도중에 잠깐씩 눈을 붙일 수 있도록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침대와 취침 등 하나만 배치해 둔 공간이었다. 침대는 다행히 더블 사이즈였다. 그렇다고 해도 간이 침대라 성인 남자 둘이 올라가 격렬하게 흔들어 대기엔 다소 무리가 따를 것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제이는 재킷과 티셔츠를 먼저 벗었다. 바지와 속옷도 벗어 바닥에 떨어뜨리자 그제야 왼쪽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발견한 리욘이 “그건 뭐지?” 하고 물었다.
“칩이죠.”
“알아. 왜 그걸 네가 차고 있느냐고.”
“만약의 불상사에 대비하는 거죠.”
혹시 나도 모르게 힘쓰게 되면 안 되니까. 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은 섹스 도중에 상대방의 머릿속 생각들이 고스란히 흘러 들어오는 게 싫어서 착용하는 거였지만, 왠지 그렇게 말하는 건 리욘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 대충 둘러댔다.
“아주 배려심이 넘치시는군.”
“저야 늘 그렇죠.”
농담처럼 말하며 제이는 시계를 풀었다. 지금은 어차피 리욘이 시계를 차고 있으니 상관없었다. 벗어둔 옷 위에 내려놓고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리욘은 넥타이만 푼 뒤 침대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엄청난 몸이군.”
상처투성이의 몸을 보고 리욘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때도 놀랐는데.”
그때, 라는 건 아마 비크에서 처음 만났던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제이는 침대에 누워 한쪽 무릎을 세우며 웃었다.
“절 남창으로 착각하셨죠.”
리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느냐고, 그는 표정만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으로 본 거랑 전혀 다른 얼굴이긴 했어.”
잘못 온 거라고 생각했지. 제이의 위로 몸을 겹치며 리욘이 말했다.
“사실 그럴 땐 돌려보내는 게 맞아. 돌려보내고, 내가 부른 사람으로 보내 달라고 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리욘은 그러지 않았다. 뻔히 잘못 온 사람이란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사진과는 다르게 생겼다는 말만 하고선 곧장 제이를 침대로 끌어 들였다.
“왜 그러셨습니까?”
제이의 물음에 리욘이 미소 지었다. 한 손으로 뺨을 감싸 쥐고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가 말했다.
“잘못 온 쪽이 훨씬 더 내 취향이었거든.”
그리고 다시 깊게 입을 맞춰 오는 남자를, 제이는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고 함께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서로에게 수없이 많은 키스를 퍼부었다. 코에도, 그리고 뺨에도. 제이가 리욘의 넓은 등을 어루만지는 동안 리욘은 제이의 허벅지 안쪽을 쓰다듬었다. 제이가 흘린 액으로 그의 음부는 물론 회음까지도 온통 미끈거릴 만큼 젖어있었다.
“신기해.”
아까부터 축축하게 젖어 혼자 숨 쉬듯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는 제이의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으며 리욘이 말했다.
“남잔데 이렇게 젖다니.”
“편리하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리욘이 인상을 찌푸렸다. 제이는 시선을 내리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과도 하지 마.”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려다 그냥 웃고 말았다. 아마 그게 정답인 듯했다. 리욘이 입을 맞추며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고작 손가락 한 개가 늘었을 뿐인데 벌써 숨이 가빠오기 시작한 건, 버거워서가 아니었다. 아래는 이미 충분히 풀려 있었고, 젖어 있었다. 애를 태우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이제 그만 제대로 된 걸 넣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하….”
제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리욘을 올려다봤다. 다행히 리욘도 더는 여유부릴 겨를이 없는 눈치였다. 그가 바지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리자마자 아까부터 잔뜩 발기해있던 페니스가 속옷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리욘은 속옷을 끌어내린 뒤 커다랗게 부풀어 위아래로 꺼떡거리고 있는 자신의 물건을 움켜쥐었다.
제이는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컸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엄청난 크기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도, 그런데도 눈앞에 드러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려질 정도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툭툭 불거진 혈관들은 왜 이리 두꺼운지. 너무 성급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제이는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쉽도록 다리를 크게 벌렸다. 다행히 리욘도 흉기 수준인 자신의 페니스 크기를 잘 알고 있는지 제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천천히 넣을게. 힘들면 말하고.”
그 말과 동시에 다리 사이에 뜨거운 열기가 확 느껴졌다. 잔뜩 젖어 혼자 뻐끔거리고 있던 구멍이 외부의 힘에 의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음….”
어지간하면 소리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이 억지로 열어 젖혀지며 그곳으로 뜨끈한 것이 빠듯하게 들어찼다. 배 속이 뜨거웠다. 꼭 불덩이를 아래로 삼킨 것만 같았다.
다행히 제일 굵은 귀두 부분을 다 삼키고 나니 나머지는 금방이었다. 마치 몸 안쪽에서 빨아들이기라도 한 듯 쑥, 매끄럽게 밀고 들어왔다. 드디어, 라는 생각에 한 숨 놓기도 전에 곧장 리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이는 놀라서 전하, 하고 외쳤다.
“전하, 잠시만… 잠시만 움직이지 말아 주, 앗, 전하, 그만.”
팔뚝을 붙잡으며 말하자 그제야 리욘이 허리를 멈추며 “아, 미안.” 하고 말했다. 표정을 보니 그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본능적으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힘들어?”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리욘이 말했다. 조금요. 제이는 기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라서요.”
“그럼 잠깐 빼 볼까?”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대로 빼버리면 이따 다시 넣었을 때 똑같이 힘들 게 분명했다. 차라리 넣은 상태로 몸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나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참을 수 있겠느냐고 묻자 리욘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제이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키스하며 조금씩 입술을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마침내 유두가 그의 입술에 닿았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던 듯, 리욘은 제이의 젖꼭지를 입에 물고는 빨기 시작했다. 턱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제이는 리욘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신음했다.
“예쁜데.”
유두 모양. 물고 있던 젖꼭지를 뱉어 내며 리욘이 말했다. 손끝으로 몇 번 만지작거리자 금세 단단해져 발갛게 부풀었다.
“옷 입고 있을 땐 몰랐는데 유두가 약간 큰 편이었군.”
아이를 낳으면서 그렇게 됐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리욘은 반대쪽 가슴도 애무하기 시작했다.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유두를 혀끝으로 툭툭 건드리더니 곧 입에 물고 잘근대기 시작했다. 혀로 뭉근하게 눌러 비볐다가 다시 쪽 소리가 나도록 빨았다. 자극이 주어질 때마다 정수리가 저릿해지며 몸속으로 물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면 예외 없이 남자의 성기를 물고 있는 아래가 더 흠뻑 젖어 들었다.
“전하, 이제….”
제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움직일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배 속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던 게 쑥 하고 빠져나갔다. 귀두가 구멍에 걸릴 정도로 잡아 뺐다가 그대로 다시 천천히 밀어 넣는다. 다행히 그 사이 몸이 어느 정도 남자의 물건에 적응했는지 아까처럼 마냥 버겁지는 않았다. 여전히 빠듯하게 들어 차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움직임이 훨씬 부드러웠다. 경직됐던 몸이 조금씩 이완되며 낯선 듯 익숙한 감각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전하, 아… 전하, 잠시만요.”
리욘의 등을 끌어안은 채 제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중얼거렸다. 그 잠시만이 잠시만 멈춰 보라는 뜻이 아님을 잘 아는 리욘은 제이가 그 소릴 할 때마다 더욱 깊숙하게 밀어 올렸다. 성기가 워낙에 크고 굵다 보니 한 번씩 그렇게 찔러 올릴 때마다 자궁에까지 닿는 느낌이었다. 두려운 마음보다 견디기 힘든 자극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전하, 전하, 더 세게… 아읏, 전하.”
헐떡이며 제이는 더욱 넓게 다리를 벌렸다. 다리를 벌리면 벌리는 만큼 더욱 깊이 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푹, 안쪽을 찔릴 때마다 온몸이 기뻐하며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남자의 성기에 잔뜩 짓이겨지고 들쑤셔질수록 몸은 달게 익어 어딜 건드려도 울음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때마다 리욘의 성기를 감싼 내부가 꿈틀거리며 그를 옥좼다.
“제기랄.”
리욘이 미간을 좁히며 짧게 내뱉었다. 그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제이의 뺨에 닿았다. 그것조차도 견딜 수 없는 자극이 되었다.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으며 제이는 소리를 질렀다.
“전하, 전… 아, 거기, 는, 읏, 으응!”
여기? 하며 리욘이 입구에서 가까운 곳을 쿡 찔렀다.
“아악!”
제이의 턱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전하, 으읏, 전하….”
“이름으로 불러.”
“그만, 거기는 이제, 전하, 그만…!”
“리욘이라고.”
제이는 헐떡이며 고개를 저었다. 와중에도 완강한 제이를 보며 리욘이 웃었다. 푸욱, 소리가 날 정도로 깊이 찔러 넣고는 뭉근하게 비비듯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뭉툭한 귀두가 안쪽을 문질러댈 때마다 제이는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매달리듯 리욘의 등을 끌어안은 채 어떻게든 이 자극을 견디기 위해 그와 함께 허리를 움직였다. 그때마다 발기한 페니스가 리욘의 아랫배에 문질러졌다.
“아, 헉… 전하.”
리욘을 끌어안은 채 제이는 사정했다. 그의 와이셔츠를 더럽혔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리욘은 제이의 목덜미를 짓씹듯이 물고 빨아 대면서도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제이는 죽을 것만 같았다. 사정 직후의 기분 좋은 나른함과 배 속을 들쑤셔지는 강렬한 쾌감이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잇새로 잔뜩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인이 듣기에도 낯 뜨거울 정도로 완벽한 교성이었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지만 참아지지가 않았다. 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났다. 애액과 프리컴과 정액으로 엉망이 된 다리 사이에서는 질퍽거리다 못해 철퍽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어질 정도로 추잡하고 음란한 그 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다시 발기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제법 훌륭한데.”
금세 힘을 받은 제이의 성기를 만져 주며 리욘이 말했다. 리욘에게 그런 칭찬을 받아 봤자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것도 많이 써 봤나?”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리욘이 흠, 하고 웃더니 제이의 뺨에 키스했다. 그렇게 자세를 낮춘 상태로 빠르게, 얕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시 제이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거기, 는… 전하, 잠, 앗, 전하, 하지 마, 응, 하지 마세요, 전하, 으응, 전하… 전하!”
대놓고 약한 곳만 찔러 대는데 너무 느껴서 괴로울 지경이었다. 속수무책으로 주어지는 쾌감에 눈앞이 하얘지는 걸 느끼며 제이는 두 번째로 사정했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리욘이 입을 맞춰왔다. 동시에 안에 들어와 있던 그의 성기가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사정의 징조였다. 본능적으로 밀어내려던 제이는 뒤늦게 아차, 하며 도로 그를 끌어안았다. 두 팔로는 리욘의 넓은 등을 끌어안고, 두 다리로는 그의 허리를 감쌌다. 그 상태로 아래에 힘을 주듯 꽉 조이자 곧 몸 안쪽으로 둑이 터진 것 마냥 뜨거운 것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
제이는 턱을 뒤로 젖힌 채 자기도 모르게 신음했다.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아래가 저절로 더 꼭 조여졌다. 허벅지 안쪽이 부들거리며 경련했다. 리욘의 셔츠를 꽉 움켜쥔 채, 제이는 자신의 내부의 떨림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미안. 안에다 해 버렸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리욘이 말했다. 참 뻔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이는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다.
“어차피 임신은 안 될 거라서요.”
“임신이 안 된다고?”
어째서? 하고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최대한 태연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 호르몬 수치가 정상이 아니라서요.”
“호르몬 수치가 또 왜.”
설마 그때 먹은 약 때문에? 리욘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냥 조금 아쉬워하고 말 줄 알았는데,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걱정하는 리욘을 보자 괜히 미안해졌다. 아닙니다. 제이는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원래 가끔씩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
한숨을 쉬며 리욘이 제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커다란 손이었다. 제이의 얼굴을 다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투박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손길 자체가 굉장히 섬세하고 부드러웠다. 7년 전에도 그랬다.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다르게 손길만은 참 다정하고 상냥한 남자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을 맞추고 있었다. 혀는 섞지 않고 쪽,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쪼듯이 입만 맞췄다. 아프지 않게 입술을 깨물며 리욘이 말했다.
“움직여도 될까?”
이것도 7년 전과 같았다. 한번 사정한 정도로는 힘을 잃는 법이 없는 성기도, 똑같이 굳건한 그 체력도.
…약 때문이 아니라 원래 타고난 정력이 엄청난 거였구나.
어쩐지 실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사흘 내내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되는 거 아닐까. 제이는 진지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걱정이 되는 거고, 어쨌든 사흘 동안 한 번이라도 더 할 수 있으면 해야만 했다. 관계 횟수가 많을수록 임신 확률도 확실히 높아진다고 했으니까.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세를 좀 바꿔 볼까.”
“자세요?”
“뒤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며 몸을 빼내려는 리욘을 제이는 다급하게 붙잡았다.
“왜?”
왜냐니요, 빼 버리면 기껏 안에다 싼 정액이 흘러나오지 않습니까─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이대로 하죠.”
“이 자세가 좋아?”
“그야 뭐, 편하니까요.”
제이는 대충 둘러댔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센스라곤 없구만.”
센스? 무슨 센스? 라고 생각하던 제이는 뒤늦게야 아, 하고 중얼거렸다. 보통 뒤로 하는 것보다 정상위로 하는 게 좋다고 했을 때는 ‘얼굴을 보고 하는 게 좋다.’라는 게 이유로 따라 나오니까. 아마 리욘도 그런 비슷한 걸 기대했던 것 같다.
“…….”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여기서 사과하면 분명히 또 사과한다고 한 소리 하겠지.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제이는 결국 두 손으로 리욘의 뺨을 감싸 쥔 채 키스하기 시작했다. 혀는 넣지 않고 부드럽게 입술만 몇 번 빨았을 뿐인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리욘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센스는 없는 주제에 스킬은 좋아서.”
제이가 입술을 떼자마자 혀를 차며 리욘이 말했다. 고작 이런 걸로 기분이 풀린 게 분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의 리욘은 영락없는 열아홉 살 소년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눈앞의 남자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제이는 두 팔로 리욘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리욘이 제이의 귓불을 지그시 물며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긴 밤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