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22)
  • “블라스트 출신은 확실히 아니야.”

    해리가 말했다. 제이는 휴대폰을 든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노사이드 용병들뿐만 아니라 IART에서 일했던 사람들조차 본 적 없는 얼굴이라고 하는 거 보면 성형 수술을 했을 확률이 높아.”

    “그럴 거예요.”

    아마도 실제 앨런 최와 최대한 닮은 얼굴로 고쳤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S급이야?”

    확실하냐는 해리의 말에 제이는 애매해요, 라고 답했다.

    “염동력은 S급인 거 같은데 정신 감응 능력은 잘 모르겠어요.”

    만약 S급이었다면 7년 전 비크에서 번거롭게 도청기까지 써 가며 안의 상황을 염탐할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그런 거 없이도 바깥에서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거야 컨디션에 따라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죠. 엊그제는 칩 착용한 상태로도 내 생각을 다 읽었으니까요. 그리고 호르몬제나 다른 약 같은 걸 좀 많이 먹은 모양이에요.”

    “A급이 확실하군. S급이라면 굳이 약을 먹을 필요가 없었겠지.”

    그럼 염동력도 지금으로선 잘 모른다는 얘긴데. 난감하다는 듯 해리가 혀를 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S급이라면 정체 파악은 쉬웠을 테니까. 하지만 A급이라면 그 범위는 순식간에 몇 배로 넓어져 버린다.

    “그래도 혹시 뭐 알게 되면 연락 좀 주세요.”

    “그러지.”

    “끊을게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해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제이! 잠시만!” 하고 외쳤다. 제이는 얼른 다시 휴대폰을 귀에다 갖다 댔다.

    “왜요? 뭐 있어요?”

    뭐 생각난 거라도 있나 싶어 제이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그니 사진 좀 보내 줘.”

    “…….”

    “부탁이야. 너무 보고 싶어. 너 마지막으로 사진 보내 준 게 벌써 한 달 전이야. 알아?”

    제이는 대답 대신 종료 버튼을 눌렀다.

    “뭐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제이를 보며 수잔이 물었다.

    “시그니 사진 좀 보내 달래요.”

    “뭐어? 이 얼간이가 진짜… 지금 이 판국에 할 소리야?”

    어휴 정말. 수잔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내두르면서도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사진첩을 실행시킨 그녀는 망설임 없이 ‘honey’ 폴더로 들어가 시그니의 사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중하게 하나, 하나 사진들을 고르며 수잔은 몇 번이나 “이거 봐.” 하고 자신의 휴대폰을 제이에게 들이밀었다.

    “엄청 귀엽지?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찍었어.”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봐봐. 쬐끄만 게 시럽을 어떻게 이렇게 뿌린대냐. 하도 신기해서 찍어 놨잖아.”

    제이는 이번에도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장장 40분에 걸쳐 고른 사진들을 해리에게 모두 전송한 수잔은 그제야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제이에게 말했다.

    “사진 다시 줘 봐.”

    제이는 말없이 앨런의 사진을 그녀에게 건네줬다.

    “성형 수술한 건 확실한 거 같고… 실제 나이는 몇 살 정도 될 거 같았어?”

    “삼십대 후반… 아무리 젊어도 중반이상에요.”

    손등과 목을 보면 그 이상일 가능성은 있어도 그 아래일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한국계에 80년대 중후반생이라. 당장 떠오르는 얼굴만 해도 열댓 명은 되는걸.”

    수잔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들까지 포함하면 그 두 배 이상은 될 것이다. 그중에서 현재 소재가 파악되는 사람들은 1/3 정도나 될까.

    “진짜 신상을 파악하는 건 사실상 무리 같아요. 그리고 파악해 봤자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수잔이 “내가 왕궁으로 가 볼까?” 하고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제이는 즉시 대답했다. 물론 수잔이 그를 보자마자 바로 죽일 수만 있다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실패하게 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앨런이 이쪽에게 관대한 건 어차피 A급의 능력으론 본인을 어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잔이 등장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즉시 앨런은 자신과 리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일단은 다시 한 번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당장 리욘을 어떻게 할 마음이 없다고 한 걸 보면 그쪽도 따로 계획이 있는 것 같으니까.”

    “그런가.”

    테이블 위의 찻잔을 집어 들며 수잔이 중얼거렸다. 다 식어 버린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도로 내려놓으며 그녀는 제이에게 말했다.

    “그런데 너 괜찮은 거야?”

    “뭐가요.”

    “엊그제부터 계속 안 나가고 있잖아.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무슨 일은요.”

    원래 일주일 휴가 받았잖아요. 제이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 그런데 휴가 첫날부터 다시 출근했잖아. 가지 말라고 해도 꼭 가야 한다고 부득부득 우기며 나가더니.”

    “그건 그때고요.”

    어쨌거나 앨런은 지금 당장 움직일 마음은 없다고 했다. 어차피 연내에는 대관식을 치를 수 없을 것이다, 라는 전제가 따라 나온 걸 보면 대관식 날짜가 앞당겨지지 않는 한은 당분간 리욘을 지켜보기만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자신도 리욘의 옆에 하루 종일 붙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제노스 관련이 아닌 통상적인 경호에 대해서는 어차피 그의 경호대원들에게 일임한 상황이었고.

    “그리고, 걔가 시그니 얘길 꺼내면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읽지 말라니까요….”

    “읽게 하지 말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아니, 그 자식이 무슨 권리로 너한테 애 얘길 꺼내겠어. 지 새끼도 아닌 애한테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다고.”

    “할 말이 많지는 않겠지만 아주 없지도 않을 거라서요.”

    분명 얘기 꺼낼 거예요. 자신의 뒷목을 매만지며 제이는 한숨을 쉬었다.

    ***

    아니나 다를까.

    “시그니란 이름 혹시 아이슬란드 동화에서 따온 건가?”

    의회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리욘이 물었다. 다음 일정 보고를 위해 따라 들어오던 에이나르가 그대로 조용히 뒷걸음질 치며 나갔다. 참 여러모로 고생 많은 비서관이었다.

    “그렇습니다.”

    등 뒤에서 살며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대답했다.

    “아이 아빠가 아이슬란드 사람이었나?”

    “아닙니다.”

    수트를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치던 리욘이 “그럼?” 하고 물었다.

    “그냥 그 동화를 좋아해서요.”

    “좋은 이야기지.”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아이슬란드다운 동화야. 책상에 걸터앉으며 그는 말했다.

    “보통 왕자님이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건데, 여기선 공주님이 왕자님을 구하러 가지. 공주님도 아니지. 시그니는 늙은 농부의 딸이었으니까. 그런 부분도 참 아이슬란드다워. 그나저나 앉지 그래.”

    집무실 문을 등지고 서 있는 제이를 향해 리욘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제이는 잠시 리욘을 바라보다 곧 손님용 소파로 향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리욘은 제이가 소파에 완전히 앉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도 좋아하는 동화야. 약간 으스스한 느낌도 나지만 그래서 더 신비롭다고 해야 하나. 특히 거기 나오는 주문을 좋아했어.”

    “침대 다리에 새겨진 주문 말인가요.”

    “그래. 루네 문자로 새겨진 그거.”

    달려라, 달려라, 나의 침대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 다오.

    리욘이 자신의 책상을 두드리며 주문을 외웠다.

    “…….”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주문을 외우는 리욘을 보자 제이는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그때도 리욘은 꼭 저렇게 웃으며 주문을 외웠다.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자신을 위해 침대를 두드리며 낯선 나라의 언어로 주문을 외워 주었다.

    그때부터였다. 그 어린 아이가, 눈앞의 남자가 자꾸만 생각이 나기 시작했던 것은. 저 웃는 얼굴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이?”

    리욘의 목소리에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나 그가 자신의 표정에서 뭔가를 눈치 챌까 애써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비크에서도 한 번 그 주문을 외우신 적이 있죠.”

    “그랬던가?”

    “네. 지하실 매트리스 위에 누워서요.”

    제이의 말에 리욘이 눈썹을 찌푸리며 아, 하고 중얼거렸다.

    “기억나. 시스테마를 가르쳐 준답시고 나한테 이상한 자세를 하게 했었지.”

    “이상한 자세라니요.”

    “이상한 자세 맞아. 이상하고 힘든 자세였어.”

    여전히 인상을 쓴 채 말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괴로웠던 모양이다. 꼭 열아홉 무렵의 그를 보는 것만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 기분이 좀 누그러졌는지 리욘이 “굉장히 멋진 주문이지 않아?” 하고 말했다.

    “어디로 가자고 콕 집어 말할 필요가 없잖아. 그냥 ‘내가 원하는 곳’이라고 하면 알아서 데려가 주니까. 가령 내가 지금 너무 지쳐 있으면 편히 쉴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고 간절하게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주는 거지.”

    그래서 난 누군가가 보고 싶어지면 늘 그 주문을 외웠어. 책상 위에 놓인 인터폰의 수화기를 손끝으로 두드리며 리욘은 말했다.

    “정말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아니야. 그냥,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모르게 그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는 거지.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중얼거리다 잠이 들면 항상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났거든.”

    거기까지 말한 리욘은 고개를 들어 제이를 쳐다봤다.

    “네 얘길 하는 거야, 제이.”

    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소파에 앉아 가만히 마주 바라보고 있자니 리욘이 웬일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도망 안 가는군.”

    “계속 해 보십시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도전 받아들이는 챔피언처럼 말하지 마.”

    한숨을 내뱉으며 리욘이 말했다.

    “여기가 무슨 링 위야? 글러브 던져 주면 얼씨구나 받을 기세로군.”

    “별로… 체급 차이가 워낙 심해서요.”

    승산 없는 싸움은 안 하는 편이라고 하자 리욘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정말이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딸 예쁘더군.”

    책상에 걸터앉아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리욘은 말했다. 너랑 많이 닮았어. 나직한 목소리 끝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멀리서 봐도 네 딸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얼굴은 별로 안 닮은 모양이지?”

    “…아뇨.”

    많이 닮았습니다. 제이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머리색이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절 더 닮은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군.”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그런 리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역시 많이 닮았다. 보면 볼수록 더 닮은 듯했다. 특히 눈매와 이마가 어린 리욘과 판박이였다. 본인이야 금세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어린 시절의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아마 시그니를 보자마자 외칠 것이다. 어릴 때의 전하와 똑같이 생겼다고. 오스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왜?”

    시선을 눈치챈 듯 리욘이 말했다.

    “닮았습니다.”

    “누가.”

    “전하와… 닮았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설마, 하고 리욘은 눈썹을 찌푸렸다.

    “애 아빠 얘긴가?”

    “네.”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기분이 좋진 않군.”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이었다.

    “원래 알던 사이였나?”

    “네.”

    “설마 사랑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욘이 곧 허탈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알고 싶지 않던 사실을 알게 된 표정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던 몸을 일으킨 그는 곧 거칠게 넥타이를 풀며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자 유리창을 통해 오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에 반짝이는 먼지를 응시하며 제이는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커튼을 걷은 뒤 다시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같이 있을 때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적인 호감은 있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인간적인 호감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계기도 분명히 있었고요.”

    하지만 자신의 그 마음이 그렇게 순수한 종류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아이를 갖고 나서였다. 원치도 않던 아이였는데, 심지어 강간을 당해 갖게 된 아이였는데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애초에 태아는 생명이 아니라고 믿던 자신이었는데도 말이다. 인공 수정 시술을 받을 때만 해도 그랬다. 만에 하나 임신이 될 경우 능력치의 변화 양상만 지켜보다 적당한 시기에 수술을 받을 생각이었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자신도 그러겠다고 했다. 애초에 생명 윤리라든가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쓰레기통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온 자신이었기에 그게 잘못됐다거나 나쁘다는 인식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그때 배 속의 아이를 지우길 망설이다 결국 낳기로 마음먹게 된 건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 사람의 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낳기로 했던 거다. 그때는 이미 밉다거나 원망스럽다는 마음도 없었다. 그저 빨리 아이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어떻게 생겼을까, 누굴 더 많이 닮았을까, 이왕이면 나보다는 그 사람을 더 많이 닮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정말 예쁠 텐데 라는,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런데 낳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닮아서….”

    “좋았나?”

    아뇨. 제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힘들었습니다.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조금만 덜 닮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고 뒤늦게야 후회했죠.”

    “이해해.”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잊고 살면 좋은데 계속 생각이 나니 미칠 노릇인 거지.”

    그 마음 나도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리욘은 곧 한숨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내게 이런 얘길 하는 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제이는 말없이 웃었다.

    “전하는 어떻습니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묻자 리욘이 뭐가? 라는 표정을 짓는다.

    “저에 대한 마음이요.”

    “너에 대한 마음?”

    “네. 정말로 사랑이라고 믿습니까?”

    “그럼, 너는 정말 그게 단순한 소유욕이라고 믿나?”

    “네.”

    “사랑과 소유욕의 차이가 뭐지.”

    제이는 금방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욘이 책상 의자에 앉으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하고 말했다.

    “네가 자꾸 사랑이 아니다, 소유욕 때문이다, 라고 하는 건 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야? 내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너한테는 문제가 없지만 내가 그런 인간적인 감정 따윈 모르는, 본능에만 지배당하는 짐승이라고 생각해서 자꾸 그런 소릴 하는 건가? 만약 후자라면 난 이거 진심으로 화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전자라면 그 두 배로 화내겠지만. 리욘은 단호히 말했다.

    “어느 쪽이야?”

    책상에 팔을 괴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잠시 생각 끝에 대답했다.

    “둘 다입니다.”

    “둘 다라고?”

    “네. 전하가 평범한 다른 남자, 혹은 여자를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으셨다면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제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왜지.”

    “이종에 대한 혐오감은 생래적인 거고, 생래적인 혐오감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널 이종 취급한 적이 있었던가?”

    정말로 기억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오래전 일이니 기억 못 하실 수도 있죠.”

    그제야 리욘이 “아, 혹시 그때 말하는 건가?” 하고 낯을 찌푸렸다.

    “비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제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게 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리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야말로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흘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봐, 제이. 그게 몇 년 전인지 기억은 하고 있는 거야?”

    “7년 전이죠.”

    “그래. 7년 전이야.”

    벌써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고. 리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때 난 열아홉 살이었어.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막 해 대고, 돌아서서 후회하던 사춘기였단 말이지. 내 실수나 잘못에 대해 사과할 만한 용기도 없던 철부지였고.”

    거기까지 말한 리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제이를 바라보았다. 한참동안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곧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난 스물여섯 살이야.”

    그때 네 나이지. 리욘의 말에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나이가, 그렇게 되는 거였구나.

    듣고 보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때 자신의 나이가 지금의 리욘과 같았다는 사실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넌 그때 세상 통달한 어른처럼 굴었어. 그런데 똑같은 스물여섯인 나는 아직도 내 감정조차 구분 못 하는 어린아이 취급을 하고 있지. 앞뒤 안 맞는 행동이란 생각 들지 않아?”

    “나이가 전부는 아니니까요.”

    아하, 하고 리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말고 내가 어른임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 리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곧장 제이가 앉아있는 소파로 다가온 그는 제이의 두 뺨을 손으로 감싸 쥐더니 그대로 키스했다.

    “…….”

    당황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두 번째라고 지난번처럼 온몸이 굳을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리욘이 다가올 때부터 설마,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도 막상 입술이 겹쳐지자 몸이 뒤로 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실수였다. 기다렸다는 듯 리욘이 한쪽 팔로 등을 끌어안더니 그대로 천천히 소파 위에 눕혔다. 그 와중에도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밀어내야 할까. 짧은 찰나 고민하던 제이는 그러나 이내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는 쪽을 택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자신의 등을 안은 채 천천히 소파에 누이던 리욘의 몸짓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안타까울 정도로 다정해서, 그래서.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리욘의 혀가 들어왔다. 남자의 열기를 그대로 간직한 살덩어리는 입안 전체를 애무하듯 부드럽게 훑기 시작했다. 혀끝으로 간질이듯 입천장을 두드리더니 혀는 또 혀뿌리가 아릴 정도로 세게 빨아올렸다.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달래듯 리욘의 커다란 손이 다시 뺨을 감싸 안았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다정해질수록 입맞춤은 깊어지고 짙어졌다.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서 두 혀는 난잡하게 얽혔다. 서로의 혀에 돋은 작은 돌기 하나하나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하게 비벼대며 교접했다. 리욘의 혀가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스칠 때마다 젖은 점막을 감싼 타액이 엉기며 끈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확실히 그때의 잡아먹을 것만 같던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훨씬 더 농밀하고 성적인 향취를 풍기는, 그런 키스였다.

    리욘이 착용한 칩 덕분에 그의 생각은 흘러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만큼은, 넘쳐흐르는 감정의 깊이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너무 버거워 감당하기 어렵단 생각이 들 즈음 제이는 리욘을 밀어냈다.

    “어때, 이정도면 어른이라는 증명이 됐나?”

    순순히 입술을 떼며 리욘이 물었다. 마음 같아선 아직 멀었다고 해주고 싶었지만 숨을 고르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실컷 응해 놓고 그런 소릴 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고. 그래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자니 리욘의 손가락이 지그시 입술을 눌러 왔다.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느리게 쓸며 그가 말했다.

    “제이. 너도 이미 알고 있을 거야. 내가 단순한 소유욕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거지. 리욘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네가 편하니까.”

    “…그러면 안 됩니까?”

    제이는 리욘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리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했다. 뻔뻔하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지금 리욘의 눈을 보면 무너질 게 분명했다. 그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너무나 명백했으므로.

    “나는 내 마음대로 할 거라고 한 주제에 네게만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건 이기적인 거겠지.”

    어차피 이제 와서 배려하는 척해 봤자 아무 의미 없겠지만. 입술을 문지르던 손을 거두며 리욘이 말했다.

    “좋을 대로 해. 모르는 척하는 게 편하다면 모르는 척하고, 차라리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 싶어지면 받아들이고.”

    그렇게 말하며 리욘은 몸을 일으켰다. 책상으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제이도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그거 알아?”

    책상 서랍에서 담뱃갑을 꺼내며 리욘이 말했다. 담배를 피웠던가. 제이는 적잖이 놀랐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서 담배 향이 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아주 가끔씩만 피우는 모양이었다.

    “넌 한 번도 내 앞에서 환하게 웃은 적이 없어.”

    칙, 소리와 함께 지포 라이터의 심지에 불이 붙었다. 불은 곧 리욘의 입에 물린 담배로 옮겨 갔다. 불붙은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아들인 뒤 천천히 내뱉으며 그는 말했다.

    “꿈에서는 자주 봤거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웃음이 굉장히 현실감 없게 느껴지는 거야.”

    “현실이 아니니까요.”

    “맞아. 현실이 아니었으니까.”

    흰 연기가 웃음처럼 흘러나왔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봤더니 현실에서는 네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더라고. 무려 한 달이나 같이 지냈는데 말이야.”

    제이로서는 별로 놀랍지 않은 이야기였다. 원래 잘 웃는 편이 아니었으니까. 그 전에 웃을만한 일이 거의 없기도 했다. 딱히 비크에서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이 일을 하면서 자주 웃기가 더 힘들었다.

    “그래서 더 보고 싶어진 것도 있었어. 꿈속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다시 만나면 어떻게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쉬운 얘기가 아니었군.”

    어쩐지 제이는 망연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은 리욘의 웃는 얼굴을 지켜주고 싶어서 뭐든 하겠다고 한 거였는데, 정작 리욘은 자신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고 있었다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보다 자괴감이 먼저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리욘이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그럴 터였다.

    “딸과 있을 때는 어떻지?”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리욘이 “딸과 함께 있을 때도 잘 안 웃나?” 하고 말했다.

    “그건 아니겠지?”

    제이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시그니와 함께 있을 때의 자신의 표정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 아닐 거야.”

    제이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리욘이 직접 정답을 알려 주었다.

    “애들은 부모의 표정을 그대로 배운다고 했으니까. 네 딸이 널 보며 그렇게 환하게 웃었다는 건 네가 딸 앞에서 자주 그런 표정을 지었단 얘기겠지.”

    그런 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그니를 보고 있으면 행복했으니까. 아이의 작은 손짓 하나, 옹알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마냥 신기하고 행복하기만 했다. 그때마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는, 리욘의 말대로 지금 시그니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부럽군.”

    불쑥 리욘이 중얼거렸다. 제이는 고개를 들어 리욘을 바라봤다.

    “네 딸 말이야.”

    “…….”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당신에게 웃어 주지 못하는 대신 당신 딸을 보며 웃는다고 하면 리욘은 뭐라고 할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아니면 더욱 슬퍼할까.

    할 수 없는 말들이 자꾸만 가슴 속에 쌓여갔다.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

    7월 넷째 주 수요일 오후, 임시 의회 회의가 열렸다. 예의 대관식 날짜 변경 건에 대해 마지막으로 의견을 나눈 뒤 그 자리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였다. 국왕에게 뇌사 판정이 내려진 지 정확히 열흘째였다. 뇌사 판정 후 시간이 지날수록 소생의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더는 기다리는 의미가 없다는 게 의회의 판단이었다. 이제 확실히 매듭을 지어야만 했다.

    리욘은 회의 시작시간인 세 시 정각에 사원에 도착했다. 리욘의 뒤를 따라 대회랑으로 향하던 제이의 표정이 굳었다. 회랑 입구에 앨런이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는 앨런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뒤 리욘은 회랑 안으로 들어갔다. 리욘이 회랑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오후입니다. 날씨가 심상치 않긴 하지만.”

    비 쏟아지기 전에 끝냅시다. 반농담조로 말하며 리욘이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좋습니다! 하는 대답이 들렸다. 의원들이 착석하는 사이 제이는 얼른 에이나르에게 말했다.

    “에이나르, 지금 굳이 제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죠?”

    “네? 아, 네. 꼭 있어야 할 필요는….”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제이는 에이나르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 사이 어디로 간 건지 앨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대회랑 앞으로 길게 이어진 복도를 따라 걸으며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앨런은 없었다. 발데마르가 혼자 돌아갈 리는 없는데. 사원 바깥으로 나갔나. 두리번거리던 제이는 헤이,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원 건물로 들어서는 입구의 돌계단에 앨런이 앉아있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잠깐 사이에 앨런의 낯빛이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오늘 컨디션이 영 안 좋네요.”

    제이가 다가가자 앨런이 먼저 말했다. 사원 입구의 돌기둥에 머리를 댄 채 힘없이 중얼거리는 모습이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물론 병원에 가라거나, 약은 먹었냐는 등의 걱정은 해 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앨런을 살피던 제이는 곧 그의 손목에 채워진 칩을 알아차리고는 짧게 혀를 찼다.

    그나저나 이런 생각까지 하는데도 조용한 걸 보면 못 읽고 있는 건가. 아니면, 못 읽는 척하고 있는 거라던가….

    이쯤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아마도 못 읽고 있는 게 맞는 듯했다. 하긴, 컨디션이 이 정도로 나쁘면 원래 가진 능력만큼도 발휘가 안 되는 법이었다. 하물며 약을 써서 억지로 끌어낸 능력이 제대로 발현될 리가 만무했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요, 제이. 약 많이 먹지 말아요.”

    한숨을 토해 내며 앨런이 말했다.

    “그렇게 안 좋을 걸 알면서 억지로 먹은 이유가 뭐지.”

    “그야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전히 기둥에 머리를 댄 채 앨런은 힘없이 웃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내가 조금 무리하면 메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부질없는 짓이란 걸 너무 늦게 알았어요. 앨런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면서도 왜 여전히 그녀를 위해서 애쓰는 걸까.

    제이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앨런이 말했다.

    “그거 말고는 제가 할 게 없으니까요.”

    “…….”

    “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역시 다 읽고 있었구나. 제이는 혀를 찼다. 섣불리 덤비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 사이 눈을 뜬 앨런이 그런 제이를 보며 웃었다. 기둥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하며 그는 제이, 하고 불렀다.

    “전에도 말했지만 대관식을 앞당기긴 힘들 겁니다. 세습 의원들이 문제가 아니에요. 세습 의원들은 오히려 쉽습니다. 결국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건 파벌이니까요. 그들이 파벌을 유지하고 세력을 키우려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본인의 권익을 위해서죠. 그럴 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됩니다. 더 큰 권익을 보장해 주면 그들은 넘어올 수밖에 없어요.”

    진짜 문제는 평의원들이죠. 앨런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들이 대관식을 앞당기길 거부하는 이유는 파벌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파벌이랄 게 없어요. 굳이 편을 가르자면 왕세자파라고 봐야겠죠. 리욘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니까요. 그런 사람들이 대관식 날짜를 앞당기는 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어요.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시기상조라는 거죠, 아직은.”

    왕위 계승에 대한 에시르 왕가의 철칙은 확고했다. 달이 지고 해가 뜨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것, 모든 국민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할 것. 지나친 변화와 혁신은 발전이 아닌 혼란을 야기할 뿐이다. 국민의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고 그 준비는 오로지 왕세자의 몫이었다.

    “에시르 왕세자들이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참관자 자격으로 의회 회의에 들어가고 국정 토론회에 참석하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일찍부터 국정에 대한 감각을 익히고 인사를 살피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예요. 그러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참관자 꼬리표 떼고 국왕의 대리인이 되어 의회를 이끄는 거죠. 연방 출범 이후의 왕위 계승권자들은 모두 이 과정을 거쳤습니다.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도 국왕의 대리인 명목으로 정사를 이끌며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어받을 준비를 해 나갔단 말이죠.”

    하지만 리욘은 왕세자로 책봉된 게 겨우 2년 전이다. 거기다 본격적으로 국사를 돌보기 시작한 건 반 년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참관 기간 따위는 아예 없었고 갑작스레 쓰러진 국왕을 대신해 곧바로 대리인 명목으로 의회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위를 잇기 위해 수년, 십 수 년을 차분하게 준비해 오고도 아직 부족하다며 선양을 거절했던 선대들에 비하면 확실히 준비가 미흡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 크게 관심 없는 국민들은 어차피 지금도 왕세자가 의회를 이끌고 있지 않느냐, 이 상태에서 왕관만 물려받는 것뿐인데 뭐가 달라지느냐는 반응이었지만 많은 것이 달라진다. 지금 그는 국왕의 대리인 자격으로 국왕의 정책을 그대로 이행해 나가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왕의 대리인이 아니라 왕이 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정책을 펼쳐 나가게 된다. 그리고 리욘은 연방 출범 이후 에시르에서 처음 탄생하는 진보 성향의 군주였다. 그의 정책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든 당장의 사회적 혼란은 불가피할 전망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 평의원들은 그 사실을 불안하게 여겼다. 젊은 왕의 탄생을 기대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는 그들은 리욘이 좀 더 현 국왕이 만들어둔 체제 안에서 준비를 하고 기반을 다져 주길 바라고 있었다. 어차피 왕의 공석은 두 달 전부터였고, 그 기간 내내 리욘은 무리 없이 왕의 대리인 노릇을 해오며 의회와 함께 국정을 이끌었다. 내년 4월까지는 이 상태를 유지하며 그 시간동안 조금이라도 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해달라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그런 사람들이다보니 애초에 리욘도 평의원들 상대로는 로비할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더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로비한다고 넘어올 사람들도 아니거니와, 하나하나 붙들고 로비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요. 아마 오늘 투표 직전에 마지막 연설로 승부수를 띄워볼 생각인 듯한데, 글쎄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 사람들도 리욘의 능력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아주 잘 알고 있죠. 아니까 왕이 되길 바라는 거예요. 최대한 안정적인 상황에서 본인이 가진 능력을 다 펼쳐 주길 바라는 거고요.”

    뭐, 리욘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죠.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제이의 얼굴이 굳었다. 앨런은 그런 제이를 보며 웃더니 “리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까요, 제이?” 하고 말했다.

    “아주 간단해요. 그가 왕위를 포기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거예요. 왕위를 내놓는다면 절대 리욘에게는 손대지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만약 그가 끝까지 왕이 되길 원한다면….”

    “왕이 되길 원한다면?”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리욘은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죽겠죠.”

    그야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앨런이 어깨를 으쓱였다.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그는 제이에게 말했다.

    “당신은 어차피 날 못 막아요. 그러니 차라리 리욘을 설득해 왕위를 포기하게끔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면 하루라도 빨리 딸을 데리고 아이슬란드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고요.”

    “글쎄. 널 막는 것보다 그 사람을 설득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

    한숨처럼 웃는 제이를 보며 앨런이 “시간은 넉넉하게 드리죠.” 하고 말했다.

    “올해까지입니다. 올해 안으로만 리욘이 왕위를 포기하고 왕세자 자리를 내놓으면 되는 거예요.”

    올해 안.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연말까지를 기한으로 둔다면 총 다섯 달의 유예가 주어진 셈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나로서는 굉장히 크게 쓴 건데 말입니다.”

    그나마 제이, 당신이니까 그 정도까지 기회를 준 거예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소리를 하며 앨런은 웃었다.

    “그럼, 한번 애써 봐요.”

    제이의 어깨를 툭 가볍게 두드린 뒤 앨런은 사원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던 제이는 곧 앨런과는 반대로, 사원의 바깥으로 향했다.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면 앨런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았다. 굳이 회의장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도 없었으니 차라리 곧장 왕궁으로 향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생각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정리한다고 해서 정리가 될 문제가 아니었다. 앨런의 말이 옳았다. 자신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리욘에게는 손대지 않겠다던 그 약속을 지키게 하는 편이 현명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리욘이 왕위를 포기하게끔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냔 말이지….

    막막했다. 자신이라면 당연히 왕위를 내놓고 목숨을 보전하는 쪽을 택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이었다. 리욘의 입장은 또 다를 터였다. 그 성격에, 그 자존심에 목숨 지키자고 왕위를 내놓을 리가 만무했다. 어떻게든 왕위를 지키고 목숨도 지킬 수 있는 그런 방안을 찾아내려 하겠지. 그건 불가능하다고 백 번 설명해 봤자 듣지 않을 것이다. 왜 해 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한심하다는 듯 그렇게 얘기할 게 분명했다.

    그래,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딱 하나 방법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방법만큼은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지켜낸 본인의 목숨과 왕위를 리욘이 기꺼워 할 리 없으니까. 물론 그가 모르게 처리하면 될 일이긴 했다. 그게 가능할지가 문제였지만.

    “…미치겠군.”

    제이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도 당장 답을 내기란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섯 달의 유예가 주어진 게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왕궁이었다. 문을 지키고 선 경비대원들의 경례를 받으며 제이는 생각했다. 그래, 아직 다섯 달이란 시간이 남아있다.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 보자. 어떻게든 머리를 굴리다보면 대책이 떠오르겠지.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리욘을 한번 설득해 보면 되는 거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제이는 왕궁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한 시간도 안 되어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어서 와요, 제이. 얘기 들었죠? 대관식 석 달 앞당기기로 했어요.”

    우리 전하께서 해 내셨습니다.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에이나르의 말에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제이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죠, 그럼! 내년 1월로 결정됐어요.”

    도대체 어떻게? 라고 묻기도 전에 에이나르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전하의 마지막 연설을 제이가 직접 들었어야 했어요. 짐은 제1의 공복이다. 이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한 말이거든요. 전하께서 연설 시작하실 때 먼저 이 말부터 딱, 한마디 하시는데, 아휴 어찌나 가슴이 뛰던지! 확실히 연설에서는 외모발, 목소리발 무시 못 한다니까요? 아, 그런데 연설 내용도 정말 좋았어요. 복지 국가들 성공 사례 먼저 쫙 브리핑한 다음에, 전하께서 가장 최우선으로 시행시킬 예정인 정책들 몇 개 설명하시면서 예상되는 결과는 물론이고 중간 과정에서 겪게 될 부작용, 혼란 같은 것도 아예 다 까 버렸, 아, 아니, 아예 미리 다 밝히셨거든요. 그리고 이러이러한 상황이 예상되는 만큼 당장 밀어붙일 생각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관식이 언제 거행되더라도 최소 이 년 정도는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바꿔 나갈 생각이다, 어차피 나한테 주어진 시간은 길다, 서두르지 않고 국민들이 적응해 나갈 시간을 충분히 주면서 개선해 나가겠다,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의원들이 다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는데,”

    “잠시만요.”

    제이는 에이나르의 말을 잘랐다.

    “정말 그렇게 하실 거랍니까?”

    “그야 물론…!”

    “…….”

    “…그렇게 하려고 노력은 하실 겁니다.”

    “…….”

    “노력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에이나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한 말에 제이는 그만 기가 차서 웃고 말았다. 그럼 그렇지. 리욘의 성격상 그렇게 느긋하게 지켜보며 기다릴 리가 없었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남들이 뭐라 하건 듣지 않는 사람이니까. 결국 말로만 그럴싸하게 달래 놓고 왕이 되자마자 불도저처럼 밀어 버릴 심산인 거다.

    새삼 그의 책상에 놓인 접시의 글귀가 마음에 와 닿았다. 모든 승자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겼는가를 떠나서 부끄럽지 않은 적이 없다. 그야말로 리욘을 위한 명언이었다. 의회의 의원들이 제노스가 아닌 게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거짓말을 믿다니.

    “환장하겠군….”

    제이는 한숨을 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런 제이의 반응에 당황한 듯 에이나르가 “아니, 저기 제이. 너무 그렇게 나쁘게 생각할 건 없어요.” 하고 해명하려 들기 시작했다.

    “원래 이런 연설에는 다 뻥, 아니, 어느 정도의 그 뭐랄까, 포장 같은 게 필요한 거니까요. 오히려 액면 그대로 말하는 게 바보죠. 그리고 전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고 계획이 있으셔서 정책을 세우고 시행 방안을 세우신 거니까요. 제이는 잘 모르겠지만 2년 동안 굉장히 준비 많이 하셨거든요. 각 분야 전문가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조언도 많이 구하셨고…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해도 돼요.”

    제이도 그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나르의 말대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도 안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리욘인데 어련할까. 애초에 평의원들도 그의 능력을 의심해서 대관식 날짜를 앞당기길 반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는 입장이었을 뿐. 반대로 리욘은 준비가 완벽하게 된 이상 더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었고. 리욘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굴 땐 그만큼 모든 준비가 다 갖춰져 있다는 뜻이었다. 제이가 걱정하는 건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아무튼 이 정도로 당긴 것만 해도 엄청난 거예요. 사실 우리는 딱 한 달 정도만 당겨도 다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무려 석 달을 앞당겼어요. 날짜도 딱 좋아요. 새해 시작과 함께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된 거잖아요.”

    바로 이것, 대관식 날짜가 1월로 당겨졌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애초에 앨런이 올 연말까지로 유예를 둔 건 대관식이 내년 4월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려 석 달이나 앞당겨졌으니. 당장 앨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발데마르 공은, 돌아갔습니까?”

    “아뇨. 전하와 이야기 나누는 중이에요.”

    에이나르가 집무실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은 즉, 앨런은 아직 궁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제이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마침 복도 앞에 서 있던 앨런과 딱 마주쳤다.

    “잠시 얘기 좀 하죠.”

    “죄송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요.”

    앨런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단 맞춰 주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제이는 앨런의 팔을 붙잡아 계단으로 향했다. 거의 끌고 가듯 3층으로 데리고 올라가자 앨런은 제이의 팔을 뿌리치며 창틀에 몸을 기대더니 곧 고개를 숙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인정해요. 내가 리욘을 너무 과소평가했어요.”

    그런데 참 이름답지 못한 행동이었어요. 앨런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식으로 얕은 수를 쓰다니. 리욘이라면 안 되더라도 정공법을 택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사자는 원래 그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녀석들이야.”

    가젤 한 마리 잡자고 사방에서 몇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기도 하는 게 바로 사자였다.

    “맞아요. 심지어 수사자는 자기가 나서지도 않고 암사자가 사냥해 온 먹잇감을 먹기만 하죠.”

    앨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이를 바라봤다.

    “수사자는 무리를 지킬 의무가 있으니까.”

    제이는 침착하게 말했다.

    “수사자가 사냥에 나섰다 죽기라도 하면 무리 전체가 위험해지는 거야. 그리고 아예 사냥에 안 나가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암놈이 위험해지면 직접 나서기도 해.”

    “이미 다 위험해진 뒤에 나서 봤자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 쉽게 위험에 처하지도 않으니까.”

    굳이 걱정해 줄 필요가 없다고 하자 앨런이 흐음, 하고 웃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애써 무시하며 제이는 말했다.

    “네가 뭐라고 하건 사자는 사자야. 수사자든 암사자든 사자에게 물리면 살아남기 힘들어. 그러니 리우지엔에게 포기하라고 해.”

    “그건 안 돼요.”

    “왜지?”

    “그녀도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마음은 없을 테니까요.”

    창틀에 몸을 기댄 채 앨런은 말했다.

    “아마 프란츠가 없었으면 포기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까지 됐으니 메이도 어떻게든 자기 아들이 왕이 되는걸 보고 싶을 겁니다.”

    프란츠는 리욘이 왕세자로 책봉되던 바로 그 해에 스위스로 향했다. 얼핏 왕세자가 된 리욘을 의식해 왕비가 멀리 도피시킨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스위스의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였다. 르 로제 스쿨 주니어. 리욘이 졸업한 바로 그 국제학교의 주니어 과정이었다.

    “열 살밖에 안 된 애를 그렇게 떼어 놨을 땐 각오했단 이야기죠. 메이도 여자로서의 평범한 행복은 포기했어요. 그렇다면 최소한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은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야.”

    제이는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떻게 하자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앨런은 평연히 말했다.

    “바뀌는 건 없어요. 리욘이 왕위를 포기하게 만드십시오. 그를 살리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대관식이 내년 1월이니 9월 중으로는 이야기가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예상대로 유예의 시간이 단박에 줄어들었다. 제이는 혀를 찼다.

    “올 연말까지로 해.”

    “그건 좀.”

    곤란하다는 듯 웃는 앨런에게 제이는 “어쨌거나 대관식 전까지만 포기하게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하고 말했다.

    “올해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 볼 테니까 그렇게 해.”

    앨런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11월까지로 하죠.”

    “12월.”

    “아뇨, 넉 달이면 충분합니다. 넉 달 가지고 안 될 거면 다섯 달, 여섯 달을 끌어도 안 된다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안 될 것 같으면 일찌감치 아이슬란드로 가요, 제이. 앨런은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건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앨런은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더 이상 타협은 없다는 뜻이었다.

    제이는 하릴없이 앨런의 뒤를 따라 2층으로 내려갔다. 비서실로 들어가자 마침 안쪽에서도 이야기가 끝난 듯 집무실 문을 열고 리욘과 발데마르가 나왔다. 리욘은 제이의 앞에 서 있는 앨런을 보고는 반가운 듯 앨런, 하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수고 많았네.”

    “아닙니다. 이번 결과에 전 정말 일조한 게 없는 걸요. 모두 전하께서 해 내신 겁니다.”

    겸손 아닌 겸손을 떨며 고개를 조아린 앨런은 곧 자신의 뒤에 선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보다 대위님께서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만.”

    “뭐….”

    제이는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냔 표정으로 바라보자 앨런은 대답 대신 싱긋 한 번 웃더니 다시 리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 대위가?”

    리욘은 별일이라는 듯 말하더니 이내 자신의 옆에 선 발데마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쪼록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

    “네. 전하께서도 푹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기분 좋은 얼굴로 전한 뒤 발데마르는 앨런과 함께 비서실을 나섰다. 모르는 척 함께 나가려는 제이를 리욘이 불렀다.

    “대위. 할 말이 있다고?”

    “아, 그게.”

    앨런이 잘못 안 거라고 말하기도 전에 리욘이 집무실로 들어가며 따라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왕세자의 비서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무례하지 않게 거절하며 돌아서는 방법 따위 제이는 알지 못했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리욘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할 얘기가 뭐지?”

    책상 의자에 앉으며 리욘이 말했다.

    “그… 대관식 날짜 앞당기신 거, 축하드립니다.”

    일단은 축하부터 했다.

    “고작 석 달 당긴 건데 뭐.”

    별거 아니라는 듯 말하는 리욘에게 “그것도 엄청난 거 아닙니까?” 하자 그렇긴 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달 정도는 더 앞당길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어차피 준비도 다 됐는데 여기서 더 미적거려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지. 어지간하면 넘어와 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집 센 양반들이 몇 명 있더군.”

    “에이나르의 말을 들어보니 1월도 괜찮은 거 같던데요. 새해와 동시에 새 정권이 출범하게 되는 셈이니 나름 시기적절하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그런 식으로 굳이 의미 부여를 해 보면 썩 나쁜 날짜는 아니야. 뭐든 시작하기엔 연초가 가장 적기니까. 애매한 시기에 걸려서 타이밍 재며 기다리는 것보단 낫지.”

    새해 시작과 동시에 싹 갈아엎을 참이야.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며 리욘이 말했다.

    “다들 놀라서 말리려 들겠지. 전에 하셨던 말씀과는 다르지 않느냐, 좀 더 시간을 두고 결정해야 할 문제다, 시기상조다 엄청 떠들어 대겠지만 막상 일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그런 말들은 쑥 들어갈 거야. 결과가 눈에 보일 때쯤이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할 거고. 그때 폐하의 결정이 참으로 타당하셨노라고.”

    난 그런 식으로 우려의 목소리가 찬양으로 뒤바뀌는 그 순간이 좋아, 아주 짜릿하지. 리욘은 벌써 결과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즐거워하며 말했다. 지금만큼은 왕비를 폐위시킨다거나, 왕비파 귀족들의 처분에 대한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로지 자신의 정책을 실현시키고 원하던 국가의 모습을 완성시킬 생각에 한껏 마음이 들뜬 눈치였다.

    그리고 그런 리욘을 바라보는 제이의 얼굴은 더욱더 어두워졌다. 저렇게 의욕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당신 마음은 알지만 살고 싶으면 왕위를 포기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건 리욘도 이미 일찍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왕위만 포기하면 그 모든 위험과 속박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걸, 리욘이야말로 진저리가 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왕이 되고자 했을 때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각오를 마친 이상 그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그를 지켜주기 위해 이곳에 온 거였고.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제이는 망연히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떠오르는 방법이라곤 하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거 외에는 정말 다른 대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제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제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왜… 뭐 잘못됐습니까.”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아니, 너무 굳어 있어서.”

    무슨 일 있나? 자리에서 일어서며 리욘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리욘이 무슨 이야기인지 말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아, 그게….” 제이는 시선을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일찍 들어가 봐도 되냐고요.”

    “뭐야,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앨런까지 찔러 댄 거였어?”

    어이가 없다는 듯 리욘이 웃었다. 제이도 따라 웃으려고 했지만 웃음이 안 나왔다. 입꼬리조차 올릴 수가 없었다.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리욘의 고개를 숙여 제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닙니다. 나가 보겠습니다.”

    “제이.”

    돌아서 나가려는 제이를 리욘이 붙잡았다. 팔을 붙잡자마자 그대로 뒤돌려 세워 자신을 보게 하며 리욘이 말했다.

    “말해 봐. 무슨 일이야.”

    “…….”

    “제이.”

    재차 리욘이 불렀다. 조금 전까지 맑게 빛을 발하던 눈동자는 금세 비라도 쏟아질 듯 흐려져 있었다. 구름 낀 오후의 하늘 같은 그 눈동자를 제이는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시그니였다. 자신의 품에 안겨 아프지 말라고 울먹이던 시그니의 눈동자가 꼭 저랬다.

    “어디 아픈 건 아니겠지.”

    제이는 대답 대신 자신을 붙잡고 있는 리욘의 손목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마음이 다 들리는 이유를 제이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건 들리는 게 아니었다. 느껴지는 거였다. 느껴지고 있었다. 리욘의 마음이. 애초에 칩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였다. 모든 간절한 마음은 결국 이런 표정 하나, 눈빛 하나에서 다 느껴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니 진작부터 알 수밖에 없었다. 리욘의 마음을. 자신이 호르몬제를 먹은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를 낼 때, 이미 알아차렸다. 그의 말대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유치한 소유욕이라고 우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주제도 모르는 인간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욕심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한번쯤은, 딱 한 번 정도는 원하는 걸 가져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도 그 정도 자격쯤은 있는 거니까.

    “전하.”

    제이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7년 전에 제게 하셨던 약속 생각나십니까.”

    “뭐?”

    “무엇이든지, 제가 원하는 거 하나를 들어 주겠다 하셨던 약속이요.”

    “물론이지.”

    리욘이 즉답했다.

    “바둑을 가르쳐 준 대가였잖아. 얼마를 지불하면 되냐고 했더니 돈은 좀 그러니 다른 걸로 대신 받겠다고 했지.”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제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소원 하나를 못 들어 준 게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그런데 왜? 하고 리욘이 물었다.

    “이제야 그 소원이 생각났나?”

    “네.”

    “설마 일찍 퇴근하게 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리욘의 물음에 제이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동안이나 바라본 끝에야 작은 소리로 “제가….” 하고 말했다.

    “제가 혹 실수를 저질러 본의 아니게 전하께 상처를 주는 일이 생긴다면, 부디 딱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뭐…?”

    리욘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말 그대롭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마 맹세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까… 어쩌다 벌어진 실수이겠거니 하고,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게 전하께 부탁드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제 소원입니다.

    고개를 숙인 채 제이는 말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

    “호르몬 수치는 이제 완전히 정상화 됐네요.”

    다행이에요. 검사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니나가 말했다. 그녀는 곧 지난번 검사 결과지를 꺼내 두 장을 비교해 가며 각 호르몬의 변화 수치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런 니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는 곧 닥터, 하고 그녀를 불렀다.

    “물어볼 게 있는데요.”

    “뭐죠?”

    펜을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니나가 말했다.

    “배란 유도제라는 건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겁니까?”

    “그럼요.”

    “그건 어떤 원리로 작용하는 거죠?”

    “그게, 가장 흔하게 쓰는 클로미펜 같은 경우엔 에스트로겐 리셉터를 차단해서 배란을 유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스트로겐이 분비가 안 되는 건 아닌데, 뇌는 에스트로겐 농도가 낮다고 인지를 하게 만드는 거죠. 그럼 난포 자극 호르몬과 황체 형성 호르몬 분비가 촉진되면서 난포의 성장이 활성화되고 결과적으로 배란이 잘 이루어지는 거죠.”

    “난임의 경우에도 효과가 있습니까.”

    “그럼요. 애초에 난임 환자들을 위해서 개발된….”

    문득 니나의 손이 멈추었다. 고개를 든 그녀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제이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위님. 지금 무슨 생각하시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제이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대위님.”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제이는 곧장 진료실을 나섰다.

    “…….”

    진료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제이는 문에 등을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닥터 블리스는 안 되겠지.

    병원엘 직접 가면 처방을 받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심부름센터를 이용하는 게 나을까. 막연히 생각하던 제이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기류에 아차, 하며 황급히 다시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니나가 막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의 수화기를 집어 들고 있었다. 제이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가 들고 있는 수화기를 빼앗았다. 그대로 쾅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제이는 애원하듯 말했다. 닥터, 제발.

    “전하께는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게 전하께도 말하면 안 되는 일을 대체 왜,”

    “이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요.”

    제이는 내뱉듯이 외쳤다. 그 절망적인 어조에 그제야 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니나가 굳은 얼굴로 대위님, 하고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니나는 재차 물었다.

    “무슨 일인지부터 이야기해 줘요. 그래야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거 아니에요.”

    뭐죠? 설마 전하께 위험한 일이 생긴 건가요? 다급한 어조로 니나가 물었다. 그런 니나의 시선을 피한 채 책상 위의 전화기만 내려다보던 제이는 이윽고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니나에게 말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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