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22)
  • 처음 그 꿈을 꾼 날을, 리욘은 기억하고 있다.

    그날은 자신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다. 나흘째 눈은 그치지 않았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해는 오후 세 시가 되기도 전에 저물었다.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면회실에서 리욘은 오스카가 자신에게 들려줄 변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커다란 철제 책상 위에는 여섯 군데 센터에서 보낸 유전자 감식 결과표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쉽게도 오스카는 변명 따위 하지 않았다. 아마 변명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리욘도 동의하는 바였다. 모든 일에는 결과가 가장 중요한 법이었으니까. 과정이나 이유, 계기 같은 건 모두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것들은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눈물겨운 자기 합리화를 위한 수단으로나 쓰일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결과는 명백했다. 미카엘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 그거면 된 거였다. 오스카가 어째서 베아테의 편을 들어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또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고.

    자신이 왕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것뿐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외숙부는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본인의 반평생을 바쳐 왔다. 그런 것치고는 참 무모하고 대책 없는 소행이긴 했다. 머리카락 한 올, 타액 한 방울이면 들켜 버릴 것을.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었다. 아이는 겨우 두 살이 지났을 때부터 자신과는 확연하게 다른 생김새를 갖게 되었으니까.

    리욘은 책상 위에 흩어진 결과표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에시르 국립 유전자 정보 센터에서 보내온 결과표였다. 이 센터에서는 STR 타이핑을 통한 유전적 지문 검사 방식12)을 채택하고 있는 듯했다. 총 18개의 STR 유전자좌 중 7좌 불일치로 친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표 아래 새빨간 글씨로 깔끔하게 결과를 기재해 둔 게 마음에 들었다.

    충격이나 실망감은 없었다. 오히려 아주 만족스러웠다. 애초에 다른 날도 아닌 오늘 오스카를 소환해 그의 앞에서 유전자 감식 결과표를 개봉한 이유가 있었다. 생일을 기념하고 싶었다. 말하자면 이건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인 셈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이건 제가 가져가죠. 손에 쥐고 있던 결과표를 들어 보이며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오스카가 따라 일어서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혼만큼은 재고해 주십시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베아테를 위해서 그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하를 위해서,”

    “외숙부님.”

    리욘은 오스카의 말을 잘랐다.

    “저는 왕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자신의 조카를, 오스카는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리욘은 개의치 않고 면회실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이혼은 올 여름에 할 겁니다. 휴가 때 스바르트로 갈 예정이니 그때 서류를 접수하면 되겠죠. 반년 정도 유예가 남았으니 베아테와 함께 머릴 맞대고 최대한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 보십시오. 이게 베아테를 위한 저의 마지막 배려입니다.”

    문손잡이를 붙잡으며 리욘은 “참 그런데,” 하고 뒤를 돌아봤다.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요. 그날 밤에 베아테가….”

    그날 밤, 이란 말에 오스카가 고개를 들어 리욘을 바라봤다. 잠시 고민하던 리욘은 곧 “아닙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저기 있는 것들은 숙부님께서 가지셔도 됩니다. 리욘은 턱짓으로 책상 위의 결과표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베아테와 나눠 가지셔도 좋고요.”

    그 말을 끝으로 면회실을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다시 한 번 손에 들린 결과표를 눈으로 훑었다. 그래. 미카엘이 자신의 친자가 아닌 걸 확인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이걸 가지고 그날 밤 베아테가 자신과 관계를 가진 사실마저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건 아닌 거고, 관계를 가진 건 가진 거니까. 기억에조차 없다면 모를까,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몇몇 장면들이 있는 이상 그 사실을 부인할 마음은 없었다.

    특히 자신이 처음 삽입할 때 그녀에게 한 말은 지금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어디 한번 아이를 낳아서 내 자식이란 이유로 죽어 가는 걸 지켜보라고, 아마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베아테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뒤늦게야 자신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상관없다는 듯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전자일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야 다른 사람도 아닌 베아테니까. 아마 자신의 말 따윈 개의치 않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싫다고 밀어내는 그녀의 모습을 본 것만 같은 건, 아마도 약에 취해 엉망이 된 머릿속이 멋대로 만들어 낸 환상 때문일 거라고, 리욘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잊고 있었던 얼굴 하나가 꿈에 나타났다.

    꿈속에서 리욘은 베아테와 섹스를 하고 있었다. 그 밤이었다. 베아테가 억지로 먹인 약에 반쯤 정신을 잃고선 짐승마냥 교미를 해댔던 그 밤.

    꿈속에서도 베아테는 집요했다. 긴 팔과 다리로 리욘의 몸을 옭아매고선 끝임 없이 교성을 질러댔다. 축축하게 젖은 피부가 기분 나빴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리욘은 그녀의 몸 안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자 간드러지는 신음을 흘려대며 허리를 흔들던 베아테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리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놀란 리욘이 움직임을 멈추고 내려다봤을 땐 베아테는 어디 가고 낯선 듯 익숙한 얼굴 하나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제이였다. 그것도 온통 눈물에 젖은 얼굴을 한 제이.

    흐느끼며 그는 제발 놓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 처절한 모습에 가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리욘은 더욱 거칠게 그를 몰아붙였다. 베아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난폭하고 흉포하게 다루었다. 한사코 거부하던 제이는 어느 순간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두 팔로 리욘의 등을 끌어안고는 잔뜩 젖은 신음을 흘리기도 했다. 심지어 사정하기 위해 허리를 드는 리욘을 붙잡으며 살짝 쉰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안에다 싸도 돼요, 전하.’ 그 말대로 리욘은 그의 안에다 사정했다. 긴 사정 내내 입술을 꼭 깨물고 참던 제이는 사정 후 자신의 몸 위로 쓰러진 리욘의 머리를 끌어안고는 잘했다는 듯이 이마에 키스를 해 주었다. 따뜻한 입술이 이마에 닿는 순간 리욘은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난 3년간 필사적으로 이 남자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 했던 이유를.

    그는 자신이 처음으로 믿은 제노스였다. 꼭 제노스가 아니더라도 철든 이후로 누군가를 그렇게 믿고 마음을 준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그는 보란 듯이 그런 자신의 마음을 배신했다. 절대로 읽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말도 없이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믿었던 만큼 그때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떠올리면 분노만 치밀 뿐이었다. 그래서였다. 더는 그를 생각하지 않기로 한 건. 생각해 봤자 미움만 더 커질 뿐이니까. 원망하는 마음만 커질 뿐이니까, 차라리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더는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원망하고 싶지도 않아서.

    하지만 꿈속에서 그가 자신을 끌어안는 순간 리욘은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그를 용서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은 건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리워하고 싶지 않아서였음을. 떠올리면 보고 싶고, 그리워질 걸 알아서, 그래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던 거였다.

    그 후로 리욘은 종종 꿈에서 제이를 만났다. 상황은 늘 똑같았다. 베아테와 정신없이 섹스를 하다 보면 어느 샌가 그녀가 제이로 바뀌어 있었다. 제이는 늘 싫다고, 놓아 달라고 울다가 종내에는 잔뜩 환희에 들뜬 교성을 내지르며 리욘의 정액을 받아 냈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내내 싫다고 울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부처럼 나긋하게 안겨 오기도 했다. 긴긴 국경 지대의 겨울밤을 리욘은 제이와 함께 침대 위에서만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봄이 와 있었다.

    철망 위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고 전나무 가지에서 새순이 움트기 시작할 무렵 리욘은 제이의 근황에 대해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다친 곳 없이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만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흘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하여 받은 에이나르의 메일 내용은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또한 2014년 10월에 텍사스로 이주, 2016년 6월에 여아 출산 후 올해 초 다시 아이슬란드로 이주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