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22)

제이는 여섯 시가 조금 못 되어 눈을 떴다. 살짝 열린 방문 틈새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미국 증시 상황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제이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밤새 굳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방을 나서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수잔이 벽에 걸린 벽시계와 제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알람, 울렸던가?”

“아뇨. 아직 58분이에요.”

“TV 소리가 시끄러워서 깬 건 아니겠지.”

수잔의 기상 시간은 오전 다섯 시 삼십분이었다. 조용한 건 상관없지만 적막한 건 견딜 수 없다는 그녀는 시그니가 일어나기 전까진 항상 TV를 켜 놓았다. 노르드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늘 틀어 두는 거라곤 24시간 내내 영어로 떠들어대는 월드 뉴스 채널이었다.

“그럴 리가요.”

어깨를 으쓱인 뒤 제이는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자 식탁 위에 막 내린 커피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수잔.”

제이는 커피 잔을 집어 들며 거실에 있는 수잔을 불렀다. 돌아보는 그녀에게 잔을 들어 보이며 짧게 thanks, 하고 인사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출근 준비가 끝나자 마지막으로 콘솔 의자 위에 놓인 가방을 들고 다시 방을 나섰다. 곧장 현관으로 향하는 제이를 보며 수잔이 몸을 일으켰다. 비록 잘 다녀오라는 키스는 없었지만 그녀는 항상 이렇게 현관까지 제이를 배웅하곤 했다.

“오늘도 잘 부탁해요, 수잔.”

제이 역시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애초에 다른 곳도 아닌 용병 부대에서 만나 이십 년 가까이 팀을 이끄는 리더와 그 팀원으로 일해 온 두 사람이었다. 애정이 넘치는 키스라든가 낯간지러운 인사말은 서로가 무리였다.

“그래, 살아서 돌아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수잔이 말했다. 피식 웃으며 제이는 신발을 갈아 신었다. 실내용 슬립온을 벗고 단단하게 끈이 조여진 옥스퍼드화에 발을 밀어 넣고 있자니 뒤에서 수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제이.”

제이는 신발을 신으며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너 혹시 약 먹는 거 아니지?”

벽에 반쯤 몸을 기댄 채 묻는 수잔에게 제이는 태연한 목소리로 “왜요?” 하고 물었다.

“이유는 됐으니까 대답만 해.”

“대답 안 한다고 모르는 거 아니잖아요.”

웃음 띤 제이의 말에 수잔이 쯧, 혀를 차며 “이래서 내가 반대한 건데.” 하고 말했다.

“넌 분명 이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망할 꼬맹이 하나 지키자고 제 몸 아까운 줄 모르고 덤벼 댈 줄 알았다고.”

“꼬맹이라니요. 나이가 스물여섯인데.”

제이는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물론 올해 쉰여섯인 수잔에게 서른 살이나 어린 리욘이 꼬맹이로밖에 안 보이겠지만 그래도 내년이면 한 나라를 짊어질 국왕이 될 사람에게 그 호칭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리고 수잔, 나도 이제 그렇게까지는 안 해요.”

시그니가 있는걸요, 라는 말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래, 시그니 생각해서라도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다 안다는 게 이 사람의 장점이었으니까.

“서랍에 있는 약병 당장 갖다 버려. 안 그럼 내가 버릴 거야.”

동시에 단점이기도 했지만.

“다녀올게요.”

제이는 대답 대신 문을 열고 나서며 말했다.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출근길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다행히 오늘은 화요일이니 어제만큼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델링그 광장 주변은 요일이나 시간대와 상관없이, 심지어 주말에도 차가 밀리는 곳이니 마음 놓을 수는 없었다. 지금 시간이 6시 40분이니 광장에 도착하면 7시 15분쯤 되겠지. 왕궁 정문까지 5분 정도 소요된다 치면 거기서부터 왕궁 대현관까지는 또 10분 정도가 걸리니 입궁 허가증을 받아 2층으로 올라가면 아마도 7시 40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의미도 없는 출근길 타임라인을 떠올리며 딴생각을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빌라 건물을 빠져나온 제이는 곧장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목적지를 말하자 곧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제이는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수잔과 함께 있으면 역시 이런 부분이 불편했다. S급 정신 감응 능력자에다 다른 이의 생각을 읽는 걸 크게 꺼려하지도 않는 사람이니까. 물론 제이는 그런 수잔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지난 20여 년간 제노사이드의 수장으로 군림하며 팀원들을 이끌어 온 사람이었다. 평범한 용병단도 아니고 제노스로 이루어진 집단을 이끌기 위해서는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은 버려야 했다. 그렇게 20년이 넘도록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읽고 통제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일을 그만둔 지는 2년 정도밖에 안 됐다. 그러니 아직까지 그때의 버릇이 남아 있다고 해서 그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숨기고 싶은 게 있다면 오늘처럼 적당히 다른 생각을 하며 그 자리를 피하면 되기도 했고. 어쨌거나 그 순간만 넘기면 수잔도 굳이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 추궁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트러블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 사소한 불편을 제외하면 적어도 제이에게 있어 수잔은 최고의 룸메이트였다. 일단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알았고, 그런 만큼 굳이 이해시키려 들거나 조심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성격은 정반대였지만 성향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같은 동양계에다 나이차가 나이차다 보니 밖에 나가면 으레 모자지간이겠거니 하는 눈치였다. 어떤 관계인지 이웃들에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의외로 큰 메리트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그니가 수잔을 잘 따랐다. 수잔 역시 시그니를 손녀처럼 아꼈고. 텍사스에서 4년을 함께 살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었지만 수잔이 처음부터 시그니를 마음에 들어 한 건 아니었다. 심지어 제이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수술을 종용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농담으로라도 그때 얘길 꺼내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발로 걷어차는 시늉을 할 만큼 시그니를 아끼고 있었다. 어쩌면 배 속에 있을 때 그렇게 구박을 해댄 게 미안해서 더욱 예뻐하고 귀여워해 주는 건지도 몰랐지만 말이다.

생각하는 사이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제이는 언제나처럼 광장에서 내려 왕궁까지 걸어갔다. 대현관에서 입궁 허가증을 받고 2층으로 올라갔을 때는 정확히 7시 40분이었다. 별것도 아닌데 기분이 좋았다. 이 좋은 기분을 망치지 않기 위해 제이는 우선 무전기를 껐다. 그 상태로 집무실 앞 복도에 대기 중인 경호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7시 52분쯤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났다.

제이는 좌측 계단을 통해 왕궁의 3층으로 올라갔다. 겨우 한 층 차이일 뿐인데도 마치 딴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3층에는 손님들을 위한 몇 개의 게스트 룸과 왕들의 도서관이라고 불리는 서재,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아둔 초상화의 방 등 평소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공간들이 몰려 있다 보니 한여름에도 괴괴할 정도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조용히 걸어간 제이는 왕들의 도서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복도에 난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소리도 없이 밀려 들어왔다. 제이는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창틀에 몸을 기댔다. 이곳에서는 왕세자궁의 전경이 가리는 것 없이 다 보였다. 여기서 리욘의 출근을 지켜보다 그가 집무실에 도착해 일을 시작할 즈음 다시 2층으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정확히 55분이 되자 현관 앞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왕세자궁에서 본궁까지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였지만 안전을 위해 차로 이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곧 수행원들과 함께 궁을 나선 리욘이 차에 올랐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차는 금세 후원을 지나 본궁에 도착했다. 차가 대현관 쪽으로 가기 위해 크게 방향을 트는 것까지 본 뒤 제이는 창문을 닫았다. 이제 1분 후면 차는 본궁의 현관 앞에 멈춰 설 것이다. 2층의 집무실에 도착하면 리욘은 가장 먼저 에이나르와 비서진에게 간단한 업무 보고를 듣고 각각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리고 8시 20분쯤부터 본격적인 오전 일과가 시작된다. 오늘은 일찍부터 두 건의 접견 일정이 잡혀 있었다. 접견 요청인은 대표적인 왕세자파 귀족 하르트발 백작과 쇼나르 후작이었으므로 굳이 자신이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제이는 안전하게 10분 정도 더 기다린 뒤 8시 30분이 되어서야 2층으로 내려갔다. 다른 경호대원들과 함께 집무실 앞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로겐이 찾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어디 계셨습니까. 무전기도 꺼 놓으시고.”

“잠시 근처 수색 좀 하다 왔습니다.”

로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수색이요?” 했다.

“뭐 수상한 기색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꼭 그런 게 없어도 한 번씩은 둘러보는 게 좋으니까요.”

아아, 하고 로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찾으셨습니다.”

“그렇군요.”

제이는 적당히 대답한 뒤 경호대원들이 지키고 있는 복도 끝으로 가 섰다. 어차피 제대로 된 용건이 있어서 찾은 건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왜 관사로 들어오지 않느냐, 분명 이번 주부터는 왕세자궁에서 생활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는 소리나 하려고 찾은 거겠지. 어제도 종일 자신만 보면 그 소릴 해댔으니까.

그래서 오늘은 가급적이면 리욘과 마주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고도 그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다행히 오늘은 접견 후 오찬 모임만 제외하면 궁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다. 에이나르의 말로는 요즘 밀려드는 업무량으로 인해 왕세자 전하께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신다고 하니 오늘도 내내 집무실에 틀어박혀 서류를 살펴볼 확률이 높았다. 그럼 차라리 쉬웠다. 그가 집무실 안에서 서류를 보는 동안 경호대원들은 이렇게 복도에 서 있기만 하면 됐으니까. 밖으로 나갈 땐 늘 그렇듯 경호 차량에 타면 됐고 그 외 이동시에는 다른 대원들의 뒤에 서서 가면 됐다. 그렇게 적당히 거리만 유지하며 따라가도 어느 정도 귀찮은 일은 피할 수 있을 터였다. 리욘이 찾거나 부르는 건 그냥 무시하면 되는 거였고.

하지만─

“이게 누구신가. 그 얼굴 보기 힘들다는 콜스케그 대위 아니신가.”

그가 직접 찾아오는 것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걸, 불행히도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제이는 깨달았다. 둘만 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야 점심시간의 구내식당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이는 지금 제3 특별 경호 중대 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경호대원들 앞에서 왕세자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전하, 어쩐 일이십니까. 식당엘 다 오시고.”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리욘은 반색하며 일어서는 경호대원들을 도로 자리에 앉힌 뒤, 자신도 자연스럽게 제이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1층에 일이 있어 왔다가 마침 자네들이 여기서 식사 중이란 소릴 듣고 잠깐 들렀지.”

물론 뻥이었다. 하지만 그게 뻥이란 사실을 아는 건 제이밖에 없었다. 경호대원들은 자신들을 보기 위해 일부러 이 사람 많은 구내식당에까지 행차하셨다는 왕세자 전하의 의리에 감복한 듯 촉촉하게 젖은 눈빛으로 ‘전하…’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원래 제이의 옆자리 주인이었던 페르들란 하사가 도착했다.

“전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왕세자를 보며 페르들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혹해하기보다는 반가워하는 눈치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이는 이때다 싶어 차분한 목소리로 리욘에게 말했다.

“자리 주인이 왔는데 비켜 주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제이의 말에 리욘이 그래? 하며 페르들란을 쳐다봤다.

“여기가 자네 자린가? 페르들란?”

“네? 아, 네. 그렇긴 합니다만….”

“꼭 여기 앉아야만 소화가 잘된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아이구, 설마요. 자리야 아무 데나 앉으면 되는 거지요.”

얼른 대답하며 페르들란이 맞은편에 있는 푸벤 중사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이제 됐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리욘을 외면한 채 제이가 말없이 물 잔을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께선 사관학교 선후배지간이라고 하셨죠.”

푸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경호대원들이 리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대위님은 어떤 학생이었습니까?”

“두 분 사관학교 시절부터 친하셨던 건가요? 대위님도 전하의 밤낚시 패밀리 중 한 명이었습니까?”

“아니야, 밤낚시 패밀리는 전하의 동기라고 했어. 대위님은 2년 선배니 그쪽 패밀리는 아니겠지.”

말하는 내용들을 보아하니 리욘의 사관학교 시절에 대해선 이미 다들 알 만큼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2년을 국경 지대에서 함께 지냈으니 어지간한 이야기는 다 들어 알고 있겠지. 그럼 당연히 뉴 페이스인 이쪽의 이야기를 궁금해 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런 그들의 관심이 제이는 부담스럽다기보다는 불안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은 리욘과 같은 사관학교를 다닌 적이 없으니까. 리욘이 자신과의 에피소드랍시고 풀어 놓는 이야기래 봐야 모두 지어낸 말일 게 분명했다.

“평소엔 얌전한 사람인데 주사가 엄청났어. 술만 마시면 늘 옷을 벗었거든. 스트립쇼를 벌이듯 한 장씩, 한 장씩 벗어 던지고는 항상 속옷 한 장만 남긴 상태로 옆 사람에게 춥다고 안아 달라고 매달리곤 했지.”

그래,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정말입니까? 대위님께 그런 주사가 있다고요?”

“대위님, 아직도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설마 전하께도 안아 달라고 하신 겁니까?”

경악에 차서 한마디씩 외치는 경호대원들로 인해 테이블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찌나 시끄러웠던지 식당 안의 사람들이 식사를 멈추고 힐끔힐끔 쳐다볼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상태로 리욘은 태연하게 소설을 써내려 갔다.

“물론 나한테도 안아달라고 매달린 적이 있지.”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떻게 하긴. 춥다고 징징거리는데 안아 줘야지. 그랬더니 이번엔 키스를 해 달라고 하더군.”

“그, 그래서요? 해 주셨습니까?”

“하도 애원해서 딱 한 번.”

으아아아아. 경호대원들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두드려 댔다. 혈기왕성한 고등학생들도 아니고, 나이 평균 33.4세의 군인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과격한 반응이었다. 애초에 이런 반응이 나올 걸 알았으니 리욘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며 냈던 거겠지만.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대위. 나 지금까지 이 얘기 아무에게도 한 적 없었어. 오늘 처음 말하는 거야.”

진지한 목소리로 리욘이 말했다. 이 외모에 이 정도 연기력이면 배우가 됐어도 크게 됐을 텐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제이는 “네, 압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저도 전하께서 술에 취해 옷 다 입은 채로 복도에 드러누워 소변 보신 거, 아무에게도 말 안 했습니다. 쭉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 왔죠.”

담담하게 이어진 제이의 목소리에 순간적으로 테이블 주변이 얼어붙었다. 꽤 오랫동안 ‘지금 내가 무슨 얘길 들었지…?’ 라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리고 있던 대원들은 곧 정신을 차리곤 리욘을 향해 외쳤다.

“저, 전하. 진짭니까?”

“한 번도 취하신 걸 못 봐서 몰랐는데… 그런 주사가 있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옷을 다 입고 복도에 누워서… 그런….”

“전하. 안 됩니다. 그건 고치셔야 합니다.”

경악에 가득 찬 표정으로 한마디씩 던지는 자신의 경호대원들을 보며 리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대위가 농담한 거야.”

그렇지, 대위?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침착한 어조로 묻는 리욘에게 제이는 아까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저도 차라리 농담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선을 내리깐 채 그렇게 말하자 다시 한 번 주위가 조용해졌다. 이쯤 결정타를 날려 줄 필요가 있었다. 제이는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비록 같이 일한 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새로 온 대위가 이런 농담을 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모든 대원이 다 알고 있었다.

“자네들 지금 그 표정은 뭔가. 설마 대위의 말을 믿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리욘이 말했다. 하지만 리욘을 바라보는 대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충격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듯 리욘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기가 찬다는 듯 한참을 소리 내어 웃던 그는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제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봐, 대위.” 하고 말했다.

“내 경호대원들이 몇 년을 알고 지낸 나보다 일주일 함께 일한 자네를 더 신뢰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자네 사람 홀리는 재주가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전하께서야말로 이렇게 권력에 굴하지 않고 참된 진실만을 받들 줄 아는 훌륭한 군인들을 어디서 데려오신 건지. 저도 전하의 안목에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 중입니다.”

“말은 잘하는군.”

리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 원래 이렇게 달변가였나?”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난 먼저 가 보도록 하지. 다들 식사 맛있게 하도록. 그리고 내일부터 한 일주일 정도는 이 식당 말고 다른 곳에서 식사하고.”

뜬금없는 말에 경호대원들이 눈을 크게 뜨며 “일주일 동안은 다른 곳에서 식사하라고요? 이유가 뭡니까?” 하고 물었다.

“오늘 내가 들렀으니 당분간은 음식에 뭐가 섞여 나올지 모르거든.”

웃으며 말한 뒤 리욘은 그대로 식당을 떠났다. 다분히 농담처럼 한 말이었으나 마냥 농담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제이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비서실로 찾아가 에이나르에게 물었다.

“혹시 최근에 전하 음식에 누가 장난친 적 있습니까?”

“네? 전하께서 말씀하시던가요?”

어떻게 알았냐는 듯 묻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조금 전 식당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아아, 그건 아마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 맞으실 거예요.”

“마냥 농담으로 들리진 않던데요.”

“음, 그게… 맞아요. 독살 시도가 있긴 했어요.”

에이나르가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하지만 최근이라고 해야 할까, 거의 두 달 전에 있었던 일이라서요.”

“그걸 왜 여태 말 안 한 거죠?”

“그야 이미 다 끝난 이야기고… 또 왕비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요.”

확실히 왕비가 벌일 만한 짓은 아니었다. 그녀가 하고자 마음만 먹었다면 굳이 번거롭게 독 같은 거 쓰지 않고도 단번에 리욘을 해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명색이 경호를 맡겼으면 그런 부분까지도 다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라도 더 경계하고 지켜보고 했을 텐데, 아무리 두 달 전 이야기로서니 지금까지 자신에게 관련된 이야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 몸 상하거나 하지는 않으셨고요?”

“먹자마자 바로 뱉어 내셨거든요. 혹시 몰라 병원에 가서 위세척도 받으셨고요. 아무 문제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네, 그런데….”

에이나르의 말에 따르면 그 뒤가 더 문제였단다.

“그게 왕궁에서 식사하다 생긴 일이었거든요. 그날로 당장 요리사들 바꾸고, 그래도 몰라서 한동안 식사 때마다 주의를 기울였어요. 조리 과정에도 신경 쓰고 재료도 우리가 직접 구입해서 주방에 갖다 주고, 식전에 항상 개들에게 음식도 조금씩 먹여 보고 그랬는데….”

그 후로 무려 두 번이나 더 미심쩍은 음식들이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단 2주 사이에. 한마디로 3주 동안 세 번이나 독살시도가 있었던 셈이다. 이쯤 되면 왕실 측의 관리 허술 보다 상대방의 대범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보통 암살 시도가 한 번 이루어지면 그 전보다 몇 배로 더 경계가 삼엄해지는 법이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은 상황을 좀 지켜보다 다시 경계가 느슨해질 타이밍을 노리는 법인데, 이 범인은 무슨 생각인지 곧바로 또 덤벼든 것이다. 그것도 보름 사이에 두 번씩이나.

“녀석도 대범하지만, 우리 쪽 과실도 있긴 했어요. 당연하지만 정말 철저히 관리할 땐 누가 뭐 장난질 칠 틈이 없거든요. 그런데 아주 잠깐만 좀 한눈을 팔거나 관리에 소홀해지면 바로 그런 일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다 보니 전하께서도 차라리 그냥 포장되어 나온 공산품을 먹는 게 낫겠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거죠.”

“그 정도면 노이로제에 걸릴 만도 하죠.”

“아뇨, 노이로제도 아니고 전하는 그냥 귀찮으신 거예요.”

전하 성격 아시잖아요. 에이나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말 그대로 귀찮으신 거예요. 더는 그 문제로 신경 쓰기 싫으신 거죠. 재료부터 일일이 다 준비하고 조리과정 지켜보고 검수하고 식사 자리에 개 데리고 와서 먼저 먹여 보고 그러는 것들이요. 거기에 들이는 인력과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러느니 그냥 내가 공산품 사다먹으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 아니냐는 거다. 일국의 왕세자가 할 만한 발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리욘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맛은 둘째 치고 영양적인 측면에서 너무 별로지 않습니까.”

“공산품만 드시는 건 아닙니다. 요즘 가게에서 만들어서 파는 음식들 깔끔하게 잘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 것도 드시고 가끔은 레스토랑 음식 같은 걸 다른 사람에게 테이크 아웃으로 주문하도록 한 다음에 우리가 가서 가져오기도 하고 그래요.”

그것도 결국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지금이야 타고난 체력과 체격으로 버티고 있다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 먹었다간 일 년도 안 돼 몸 상태가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뭔가 제대로 된 대책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던 제이는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거기까지는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리욘 측에서 먼저 독살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관련된 지시를 내린다면 모를까, 그러기 전에는 자신이 뭐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왕세자의 식생활과 관련된 모든 책임과 권한은 그의 비서실과 주치의에게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리욘이 그렇게 하길 원한다는데 일개 경호원에 불과한 자신이 더 이상 뭐라고 하겠는가.

“알겠습니다. 뭐, 알아서 잘하시겠지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제이는 돌아섰다. 그대로 비서실을 나서려는 그를 에이나르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잠시만요, 제이. 이번 주 왕비의 공식 일정이 확정됐어요.”

“그래요?”

전에 말했던 그건가요? 다시금 에이나르에게 다가가며 제이는 물었다.

“네. 멘글라다에서 여는 자선바자회 이번 주 금요일에 열리는 거요.”

멘글라다(Menglada)는 쉽게 말하면 귀족 부인들의 모임이었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치료와 위안의 여신 멘글라다의 이름을 그대로 따와 만든 이 부인회는 해마다 여러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 바자회를 열고 구호 활동을 벌이는 등 다방면으로 선행을 베풀고 있었다. 덕분에 ‘귀족 부인들의 모임회’라는 공격 받기 딱 좋은 프레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들로부터 많은 호응과 지지를 얻고 있는 단체였다. 이번 주 금요일에도 소외 아동들을 돕기 위한 자선 바자회를 광장에서 열기로 했는데, 거기에 과연 리우지엔이 참석할 것인가가 제이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참석하는 걸로 결정됐나 봅니다. 그래서 오늘 바예리 백작 부인과 만나기로 한 모양이에요. 바예리 백작 부인이 이번 바자회의 총 책임자거든요.”

“백작 부인이 궁으로 오는 겁니까?”

“아뇨, 왕비의 외출이 예정된 걸로 봐선 왕비가 백작 부인의 집으로 갈 모양인가 봐요. 이거 보세요.”

에이나르가 왕비궁 비서실에서 입수해 온 스케줄 표를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 왕비는 오늘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외출이 예정되어 있었다. 행선지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지만 바예리 백작가로 향할 게 분명했다.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일단 리우지엔이 왕비궁을 벗어난다는 자체가 중요했다.

“에이나르. 군복 좀 준비해줄 수 있나요? 일반 군복 말고, 왕실 경비대원들 걸로요.”

스케줄 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이는 말했다.

***

경비대원들의 막사는 정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정원 관리사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건물이었으나 2차 대전 이후 에시르가 북유럽 연방의 수장이 되면서 왕실 경비 인원을 두 배로 늘림에 따라 경비대원들의 막사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거창하게 막사라고 해도 경비대원들의 숙소는 따로 있었기 때문에 거의 휴게실로나 이용되는 정도였다. 국왕 일가의 개인 경호를 맡고 있는 특별 경호 중대 대원들을 제외한 일반 경비대원들은 근무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면 항상 이곳에 와서 준비를 마친 뒤, 본인이 맡은 구역으로 향하곤 했다.

왕궁의 정문을 비롯해 모든 경비 초소의 경비대원들은 6시간 단위로 교대하게끔 되어 있었다. 왕비궁에서 가까운 후문은 두 명의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오늘 저녁 근무자는 바우타르와 비겔란이었다. 제이가 막사에 도착했을 땐 마침 비겔란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일찍 왔군, 비겔란. 자네 오늘 후문 쪽 교대였던가?”

벤치에 앉으며 제이는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단추를 꿰느라 정신이 없는 비겔란은 제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어.” 하고 대답했다. 왕실 경비대원들의 군복은 실용성이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철저히 관상용에 목적을 두고 만든 디자인이었다. 특히 몸에 딱 맞게끔 만들어진 타이트한 상의는 보는 사람들의 눈이야 즐거워도 입는 사람 입장에선 고역이었다. 심지어 장식용으로 달린 단추 개수도 어마어마해 입고 벗을 때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후문이지. 자네는 어디, 서문인가? 아니면 정문?”

열심히 단추를 잠그며 비겔란이 말했다.

“난 오늘 비번이야. 푸욘이 잠깐 급한 볼일이 있다고 세 시부터 다섯 시까지만 자기 대신 서문을 봐줄 수 없겠냐고 해서 온 거지.”

“그렇군. 그럼 이제 집으로 가는 건가? 부러운걸.”

그 말과 동시에 마침내 상의의 단추를 모두 꿴 비겔란이 소매의 단추를 잠그기 위해 팔을 드는 찰나였다. 투둑, 소리와 함께 가슴팍의 단추 두 개가 떨어져나갔다.

“나 정말 환장하겠구만.”

그야말로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겔란이 허리를 숙였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단추를 줍는 사이 관물대 옆에 세워져있던 장총 한 자루가 천천히 이동했다. 총이 제이가 앉아 있는 벤치 뒤쪽으로 소리도 없이 넘어가는 순간 비겔란이 몸을 일으켰다. 주워든 단추를 주머니 안에 집어넣던 그는 “어라?”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관물대 옆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총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이, 이게 어디 갔지? 분명 여기다 세워 놨는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관물대 주변을 살펴보는 비겔란에게 제이는 태연한 목소리로 “자네 안 나가나?” 하고 물었다.

“곧 여섯 시야.”

“아니, 나가야 하는데… 내 총이 없어졌어. 분명 여기 세워 뒀는데. 이게 도대체 어디로, 아니, 난 틀림없이 여기다 세워 뒀는데?”

혼비백산하여 휴게실을 뒤지기 시작한 비겔란에게 제이는 부러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 수 없지. 일단 교대는 해야 하니 내가 대신 가도록 하지. 자네 총 찾는 즉시 바로 와야 하네.”

“어어, 당연하지. 총 찾는 대로 바로 달려가야지. 고맙네!”

고맙긴. 속으로 대꾸하며 제이는 막사를 나섰다. 그가 후문으로 도착했을 땐 이미 근무 교대를 마친 바우타르가 혼자 서 있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모자를 벗어 얼굴을 부치고 있던 바우타르는 군모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제이를 보자마자 “응? 비겔란은?” 하고 물었다.

“총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겠대. 찾는 대로 오겠다고 해서 대신 잠깐 봐 주기로 했어.”

“얼간이 자식. 그 자식은 늘 그래.”

쯧 혀를 차며 바우타르가 말했다. 다행히 제이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사실 의심할 것도 없긴 했다. 왕궁 안에서 일하는 경비대원만 이백여 명에 달했다. 그중에는 얼굴을 아는 이도 있고 모르는 이도 있었다. 어느 날은 친분이 있는 이와 함께 근무를 서기도 했고, 어느 날은 처음 보는 이와 함께 근무를 서기도 했다. 제이는 후자에 해당할 뿐이었다.

바우타르가 먼저 후문의 왼쪽을 차지하고 섰기 때문에 제이는 자연히 오른쪽으로 가게 되었다. 통상 왼쪽에 선 사람이 출입객의 신분증과 출입증을 확인하면 오른쪽 사람은 문을 열어주게 되어 있었다. 어차피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는 후문에선 어느 쪽이건 여섯 시간 동안 망부석 노릇만 하다 갈 뿐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왕비의 저녁 외출이 예정되어 있으니까. 스케줄 표대로라면 왕비는 늦어도 7시 정각에는 왕궁을 나서야만 했다.

드디어 그 리우지엔의 실물을 확인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뛰었다. 탐색전일 뿐이라고 해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엉뚱한 생각들로 상대방의 눈을 속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태를 오래 지속시키는 게 문제였다. 뇌라는 건 무의식중에도 생각을 확장시키려 들기 때문에 아주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순간 통제를 벗어나 멋대로 사고를 전개해 버린다. 아차, 하는 순간에는 이미 머릿속은 리우지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리우지엔이 자신의 머리를 터뜨리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녀의 심장을 멈춰야했다.

“…….”

어느새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반대로 목은 자꾸만 타들어 갔다. 겨우 침을 삼키며 제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6시 47분. 7시까지는 이제 겨우 13분밖에 남지 않았다.

제이는 크게 심호흡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정신 감응 능력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이제 곧 리우지엔이 왕비궁을 나설 것이다. 그녀가 이 후문을 통과해 차에 오르는 순간까지, 단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치면 안 됐다.

마음을 가다듬는 사이 어느덧 7시 정각이 되었다. 하지만 왕비궁 쪽에서는 어떠한 움직임의 기색도 없었다. 순간 제이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물론 준비하다보면 몇 분 정도는 늦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조금 늦어지는 거라고 하기에는 왕비궁 쪽이 지나치게 조용한 게 마음에 걸렸다. 외출을 하면 수행원들이 먼저 분주하게 움직이는 법인데, 왕비궁 주변에는 사람 그림자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나다를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록 왕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7시 20분이 조금 지났을 무렵 검은 세단 한 대가 왕궁 후문 앞에 멈춰 섰다.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문을 열자 보라색 정장을 입은 중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차에서 내리는 여인을 보는 순간 제이는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달았다.

“출입증 있으십니까.”

바우타르가 경례 후 자세를 바로하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신분증도요.”

부인이 내민 출입증과 신분증을 살펴본 바우타르가 고개를 들며 “바예리 백작 부인, 맞습니까?” 하고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네, 맞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바우타르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제이가 문을 열어주자 백작 부인은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안으로 들어섰다. 왕비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는 무거운 철문을 도로 닫았다. 철컹, 소리와 함께 후문이 닫히자 그제야 비로소 백작 부인의 운전기사가 돌아섰다.

- 두 시간 정도 걸리려나. 그동안 차에서 눈이나 잠깐 붙여야겠군.

크게 기지개를 켜는 운전기사의 등을 바라보며 제이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예상대로였다. 왕비가 아예 약속 장소를 왕궁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허탈해 할 겨를이 없었다. 왕비가 직전에 약속을 바꾼 거라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을 테니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이곳에서 본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선, 곧바로 약속 장소를 바꿔 백작 부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거다.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아무리 후문에서 왕비궁까지가 지척이라고는 하나, 그 큰 건물 안에서 나오지도 않은 채 이곳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파악하고 생각까지 읽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게 가능하려면 정신 감응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하는 건지, 제이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어이, 자네 괜찮나?”

바우타르의 목소리에 제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지?”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제이는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제이는 이 감각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엔 몸 전체가 조금 나른하고 덥게 느껴진다. 이때만 해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곧 허리 쪽에서부터 골반 아래가 뻐근하게 저려오기 시작하는데, 이때부터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조일 뿐이었다. 메인이벤트는 다음이었다.

“미안한데 바우타르, 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제이는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일단 막사로 가서 비겔란이 총을 찾는 걸 도와주겠네. 못 찾으면 내 총이라도 쥐어 주도록 하지.”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군.”

어서 가 보라는 듯 바우타르가 손을 내저었다. 제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막사로 갔더니 비겔란은 그때까지도 총을 찾고 있었다. 제이는 벤치 뒤에서 총을 꺼내 비겔란의 품에 안긴 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과 총을 번갈아 바라보는 남자를 남겨둔 채 다시 막사를 빠져나왔다.

막사에서 본궁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였다. 그것도 대현관까지의 거리였고, 가장 가까운 서현관까지는 4, 5분이면 도착했다. 정원을 가로질러 가면 금방이었지만 제이는 건물 뒤로 이어진 후원으로 향했다. 자꾸만 식은땀이 나고 허리 쪽이 뻐근한 게 조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후원으로 접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배가 끊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한 걸 제이는 이를 악물고 몇 걸음 더 걸어가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으….”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을 눌러 죽이며 제이는 깊이 허리를 숙였다. 머리에 쓰고 있던 군모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주워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기억하고 있던 것보다 더욱 끔찍한 통증에 제이는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하긴, 거의 십 년 만이니까. 벤치에 앉아 잔뜩 몸을 숙인 채 제이는 생각했다. 호르몬제를 복용한 것도, 그 부작용을 이렇게 온몸으로 실감하는 것도 모두 십 년 만이었다. 한창 젊을 때, 흔한 말로 날아다니던 시절에도 호르몬제만 복용했다 하면 이틀은 침대에서 나오지 못했다. 호르몬제에 대한 부작용 증상은 누구에게나 다 조금씩 나타난다고는 하지만 그중에서도 자신은 유난한 편이었다. 오죽했으면 담당 연구원이 먼저 앞으로는 절대 먹지 말라며 복용 금지 처방을 내릴 정도였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년 만에 다시 그 약을 먹은 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희미하게 흐려져서는 아니었다. 먹으면 힘들 것도 알았고, 죽도록 괴로울 것도 알았다. 하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됐다. 약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A급 능력자인 자신은 결코 리우지엔을 이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약을 먹고도 이 정도였다. 요새 안에 틀어박혀 나와 볼 생각조차 않는 상대에게 당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전력 차이가 엄청났다. 더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이 승부의 결과는 안 봐도 뻔할 뻔 자였다.

그나저나 통증이 왜 이렇게 빨리 시작된 거지.

제이는 머릿속으로 약을 복용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지난주 월요일에 처음 출근하면서 먹기 시작했으니 오늘로 9일째였다. 보통 이 정도 통증이 약 복용 2주 차에 나타났던 걸 감안하면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마지막으로 약을 먹은 게 벌써 십 년 전이었다. 십 년 동안 몸이 어떻게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였다. 심지어 그 사이에 아이도 한 번 낳았고. 임신 기간 동안 호르몬 수치는 널을 뛰어댔고 그에 따른 몸의 변화도 다이나믹했다. 능력치는 S급 수준을 웃돌았지만 호르몬제를 복용했을 때와 같은 부작용 같은 건 없었다. 사실 이번에 약을 먹기 시작했을 때 잠깐 그런 생각도 했다. 혹시 그때 아예 체질이 바뀌어서, 호르몬제를 먹어도 능력치는 향상되고 부작용은 없는 그런 기적이 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정말 꿈같은 발상이었다.

하긴, 기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면 그건 기적이 아니지.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통증은 여전히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었다. 이럴 때는 배를 따뜻하게 하고 배꼽 아래쪽을 지그시 누르듯 마사지해 주는 게 좋다고,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뭐라도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는 손끝으로 자신의 아랫배를 더듬다 배꼽 아래쪽을 천천히 눌러 보았다. 순간 송곳으로 찌른 듯 날카로운 통증이 손 닿은 곳에서부터 안쪽으로 퍼져 나갔다. 제이는 입술을 깨물며 낮게 신음했다. 어느새 이마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당장의 통증이야 그렇다 쳐도, 이래서야 금요일까지 버틸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진통제를 먹으면 어느 정도 통증이 가시기야 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게다가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라면 복통 다음엔 출혈이었다. 보통 배가 아프기 시작하고 닷새 정도 후부터 하혈의 조짐이 보였다. 그 전에 약 복용을 중단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수도 없었다. 금요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을 계속 먹어야만 했다.

미치겠군….

제이는 몸을 웅크리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 특히 아까 손으로 누른 곳이 계속 찌르듯 아팠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기어서라도 궁 안으로 들어가야 하나, 의료실이 몇 층에 있었던가, 복잡한 머리로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말했다.

“괜찮습니까.”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한참 올려다봐야 할 높이에서 낯선 듯 익숙한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누구지.

멍하니 생각하던 제이는 남자의 머리에 씌워진 버킷 햇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앨런이었다. 앨런 최.

“다른 경비대원을 불러드릴까요? 누구, 근처에서 근무 중인 동료 중에 아는 사람 없습니까.”

입고 있는 옷 때문인지 이쪽을 경비대원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잠깐 이러고 있으면 돼요.”

금방 좋아질 겁니다. 제이는 겨우 웃으며 말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는 그의 시선 끝에 앨런의 손목이 보였다. 재킷 소매 아래 드러난 그의 양 손목에는 시계가 채워져 있지 않았다. 아주 잠깐 읽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관두었다. 읽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지금 자신을 굉장히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괜찮겠습니까.”

재차 앨런이 말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부축해드릴 테니 어디로든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제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앨런의 얼굴만 보느라 미처 몰랐는데, 정말로 하늘이 먹구름으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변덕스러운 북유럽의 여름 날씨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더는 방법이 없었다. 제이는 염치불구하고 앨런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럼 죄송하지만 진통제를 좀 구해다 줄 수 있을까요.”

“진통제요?”

“네. 아무거나 상관없으니까….”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앨런이 자신의 맥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다시 손을 꺼냈을 땐 포장도 뜯지 않은 타이레놀 한 통이 손바닥 위에 놓여 있었다.

“타이레놀, 괜찮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앨런은 직접 포장지를 뜯어 용기 안에 들어있는 알약 중 두 개를 꺼내 제이에게 건넸다.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아뇨, 두 알이면 충분합니다. 고맙습니다.”

제이는 앨런에게 받은 타이레놀 두 알을 입에 넣은 뒤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물 없이 삼킨 뒤 다시 한 번 고맙다고 인사하자 그제야 다시 약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앨런이 “아닙니다.” 했다.

“도움이 돼서 다행입니다. 다른 약보다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편이니 아마 곧 좋아지실 겁니다.”

제이는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씹어 먹는 형태다 보니 흡수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타이레놀은 원래 늘 상비하고 계신 건가요?”

“편두통이 있어서요.”

아아. 제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힘드시겠군요.”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

짧게 말한 뒤 앨런은 자신의 모자를 한번 꾹 눌러 썼다. 그럼 이만, 하고 그대로 돌아설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제이 앞에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고맙기는 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신세를 지게 된 상황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제이는 허리를 펼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부러 힘차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슬슬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요? 좀 괜찮아졌나요?”

“네, 덕분에요.”

감사했습니다. 제이는 앨런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입니다.”

손을 마주 잡으며 앨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마음에서 우러난 안도의 한숨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이는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저려 오는 걸 느꼈다. 연민이라기엔 가당치 않았고 어쭙잖은 동포애라기엔 자신에게 모국의 존재가 그 정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몇 마디를 나누었을 뿐인 사람을 상대로 이렇게 애틋한 감정을 느껴본 건 17년 전 어린 리욘을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사례를 하고 싶습니다만.”

“당치도 않습니다.”

앨런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가 붙잡고 있던 제이의 손을 놓는 순간 투둑,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얼른 들어가 보십시오.”

그렇게 말한 뒤 앨런은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이 곧 굵은 빗줄기에 가려졌다. 제이는 정원 쪽으로 향하는 앨런과는 반대 방향으로 돌아섰다. 후원에서 본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찾아 후문으로 들어갔다.

2층에 도착한 제이는 왕세자 집무실이 아닌 경호원 대기실로 향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어야 했다. 이 꼴을 하고 있는 걸 리욘에게 들키면 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한 소리 들을 게 분명했다. 제이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벗은 군복을 들고 비서실로 향했다.

“에이나르, 여기 빌렸던 옷이요.”

비에 젖어 무거워진 군복을 건네자 에이나르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더니 곧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어떻게 됐어요? 왕비는 만났나요?”

제이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왜요, 엇갈렸어요? 아니면 혹시 잠입에 실패했나요?”

“나중에 말해 줄게요.”

오늘은 설명할 기분이 아니라는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는 “아…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퇴근하는 거죠? 얼른 들어가요, 제이. 많이 피곤해 보여요.”

“수고해요, 에이나르.”

짧게 인사한 뒤 제이는 돌아섰다. 막 비서실의 문을 열려는 찰나 한 박자 빠르게 바깥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종일 바쁘군, 대위.”

한숨 쉬는 제이를 본 리욘이 보란 듯이 문을 막고 서서 말했다.

“이제 퇴근하는 건가?”

“네.”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최대한 말을 섞지 않고 틈이 보이는 대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제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리욘이 말했다.

“잘됐군. 마침 왕세자궁에 다녀올 일이 있는데 내가 직접 자네 방까지 안내해 주지.”

그렇게 말하자마자 우악스런 손아귀 힘에 팔을 붙잡혔다. 순식간에 복도로 끌려 나간 제이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하!” 하고 외쳤다.

“놔주십시오. 전하.”

“놔달라니. 누가 보면 강제로 끌고 가는 줄 알겠군.”

천연덕스럽게 말한 리욘은 더욱 바특하게 제이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품에 안다시피 한 채 복도를 걸어가며 리욘은 “영광으로 알아, 대위.” 하고 말했다.

“이 내가 손수 에스코트해 주고 있지 않나. 이 정도 서비스는 흔치 않은 일이야.”

“전하. 빨리 놓으십시오.”

제이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지친 상태였다. 약 부작용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도 그렇지만 그렇게 약을 먹고도 리우지엔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단 사실에 자괴감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전하. 제발요. 저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닙니다.”

리욘이 우뚝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제이를 바라보았다.

“자네 눈엔 내가 지금 장난하는 걸로 보이나?”

차갑게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만큼 사람의 마음을 시리게 하는 건 없었다. 제이는 리욘이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청색이 옅게 드리워진 리욘의 눈동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조각의 빙하 같기도 했고, 투명한 얼음의 결정체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꼭 북풍이 몰아치는 설야(雪野) 같았다.

“죄송합니다.”

제이는 곧바로 사과했다. 이번 건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실언이었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좀 놓아주십시오.”

아픕니다. 제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제야 리욘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똑같은 회색 눈동자인데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늘 자신만을 바라보는 또 다른 회색 눈동자를 생각하며 제이가 한숨을 삼키는 사이 창틀에 몸을 기댄 리욘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위. 관사에서 생활하라는 건 자네에게 하는 부탁이 아니야. 물론 명령도 아니고.”

“명령이 아니라고요?”

제이는 낯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리욘은 대답 대신 낮은 목소리로 “대위.” 하고 불렀다.

“우리 경호대원의 하루 근무 시간이 어떻게 되지?”

“3교대를 원칙으로 하는 여덟 시간이죠.”

제이의 답변을 들은 리욘이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만에 제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제이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블라스트의 PSD(요인 경호팀)는 의뢰 기간 중 업무 시간제한을 어떻게 두나.”

제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PSD는 기본적으로 24시간 밀착경호를 뜻하는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알겠나, 대위?”

숙이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리욘이 말했다.

“하루 여덟 시간, 3교대 근무라는 건 일반적인 경호대원의 경우야. 하지만 자네는 그런 일반적인 경우와는 거리가 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자네를 배려해 그 일반적인 경우와 동일하게 대우해 주고자 노력하는 중이고. 하루 여덟 시간, 3교대 근무에 관사 제공까지.”

그 말은 결국 24시간 밀착 경호 근무하기 싫으면 관사로 들어오라는 얘기였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내가 계약서에 근무 시간에 대해 따로 적은 내용이 없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이미 하루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로 머릿속은 포화 상태였다. 게다가 피곤해서인지 머리조차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어때, 이제 내 배려를 감사히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나?”

팔짱을 낀 채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고개를 든 그는 리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전하의 배려에는 감사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필요 없습니다. 3교대는 철회하고 근무 시간을 늘리겠습니다.”

“뭐?”

리욘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아랑곳 않고 제이는 자신이 할 말만 했다.

“어차피 24시간 경호라고 해도 잠은 재우지 않습니까. 그럼 그 시간 제외하고 하루 18시간씩 밀착 경호, 하겠습니다. 대신 나머지 여섯 시간 동안은 제가 어디에서 뭘 하든지 상관하지 마십시오.”

“제이.”

리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그는 드물게도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관사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그리고 드물게도 절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 열여덟 시간 근무하는 한이 있어도 왕궁에는 들어오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강풍에 나뭇가지들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키 큰 자작나무들은 금방이라도 드러누울 듯 같은 방향으로 휘어 있었다. 나부끼는 나뭇잎들 사이로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딸 때문인가?”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왜, 내가 네 딸에게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제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리욘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제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내가 네 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넌 관사로 들어와야 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라는 제이의 말은 다급하게 “전하!”를 외치며 달려오는 에이나르의 목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전하, 지금 여기서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빨리 벨리에스테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벨리에스테?”

“네, 공항에서 활주로 이탈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 라는 표정이었다. 제이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에이나르를 쳐다봤다. 비행기의 활주로 이탈은 안개가 심한 날이나 오늘 같은 악천후에 종종 발생하는 사고였다. 발생 빈도가 높은 사고이니만큼 공항 내의 안전 대비책도 잘 마련되어 있고 구조 작업에 대한 소방당국의 매뉴얼도 확실한 편이었다. 부상자는 나오겠지만 사망자는 거의 나올 일이 없었고, 설령 사망자 한두 명이 나온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국왕이 직접 사고 현장으로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그게, 비행기가 빗길에 심하게 미끄러지면서 방호벽에 부딪쳤다고 합니다. 아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상 이상 부상자가 제법 나올 것 같다고 하네요. 그런데 전체 탑승객 117명중에 63명이 13세 미만 아동입니다.”

“어디 학교에서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길이었나?”

“학교는 아니고 발달 장애 아동 센터인 것 같습니다. 스웨덴에서 열린 합창 대회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리욘은 짧게 혀를 찼다. 곧바로 계단 쪽으로 몸을 돌리며 그는 에이나르를 향해 말했다.

“지금 바로 출발하지. 차 대기시키고 국토안보부 장관과 교통안전청장 전화 연결해.”

“알겠습니다.”

에이나르 역시 대답하자마자 비서실을 향해 달려갔다. 그보다 한 발 더 먼저 집무실로 달려간 제이는 대기 중인 경호대원들을 1층으로 내려 보냈다. 경호원 대기실에 있는 대원들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린 뒤 1층으로 내려가자 준비를 마친 차량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이는 왕세자의 승용차 바로 뒤를 따라가는 제1 경호 차량팀에 합류했다. 조수석에 오르는 제이를 보며 이나린 중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대위님도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까 퇴근하신 줄 알았는데요.”

“연장 근무야.”

안전벨트를 매며 제이는 짧게 말했다.

“오늘부터 하루 열여덟 시간씩 근무하기로 했거든.”

“네?”

이나린 중사가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그건 무슨 농담입니까, 라는 표정의 중사에게 제이는 백미러를 통해 웃어 보이며 “아냐.” 하고 말했다. 마침 리욘이 탄 차가 움직이기 시작해 제이는 자연스럽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하사에게 출발을 명령할 수 있었다.

왕궁에서 벨리에스테 공항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날씨가 날씨다보니 도로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결국 왕세자와 그의 경호팀은 왕궁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됐나.”

차에서 내리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사고 현장을 향해 걸어가며 리욘이 말했다. 이 와중에도 예를 갖추어 인사하려는 공항 책임자를 가로막으며 리욘은 “됐으니까 보고부터 해.” 하고 인상을 썼다.

“날씨가 갑자기 안 좋아지면서 관제탑,”

“그건 들었어. 사상자 현황만 보고해.”

“현재 구조 작업 중입니다. 현재까지 생존 확인된 인원은 41명이고 사망자는 아직 없습니다. 부상자는 지금 막 스무 명을 넘어섰습니다.”

“정원이 117명인데 지금까지 생존 확인된 인원이 41명밖에 안 된다고? 대체 구조 작업 속도가 얼마나 느린 거야.”

“비바람이 너무 심한 데다 아까 아홉 시 정각부터 삼십 분 가량 근방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있었습니다. 비상 전력을 사용하려니 담당자가….”

“변명은 나중에 듣지.”

사고 현장에 도착한 리욘은 망설임 없이 슈트 재킷을 벗어서 자신의 수행원에게 건넸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다른 말없이 곧바로 구조 작업 중인 사람들 틈에 껴 기체를 들어 올리고 생존자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당황한 듯 입만 벌리고 서 있는 공항 관계자들을 뒤로 한 채 왕세자의 경호팀도 구조작업에 뛰어들었다. 국경 지대를 누비던 부사관 출신의 경호대원들은 전문 구조대원들을 능가하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남은 생존자들을 찾고 부상자를 옮겼다.

다행히 열한 시가 넘어 비가 그치면서 구조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자정을 기해 생존 확인자 명단은 마침내 110명을 넘어섰다. 나머지 구조 작업은 구조대원들에게 맡기고 리욘은 다시 공항 책임자를 소환했다. 뒤늦게 도착한 교통안전청장까지 불러들여 한 시간 가까이 면담을 진행한 그는,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자신의 차에 오를 수 있었다. 리욘을 태운 승용차의 뒷좌석 문이 닫히자 그제야 경호대원들도 각자의 차에 올라탔다. 제이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제1 경호 차량의 조수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출발하길 기다리는데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에이나르였다.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차창을 내리자마자 에이나르가 말했다.

“무슨 일로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에이나르가 말했다. 제이는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빠른 걸음으로 왕세자의 차량을 향해 걸어간 그는 지친 얼굴로 뒷좌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한 걸음 물러서서 차창이 내려가길 기다리고 있자니 열리라는 차창은 안 열리고 대신 차문이 열렸다. 제이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뒷좌석에 앉은 리욘을 바라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대위는 이 차에 타도록.”

시트의 암레스트에 팔을 괸 채 그렇게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짧은 한숨과 함께 아뇨, 하고 말했다.

“경호 차량에 타겠습니다.”

“아까 분명히 하루 18시간씩 밀착 경호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밀착 뜻이 뭔지 모르나?”

밀착이 그 밀착이 아니지 않느냐고 말하려던 제이는 이내 포기하고 차에 올랐다. 어차피 리욘은 자신이 차에 오르기 전까진 출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의미 없는 말씨름 따위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말뜻 하나 가지고 물고 늘어지며 싸우기엔 너무 피곤했다.

제이가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에이나르가 차를 출발시켰다. 순식간에 공항을 빠져나간 차는 금세 일반 도로를 지나 국도로 진입했다.

“왕궁에 도착할 때까지 눈이라도 좀 붙여 둬.”

인터체인지를 지날 때 쯤 리욘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건 자네 생각이고.”

별로 안 괜찮아 보여. 리욘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안 좋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제이는 리욘의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안색이 안 좋아. 공항에서 구조 작업할 때부터 계속.”

리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호르몬제를 먹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지금 리욘의 머릿속은 온통 자신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시에 제이는 깨달았다. 리욘이 자신을 굳이 이 차에 태운 이유를. 밀착 경호는 핑계고, 왕궁까지 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던 거다.

리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건지는 알 것 같았다. 이 차가 경호 차량보다는 훨씬 더 크고 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벤틀리에서 에시르 왕가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전 세계에 두 대밖에 존재하지 않는 한정 에디션이었다. 방탄 시설을 좀 더 보완했을 뿐, 평범한 세단에 지나지 않는 경호 차량과는 승차감 면에서나 성능 면에서나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월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이 편하다고 해서 마음까지 편한 건 아니었다. 아무리 차가 좋아 봤자, 옆자리에 리욘이 앉아 있는 이상 자신은 절대 마음 편히 쉴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경호 차량을 그대로 타고 갔더라면 지금쯤 리욘의 말대로 눈이라도 붙이고 있었을 텐데.

물론 그런 말을 리욘에게 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그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걸 테니까.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콘솔박스에 한쪽 팔을 걸치며 제이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끝에 그는 조금 웃었다. 어차피 못 자는 건 못 자는 거고, 피곤한 건 피곤한 거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한결 누그러진 상태였다. 제이는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리욘을 바라봤다.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텐데 그도 역시 눈을 붙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암레스트에 팔을 걸친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리욘에게 제이는 조금 망설인 끝에 물었다.

“저녁 식사는 하셨습니까.”

“대충.”

“대충… 드시긴 하신 겁니까.”

그 말에 리욘이 고개를 돌려 제이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런 걸 묻는 이유가 궁금한데.”

“독살 시도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리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는 리욘에게 제이는 전하,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말씀 안 하셨습니까.”

“자네 성격상 먼저 먹어 보겠다고 할 게 분명하니까.”

“필요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넨 목숨이 한 여섯 개쯤 되나?”

리욘이 혀를 차며 말했다. 예상도 못 했던 신경질적인 반응에 제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차 안은 어색한 침묵의 기류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 불편한 침묵이 마음에 안 들었던지 리욘이 다시 한 번 작게 혀를 찼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제대로 된 걸 먹으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재료부터 다 준비해서 요리사가 요리하는 내내 지켜보고 있다가 완성이 되면 조금 덜어서 개나 누구한테 먹여 보고 이상 없으면 그때 먹으면 되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식당에 보내서 먼저 주문하게 한 다음 요리가 나오면 그걸 내가 먹는 방법도 있고. 그래,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지. 많은데, 귀찮아. 고작 먹는 일에 그렇게 정성을 기울이고 신경을 쓰기엔, 진짜 제대로 신경 써야 할 다른 일이 너무 많다고.”

에이나르가 했던 말 그대로였다. 아마 에이나르도 몇 번인가 리욘에게 이 문제로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때마다 리욘은 지금과 같은 대답을 들려 줬겠지. 에이나르가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같은 대답을 반복한 거라면 리욘은 이미 그렇게 마음을 굳힌 것이다. 그리고 이 생활에 크게 불만도 없는 거고.

하지만 제이는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당장 일이 년은 어떨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땐 확실히 몸이 상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으니까.

제이는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리욘에게 말했다.

“라일라를 부르면… 라일라를 왕궁으로 데려와서 요리를 해 달라고 하는 건 어떻습니까.”

“자네 노인 학대라고 들어 봤나?”

라일라 올해 나이가 일흔이야. 리욘이 웃으며 한 말에 제이는 아, 하고 중얼거렸다. 하긴, 그때 이미 육십 세가 넘었으니. 그 정도 됐겠구나.

“난 지금 식생활에 큰 불만 없어. 제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으면 그때그때 적당히 알아서 사 먹으면 돼. 그러니 이제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지.”

리욘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가 끝내자고 하면 끝낼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고작 경호원 하나 때문에 그 먼 국경 지대에서까지 의사를 찾아 왕궁으로 데리고 왔으면서 정작 본인의 건강은 신경도 안 쓰고 제대로 돌볼 생각도 안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일개 경호원의 병원 문제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인데도.

어느덧 비가 완전히 그쳐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 사이로 하늘이 조금씩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가까워서야 겨우 해가 지기 시작하는 북구의 여름이, 이 백야 현상이 제이는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바깥이 어두웠다면 창에 비친 자신의 표정을 리욘이 볼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면 들켜 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기분 탓일까. 아랫배가 조금씩 저려 오는 것 같았다. 아니, 배가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어디인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차창에 이마를 댄 채 제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바자회는 정확히 금요일 오후 한 시에 개최될 예정이라고 했다. 왕궁이나 사원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와서 보고 참여할 수 있게끔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춘 것이다.

덕분에 금요일 아침 일찍부터 광장은 퍽 소란스러웠다. 실질적으로 바자회를 준비하는 건 왕실의 경비대원들이었다. 그들은 총 대신 망치를 들고 다니며 오전 내내 강단을 설치하고, 앰프를 옮기고, 천막을 쳤다. 그리고 그 소음은 고스란히 왕궁으로 전해졌다.

“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푸벤이 경호원 대기실 문을 열며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뭐? 바자회?”

“바자회? 지금 이 망치질 소리, 드릴 소리가 바자회 준비 때문에 나는 소리였어?”

“몰랐어? 한 시부터야. 이제 곧 시작이니 조금만 참아.”

그라이든의 말에 푸벤이 소파에 주저앉으며 젠장할, 하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 시부턴 이제 확성기 소리에 귀 터지겠군.”

“그것도 그런데 아마 그때부턴 광장에 사람이 넘쳐날 거야. 지금 빨리 점심 먹고 오는 게 좋을걸.”

“아아, 맞아. 그것도 그렇군.”

도대체 이런 바자회는 왜 여는 건지. 투덜거리며 도로 몸을 일으킨 푸벤이 대기실 한쪽 벤치에 앉아있는 제이를 향해 말했다.

“대위님, 식사하러 가시죠.”

“먹고 와. 난 이따 자네들과 교대하지.”

“그땐 광장이고 사원이고 사람들로 넘쳐날 텐데요.”

“상관없어.”

제이의 말에 푸벤이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위님.”

두 사람은 나란히 대기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마자 제이는 벤치 뒤 벽에 몸을 기대며 낮게 신음했다.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엊그제부터 약을 하루에 두 알씩 먹고 있으니까. 진통제도 하루에 한 통씩 먹고 있었다. 그나마 행사가 점심시간이라 다행이지, 저녁이었다면 그때까지 이런 컨디션으로 못 버텼을 거다.

제이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이제 막 열두 시 이십 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직 멀었군.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제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번처럼 괜히 미리 가 있다가 들키면 곤란했다. 바자회는 1시 정각에 왕비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오픈, 이라고 행사 진행표에 나와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시간에 맞춰 도착하는 게 좋았다.

그 다짐대로 제이는 12시 35분에 대기실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간 그는 곧장 광장으로 향했다. 바자회 오픈을 앞두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는 부인들을 지나쳐 강단 뒤쪽으로 갔다. 새하얀 대형 천막을 빙 둘러 바리케이트가 몇 개 세워져 있고 그 앞을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었다. 제이는 경비대원에게 신분증을 보여줬다. 즉시 총을 바로 세우고 경례하는 경비대원을 향해 그는 말했다.

“제2 특별 경호 중대에서 지원요청해서 왔네만.”

들어가도 되겠냐고 묻기도 전에 경비대원이 즉시 바리케이트를 옆으로 치웠다.

“고맙네. 수고하게.”

제이는 짧게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천막 근처로 다가가 슬쩍 안쪽을 들여다봤다. 바자회에 쓰일 물건들이 곳곳에 잔뜩 쌓여 있었다. 당장 매대에 내놓을 물건들을 들고 옮기느라 분주히 오가는 부인들 중에 왕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천막을 내리고 돌아선 제이는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53분. 바자회 오픈까지는 앞으로 7분밖에 남지 않았다. 정말 직전에야 도착할 생각인가. 한숨을 쉬며 바리케이트 입구로 향하던 제이는 대형 천막 뒤쪽에 세워진 작은 천막 하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딱 사람 한 둘이 대기하며 머물 만한 크기의 천막이었다. 기분 탓인지 새하얀 천 안쪽으로 얼핏 여자의 그림자가 비치는 듯도 했다.

제이는 천천히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커튼마냥 길게 드리워진 입구의 가림막을 살짝 들어 올렸다. 찰나에 새어 들어온 빛에 다리를 꼰 채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베아테였다.

낭패란 생각보다 허탈한 기분이 먼저 들었다. 말없이 가림막을 도로 내리려는 제이를 베아테가 불러 세웠다.

“콜스케그 대위.”

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천막 안쪽의 베아테를 바라보았다.

“아직 왕실의 예법이 익숙하지 않은 건가요?”

여전히 다리를 꼰 채 그렇게 묻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죄송합니다만,” 하고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예를 갖추어 인사하지 않느냐는 말이에요.”

날 선 목소리로 베아테가 말했다. 이리저리 말 돌릴 것 없다는 듯 곧장 단도직입적으로 쏘아붙이는 게 참으로 베아테다웠다. 역시 사람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구나.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는 제이를 보며 베아테는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며칠 전에도 날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던가요.” 하고 말했다.

“그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고 자칫 왕실에 대한 모욕으로도 치부될 수 있는 행위란 거 알고 계셔야 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글쎄요. 딱히 무례한 행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제이는 말했다.

“아니, 그 전에 제가 예를 갖추어 인사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제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제이는 정말로 모르겠단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제이를 보며 베아테가 기가 찬다는 듯 “왜냐구요?” 하고 웃었다.

“그야 난 왕세자비니까요. 설마 내가 왕세자비라는 사실도 몰랐나요?”

“아뇨, 그건 알고 있습니다. 에시르의 왕세자비시죠.”

고개를 끄덕인 제이는 곧 베아테가 있는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붙잡고 있던 가림막을 내려놓자 순식간에 빛이 차단되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도, 분주한 기색도 모두 다 먼 곳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전 에시르의 국민이 아닙니다.”

고요해진 천막 안에 제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도 내 나라의 왕세자비가 아니고요. 나와는 상관도 없는 나라의 왕세자비에게, 심지어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에게 굳이 예를 갖춰 인사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이봐요, 콜스케그 대위.”

노기 띤 목소리로 베아테가 외쳤다.

“당신 이름은 새윈 콜스케그 아니었던가요. 에시르에서 태어나고 자란, 에시르의 군인 새윈 콜스케,”

“그게 제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요.”

베아테 양. 제이는 정확한 발음으로 베아테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베아테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그녀에게 있어 제이의 목소리로 듣는 자신의 이름은 과거의 기억을 소환해내는 주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신… 도대체 여기엔 왜 온 거죠?”

떨리는 목소리로 베아테가 겨우 말했다.

“당신 남편이 날 고용했거든요.”

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돈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죠. 조건도 나쁘지 않았고요.”

“돈이면 다 되는 건가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베아테가 외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다시 리욘을 볼 생각을 한 거죠? 나는 이해가 안,”

“그런 일이 무슨 일이죠?”

베아테의 말을 가로막으며 제이는 물었다. 베아테는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다. 벙어리라도 된 양 입을 딱 다문 채 분주히 시선만 옮겨 대는 베아테를 향해 제이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알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당신 남편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은 제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방금 했던 말 그대로 돌려 드리죠. 제이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내게 인사 받을 생각을 다 했습니까. 베아테 양.”

“…….”

베아테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로 붉게 일그러지는 순간 천막 바깥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왕비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베아테를 홀로 남겨 둔 채 제이는 천막을 빠져나왔다. 강단 뒤쪽으로 바짝 붙듯이 다가갔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막 단상 위로 올라서고 있는 왕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등 뒤를 지키고 경호대원들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제이는 혀를 차며 다시 강단의 앞쪽으로 향했다.

광장에 가득 몰려 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도 그는 단상에 오른 왕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손목에는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마도 저 팔찌 안에는 지디스 칩이 장착되어 있겠지. 그래서일까. 제이가 강단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가는 동안에도 왕비는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다행스럽다기보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제이였다. 저 지디스 칩은 보여주기 용으로 차고 다니는 거 아니었던가. 애초에 S등급에게 칩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텐데.

“…….”

하필 그때 타이밍도 좋게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제이는 혀를 차며 손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미리 준비해 둔 진통제를 꺼내 입안에 넣고 씹으며 그는 계속해서 왕비를 주시했다. 섣불리 공격할 순 없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자신의 심장이 정지할 터였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며칠 전에 리욘이 한 말이 떠오른 것이다. 이렇게 먼저 공격을 해도 성공을 할까 말깐데, 얌전히 방어만 하다가 상대가 먼저 공격해오면 그때 가서 처리하라니. 그건 이쪽이 S등급이고 상대가 A등급일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현실은 정반대였다. 나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적이 심지어 먼저 공격을 해오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리우지엔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자신은 말 그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미 심장이 멎어버린 리욘을 끌어안고 그때 그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고 후회나 하는 게 고작이겠지. 그것만은 사양이었다.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먼저 오늘 이렇게 좋은 뜻으로 한 자리에 모여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단상 앞에 선 리우지엔이 개회사를 읽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카이옌의 사망 이후로 여론이 상당히 안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는 에시르의 왕비였다. 그리고 왕실에 대한 에시르 국민들의 애정과 충성도는 다른 군주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그녀가 에시르의 왕비로 존재하는 한 국민들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환호할 터였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에시르를 위해서. 그리고 리욘이 국왕이 되어 그녀를 왕대비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순간, 그녀는 이제 잔악한 중국인 계집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이번 행사가 우리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빛이 되고 희망이 되길 빌며,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치유와 위안이 되길 빌겠습니다. 아울러 매년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멘글라다에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왕비가 개회사가 끝남과 동시에 광장 여기저기서 폭죽이 터졌다. 사람들의 함성과 환호 속에서 왕비는 강단을 내려와 차에 올랐다. 제이는 당황했다. 좀 더 행사 진행에 참여할 줄 알았는데, 설마하니 개회사를 읽자마자 광장을 떠날 줄은 몰랐다. 이쪽의 존재를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제이는 곧바로 왕비의 차를 뒤따랐다.

다행히 광장에 몰린 인파 때문에 차는 매우 느린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어차피 빨리 빠져나가기란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왕비는 아예 차창을 내린 채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악수도 받아 주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더 먼저 왕궁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제이는 구두끈을 단단하게 맨 뒤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헤치고 광장을 빠져나오자마자 곧장 왕궁을 향해 달렸다. 순식간에 정원을 가로질러 본궁 건물에 도착한 그는 아주 잠깐 멈칫했다. 바로 후원을 끼고 돌아가는 게 빠를지, 아니면 본궁을 가로질러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게 빠를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는 본궁을 가로질러가는 게 빠르지만 본궁 건물 안에서 이렇게 전속력으로 달렸다간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분명했다. 운 나쁘면 경비대원에게 제지를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 눈에 띄는 건 띄는 거고 일단은 왕비보다 빨리 왕비궁에 도착하는 게 중요했다. 제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경비대원들에게 오전에 발급받은 출입증을 보여주자 통과 허가가 떨어졌다. 중앙 계단까지는 숨을 고르며 걷다가 중앙 계단을 지나자마자 다시 뛰기 시작했다. 곧 후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문만 통과하면 후원이었다. 그리고 후원은 곧 왕비궁의 앞뜰이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 왕비의 차량은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후문에 도착한 제이는 허리를 숙인 채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전력 질주를 한 게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겨우 10분 정도 뛰었다고 이렇게 숨이 차다니, 확실히 체력이 많이 떨어지긴 했나보다고 생각하며 허리를 바로 펴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누군가가 오른쪽 팔을 세게 붙잡았다. 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확인하곤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리욘이었다.

“왜 여기서…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제이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야 리욘은 왕세자고 왕궁은 그의 집이었으니 그가 이 왕궁 안 어디에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지만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하려다 보니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튀어나왔다. 또 잔뜩 비꼬는 답변이 돌아오겠구나 생각했는데 의외로 리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제이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 왜….”

중얼거리던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리욘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훨씬 더 아래쪽을 향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팔을 붙잡고 있으니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곳은 자신의 등이거나 허리… 아니, 허리도 아니다. 허리보다 조금 더 아래의…….

“…….”

설마.

제이는 왼손을 자신의 뒤쪽으로 가져갔다. 허리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손을 내려가며 더듬어보았다. 정확히 리욘의 시선이 닿은 곳이 이쯤일까 생각했던 그곳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놀라 도망치려는 제이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으며 리욘이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단축 번호를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닥터 블리스, 지금 의료실인가?”

“전하.”

제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리욘을 불렀다. 리욘은 제이의 말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수화기 너머의 니나에게 말했다.

“상관없어. 지금 바로 내 집무실로 와주게. 최대한 빨리, 지금 당장.”

명령을 마친 리욘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제이의 팔을 붙잡은 채 성큼성큼 중앙계단으로 향했다.

“전하, 잠시만요. 제가 가겠습니다. 전하.”

제이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물론 리욘은 듣지 않았다. 도리가 없었다. 제이는 끌려가듯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도착하자 리욘은 아예 제이의 허리를 끌어안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킨 뒤 집무실까지 걸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뒤쪽을 못 보게 하기 위해서란 건 알았지만 이대로라면 리욘의 옷이 더러워질 판이었다. 제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전하, 제발요….” 하고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제 발로 가서 설명할 테니 제발 놔주십시오.”

“설명은 해. 하지만 네 발로 갈 필요는 없어.”

이미 다 왔으니까. 리욘이 턱짓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지척에 왕세자 집무실이 보였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닥터 블리스 빼고.”

리욘은 비서실 책상에 앉아있는 에이나르에게 명령한 뒤 제이를 끌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자, 설명해 봐.”

집무실 문을 닫으며 리욘이 말했다. 붙잡은 팔도 놓아주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제이는 한숨을 내쉬며 “이거부터 좀 놔주세요.” 하고 말했다. 뭐가 그렇게 못 미더운지 한참이나 제이를 내려다본 끝에 비로소 리욘은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세게 붙잡고 있었던지 팔 전체가 욱신거렸다. 제이는 손으로 팔을 주무르며 “별거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파탄성 출혈이라고… 에스트로겐 과다로 인한 부작용 증상 중에 하납니다.”

“에스트로겐 과다 분비?”

리욘이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갑자기 에스트로겐이 왜 과다하게 분비됐다는 거지? 그리고 에스트로겐 과다로 부작용 증상까지 나타날 정도면….”

거기까지 얘기한 리욘이 갑자기 침묵했다.

그리고,

“설마 호르몬제를 복용한 건가?”

그야말로 설마, 라는 표정이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집무실 안쪽으로 걸어간 그는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도대체 왜?” 하고 말했다.

“호르몬제가 안 맞는 체질이란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걸 복용하면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었을 텐데.”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바로 “대답해.” 하고 리욘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부작용이 나타날 거 알았나, 몰랐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복용했지?”

재차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반쯤 포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야 리우지엔을 상대할 시도라도 해 볼 수 있으니까요.”

역시 그런 거였냐는 듯 리욘이 웃었다.

“약을 먹어서라도 어떻게든 능력치를 끌어 올려 보려고?”

“네.”

“부작용이 생기거나 말거나 말이지.”

“원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죠.”

제이는 담담히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곧 몸을 일으켰다. 무서운 기세로 집무실을 나선 그는, 잠시 후 손에 가방 하나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이거 자네 가방 맞나?”

제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리욘은 가방을 열어 안의 물건들을 자신의 책상 위에 쏟았다. 신분증과 권총, 지갑이 차례로 쏟아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은 약병 하나가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유리 위로 떨어졌다. 리욘은 말없이 그 약병을 집어 들었다.

“이건가?”

제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맞군.”

리욘은 약병을 들고 집무실 내의 세면실로 향했다. 제이가 뒤따라갔을 때 리욘은 이미 세면실 안쪽의 변기에 약을 쏟아 붓고 있었다.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제이는 리욘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제이의 힘으로 리욘을 말리기란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한 알의 약까지 모두 변기에 쏟아 부은 리욘은 그대로 물을 내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알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하….”

힘없이 중얼거리는 제이의 눈앞에 빈 약병을 흔들어 보인 리욘은 곧 그것을 세면실 바닥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이런 거, 두 번 다시는 먹지 마.”

제이는 붙잡고 있던 리욘의 팔을 놓았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간 듯했다. 비틀거리며 세면실 벽에 몸을 기댄 제이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실 거면 절 왜 불렀습니까.”

전부터 묻고 싶었다. 도대체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건지.

“제 능력이 필요해서 부른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할 수 있는 만큼 하려고 하는 건데 왜,”

“제이.”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이는 여전히 벽에 몸을 기댄 채 고개만 돌려 리욘을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리욘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는 내가 자넬 부른 이유가 정말 경호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네…?”

제이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리욘이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 가지 알려 주지.” 하고 말했다.

“왕비는 제노스가 아니야.”

리욘은 웃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바로 세우며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야. 왕비는 제노스가 아니야. 설령 제노스가 맞다고 해도 S등급 능력자는 못 돼. 그러면 지디스 칩만 있어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하지. 그 말은 굳이 네가 내 경호원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고.”

리욘은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말을 멈췄다. 가만히 제이를 바라보던 그는 다시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도 내가 널 궁으로 부른 이유가 뭘까.”

제이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본능적으로 피하려는 제이의 팔을 붙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리욘이 말했다.

“모르겠다면 알려 주지.”

그대로 입술이 겹쳐졌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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