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2)

2021년, 에시르

부우우우.

시트 위에 놓인 휴대폰이 작은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제이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여섯 시 정각. 짧게 한숨을 내쉬며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가 깰까 봐 알람을 진동으로 설정해두긴 했으나 내심 불안하긴 했다. 이 시간에 일어나는 게 워낙에 오랜만이어서. 다행히 몸은 녹슬었어도 정신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었다.

욕실로 향하던 중에 시그니의 방 앞에 서서 방문을 살짝 열어 보았다. 다행히 세상모르고 자는 중이었다. 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욕실로 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소리 때문에 드라이어를 쓸 수 없어 수건으로만 머리를 말리며 현관에 떨어져 있는 신문을 들고 왔다.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자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엘라?”

“네, 저예요.”

“기다려요. 문 열어 줄게요.”

제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관문을 열어 주자 엘라가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미안합니다. 초인종 누르면 될 걸 귀찮게 전화하라고 해서.”

인사 받을 생각도 못 하고 사과부터 했다. 엘라는 문을 닫고 들어오며 아니에요, 했다.

“초인종 소리에 시그니가 깨면 곤란하잖아요.”

이유를 말한 적도 없는데 알아서 척척이었다. 확실히 노련한 베이비시터는 다르구나 감탄하며 제이는 자신이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로 가져갔다. 엘라에게도 커피를 한 잔 건네며 예상 퇴근 시간을 말했다.

“아마 8시쯤엔 들어올 거라고 생각하는데, 확실치는 않아요.”

“괜찮아요. 만약 9시 이후가 될 것 같으면 전화 한 통만 주세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가 시그니를 맡아 주기로 한 건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였다. 이 말도 안 되는 근무시간을 그녀가 받아들인 건 급여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단 나흘간 아이를 봐 주는 대가로 그녀는 입주 베이비시터의 한 달 치 급여에 해당하는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수잔은 어차피 나흘 뒤면 자신이 도착할 텐데 뭣 하러 그런 바보짓을 하느냐고 혀를 찼지만 제이는 그 돈이 딱히 아깝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제 면접 겸 인사 겸 잠깐 방문을 했을 때도 느꼈지만 엘라는 성격도 똑 부러지고 아이를 다루는 데도 무척 능숙했다. 무엇보다 시그니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원래 낯을 가리지 않는 아이이긴 했지만 만난 지 십 분 만에 대뜸 스케치북을 들고 같이 그림을 그리자고 하는 건 웬만큼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엘라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제이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출근 준비를 했다. 몇 년 만에 입는 건지도 모를 정장을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자 비로소 일을 하러 간다는 실감이 났다. 물론 그 일이 왕세자, 즉 리욘의 경호라는 건 아직도 약간 믿기지가 않았지만.

한숨을 쉬며 노트북 가방에서 노트북을 빼고 에이나르에게 받은 권총을 집어넣었다. 집어넣다가 너무 가벼워서 탄창이 비었나 싶어 열어 보기까지 했다. 물론 탄창은 꽉 채워져 있었다. 그제야 FN-57이 원래 총기 자체가 가볍고 탄환도 경량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제이는 낮게 신음했다. 아무리 근 십 년 만에 만져 보는 총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가물거려서야 되나 싶었다. 왜 하필 그 친구는 총을 잘 써서 사람을 귀찮게 하는 걸까, 어차피 쓰지도 않을 건데 그냥 가져가지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에이나르가 일부러 챙겨 준 정성을 생각해서 일단은 가방에 넣었다. 총기 소지 허가증도 챙겨 넣고 왕궁 출입증도 챙겼다. 그리고 새로 발급받은 신분증도 찾아 지갑에 끼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야.

어느새 두툼해진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끼우며 제이는 생각했다. 제이 새윈 콜스케그라니. 일부러 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교를 찾은 걸까? 아니면 적합자를 찾고 보니 우연하게도 자신과 이름이 같았던 걸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보자 어쩔 수 없이 마지막으로 시선이 가 닿는 곳이 있었다. 제이는 침대 옆에 놓인 콘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콘솔의 서랍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결국 서랍을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약병 가운데 두 개를 꺼냈다. 크기와 모양이 각각 다른 알약 두 개를 입 안에 넣은 뒤 약병을 도로 서랍 안에 넣고 방을 나섰다. 주방에 가서 물과 함께 약을 삼키자 커피잔을 씻던 엘라가 “어디 아파요?” 하고 물었다.

“아뇨. 그냥 영양제.”

웃으며 말한 뒤 제이는 식탁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다녀올게요. 아마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는 휴대폰이 꺼져 있을 겁니다. 무슨 일 있으면 메시지 보내둬요. 확인하는 대로 전화할 테니.”

“그럴게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엘라는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제이는 시그니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하고 잠깐 망설였으나 그냥 말없이 집을 나서는 쪽을 택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혹시라도 깨서 칭얼대는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았다.

빌라 건물을 나오자마자 길 건너편으로 가 바로 오는 택시를 탔다.

“왕궁으로 가 주십시오.”

왕궁의 정확한 이름은 비다르(Viðarri)9)궁이었으나 그냥 왕궁이라고만 해도 알아들었다. 왕궁은 빌라가 있는 린드르 거리에서 차로 20여 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출근 시간이라 길이 조금 밀렸다. 왕궁 앞의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7시 20분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부터는 사전에 허가받은 차량만 출입이 가능했기에 걸어서 가야 했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군복 차림의 경비대원에게 왕궁 출입증을 보여주자 경비대원은 거수경례를 하며 총을 바로 세웠다. 정문을 통과해 왕궁의 자랑인 메일리(Meili) 정원을 걷다 보니 마침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는 파사드와 그랜드 엔트런스10)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현관을 지키고 있는 경비대원들에게 다시 한 번 출입증을 보여준 뒤 오늘 날짜가 찍힌 입궁 허가증을 받았다. 제이의 공식적인 첫 입궁 시간은 7시 36분이었다. 이제 오늘 하루 동안은 출입증 없이도 이 허가증만 있으면 왕궁 안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제이는 왕세자 집무실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군복이 아닌 정장을 입은 경호대원들이 복도 곳곳에 서 있었다.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상사가 직접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반갑습니다, 대위님. 로겐입니다.”

로겐은 왕세자의 경호를 맡고 있는 제3 특별 경호 중대의 행정관이었다. 올해 서른두 살로 새윈 콜스케그보다 네 살이 많았고 직급은 한참 낮았다. 다른 경호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특별 경호 중대의 대원들은 대부분이 부사관학교 출신이라 사관학교 출신인 새윈 콜스케그보다 나이는 많고 직급은 낮았다.

“전하는 어디 계십니까.”

“오늘은 왕세자궁에서 바로 의회의사당으로 가십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오전에 의회 회의가 열립니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바로 출발하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전하는 2소대 대원들이 모시고 올 예정입니다.”

제이는 로겐과 다른 경호대원들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대현관이 아닌 오른쪽 우현관을 통해 나가자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의회의사당은 왕궁에서 걸어가도 10분 이내였다. 스바르트의 심장이라 불리는 델링그 광장을 중심으로 정중앙에는 비다르 왕궁이, 서쪽에는 킬피르 대성당이, 동쪽에는 흐레타 사원이 있었는데 바로 이 흐레타 사원이 의회의사당으로 사용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의회 회의는 사원의 1층 대회랑에서 열렸다. 제이가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8시 반을 기점으로 모든 의원들이 착석했고, 곧이어 왕세자의 차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이는 다른 경호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대회랑 입구에 서서 왕세자를 기다렸다.

곧 리욘이 그의 수행원들과 함께 사원으로 들어섰다. 긴 복도를 걸어오는 내내 수석 비서관인 에이나르와 총무 비서관, 국정 과제 비서관으로부터 보고를 듣고 지시를 내리는 리욘을 보자 제이는 새삼 그날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정장차림의 모습도 TV에서 몇 번 보긴 했지만 코앞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제도 분명 봤는데 하룻밤 사이에 더 큰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 때문일 것이다.

진짜 왕이 되는 거구나.

무상히 생각하던 제이는 “대위.” 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눈앞의 왕세자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치자 리욘은 소리 없이 손가락을 까딱했다. 회의장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말없이 리욘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제이에게 에이나르가 얼른 선글라스 하나를 건넸다. 제이는 그것을 쓰고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리욘이 입장하자 모든 의원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며 리욘은 자신의 의자에 앉았다. 그의 자리는 가장 상석에 위치한 국왕의 의자 바로 옆이었다. 국왕이 입원한 후 사실상 그가 국왕의 모든 임무를 대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아직 왕세자에 불과했다. 국왕이 아닌 자가 국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건 반역 행위에 해당했으므로 형식상으로나마 국왕의 의자를 약간 옆에 밀어두고 그 옆에 다른 의자를 두고 앉아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작하죠.”

리욘의 말에 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 개시를 선언했다.

에시르 의회는 양원제로서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상원 의원은 총 111명인데, 국가에 대한 봉사를 인정하여 국왕이 직접 임명한 67명의 의원과 44명의 세습 의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습 의원은 당연히 모두 귀족들이었다.

뒤에 서서 회의를 지켜보던 제이는 리욘의 바로 왼쪽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의회에서의 자리 배치는 직위 순이었다. 국왕의 바로 왼쪽 옆자리라는 것은 귀족들로만 구성된 세습 위원 중에서도 가장 직위가 높은 인물이란 뜻이었다. 제이는 비어 있는 의자를 잠시 바라보다 눈길을 거두었다.

회의는 정오를 조금 넘겨서야 끝이 났다. 국왕이 회의실을 나서기 전까지는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는 의원들을 배려해 리욘은 의장이 망치를 두드리기도 전에 대회랑을 빠져나왔다. 이제 남은 오후 일정은 몇 개의 접견 요청 건을 처리한 후 점심 식사를 하고 병원에 입원 중인 국왕을 만나 회의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다.

왕궁에 도착하자 접견을 요청한 외교부 인사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리욘이 접견 요청자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제이는 집무실과 이어진 비서실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에이나르, 이거요.”

제이는 사원에서 빌렸던 선글라스를 에이나르에게 돌려줬다.

“아, 괜찮습니다. 그건 그냥 제이가 쓰세요.”

“이걸요?”

“네. 경호대원들은 성당 안만 아니면 어디서든 선글라스를 써도 상관없어요. 밖에 경호대원들도 다 쓰고 있잖아요? 로겐 상사는 자긴 그거 쓰면 너무 험상궂어 보인다고 안 쓰지만 그라이든 중사와 크뢰임 하사는 늘 쓰고 있어요. 음, 그리고….”

에이나르는 잠깐 망설인 끝에 말했다.

“제 생각이지만, 제이는 얼굴을 좀 가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왜죠?”

“너무 어려 보여서요.”

“누가요, 내가요?”

제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어제 보고 깜짝 놀랐어요. 7년 전에도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는 외모라고 생각했는데, 7년 동안 하나도 안 변했어요.”

“설마요.”

“정말이에요. 처음엔 스물여덟 살 대위면 딱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제이를 보자마자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스물다섯 살 중위로 했어야 했는데. 뭐, 이미 신분증도 다 나왔고 서류 작업까지 마친 상태라 어쩔 수 없었지만요.”

“스물다섯이라니. 맙소사, 에이나르.”

제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었다. 물론 동양계가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는 편이라는 건 제이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같은 나이의 북유럽인들에 비하면 못해도 일곱 살 정도는 어려 보였다. 하지만 자신은 순수한 동양인도 아니었고, 인상 자체가 약간 싸늘한 편이라 그렇게까지는 무리였다. 기껏해야 두세 살 정도 차이나 보이는 수준일까.

“아녜요. 제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전 정말 어제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해도… 제이 외모가 이곳에서는 좀 튀는 편이거든요. 가리는 쪽이 일하기엔 편할 거예요.”

그런 이유라면 딱히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뭐, 그럼 당분간 빌리는 걸로 하죠.”

제이는 에이나르의 선글라스를 수트 가슴 포켓에 집어넣었다.

접견은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외교부 인사가 왕세자와 면담을 마치고 나가자 이번에는 국토부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다음에는 언론사 인터뷰가 있었다. 그 사이에도 국왕 대행인 왕세자의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이 끊임없이 에이나르의 책상 위로 쌓이고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손님들의 접견까지 모두 끝이 났다. 에이나르는 그들을 비서실 입구까지 배웅한 뒤 재빨리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뭉치를 들고 왕세자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제이가 그 뒤를 따라 들어갔을 때 리욘은 벌써 에이나르가 가져온 서류들 중 가장 위에 놓인 것을 들어 훑어보고 있었다.

“의회는 어땠지, 제이?”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리욘이 말했다.

“딱히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난 대위가 아니라 제이에게 물었는데.”

그러니까 그 대위 이름도 제이 아니냐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제이는 다시 대답했다.

“칩을 착용하지 않은 사람이 의외로 몇 명 있었습니다.”

“왕비파들이야.”

“네, 전하의 편은 확실히 아닌 것 같더군요.”

다분히 의미심장한 그 대답에 리욘이 고개를 들어 제이를 쳐다봤다.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린 뒤 다시 서류를 보며 물었다.

“그리고, 또?”

“없습니다. 아직까지 발견한 건.”

“좋아.”

리욘은 펜을 들어 서류에 사인했다. 결재를 마친 서류를 책상 한쪽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그는 말했다.

“앞으로 매주 월요일마다 회의에 동석하도록 해. 그리고 그 선글라스는 이제 쓰지 마.”

제이는 자신의 가슴 포켓에 꽂힌 선글라스를 바라봤다. 책상 옆에 서서 결재가 완료된 서류를 챙기던 에이나르가 “예에?” 하고 소리쳤다.

“하, 하지만, 제이는 너무 어려 보여서… 얼굴은 가리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은데요. 외모도 다소 눈에 띄는 편이고.”

“가린다고 가려질 것도 아니지 않나. 그런 거면 안 쓰는 게 낫지.”

“하지만….”

어지간히도 걱정이 되는지 에이나르는 안절부절 못하며 중얼거렸다. 면전에서 기각 당한 게 안쓰러워 제이는 “염색은 어떨까요.” 하고 물었다.

“밝은 갈색으로 물들이면 그래도 나름,”

“아니. 하지 마.”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

단호한 어조였다. 명령이라는 말만 안 붙였다 뿐이지 사실 명령과 진배없는 한 마디였다. 에이나르도 그 말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을 눈치챘는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이나르, 커피 한 잔만.”

그 사이 또 한 묶음의 서류를 훑어보고 결재까지 마친 리욘이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에이나르는 대답과 동시에 쏜살같이 비서실로 향했다. 잠시 후 커피를 들고 돌아온 그는 책상에 조심스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귀찮아. 아무거나 줘.”

에이나르는 알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비서실에 다녀온 그의 손에는 쿠키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제이는 당황했다. 점심시간까지 쪼개 서류를 봐야하는 판국이니 고열량의 버터 쿠키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한다는 건 그럭저럭 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그 쿠키가 고급 베이커리에서 주문 받아 구워 내는 수제 쿠키도 아니고 마트나 편의점에 가면 흔히 살 수 있는, 시판되는 공산품이라는 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리욘의 취향인가 했더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눈치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쿠키를 하나씩 입에 넣고 커피와 함께 삼키는 모습이 맛을 음미한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 최소한의 열량 보충을 위해 먹는다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도 쿠키를 하나 먹고 나면 반드시 냅킨에 손을 닦는 리욘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남았다. 원래 저런 버릇이 있었던가. 제이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7년 전에도 그랬던 것 같긴 했다. 피쉬 앤 칩스를 먹을 때도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먹고 나면 리욘은 항상 냅킨에 손을 닦곤 했었다.

그랬구나. 제이는 생각했다. 저건 저 사람의 버릇이었구나.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반가우면서도 허탈했고,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아팠다. 말로는 차마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바라보고 있자니 리욘이 물었다.

“왜? 하나 줘?”

너무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제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맛있습니까?”

“맛없어.”

“그래 보입니다.”

리욘은 냅킨에 손을 닦으며 제이를 보고 웃었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던가?”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부러 애매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 리욘이 묻는 건 7년 전에도 이런 성격이었냐는 뜻이니까. 그때의 이야기는 가급적이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서로를 위해서도 좋았다. 오히려 리욘이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그때를 언급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세자는 7년 전에 비크에 간 적이 없지 않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제이를 보며 리욘도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에이나르, 대위와 함께 식사하고 와. 식당 위치도 알려 주고.”

“아, 그럴까요.”

기다렸다는 듯 에이나르가 대답했다. 그는 결재가 끝난 서류들을 얼른 책상 한쪽에 놓아두고 제이에게 다가왔다.

“식사하러 가시죠.”

왕세자가 쿠키로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수행원들만 식사를 하러 간다는 게 조금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돈 받고 정해진 기간 동안 경호만 하면 되는 건데 그렇게까지 충성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고. 결국 제이는 에이나르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비서관님, 총무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었는데요.”

비서실을 지키고 있던 직원의 말에 에이나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뭔가 그쪽에서 넘기라고 한 서류를 아직 준비하지 못했는지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해 미안하다는 말로 통화를 끝낸 에이나르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쓰러지듯 책상 위에 엎드리며 말했다.

“대위님. 죄송하지만 식사는 다음에 같이 해야 할 것 같아요…. 밖에 로겐 상사가 있을 테니 같이 다녀오시는 건 어때요?”

상황을 보아하니 에이나르의 점심 식사 메뉴도 고열량 쿠키거나 초콜릿바일 것 같았다.

“그러죠.”

제이는 수트 주머니에 있던 선글라스를 꺼내며 대답했다. 마침 직원이 자리를 비워 비서실 안에는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제이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선글라스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에이나르를 불렀다. 오스카가 자신에게 이번 일을 의뢰하며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묻기 위해서였다.

“에이나르,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며칠 전에 왕세자궁의 물건들이 갑자기 움직였다고 했죠?”

“네?”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에이나르가 번쩍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는 에이나르의 표정에 제이는 도로 당황해서 “몰랐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 아뇨, 알았습니다. 네, 맞아요. 그런 일이 있었죠.”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에이나르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전하께서 다치지는 않았고요?”

“네, 다친 곳은 없었습니다.”

“그게 몇 시쯤이나요?”

“그게… 새, 새벽 두 시쯤이었나 세 시쯤이었나.”

죄송합니다. 확실히 기억이 나진 않네요. 에이나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이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일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니. 애초에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도 그것 때문이 아니었나. 오스카는 왕비가 드디어 본격적으로 움직일 셈인 모양이라고 아주 사색이 되어 자신을 찾아왔었다.

“그게, 그때 제가 현장에 있었던 게 아니라서요. 나중에 보고만 들은 거라 지금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죄송해요. 찾아볼게요.”

면목 없다는 듯 에이나르가 말했다.

“할 수 없죠. 나중에 그 현장에 한 번 가볼 수 있을까요.”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가 어, 그게, 하며 눈알을 굴렸다.

“그, 전하의 침실이라서요. 아, 물론 제이만 괜찮다면 상관없지만요.”

“나보단 전하께 먼저 괜찮은지를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렇죠. 참.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그런 것 같군요.”

안 그래도 정신없는 사람에게 일거리를 더 얹어 주고 싶진 않았지만 이쪽 사정도 사정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 제이는 우선 왕비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조사해 둔 자료가 있는지 에이나르에게 물어봤다.

“물론이죠. 왕비가 입궁할 때 데리고 온 사람들부터 최근에 자주 만난 인물들까지, 전부 다 실시간으로 체크하고 있습니다.”

“그 자료 좀 정리해서 줄 수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 더, 왕비 입궁 이후에 궁에 드나들기 시작한 동양인들에 대해서도요. 청소부든 의원이든 상관없어요. 동양인, 동양계 혼혈까지, 한명도 빠짐없이 전부 다 파악해서 나한테 알려줬으면 해서요.”

“알겠습니다. 왕궁 내에 동양계가 많지 않아서 아마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에이나르가 다부지게 대답했다.

“부탁할게요.”

제이는 책상 위에 놓인 선글라스를 그의 수트 가슴 포켓에 꽂아주며 말했다. 그래도 자료 조사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에이나르라 이런 쪽으론 든든했다.

“아참, 에이나르.”

비서실을 나서던 제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까 회의 때 보니까 빈자리가 하나 있던데, 누구죠?”

“아, 발데마르 공작이십니다.”

발데마르 공작. 제이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접해본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죠?”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리우지엔이 오기 전까진 왕위 계승 순위 3위였습니다. 두 분 왕자님에 이어 발데마르 공작이었죠. 하지만 리우지엔이 프란츠 왕자를 낳는 바람에 4위로 밀려나셨고요.”

“왕비 측에 감정이 좋진 않겠군요.”

“전하께도 마찬가지죠.”

흠. 제이는 팔짱을 끼며 문에 몸을 기댔다. 이거 또 상당히 입장이 묘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원래 왕자들에 이어 왕위 계승 순위 3위였으나 리우지엔이 낳은 아들로 인해 4위가 되었다, 라.

“그리고 이건 공공연한 소문입니다만.”

후다닥 달려온 에이나르가 제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동양 여자 페티시가 있어서요. 첫 번째 부인 빼고는 후처고 애인이고 세컨드고 간에 싹 다 동양 여자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네. 그래서 리우지엔이 발데마르 공의 숨겨둔 딸 아니냐는 추측도 잠깐 나돌았어요. 물론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소문도 금세 사그라들었지만요.”

그렇군요. 제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말씀하신 것들은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얼른 식사부터 하고 오시죠.”

“그러죠. 수고해요.”

에이나르를 비서실에 남겨두고 제이는 혼자 방을 나섰다. 비서실 앞 복도를 지키고 서 있던 경호대원들이 제이를 향해 일제히 거수경례했다. 제이는 가볍게 맞경례한 뒤 로겐에게 다가갔다.

“식사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입니다.”

따로 약속이 없다면 함께할 것을 제의하자 로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마침 식사를 마치고 온 부하들이 있어 두 사람은 그들과 교대해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왕궁 내에는 식당이 없습니다. 4층에 그랜드 다이닝 룸이 있긴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용할 수 없죠. 왕실 요리사들은 국왕 폐하와 폐하의 가족들만을 위해 요리할 뿐이니까요. 물론 가끔 거기서 귀빈을 접대하거나 만찬회를 열 때도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죠.”

왕궁을 드나드는 사람들과 직원들을 위한 구내식당은 왕궁이 아닌 의회의사당 2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물론 광장 근처에도 다양한 식당들이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 값비싼 곳들인지라 대부분의 직원들은 사원의 구내식당을 이용한다고 했다. 거리도 더 가깝고 음식 값도 싸고 맛도 있으니 그 좋은 식당을 두고 굳이 광장 바깥의 음식점을 찾아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제이 역시 굳이 바깥 음식점을 찾아갈 마음은 없었기에 로겐이 권하는 대로 사원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중앙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와 다시 우현관을 향해 걷던 도중이었다.

“로게에에에에엔!”

어린 사내애 하나가 큰소리로 로겐의 이름을 부르며 복도 저편에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로겐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자세를 낮추더니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는 원숭이마냥 로겐의 팔뚝에 매달렸고, 로겐은 그런 아이를 높이 들어 안전하게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렇게 뛰면 위험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하.”

아이는 로겐의 이야기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한 번 더! 한 번 더!” 하고 소리쳤다. 로겐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아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팔을 내밀었다. 아이는 로겐의 팔뚝에 매달려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복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아이의 금색 머리카락이 반짝거렸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제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땐 굳은 얼굴의 베아테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

아마도 미리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비록 묘지의 비석마냥 창백한 얼굴은 하고 있을지언정 놀라 도망가지도,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냐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클러치를 쥔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비전하.”

아이를 내려놓으며 로겐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제야 베아테는 제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로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전하를 만나 뵈러 가시는 겁니까.”

“네.”

“지금은 식사 때문에 자리를 비우셨으니 잠시 후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고마워요, 로겐. 살짝 턱을 치켜 든 채 베아테는 말했다. 그새를 못 참고 또 로겐의 팔에 매달리려는 아이의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은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겐이 제이에게 말했다.

“비전하십니다.”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저는 또 모르시는 줄 알고.”

로겐이 당황한 듯 말했다. 알면서 왜 예를 갖춰 인사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제이는 대답 대신 베아테의 손에 이끌려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미카엘 저하시죠.”

“네, 맞습니다. 전하와 꼭 닮지 않았습니까?”

로겐의 말에 제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

구내식당은 제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깨끗했다. 뷔페식이라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테이블 간의 간격도 적당해서 웬만한 식당보다 쾌적하단 인상을 줬다. 차려진 음식의 종류는 그리 많은 건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깔끔하니 맛있어 보였고 무엇보다 야채와 과일이 신선해서 좋았다. 마침 테라스 쪽에도 빈 테이블이 있어 두 사람은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하와 같은 왕립 사관학교 출신이시라고요.”

접시에 로스트비프와 미트볼, 튀긴 가자미 요리를 가득 담아오며 로겐이 말했다.

“경호대로 오기로 결정하신 거 쉽지 않으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에시르 왕립 사관학교는 쉽게 말해 엘리트 장교 양성소였다.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장교의 길을 걷다 그대로 고위 간부가 되거나, 적당한 시기에 국방부로 발령받아 요직에 배치되는 게 일반적인 루트였다. 그렇게 정해진 엘리트 코스를 두고 왕실 경호대에 자원하여 온다는 건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사관학교 재학시절에 전하의 신세를 진 일이 많아서요. 이렇게라도 도움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쁠 따름입니다.”

제이는 에이나르가 미리 설정해 준 콜스케그의 자원 입대 사유를 그대로 읊다시피 했다. 읊으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도대체 이런 입 발린 소리를 누가 믿겠냐고.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 누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마디로 전하의 인품에 반해 내린 결정이로군요.”

저희도 그렇습니다. 로겐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리욘은 사관학교 졸업 후에도 2년을 더 군에서 복무했다. 그것도 가장 혹독하고 살벌하다는 알비에테 국경 지대에서. 말로는 발령이 났다고 하지만 사실은 왕자 스스로 자원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리욘은 마약 밀매꾼들을 소탕하고 난민으로 위장한 테러범들을 진압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국민들은 수시로 전해지는 왕자의 활약상에 환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왕자가 왕위를 잇길 거부하고 이대로 군대에 말뚝 박는 건 아닐까 걱정들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대위 진급을 앞두고 전역하여 궁으로 돌아왔고, 24세 가을에 드디어 책봉식을 치르고 왕세자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왕세자의 경호를 담당할 제3 특별 경호 중대가 새로이 꾸려졌다. 원래 4개 소대, 120명의 인원으로 이루어져있던 제3 특별 경호 중대를 리욘은 딱 절반 규모로 줄여 2개 소대 60명의 인원으로 재정비했다. 그 중 스무 명은 왕세자와 함께 알비에테 국경 지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부사관 출신들이었다.

“전하께서 당신의 경호대원이 될 생각이 없냐고 했을 때 말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대위님, 우리 중에 대답을 망설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몇 명은 장교 급까지 노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미련 없이 스바르트로 달려왔죠. 왜냐하면 전하와 함께 국경 지대를 누비던 그 2년이 우리에겐 군 생활 중 가장 즐겁고 뜻깊었거든요.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왕을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직접 나서기로 했죠.”

로겐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다는 듯 연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주군에 대한 존경심과, 그 주군을 보호하는 본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는 그 얼굴을 보자 제이도 왠지 마음이 놓였다. 그렇잖아도 모집 기준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에시르 군대였다. 그 중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국경 지대를 누비던 부사관 출신들이니 실력이야 오죽할까 싶었다. 게다가 왕세자에 대한 충성심마저 각별하니 경호원으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문득 제이는 조금 전 왕궁에서 미카엘을 보며 로겐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간에 떠도는 소문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어째서 저런 소릴 하나 했더니, 로겐의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세자를 보호해야 할 자신이 앞장서서 그의 입지를 흔드는 발언은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 전에 태연한 얼굴로 베아테에게 거짓말을 해 그녀의 발길을 돌리게 한 걸 보면 센스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고.

어쨌거나 경호원은 잘 뽑은 거 같아서 다행이군.

통상적인 경호는 이쪽에 맡겨 두고 자신은 왕비를 상대하는 데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일단은 어떻게든 얼굴을 한 번 봐야할 텐데.

왕비궁에서 끌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제이는 로겐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며 “닥터!” 하고 외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흰 가운을 걸친,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람 많은 데서 그렇게 꼭 큰소리로 불러야겠어요?”

“아,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로겐은 웃으며 사과했다.

“전에 그 진통제 좀 더 줄 수 없을까요? 다른 건 도통 듣지를 않아서 말입니다.”

“그건 코데인 계열이라 많이 쓰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그러지 말고 그냥 치과를 가세요. 충치는 치과 치료 외에는 답이 없어요.”

“그건 아는데 도통 시간이 나야 말이죠. 전하 옆에 24시간을 붙어 있어야 하는데 치과가 웬 말입니까.”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거 참, 사람을 뭘로 보고.”

가당치도 않다는 듯 로겐이 테이블을 탕 내려쳤다. 여자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양손을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내일 진료실로 와요. 일주일 치 드릴 테니까. 그 이상은 안 돼요.”

“이왕 주는 거 보름 치는 안 됩니까?”

“안 돼요.”

단호한 여자의 말투에 로겐이 끙, 하고 신음했다. 그러더니 뒤늦게야 생각났다는 듯 아참, 하며 제이에게 말했다.

“이쪽은 닥터 블리스입니다. 전하의 주치의죠. 닥터, 여기는 이번에 새로 오신 대위님이십니다.”

로겐의 말에 여자가 아하, 하며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가운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던 손을 빼며 그녀는 먼저 제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가워요. 니나 블리스예요.”

“콜스케그입니다.”

제이는 손을 마주잡으며 인사했다.

“듣던 것보다 더 미남이시네요.”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하여간에 이놈의 왕궁이란.”

혀를 내두르는 로겐에게 니나가 “어쩔 수 없죠.”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그런 재미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리고 대위님이 워낙에 눈에 띄는 타입이기도 하고요.”

동양계가 드문 곳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하루에 두 번씩이나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선글라스를 쓰는 게 좋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제이에게 니나가 “그럼 전 이만.” 하고 인사했다.

“먼저 가 볼게요. 기회가 되면 또 뵈어요, 대위님.”

“반가웠습니다. 닥터 블리스.”

“저야말로요.”

웃으며 말한 니나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돌아섰다. 그녀가 자리를 뜨자마자 가자미 튀김의 튀김옷을 벗겨 내며 로겐이 말했다.

“닥터 블리스도 우리 동료입니다. 우리 부대는 규모에 비해 군의관 수도 부족하고 의료 시설도 형편없어서 부상자가 생기면 거의 마을에 있는 큰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했죠. 닥터 블리스는 바로 그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였습니다. 말투는 좀 쌀쌀맞지만 좋은 사람입니다. 어지간한 약들은 크게 문제 안 되는 선에서 거의 다 처방해 주거든요.”

좋은 사람이라. 제이는 로겐의 말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확실히 외출이 쉽지 않은 군인들에게 닥터 블리스는 자신들의 사정을 잘 봐 주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은 맞을지언정 좋은 의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제이는 리욘이 굳이 그녀를 주치의로 데려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실력만으로 따지면 그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의사도 많았을 텐데.

물론 짚이는 이유가 있긴 했다. 수면제. 그리고 신경안정제. 왕실 의사들은 그런 항정신성 약물은 웬만하면 처방해 주려고 하지 않을 테니 그런 문제 때문에 닥터 블리스를 데리고 온 거라면 어느 정도는 납득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제발 그 이유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게 제이의 솔직한 심정이기도 했다. 그 말은 결국 리욘이 여전히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허나 그렇다고 해서 리욘에게 상태를 물어 보거나 약을 줄이라고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고. 자신은 그저 계약서대로 움직이고, 딱 그만큼의 대가만 받아 가면 되는 거였다.

***

점심 식사를 빙자한 서류 검토의 시간이 끝나자 다음은 면회를 빙자한 보고의 시간이었다. 리욘은 오늘 진행된 의회 회의록과 상정 안건들에 대한 자료, 그 외 국왕의 결재가 필요한 몇몇 서류를 들고 국왕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두 달 전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 입원한 국왕은 아직까지도 절대 안정을 요해야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동석한 의료진이 수시로 맥박과 호흡, 심박 등을 체크하며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경우 곧바로 면회를 중지시켰다. 이상이 없더라도 40분에 한 번씩, 최소 십 분 이상은 휴식을 취해야 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보고를 하는 데에도 한두 시간은 가볍게 소요됐다. 오늘처럼 회의 내용이 다양한 날에는 당연히 그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장장 네 시간에 걸친 보고가 끝나고 마침내 리욘이 국왕의 병실에서 나왔다. 병원 건물 앞에서 대기 중이던 왕세자의 경호팀은 그가 차에 오르자마자 퇴근길의 러시아워를 뚫고 스바르트 시내에 위치한 아슬란 호텔을 향해 달렸다. 스웨덴 대사와의 저녁 약속이 일곱 시에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왕세자를 태운 차량은 일곱 시 정각에 호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리욘이 식사를 하는 동안 제이는 경호팀과 함께 뒤쪽 테이블에 앉아 그를 지켜봤다. 프랑스 출신의 요리사가 완벽에 가까운 누벨 퀴진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한 이 레스토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금액에도 불구하고 반년 뒤까지 예약이 꽉 차 있었다. 명성에 걸맞게 최고급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 요리들이 심플한 식기 위에 화려한 모양새로 담겨 나왔다. 리욘은 그것들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식사 시간 내내 그의 입 안에 들어간 거라곤 와인뿐이었다. 그것도 소믈리에가 추천하는 와인은 돌려보내고, 스웨덴 대사를 위해 자신이 직접 골라 왔다며 선물로 준비해 온 칠레산 포도주 두 잔이 전부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왕세자는 8시쯤 호텔을 나섰다. 그를 태운 차는 다시 왕궁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스웨덴 대사와의 식사를 끝으로 마침내 오늘의 공식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것이다. 이 시간 이후의 모든 행적은 철저히 개인적인 스케줄로, 일지에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왕궁에 도착한 리욘은 왕세자 집무실이 있는 본궁이 아니라 왕세자궁에 있는 자신의 개인 서재로 향했다. 어제 제이가 면접을 봤던 바로 그 곳이었다.

“오늘 하루 일해 본 소감은, 대위?”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넥타이를 풀며 리욘이 물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제이는 적당히 대답했다. 어제는 면접자의 신분으로 앉아 기다렸던 소파에서 오늘은 경호원의 신분으로 앉아 첫 근무의 소회를 밝히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제도 오늘도 낯설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마도 9시가 가까워져가는 시간 때문일 거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래? 그동안 체력 관리를 열심히 했나 보군.”

“글쎄요. 딱히 엄청난 체력을 요할 정도로 타이트한 일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대답하며 제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불편한 이유를. 어제는 이곳에 오스카와 에이나르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리욘과 자신, 단 둘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열두 시간 가까이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은 상태로 버틴다는 자체가 피곤한 거니까.”

풀어낸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던진 뒤 리욘은 자신의 책상 의자에 앉았다. 기익, 등받이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입술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 오는 순간,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럼” 하고 말했다.

“오늘 공식 일정은 모두 끝이 났으니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어가다니? 어딜 들어간다는 얘기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리욘이 물었다. 당연한 소릴 묻는다는 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이야기다. 제이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야 물론 제 집이죠. 퇴근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집이 아니라 관사겠지. 왕궁 안에 마련돼 있는.”

“아뇨, 관사가 아니라 제 집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출퇴근을 조건으로 이 일을 받아들인 거였으니까요.”

“그런 조건 나는 못 들었는데.”

“오스카가 들었을 겁니다. 계약서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고요.”

“계약서라.”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며 리욘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가 가진 계약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던데.”

…젠장.

제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예감이 안 좋다 했더니.

블라스트를 통해 들어온 일들의 계약 건은 거의 해리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가끔 자신이 직접 사인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다 알만 한 사람들이고 계약서 내용으로 장난칠 인사들도 아닌지라 대충 한번 읽어보고 사인하는 게 끝이었다. 그마저도 귀찮을 땐 백지에 일단 사인만 하고 나머지 내용은 그쪽에서 알아서 작성하시라고 던져 주는 편이었다. 7년 전 비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해리는 늘 계약서 내용을 꼼꼼하게 살피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지금까지 계약서 관련으로 문제가 생겼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제이는 그저 알겠다고만 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계약서 내용도 확인하고 몇 가지 조항은 수정도 한다고 했는데, 자신의 계약서만 열심히 들여다보고 상대방의 계약서는 제대로 보지 않은 게 실수였다.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꼼수를 부릴 거라곤 상상도 못하기도 했었고.

“왕실 경호대원이 자택에서 출퇴근이라니. 그런 얘긴 살면서 처음 듣는군.”

말투만 보면 꼭 이쪽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열이 오르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계약서에 장난을 쳤니 어쩌니 따지기도 귀찮았다. 어차피 말로는 리욘을 이길 수 없었다. 대신 제이에겐 그보다 더 손쉽고 빠른 해결 방안이 있었다.

“맘에 안 들면 계약을 파기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서로 반쪽짜리 계약서를 쥐고 있는 거라면 지금 당장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이 계약을 파기한다 해도 위약금은 그 절반만 물면 되는 것이다. 겨우 그 돈이 아까워 왕궁에 갇혀 지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돈 때문에 시작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위약금 따윈 안 무섭다는 거로군.”

여전히 팔을 괸 채 리욘은 피식 웃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선 굳이 약속한 여섯 배를 물 필요도 없을 테니까. 겨우 세 배쯤이야 네게는 그리 큰돈도 아니겠지.”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물론 제이는 놀라지 않았다. 이 왕세자는 7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종종 제노스인 자신보다 더 사람의 속내를 잘 간파하곤 했었다. 그래서 제이는 그가 무서웠다. 자신의 마음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차렸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이사한 지 이제 일주일 정도 됐나? 정리도 필요하고 준비도 해야 할 테니 이번 주까지는 출퇴근하는 걸로 하지.”

큰 선심이라도 쓰듯 리욘은 그렇게 말했다.

“다음 주부터는 왕궁에서 지내도록 해.”

“전하.”

“본궁이 불편하다면 왕세자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지. 아무래도 본궁보단 드나드는 사람이 적어서 지내기엔 편할 거야.”

“죄송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단호히 말하며 제이는 돌아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를 빠져나가는 그의 등 뒤로 웃음기 사라진 왕세자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글쎄. 어느 쪽이 힘들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

“감사합니다. 잔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제이는 택시에서 내리며 말했다. 기사가 차를 다시 출발시키기도 전에 그는 빌라 건물을 향해 달려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조차 없이 계단을 이용해 4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겨우 집 앞에 도착한 그는 숨을 고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곧장 천장의 등에 불이 들어왔다. 노랗게 쏟아지는 불빛 너머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제이!”

소리치며 달려오는 시그니를 향해 제이는 쉿, 하고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갖다 댔다. 아이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다가와 소리 없이 품에 안기는 아이를 안아 들고, 제이는 장밋빛 두 뺨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나 왔어, 시그니.

“오늘 하루 잘 지냈어? 엘라랑은 재미있게 놀았고?”

“응, 잘 지냈어. 엘라랑 사이좋게 놀았고 밥도 많이 먹었어.”

“잘했어.”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엘라가 “어서 와요, 제이.” 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미안해요. 첫날이라 그런지 일이 좀 늦어졌어요. 내일부터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겨우 20분도 안 지난 걸요.”

이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다는 듯 엘라는 손을 저었다. 소파에 걸쳐 두었던 겉옷을 집어 들며 그녀는 “그보다 시그니 칭찬 좀 해 줘요.” 하고 말했다.

“오늘 정말 말도 잘 듣고, 하루 종일 착하게 잘 지냈어요. 밥도 잘 먹었고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이 없는 거 보고 울까 봐 걱정했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요.”

엘라의 말에 시그니는 제이의 품에 안긴 채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는 기특하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엘라에게 말했다.

“지하철역으로 가나요? 아니면 버스?”

“버스요. 바로 집 앞에 내리는 차가 있어요.”

“다행이군요. 같이 내려가죠. 정류장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시그니 산책도 시킬 겸이라고 하자 엘라는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함께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시그니를 칭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요 몇 년간 제가 돌봤던 아이들 중에 가장 착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어요. 떼쓰는 일도 없었고 제 얘기도 잘 들어줬어요. 말도 참 잘하더라구요. 다섯 살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그야 다섯 살이 아니라 여섯 살이니까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제이는 자신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시그니가 소리 없이 싱긋 웃었다. 제이도 말없이 미소 지었다. 비밀을 공유한 자들만이 지을 수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정류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엘라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본 뒤에야 그곳을 떠났다. 제이는 빌라에서 직선으로 이어진 큰 길이 아닌 작은 골목길을 이용해 집으로 향했다. 조금 멀리 돌아가야 하긴 했지만 대로변에 비해 확실히 조용했고 길가에 작은 상점들도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골목길의 끝에는 뿌뿌가 있었다. 뿌뿌(pupu)는 핀란드어로 작은 토끼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그 이름처럼 작고 귀여운 카페였다. 이사 온 첫날, 동네를 산책하다 우연히 발견한 이 카페를 시그니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핀란드 출신의 카페 주인 카리나도 좋아했고, 카리나가 핀란드에서 가져 온 알록달록한 접시와 컵도 좋아했다. 그래도 여자애라고 귀엽고 예쁜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시그니가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해서 제이는 종종 아이를 데리고 뿌뿌에 가곤 했다. 오늘은 혼자서도 착하게 잘 놀았으니 그 상으로라도 데려가 줄 생각이었다. 시그니도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제이가 말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그니, 웬일이니? 이렇게 늦은 시간에.”

휴대폰으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카리나가 깜짝 놀라 외쳤다. 늘 앉던 창가 테이블에 앉으며 제이는 카페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아홉시 사십칠 분. 백야 현상 때문에 실감이 안 나서 그렇지, 확실히 여섯 살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올 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괜찮아요, 제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카리나가 물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자지도 않는걸요.”

제이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뒤 시그니에게 메뉴판을 보여줬다. 물론 아이는 읽지도 않고 “핫초코!” 하고 외쳤다. 제이는 메뉴판을 돌려주며 말했다.

“핫초코 하나랑 맘버그(Malmberg)4)요.”

“이 시간에 핫초코라니, 양치 잘하고 자야겠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카리나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머그컵에 가득 넘치도록 핫초코를 담아왔다. 물론 시그니가 좋아하는 마시멜로도 네 개나 띄워서.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그것부터 먹는 시그니는 핫초코가 도착하자마자 티스푼으로 마시멜로를 건지기 시작했다. 마시멜로 중에서도 핑크색의 마시멜로를 가장 먼저 입안에 넣으며 아이는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제이가 없었어.”

“그랬어?”

“응, 그치만 나 안 울고, 바로 세수부터 했어. 그 다음에 옷도 갈아입었고. 참, 엘라가 머리 땋아줬어! 예쁘지.”

시그니가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자 엘라가 땋아준 머리가 양쪽에서 달랑거리며 흔들렸다.

“응, 예뻐.”

제이가 웃으며 말하자 칭찬에 고무된 시그니는 더욱 신이 나서 그 후의 일과에 대해서도 자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점심 식사로는 뭘 먹었고 그 후에 본 만화 영화의 내용은 무엇이며 저녁에 먹은 샐러드에 들어있었던 콩이 무슨 색이었는지 까지도. 오늘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단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제이에게 모조리 전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제이가 도착한 거야.”

“그랬구나. 엘라 말대로 정말 착하게 잘 있었네.”

이제 다 컸다. 제이의 말에 시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제이에게 물었다.

“제이는 오늘 어땠어?”

“난 그냥 그랬어.”

“그냥 그런 게 어떤 건데?”

시그니가 살짝 삐죽이며 다시 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저는 이렇게나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그에 비해 단 한마디로 이야기를 끝내버린 제이가 야속한 눈치였다. 하지만 제이로서는 딱히 뭐라고 설명해 줄 말이 없었다.

“그냥 사람들 만나고 인사하고 소개 받고 그랬어.”

“우응.”

“첫날이니까. 다들 모르는 사람들이었거든.”

그래도 나름 성실하게 할 수 있는 선에서 대답을 해 주자 그제야 시그니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덧 마시멜로를 다 먹은 아이는 티스푼으로 천천히 핫초코를 저으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있잖아, 제이.” 하고 말했다.

“왜 일하는 거야?”

제이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시그니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제이는 부자잖아. 그런데 왜 일을 해야 돼?”

전혀 예상도 못했던 말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뭐? 하며 웃고 말았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누가 그래, 부자라고?”

“해리가.”

시그니는 제꺽 대답했다.

“자기가 아는 용병들 중에서 제이가 제일 부자라고 했어.”

“용병이 뭔지는 알고 하는 얘기야?”

“알아. 군인이잖아.”

“군인은 뭔데?”

“경찰 같은 거!”

아주 정답은 아니더라도 뭘 물어 보면 바로바로 대답이 튀어나오는 게 신기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옹알거리는 소리도 겨우 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이렇게나 커 버린 건지, 신기한 걸 넘어서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매일 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는 아이의 성장에 제이는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웃으며 시그니를 바라보던 제이는 곧 고개를 숙이며 그냥, 하고 말했다.

“친구가 도와달라고 해서 하는 거야.”

친구? 시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제이 친구는 텍사스에 다 있잖아. 아이슬란드랑.”

“있어. 그 친구들 말고 다른 친구. 친구는 아니고 그냥 알던 사람.”

“친구 아닌데 왜 도와 줘? 일하러 가지 말고 그냥 나랑 놀지.”

고개를 숙인 채 핫초코를 저으며 시그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닌 척해도 역시 쓸쓸하긴 했나보다. 왜 아니겠는가.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떨어져 있었던 건 시그니가 태어난 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제이는 새삼 후회가 되었다. 그냥 거절하는 게 좋았을까. 그쪽 사정이 어떻건 간에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시그니만 생각하면서 사는 게 더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게 시그니만을 생각하다 보면 결국 어쩔 수 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시그니가 없었다면 더욱 쉽게 거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자신과는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친구는 아니지만… 그래도 도와 줘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래. 모르는 척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착한 사람이야?”

시그니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제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

“그럼 못됐어?”

이건 조금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못된 건 아니야.”

제이는 한참 만에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짜증을 좀 많이 내. 신경질도 잘 부리고, 우기기도 잘 우기고. 의심도 많고.”

“못된 사람 맞는데…?”

“음, 아냐. 못됐진 않아.”

제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몰라, 헷갈려.”

시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제이도 헷갈렸다. 하지만 왠지 시그니 앞에서는 못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그랬다.

“아무튼 세 밤만 자면 수잔이 오니까 그때까진 엘라랑 사이좋게 잘 놀아.”

제이는 탄산수를 잔에 따르며 말했다.

“나 엘라랑 사이좋아. 우리 친구 됐어.”

“잘했어.”

“잘했지? 나 착하지?”

칭찬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시그니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더니,

“그럼 나아… 마시멜로 하나만 더 먹으면 안 돼?”

몸을 배배 꼬며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제이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마시멜로가 그렇게 좋아?”

“응! 핫초코보다 마시멜로가 더 좋아!”

제이는 웃으며 카리나를 향해 손을 들었다. 마시멜로만 추가로 주문이 가능하냐고 묻자 카리나는 물론, 이라고 하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조그마한 커스터드 컵 하나가 시그니 앞에 놓였다. 컵 안에는 색색의 마시멜로가 가득 들어있었다.

“여덟 개나 있다!”

커스터드 컵 안에 들어있는 마시멜로의 개수를 확인한 시그니가 신이 나서 외쳤다.

“양치 잘해야 돼.”

“응!”

기세 좋게 외치며 시그니는 핑크색 마시멜로를 손으로 집어 입 안에 쏙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손가락을 냅킨에 닦았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제이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

“어때요, 제이가 아는 얼굴이 있나요?”

벤치에 앉은 에이나르가 긴장 반 기대 반의 목소리로 물었다. 명단의 마지막 장까지 살펴본 제이는 사진이 붙어 두 배로 두꺼워진 서류철을 덮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아… 역시 그렇죠?”

휴, 하며 에이나르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이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을 서류철로 가리며 “그렇게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왕궁에 드나드는 동양계들을 조사해달라고 한 건 말 그대로 혹시나 하는 가능성 때문이었으니까요. 혹시라도 내가 아는 얼굴이 나오면 일이 쉽게 끝날 수 있겠다 싶어 부탁했던 거지, 애초에 뭐 큰 기대를 걸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이틀 만에 이걸 다 찾아내다니 대단한데요.”

“아닙니다. 원래 틈틈이 계속 정리해 두고 있었던 거예요. 최근에 새로 들어온 몇몇 인물들에 대한 자료만 갱신하면 되는 거여서 그렇게 오래 걸릴 것도 없는 일이었어요.”

말로는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표정은 내심 뿌듯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전히 리욘에게 칭찬을 많이 못 듣고 사는구나 싶어 제이는 다시 한 번 더 에이나르에게 수고했단 말을 전했다.

“의외로 왕비가 처음 입궁할 때 데리고 온 사람이 없더군요.”

에이나르가 열심히 준비한 서류를 고작 햇빛 가리개로 쓰기가 미안해 한 번 더 처음부터 끝까지 훑으며 제이는 말했다. 명단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빠르게 넘기며 사진에 붙어 있는 얼굴들을 익히고 있자니 에이나르가 그랬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왕족도 아니고 재벌가 딸도 아니니 수행원이라고 함께 오는 사람도 없었고, 영어를 잘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통역 핑계로 데리고 오는 사람도 없었죠. 지금은 노르드어도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고 있고요. 제노스들이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니 진짠가 봐요.”

“안 뛰어나도 10년 넘게 살았으면 당연히 그 정도 수준은 돼야죠.”

“아, 그건 그렇죠.”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에이나르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당시에 왕비는 혼자 몸으로 온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만약 왕비가 누군가를 데리고 오고자 했다면 폐하께서는 직위를 만들어서라도 그 사람을 왕비 곁에 머물 수 있게끔 하셨을 거예요. 가족이라든가, 왕비를 돌봐 줄 지인들을 말이죠. 하지만 왕비는 데리고 올 사람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본인이 그걸 원치 않았던 건지 혼자만 입궁했습니다. 당시에 그걸로 국민들에게 점수를 딴 것도 좀 있죠.”

“그렇군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몇몇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유심히 들여다본 끝에 그는 두 사람을 골라냈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이 둘에게 눈이 가긴 하네요.”

“이 두 사람이요?”

“네. 장뤼민, 카나 안데르센.”

장뤼민, 13년 전 정부의 초청을 받아 에시르를 방문한 뒤 현재까지도 체류 중인 생태학 박사다. 입국 당시에는 몇 번인가 강연도 하고 TV 토론회에 출연도 하였으나 그 후로는 이렇다 할 활동도 없이 연구를 핑계로 계속 에시르에 체류 중이다. 그러면서도 환경부를 비롯한 여러 관계 부처의 자문 위원이라는 핑계로 수시로 왕궁에 드나들고 있다. 그가 에시르를 처음 방문한 2008년은, 리우지엔이 루카스 국왕과 처음 만난 해이기도 하다.

카나 안데르센은 일본계 스웨덴인으로 2013년에 왕실 재무팀으로 발령받아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왕실의 살림을 주무르는 곳이니만큼 같은 직급의 다른 공무원들에 비해 왕비를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이다. 그녀는 제1 왕자가 사망하기 두 달 전에 왕실 재무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그나마 눈이 가는 사람들이란 겁니다. 나머지는 이력을 아무리 살펴봐도 왕비와 딱히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데 이 둘은 어떻게든 끼워 맞추면 끼워 맞출 수 있는 여지가 있어서요.”

그것도 신분을 위장했을 거라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하자 에이나르는 그렇군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제이, 그럼 비서실 소속 중에는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이 없는 건가요?”

“의심이야 하려면 누구나 할 수 있죠. 어차피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은 다 가능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런 건가요….”

중얼거리는 에이나르의 낯빛이 어두웠다. 아무래도 7년 전 지디스 칩 대신 도청기를 받아 내내 손목에 끼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제법 큰 트라우마로 남은 모양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었던지라 제이는 에이나르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때 에이나르에게 도청기를 준 건 아마 그 선배라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왕비의 외출 사실을 알려줬던 그 사람이요.”

“그게, 저도 처음엔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요. 그 후로 몇 번 더 선배랑 만났었거든요. 그런데 딱히 그런 거 모르겠더라고요. 물론 선배가 배우 뺨치게 연기를 잘 해서 제가 속아 넘어간 걸 수도 있겠지만요.”

“첩자가 나 첩자라고 자기 입으로 말하진 않죠.”

하지만 그 선배는 그 정도로 큰 역할도 아니었을 것이다. 에이나르에게 접근할 용도로만 잠깐 쓰고 버린 거겠지. 아니나다를까, 그 선배 지금 뭐하냐고 물었더니 몇 년 전에 퇴직해서 노르웨이 쪽으로 갔단다. 예상대로였다. 결국 왕비가 만든 미끼를 에이나르의 입 안에 밀어 넣는 것까지가 그 선배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선배가 정말 성격이 소심하거든요. 그런 스파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녜요. 보세요, 결국 얼마 못 견디고 왕실에서 나가 버렸잖아요.”

“원래 스파이 임무는 소심한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 겁니다. 대범한 사람은 적당히 상황 지켜보다 안 되겠다 싶으면 뒤통수 치고 상대방 쪽에 붙어 버리는 수가 있거든요. 소심한 사람들은 배신도 못 하는 법이죠.”

“아, 그런가요?”

“그런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제이가 서류철을 벤치 위에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별안간 분수대 쪽이 소란스럽다 했더니 곧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쨍한 목소리가 외쳤다.

“여기야! 여기로 데리고 오면 돼!”

목소리의 주인공은 미카엘이었다. 신이 나서 분수대 쪽으로 달려오는 미카엘의 뒤로 경비대원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개를 품에 안고 왔다. 털이 지저분하고 발이 엉망인 걸 보니 왕실에서 키우는 개는 아닌 것 같았다.

“아이구, 저하! 정말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뒤따라온 미카엘의 유모가 기겁을 하며 말렸지만 미카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분수대 한가운데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내려놔.”

“네? 거, 거기에요? 분수대 안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목욕 시킬 거야. 그러니까 빨리 내려줘.”

경비대원이 어떻게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유모를 쳐다봤다.

“저하, 지금 저 개를 분수대에 집어넣으면 물이 엉망이 되어버려요. 그리고 저하께서 저 커다란 개를 어떻게 목욕시키겠단 말씀이십니까.”

“할 수 있다니까? 유모가 개를 잡으면 되잖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구!”

아이가 떼를 쓰며 발을 굴러댈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이 찰랑거리며 햇빛에 반짝였다. 제이는 베아테가 사내아이의 머리카락을 저렇게까지 길도록 놔 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유일하게 리욘을 닮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이나 매스컴에서 왕세손에 대해 이야기할 항상 ‘왕세자 전하와 꼭 닮은 금빛 머리칼’을 운운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닮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머리카락 색밖에 없었다. 문제는 북유럽 인구의 80% 이상이 금발이라는 거였지만.

“음, 저기. 왕세손 저하십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제이를 보며 에이나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왕궁에서 소란을 피워대고 있는 아이의 정체가 궁금해 쳐다보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제이는 대답했다. 어제 복도에서 잠깐 마주쳤다고 하자 에이나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래요?” 했다.

“네. 비전하와 함께 계시더군요.”

“아….”

역시나, 라는 표정이었다.

“별일 없으셨죠?”

걱정스레 묻는 걸 보니 자신이 궁으로 온다는 소식에 베아테가 어지간히도 싫은 반응을 보였나 보다 싶었다. 용케 그 자리에서 표출 안 시키고 조용히 잘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하자 새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7년 전이었다면 절대 무리였을 테지만 어쨌거나 어제의 베아테는 끝까지 우아한 왕세자비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으니까.

“별일이 뭐 있었겠습니까.”

“그, 그렇죠.”

“왕세손 저하께서 로겐 상사를 무척이나 잘 따르시더군요.”

“로겐 상사가 잘 놀아 주거든요. 그나마.”

로겐 상사가 그나마 잘 놀아 주는 거라면 리욘은 어떠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가 아이에게 살갑고 다정한 부친이었으면 어제 로겐이 그런 식으로 베아테와 아이의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진 않았을 테니까. 무엇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리욘이 모를 리 없었다. 미카엘이 그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이제 곧 모든 국민들이 알게 될지도 몰랐다. 커 가면 커 갈수록 왕세자와 닮은 구석이라곤 보이지 않는 왕세손에 대해 몇몇 호사가들은 이미 두 해 전부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떠들어 대고 있었으니까. 아직은 삼류 가십지에서나 한두 줄로 언급되 흔한 왕실 루머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곧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아이가 자랄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갈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그건 미카엘의 생김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그때쯤이면 왕실에서 발표했던 출산 예정일보다 두 달이나 앞당겨 아이가 태어났다는 사실도 수상쩍게 여겨질 것이다. 하필이면 왕세손의 출생에 대한 루머가 막 나돌기 시작할 무렵 왕세자비가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모든 공식행사 일정을 중단하고 아이와 함께 아일랜드로 요양을 다녀왔단 사실도.

이미 왕세손이 왕세자의 친자가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세자가 자신의 비를 내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했다. 관련된 수많은 추측과 루머 중 가장 널리 퍼진 소문은 역시 왕세자비의 외도설이다. 당시 왕자의 약혼녀 신분이었던 그녀가 다른 남자와의 부적절한 관계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먼저 왕자에게 파혼을 요구했으나 약혼녀를 너무나도 사랑했던 왕자는 오히려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는 왕자에 대한 미안함과 왕실에 대한 죄책감에 결혼식은 사양하고 조용히 혼인 신고만을 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진실여부야 알 수 없었지만 워낙에 로맨틱한 걸 좋아하는 이 나라 국민들의 상당수는 진지하게 그 설을 믿고 있는 눈치였다.

실소가 나올 정도로 로맨틱하기 짝이 없는 그 소문은 작년 이맘때쯤 아이슬란드에 있는 제이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참 그럴 듯하게 포장을 잘했단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자칫 얼간이란 소릴 들을 수 있는 왕세자는 지독한 순애보라는 그럴싸한 단어로 포장을 했고, 상간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왕세자비는 그래도 결혼식을 거절할 정도의 염치는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냈으니까.

물론 진실이 뭔지는 제이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비크를 떠난 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두 사람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욘이 정말 사실을 알고도 베아테를 내치지 않았다면 그건 그녀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7년 전 그날 밤 베아테의 배 속에는 이미 아이가 있었을 거라는 사실도.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베아테의 거동이 수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 베아테 본인도 그때 막 임신 사실을 알게 됐겠지. 아이를 지운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녀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마음먹었고, 본인에게 기회를 가져다 줄 그 약을 구해 왔다.

결론만 놓고 보면 베아테의 결정이 옳았던 셈이다. 어찌 되었건 그녀는 왕세자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아이는 왕세손이 되었으니까. 왕실의 공식적인 입장 발표가 없는 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말 그대로 그저 소문에 불과할 뿐이다. 미카엘이 왕세자로 책봉될 즈음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만약 리욘이 미카엘을 왕세자로 삼고자한다면 DNA 감정 결과를 조작해서라도 국민들 앞에 내놓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뜻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되리라.

“뭐해! 빨리 개를 내려놓으라니까? 빨리! 빨리이이이!”

어느새 미카엘은 떼를 쓰다 못해 패악을 부리며 경비대원을 다그치고 있었다. 자신의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걸로 모자라 장딴지까지 걷어차며 소릴 질러대는 왕세손을 보고 경비대원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결국 그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분수대 안에 개를 내려놓으려는 찰나였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불쑥, 허름한 차림새의 남자 하나가 경비대원과 아이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남자는 개를 안고 있는 경비대원에게선 등을 돌린 채 자신의 허벅지에나 겨우 닿을 정도로 작은 아이를 향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개가 싫어하지 않습니까.”

“어어? 그, 그치만… 난 깨끗하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덩치 큰 성인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아이는 그것만으로도 잔뜩 위축이 되어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조금 전의 성질 머리는 어딜 가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유모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남자는 여전히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가 좋았다고 해서 모든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저하께서도 유모가 억지로 목욕을 시키려 들면 싫으시지요? 내가 싫은 건 남들도 다 싫어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럼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이 어느 정도는 구분이 되실 겁니다.”

말 자체야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고 그리 심하게 다그치는 내용도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그 어떤 회초리나 꾸짖음보다 더 아이를 주눅 들게 했다. 버킷햇을 쓰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잔뜩 험상궂은 표정으로 더욱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까 미카엘이 곧 울음을 터뜨리며 제 유모의 품에 안겼다. 유모가 아이를 달래며 궁으로 돌아가자 경비대원도 이때다 하며 안고 있던 개를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고는 그대로 줄행랑쳤다.

개는 경비대원의 품에 안겨 발버둥 치느라 지쳤는지 혀를 내밀고 한참을 헥헥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자는 헐떡거리는 개를 쓰다듬어 주며 진정시킨 뒤, 들고 있던 도시락 용기의 뚜껑에 물을 담아 그 앞에 내려놓았다. 목이 많이 말랐던지 개는 정신없이 물을 마셨고 남자는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더 개에게 물을 떠다 주었다. 충분히 목을 축인 개가 더 이상 물을 마시려 들지 않자 남자는 이번엔 자신의 남은 도시락을 주었다. 얼핏 봐도 먹은 양보다 남은 양이 더 많은 듯했다. 아마 정원 벤치에서 점심식사로 도시락을 먹던 중에 소동이 나 달려온 모양이었다.

남자는 개가 허겁지겁 도시락을 먹어치우는 동안 말없이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오랫동안 굶었던 모양인지 개는 순식간에 도시락을 깨끗이 비웠다. 남자는 빈 도시락 용기를 챙긴 뒤에야 비로소 자리를 떠났다. 따라오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당연하다는 듯 남자의 뒤를 따라가는 개를 보며 사람들이 신통하다는 듯 수군거렸다.

남자는 후문으로 나가려는 듯 제이와 에이나르가 있는 벤치를 지나 본궁 건물 뒤쪽으로 향했다. 남자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키가 워낙에 커서 전혀 그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동양계였다. 하지만 조금 전에 자신이 본 명단에는 그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없었다.

“방금 그 사람 누구죠?”

제이는 에이나르에게 물었다.

“누구… 아, 앨런 말씀이십니까?”

“앨런?”

“네, 방금 지나간 모자 쓴 사람 말씀하시는 거죠? 앨런입니다. 앨런 최. 발데마르 공작의 아들이에요. 아직 정식으로 성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아. 제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틀 전 에이나르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들이 뒤늦게야 생각났다. 그래, 동양 여자만 건드리고 다닌다고 했지.

“성을 받지 못했다는 건 애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란 건가요?”

“네. 그런데 아마 곧 아들로 인정하고 정식으로 성을 줄 겁니다. 아니 뭐, 사실 아들로 인정한 건 꽤 됐어요. 지금 부인 눈치 보느라 성만 못 물려 준 것뿐이지. 그래도 지금 비서라는 명목으로 계속 같이 다니고 있고 가끔은 앨런이 발데마르 공작의 대리인으로 왕궁에 와서 일처리도 하고 있고 그래요. 사실상 후계자나 다름없죠. 발데마르 공작의 자식들 중에 앨런만큼 똑똑한 사람도 없거든요.”

“왜 이 명단에는 없었죠?”

제이는 에이나르가 만들어온 서류철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신분도 확실하고, 또 왕비보다 먼저 궁에 들어왔거든요.”

“그래요?”

“네. 왕비가 궁에 처음 들어온 게 2009년인데, 앨런은 2008년에 이미 발데마르 공작의 비서단으로 궁에 드나들기 시작했어요.”

“그때가 몇 살이었습니까?”

“올해 서른아홉 살이니 그때는 스물여섯 살이었겠군요.”

공작의 비서로 발탁되기엔 꽤 젊은 나이이긴 하지만 이상할 건 없었다. 에이나르도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왕자궁 비서실로 발령 나 리욘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으니까.

“앨런. 앨런 최….”

제이는 가만히 남자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동양 여자 페티시즘이 있다고 했으니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중국 여자 아니면 일본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야 연구소와 텍사스 훈련장을 제외하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동양인이라고 하면 차이니즈 다음으로 재패니즈였으니까.

반갑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그냥 기분이 묘했다. 앨런 최.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어보는 순간이었다. 에이나르의 바지 주머니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불에 덴 듯 놀란 얼굴로 휴대폰을 꺼낸 에이나르가 허둥지둥 통화버튼을 누르고는 “네, 전하!” 하고 외쳤다.

“네. 네… 네, 같이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네, 네, 네, 소리만 반복하다 전화를 끊은 에이나르는 휴대폰을 다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당장 집무실로 오라고 그러시네요.”

“가 보십시오.”

“아뇨, 저 말고 제이요.”

“…….”

대답 없는 제이를 향해 에이나르가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제이, 혹시 무전기 꺼놨어요?”

“네.”

“왜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무겁고 시끄러워서요.”

“그러다 전하께 위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누군가가 무전으로 연락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아차릴 겁니다.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았다. 에이나르에게 이야기한다는 건 리욘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거나 다름없었다. 안 해도 될 이야기를 굳이 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제 와서 새삼 그가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상처 받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이상 피곤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 예민해져 있을 때는 다른 부수적인 사항들에는 일절 신경 끄고 일에만 집중하는 게 좋았다.

“갑시다.”

제이는 왕궁 건물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에휴. 뒤에서 에이나르가 소리 없이 한숨 쉬는 게 느껴졌다. 쏟아지는 햇살을 서류철로 가리며 제이는 생각했다. 확실히 약이 효과가 좋긴 한 모양이라고.

이제 겨우 사흘 복용했을 뿐인데도 감각이 달랐다. 그래봤자 S등급 수준으로 향상된 게 아니라 칩의 영향력을 뚫고 정확하게 생각을 읽어내는 것까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느낌은 왔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직감이라는 게 전보다 훨씬 더 뚜렷하고 선명해진 셈이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있긴 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예민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보니 쉽게 지치고 피로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괜찮지만 곧 에스트로겐 과다로 인한 부작용 증세도 나타날 것이다.

한 일주일 뒤? 운 좋으면 열흘 정도까진 버티려나….

정원을 가로지르며 제이는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과거에 몇 번인가 호르몬제를 투여했을 때도 항상 그 즈음해서 부작용이 나타났다. 처음은 몸이 무겁고 약간 둔해진 느낌이 드는 정도라 그때 바로 약 복용을 멈추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걸 무시하고 계속 먹다 보면 하복부 쪽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운이 나쁘면 출혈까지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번에는 그렇게 되기 전에 약 복용을 중지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그 전에 어떻게든 리우지엔을 만나야 했다.

왕궁 건물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비서실에 도착하자 에이나르는 얌전히 자신의 책상으로 가 앉으며 제이에게 눈짓했다. 집무실에는 혼자 들어가란 뜻이었다.

제이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집무실 문을 열었다. 당연히 리욘 혼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손님이 와 있었다.

“제이.”

의자가 아닌 책상에 걸터앉아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리욘이 문을 열고 들어온 제이를 보며 말했다.

“인사하지. 이쪽은 닥터 블리스.”

리욘의 소개에 손님용 소파에 앉아있던 니나가 먼저 인사했다.

“반가워요, 대위님. 우린 구면이죠?”

“엊그제 식당에서 만났죠.”

제이는 집무실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전하의 주치의라고 들었습니다.”

소파에는 앉지 않고 테이블 옆에 서서 말하자 리욘이 맞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자네의 주치의도 될 거야.”

“제 주치의요?”

제이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리욘을 바라봤다.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며 니나가 대신 대답했다.

“전 핀란드에서 의대를 나왔어요. 에시르로 돌아오기 전에 핀란드 국경 지대의 병원에서 4년 정도 근무를 했는데 거기 환자의 절반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던 러시아 밀수꾼들이었죠. 물론 그중에는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도 있었고요.”

“아하….”

제이는 낮게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리욘이 니나를 왕궁으로 데리고 온 이유가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음을. 리욘 본인의 주치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를 볼 수 있는 의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제이는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왕궁으로 불러들이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다. 물론 물어볼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글쎄요. 일부러 신경써주신 건 감사하지만 제가 닥터를 찾을 일이 있을까요.”

“찾을 일이 없으면 더 좋죠. 어쨌거나 의사는 자주 안 볼수록 좋은 거니까.”

그나저나, 하고 니나는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식당에서 봤을 땐 앉아있어서 몰랐는데 아지스크치고는 키가 꽤 크네요. 정확히 얼마나 되죠? 6피트는 될 것 같은데.”

“마지막 신체검사 결과는 6.1피트(185.9cm가량)였습니다.”

“생각보다 더 크네요.”

그래봤자 이 나라 성인 남자들 평균 신장에 겨우 턱걸이하는 정도다. 에시르는 성인 남자 평균 신장이 186cm로 네덜란드와 더불어 세계 최장신 국가다. 평균이 186cm라고 해도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보다 컸고 특히나 군인들은 대부분 190cm가 넘었다. 실력만큼이나 외모를 중시하는 왕실 경호대는 2미터에 육박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리욘의 경호를 맡고 있는 제3 특별 경호 중대 소속 중에 제이보다 작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에이나르도 192cm나 됐다. 그리고 7년 전 자신의 비서와 키가 똑같았던 리욘은 이제 그 비서를 반쯤 내려다보고 있었다. 못해도 6.5피트는 된다는 소리다.

“어머니가 슈퍼 프로바이더라고 했죠? 그럼 아버지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동양계는 확실히 아니었으니 러시아 아니면 북미 쪽 사람일 겁니다. 어쩌면 둘 다에 해당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요.”

“아, 그래서….”

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안 들려도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키가 그렇게 컸구나, 그래서 생긴 게 그랬구나, 그래서 눈동자 색이 그랬구나. 뭐가 됐든 외모와 관련된 얘기인 건 확실했다. 누가 봐도 쉽게 태생을 짐작할 수 없는 생김새였으니까.

“눈은 어때요?”

“문제없습니다.”

“운이 좋으신 분이네요.”

책상에 걸터앉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욘이 “눈?” 하고 되물었다.

“눈이 왜?”

“3세대 환자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예요. 자외선 노출을 비롯한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각막 상피가 점처럼 얇게 파이는 걸 점상미란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각막 표피에 상처가 나는 거죠. 이거 때문에 눈이 부시거나 앞이 흐릿하게 보이는 거고요. 보통은 이삼일쯤 안정을 취하면 상태가 좋아져요. 하지만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3세대 환자, 그 중에서도 모친이 슈퍼 프로바이더였던 사람들은 일단 점상미란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호전되는 경우가 없어요. 점점 더 악화될 뿐이죠. 그것도 빠른 속도로.”

“원인이 뭐지?”

“원인에 대해선 아직 밝혀진 게 없어요. 하지만 슈퍼 프로바이더의 경우에는 워낙에 다양한 약물들을 복용했고 시술도 받았기 때문에 그 부작용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죠.”

“그렇군.”

리욘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다시 니나에게 물었다.

“그럼 제이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건가.”

“지금 삼십대 초반이죠? 지금까지 이상이 없었다면 괜찮을 거예요. 보통은 십대 중후반에 이미 시력 저하가 나타나거든요. 그리고 이십대 후반쯤부터 눈부심과 번짐 현상이 시작되고요. 지금까지 괜찮았다면 앞으로도 문제없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운이 좋다고 한 거잖아요.”

“이걸 가지고 운이 좋다고 해야 하다니.”

기가 찬다는 듯 리욘이 실소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던 그가 이내 니나를 향해 말했다.

“닥터는 이만 나가보도록.”

“그러죠.”

기다렸다는 듯 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요한 거 있으면 의료실로 오세요.”

여전히 말없이 서 있는 제이에게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왕세자 집무실을 떠났다.

그렇게 순식간에 또 제이는 리욘과 단 둘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딱히 좁지도 않은 공간인데, 아니, 오히려 성인 남자 둘이 마주보고 서 있기엔 지나치게 넓은 공간인데도 그랬다. 숨 쉬기가 힘들었다. 심장이 무겁게 펌프질 해대는 소리가 자신의 귀에까지 들리는 듯했다.

“내 경호원인데도 하루 종일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군.”

“경호대원들은 늘 전하 뒤에 서 있으니까요.”

“대위.”

난 지금 말장난 하자는 게 아니야. 웃음기라곤 남아있지 않은 목소리로 리욘이 말했다.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묻는다. 가벼운 말투와는 다르게 목소리는 여전히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왕궁 내에서 전하께 위해를 가할 만한 인물이 누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습니다.”

“왜지?”

예상도 못했던 물음에 제이는 당황했다.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리욘이 먼저 말했다.

“난 그런 일은 지시한 기억이 없는데.”

“하지만… 전하를 해치려는 자가 있으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으니 먼저 죽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 그게 경호원의 일이니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리욘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날 해치려는 자가 나타났을 때의 이야기지. 그럴 기미조차 안 보이는데 구태여 찾아다니며 들쑤시는 건 과잉 방어야. 아니, 방어도 아니군. 그냥 공격이지. 선제공격.”

“기미가 보인 뒤에는 늦습니다.”

“늦지 않게 처리하면 되지.”

말이 안 통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냐고 묻기도 귀찮아서 그냥 웃고만 있자니 리욘이 다시 팔짱을 끼며 “이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 하고 말했다.

“난 자네를 내 경호원으로 고용한 거야, 대위. 경호원은 내 옆에서 날 지키고 있다가, 내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제압해 처리하는 게 임무고.”

확실히 그게 일반적인 경호원의 임무이긴 하다. 하지만….

“겨우 그것 때문에 그 돈을 주고 절 부른 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럼?”

리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제이는 뭔가를 말하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다른 곳도 아닌 왕세자 집무실에서 대놓고 암살이니 살해 청부니 하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순 없었다.

“아닙니다.”

제이는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다행히 리욘도 더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띤 채 제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흥미진진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약간 허탈해하는 것 같기도 한 그 미소가 제이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어진 리욘의 말에 그마저도 곧 잊어버렸다.

“납득한 모양이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관사로 옮길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나? 닥터 블리스가 있으니 병원 문제에 대해선 맘 놓도록 해. 닥터 블리스도 궁내의 관사에서 살고 있으니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전화만 하면 바로 달려올 거야.”

“전하. 저는 관사로 들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수도 없이 했던 말을 제이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저는 출퇴근을 조건으로 이 일을 받아들인 거라고 수차례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설령 제가 관사로 들어온다 한들 밤중에 닥터에게 전화를 걸 만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하려던 제이는 이어진 리욘의 말에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네는 아니라도 자네 딸은 그럴 수 있지.”

“…….”

“어린애들은 원래 한밤중에 갑자기 아프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니까.”

팔짱을 낀 채 말하던 리욘은 아무런 대꾸도 없는 제이를 보며 무심한 얼굴로 “왜?” 하고 물었다.

“내가 내 경호원으로 들어올 자에 대해 기본적인 신변 조사조차 안 할 거라고 생각했나.”

“아뇨, 그건 아닙니다.”

제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 정도는 충분히 알아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이런 계기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리욘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딸을 낳아 키우고 있다는 것을. 서류 한 장만 떼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니까.

“하지만 제게 그 이야길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왜?”

“입에 담는 것조차 끔찍해하셨으니까요.”

“그랬던가.”

남의 일처럼 리욘은 중얼거렸다.

“뭐,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팔짱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리욘은 말했다. 책상을 돌아 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더니, 오전 내내 신고 있던 구두는 어디 가고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아마도 오후에는 더 이상 공식석상에 나설 만한 스케줄이 없어 발이 편한 신발로 갈아 신은 모양이었다. 한 벌에 삼만 달러를 호가하는 수트를 입고선 신발은 천으로 된 스니커즈라니. 말도 안 되는 조합 같았지만 의외로 잘 어울렸다. 젊으니까, 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왕세자니, 곧 국왕이 될 사람이니 어쩌니 해도 이제 겨우 스물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청년이니까.

생각하면서도 제이는 자신이 우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리욘의 나이나 헤아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멀쩡히 서 있기가 힘들 것 같았다. 어떻게든 자신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제이는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그런 제이의 노력을 리욘은 순식간에 허사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튼 아이 때문에 출퇴근을 고집하나 본데, 자네 혼자 궁으로 들어오라고 한 적은 없어. 같이 관사로 옮기도록 해. 자네가 일하는 동안에는 유모가 봐주면 될 테니까.”

유모라는 말에 조금 전 정원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다음 순간 제이는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시그니와 미카엘이 왕궁 안에서 같은 유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내는 모습이라니.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사양하겠습니다. 제 자식은 에시르 왕실과는 어떠한 연유로든 얽히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아이를 위해선 그게 좋긴 하지.”

의자에 앉으며 리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네는 이미 왕실과 얽혔고 당분간은 계속 얽혀 있어야만 해. 그럼 자네 자식도 이미 반쯤은 왕실과 인연이 닿아 있다고 봐야겠지.”

“출퇴근 조건은 분명 계약서에도 남아 있는 내용입니다.”

“그놈의 계약서.”

내 계약서엔 그런 내용이 없어. 웃으며 말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결국 한숨을 쉬며 내뱉듯 말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어차피 왕궁에서 기거하고 있는 경호대원들도 다 삼교대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제가 출퇴근을 한다고 해서 근무 시간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고, 사흘째 계속 열 시간, 열한 시간 근무하고 있는데 도대체 뭣 때문에 굳이 그렇게,”

“그럼 왕궁으로 들어오고 하루 여덟 시간 근무하면 되겠군.”

태연히 미소 지으며 자신의 말을 자르는 남자에게 제이는 짜증스런 목소리로 “지금 그 얘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했다.

“근무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굳이 왕궁에 들어와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출퇴근을 하면서도 전하께서 맡긴 임무는 충분히 수행해낼 수 있으니까요.”

그건 아마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제이는 리욘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굳이 왕궁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시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혹시 정말로 제가 출퇴근을 하느라 임무에 소홀해질까 못 미더워 하시는 말씀이라면 차라리 계약파기를 하십시오. 저를 한 달간 쓸 돈이면 에시르 군 1개 소대를 한 달 동안 움직일 수 있다는 거, 전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건지는 전하께서 파악하여 결정하실 문젭니다.”

격앙된 와중에도 최대한 소리를 억누르기 위해 애쓰며 제이는 말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약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서 사흘간 꾹꾹 누르고 있던 게 폭발을 한 상황이다 보니 스스로도 잘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말투는 영락없는 배째라였다. 뒤늦게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진 상태였고 리욘은 지금 그 엎질러진 물에 발까지 젖은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계약 파기가 돼도 할 말이 없겠군.

차라리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제이는 생각했다.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왕비를 상대하는 것보다 눈앞의 리욘과 신경전을 벌이는 게 백 배는 더 힘들었다. 이런 별것도 아닌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 소모를 하는 일이 생길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리욘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 관두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제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넌 여전히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읽나 보군.”

한참만에야 입을 연 리욘은 전혀 다른 소릴 했다.

“그게 지금 무슨….”

황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제이의 눈에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은 리욘의 왼쪽 손목이 보였다. 오른쪽도 마찬가지였다. 시계 따위는 없었다.

“칩… 안 차고 계신 겁니까.”

“그래.”

“왜죠.”

“번거로워서.”

대수롭지 않은 투로 리욘이 말했다.

“목숨이 달린 일인데요.”

“위험하다 싶은 장소에서는 제대로 차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절 왜 부르신 겁니까.”

지친 목소리로 묻자 의자 팔걸이에 한쪽 팔을 괴며 리욘이 말했다.

“칩 얘기라면 자네가 있어서 안 차는 거야.”

“제가 있어도 차셔야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럼 무슨 뜻입니까.”

제이는 여전히 지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제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리욘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네에게 자식이 있다는 게 놀랍군.” 하고 웃었다.

“아이는 어떻게 갖게 된 거지? 인공 수정? 아니면 자연 임신?”

“…….”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리욘은 자기가 먼저 “자연 임신이겠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스물네 살 이후론 인공 수정을 시도했단 기록이 없었으니까. 아이 출생지가 텍사스인걸 보면 아이 아빠는 블라스트의 용병인가? 제노스?”

“일과 관련 없는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일과 관련 있는 얘기를 하지. 다음 주부터는 관사에서 생활하도록 해, 제이.”

기다렸다는 듯 리욘이 말했다.

“왕세자궁 2층 가장 안쪽 방을 자네에게 주지. 내가 어릴 때 여름마다 가서 묵던 곳이야. 왕자궁은 서향이라 여름엔 더워서 살 수가 없었거든. 왕비궁도 마찬가지라 여름만 되면 어머니와 함께 종종 왕세자궁으로 피서를 가곤 했지. 방 두 개를 터서 아예 스위트룸처럼 개조를 한 거라 아이와 함께 지내기엔 나쁘지 않을 거야.”

“아뇨, 필요 없습니다.”

제이는 딱 잘라 말했다.

“저는 관사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라서요.”

더 할 말 없으시면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짧게 말한 뒤 제이는 리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비서실을 통과해 복도로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며 그는 거울 속의 자신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빨리 왕비를 찾아내서 죽이자.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리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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