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노트북은 필요 없는 건가요?”
“그게 왜 필요해.”
“하지만 과제를 하려면 노트북은 있어야….”
“거기서 다 지급해 준다고.”
“아, 그렇군요. 그럼 빼겠습니다.”
패드의 화면을 터치펜으로 그으며 에이나르가 말했다.
“그럼 또… 휴대폰 충전기는 챙겨야겠죠?”
“미쳤어? 휴대폰을 못 가져가는데 충전기가 무슨 소용이야!”
참다 못 한 리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나르는 아차, 하고 깜박했다는 표정으로 또 패드 위에 찍 선을 그었다. 제이는 힐끔 옆에 앉은 에이나르의 패드를 들여다보았다. ‘꼭 챙겨야 할 것들’ 리스트에는 아직도 수십여 가지의 물건들이 남아 있었다. 리스트 중간중간에 리욘의 혈압을 올릴 만한 물건들, 이를테면 게임기나 mp3 플레이어, 블루투스 이어폰 같은 것들이 보여 제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리스트가 완벽히 정리되기 전까지는 어디로든 잠시 피해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리욘의 사관학교 입교식이 이제 2주도 남지 않았다. 다음 주 토요일이면 리욘은 에시르로 떠난다. 왕궁에는 들르지 않고 곧장 사관학교 기숙사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이틀 밤을 지낸 뒤 월요일에 입교식을 치르고 나면 이제 3년간은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왕궁에 가지 않는 왕자를 대신해 그의 짐을 꾸리는 건 에이나르의 몫이었다. 밤새워 리스트를 작성해 온 에이나르를 보며 제이는 솔직히 많이 놀랐다. 에이나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임을 알게 된 까닭이었다.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사관학교는 말이 학교지 거의 군대나 다름없는 곳인데 개인 텀블러와 머그컵을 반드시 챙겨 가야 할 필수 용품으로 챙겨 넣을 줄은 몰랐다. 물론 엘리트 출신들 중에는 의외로 세상 물정 모르고 사회생활에 서툰 사람들이 많았다. 요인 경호팀으로 일하다 보면 은근히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에이나르가 그런 과일 줄은 몰랐다. 덕분에 보고 있으면 덜 심심하긴 했지만 가끔은 진지하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러다 혹시라도 리욘이 국왕이 되면 에이나르는 국왕의 비서가 되는 건데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리욘이 그렇게 에이나르를 구박하고 짜증을 내면서도 의외로 그를 잘 봐 준다는 거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제이는 리욘이 언제 에이나르의 패드를 빼앗아 바닥에 패대기쳐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제이가 다이닝 룸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두 사람을 위해 냉장고에 있던 탄산수 두 병을 꺼내들고 다시 가족용 거실로 향할 때까지도 리욘은 에이나르의 맞은편에 앉아 참을성 있게 그의 리스트를 수정해주고 있었다. 물론 표정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제이는 탄산수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한 번 에이나르의 패드를 들여다보았다. 리스트는 상당히 줄어들어 앞으로 체크해야 할 물건은 열댓 가지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음, 이 정도면 이제 그냥 에이나르가 알아서 빼고 더하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왕자의 앞에서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땀을 흘리고 있는 에이나르가 안쓰러워 말하자 리욘이 딱 잘라 “안 돼.”라고 했다.
“지금 확실하게 해 놔야지, 안 그럼 내일 하루 종일 전화해서 이건 가져가야 할까요, 저건 빼는 게 좋을까요, 하고 묻는다고.”
리욘의 말에 에이나르가 정색을 하며 “아닙니다.” 하고 외쳤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리고 사관학교 반입 금지 품목이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았으니 그거 참고하면 될 것 같고요.”
믿어 주십시오. 에이나르가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제이. 전하는 아직도 서핑 중인가요?”
“네.”
“그럼 아까 그거랑 같이 이 쿠션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봐 줄래요? 그냥 쿠션이면 저도 말 안 하겠는데 이게 숙면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전하의 유모가 작년에 일부러 프랑스에서 사 온 쿠션이거든요. 꽤 효과가 좋다고 그래서요. 쿠션 반입이 힘들면 안에 들어 있는 아로마 캡? 그거라도 어떻게 가져가셨으면 하는데 전하께 한번 여쭤봐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는 짧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옆에 놓인 나무막대를 주워 모랫바닥에 ‘숙면용 쿠션’이라고 적었다. 그 위에는 이미 숙면용 양말, 수면 안대, 항수 같은 방향제 등의 물건들이 빼곡하게 리스트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에이나르가 리욘에게 물어봐 달라고 한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가져갈 수 있을 텐데 가져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에 해당하는 물품의 목록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리욘이 자신의 혈압을 포기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리스트를 정리했던 건데,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휴대폰을 꺼 둘까. 제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시간 사이에 벌써 여덟 번이나 전화벨이 울렸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전화가 올지 몰랐다. 결심한 듯 제이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한참 동안 전원 버튼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휴대폰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말았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아주 긴급한 연락이 올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해 보였지만.
휴대폰 소리에 노이로제 증상마저 보이고 있는 제이를 알 리가 없는 리욘은 오늘도 신나게 파도를 타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웬일로 그를 구경하는 관광객도 거의 없었다. 아니, 해변에 사람 자체가 없었다. 당연히 수상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도 좀 더 주의 깊게 정찰을 해볼까 했으나 조금이라도 정신을 집중시킬라치면 요란하게 울어 대는 벨소리 때문에 곧 포기하고 만 제이였다.
오늘따라 태양도 유난히 뜨거웠다. 제이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막대를 주워 들었다. 에이나르가 불러 주는 리스트를 적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다 발견한 아이스 바 막대였다. 그걸 쥐고 바닥에 선을 몇 갠가 그었다. 가로로도 긋고 세로로도 그었다. 그런 다음 한가운데에 먼저 하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 옆에는 까만 동그라미, 그 위에는 또 하얀 동그라미. 그렇게 한참동안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을 때였다.
“그게 뭐지?”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제이는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리욘이 신기한 걸 보는 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그려진 바둑판을 보고 있었다.
“바둑이라고… 일종의 보드게임입니다.”
“바둑?”
“네. 아시아권에서 많이들 하는 겁니다. 저는 텍사스에 있을 때 배운 거지만요.”
훈련장에서 대기가 길어질 때면 용병들은 가벼운 게임을 하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주로 카드게임을 많이 했지만 카드가 없을 때는 간단하게 바닥에 판을 그려놓고 할 수 있는 게임들을 했다. 블라스트 전체로 보자면 단연 오델로와 체스를 즐기는 이들이 많았으나 비교적 동양인 비율이 높은 제노사이드 한정으로는 바둑이나 오목이 인기였다.
“흠. 리버시 같은 건가?”
“비슷합니다. 다만 이건 돌의 색이 바뀌는 게 아니라 그대로 빈 집을 만들어 그 집이 많은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재미있어 보이는데?”
가르쳐 줘. 리욘은 제이가 그려 놓은 바둑판 앞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여기서 말입니까?’ 제이는 분명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입을 통해 나온 단어들은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공짜로 말입니까?”
말해놓고서야 아차, 했다. 이건 조건 반사였다. 블라스트에서는 동료 사이에도 절대로 공짜라는 게 없었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돈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게 그곳에서의 불문율이었다. 아무리 절친한 동료 사이라 해도 일방적인 부탁이란 건 없었다. 거래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확실한 결과가 보장됐으니까. 하다못해 게임을 배울 때도 그랬다. 맥주 한 캔이나 최소한 담배 한 개비 정도는 입에 물려 줘야 상대방도 제대로 된 룰을 가르쳐주었다. 공짜로 배우려 들었다간 엉터리 룰에 속아 내기에서 돈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럼, 페이를 지불하라고?”
리욘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루에 이천육백 달러씩 버는 작자가 너무 악착같이 구는 거 아냐? 뭐 얼마나 받으려고?”
어쩌다보니 나온 말이었는데 막상 진지하게 흥정하려고 드는 리욘을 보자 어라, 싶었다. 하지만 같이 훈련장을 뒹굴던 동료도 아니고 왕자를 대상으로는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돈은 좀 그렇고, 다른 걸로 받겠습니다.”
“다른 거 뭐?”
“음, 그건 나중에 생각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당장 생각해내려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래놓고 나중에 말도 안 되는 걸 요구하면 어쩌라고?”
“그땐 뭐, 거절하셔도 됩니다.”
“너 페이를 받을 생각이 있긴 한 거야?”
리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제이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했다. 하지만 어차피 맥주 한 캔, 커피 한 잔 정도 얻어 마시고 말 생각이었기 때문에 리욘이 거절한다고 해도 큰 타격은 없을 터였다. 그 전에 거절할 것 같지도 않았지만.
“참, 그보다 에이나르가 이 정도는 들고 가도 되지 않느냐고, 전하께 여쭤봐 달라고 한 물건들이 있는데요.”
“뭐?”
제이는 대답 대신 모랫바닥에 써진 리스트를 가리켰다. 리욘은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잠시 들여다보더니 이내 욕설을 퍼부으며 발로 모래 위의 글자들을 싹 지워 버렸다.
“제정신인가. 이걸 가져갈 거라고 생각하게.”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제이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맞장구쳤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죠.”
제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오늘은 태양이 너무 뜨겁습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제대로 된 바둑판을 갖다 놓고 가르쳐 드리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바둑판? 그런 게 따로 있나?”
“물론입니다. 아마 창고에 있을걸요.”
저택 안을 수색할 때 본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다고 하자 리욘이 그래? 하고 신기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없으면 종이에 인쇄라도 하면 되니까요.”
리욘의 성격상 본인이 진다 싶으면 괜히 돌을 놓는 척하며 다 흩뜨려 버릴 수도 있었다. 차라리 종이에 인쇄해서 펜으로 그려 가며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제이는 생각했으나 불행히도 하칸이 창고에 처박혀 있던 바둑판을 찾아내 두 사람 앞에 내려놓는 바람에 그 계획은 좌절되었다. 바둑알도 두 통 그대로 다 있었다.
“이거였구나. 일본에 갔을 때 TV에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아.”
“그쪽에선 꽤 큰 규모의 대회도 열린다고 하더군요.”
제이는 일단 게임 방법부터 설명했다. 오델로를 할 줄 알아서인지 예상대로 리욘은 바둑의 규칙을 쉽게 이해했다. 하지만 규칙을 이해하는 것과 게임에서 이기는 건 다른 문제였다.
“혹시 지금 내 머릿속 읽고 있는 거 아냐?”
게임에서 세 판을 내리 진 리욘이 바둑돌을 집어던지며 외쳤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자꾸 이겨?”
“전 이걸 십 전부터 뒀습니다. 전하는 오늘 처음으로 배웠고요. 심지어 이제 세 판째 두는 건데 그런 전하께 제가 진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지.”
맞아. 난 이제 겨우 세 판밖에 안 뒀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리욘은 자신이 내던진 바둑돌을 주워 통 안에 집어넣었다.
“그럼 다시 시작해볼까.”
리욘은 기세 좋게 검은 돌을 바둑판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열 판을 내리 지자마자 이번엔 바둑판을 엎었다.
“솔직히 말해 봐. 진짜 내 생각 들여다본 적 없어?”
“안 봤다고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그런데 왜 자꾸 이기냐고! 열세 판 두는 동안 한 판도 못 이겼다는 게 말이 돼?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내가!”
“이제 겨우 열세 판 뒀을 뿐입니다. 서른 판은 두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또 내리 열일곱 판을 진 리욘이 흥분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제이는 우선 리욘의 앞에 놓인 바둑통부터 붙잡았다. 순서상으론 이제 바둑통을 던질 차례였기 때문이다. 그 상태로 그는 전하, 하고 차분하게 말했다.
“전 블라스트 내에서도 두 번이나 바둑 챔피언 자리에 올랐던 사람입니다. 오늘 처음 배운 사람에게 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서른 판을 두는 동안 한 판을 못 이겨.”
믿기지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신음하던 리욘은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내 생각 읽은 거 아니야? 정말로?”
“안 읽었습니다.”
제이는 이번에도 똑같은 대답을 돌려줬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칩을 잠깐 바꾸시든지요.”
가지고 올까요? 제이의 물음에 리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아냐.” 하고 고개를 저었다.
“가지고 오지 마.”
바둑판 위의 검은 돌을 모아 자신의 통에 쏟아 부으며 리욘이 말했다.
“네가 읽었을 리가 없지. 난 요즘 밤에도 칩을 안 바꾸는걸.”
“밤에도 안 바꾸신다고요?”
제이도 흰 돌을 자신의 바둑통에 담으며 되물었다.
“왜요, 잃어버리셨습니까?”
그럼 사관학교 들어가기 전에 빨리 새로 하나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아니, 그냥. 널 믿으니까.”
리욘이 바둑판 한가운데에 검은 돌을 놓으며 말했다. 제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엉뚱한 곳에 돌을 놓을 뻔했다.
“교란 작전입니까?”
“응?”
리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얼른 대답하며 제이는 소목에 흰 돌을 두었다. 시계를 보자 어느덧 밤 열 시가 지나 있었다. 아무리 속기로 뒀다고 하나 서른 판을 쉬지 않고 달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저녁 식사도 거르고 바둑만 뒀다. 아마 배가 고파서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모양이라고 제이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얼른 끝내고 간단하게 빵이나 과일로라도 끼니를 때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바둑통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제이는 그날 결국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내일 다시 둬.” 라는 말을 남기고 리욘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게 새벽 세 시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세 시간 후면 아침 식사였다. 제이는 차라리 아침을 먹자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드물게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하마터면 아침도 못 먹을 뻔했다. 리욘은 아예 아침 식사 시간에는 내려오지도 않았다. 오전 열 시가 다 돼서야 1층으로 내려온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제이부터 소환했다. 바둑을 두기 위해서였다. 제이는 리욘에게 바둑을 가르쳐 준 걸 진심으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점심시간에도 라일라가 만들어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계속 바둑을 뒀다. 제이가 서핑은 안 가실 거냐고 물었지만 리욘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한 판도 이기지 못한 상태였다. 저녁 식사도 거르려는 걸 제이가 자꾸 이러시면 이제 바둑 안 두겠다고 엄포를 놓아서 겨우 제대로 챙겨 먹었다. 새벽까지 바둑은 이어졌지만 여전히 리욘은 제이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다음날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바둑을 뒀다. 제이는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그냥 리욘에게 져 주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다 실수인 척 돌을 엉뚱한 곳에 놓았으나 그걸 눈치 못 챌 리욘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져 주면 내가 좋아라 박수칠 줄 알았나 보지.”
차라리 불같이 화를 냈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팔짱을 낀 채 싸늘하게 웃으며 말하자 더욱 자신의 실수가 뼈저리게 느껴지는 제이였다.
“봐 주지 마. 제대로 해.”
“알겠습니다.”
그 말대로 제이는 정말 제대로 했다. 리욘은 제이가 마음먹고 덤비면 아무리 속기로 둔다고 한들 자신이 10분을 채 버티지 못한단 사실을 깨닫고 꽤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듯했다. 그러나 제이도 더는 봐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차라리 리욘이 자신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식하고 바둑을 포기하길 바랐다. 그 정도로 바둑 지옥은 끔찍했다. 제이는 이틀 전 생각 없이 모래사장에 바둑판을 그려댄 자신을 저주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혹하게 리욘을 몰아붙인 게 오히려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된 듯했다. 덕분에 제이의 모든 수를 단시간 안에 간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금요일 오후, 리욘은 처음으로 제이를 상대로 승을 얻어냈다. 바둑을 두기 시작한 지 사흘만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파죽지세였다. 토요일 내내 두 사람은 바둑을 오십 판 정도 뒀다. 그 중 제이가 이긴 건 단 네 판뿐이었다. 일요일에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바둑을 뒀다. 제이는 단 한 번도 리욘을 이기지 못했다. 밤이 되자 닷새간의 바둑 대전 끝에 마침내 리욘의 승률이 제이를 앞섰다. 그제야 리욘은 바둑통을 덮으며 말했다.
“이제 바둑은 그만 두지.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어.”
“그러죠.”
제이도 바둑통을 덮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빤히 바라보더니 “안 분해?” 하고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치사하게 내 승률이 앞서자마자 그만두자고 한 거잖아. 열 받지 않아?”
“별로요.”
제이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열심히 하셨으니까요. 속도 많이 끓이셨고, 아마 인터넷으로 기보도 찾아보신 것 같고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설마? 하며 인상을 쓰는 리욘에게 제이는 이젠 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아닙니다.”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낮에 전하께서 바둑 두시는 거 보고 알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봤던 기보와 똑같은 양상으로 흘러가서 그 기보를 보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집엔 바둑책 같은 건 없으니 당연히 인터넷으로 찾아보신 거겠죠.”
“기보도 봤었어?”
“말씀 드렸잖습니까. 블라스트 안에서 두 번이나 챔피언 자릴 차지했었다고.”
우승자 상금도 상금이지만 동료들 판돈도 걸린 시합이라 나름 준비를 해야 했었다고 하자 리욘이 기가 찬다는 듯 하, 하고 웃었다.
“그게 벌써 몇 년 전 얘기일 텐데, 그때 본 걸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고?”
“기억력은 좋은 편이라서요. 그리고 린하이펑의 기보가 워낙 형세가 특이하기도 했고요.”
“그 사람 별명이 오뚝이였다더라고. 분명 녹다운 위기였는데 어떻게든 살아나서 이긴다고. 그래서 찾아봤지 나도.”
우쭐해서 말하던 리욘은 금세 심각한 표정이 되어 “그런데 그건 그거고.” 하며 테이블에 팔을 괬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제노스의 특징인가? 기억력이 좋은 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향이 아주 없진 않을 거라고 제이는 설명했다.
“아무튼 거저 얻은 결과도 아니고 5일 동안 죽도록 노력하셨으니까요. 그리고 뭐, 제 승률이 앞설 때까지 계속 하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지금 상태론 무리일 것 같아서요.”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아, 이상해.” 하며 고개를 숙였다.
“왜 내가 이겼는데도 진 거 같지.”
“전하께서 이긴 게 맞습니다. 충분히 기뻐하시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한 뒤 제이는 바둑판과 바둑통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일부터는 다시 서핑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래야지. 5일 동안 집 안에만 있었더니 컨디션이 영 별로야.”
그건 제이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컨디션이 별로인 건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닷새 동안 바둑만 둔 덕분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햇빛을 좀 받고 싶었다.
그리고 이튿날, 불행히도 이른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짙은 구름이 바닷가 마을 전체에 내려앉았다. 창가에 서서 비바람에 하염없이 젖어 가는 언덕 위 교회의 빨간 지붕을 바라보며 리욘이 말했다.
“점심때까지 날이 갤 확률은 얼마나 될까.”
“제롭니다.”
제이의 즉답에 리욘이 아아아, 탄식하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대로라면 저녁까지도 안 그칠 거란 말이지.”
“내일은 그치겠죠.”
“난 오늘 서핑을 하고 싶어.”
그럼 하시든가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제이는 얼른 입 안의 말들을 도로 삼켰다. 리욘이라면 정말로 이 빗속에 서핑을 하러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러다 큰일이라도 생기면 그 원망은 이 빗속에 왕자를 바닷가로 내몬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 해도 말이다.
“바둑이라도 두시지 그래요.”
라일라가 정리한 옷가지들을 각 방에 가져다두기 위해 2층으로 향하며 하칸이 소리쳤다. 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바둑이라면 이제 진저리가 났다. 바둑판만 봐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리욘도 마찬가지인지 심각한 목소리로 “아니, 그건 아닌 거 같아.” 했다.
“서재에 가서 책을 읽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책 읽기 딱 좋은 날씬데.”
“서재의 책들은 다 봤어.”
“전부 다… 말입니까?”
“그래.”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리욘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봤던 책이라도 또 읽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왕자는 뭔가 몸을 움직이는 걸 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니나다를까 소파에 앉은 채로 가볍게 어깨를 돌리며 리욘이 말했다.
“운동을 하고 싶어. 매일 두세 번씩 나가다가 5일이나 집에만 처박혀 있었더니 몸이 녹슨 거 같아.”
“그럼 지하실로 가시죠.”
제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리욘이 그럴까? 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제이는 지하실의 홈 짐에 도착한 뒤에야 리욘의 목적을 깨달았다.
“시스테마의 기본 동작들을 가르쳐줘.”
홈 짐 안에 깔린 매트를 밟자마자 리욘이 말했다.
“…전하.”
“다른 건 필요 없어. 딱 기본 동작들만 가르쳐 주면 돼.”
빨리, 어서. 툭툭 제이의 팔을 치며 리욘이 재촉했다. 격투기 얘기에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니 열아홉 살은 열아홉 살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시스테마가 러시아 특수 부대에서 만들어 낸 특공 무술이란 걸 알고 있단 자체가 이쪽 관련에 관심이 많단 얘기였다.
“그건 두 가지 이상의 무술 경력이 도합 4년은 돼야 배울 수 있는 겁니다.”
“그래? 그럼 문제없군. 난 학교에서 유술과 펜싱을 배웠으니까.”
“펜싱은 무술이 아니죠.”
“아, 맞아. 검술이었지. 괜찮아. 무술 유단자와 검술 유단자가 붙으면 검술 유단자가 이기니까 상관없어.”
말이 안 통했다. 제이는 소리 없이 신음했다.
“고급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게 아니잖아. 기본적인 동작만 가르쳐 달라고. 아주 기본이 되는 것들이면 돼.”
“어차피 사관학교에 가면 무술 같은 건 질리도록 하게 되실 겁니다.”
“그래. 그러니까 미리 배워 가려는 거야. 그래야 거기서도 더 쉽게 익힐 수 있을 테니까. 시스테마는 동서양 무술의 장점만을 골라서 만든 무술이잖아? 배워 두면 뭘 해도 도움이 될 거라고.”
그야 도움이 되긴 할 거다. 하지만 하루 동안 기초 동작 몇 개 배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최소 일 년 이상은 해야 폼이 나도 날 텐데, 어차피 그런 이야기는 지금 리욘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제이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말씀 하신대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동양 무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기, 입니다. 아시죠? 유술을 배우셨으니까요.”
“아아, 물론이지.”
“그 기를 모으기 위해선 호흡법이 가장 중요하고요. 일단 호흡하는 법부터 배우겠습니다.”
“뭐? 호흡?”
리욘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동작을 가르쳐달라니까 무슨 호흡이야.”
“가장 기본적인 걸 알려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동양 무술에선 이 호흡법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겁니다. 호흡법을 익히지 못하면 절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노골적으로 불만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본을 알려 달라고 한 건 자신이니 이제 와서 다른 소릴 할 수도 없었다. 제이의 성격상 기본 건너뛰고 그냥 동작부터 알려 달라고 하면 그냥 관두십시오 하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릴 확률이 높단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알았어. 그럼 호흡법부터 배우지.”
“좋습니다. 그럼 일단 이렇게 앉아 보십시오.”
제이는 매트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리욘은 그쯤이야, 하는 표정을 짓더니 당당하게 크로스 레그드8) 자세를 하고 앉았다.
“아뇨, 그게 아닙니다. 양 발이 이렇게 위로 올라 와야죠.”
“양 발이… 어떻게 그렇게 올라가는 거지?”
그제야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제이의 자세를 깨닫고 리욘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처음 해 보시는 거라면 좀 아플 겁니다.”
그리고 동양인에 비해 관절이 덜 유연한 서양인이라면 더더욱 힘들 거라는 얘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 보면 알게 될 터였다. 하루 만에 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란 걸.
“으아아아아아아!”
예상대로 리욘은 다리를 꼬는 과정에서부터 비명을 질러 댔다.
“참으십시오.”
제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며 리욘의 양쪽 발을 잡아 당겨 그의 허벅지 위에 올려 놓게 했다.
“안 돼, 이건 못 해. 하면 안 되는 거야.”
“아뇨, 할 수 있습니다. 하면 다 됩니다.”
“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것 같아.”
“끊어질 것처럼 아플 뿐이지 끊어지지는 않습니다.”
“제이!”
제이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리욘의 뒤로 가서 섰다. 고통에 잔뜩 굽어진 어깨를 붙잡아 뒤로 확 당기자 리욘이 비명을 지르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좋습니다. 이 자세 그대로, 지금부터 한 시간 동안 천천히 호흡을 하면서 명상하는 겁니다.”
“뭐? 한 시간 동안이나?”
“원래 처음에는 하루 종일 하는 겁니다. 그것도 벽을 보고요.”
단기 속성으로 배우는 거라 한 시간으로 줄여 준 거라고 하자 리욘은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하면서도 알았어, 하고 답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간 재겠습니다. 시작하십시오.”
제이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타이머를 작동시키는 척하며 말했다. 물론 시늉만 했을 뿐 타이머는 작동시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어플 따위 깔려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리욘은 십 분 만에 포기할 게 분명했다. 안 그래도 서양인들이 힘들어하는 자세였다. 하물며 서양인들 중에서도 가장 기골이 장대한 북유럽인이 첫날에 가부좌를 틀고 한 시간을 버틴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아니나다를까, 리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저히 못 하겠다며 그 자리에서 드러누워 버렸다.
“안 돼, 이건 안 돼.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냐.”
제이는 대답 대신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타이머는 재지 않았지만 시작 시간은 확인을 해 두었다. 십 분이면 포기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리욘은 이십 분이나 넘게 버텼다. 첫날에 이 정도면 무척 양호한 편이었으나 제이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칭찬에 고무된 리욘이 작정하고 버티기라도 했다간 자신만 더 피곤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제이는 겨우 이거밖에 안 되느냐는 표정으로 리욘을 바라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무실 거면 방에 가서 주무십시오.”
“허벅지 근육이 끊어졌나봐. 꼼짝도 못 하겠어….”
“허벅지 근육이 끊어졌으면 지금 그렇게 편히 누워 계시지도 못합니다.”
“아니, 진짜 엄청나게 아파.”
“오늘 운동은 여기서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리욘의 말을 무시하며 제이는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잘 안 쓰던 근육을 써서 좀 뻐근할 겁니다. 내일이면 풀릴 테니 파스는 뿌리지 마세요. 차라리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을 해 주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럼 전 이만. 제이는 문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말했다. 그대로 홈 짐을 나서려는 제이의 뒤에서 매트 두드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곧이어 리욘이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앓듯이 중얼거렸다.
“달려라, 달려라, 나의 침대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 다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그거… 뭔가요?”
제이의 말에 리욘이 매트에 드러누운 채 “뭐가?” 하고 물었다.
“방금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뭐? 달려라 나의 침대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 다오?”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리욘에게 제이는 네, 그거 말입니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거야. 아이슬란드 전래 동화에 나오는 주문.”
“아이슬란드 전래 동화요?”
“그래. 리니 왕자님과 시그니 아가씨라고, 마녀의 숲에 갇힌 리니 왕자를 시그니라는 여자아이가 구하러 가는 내용이야.”
“그럼 아까 그건….”
“그건 마녀의 침대에 적힌 루네 문자야. 그 주문을 외우면 어디로든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준다고 해서 리니와 시그니가 침대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지.”
아, 그래서.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때 그 주문을 외웠던 거구나. 집이 어디인지 모를 땐 이 주문을 외우면 된다고…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그런데 갑자기 왜?”
리욘의 물음에 제이는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면 됐어. 나 좀 일으켜줘.”
일부러 고생 좀 해 보라고 혼자 두고 온 거였는데, 갑작스레 알게 된 주문의 정체로 마음이 들뜬 제이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다시 홈 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누워 있는 리욘의 손을 붙잡아 그를 일으키려는 찰나였다.
“……!”
리욘이 조금 더 빨랐다. 그는 힘의 반동을 이용해 제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고 방심하고 있던 제이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리욘의 몸 위로 쓰러졌다. 리욘은 제이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몸을 뒤집었다. 순식간에 위아래가 바뀌었다. 리욘은 바닥에 누운 제이의 몸 위에 올라타 그의 가슴을 팔로 꽉 눌렀다.
“뭐, 뭐하는 겁니까.”
“말했잖아? 난 유술을 배웠다고. 가르쳐주지. 이건 곁누르기라고 하는 거야.”
조금 전의 엄살쟁이는 어디가고 웃음기마저 묻어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왕자가 말했다.
“빨리 비키십시오.”
“아까 나한테 가르쳐준 건 그거지? 붓다의 자세.”
“전하.”
제이의 부름에도 아랑곳 않고 리욘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에 인도의 고승이 강연하러 온 적이 있었어. 그때 학생들이 다 같이 교실 책상에 올라가 이 자세를 했었단 말이지.”
“아픕니다. 비키세요.”
“엄살 피우지 마. 세게 안 누르고 있어.”
사실이었다. 곁누르기는 원래 자신의 체중을 다 실어 상대방의 가슴과 팔을 누르는 건데 리욘은 지금 자기 체중의 반의반도 싣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움직이기가 힘이 든다니, 리욘이 정말 마음먹고 제압하려 들면 어떻게 될지 제이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기술이 어쩌고 해도 완력으로 눌러 대면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리욘은 제이보다 키가 10cm가량 컸다.
이래서 체급이 깡패라는 거지.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들어 더는 비켜 달란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자니 리욘이 뒤늦게야 깨달았다는 듯 “그러고 보니” 하고 말했다.
“상처가 다 나았군.”
상처?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무슨 상처를 얘기하는 거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자니 리욘의 손가락이 왼쪽 눈썹 위에 닿았다.
“여기에 있던 상처.”
아. 제이는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흉터는 남을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제이는 부러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일을 저지른 쪽은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딘지 심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리욘은 한참이나 말없이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참에 사과라도 할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자 제이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사과를 받으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척 해 주면 고마울 텐데, 그냥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날 위하는 건데. 어떻게든 왕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는데 불쑥 그가 말했다.
“눈동자 색이 특이해.”
“…네?”
제이는 당황했다. 제발 사과의 말 따윈 하지 말아달라고 빌긴 했지만 막상 리욘의 입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나오자 이건 또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제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욘은 태연하게 제가 할 말만 할 뿐이었다.
“막연하게 검은색이겠거니 했었는데 햇빛 아래에서 보니 녹색이더라고. 근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또 검은색과 녹색이 섞인 것 같고.”
“…….”
“이런 눈동자 색을 보틀 그린이라고 하나? 아니면 그냥 다크 그린?”
“전하.”
비키십시오. 제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음성에 깃든 복잡한 심경을 읽었는지 이번에는 리욘도 말없이 웃으며 몸을 비켰다. 리욘이 물러서자마자 제이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그는 리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전에 해봤다면서 왜 모른 척하셨습니까.”
“뭐가?”
“가부좌… 그러니까 붓다의 자세요.”
“아니, 하다 보니 기억이 난 거야. 이거 그때 했던 그거구나 하고.”
그때 강의를 들은 학생들 모두 이건 승려들이 큰 죄를 지었을 때나 하던 자세임이 틀림없을 거라고 얘기들을 했단다.
“다들 어지간히도 아팠나 보군요.”
“아픈 정도가 아니었어. 동양 애들만 멀쩡하고 나머진 다 죽어 났다고.”
“동양인들 관절이 서양인들에 비해선 더 부드러우니까요.”
“그래서 그런 건가?”
“그렇죠. 아무래도 관절에 무리가 덜 가니까 고통도 덜한 거고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거죠.”
제이의 말에 리욘이 “아, 그래서” 하고 중얼거렸다.
“약간 무리다 싶은 체위들도 척척 해 냈던 거였군. 버티기도 잘 버텼고.”
“…지금 붓다의 자세 얘길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궁금하면 들여다봐도 돼.”
“아뇨, 전혀 궁금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웃었다. 바닥에 누워 웃고 있는 리욘을 보자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꾸만 불온한 그림이 연상될 것만 같아 제이는 얼른 돌아서서 홈 짐을 나왔다. 정신을 다른 데에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며 제이는 조금 전 리욘이 알려주었던 동화의 제목을 자신의 휴대폰에 입력하기 시작했다.
리니 왕자와 시그니 아가씨.
“리니 왕자와 시그니 아가씨….”
혹시라도 잊을 세라 제이는 몇 번이고 그 문장을 입속으로 되뇌었다.
***
에이나르가 돌아온 건 화요일 오후였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챙겨 간 왕자의 물건들을 모두 사관학교 숙소에 반입시키는 데 성공한 에이나르는 그 후 왕자궁 비서실에 붙들려 밀린 업무 몇 가지를 처리하고 나서야 다시 비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에이나르는 전하의 수행원 일만 하는 게 아니었나요?”
제이가 커피를 잔에 따르며 묻자 에이나르는 그럴 리가요, 하며 정색했다.
“수행원 일은 수행원 일이고, 비서실에서 제가 맡은 업무는 또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수행원 일을 하면서 발생한 경비 같은 것도 다 영수증 처리해서 정리해 올려야 하고요.”
“아, 그거 귀찮은데.”
“석 달 치 한꺼번에 하려니까 죽겠더라고요.”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에이나르에게 커피를 건네며 제이는 “수고했어요.” 하고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이거 궁에서 들은 건데요.”
커피잔을 집어 들던 에이나르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날 있잖습니까? 그, 제이가 이상한 웃음소리를 들었다던 날이요.”
“네.”
“그날 왕비가 외출을 했던 모양이더라고요.”
“왕비가요?”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그런데 그게 공식적인 외출은 또 아니었나 봐요. 왕궁 출입 기록부를 확인해봤는데 거기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더라고요.”
“그럼 에이나르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죠?”
“대학 선배 중에 왕비궁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같이 만나서 식사를 했는데 그 선배가 그러더라구요. 최근에 왕비의 외출이 굉장히 잦은데 그게 다 비공식적인 외출이라 일지 쓸 때 타임라인 짜 맞추는 게 일이라고요. 선배는 왕비가 내연남이 생긴 게 아닐까, 왕궁 밖에 남자가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몰래 몰래 밖으로 나다닐 수가 없다는 식으로 얘길 하던데 전 듣자마자 그때 일이 생각나지 뭡니까. 그래서 혹시나 싶어 선배에게 물어봤는데 그때도 외출을 한 게 맞다고 그러더라고요.”
“최근에 비공식 외출이 잦은 거라면, 그 전에도 비공식적으로 외출을 감행한 일이 있다는 얘긴가요?”
“물론입니다. 왕비가 워낙에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두문불출하기로 알려져 있다 보니 하루 종일 궁 안에서 왕비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거든요. 그걸 이용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몇 번 외출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일단 방을 나서면 비서가 따라붙기 때문에 창문으로 도망치지 않는 이상은 비서에게 목격 당할 수밖에 없죠. 물론 왕비는 그런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잠시 나갔다 올 테니 일지에는 적당히 적어 놓아라, 그렇게 한 마디 하고 끝이었죠.”
그리고 정문이 아닌 곳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는 이야기다. 물론 정문이 아닌 옆문, 후문, 심지어 쪽문이라고 해도 출입 관리는 하고 있다. 하지만 정문처럼 엄격하게 관리하지는 않는다. 문의 규모가 작을수록 더욱 그렇다. 어쩌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나 드나드는 쪽문의 경우에는 문을 지키는 사람도 한 명밖에 없다. 당연히 왕실 경호대 소속의 병사일 거고, 일개 병사 하나 요리하는 것쯤이야 왕비에겐 어린애 팔목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이다.
“왕비는 그날 당일에 외출을 했나요?”
“네. 그날 오후 두 시쯤 외출해서 다음날 아침 일찍 돌아왔답니다.”
“오후 두 시라….”
에시르에서 아이슬란드로 가는 비행기는 거의 매 시간마다 있다. 비행시간은 두 시간 반가량이고 스바르트에서 가장 가까운 벨리에스테 공항까지는 차로 한 시간이 조금 안 걸린다. 왕비는 아마 에질스타디르 공항에 도착해 거기서 다시 차를 타고 비크로 왔을 확률이 높다.
“웃음소리가 들렸던 게 밤 열 시 무렵이었고, 에질스타디르에서 비크까지는 차로 두 시간 정도니 그때쯤이면 리우지엔이 이 집 근처에 도착하고도 남았겠군요. 두 시간 시차를 감안한다 해도요.”
“그렇죠.”
“하지만 비행기를 이용한다면 비밀 외출의 의미가 없죠. 출입국 기록이 그대로 남을 테니까요.”
“음… 리우지엔이라면 가짜 여권 정도는 충분히 만들어서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가짜 여권이야 만들 수 있죠. 하지만 왕비의 얼굴을 못 알아보는 승무원이 있을까요.”
에이나르가 그러고 보니, 라는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물론 변장을 했을 수도 있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요.”
“그렇죠. 왕비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자신도 고개를 끄덕인 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잠시 후 잔을 내려놓으며 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왕비가 외출이라….”
“왜, 왜요? 뭐가 잘못됐나요? 전 이거 굉장히 중요한 정보라고 해서 어떻게든 빨리 알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한 정보예요. 그리고 에이나르,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최근 한 달 사이의 왕비의 비공식 외출 기록을 좀 알고 싶은데요.”
“아, 그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알아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이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그거야 당연하죠. 그럼 전 선배한테 연락을 해 봐야하니까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남은 커피를 단숨에 마신 뒤 에이나르는 다이닝 룸을 나섰다. 에이나르가 자리를 뜬 뒤에도 제이는 꽤 오랫동안 혼자 식탁에 남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그는 다시 한 번 에이나르가 전해 준 정보들을 정리해 보았다. 딱히 말이 안 되거나 억지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이로써 그날 웃음소리의 주인공이 리우지엔이었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래서 뭔가 더 내키지 않았다. 너무나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정황과 딱딱 맞아떨어지는 타임라인이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눈앞에 들이밀어진 증거들이 가장 위험했다.
제이는 커피를 다 마시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씻어 두고 다이닝 룸을 나선 그는 마침 외출했다 돌아온 베아테와 계단 아래에서 딱 마주쳤다.
“외출하셨나 봅니다.”
“네.”
시선을 내리깔고 말하는 베아테의 안색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창백했다.
“베아테 양.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어디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이의 말을 자르며 베아테는 짧게 내뱉었다. 먼저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는 곧 자신도 2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베아테는 식사시간에 내려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 때에는 과일만 조금 먹은 뒤 일찌감치 올라갔고 점심 식사 시간에는 다시 또 내려오지 않았다. 제이는 식사 내내 비어있는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다이닝 룸을 나서는 제이에게 에이나르가 다가왔다.
“어제 말씀하신 거 선배에게 부탁했습니다. 선배 말로는 자기가 당직이 아닌 날의 사정은 잘 알 수가 없다고, 일단 할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정리해서 내일 중으로 알려 주겠다고 그러네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에이나르.”
“별 말씀을요.”
에이나르가 뺨을 붉히며 머리를 긁적였다. 워낙에 왕자에게 칭찬을 들어본 일이 없다 보니 별 거 아닌 한마디에도 매우 쑥스러워하며 좋아하는 모습이 왠지 짠하게 느껴지는 제이였다.
에이나르와 헤어진 제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던 그는 활짝 열린 서재의 문 안쪽으로 책상에 앉아있는 베아테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다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점심 식사시간에 안 내려오셨던데 속이 많이 안 좋으신 겁니까.”
베아테는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책상 위에 널브러진 서류들을 끌어당겨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재빨리 가렸다.
“네, 좀 안 좋네요. 저녁은 먹을 거예요.”
시선을 피하며 대충 얼버무리는 베아테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는 “베아테 양” 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혹시 칩 바꾸셨습니까?”
“네…?”
베아테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치켜들고는 당당한 어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주신 게 망가져서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걸로 바꿨어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없잖아요? 어차피 제이 계약기간도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 그 사이에 별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설령 일이 생겨서 내가 다치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한다고 해도 당신을 원망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쏘아붙이듯 말하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정말로 망가져서 바꾸신 거라면 상관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바꾸신 거라면 그 이유를 좀 들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망가져서 바꾼 거 맞아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베아테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이는 짧게 답한 뒤 돌아섰다. 느린 걸음으로 서재를 나서던 그는 이내 뒤를 돌아보며 베아테를 불렀다.
“베아테 양.”
흠칫 놀라 고개를 드는 베아테에게 제이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제 계약 기간은 이번 주말까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와의 계약 기간 중에 전하께서 다치시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전하께 위해를 가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그 자가 누구건 간에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죠. 그러라고 오스카가 그 돈을 주고 당신을 부른 거잖아요.”
제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변함없는 표정으로 베아테를 응시할 뿐이었다. 베아테 역시 지지 않고 제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못 견디겠다는 듯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이봐요, 제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리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나예요.”
“그렇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리욘의 약혼녀니까요. 날 위해서라도 리욘은 반드시 왕이 돼야 해요. 나는 왕비가 되어야하고요.”
마지막 말은 차라리 다짐에 가까웠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소리치는 베아테를 제이는 꽤 오랫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한참만에야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망설임 없이 서재를 나섰다.
베아테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리욘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만은 진심이었다. 그래야 자신이 왕비가 될 수 있으니까. 그녀의 말마따나 그녀를 위해서라도 리욘은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제이는 복도 끝에 위치한 왕자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문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활짝 열려있었다. 참 겁도 없다고 생각하며 제이는 열려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던 리욘이 시선을 들었다.
“서핑 안 가십니까.”
“이따 저녁에.”
짧게 답한 뒤 그는 다시 책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제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별 생각 없이 리욘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눈으로 훑던 그는 군주론이란 표제를 발견하고 놀라서 물었다.
“마키아벨리입니까?”
“그래. 예전에 읽을 때도 생각했는데 정말 역겨운 작자야.”
혀를 차며 리욘은 책을 덮었다.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그는 신랄하게 마키아벨리를 비난했다.
“이 부도덕한 이탈리아인은 창피를 몰라. 실컷 잘난 척 떠들어 대고 있는데 그래 봤자 권력자에게 아부나 하고 관직이나 얻어 볼 생각으로 쓴 책이잖아. 군주의 도리 운운하며 차라리 악인이 되어라 어쩌라 하는 것도 당시에 메디치 가가 저지른 악행이 어마어마하니 그네들 비위나 맞추려고 한 소리 아닌가. 저 하나 살겠답시고 왕에게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을 종용하다니. 지독한 이기주의자야.”
“그 정도로 싫어하면서 용케 다시 읽어 볼 생각을 하신 게 신기하군요.”
바닥에 떨어진 책을 주우며 제이는 말했다.
“뭐… 단순한 변덕이지.”
약간 말끝을 흐리며 리욘이 대답했다. 제이는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리욘에게 말했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만.”
리욘이 뭐?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아테 양의 부친은 어떤 사람이죠.”
“소르스테인 공작?”
“네.”
“변변찮은 인물이지. 귀족으로서도, 사내로서도.”
리욘은 감흥 없는 투로 말했다.
“선대, 그러니까 베아테의 조부 되는 사람이 뭔가 실수를 저질렀나보더군. 공작 직위는 유지했지만 의원직은 박탈당했지. 귀족들의 의원직은 세습되는 거니 당연히 베아테의 부친도 귀족의 직위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몇 번 의회 쪽으로 줄을 대보려고 한 모양인가 보던데 잘 안 되니 금세 포기하고 하나뿐인 딸에게 투자하기 시작했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내가 다니는 학교에 보내놓으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집안 괜찮은 놈 하나 정도는 골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간이 작은 인간이야. 리욘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러니 이런 판국에 겨우 생각해 낸 게 베아테를 여기로 보낸다는 선택지였겠지. 그게 그 사람의 최선이고 최대인 거야.”
“그럼 베아테 양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 부친보다는 나아.”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리욘은 말했다.
“욕심도 크고, 야망도 있지. 어떻게든 왕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텀을 두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베아테 양이 리우지엔 측에 가담할 가능성은,”
“제로.”
제이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리욘은 즉답했다.
“어째서죠?”
“아무리 왕비가 되고 싶어도 프란츠의 애를 가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제이는 리욘의 말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이 때문인가? 확실히 열네 살 차이라면 무시 못 할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가의 결혼 상대란 어차피 가문만을 보고 고르는 거라 나이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무 살 이상 차이나는 경우도 허다한데 열네 살 차이가 뭐가 대수란 말인가. 일단 약혼부터 해두고 프란츠가 적당히 나이가 차면 그때 합방을 하면 된다. 다른 수많은 나라의 왕과 왕비가 그랬듯이.
“눈치 못 챘어? 베아테는 레이시스트야.”
“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이차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차마 상상도 못했던 이유였다.
“필사적으로 아닌 척하고 있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지.”
제이는 그제야 처음 만난 날 자신을 보며 예쁜 동양인 운운하던 베아테의 모습을 떠올렸다. 말과는 다르게 말투와 표정이 날 서 있다고는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원래 말투가 약간 호전적인 편이기도 했고.
“그랬군요.”
뭔가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선 차라리 안심이 되기도 했다. 최소한 그녀가 리우지엔 측에 협조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베아테는 왜?”
“아닙니다. 그냥 요 며칠 약간 불안해 보여서요.”
그녀가 자신이 준 칩을 버리고 기존의 것으로 바꿔 끼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리욘과 관련된 이유가 아니라 그저 이쪽이 자기 생각을 읽는다는 자체가 싫어서 그랬던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틀 뒤에는 여길 떠나야 하니까. 그토록 염원하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게 됐으니 초조할 수밖에.”
다분히 비웃는 어조로 리욘이 말했다. 그러던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제이를 올려다봤다.
“그보다 넌 이 일이 끝나면 이제 텍사스로 가는 건가?”
“아뇨. 에질스타디르로 돌아갈 겁니다.”
“아, 지금 휴가 중이라고 했던가.”
“네.”
“휴가 중인데 왜 이 일을 맡은 거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제이는 대충 얼버무렸다.
“휴가는 왜 아이슬란드에서 보내게 된 거고?”
“그것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가 궁금한 거라고.”
혀를 차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멋쩍은 얼굴로 웃었다. 다그쳐 봐야 소용없단 걸 알았는지 리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휴가는 언제 끝나는 거지?”
“원래 내년쯤 복귀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번에 일한 덕분에 한 삼년쯤은 더 쉬어도 될 것 같아서요.”
“한 달 일해서 삼 년 동안 먹고 살 돈은 벌었나보지?”
좋은 직업이야. 리욘은 베개를 베고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말할까 하다 관뒀다. 어차피 돈이야 이 일을 맡기 전에도 앞으로 이삼십 정도는 충분히 더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벌어 둔 상태였다. 다만 이번에 휴가 중에 일을 했으니 해리가 또 일을 물어오면 몇 번 정도는 더 쳐낼 수 있는 카드를 챙긴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귀찮기도 했고 뭔가 구차한 기분이 들어 하지 않았다.
“휴가가 끝나면 다시 블라스트에서 일하게 되는 건가?”
“일을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렇겠죠.”
어차피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다. 거기다 돈까지 많이 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왕실 경호로 전직할 생각은 없나?”
“…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어차피 3년 정도 더 쉬다 일 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 3년 뒤면 마침 나도 졸업하는 해고, 내 경호단에 포함 시켜서 왕궁으로 데려가고 싶어서.”
“아, 하지만… 에시르 왕실에서는 경호대가 경호를 맡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설 경호는 들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긴 한데 방법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어때? 리욘이 시선을 들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빛도, 질문도 제이는 모두 당황스러웠다. 정말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바로 생각해 내 대답하기엔 질문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질 않아서요.”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 봐.”
대수롭지 않은 투로 리욘이 말했다. 그 말투가 하도 여상하여 제이는 어쩐지 혼자만 심각한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정작 리욘은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란 마음으로 한 번 그냥 던져 본 눈친데 머릿속이 하얗게 될 정도로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얘길 했으니. 심지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까지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왕자가 제노스가 아니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간 당장에 수상하단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봤을 테니까. 아니, 수상하단 표정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대번에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냐고, 그 반응은 도대체 뭐냐고 물었다면 자신은 아마 변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귓전이 뜨끈해지고 목이 탔다. 크흠, 작게 기침하는 제이에게 리욘이 “감기?” 하고 물었다.
“아뇨. 잠깐, 사레가 들려서요.”
“물이라도 한 잔 마시지 그래.”
“그래야겠습니다.”
빨리 이 방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럼, 하고 고개를 숙이는 제이에게 리욘이 “1층에 가면 에이나르 좀 불러 줘.” 하고 말했다.
“에이나르요?”
“그래. 바로 내 방으로 오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제이는 리욘의 방을 나왔다. 곧장 계단을 향해 걷던 그는 마침 2층으로 올라오고 있는 에이나르를 발견하고 리욘의 말을 전했다.
“전하께서 지금 바로 방으로 와 달라고 하시더군요.”
“전하께서요?”
에이나르는 무슨 일이지,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바로 리욘의 방으로 향했다. 에이나르가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방문이 닫혔다. 웬일로 방문까지 닫게 한 걸 보면 뭔가 중요한 얘기가 오가는 모양이었다. 별일이라고 생각하며 제이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으며 제이는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혼자가 되자 침착해질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별거 아닌 이야기다. 리욘이 사관학교 졸업 후 어떠한 연유로든 궁에 들어가게 된다면 경호원이 필요할 테고, 왕비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그 경호원 역시 최소한 제노스 출신이어야 한다. 그런 거라면 한 달이라도 같이 일해 본 자신을 먼저 떠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인 거고. 아니, 어쩌면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서 한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휴가가 끝나면 무슨 일을 할 거냐는 물음 끝에 나온 말이었으니까. 계약 마치고 헤어질 때 서로 인사치레로 다음에도 같이 일합시다, 하는 그런 느낌일 수도 있다.
그래, 아마도 그런 걸 거라고 제이는 스스로를 달래듯 생각했다. 큰 의미는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결국 실망하게 되는 건 자신일 뿐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마음이 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사치레든 뭐든 좋았다. 왕자가 다시 한 번 본인의 경호를 맡길 생각을 할 만큼 자신을 신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니, 신뢰라는 단어는 너무 거창하다. 그저 예전처럼 자신을 경멸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그거면 충분했다. 정말로, 그거면 충분했다.
***
“오늘 여기서 파티라도 열리는 건가요, 라일라?”
다이닝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며 오스카가 말했다.
“앞으로 삼 년간은 제대로 먹지도 못할 텐데 그 전에 잔뜩 먹여 둬야지.”
더 이상은 접시 놓을 자리도 없는 식탁 위에 어떻게든 공간을 만들어 그레이비 보트를 내려놓은 라일라는 리욘의 어깨를 다정하게 도닥였다.
“네가 어릴 때 잘 먹던 병아리콩 스튜란다. 먹어 보렴.”
“고마워요, 라일라.”
라일라의 뺨에 키스하는 리욘의 맞은편에서 에이나르가 기쁜 건지 괴로운 건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월요일부터 계속 최후의 만찬이 펼쳐지고 있어요.”
“그 말은 월요일부터 계속 이랬단 소린가?”
오스카는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었다. 이번 주 내내 일이 있어 저녁 식사를 함께하지 못했던 그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달 치 식비를 요 일주일 동안에 다 쓸 생각인가보군.”
“원한다면 남은 이틀 동안 석 달 치 식비를 더 쓸 수도 있어.”
“참아 줘요, 라일라.”
“그럼 잠자코 있어.”
라일라는 콧김을 내뿜으며 오스카의 등을 소리 나게 때렸다. 식탁 위에 모든 음식들이 차려지자 마지막으로 그녀는 언제나처럼 직접 한 사람, 한 사람의 잔에 커피를 채워주었다. 라일라가 커피를 따르는 동안 오스카가 리욘에게 물었다.
“입교식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습니까.”
“에이나르가 빠뜨린 것만 없다면요.”
리욘의 말에 에이나르가 정색을 하며 “절대요.” 라고 외쳤다.
“맹세컨대 그런 건 없습니다.”
“나도 그 말을 믿고 싶군.”
말과는 다르게 큰 기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빠뜨린 게 있을라고요.”
물 잔을 들며 오스카가 허허 웃었다. 그러면서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잔을 내려놓으며 에이나르에게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따 한 번 더 점검해보게.” 라고.
“토요일 오후 비행기였죠?”
“네.”
“이틀밖에 안 남았군요.”
어딘지 착잡한 표정의 오스카에게 리욘이 “일요일 오전 비행기로 바꿀까 하고요.” 했다.
“일요일 오전 비행기요?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어차피 3년 내내 있을 건데 하루라도 늦게 들어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고개를 끄덕인 오스카는 리욘의 옆에 앉아있는 베아테에게도 물었다.
“그럼 베아테는 예정대로 토요일 오전 출발인가?”
“아마도요.”
“그래. 떠나는 데 문제없도록 준비 잘하도록 하고. 그런데 너 안색이 왜 그러냐.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니?”
오스카의 말에 베아테는 포크를 내려놓으며 죄송해요, 하고 말했다.
“요 며칠 계속 몸이 안 좋아서요.”
“병원에는 다녀왔고?”
“그냥… 가벼운 위염이래요.”
그렇게 말한 뒤 베아테는 냅킨을 접어 입을 가리며 말했다.
“죄송한데 저 먼저 일어서도 될까요?”
“물론이지. 올라가서 쉬렴.”
오스카의 허락이 떨어지자 베아테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다시 식사가 시작되었고 라일라는 베아테가 먹을 만한 묽은 스프를 끓여야겠다며 분주하게 주방을 오갔다. 라일라의 스프가 완성되었을 즈음 저녁 식사도 대충 끝이 났다. 라일라는 다이닝 룸을 나서는 에이나르에게 스프가 담긴 보울을 건네주며 베아테의 방에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트레이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간 에이나르는 잠시 후 그것들을 그대로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방에 없는데요? 문이 잠겨 있는 걸 보면 외출이라도 한 모양이에요.”
“외출을 했다고요? 아무런 말도 없이 혼자?”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는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다들 식사 중이었으니까요.” 하고 말했다.
“아프다고 올라간 사람이 외출한다고 하면 다들 걱정할 게 분명하잖아요? 같이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그냥 말 안 하고 혼자 잠깐 나갔다 오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요.”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제이도 그 추측에 한 표를 보탰을 것이다. 하지만 베아테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사려 깊은 성격도 아닐뿐더러, 더욱이 식사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태라면 근처 어딜 가더라도 누군가가 차를 태워 주길 바랐을 것이다.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긴 한데….
그 뭔가가 뭔지를 알 수 없으니 다짜고짜 추궁할 수도 없었다. 최소한 왕비와 결탁하여 리욘에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은 없으니 이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팔짱을 낀 채 생각하고 있자니 라일라가 앞치마를 벗으며 “에잉, 할 수 없지.” 하고 말했다.
“난 이만 씻고 잘 테니 이건 이따 베아테 오면 먹으라고 해.”
“그럴게요. 걱정 마세요.”
라일라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얼마 안 있어 제이도 다이닝 룸을 나섰다. 2층으로 올라가 복도 끝에 있는 왕자의 방으로 향했다. 언제나처럼 활짝 열려있는 문 사이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리욘이 보였다. 웬일로 책이 아닌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에게 제이는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서핑은 안 하시는 겁니까.”
“오늘은 됐어.”
“어제도 안 나가셨잖아요?”
“그렇긴 한데 오늘은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요?”
제이의 물음에 리욘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며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야, 왜 이렇게 캐물어? 난 일 좀 있으면 안 돼?”
“그럴 리가요. 신기해서 여쭤본 것뿐입니다.”
“신기할 거 없어. 난 원래 항상 바쁜 사람이니까.”
그러시겠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틀 동안이나 안 나가셔서, 혹 컨디션 문제는 아닌가 싶어 걱정이 돼서 와 봤습니다.”
“컨디션은 아주 좋아. 약 없이도 잘 자고 있고.”
“그런 거라면 다행이지만요.”
그럼, 하고 제이가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전하, 어제 말씀하셨던 거 말입니―!”
다급히 외치며 방 안으로 들어오는 에이나르를 향해 리욘이 말없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조용히 하란 뜻이었다. 에이나르가 입을 다물자 리욘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제이를 향해 이만 나가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제이는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방을 나섰다. 제이가 방을 나오자마자 문이 닫혔다. 도대체 어제부터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저렇게 하는 건지.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제이는 1층으로 내려갔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 소파에 혼자 앉아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늘 식사 후에는 리욘과 함께 해변에 갔으니까. 이렇게 예고 없이 주어지는 자유 시간엔 뭘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제이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유시간이라니. 자신에게 자유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방심하고 있을 때 항상 일은 터지는 법이었다. 할 일이 없을 땐 무조건 주변 수색이었다. 어제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도 그러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오늘은 뒤뜰부터 살펴보기로 하고 후원으로 이어지는 문을 찾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서는 라일라의 스프가 여전히 베아테를 기다리며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식기를 덮고 있는 돔 커버에 힐끔 시선을 던진 뒤 제이는 주방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후원과 정원, 지하실 순으로 수색을 마치고 1층으로 올라왔을 땐 밤 아홉 시가 약간 지나있었다. 다행히도 수상한 점은 없었다. 이제 집 안을 살펴볼 차례였다. 1층부터 할지 2층부터 할지를 고민하느라 잠깐 계단 앞에 서 있는데 멀리서 콰당,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베아테가 가족용 거실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섰다. 여전히 파리한 안색으로 바닥을 보며 걸어오던 베아테는 계단 앞에 서 있는 제이를 보고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러니 수상하단 생각을 안 할 수가 있나. 한숨을 내쉬며 제이는 다이닝 룸 쪽을 향해 눈짓했다.
“라일라가 스프를 끓여 뒀습니다. 식탁 위에 있어요.”
“미안한데 속이 안 좋아서요.”
딱딱하게 내뱉은 뒤 베아테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칩을 다시 바꿔 끼우게 했어야 했는데.
혀를 차며 제이는 돌아섰다. 한 번만 더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그때는 이유 불문하고 베아테의 칩을 빼앗아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고 난 뒤에는 늦는 법이니까.
제이는 1층과 2층의 순서로 집 안 수색을 마쳤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정원과 뒤뜰을 살펴보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사이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밤 열 시가 넘자 언제나처럼 오스카의 사설 경호원들이 도착했다. 제이는 그들에게 지하실을 꼼꼼히 살펴보게 한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찾고 있었던 듯 두리번거리며 다이닝 룸과 응접실을 들락거리던 에이나르가 “제이!” 하며 달려왔다.
“선배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건가요?”
제이는 에이나르의 손에 들린 A4용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지금 막 팩스로 받은 거예요.”
“그렇군요. 수고 많았어요.”
에이나르에게 종이를 건네받은 제이는 응접실 소파에 앉으며 “어디 한 번 봅시다.” 하고 말했다. 종이 위에는 요 한 달 간 왕비의 외출기록이 적혀 있었다. 에이나르의 선배라는 사람의 말대로 외출이 상당히 잦은 편이었다. 하지만 딱히 주의 깊게 살펴볼 만한 기록은 없었다. 거의 다 오전에 나가서 오후에 들어왔다거나, 오후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거나 하는 식의 짧은 외출들이었다. 외박을 했던 건 그날이 유일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날의 외박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었다. 왜 하필 그날에만 외박을 했단 말인가. 정말로 왕비가 웃음소리의 주인공이라서? 아니면, 주인공처럼 보이게끔 하기 위해서?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에이나르가 거짓말을 했거나, 에이나르 역시 왕비의 수하인 선배의 말에 속았거나.
소용없는 짓인 걸 알면서도 제이는 에이나르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의 생각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 그런데 이거 왜 이렇게 외출 시간들이 다 짧은 거지? 그러다 딱 저 날에만 외박을 한 건데… 이거, 그대로 믿어도 되는 거 맞나? 혹시 선배가 나한테 미끼를 던진 건 아니겠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 오는 에이나르의 목소리에 제이는 매우 당황했다. 에이나르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단 사실은 다행스러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들리지 말았어야 할 에이나르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린 것이다.
“에이나르, 지금 지디스 칩 장착하고 있습니까?”
“네? 그럼요. 당연하죠.”
“어디에 넣어 뒀죠?”
“그야 당연히 시계 안에….”
“잠깐 좀 보여줄 수 있나요.”
“아, 네. 물론이죠.”
에이나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계를 벗어 제이에게 건넸다. 제이는 시계를 받자마자 스위치를 눌러 칩을 빼냈다. 시계 안쪽에서 튀어나오는 칩을 보는 순간 제이의 표정이 굳었다.
“칩이 아니라 도청기군요.”
“네?”
에이나르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비명을 질렀다.
“도, 도청기요? 그게요? 확실한 건가요?”
“네, 확실합니다. 블라스트 내의 연구소에서 만들어 낸 물건이니까요.”
“브, 브, 블라스트가 왜 그런 걸,”
“팔기 위해서죠.”
특히 CIA 같은 정보 기관에서는 칩보다 칩으로 위장할 수 있는 물건들을 더 많이 찾았다. 도청기나 소형 카메라 같은 것들. 물론 정보 기관에서만 이런 물건을 사간 건 아니었다. 개인 단위로 구매를 원한 사람도 있었고 되팔기 위해 사들이는 집단도 있었다.
“이 칩은 어디서 난 겁니까.”
“지, 지난달에 비서실에서 지급 받은 겁니다. 원래 쓰던 모델이 구형이라 차단율이 떨어진다고, 더 좋은 신형으로 바꿔 주겠다고….”
제이는 도청기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옆면에 스피커로 보이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그 말은 즉, 송수신 기능을 다 갖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때 그 웃음소리도 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도청기를 통해 이곳의 상황을 전해 들으며 적당한 타이밍에 맞춰 웃음소리를 흘려보낸 것이다. 그것도 에이나르에게는 들리지 않는 주파수로.
그게 가능하려면 정신 감응 능력이 상당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S등급일 필요는 없다. A급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S등급 능력자일 수도 있지만 제이는 아무래도 상대방이 S등급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 그 웃음소리는 어떻게 들어도 남자의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범인이 남자라면 지금쯤 얼마든지 집 안에 들어와 있을 수도 있다. 오스카의 사설 경호원으로 위장해 들어왔다면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지 않고 당당하게 이 집 안을 활보할 수 있을 테니까.
제이는 소파를 뛰어넘다시피 하며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 지하실 수색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당장 집 안에 보이는 경호원은 없었다. 계단을 서너 칸씩 뛰어올라가며 제이는 입속으로 제발, 제발, 하고 중얼거렸다. 제발 아무 일도 없길, 제발.
2층에 도착하자 복도 끝에 활짝 열려있는 왕자의 방문이 보였다. 진즉에 저 버릇을 고치게 했어야 했는데. 답답하다고 화를 내거나 말거나 반드시 문을 닫고 잠그는 버릇을 들이게 했어야 했는데.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복도 끝까지 가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급한 마음에 제이는 리욘의 목소리를 찾아 정신을 집중시켰다. 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저 그가 멀쩡하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됐다. 별일 없다는 걸 확인하면 그대로 차단기를 내릴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금세 리욘의 목소리가 잡혔다. 그러나 익숙한 왕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오롯이 전해지는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한마디로 호르몬제는 잘 맞지 않는 체질이란 거군.
호르몬제. 리욘이 저 단어를 입에 올리거나 머릿속에 떠올릴 일은 제이가 아는 한은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자신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상황이 아니고서는 리욘이 굳이 저 단어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더는 들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이는 계속해서 리욘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시켰다.
- 능력치는 확실히 올랐지만 부작용이 만만찮은 체질이라는 건, 호르몬제를 써봤다는 얘기인데… 그런데 왜 그때는 안 썼다고 거짓말을 한 거지? 실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던 건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뛰어 대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제이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왕자의 방 앞에 도착하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책상에 앉아있는 리욘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제이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모니터에 비친 화면을 보아하니 아마도 메일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 호르몬 수치상 임신은 가능한 몸이라….
제이는 리욘이 읽고 있는 메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블라스트 내에서 기밀로 보관되고 있는 연구 기록표일 것이다. 리욘이 저걸 어떻게 손에 넣은 건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는 에시르의 왕자였다. 그에게는 기밀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보다 더 제이를 조급하게 만든 건 바로 다음 섹션에 기록된 내용이었다. 제이의 기억이 맞다면 호르몬과 관련된 실험과 연구 기록 다음에는 임신과 출산에 대한 기록들이 적혀 있었다. 두 번의 인공 수정 시도가 있었으나 두 번 다 착상에 실패했다, 고.
그 문장을 리욘이 읽는다고 생각하자 제이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단순히 테스트를 위한 실험에 불과했고, 결국 임신은 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런 건 리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시도 자체를 끔찍하게 여길 게 분명하니까. 겨우 호르몬제를 쓰는 걸로도 그렇게 과격한 반응을 보이던 사람이었다. 하물며 남자인 주제에 임신을 하기 위해 인공 수정 시술을 받았다고 하면 경멸을 넘어서서 혐오하게 될 것이다.
왜 하필 지금일까.
왕자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는 생각했다. 왜 하필 지금에 와서야 이걸 보는 걸까. 만약 자신이 저택에 도착한 첫날 왕자가 이 메일을 봤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을 사람의 모습을 한 에일리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래도 최소한 믿을 수는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눈치였다. 비록 제노스긴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믿어도 된다고, 이 녀석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하는 게 자신에게도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3년 후에 다시 개인 경호를 맡아 줄 것을 제의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니, 전적으로 믿고 있는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더는 쓸데없는 의심 따윈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뭘까.
그래, 그건 정말로 그냥 인사치레였던 건지도 모른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립 서비스 같은 것. 그걸 혼자 진지하게 생각하고 들뜨기까지 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을 뿐이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이젠 다 틀렸으니까.
제이는 문틀에 몸을 기댄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 이걸로 왕자는 자신을 더욱 혐오하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신뢰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일반 사람이 제노스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으니까. 이해를 못하니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신뢰라는 건 전적인 이해를 바탕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언젠가 그가 지나가는 말로 자신을 믿는다고 했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혐오와 경멸의 대상만은 되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욘에게만큼은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리욘의 노트북이 박살났다. 제이는 깜짝 놀라 문틀에 기대고 있는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야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닫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데 리욘이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온 그는 복도에 서 있는 제이를 향해 물었다.
“네 짓이냐.”
“…….”
“네가 한 짓이냐고 물었어.”
“…죄송합니다.”
제이의 대답에 리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미쳤군.”
짧게 내뱉은 그는 팔짱을 낀 채 문틀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이유나 한 번 들어 보지.” 하고 말했다.
“도대체 왜 내 노트북을 망가뜨렸지?”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묻는다. 왜 내 노트북을 망가뜨렸지?”
“…….”
“제이.”
리욘은 낮은 목소리로 제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기에 제이는 공연히 마음이 아팠다. 어쩐지 목이 메는 기분이었다.
“전하야말로….”
한참만에야 겨우 제이는 입을 열었다.
“전하야말로 왜 이제 와서 저에 대한 기밀 사항을 보고 계신 겁니까.”
제이의 말에 리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마, 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말했다.
“너, 읽었어?”
“네.”
담담히 대답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문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하.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연신 웃음을 흘리던 그는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
“언제부터인지 말도 못 할 만큼 오래됐나 보지?”
“그건 아닌,”
“늘 이런 식으로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나? 내가 뭘 하는지 밤마다 읽고 있었어? 아니,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하루 종일?”
“그건 아닙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뒤늦게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리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제이는 말했다.
“맹세코 오늘이 처음입니다.”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차가웠다. 목소리도, 말투도. 아마 표정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더더욱 고개를 들어 그를 볼 자신이 없었다.
“재미있었어? 내 머릿속은?”
리욘이 말할 때마다 머리 위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읽지 않았습니다.”
“읽지 않고 들었겠지.”
“아닙니다. 전하, 절대로 저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며 말하던 제이는, 그러나 리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당연히 차가운 표정을 하고 서 있을 줄 알았는데, 한껏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리욘은 상처 받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 했던 그의 표정에 제이는 그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제이를 향해 리욘이 말했다.
“나가.”
“전하….”
“지금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
나가지 않으면 멱살을 쥐어서라도 끌어낼 생각인 듯했다. 제이도 더는 자신이 이 저택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왜지?”
“누군가 이 집 안에 잠입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언제는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군.”
리욘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엔 이야기가 길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리욘이 믿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결국 제이는 이유 따윈 집어치우고 결론만 간단히 말하기로 했다.
“밤새 한 번 더 온 집을 수색할 겁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는 대로 보안 업체의 책임자를 불러서 직원들의 신상 명세를 파악할 생각입니다. 문제가 없다면 그쪽 책임자에게 인수인계를 마친 다음에 나가겠습니다.”
“인수인계는 에이나르가 대신 하면 돼.”
손목시계에서 칩을 빼내며 리욘이 말했다. 그는 빼낸 칩을 제이의 눈앞에 들이밀어 확실히 보여준 다음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수색이 끝나면 당장 이 집에서 나가도록.”
말을 마친 리욘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혔고 잠시 후 고요한 침묵이 복도에 내려앉았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왕자는 아마 원래 쓰던 tp 차단용 칩을 자신의 시계에 꽂아 넣었을 것이다.
“…….”
제이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칩을 주워 들었다.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돌아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에이나르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
에이나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괜찮아요?”
제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로 복도를 걷기 시작한 제이를 뒤따라오며 에이나르가 다급하게 “제이, 제이.” 하고 그를 불렀다.
“제이 내 말 좀 들어봐요. 전하께서 왜 그걸 봤는지는 알아야 하잖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알아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전에 알고 싶지도 않았고. 설령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서로간의 신뢰는 이미 깨진 상태였다.
하지만 에이나르는 어떻게든 리욘을 대신해 해명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계단까지 따라 내려오며 그는 “제발요, 제이.” 하고 사정하듯 말했다.
“갈 땐 가더라도 오해는 풀고 가야죠. 전하께서 딱히 제이를 의심하고 뒤를 캐려고 그걸 보신 게 아니에요.”
“에이나르, 나는,”
“제이를 왕실 경호원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요.”
순간 제이의 걸음이 멈췄다. 이때다 싶었는지 에이나르는 제이의 옷깃을 붙들며 “네, 그런 겁니다. 그런 거였어요.” 하고 말했다.
“제이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에시르 왕실 경호는 경호대가 맡고 있어요. 만약 제이를 데리고 가려면 경호대로 위장시켜야 하는데 에시르 군대가 나름 기준이 빡빡하고 특히 신체 검사와 관련해서는 아주 조그마한 결격 사유가 있어도 탈락이다 보니까 그런 부분을 미리 알아보고 준비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자료를 구하신 거였어요. 절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왕실 경호… 말입니까.”
제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그래요.” 에이나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방법이 나빴던 건 인정합니다. 제이에게 먼저 동의를 구한 다음에 알아봤어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아마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전하도 마음이 급해서 그러셨던 거 같기도 하고요.”
그럼 그때 그 말이,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로… 진심으로 날 왕궁으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고? 자신의 경호를 맡기기 위해?
“아, 그래도 전하께서는 많이 신경 쓰셨습니다. 제게도 그 내용들을 안 보여 주시려고 메일도 직접 본인의 개인 메일 주소로 받으셨고요. 원래 그런 건 무조건 다 보기 쉽게 프린트해서 내놓으라고 하시는 분이신데 그런 것도 없이 바로 노트북으로 확인하셨잖습니까. 읽고 바로 폐기하려고 그러신 거예요. 종이로 뽑아 버리면 그걸 처리하는 것도 일이니까, 그래서….”
에이나르는 뭐라고 한참을 더 떠들어댔다. 하지만 제이는 그의 말들이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끝이 없는 바닥을 향해 제이는 한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
보안업체 직원들을 총동원한 수색은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겨우 끝이 났다. 그나마도 해가 지기 시작해 수색을 더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반 강제로 종료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이가 보안 업체 직원들을 이끌고 집 안팎을 수색하는 동안 에이나르는 보안 업체 측에서 보내 준 직원들의 이력서를 뽑아 들고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모두 지금의 업체에서 일한 지 2년 이상 된 사람들이었고 이력서의 사진과 신분증의 사진, 얼굴 생김새가 모두 일치했다. 달리 수상한 인물은 없었다. 이제 남은 이틀 동안은 이들에게 리욘의 경호를 맡겨야 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그제야 제이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가방 하나 없이 맨몸으로 와서 그대로 한 달을 머물게 된 것이었으니까.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옷장에 있는 옷들도 모두 에이나르가 비크 시내에 가서 적당히 사다준 것들이었다.
제이는 입고 있던 셔츠와 슬랙스를 벗어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옷장을 열어 자신이 입고 왔던 검정 티셔츠와 청바지를 찾아냈다. 그것들을 입고 침대에 걸터앉자 문득 이 집에 처음 왔을 때가 떠올랐다. 이제 와 생각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타이밍이 그 모양일 수가 있는지. 그때는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왕자와 평범하게 말을 섞는 일은 없겠구나, 라고.
하지만 사람 앞일은 모른다고, 어쩌다보니 그 왕자와 함께 피쉬 앤 칩스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바둑을 두고, 매트 위에서 몸을 누르며 장난까지 치게 되었다. 한 달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좁혀진 두 사람의 거리를 자신이 직접 망가뜨리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왕자의 신뢰를 저버릴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제이는 문 앞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리욘의 표정을 떠올렸다. 차라리 화를 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면 기꺼이 맞아 주었을 것이다. 그편이 차라리 마음은 편했을 테니까. 하지만 리욘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상처 받은 아이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실제로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에이나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말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남긴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제이가 임신이 가능한 사람이란 게 뭐가 어때서요? 그건 처음부터 전하도 알고 계셨잖아요. 그리고 처음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전하도 딱히 신경 안 쓰시는 눈치 아니었나요? 오히려 걱정하신다면 모를까…. 아, 그게, 왜냐하면 어제 저랑 얘길 하다가 그러셨거든요. 만약 제이가 왕실 경호원이 되면 다른 경호대원들과 함께 숙소에서 생활해야 하니까 그 문제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고, 제이는 블라스트 출신이고 거기서도 아마 다른 용병들이랑 같이 숙소 생활했을 텐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그랬죠. 그랬더니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이 블라스트에 있을 때야 다들 제노슨데 무슨 문제가 생겼겠냐는 거죠. 하지만 왕실은 아니라고, 거기선 제이 혼자 제노스라 위험할 수도 있다고… 아, 물론 이게 제이 입장에선 기분 나쁠 수도 있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전하도 나쁜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왜, 제노스는 남자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자이기도 하니까… 아니, 그게, 겉으로 보기엔 물론 아니지만요. 평범한 남자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만큼 많은 데미지를 입는다고 해야 하나? 쉽게 말해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니까,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배려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그런 거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죠, 제이? 이해한 거죠?”
에이나르는 몇 번이나 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말을 잘못 전달해 왕자의 뜻을 곡해시킬까 걱정되는 눈치였다. 자신도 아마 에이나르의 말만 들었다면 쉽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던 리욘의 표정을 떠올리자 그것만으로도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수백 마디의 말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리욘의 그 표정과 눈빛은.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거다. 겨우 열아홉 살밖에 안 된 소년을, 자신을 믿기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낸 그를, 자신이 먼저 배신한 거나 다름없었다.
“…….”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어제까지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일은 행복한 꿈 끝에 찾아온 악몽 같았고. 아니, 처음부터 악몽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중간 과정이 조금 즐겁고 행복했던 것뿐이지. 결말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차피 평범한 사람들은 우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그래, 그러니 더는 후회하지 말자.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자신과 왕자는 더 이상 전과 같은 관계로는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이 좀 더 신중했더라면 예전의 좋은 관계가 아주 약간 더 지속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에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끝이 났을 거다.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자. 아쉬워하지도 말고.
더는 지체할 이유도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선 제이는 다시 옷장 앞으로 갔다. 자신의 바버 재킷을 찾기 위해서였다. 옷장 안의 옷들을 뒤지다 제일 안쪽에 걸려 있는 재킷을 발견했다. 그것을 꺼내 어깨에 걸친 채 방을 나서려는 찰나였다.
삐이이이이이이.
요란한 호출소리에 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벽에 설치된 인터폰에서 빨간 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그 인터폰이 연결된 장소가 어디인지를 떠올리는 순간 제이는 재킷을 집어던지고 방을 뛰쳐나갔다. 복도를 달려 제일 안쪽 방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시간이면 경호원들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제이는 곧장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무슨 일…!”
이십니까,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 방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리욘이 베아테를 벽에 밀친 채 목을 조르고 있었다. 베아테는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컥컥거리며 그녀는 손으로 벽을 더듬어 미친 듯이 인터폰을 눌러 대고 있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그런 종류의 큰일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할 겨를도 없었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리욘을 베아테에게서 떼어내며 제이는 말했다.
“놔, 꺼져!”
소리 지르며 자신을 뿌리치려는 리욘을 억지로 침대에 데려가 앉힌 뒤 베아테에게 달려갔다.
“괜찮습니까?”
“나, 난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리욘 좀… 리욘 좀 진정시켜줘요.”
콜록거리며 베아테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목이 졸린 베아테보다 목을 조른 리욘의 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 제이는 다시 침대로 다가갔다.
“이게 대체 무슨 일,”
“망할 년이, 나한테 약을 먹였어.”
침대에 누워 헐떡거리며 리욘이 말했다.
“약이요?”
제이는 깜짝 놀라 베아테를 쳐다봤다. “아, 아니야!” 베아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흥분제일 뿐이란 말예요.”
“흥분제요? 무슨 흥분제 말입니까?”
베아테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베아테 양!”
제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베아테는 울음을 터뜨리며 “그게, 그러니까….” 하고 더듬거렸다.
“마약 성분이 들어있는 거긴 한데, 그냥 최음제일 뿐이라고, 위험한 건 아니라고 해서, 그래서….”
맙소사. 제이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는 리욘을 붙잡아 일으켰다.
“전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전하.”
리욘은 대답하기도 힘든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 의식은 멀쩡한 듯했으나 얼마나 갈지는 모를 일이었다.
“혹시 오늘 수면제나 안정제 드셨습니까.”
리욘은 대답하지 않았다. 먹었다는 뜻이었다. 제이는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긴, 밤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맨 정신으로는 잠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둘 다 먹었겠지. 그리고 막 잠이 들려는 찰나에 베아테가 그의 입에 약을 집어넣은 게 분명했다. 만약 그의 정신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베아테는 이 방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테니까.
“빨리 에이나르를 깨우십시오. 오스카도요.”
제이는 베아테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베아테는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 안 돼요.”
“안 된다니요,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병원에 가려는 거잖아요. 안 돼요.”
“베아테 양.”
“병원에 가면 다들 알아 버린단 말이에요.”
안 돼요, 절대 안 돼. 잠꼬대를 하듯 중얼거리는 베아테를 향해 제이는 다시 한 번 “베아테 양!” 하고 소리를 질렀다.
“지금 그런 소릴 할 때가 아닙니다. 빨리 사람을,”
“병원엔 안 가.”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이 짧게 내뱉었다.
“전하.”
제이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리욘을 향해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위세척을 하든 주사를 맞든 일단은 병원에 가야 합니다.”
“괜찮아. 그 정도는 아니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거야.”
“전하, 하지만.”
“괜찮다고 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던 리욘은 이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했다. 제이는 괴로운 듯 침대 위로 쓰러지는 리욘을 붙잡아 최대한 충격이 가지 않게 천천히 침대 위에 눕혔다.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리욘은 한참 만에야 조금 진정이 된 목소리로 “이제 됐어….” 하고 말했다.
“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으니까… 이대로 잘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그래….”
중얼거리며 리욘은 눈을 감았다. 제이는 우선 그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베아테를 향해 말했다.
“일단 옷부터 입으십시오.”
그제야 베아테는 훌쩍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옷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제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리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베아테에게 물었다.
“경호원들은 다 어디 갔습니까.”
베아테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른다면 모른다고 대답할 텐데, 아무런 말도 없는 걸 보면 아마 본인이 다른 곳으로 보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옷을 다 입은 베아테가 훌쩍거리며 다가와 침대 옆에 섰다. 제이는 여전히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전하의 상태가 지금보다 더 안 좋아지면 바로 병원으로 가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데려간다는 얘깁니다. 베아테 양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베아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금 울음이 터졌다.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거리는 소리에 리욘이 눈을 감은 채 “제발….” 하고 신음했다.
“제발 내 방에서 좀 꺼지라고 그래. 돌아 버릴 것 같아….”
제이는 들으셨죠? 라는 표정으로 베아테를 봐라봤다. 퉁퉁 부은 얼굴로 리욘을 노려보던 베아테는 이내 홱 돌아서서 그의 방을 나갔다. 베아테가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리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제이에게 말했다.
“너도 나가.”
“잠드시는 거 확인하고 나가겠습니다.”
뭔가 말하려는 듯 제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리욘은, 그러나 이내 다시 머리를 움켜쥐며 신음하고 말았다.
“잠드시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걱정 말고 주무십시오.”
리욘이 움직이는 바람에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 올려 다시 바르게 덮어 주며 제이는 말했다. 리욘은 여전히 괴로운지 신음만 할 뿐이었다. 한참을 뒤척이며 힘들어하던 그는 이삼십여 분 정도가 지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하지만 잠이 들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제이는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잠든 리욘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물….”
문득 리욘이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제이는 일어서려는 그를 부축하며 “물이요? 목이 마르십니까?” 하고 물었다.
“목이, 타는 거 같아….”
제이는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거 말고.” 곧장 리욘이 거부 의사를 표했다.
“차가운 물… 얼음 넣은 걸로.”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목이 많이 타는 모양이었다. 약 부작용으로 입이 마르는 증상이 나타난 걸 수도 있었다. 제이는 물병을 테이블 위에 도로 내려놓고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방을 나선 제이는 거의 뛰다시피 1층으로 내려갔다. 500ml짜리 맥주 컵에 절반 정도 얼음을 담고 물을 가득 채워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제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리욘은 침대 위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었다.
“전하.”
제이는 놀라서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리욘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리욘은 대답이 없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거칠어진 숨소리가 그의 방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하, 제 말 들리십니까?”
제이는 거듭 리욘에게 말을 걸었다. 리욘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사람을 부르기 위해 제이가 몸을 일으키는 찰나였다. 리욘의 손이 우악스레 제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저항할 틈도 없이 침대 위에 쓰러뜨려진 제이는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타는 리욘에게 놀라 “전하!” 하고 외쳤다.
“전하, 접니다. 정신차리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뺨을 때렸다.
“입 닥쳐.”
쉰 목소리로 리욘이 말했다. 그의 숨소리는 거칠다 못해 거의 짐승마냥 그르릉대고 있었다. 괴로운 듯 헐떡거리며 리욘은 제이의 티셔츠를 단숨에 찢어 버렸다. 제이가 그 손목을 붙잡아 막아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하, 제발.”
“닥치라고 했잖아!”
버럭 소리 지르며 리욘은 다시 한 번 제이의 뺨을 때렸다. 두 대, 세 대. 연거푸 제이의 뺨을 후려친 리욘은 곧이어 그의 목을 조르듯이 누르며 “네가 원하던 게 이거였잖아?”하고 말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어디 한 번 애를 가져 봐. 그리고 낳아서, 내 자식이란 이유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 봐.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그렇게 해 줄게.”
그제야 제이는 리욘이 자신을 베아테로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이름을 말할 틈도 없이 청바지가 벗겨졌다. 속옷이 끌어내려지고 난폭한 손길에 두 다리가 있는 대로 벌어졌다. 아직 젖지도, 적셔지지도 않은 구멍에 커다란 성기가 있는 힘껏 쑤셔 박혔다. 제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남자를 밀어내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강제로 품게 된 남자의 물건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커서 하체에 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전하, 전하… 제발 놔주십시오. 전하.”
제이는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말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지만 절대 큰소리는 내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소릴 듣고 달려온다면 끝장이었다. 자신보다도, 리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수치가 될 게 분명했다. 왕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약혼녀가 먹인 약에 취해서 남자 경호원을 강간했다니. 심지어 그 경호원이 제노스라면 평생을 따라다닐 끔찍한 추문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냥 나만 참으면 된다. 나만 참으면, 그러면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더는 작은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어차피 리욘은 지금 자신을 베아테로 오인하고 있다. 자신만 입 다물고 있으면 평생 리욘은 그렇게 오인한 채 살지도 모른다. 리욘을 위해서라면 그쪽이 나았다. 약에 취해 제노스 출신의 경호원을 강간했다는 사실보다는 약혼녀와 합방을 했다는 착각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그럴싸하니까.
“……!”
생각하는 순간 리욘의 성기가 쑥 빠져 나갔다. 설마 정신이 든 건가, 라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곧바로 다시 몸 속 깊숙한 곳까지 뜨거운 것이 밀고 들어왔다. 내장 안쪽까지 쑤셔지는 기분에 제이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만 같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시트만 움켜쥔 채 허리를 비틀자니 다시 한 번 허리를 뒤로 빼며 리욘이 말했다.
“소리 내.”
퍼억.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남자의 물건이 제이의 몸 안에 꽂혔다.
“소리 내. 빨리.”
이번에도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아무리 강요해도 절대 신음 한 번 내지 않는 제이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리욘은 연신 퍽,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밀어붙였다. 그때마다 제이는 배 속이 짓이겨지는 것만 같았다. 성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입구는 진즉에 찢어진지 오래였다. 날카로운 격통과 둔중한 아픔이 한데 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기절해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뻣뻣한 남창은 처음이군. 좋아, 마음에 들어.”
어떻게든 소리를 참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번에는 또 남창이라고 하는 걸 보니 확실히 멀쩡한 정신은 아닌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싶다가도 머리채를 움켜쥔 채 입술을 물어뜯을 듯 키스해 오는 남자를 보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베아테가 상대였다면 어쨌거나 절대로 키스는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리고──
“읏…!”
아마 안에다 사정하지도 않았을 테고.
“…….”
배 속이 뜨겁고 미끈거리는 걸로 가득 찬 기분이었다. 리욘이 허리를 빼자 주르륵,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흘러나왔다. 제이는 입술을 깨문 채 그 소름끼치는 감각을 참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 차례 사정을 한 뒤에도 리욘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했다. 페이스 또한 사정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전히 무자비하고 흉포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덕분에 자신이 섹스를 하고 있는 중이 아니라, 강간을 당하는 중이란 사실을 끊임없이 인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욘의 사정을 기점으로 한결 고통이 덜해진 건 아마도 그의 정액이 윤활제 노릇을 해서일 것이다. 제이는 이 변화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고통의 크기가 작아지면 그 아래에 감춰져 있던 다른 감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나다를까 한껏 문질러지고 쑤셔지는 사이 아플 정도로 부푼 안쪽에서 조금씩 저릿한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여전히 순수한 고통의 크기가 훨씬 더 컸지만 몸은 뇌보다 빨리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였다.
애액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리욘이야 어차피 본인의 정액과 구분을 못할 테니 상관없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극이 오면 반응을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건데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 눈물이 나는 것과 같은 건데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스스로의 몸에 진저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강간을 당하면서도 느끼다니.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리욘이 허리를 낮췄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각도를 얕게 해 빠르게 찔러 올리기 시작했다. 잔뜩 부은 안쪽을 가볍게 건드리듯이 쿡쿡 찔러대는 바람에 제이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가까스로 이불을 끌어다 입에 물었다. 어떻게든 소리를 참아야만 했다. 본인의 교성을 듣기 싫기도 했거니와, 혹시라도 자신의 목소릴 눈치챈 리욘이 이 모든 상황을 알아차릴까 두려운 게 더 컸다.
리욘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제이는 여전히 이불을 입에 문 채 소리를 참아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랫배가 불이라도 삼킨 양 뜨거웠다. 프리컴과 애액으로 잔뜩 젖은 허벅지 안쪽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더는 못 견디겠다고 생각할 즈음 리욘의 손가락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침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은 이불이 빠져나가고 대신 리욘의 혀가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배 속으로 뜨끈한 것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정할 때는 꼭 키스를 하는구나.
로맨틱한 행동이라고 해야 할지, 좆 같은 습관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무엇보다 좆 같은 건 리욘의 성기였다. 두 번의 사정 후에도 그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했다.
결국 그는 그 후로도 두 번이나 더 제이의 안에 사정한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침대를 내려간 리욘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반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제이는 그 틈에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제이는 두 사람 분의 정액과 프리컴, 그리고 자신의 피와 애액으로 엉망이 된 밑을 침대 시트와 이불로 대충 닦은 뒤 속옷을 입었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겨우 겨우 바지를 다 입은 뒤 마지막으로 걸레짝이 되어버린 티셔츠를 집어 들고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문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본 제이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오스카와 베아테였다.
“전하는?”
오스카가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이한 어조였다.
“…욕실에 계십니다.”
제이는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오스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뒤는 나와 베아테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자네는 이만 떠나게.”
제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오스카는 리욘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베아테가 따라 들어갔다. 등 뒤에서 침대 시트와 이불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욕실에서는 여전히 물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들을 뒤로 하고, 제이는 왕자의 방을 나섰다.
리욘의 방을 빠져나오자마자 제이는 자신이 쓰던 방으로 향했다. 침대 위에 벗어두었던 셔츠를 걸친 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재킷과 휴대폰만을 챙겨 들고 방을 나왔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자 마침내 계단이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던 그는 층계참에서 잠시 멈칫했다. 몸 안쪽에 고여 있던 정액이 한꺼번에 주륵 흘러내린 탓이었다. 속옷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제이는 입술을 깨물며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택을 빠져나왔을 땐 아직 한밤중이었다. 땀에 젖은 피부에 차가운 바닷바람이 감겨들었다. 제이는 들고 있던 재킷을 걸치고, 단단히 앞을 여몄다. 가로등도 없는 해안 도로를 그는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그는 결국 도로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찢어진 곳이 너무 쓰라려 더는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속옷이 축축한 게 정액 때문인지 피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제이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콜택시 회사에 전화해 위치를 알려 주자 교환원은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기다리실 거냐고 물었다. 기다리겠다고 하자 교환원은 차량 번호를 알려주었다.
통화를 끝낸 뒤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네 시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제이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천천히 다리를 끌어 모았다. 무릎 위에 이마를 얹고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밤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저 눈을 감고만 있을 생각이었는데 그 사이에 깜박 졸았던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과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바다가 너무나 눈이 부셔 제이는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에 내려앉아 있던 어둠은 어느덧 흔적도 없이 물러나 있었다.
택시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