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2)

비크는 3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작은 해안 마을이다. 몇몇 유명한 영화의 배경이 된 아름다운 장소들이 있어 레이캬비크에서 스코가포스로 향하는 길에 당일치기 일정으로 찾는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다. 마을 분위기에 감화되어서인지 관광객들도 말없이 주변 경관을 감상하거나 검은 모래 해변을 거닐거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야생화 사진을 찍거나 하는 정도다. 여름이라도 평균 기온이 십도 안팎이라 관광객들의 옷차림은 기본적으로 긴 팔에 겉옷을 걸친 형태다.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을 때도 십오 도가 될까 말까 한 수준이라 그럴 때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면 해결이 되곤 했다.

그렇게 사시사철 늘 조용한 겨울바다의 풍경을 유지하는 곳에서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며 서핑 하는 모습을 제이는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굉장히 이질적인 풍경일 거라고 짐작만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가관이었다. 관광객들이 파도 위의 왕자를 손가락질하며 다양한 나라의 말로 미친놈이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제이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다못해 서핑슈트라도 갖춰 입었으면 좀 나았으련만, 웃통은 벗어던지고 반바지 한 장만 걸친 채 타잔마냥 소리를 지르며 파도를 타고 있으니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풍광은 내버려 두고 왕자만 구경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함께 왔던 에이나르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다면 저택으로 도망가 버린 지 오래였다. 제이도 마음 같아선 돌아가고 싶었지만 지금 왕자를 두고 혼자 저택으로 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제 저택에서 들었던 수상한 웃음소리의 정체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오스카 역시 서핑을 하러 나가겠다는 리욘을 한사코 말렸다. 하지만 왕자는 숙부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눈치였다.

“별일이야 있으려고요. 그리고 좀 있으면 어때요. 저렇게 믿음직스러운 경호원이 있는데.”

“전하.”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해결해 주겠죠. 안 그럼 그 비싼 돈을 주고 제노스를 쓸 이유가 없잖습니까.”

안 그래? 서프보드를 챙긴 왕자는 오스카의 뒤에 서 있는 제이를 향해 물었다.

“심지어 내 속마음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도록 칩까지 바꿨는데.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보고만 있을 거면 그냥 나가 죽어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 번 옳은 말도 아니었지만 반박하기도 귀찮았고 반박해서 이길 자신도 없었기에 제이는 그냥 조용히 왕자를 따라나섰다. 이렇게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될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한 번 꺼내 봤을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왕자는 아주 신이 나 보였다. 약의 효과라기보다는 오랜만에 외출을 한 덕분인 것 같았다. 거기다 서핑 자체가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레저이다 보니 즐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크는 삭막한 바다의 풍경과는 별개로 잔잔한 파도가 길게 이어져 서핑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덕분에 리욘은 지금 꼬박 두 시간이 넘도록 바다에서 나오질 않고 있는 중이었다. 제이 역시 꼬박 두 시간동안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운을 풍기는 자가 없는지 살펴보는 중이었다.

어제 정체불명의 웃음소리를 들은 제이는 즉시 오스카에게 사실을 알린 뒤 그의 사설 경호원들을 집합시켰다.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다 동원해 저택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날이 밝는 즉시 전문가를 불러다 저택 안에 감시 카메라가 없는지도 확인해 보았으나 보안용 CCTV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안용 CCTV의 경우 사설 보안업체에서 실시간 감시하며 이상이 있을 경우 저택에 있는 자기네 보안 요원에게 연락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 화면을 보면서 웃는 소리를 들었다, 는 처음부터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였다. CCTV의 모니터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설 보안업체의 지사 건물은 저택에서 11마일 정도가 떨어진 비크 시내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CCTV가 해킹을 당했을 경우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놈은 자신들의 모습을 2중으로 걸쳐서 보게 된다는 소린데, 거리가 멀면 필연적으로 정신 감응 능력의 파장도 약해지는 걸 감안했을 때 그 정도로 선명한 웃음소리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왕자의 방 안에는 보안용 CCTV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건 뭘까.

제이는 해안가에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을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몇 가지 아주 희박한 가능성의 경우가 떠오르긴 했지만 현실적으론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들이었다. 해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좀 더 쉽게 가닥이 잡힐 수도 있겠지만 현재로선 그에게 제공할 만한 유효단서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지?”

불쑥 건네진 말에 제이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 바다에서 나온 건지 리욘이 서프보드를 어깨에 멘 채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아닙니다. 서핑은 충분히 즐기셨습니까.”

“아니, 아직 덜 놀았어.”

리욘은 제이의 팔에 걸쳐져 있던 자신의 셔츠를 빼앗듯 가져갔다.

“그런데 왜 벌써….”

“배고파.”

제이의 질문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리욘이 답했다.

“뭐 좀 먹고 와서 다시 타야겠어.”

“그럼 저택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그레이핀으로.”

리욘은 자신의 발목에 채워진 리시 코드를 벗겨내며 말했다.

“조금 걷다 보면 휴게소가 하나 나올 거야. 그 안에 있는 식당인데 간단하게 끼니 때우기엔 괜찮아.”

웬일로 친절하게 설명까지 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제이는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서프보드는 제가 들겠습니다.”

“됐어. 여기 두고 갈 거야.”

“누가 들고 가 버리면 어쩌시려고요.”

“누가? 여기 이 관광객들이?”

리욘이 픽 웃으며 말했다. 제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가져갈 거면 가져가라고 해. 기껏 아이슬란드까지 왔는데 기념품 하나 정도는 챙겨가야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한 리욘은 벗겨낸 리시 코드를 모래사장 위에 툭 던진 뒤 서핑부츠를 신은 채로 해안가를 걷기 시작했다. 제이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리욘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휴게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휴게소 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식사를 하러 온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피쉬 앤 칩스가 가장 인기 있는 메뉴인지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걸 먹고 있었다.

“여긴 핫도그가 맛있어.”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리욘이 말했다.

“피쉬 앤 칩스가 아니고요?”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펼치던 제이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관광객들은 피쉬 앤 칩스를 많이 먹지. 그게 양이 많으니까. 맛도 나쁘진 않아. 하지만 여긴 핫도그가 제일 맛있어. 이 마을 사람들은 여기서 핫도그밖에 안 사먹어.”

“그럼 그걸로 주문하면 되겠군요. 세트로 두 개면 되겠습니까?”

제이는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 라는 대답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째서인지 리욘은 아무 말 없이 제이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고개를 저으며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주문하고 오지.”

“아뇨, 제가,”

“내가 하는 게 나아.”

그렇게 말한 뒤 리욘은 정말로 자신이 직접 가서 핫도그 세트를 두 개 주문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냅킨까지 챙겨 와 제이의 앞에 내려놓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별스러운 왕자의 태도에 제이는 적잖이 당황했다. 서핑이 그렇게 만족스러웠나 싶었다. 하긴, 혼자 그 넓은 바다를 전세 낸 기분이었을 테니 즐겁기야 했겠지. 아니, 그래도 이렇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필요가 없다기보다는… 어차피 곧 다시 평소 때로 돌아갈 테니까. 그런 거라면 이런 일회성 친절은 처음부터 안 베푸는 게 좋은데.

직접 하지 못할 말들만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제이의 심정을 알 리가 없는 리욘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턱을 괸 채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래지 않아 주문한 핫도그가 나왔다. 리욘은 제이에게 먼저 한 입 먹어보길 권했다.

“일단 소스 없이 피클만 약간 얹어서 먹어봐.”

그의 조언에 따라 제이는 핫도그에 다진 피클을 적당히 올린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

어떠냐면, 최악이었다. 빵은 완전히 말라비틀어진 상태였고 소시지는 겉만 뜨겁고 안은 차가웠다. 심지어 짜기까지 했다. 피클도 지나치게 시어서 코끝이 다 찡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부러 핫도그를 추천해준 리욘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제이는 최대한 천천히 입 안의 핫도그를 씹어 삼키며 리욘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감상의 말을 골랐다.

“제 입맛에는 약간 짠 것 같군요.”

“그럼 피클 대신 이 소스를 뿌려봐. 좀 나을 거야.”

리욘은 테이블 위에 비치되어 있던 정체불명의 소스를 제이의 핫도그 위에 직접 뿌려 주었다. 제이는 잠깐 망설인 끝에 다시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소스가 발라진 부분을 모두 베어 물고 천천히 씹고 있자니 이번에도 리욘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어때?”

어떠냐면, 기적 같은 맛이었다. 엄청나게 매운데 엄청나게 느끼한 기적의 맛이 입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재료를 어떻게 배합하면 이런 소스가 만들어지는 궁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 역시 리욘에겐 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입 안의 핫도그를 다 삼킨 제이는 얼얼한 입술을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좀 맵습니다. 제 취향은 아니군요.”

“한 입만 더 먹어봐.”

“…그러죠.”

제이는 리욘이 권하는 대로 한 번 더 먹어 보았다. 당연히 한 번 더 먹어 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핫도그는 여전히 시고, 맵고, 느끼하고, 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때?”

이번에도 물어보는 리욘을 보고 있자니 제이는 혹시 내 둔한 혀가 이 핫도그의 오묘한 매력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건가, 기껏 추천해 준 사람을 실망시키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대답 대신 다시 한 입을 크게 베어 물었다. 이번에는 리욘도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핫도그를 씹고 있는 제이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제이가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다시 한 번 더 핫도그를 베어 물려는 찰나였다.

“그만. 이제 그만 먹어.”

리욘이 빈 접시를 제이의 턱 앞에 갖다 대며 말했다. 핫도그를 내려놓으란 뜻이었다. 갑작스러운 왕자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제이는 그의 말대로 했다. 리욘은 핫도그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언제나처럼 테이블에 팔을 괴며 말했다.

“사실 여기 핫도그는 최악이야. 그냥 냉동식품을 데워서 낼 뿐이거든.”

아. 제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도 냉동실 안에 몇 달씩이나 처박혀 있던 것들이지. 빵은 말라비틀어져있고 소시지는 아무리 데워도 안까지 익지를 않아. 거기다 소스들은 다 간이 엄청 세. 그래야 오래 묵은 냉동실 냄새를 좀 가릴 수 있거든.”

“그런데 왜 굳이 이 핫도그를….”

질문하던 제이는 곧 입을 다물었다.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네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떻게든 다른 걸 주문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역시.

제이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핫도그 세트에 딸려온 펩시콜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약간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핫도그를 주문했을 수도 있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닌 거 같아서.”

그건 또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왕자의 태도에 제이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하루치의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마침 웨이트리스 하나가 옆 테이블을 치우기 위해 다가왔다. 리욘은 그녀에게 핫도그 접시를 치워달라고 한 뒤 피쉬 앤 칩스 두 개를 주문했다.

“그나저나 맛에 까다로운 타입은 아닌 거 같군.”

주문한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이 리욘이 말했다.

“아마 그럴 겁니다. 남들이 맛없다고 하는 것도 그럭저럭 다 먹는 편이거든요.”

“미각치인가 했어.”

“그 정도는 아닙니다. 맛이 없다, 이상하다, 하는 생각은 하지만 어지간하면 그냥 먹는 거죠. 음식이란 건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

“하긴. 군인이 입맛 까다로우면 힘들지.”

리욘은 짧게 응수했다.

“연구소에선 뭘 먹었지?”

“구내식당에서 나오는 대로 먹었습니다. 연구소 직원들도 같이 이용하는 식당이었으니 아마 식단 자체는 평범했을 겁니다.”

웨이트리스가 주문한 피쉬 앤 칩스를 들고 왔다. 그녀가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동안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웨이트리스가 떠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노릇하게 튀겨진 생선살을 나이프로 자르며 리욘이 말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 제이는 약간 긴장한 상태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노스들이 생각을 읽는다고 하잖아. 그건 말 그대로 활자가 눈에 보인다는 거야, 아니면 상대가 하는 생각이 소리로 들린다는 거야?”

다행히 걱정했던 종류의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답하기 쉬운 질문도 아니었다.

“그건 아마 사람마다 느끼는 게 조금씩 다를 것 같습니다.”

“다르다고?”

“네. 이게 정확히 귀와 눈을 통해 전달되는 시각, 청각 같은 감각이 아니라 바로 뇌를 통해 느껴지는 일종의 직감 같은 거라서요”

실제로 연구소 안에는 선천적 청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정신 감응 능력자도 있었다. 또 블라스트의 동료 중에는 임무 수행 중 시력을 잃었지만 정신 감응 능력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이도 있었다. 한마디로 외수용기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결국 그냥 느낌이란 거군.”

“맞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읽는다, 보다는 듣는다, 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사람들이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걸 듣듯이 상대방이 머릿속으로 말하는 걸 듣는 거죠.”

“하지만 실제로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니다?”

“그렇죠.”

“귀가 아니라 뇌를 통해 바로 인지하는 거라면 환청이 들리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비슷합니다.”

제이의 대답에 리욘이 잠깐,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다 들리는 거 아닌가? 분명 네 입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안 듣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허언이었나 보군. 리욘의 조소에 제이는 당황해서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하고 말했다.

“듣는다, 에 가깝다고 하지만 정말 귀로 듣는 게 아니니까요. 듣고 싶지 않을 때는… 그러니까,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되실까 모르겠습니다만.”

제이는 잠시 망설였다. 이게 과연 가장 적합한 표현일지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만한 표현도 딱히 없었다. 제이는 짧게 숨을 내뱉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말해서 눈을 감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눈을 감는 것과 비슷하다고?”

“네. 눈을 뜨고 있으면 눈앞의 전경이 가감 없이 눈에 들어오잖습니까. 반대로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안 보이죠. 하지만 눈을 감고 있어도 누군가가 제 눈앞에 조명을 비추면 곧장 알지 않습니까?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위험한 상황에서 저를 찾으시면 이렇게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도 눈앞에 조명이 비치는 것처럼 알 수 있습니다. 느껴지는 거죠. 누군가가 전하를 향해 강한 살기를 내비치는 경우에도 물론 알 수 있고요. 눈을 감고 있어도 강한 빛의 흐름 같은 건 충분히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흠,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어.”

다행히 리욘은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눈치였다.

“그러니까 눈을 감는다는 건 일종의 차단기를 내리는 거로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올 수 없게끔.”

“그런 거죠. 좋은 표현이네요, 그거.”

“뭐? 차단기?”

“네. 다음부턴 저도 그렇게 설명해야겠습니다. 훨씬 쉽고 간단한 표현이 있었군요.”

“쓸 거면 허락받고 써.”

리욘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로열티를 지불하란 말씀이십니까?”

“어려울 거 없잖아? 하루 종일 내 뒤나 따라다니고 밥이나 얻어먹는 대가로 2600달러씩 벌고 있으니까.”

“이거, 전하께서 사는 거였습니까?”

제이는 놀라서 되물었다.

“싫으면 각자 계산하지.”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봐.”

소리 나게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리욘이 혀를 찼다.

“이럴 땐 그냥 잘 먹겠다고 하면 되는 거야.”

“아, 그럼… 잘 먹겠습니다.”

제이는 얼결에 리욘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리욘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더니 다시 포크를 집으며 말했다.

“그럼 평소엔 차단기를 올려놓고 있는 거야?”

“평소엔 내려놓고 있는 거죠. 일할 때만 잠깐 올릴 뿐입니다.”

“왜?”

“시끄러우니까요.”

“아하?”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폼이 정말로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냐고 묻는 듯한 뉘앙스였다.

“2세대까지만 해도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의 공식적인 사망 원인 2위가 바로 자살이었습니다. 스트레스로 미쳐 버린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거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선 거의 하루 종일 환청이 들리는 수준이었을 테니까. 특히 정신 감응 능력이 유독 뛰어난 사람은 한꺼번에 수십, 수백 명의 목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긴. 하루 종일 차단기를 올려 두고 있으면 확실히 피곤하긴 하겠어.”

리욘이 납득한다는 듯 말했다.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넣은 그는 곧바로 기름 묻은 손을 냅킨에 닦은 뒤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다시 제이를 향해 물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궁금하지 않아? 길에서 어쩌다 마주친 생판 남들 말고, 내 주변 사람들 말이야. 특히 나에 대해 어떠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할 텐데.”

“궁금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그런 거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러니 애초에 궁금해 할 필요도 없다.

“좋을 수도 있지. 상대방이 날 해치려고 할 때 먼저 알고 준비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건 굳이 생각을 읽지 않아도 행동으로 알 수 있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을 감추는데 능한 자라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 제 탓이니 어쩔 수 없죠.”

“말도 안 돼. 기껏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맥없이 당하고만 있을 거라는 게 말이 돼?”

가당치도 않다는 듯 웃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전하” 하고 그를 불렀다.

“저 같은 사람들은 어차피 평생의 태반을 남의 생각을 읽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일이니까요. 누구도 퇴근 후 집에서까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쉴 때는 그냥 편히 쉬고 싶을 뿐이죠. 그리고 일 관계로 만난 사람이 아니라면, 그냥 평범한 제 이웃들은 이유 없이 절 해치려고 들지 않습니다. 제 동료들도 마찬가지고요. 물론,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자가 절 해치려고 들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런 자들은 행동에서 티가 나기 때문에 굳이 미리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의심 가는 경우가 생기면 그때 읽어 보면 되니까요. 그런 것도 아닌데 무작정 남의 생각을 읽어 봤자 그걸로 아는 척도 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곤란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여러모로 피곤해질 뿐이죠.”

왜 곤란해지느냐, 어떤 식으로 피곤해지는 거냐 하고 캐물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리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늘 그렇듯 테이블에 팔을 괸 채 제이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렇군.”

한참 후에야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네 주변엔 평범한 이웃과 동료라는 게 존재하고 있었군.”

“…….”

“난 그런 게 없어서 말이야.”

리욘의 말에 그제야 제이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소년이 그런 평범한 이웃과는 인연이 없는 처지임을 깨달았다. 그는 일국의 왕자였고, 곧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원래 왕위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던 그의 형은 며칠 전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에게는 평범한 이웃이란 게 없었다. 아군이 아니면 적이었다. 심지어 오늘의 아군이 내일은 적이 되어 왕비와 함께 그를 해치려 들 수도 있었다. 그러니 리욘의 입장에선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머릿속의 차단기를 올려놓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제노스였다면 난 아마 옛날에 미쳤을 거야.”

생선 튀김에 곁들여 나온 레몬을 포크로 쿡 찌르며 리욘이 말했다.

“내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군.”

“행운이죠.”

리욘이 어째서? 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가 됐든 미쳐서 자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요.”

“그럴까?”

“물론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선 비록 그런 능력은 없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부릴 능력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그렇군.”

리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루에 2600달러 정도는 지불할 능력이 되니까.”

“그게 최고의 능력이죠.”

“그렇지. 내 능력은 아니지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인 뒤 리욘은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그가 잘라낸 대구 살을 입안에 넣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비로소 제이도 나이프와 포크를 손에 쥐었다. 생선튀김은 이미 반쯤 식어 딱딱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좀 전의 그 핫도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평소 기름에 튀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제이였으나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식은 피쉬 앤 칩스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처럼 여겨졌다.

식사를 마칠 때 쯤 휴게소 앞에 두 대의 버스가 도착했다. 밀려드는 관광객을 피해 두 사람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마치고 나가던 두 사람은 휴게소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에서 어린 여자 아이와 부딪쳤다. 네다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주 어린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두 사람을 흘깃 올려다보더니 이내 훌쩍거리며 식당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식당에서 저렇게 뛰어다니니 엄마에게 혼이 나지.”

리욘은 쯧쯧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제이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휴게소를 나섰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없이 해안가를 걷고 있는데 멀리서 관광객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정신없는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게 보였다.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지나가는 리욘의 뒤에서 제이가 불쑥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 찾고 있죠?”

“네? 아, 네….”

“식당 휴게소에 있어요.”

제이의 말에 여자가 눈을 크게 뜨며 “휴게소요?” 하고 외쳤다.

“저기 식당 있는 휴게소요? 우린 거기 간 적도 없는데요?”

“믿거나 말거나 당신 자유지만 거기서 울고 있는 거 봤어요. 빨리 가 봐요.”

여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한껏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제이를 쳐다보더니 이내 휴게소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달려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본 리욘은 곧 제이를 향해 말했다.

“네가 말한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란 게 이런 거였나 보군.”

제이는 대답 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게 안 읽었으면 됐을 거 아냐.”

“읽으려고 읽은 건 아닙니다.”

“그럼?”

“말씀 드렸잖습니까.”

제이는 약간 지친 어조로 말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강한 빛은 감지할 수 있다고요. 여자애가 속으로 너무 크게 울고 있었어요. 저 여자도 패닉 상태에 빠져서 계속 딸의 행방만 찾고 있었고요.”

“그냥 모르는 척해도 됐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흐음,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몇 발짝 더 걸어가던 그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네?”

제이는 덩달아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그 상처는 일부러 그렇게 밴드도 안 붙이고 드러내고 다니는 거야? 나한테 시위하려고?”

“아뇨, 이건….”

생각도 못 했던 이야기에 제이는 당황해서 눈썹 위의 상처를 손으로 가렸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뭐야? 왜 그렇게 보란 듯이 내놓고 있어.”

“이 정도는 금방 낫기 때문에 딱히 약까지 바를 필요는,”

“바닷바람을 우습게 보는군.”

제이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리욘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속도를 빨리 해 걸으며 그는 말했다.

“서핑은 이제 됐어. 저택으로 돌아가자.”

서프보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 보려던 제이는 그냥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한껏 짜증스런 표정으로 저택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보드 따윈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리욘은 보드를 놓고 온 해안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라일라부터 찾아댔다.

“라일라! 라일라 어디 있어요? 좀 나와 봐요!”

하지만 리욘이 아무리 불러도 라일라는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야.”

다이닝 룸에도 없는 걸 확인한 리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칸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함께 장이라도 보러 간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군.”

할 수 없지. 혀를 차며 리욘은 응접실을 나섰다. 뒤따르는 제이에게 “넌 거기 있어.” 하고 짧게 명령한 뒤 그는 혼자 가족용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리욘의 손에는 구급상자가 들려 있었다.

“앉아.”

응접실 한쪽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설마,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 소파에 앉았다. 리욘은 테이블 위에 구급상자를 내려놓은 뒤 소독약과 솜을 차례로 꺼냈다.

“고개 들어 봐.”

소독약을 듬뿍 적신 솜을 들고 다가오며 리욘이 말했다. 제이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명령을 받은 사람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는 그에게 리욘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빨리” 하고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는 거 싫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과할 시간에 고개를 들라고.”

더는 머뭇댈 수도 없었다. 제이는 리욘의 말대로 고개를 들었다.

“눈은 감지 마.”

기분 나쁘니까, 라고 굳이 안 해도 될 소리를 하며 리욘은 젖은 솜으로 제이의 상처를 닦았다. 채 아물지 못한 상처에 소독약이 스몄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는지 제법 쓰라렸다. 하지만 혹여 그런 내색을 했다간 리욘의 마음이 불편해질지도 몰랐다. 제이는 눈썹 한 번 찌푸리는 일 없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병원에는 안 가도 되겠군.”

상처를 닦아낸 솜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며 리욘이 말했다.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구급상자 안에서 연고를 꺼내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참았던 숨을 얼른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는데 연고가 들어있는 튜브의 캡을 열며 리욘이 말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였어. 여름방학이 시작돼서 반년 만에 왕궁에 갔더니 그 여자가 있더군.”

제노스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어. 캡을 연 튜브를 끝에서부터 짜내며 리욘은 심상하게 말했다.

“왕궁의 정문을 들어설 때부터 비서관이 칩이 내장된 시계를 챙겨줬지. 리우 부인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읽는다고. 하지만 이걸 차고 있으면 전하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 테니 꼭 차고 있으라고 하더군.”

리욘은 그 시계를 자신의 손목에 채우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그 중국인 여자가 자신의 머릿속을 읽어주길 바랐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빈자리는 그 누구도 채울 수 없으니 허튼 기대 따윈 말고 썩 꺼지라고, 그렇게 여자를 향해 소리 없는 저주를 퍼붓고 있으면 그녀가 모멸감에 몸을 떨며 궁을 박차고 나갈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리욘은 그녀에게 자신의 생각을 읽힐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 여자가 자기 방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았거든. 도착한 첫날 잠깐 얼굴을 보고 그 뒤로는 한 번도 보질 못했지. 대신 그 여자는 매일 내게 선물을 보내왔어. 당연히 난 그것들을 그 자리에서 다 돌려보냈고.”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나고 역시 여름방학을 맞은 카이옌이 뒤늦게 왕궁에 도착했다. 두 왕자가 모두 모인 그날 저녁, 궁에서는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국왕의 옆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앉은 여자는 만찬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리욘에게 말했다. 어째서 자신이 보낸 선물을 모두 돌려보내기만 하시는 거냐고. 나는 전하를 위해 가장 귀한 것들만을 골라 손수 포장하여 보내드렸는데 한 번 열어보지도 않으시고 그 자리에서 돌려보내시니 무척 서운하다고.

“일부러 그 많은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얘길 한 거지. 특히 국왕께서 보고 계신데 그 자리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 여잔 국왕 폐하의 정부였고 곧 새로운 왕비가 될 몸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 여자의 호의를 거절하고 망신을 준다는 건 결국 국왕 폐하를 망신 주는 거나 마찬가지거든.”

결국 리욘은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다고 말한 뒤, 무엇을 보내주시든 기쁜 마음으로 받겠노라 대답했다. 여자는 그런 대답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서 시녀를 불러 준비해둔 선물을 가져오라 일렀다. 시녀가 가져온 비단으로 감싸인 상자를 열어보자 안에는 화려한 모양의 과자들이 들어있었다. 중국 황실에서는 왕자의 생일상에 반드시 이 연꽃모양의 과자를 올렸다고, 전하를 위해 내가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니 모쪼록 받아주셨으면 한다고 여자는 간드러지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참으로 뜻깊은 선물이라고 옆에서 국왕까지 거드는 바람에 리욘은 꼼짝없이 여자가 주는 과자를 받아야만 했다.

“국왕 폐하께서 그 자리에서 하나 먹어보라고 했지만, 난 속이 불편하단 핑계로 끝까지 그걸 먹지 않았어. 개에게나 줘야겠다고 생각했지. 혹시라도 단 둘이 있을 때 그 여자가 그때 그 과자는 어떻게 했느냐고 물으면 내 개가 다 먹어치웠다고 솔직하게 말할 요량으로 말이야.”

그리고 식사가 끝난 후 선물 받은 과자를 들고 방으로 돌아간 리욘은 바닥에 깔린 카펫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자신의 개를 볼 수 있었다.

“사인은 질식사였지. 부검을 해 봤지만 왜, 어쩌다 질식을 하게 된 건지는 명확히 알 수 없었어. 어이, 고개 들어.”

제이는 엉겁결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길고 우아한 손가락이 제이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손끝에는 연고가 발라져 있었다. 소독약으로 닦아낼 때도 생각했지만 의외로 손길이 다정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해 겨울방학에 나는 다시 궁에 가게 됐지.”

제이의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며 리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어떻게든 그 여자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 혹여 마주쳐도 생각을 읽히지 않도록 칩이 들어있는 시계를 꼭꼭 손목에 차고 있었지. 여전히 그 여자는 자기 방에서 잘 나오질 않았고 덕분에 한 일주일은 부딪치는 일 없이 잘 지냈어. 그러다 왕실 사냥대회가 열렸지.”

에시르에선 매년 12월이면 왕실 주최의 사냥대회가 열렸다. 대회에 참가한 귀족들은 왕궁의 뒷산에 서식하고 있는 엘크, 야생토끼, 꿩 등을 인당 제한된 수량 안에서 마음껏 잡을 수 있었는데, 그 중 1등부터 5등까지 순위를 매겨 국왕이 직접 시상까지 하는 제법 큰 규모의 왕실 이벤트였다.

“소르발센 백작이라고 있어. 내 유모가 독감으로 입원했을 때 그 부인이 잠시 내 유모 노릇을 했었지. 엘리다라고 나랑 동갑내기 딸이 있어서 그 딸도 종종 왕궁에 와서 나랑 같이 놀았는데, 말하자면 소꿉친구였던 셈이지.”

그 해의 사냥대회에 소르발센 백작이 참가를 하면서 그 부인과 딸도 함께 뒷산에 올랐다. 여자들은 시상식이 열리는 산 중턱에 천막을 쳐두고 그곳에서 수다를 떨곤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엘리다는 그 사이에 굉장히 예뻐졌더군. 원래 그 시기에는 일 년 사이에 다들 엄청 크곤 했으니까. 여자애든 남자애든.”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레 왕자가 자신의 소꿉친구와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그저 예뻐졌구나 하고, 그는 무심코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때 이미 왕실에서는 제2 왕자의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리욘은 자연스럽게 혹시 엘리다도 약혼녀 후보에 올랐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르발센 백작의 직위가 직위다보니 가능성은 몹시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 만약에, 라는 단서를 달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되었다.

“엘리다는 얌전하게 생겨서 굉장히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거든. 만약 내가 그 아이와 약혼을 하게 되고, 그대로 결혼까지 하게 되면 매일매일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지. 물론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고 수많은 가능성 중에 하나로만 여겼을 뿐이야. 그리고….”

슥, 왕자의 손이 멀어졌다. 약이 다 발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됐을 거 같아?”

캡을 닫은 튜브를 구급상자 안에 넣고, 마지막으로 반창고를 꺼내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왕자가 사냥대회에서 자신의 소꿉친구를 만난 순간부터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어이없게도 사냥대회가 무사히 다 끝나고 시상식만 남은 시점에 오발사고가 벌어졌지. 총기 오작동에 의한 사고였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자는 한 명밖에 안 나왔어.”

그 한 명이 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후론 방학이 돼도 궁으론 안 갔어.”

약이 발라진 상처 주위로 까슬한 섬유의 감촉이 느껴졌다. 반창고를 붙여주는 리욘의 손길은 약을 발라 줄 때와 마찬가지로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가도 국왕 폐하께 인사만 드리고 그 길로 곧장 다시 공항으로 향했지. 주로 영국이나 프랑스로 갔던 거 같다. 이곳 비크로 올 때도 있었고.”

“…말 그대로 불의의 사고였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리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지 않을까 싶어 한 말이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반창고 방수제에서 떼어낸 필름을 구기며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

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떠한 방식으로 계산해 확률을 제시한다고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모든 사람이 똑같지는 않지.”

탁, 소리 나게 구급상자를 닫으며 리욘이 말했다.

“모든 제노스도 똑같진 않을 거고.”

그렇게 말하며 구급상자를 집어 든 리욘은 소파에 앉아 있는 제이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네가 그 중국인 계집과는 다르단 건 확실히 알겠어.”

“…….”

“어디까지나 일단은, 이지만.”

굳이 안 해도 될 한마디를 덧붙여서 산통을 깨는 건 아무래도 버릇인 모양이었다. 구급상자를 들고 응접실을 나서는 왕자를 보며 제이도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내내 문질러진 상처 부위가 아릿했다. 가만히 손을 갖다 대자 반듯하게 붙여진 반창고 위로 뜨끈한 열이 느껴졌다. 아마도 상처 부위에서 난 열이겠지만 제이는 그 온기가 이상하게도 다정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

아이슬란드에서 처음 여름을 나던 해, 제이는 수면제를 처방받기 위해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백야 현상으로 인해 며칠째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는 제이의 말에 의사가 수면제 대신 내린 처방은 운동이었다.

“일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면 수면제를 처방해드렸겠지만 휴가 중이시라고 하니 그냥 운동을 권해드리는 겁니다. 수면제는 먹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운동을 하세요. 운동은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고, 또 낮에 몸을 움직이면 밤에 잠이 잘 올 수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아이슬란드에 오기 전까지 아프간의 전장에서 쉴 틈 없이 뒹굴며 혹사당했던 제이는 휴가 기간 동안만큼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또 겨우 운동 정도로 이 끔찍한 불면증이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고. 그는 과감하게 의사의 말을 무시했고 결국 그 해 여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판단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걸, 요즘 리욘을 보며 제이는 깨닫고 있었다.

왕자는 요 며칠 거의 매일 바다에 나갔다. 서핑을 하기 위해서였다. 점심 식사 후에 한 번, 저녁 식사 후에 한 번, 하루에 두 번씩 바다에 나가 몇 시간 동안 파도를 타다 보니 밤엔 자연스럽게 곯아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핑을 나가기 시작한지 사흘 만에 리욘은 수면제를 먹지 않게 되었다. 약 없이도 충분히 잘 자니 그것만으로도 나름 괜찮은 컨디션이 유지되는 모양이었다. 컨디션이 좋을 때의 그는 의외로 친절하고 다정했다.

“의외라니. 원래 사려가 깊고 심성이 고우신 분이었네. 요 며칠사이 여러 가지 일로 심신이 지쳐 조금 짜증스레 행동하신 것뿐이야.”

오스카는 정색을 하고 말했지만 제이는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리욘의 그 몸에 밴 짜증은 결코 며칠 사이에 생긴 버릇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오스카의 말대로 원래 리욘이 이렇듯 다정한 성품의 사람이었다면 그때 자신에게 초콜릿을 준 것도 단순한 변덕에 의한 건 아니었겠구나 싶어 내심 그의 말을 믿고 싶기도 했다.

저녁 서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항상 그레이핀에 들러 피쉬 앤 칩스를 먹었다. 접시에 쌓인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며 리욘은 늘 제노스에 대해 물어봤다. 뿐만 아니라 블라스트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제이는 웬만한 질문에는 거의 솔직하게 대답을 해주는 편이었다. 애초에 기밀 사항 따위는 리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자신이 말해주지 않아도 그가 알아내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문제와는 별개로 가끔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도 있었다.

“그런데 일할 때는 차단기를 올린다고 했잖아. 그럼 넌 그 순간에는 온갖 소리를 다 듣게 되는 거 아닌가?”

그 날도 리욘은 여느 때처럼 감자튀김을 집어먹으며 제이에게 질문했다. 여기까지는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질문이었다.

“제가 S등급이라면 그렇겠죠. 그 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정신 감응 능력을 지녔을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보통은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동서남북 네 방향의 전경이 모두 한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확실히 주시하고 있는 대상이 가장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고 나머지는 스쳐지나갈 뿐이죠. 마찬가지입니다. 대상 외의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 셈이죠.”

“그런 거라면 다행히 미치지는 않겠군.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범인의 경우엔 그대로 스쳐지나갈 수도 있다는 얘긴데.”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드뭅니다. 가령 제가 전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길을 걷고 있다고 칩시다. 당연히 제 눈에는 전하의 모습이 가장 크게, 확실하게 들어오겠죠.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시선을 잡아끌 정도로 강렬한 뭔가가 주위에 있다면 저절로 시선이 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강렬하게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소리가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부모를 잃어버렸던 그 꼬마처럼?”

“네, 바로 그런 겁니다. 특히나 스파이와 암살자들은 목표물에 굉장히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차단기를 올려놓고 주변을 둘러보다 보면 그들의 머릿속 생각이 저절로 들리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가려내는 거죠. 정신 감응 능력의 제어입니다. 온갖 잡음이 다 들리면 본인도 곤란하니까요.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도 별거 아닌 잡음은 거르고 필요한 정보만을 선별해 듣는 능력이 중요한 겁니다.”

“그렇군. 그런 제어 능력은 훈련을 통해 갖춰지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리욘은 고개를 끄덕였다. 냅킨에 손을 닦으며 그는 물었다.

“훈련을 통해서 B등급이 A등급이 되는 경우도 있나?”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매우 드뭅니다. 말 그대로 그건 타고나는 능력이라서요. 훈련을 하는 건 컨트롤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한 거지 능력 자체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약물을 이용해서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부작용이 심해서 웬만해서는 쓰지 않습니다.”

“약물? 어떤 종류의?”

그제야 제이는 아차, 했다. 뒤늦게야 자신의 실언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지만 그냥 넘어갈 리욘이 아니었다.

“대답해. 어떤 종류의 약물이지?”

“일종의… 호르몬 제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호르몬을 분비시키는 약이냐고.”

리욘은 재차 물었다. 이 정도면 거의 눈치 채고 물어 보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제이는 리욘이 원하는 답변을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장 주된 호르몬은 에스트로겐과 옥시토신입니다.”

제이의 대답에 리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남자에게 그걸 쓴다고? 여성호르몬제를 맞고, 강제 발정 상태가 되어야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거로군.”

끔찍하군. 리욘은 정말 끔찍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순수한 호기심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어느새 경멸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너도 그걸 쓴 적이 있나?”

“…….”

“대답해.”

잠시 후,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쓴 적 없습니다.”

“정말이야?”

“네, 정말입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제이는 자신이 왜 그때 그런 거짓말을 한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리욘이 큰소리를 내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괜한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는 없으니까, 라고 그 순간에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때 거짓말을 한 건, 더 이상 그에게 경멸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임을.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거짓말을 했던 것임을 제이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거짓말을 한 보람이 있어서 리욘은 언제 그리 매섭게 쏘아붙였냐는 듯 금세 누그러진 표정으로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이 역시 평소와 마찬가지로 성실히 대답을 해주었고,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 돼서야 식당을 나섰다.

리욘이 바다에 나가지 않을 때면 제이는 항상 집 안팎을 둘러보며 수상한 낌새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웃음소리는 그날 이후론 들리지 않았다. 저택에 드나드는 사람 중에는 딱히 미심쩍은 인물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왕자의 방과 연결해 둔 인터폰 위로는 먼지만 쌓여갔다.

리욘이 서핑을 시작하면서 모든 일들이 순탄하게만 흘러가는 것 같았으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베아테였다. 그녀는 틈만 나면 서프보드를 들고 바다로 나가는 리욘 때문에 어지간히도 속이 타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리욘의 사관학교 입교식까지 이제 3주도 남아있지 않았다. 부친은 매일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일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 물어 보는 눈치였다. 부친과 통화가 끝나면 베아테는 항상 리욘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리욘은 베아테가 자신의 방을 찾아올 때마다 서프보드를 챙겨 바다로 나가곤 했다. 그나마도 다 리욘이 충분한 수면으로 마음이 너그러워진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전의 그였더라면 얘기 좀 하자고 들어온 베아테에게 있는 대로 욕설을 퍼붓고 자꾸 귀찮게 굴 거면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마음이 급했던 베아테는 끊임없이 리욘을 닦달해댔고, 결국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8월 둘째 주가 마무리 되는 주말 저녁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이는 리욘과 함께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안간 복도 끝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리욘이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그딴 미친 소리 할 거면 당장 꺼져!”

“뭐가 미친 소리야? 너야말로 제발 현실을 직시해!”

받아치는 베아테의 목소리는 이미 악에 받쳐 있었다. 이러다 큰일이 나겠다 싶어 제이는 급히 방을 나섰다. 두 사람은 리욘의 방 앞에 서서 대치하고 있었다.

“네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어차피 너는 왕이 될 거야. 그럴 거면 하루라도 빨리 네 입장을 공고히 하는,”

“아아, 그래. 나는 왕이 될 거야. 그리고 왕이 되자마자 형을 죽게 만든 것들을 모조리 잡아 처넣을 거야. 그렇게 되면 베아테, 네 부친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리욘의 말에 베아테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너 정말 미쳤구나?” 하고 소리 질렀다.

“네가 왕세자가 되면 당장 파혼 얘기부터 나올 게 분명한데, 그런데도 우리 아버지가 널 왕으로 만들기 위해 네 형을 죽였다는 거야?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야 딸을 왕비로 만들기 위해서겠지. 파혼 얘기가 나올 것 같으니 그 전에 어떻게든 너한테 애를 만들어오란 거고.”

“아버지는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날 여기로 보낸 것뿐이야.”

“널 여기로 보내기 위해 상황을 그렇게 만든 걸 수도 있지.”

“너 정말…!”

발끈해서 리욘에게 달려드는 베아테를 제이가 붙잡았다.

“진정하십시오.”

“이거 놔요!”

“방으로 들어가시죠.”

악을 써 대는 베아테를 무시하고 제이는 리욘에게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그에게 붙들려 있는 베아테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리욘의 방문이 닫히고 안쪽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제이는 베아테를 놓아주었다.

“말다툼 두 번 했다간 손목 부러지겠어요.”

벌겋게 자국이 남은 손목을 주무르며 날 선 어조로 말했다.

“그 정도로 세게 붙잡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당신 생각이겠죠.”

날카롭게 내뱉은 뒤 베아테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쾅, 박력 넘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닫히는 순간 제이는 본의 아니게 이번 소란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 이 정도로 양보했으면 됐잖아. 왜 혼자만 고집을 부려. 두고 봐, 어떻게든 인공수정 시술 받게 할 거야. 지금은 그거 말곤 방법이 없어.

맹세코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베아테가 워낙에 맹렬한 기세로 의지를 불태우다보니 절로 들린 것뿐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내용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방문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인공수정이란 단어 자체야 낯선 것도 아니었지만 고작 열아홉밖에 안 된 아가씨가 스스로 그걸 원한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그 정도로 절박했던 건가. 쉽게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상황에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자니 복도 끝에서 에이나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끄, 끝났나요?”

조심스레 묻는 에이나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제이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폭력 사태는 벌어지지 않은 거죠?”

“다행히도요.”

에이나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함께 계단을 내려가며 제이는 물었다.

“아까 전하께서 그러시던데, 혹 베아테 양의 아버지가 왕세자 전하의 죽음과 연관이 있나요?”

“어우,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다만 화가 나니까 비꼬아 말씀을 하신 것뿐이죠.”

“비꼴 만한 뭔가는 있단 얘기군요.”

“음, 그런데 그게… 딱히 소르스테인 공작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에이나르의 말인 즉, 베아테의 부친인 소르스테인 공작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이 일찌감치 카이옌은 가망이 없다고 단정 지은 분위기였다는 거다.

“귀족들만이 아닙니다. 평의원들도 마찬가지였죠. 언젠가부터 왕세자 전하가 아니라 리욘 전하께서 왕위 자리를 물려받는 걸 당연한 순서로 여기고 있었어요. 왕세자 전하의 병세가 심각해져도 다들 크게 걱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왕위는 제2 왕자가 물려받을 거 아닌가, 라는 분위기였죠. 그리고 리욘 전하께서는 그런 분위기를 아주 노골적으로 싫어하셨고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카이옌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항상 성실했으며 타고난 재능에 기대기보다는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리욘에 비하면 타고난 재능이랄 것도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늘 죽을 만큼 노력해야 겨우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리욘은 어릴 때부터 영리하기로 소문이 난 아이였다. 그를 가르치던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명석했으며 그림이나 악기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 선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다보니 어릴 때부터 항상 자신감이 넘쳤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두려워하는 일 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그게 마냥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고 도리어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다가온 건 그의 고귀한 태생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운 외모도 한 몫 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터였다.

두 왕자의 차이가 명백하다보니 은근히 리욘이 왕세자로 책봉되길 바라는 세력들이 있었지만 국왕은 예외 없이 장자인 카이옌을 왕세자로 삼았다. 부왕의 기대에 응하기 위해 카이옌은 더욱더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노력하면 할수록 부족한 부분들이 드러났고, 그때마다 의원들 사이에서는 지금이라도 리욘을 왕세자로 삼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런 분위기를 다분히 의식한 것인지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된 리욘은 부러 요란하게 놀기 시작했고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형편없는 성적표를 부왕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뭐, 요란하게 놀았다고 해봐야 그 안에서 얼마나 요란하게 놀았겠습니까. 그냥 나이에 맞지 않게 음주가무를 즐기고 좀, 뭐랄까, 나이에 맞지 않는 불건전한 이성 관계를 가졌다 하는 정도겠죠.”

리욘이 졸업한 제네바의 국제학교는 각국 정상을 비롯하여 세계의 정세를 움직이는 소위 0.1%의 자제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도 아스갈 연방국의 수장인 에시르의 왕자는 특별한 존재였다. 많은 여학생들이 에시르의 왕자비 자리를 노리고 리욘에게 접근했고 리욘도 절대 그녀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단한 건 그 와중에도 피임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철저하셨단 거죠.”

에이나르가 혀를 내두르는 사이 1층에 도착했다. 둘은 자연스럽게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커피포트 서버에 담겨있는 커피를 한 잔씩 나누어 들고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았다.

“그건 어떻게 알죠?”

“뭘요?”

“피임을 철저히 했다는 거요.”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가 아, 그거,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학교에서 사고를 칠 때마다 왕자궁 비서실에서 스위스로 날아갔거든요. 간 김에 전하를 붙잡고선 노는 건 상관없습니다, 대신 피임은 꼭 하십시오 그러면 전하께서 그러셨다더군요. 걱정 말라고, 그건 너희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고. 난 형이 자식 보기 전에는 절대 애는 안 만들 거라고.”

그렇잖아도 리욘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카이옌이었다. 성인이 된 뒤에는 더욱더 앓아눕는 일이 잦아서 왕세자가 저렇게 허약해서 되겠느냐, 왕이 된다고 한들 후계자는 볼 수 있겠느냐 걱정하는 목소리가 컸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자신이 먼저 애라도 낳으면 그 길로 당장 또 왕세자를 갈아치우란 소리가 나올 게 분명함을 리욘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왕세자인 형의 세력이 약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혼처를 정할 때도 이름만 공작에 불과한 소르스테인 가의 딸을 지목해 약혼녀로 맞이했던 것이다.

“그러다 10학년 때였나, 학교 밖에서 만났던 여자가 전하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죠. 결국 거짓으로 밝혀졌지만요. 그 후로 전하는 아예 여자들과는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뭐, 그때부터 오히려 더 음, 그런, 뭐랄까, 자…유로운 성생활을 즐기신 걸 보면 단순히 남자 쪽이 더 취향에 맞은 걸 수도 있지만요.”

에이나르는 제이의 시선을 피하며 호륵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아무래도 이 저택에 온 첫날의 일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학교 성적은 좋지 않았나요?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요. 마지막 졸업시험에서 1점차이로 2등인가 했다고.”

“아, 그게 말입니다. 마지막 일 년 동안은 갑자기 그렇게 또 좋은 성적을 받아오시더라구요.”

“지원하려던 대학이 졸업학기 학점만 봤다던가?”

“아뇨, 전하는 처음부터 졸업 후에는 왕립 사관학교에 입교하는 걸로 되어 있었어요. 카이옌 전하도 사관학교를 나오셨죠. 국왕폐하도 사관학교 출신이셨습니다. 선대 왕께서도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시르 국왕은 연방의 수장이자 중앙 정부의 국군통수권자이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군에 자원해 3년씩이나 틀어박혀있다 나오느니 사관학교로 가서 장교 자리부터 따놓고 오는 게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었다.

“그럼 갑자기 그렇게 좋은 성적을 받아온 이유는 뭐랍니까? 그냥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선가요? 내가 어쩔 수 없이 사관학교에 가지만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대학에든 갈 수 있다, 라는 거?”

“저도 처음엔 그런 건가,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게 미묘한 게, 그 즈음 전하께서 성적만 그렇게 좋았던 게 아니라서요. 대외 활동도 굉장히 열심히 하셨고 방학 중에는 국왕 폐하의 해외 순방길에도 동행을 하셨죠. 이런저런 대외 활동이야 대학진학에 필요한 요건이라고 해도 해외 순방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일 년 동안은 남자고 여자고 만나지를 않았다고 하더군요. 기숙사 생활도 아주 모범적이었고요.”

“그거야말로 희한한 일이군요.”

“그러니까요. 막말로 섹스 좀 한다고 해서 대학에서 안 받아주고 그런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디 아프기라도 했던 건 아니고요?”

반농담조로 던진 말이었는데 에이나르는 침울한 표정으로 “아팠던 건 카이옌 전하였죠.” 하고 대답했다.

“원래 몸이 약한 분이셨는데 하필이면 리우 부인이 왕비가 되던 해에 입원을 하게 되셨죠. 그 후로 꾸준히 상태가 안 좋았습니다. 그러다 일 년 전쯤에 사실상 사망 선고를 받게 되었어요. 그때 리욘 전하께서 며칠씩 병원에 머무르면서 카이옌 전하를 돌보신 적이 있는데… 그 후에 갑자기 그렇게 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각성했나보군요.”

그야 형이 이대로 죽으면 결국 자신이 왕세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왕위를 이어받을 재목답게 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변모한 거라면 이해가 안 되는 바도 아니었다. 아니,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카이옌 전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제3 왕자의 방으로 가서 총을 쏘진 않았겠죠.”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그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무슨 일이 있어도 왕은 안 될 거라고 소리를 지르지도 않을 테고.

그럼 도대체 뭐지. 리욘은 왜 그때를 기점으로 확 바뀌었던 거지.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집어 들던 제이는 이어진 에이나르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수면제를 처방 받은 것도 그쯤이었습니다.”

“그쯤이라뇨?”

“카이옌 전하의 병원에 다녀오신 직후요. 그때 처음으로 처방을 받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드시고 계신 거죠. 물론 매일 드신 건 아니었지만요. 그리고 장례식 이후부턴 거기에 안정제가 더 추가되었고요.”

“그렇군요.”

제이는 십 년 전 병원에서 보았던 형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혼자 병실을 돌아다니던 동생을 찾아 헐떡이며 달려온 형. 그리고 그 형에게 손목을 붙들린 채 말없이 병실을 나서던 어린 동생. 스치듯 지나간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사색이 되어 리욘의 손목을 낚아채던 카이옌의 표정을 제이는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런 형의 죽음이 리욘에겐 크나큰 상처로 남았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남은 것도 사실이었다.

카이옌을 보러 간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군.

제이는 컵을 기울이며 생각했다. 반쯤 식은 커피는 미묘한 쓴 맛만을 혀끝에 남긴 채 순식간에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

“그러고 보니 오늘 풍요의 날인데 다들 집에만 있을 건가?”

커피를 따라주며 라일라가 말했다.

“풍요의 날이요?”

그게 뭐냐고 묻자 에이나르가 대신 대답했다.

“이 지역 축제예요.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올 겨울에도 고기가 잘 잡힐 수 있길 빌면서 마을 사람들끼리 행진하고 그러는 거죠.”

“밤에는 검은 해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춤도 춘다우. 마을 사람들이 술과 음식도 나눠주고 하니까 리욘이랑 한번 구경가봐.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안 내려오는 걸까?”

다이닝 룸 입구 쪽을 바라보며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군가가 2층에 올라가 그를 데려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아마 오늘 아침 식사에는 안 내려오실 겁니다.”

“점심 식사 시간에라도 내려오시면 다행이죠.”

제이의 말을 받아 에이나르가 잽싸게 덧붙였다. 맞은편에 앉은 베아테는 아무런 얘기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커피만 마셨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예상대로 리욘은 아침 식사는 물론 점심 식사 시간에까지 1층에 내려오지 않았다. 그는 점심 식사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난 오후 네 시경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와 응접실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는 폼이 누가 봐도 상태가 엉망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밤새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야 겨우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고 지금 이 시간에 일어났으니 당연히 컨디션이 엉망일 수밖에.

“뭐라도 좀 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따 저녁 먹을 건데 뭣 하러.”

“그래도요. 속 버리십니다.”

에이나르는 필요 없다는 리욘의 손에 부득불 스퀴르가 담긴 컵을 쥐어주었다. 스퀴르 위에는 약간의 시리얼과 베리류의 과일이 얹어져 있었다. 참 성실한 비서라고 생각하며 제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스퀴르를 섞고 있는 리욘에게 물었다.

“서핑은 안 가실 겁니까?”

“안 가.”

귀찮다는 듯 내뱉은 리욘은 스퀴르도 두어 스푼 떠먹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벌써 다 드셨습니까?”

“피곤해.”

쉴래. 짧게 말하며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길로 다시 2층에 올라간 그는 결국 저녁 식사 시간에도 내려오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제이는 2층에 있는 리욘의 방으로 향했다. 라일라가 만들어준 포켓 샌드위치를 들고 올라가자 리욘은 그때까지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뭐 좀 드셔야죠.”

“속이 안 좋아.”

“너무 안 드셔서 그런 겁니다.”

리욘은 팔로 눈을 가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제이는 샌드위치가 담긴 접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피곤해.”

“오늘이 풍요의 날이라고 하더군요.”

그제야 리욘은 천천히 팔을 들더니 벽에 걸린 달력을 쳐다봤다.

“아아, 오늘이 둘째 주 일요일이었나….”

그리고 다시 팔로 얼굴을 덮으며 그는 중얼거렸다.

“2주만 버티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겠군.”

“거기도 만만찮은 지옥일 텐데요.”

“상관없어. 거기선 적어도 애 갖자고 달려드는 여자는 없을 테니.”

어제 베아테가 꺼낸 얘기가 어지간히도 끔찍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진저리를 쳐대는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해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이는 침대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계속 이렇게 누워만 계시면 오늘밤에도 제대로 못 주무실 겁니다. 차라리 잠깐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시는 게 숙면에는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왜 이렇게 귀찮게 해.”

리욘이 짜증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축제 같은 거 한 번도 못 가 봐서요. 구경해 보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웃기지 마. 그런 거 관심도 없으면서.”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리욘을 보며 제이는 음, 하고 침음했다.

“들켰나요.”

“얼굴이 전혀 아니야. 축제 따위엔 관심도 없는 얼굴이라고.”

사실이었다. 제이는 축제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걸 즐길 처지도 아니었거니와 그렇게 평범한 사람처럼 축제 분위기에 들떠 행복해 할 자격이 자신에겐 없다고 생각했다.

“에이나르가 어떻게든 구슬려서 데리고 나가 보라고 한 모양이지?”

리욘의 말에 제이는 에이나르 말입니까? 하고 되물었다.

“아뇨, 에이나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네. 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그래야 내일 자기가 덜 피곤할 테니까.”

안 그래? 리욘이 반쯤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예상도 못 했던 이야기에 제이는 적잖이 놀랐다. 본인의 컨디션 난조가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든다는 자각이 있었단 말인가.

“혹시 그래서 요 며칠 계속 서핑을 나가셨던 건가요.”

“그럴 리가. 집에만 있기 따분해서 그런 거야. 이 집구석에선 책 읽는 거 말곤 할 게 없으니까.”

리욘은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제이는 그가 매일 몇 시간씩, 지칠 때까지 파도를 탄 건 어느 정도는 주변 사람들을 배려한 것도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스카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군.

제이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퍼센트 사실도 아니었다. 사려가 깊고 심성이 고운 아이는 말도 곱게 하는 법이었으니까.

“아무튼 에이나르는 아닙니다. 그냥 제 생각에 잠깐 바람이라도 쐬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말씀 드린 겁니다. 그럼 아무래도 밤에 잠드는 게 수월할 테니까요.”

“수면제 먹으면 더 수월하게 잘 수 있어.”

“몸에 안 좋으니까요.”

리욘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말에는 굳이 또 우기지 않는다는 게 리욘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피곤하면 돌아오더라도 일단은 나가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방 안에만 있는 것보단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어.”

짧게 대답하며 리욘은 몸을 일으켰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겉옷을 집어 들며 그는 제이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이유가 대체 뭐야.”

“제가 그랬나요.”

제이는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그냥 어떻게든 당신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말해 봤자 곧이들을 왕자도 아니었고. 그래서 제이는 잘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한 번 으쓱인 뒤 방을 나섰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은 그냥 안 하는 게 낫다는 것이 제이의 신조였다.

***

풍요의 날은 말 그대로 풍요로운 동절기를 기원하며 벌이는 마을 축제였다. 겨우 삼백 명이 사는 작은 시골마을에 참가 인원만 백오십여 명 정도라고 하니 이 지역 사람들에게 얼마나 뜻깊은 행사인지를 알 수 있었다. 메인이벤트는 역시 행진으로 백여 명의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건강과 안녕을 빌며 스코가포스 폭포에서부터 검은 해변까지 걸어왔다. 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면 30분 만에 도착하는 거리였으나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중간 중간 멈춰 서서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다 보니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고 했다. 행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은 미리 검은 해변에 모여 장작을 쌓아놓고 자리를 만들어 음식을 차려 두었다. 덕분에 행진 인원들은 도착하자마자 허기진 배를 달랠 수 있었다. 축제 음식은 마을의 식당 주인들이 제공했다. 펍은 캔 맥주를 무료로 나눠 주었으며 술을 마시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음료를 내놓은 건 편의점을 비롯한 각종 마트의 사장들이었다.

말 그대로 풍요가 넘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음식들을 나눠 먹었다. 이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다 같이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를 것이다. 제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리욘과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밤 아홉 시가 지났건만 아직도 대낮처럼 환한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란 참으로 낯설면서도 신기했다. 너무 밝은 태양 때문인지 한낮에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게 표정에 다 드러났는지 리욘이 말했다.

“신기해?”

“네, 조금요.”

제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 축제?”

“그것도 그렇고… 뭔가 축제라고 하면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같은 화려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게 보통이니까요. 한낮의 모닥불은 상상도 못해봤습니다.”

“여름이라 그래. 겨울에 벌어지는 축제는 또 다르지.”

“겨울 축제도 있나요?”

제이의 물음에 리욘은 당연하지, 하고 웃었다.

“비크는 아니지만 겨울 축제가 더 일반적이긴 해. 아이슬란드는 마을 단위의 작은 축제가 굉장히 많아. 어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다보니 옛날부터 만선을 기원하던 의식들이 지역 축제로 발전한 거지.”

“에시르는 어떻습니까?”

“에시르도 지역 축제가 있긴 해. 지자체에서 중앙 정부에 지원금 뜯어내는 명목으로만 쓰이고 있지만.”

즉 이름만 축제고 제대로 된 행사 같은 건 없다는 소리다.

“에시르에서 진짜 축제다운 축제가 벌어지는 건 국왕 탄생일과 즉위 기념일뿐이야. 시대착오적이지. 백 년 전에는 이 정도로 성대하게 챙기지 않았어. 에시르가 연방국의 수장이 되면서 매년 조금씩 더 규모를 늘리게 된 거라. 뭐, 이건 왕실보다 국민들이 먼저 그렇게 하길 원했던 거지만.”

마을 사람들은 해변을 거닐고 있는 관광객들에게도 음식을 나눠 주고 있었다. 늦은 밤이다 보니 관광객도 얼마 없었다. 한 커플은 마을 사람들 손에 이끌려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고 앉기도 했다.

음식을 나눠 주던 사람들은 곧 제이와 리욘에게도 다가왔다. 키가 작은 중년 여자와 노인이었는데 꼭 닮은 얼굴 생김새가 한눈에 부녀지간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 마을 축제날이라 다 같이 모여서 식사 중인데, 함께 하시지 않겠어요?”

푸근한 인상의 여자가 살갑게 말했다.

“고맙지만 괜찮습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서요.”

리욘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여자는 아쉽다는 말을 전하며 바구니에서 캔 맥주를 꺼내 리욘과 제이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옆에서 음식이 담긴 종이 접시를 건네주던 노인이 별안간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왕자님 아니십니까.”

그는 리욘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모자를 벗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페르들란입니다. 스카르페딘 어르신 저택에 생선을 댔었죠. 왕자님께서 아주 어리실 적에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이, 아버지도. 그게 벌써 몇 년 전의 일인데 기억을 하시겠어요.”

딸의 말에 노인은 “하긴, 그렇겠구먼.” 하고 웃으면서도 리욘의 손을 붙잡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방학이라 놀러 오신 모양이죠.”

“아, 네.”

“카이옌 왕세자 전하의 일은 유감입니다.”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리욘의 표정부터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입에서 나온 형의 이름에 왕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것도 모두 다 신의 뜻인 것을. 모쪼록 왕자님께서 왕위를 이어받아 우리 아이슬란드 국민을 위해 선정을 베풀,”

“형이 죽은 게 신의 뜻이라고요?”

리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황한 노인이 “네…?” 하고 눈을 크게 떴다. 혹 자신이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그런 노인을 보며 리욘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노인에게 붙잡힌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아뇨, 형은 자기 이익에만 눈 먼 자들의 뜻에 의해 죽었습니다.”

어르신처럼요. 여전히 웃으며 리욘은 덧붙였다.

“맥주 잘 마시겠습니다.”

짧게 인사한 뒤 왕자는 돌아섰다. 제이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부녀에게 꾸벅 인사한 뒤 리욘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틀린 말도 아니잖아?”

제이의 말을 가로막으며 리욘은 사납게 내뱉었다.

“저들이 내가 왕위를 잇길 바라는 건 내 몸에 흐르는 피 절반이 아이슬란드 인의 것이기 때문이야. 만약 내 어머니가 덴마크나 스웨덴 출신이었다면 절대로 오늘처럼 말하지 않았겠지.”

그야 저 사람들 입장에선 그게 당연한 거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쁜 거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모르지도 않을 텐데 굳이 그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일 필요가 있었느냐고 한 마디 하려던 찰나였다.

- 뭐가 신의 뜻이야. 정말로 신이란 게 있다면 형을 그런 식으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불현듯 들려 온 왕자의 목소리에 제이는 깜짝 놀라서 “전하.” 하고 리욘을 붙잡았다.

“왜?”

“잠시…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쳐다보던 리욘이 이내 아아, 하고 중얼거렸다.

“들렸나보지?”

“…죄송합니다.”

“뭐, 듣고 싶어서 들은 건 아닐 테니까.”

상관없어. 리욘은 정말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들리면 그냥 들어도 돼.”

“아뇨, 듣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엔 귀를 막아도 들린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거라면 차라리 내가 먼저 허락하는 게 낫지. 들리면 들어. 아예 내 머릿속을 들여다봐도 괜찮아. 잘됐군. 나도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는데.”

그렇게 말하며 리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작정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캔 맥주까지 따는 왕자를 보며 제이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들여다봐.”

리욘은 진심이었다. 차라리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이해 받고 싶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제이는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아봤자 자신은 리욘의 고통에 공감하지도, 그를 위로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럴 능력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그의 가슴속에 묻어둔 상처를 파헤쳐 그 신음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그건 리욘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가 숨기고 싶어 했던 치부만 들추는 꼴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이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고민하는 동안에도 리욘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설프게 주워들은 몇 마디로는 섣부른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리욘에게 덜 실례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제이는 왕자의 마음속에 숨겨진 상처에 귀를 갖다 댔다. 그리고 그 상처는 제이의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인했다.

“읽었어?”

점점 굳어지는 제이의 표정을 보며 리욘이 물었다. 제이가 대답하지 않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인 건지 리욘이 맞아, 하며 웃었다.

“형은 나 때문에 죽었어. 내 방패막이가 된 셈이지.”

카이옌은 아마 왕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고 생전에도 몇 번씩이나 부왕에게 간청한 모양이었다. 부왕은 완강하게 거절했고 그런 소릴 할 시간에 좀 더 노력을 해보라며 왕세자를 꾸짖었다. 하지만 이미 죽을힘을 다 해 노력 중이었던 카이옌에게 그 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스트레스로 위가 다 상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도 안 좋던 폐가 과로로 엉망이 되었다. 결국 카이옌은 장기 입원 도중 간질성 폐질환 판정을 받았고 그 후 합병증에 시달리다 의사로부터 일 년을 넘기지 못할 거란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리욘은 사망 선고가 내려진 형을 만나기 위해 방학이 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도 동생을 대하는 카이옌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주변은 아니었다. 특히 카이옌의 장인이 될 예정이었던 피엘투레르 공작은 노골적으로 리욘의 방문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리욘이 복도에 있는 걸 알면서도 들으라는 듯 자신의 외사촌인 린드고르덴 백작과 함께 간병인실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속도 없으시지. 누구 때문에 저 꼴이 됐는데.”

“2왕자는 알고 있었겠죠? 폐하께서 처음부터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실 생각이었다는 걸.”

“몰랐을 리가 있나. 알고도 방관한 게야. 제 형이 저의 방패 노릇을 하는 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리욘은 피엘투레르 공작과 린드고르덴 백작이 너무 슬픈 나머지 미쳐 버렸거나, 아니면 누군가의 음해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옌의 측근들 중엔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리욘은 그 길로 당장 형에게 달려갔다. 혹시 형도 그렇게 믿고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오해를 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숨이 턱에 차서 달려온 동생에게 카이옌은 말했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형은 알고 있었던 거야. 부왕은 처음부터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없었단 걸.”

물론 부왕은 새 왕비를 염두에 두고 한 행동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이옌이 왕세자로 책봉된 건 리우지엔이 궁에 들어오기 한참 전의 일이었으니까. 그녀가 아니더라도 에시르의 왕세자를 노리는 이들은 많았다. 그 숱한 위험에서 리욘을 지키기 위해 부왕은 자신의 장자를 왕세자로 책봉해 그를 동생의 방패로 삼았다. 카이옌이 그 사실을 눈치 챈 건 사망 선고를 받기 두어해 전의 일이었다. 그때 이미 그의 폐는 손쓸 수 없이 망가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옌은 왕세자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야만 자신이 죽은 후에도 리욘이 말썽 없이 왕세자 자리를 물려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옌은 자신이 결국 새 왕비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무리 왕비라도 왕세자를 둘씩이나 살해하진 못할 거라고, 그렇게 되면 제3 왕자인 프란츠의 입장이 도리어 위험해지기 때문에 그녀로선 신중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러니 자신이 방패로 존재하는 동안은 최대한 왕위에 관심이 없는 척 행동할 것을 리욘에게 당부했다. 자신은 방패에 불과할 뿐이고, 진짜 왕위를 이을 사람이 리욘이란 사실을 알게 되면 왕비는 타겟을 바꿀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난 그 말을 듣지 않았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멍청했다 싶지만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왕세자가 되면 형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때부터였다. 리욘이 일체의 외출을 금하고 기숙사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기 시작한 것은. 그는 뛰어난 성적표로 자신의 자질을 증명했으며 활발한 대외 활동으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적극성을 표현했다. 부왕의 순방길에 동행해 가망 없는 왕세자를 폐하고 자신을 왕세자로 책봉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왕은 요지부동이었다. 기다리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아예 리욘에겐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는 사이 일 년이 지났고 리욘은 최고 성적으로 국제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 후 왕세자가 사망했다.

“왕좌라는 건 결국 쓰레기 더미의 꼭대기를 말하는 거야. 한 사람의 군주를 세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사람들은 모르지.”

맥주가 반쯤 남은 캔을 흔들며 리욘은 웃었다.

“아까 그 노인이 내가 왕위에 오르길 바란 건 아이슬란드인들이 누릴 혜택을 생각해서겠지. 외숙부도 마찬가지야. 내가 왕이 되면 진보당 출신의 총리를 임명할 수 있으니 그걸 바라고 이렇게 날 돕고 있는 거고. 소르스테인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지. 일찌감치 이쪽에 줄을 대고 있던 자들이야. 형이 죽었으니 이제 목숨 걸고 날 왕으로 만들려고 들겠지. 모두가 자신을 위해 왕을 만들려고 해.”

그렇게 말한 뒤 리욘은 고개를 들어 제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면 왕은? 왕은 무엇을 위해 왕이 되어야 하지? 누구를 위해 왕이 되어야 하는 거야?”

제이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국민을 위해서, 라는 판에 박힌 답변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국민들조차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혜택을 가져다 줄 왕자를 골라 지지하고 응원하고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왕은 안 될 거야. 자식도 안 낳을 거고. 내가 왕이 안 되더라도 내 자식들이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한은 형과 같은 처지가 안 될 거라고 장담 못 하니까.”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타오르는 모닥불 주위를 돌며 즐겁게 춤을 추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다면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이는 춤을 추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이니까요. 누가 대신 살아 주는 것도 아니니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사는 게 현명한 거죠.”

뻔한 얘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이는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가 알고 있는 삶이란 게 결국 그런 거였다. 그가 살아온 세계에선 도덕심이라든가 공공의 이익을 위한 희생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치였다. 약한 자는 죽고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였다. 살아남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고, 강해지기 위해선 쓸데없는 동정심과 이타심 따윈 버려야했다.

“너는?”

리욘의 목소리에 제이는 고개를 돌려 왕자를 쳐다봤다.

“너는 지금 네 인생이 마음에 드는 거냐고.”

“나쁘진 않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그 일도?”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게 네 목푠가? 돈을 많이 버는 거?”

“그건 아닙니다.”

“그럼 네 목표는 뭐지?”

생각도 못 했던 질문에 제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목표라니.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는 게 지난 이십여 년 동안의 유일한 바람이자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소원을 빌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나의 새로운 목표는 뭘까.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고민 끝에 제이는 말했다.

“동생을 만나는 겁니다.”

“동생?”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이 있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그럴 겁니다.”

“그게 뭐야.”

리욘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동생을 만나는 게 목표라고?”

“목표라고 하니 좀 거창한 것 같긴 하군요. 그냥 살아 있다면 얼굴이나 한 번 보고 싶은 것뿐이라서요.”

“말투만 보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이라는 거 같은데.”

“음, 그런가요.”

의외로 날카로운 리욘의 지적에 제이는 멋쩍게 웃으며 “사실은,” 하고 말했다.

“그렇게 간절하게 꼭 만나야겠다, 하는 건 아닙니다. 전하의 말씀대로 만나면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고, 하는 정도죠. 하지만….”

“하지만?”

리욘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청색이 감도는 회색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제이는 살며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하지만, 이런 목표라도 있으면 좀 더 삶에 미련을 남기게 되니까요.”

그것이 지금 당장은 절실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해도, 언젠가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떻게든 오늘 하루 더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저는 이런 사람이라서요.”

제이는 미지근해진 캔을 다른 손으로 옮겨 쥐며 말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게 삶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게 인생인데 남 좋은 일만 하다가 갈 수는 없잖습니까? 나한테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겠죠. 그런 게 없다면 굳이 할 필요 없는 거고요.”

그러니 전하께서도 억지로 왕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이는 모래밭에 앉아있는 리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뭐든 간에 말입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제노스였다면 네 마음을 읽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지만요.”

“믿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어.”

짧게 말하며 리욘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쯤 남아 있던 맥주를 단숨에 다 마신 그는 캔을 손으로 구기며 “돌아가자.” 하고 말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있어.”

리욘의 말대로였다. 주위는 아직도 대낮처럼 밝은데 공기는 어느 샌가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진 것이다.

두 사람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리욘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재킷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은 채 묵묵히 걸음만 옮겼고, 제이도 그런 리욘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저택에 도착한 리욘은 피곤하다며 침대에 드러눕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빈속에 마신 술 덕분이려니 하며 제이는 방의 불부터 꺼줬다. 문을 닫고 나가려던 그는 뒤늦게야 왕자의 손목에 채워진 손목시계를 발견하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안에 칩을 왕자가 이전에 쓰던 칩으로 바꾸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물론 읽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일 뿐이었다. 리욘이 신경 쓸 만한 일은 하나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왕자의 손목시계 안에 내장된 칩을 바꿔 끼운 뒤에야 비로소 제이는 그의 방을 나섰다.

어제 일찌감치 뻗은 덕분인지 다음날 리욘은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춰 1층으로 내려왔다. 숙취로 고생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맥주 한 캔 정도로는 끄덕도 없는 듯했다. 컨디션도 썩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식사를 끝낸 뒤 다이닝 룸을 나설 때였다.

“어이.”

자신을 부르는 왕자의 목소리에 제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제 내 칩 네가 바꾼 거야?”

“네.”

“왜?”

왜, 라니. 안 바꿨다고 뭐라고 하면 모를까 바꿨는데도 따지듯 이유를 물어 오는 리욘에게 제이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히 신경 쓰실까 봐, 그래서 바꿨습니다.”

“어차피 넌 안 읽는다면서.”

“물론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신경이 쓰이실 것 같아서요.”

리욘은 흠, 하며 테이블에 팔을 괬다. 식탁 의자에 앉아 빤히 제이를 바라보던 그는 한참만에야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모든 제노스가 너 같지는 않겠지?”

제이는 왕자가 갑자기 그런 소릴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마도요?” 하고 대답했다.

“사람은 다 다르니까요.”

“넌 좀 이상해.”

“그렇습니까.”

제이는 약간 마음이 상해서 대답했다. 안 바꾸면 분명히 또 자기 생각을 읽었느니 안 읽었느니, 무슨 꿈을 꾸는지 봤느니 안 봤느니 캐물을 거 같아서 일부러 바꾼 거였는데. 고맙다고 감사는 못 할 망정 이상하단 소리나 하다니. 다음부턴 그냥 바꾸지 말고 내버려 둬야겠다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리욘이 갑자기 픽 웃음을 터뜨렸다. 실없는 사람처럼 연신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그는 이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지금 누가 할 소릴 하고 있는 건지.

속으로 되받아치며 제이는 생각했다. 왕자가 제노스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라고.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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