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프랑스의 한 유력지에 기재된 폭로문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애틀랜타의 질병 통제 예방 센터와 연계하여 텔레키네시스 신드롬에 대해 연구하던 IART 내의 끔찍한 참상에 대한 보고가 바로 그 내용이었다. 연구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비인도적인 행위들은 장장 8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기록되었다.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끔찍한 묘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악을 넘어 분노하게끔 만들었고 미국의 프리덤 하우스를 비롯한 수많은 국제 인권 단체에서 조속한 사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그 해 가을 전 세계의 시선이 주목된 가운데 모든 관련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법정에 서게 됐고 IART는 폐쇄되었다. 이천여 명의 환자들은 각자 본국으로의 송환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송환이라는 건 돌아갈 본국, 즉 고국이 존재할 때나 가능한 이야기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강제로 격리되어야만 했던 1세대들은 돌아갈 고국이 있고 집이 있었다. 하지만 연구소 안에서 나고 자란 2세대와 3세대들은 자신의 고국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어 볼 부모조차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연구소의 실험 자료로서 ‘만들어진’ 존재들이었으니까. 생물학적 부친은 정자제공자에 지나지 않았고 모친 역시 난자를 제공하고 열 달 간 머무를 자궁을 제공한 것 외에는 그들의 탄생과 성장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태어나자마자 연구원들이 제작한 인큐베이터형 요람에 안겼으며 연구소 내의 프로그램에 의해 길러졌다.
다행히 애틀랜타의 질병 통제 예방 센터가 일부 책임을 통감하여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에 한해 성인이 될 때까지 센터 측에서 책임지고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덕분에 삼백여 명의 아이들은 연구소에서 세 블록 떨어진 질병 센터로 보금자리를 옮길 수 있었으나 나머지 칠백여 명의 성인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국적법에 따라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아메리카의 몇몇 나라와 러시아, 중국, 한국, 일본 중에서 원하는 국적을 선택 취득하게 되었고, 이제 막 자신의 고국이 된 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말이 좋아 고국이지 결국엔 생전 처음 가 보는 외국일 뿐이었다. 평생을 연구소에 갇혀 살다 하루아침에 낯선 땅으로 내던져진 환자들은 좀처럼 바깥세상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들과 관련된 사건사고가 매스컴을 탈수록 텔레키네시스 환자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나빠졌다.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이 제노스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들은 어느 곳을 가나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방인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 건 바로 2001년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대테러시대가 도래하면서 전쟁 사업은 다시금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세계 각국에서 사설 용병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해리 필드는 범람하는 사설 용병업체 가운데서도 가장 독보적인 규모를 자랑하던 블랙워터의 수뇌부였다. 2003년 블랙워터를 퇴사하여 자신의 회사인 블라스트를 설립한 해리는, 넘쳐나는 용병 업체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획기적인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바로 특수 부대 제노사이드였다. 제노스들은 국제법 조약에 의해 국가의 징집 대상에서는 제외되었지만, 본인의 의지에 의해 사설 용병업체에 직원으로 취업하는 것은 제재할 수 없었다. 해리는 바로 그 점을 이용했다.
블라스트 안에 제노사이드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한 해리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제노스들을 상대로 용병 모집 광고를 냈다. 몇 년째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는커녕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취급도 받지 못하고 있던 제노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텍사스의 훈련장으로 모여들었다. 해리는 그들을 자신의 용병으로 등록시키는 한편, 원하는 인재가 있을 경우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후자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제이였다.
제이는 블라스트가 설립된 2003년에 처음 해리를 만났다. 당시 제이는 열다섯 살이었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애틀랜타의 보호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해리는 제이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이들을 텍사스로 데려갔다. 여섯 명의 아이들은 모두 슈퍼 프로바이더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 중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 모두 A등급 판정을 받은 건 제이가 유일했다.
타고난 조건이 다른 만큼 훈련에 대한 적응력이나 습득력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텍사스에 도착한지 일 년 만에 제이는 훈련병 딱지를 떼게 되었다. 실전 투입이 가능할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단 뜻이다. 제이의 첫 임무는 아이슬란드 반정부 시위대를 진압하는 것이었다. 제이는 러시아 국적의 올레그와 팀을 이루어 현장에 투입되었다. 서른여덟 살의 올레그는 염동력 부분에서는 B등급을 받았으나 정신 감응 능력은 제로였다. 제이는 현장에서 자신들의 리더인 수잔과 소통하며 그 내용을 올레그에게도 전달해야 했다. 두 사람은 부자로 위장하여 시위대에 섞였다. 시민들과 함께 거리를 행진하다 신호에 맞춰 미리 정해 두었던 타깃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으면 되는 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이의 첫 임무는 실패로 끝났다. 몇몇 타깃들은 성공적으로 제거했으나 시위대의 수장 에이두르를 사살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다. 제이의 실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작전 변경에 따른 후퇴 명령을 듣고도 그것을 올레그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결국 올레그는 아이슬란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제이는 아비규환이 된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부상자들과 함께 병원으로 실려 갔다.
빈 병실 침대에 앉아 자신의 신원보증인을 기다리는 내내 제이는 블라스트를 그만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더는 이 일을 해낼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블라스트의 용병이 된 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라면 잘해 낼 수 있을 거다, 훌륭한 용병이 될 거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해리도 이해가 안 됐다.
그동안 수도 없이 치렀던 모의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인형의 머리가 터질 때마다 분사되던 형광색 물감과 사람의 머리가 깨지면서 솟구치던 피는 색도 냄새도 판이하게 달랐다. 모의전에선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비명과 절규가 그곳엔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
수많은 모의전을 치르는 동안 인형들은 단 한 번도 제이를 쳐다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눈이 마주칠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그들의 시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그 눈빛과 표정을 자신은 죽는 날까지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제이는 생각했다. 그때부터 집중력이 흐려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에이두르까지 놓치게 되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올레그에게 후퇴 명령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가 아이슬란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임무는 실패했고 팀에서는 사상자가 나왔다.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겁게 제이를 짓누른 건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차피 자신은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니니 그런 죄책감 따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같은 짓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하자 숨통이 죄어드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왜 우는 거야?”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 제이는 고개를 들었다.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애가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인형처럼 예쁜 눈코입도 그랬지만 녹아내릴 듯 눈부신 금발이 삭막하고 어두운 병실과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더욱 현실감이 없었다.
“왜 우는 거야? 아파?”
아이가 재차 물었다. 제이는 작은 소리로 미안, 하고 말했다.
“난 노르드어 몰라.”
제이의 말에 아이는 다시 영어로 물었다.
“왜 우는 거야?”
제이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말없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아파?”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울어?”
다시 아이가 물었다. 제이는 한참만에야 겨우 대답했다.
“도망가고 싶어서.”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디로?” 하고 물었다.
“집으로?”
“…모르겠어.”
제이는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이었다. 블라스트에서 도망친다고 해도 갈 곳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으니까.
“집이 어느 방향인지 모르겠다는 거야? 그럴 땐 이렇게 말하면 돼.”
아이는 두 손을 번쩍 들더니 제이가 앉아 있는 침대의 매트리스를 소리 나게 두드리며 외쳤다.
“달려라, 달려라, 나의 침대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 다오!”
제이는 신나게 매트리스를 두드려 대는 아이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마녀의 침대 다리에 새겨져 있던 루네 문자야.”
“루네 문자?”
“응. 근데 이건 마녀의 침대가 아니라 안 되나 봐.”
아이는 살짝 풀죽은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제이는 아이가 무슨 이야길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루네 문자라고 하는 거 보면 북유럽 신화인가, 아니면 아이슬란드 동화인가 혼자서 이리저리 추측을 하고 있자니 아이가 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꼼지락거리며 “대신 이거 줄게.” 하고 말했다.
아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건 예쁘게 포장된 초콜릿이었다. 제이가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초콜릿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자 아이는 직접 금색 포장지를 벗겨 낸 뒤 그것을 다시 제이의 손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작고 네모난 초콜릿에는 새하얀 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제이는 조심스레 그것을 입 안으로 가져갔다.
“맛있어?”
아이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의 상기된 두 뺨이 살그머니 부풀어 올랐다. 수줍어하면서도 한껏 기뻐하며 미소 짓는 아이가 너무나 예뻐서, 그야말로 천사 같아서 제이는 도리어 울고만 싶어졌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온 자신이었다. 그런 주제에 감히 천사를 떠올리다니. 뻔뻔하기 짝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왜 그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제이의 얼굴을 보며 아이의 표정에도 근심이 어렸다. 제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툭,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는 그런 제이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안절부절 못하며 제이의 표정을 살피던 아이는 다시 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울지 마, 이거 또 줄게.”
아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초콜릿을 제이의 손바닥 위에 떨어뜨리는 순간이었다.
“리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치며 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고 했잖아!”
소년은 아이의 손목을 낚아채며 외치더니 그대로 아이를 데리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제이는 잘 가란 인사조차 못한 채 병실을 나서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이가 에시르의 제2 왕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날 밤의 일이었다. 제이는 자신을 데리러 온 해리와 함께 레이캬비크의 숙소에서 뉴스를 보고 있었다. 첫 소식은 당연히 오늘 낮 국회 앞에서 벌어졌던 시위에 대한 속보였다. 아나운서가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는 사망자의 수를 전하는 동안 VCR은 제이가 머물렀던 국립 병원의 모습을 내보냈다. 병원 안을 가득 메운 부상자들과 그들의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적나라하게 화면에 담겼다.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달려온 진보당 의원들과 경찰의 과잉 진압을 책하러 온 사회당 의원들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던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북새통 같은 병원 복도 한쪽 구석에 서 있는 경호원들을 프레임에 담았다. 무리지어 서 있는 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 사이로 유모인 듯한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를 본 순간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왜 그래?”
해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뇨.”
제이는 대충 얼버무리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린 아이가 있길래요.”
“방금 그 아이?”
제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해리는 테이블 위의 캔 맥주를 집어 들며 “왜, 시위 중에 다치기라도 했을까봐?” 하고 웃었다.
“절대 그런 건 아닐 테니 걱정 마.”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리욘 스카르페딘 엘리아스 아그나르. 에시르의 제2 왕자야. 아마 올해 아홉 살이었던가.”
리욘 스카르페딘 엘리아스 아그나르. 제이는 멍하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에시르의 제2 왕자, 라는 말은 차마 소리 내어 되뇌지도 못했다.
“아이슬란드에서 에시르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이 일면 늘 왕비가 왕자들을 데리고 방문하곤 했거든. 아마 이번에도 왕자들만이라도 보내서 진정시키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런데 무력진압 사태로 반감이 커져서 병원에만 있다가 돌아갔다는군.”
해리는 작은 그릇에 담긴 피스타치오 껍질을 까며 심상하게 말했다. 뉴스에서는 아이슬란드 경찰 총장이 무력진압 사태에 대한 유감문을 발표하고 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진땀을 흘리며 총장은 종이에 적힌 문장들을 읽어 내려갔다.
“만약에…… 시위 진압이 제대로 안 되면 왕자는 어떻게 되는 거죠?”
“당장이야 어떻게 되진 않겠지. 하지만 시위 규모가 여기서 더 커지면 그땐 에시르 국왕도 위험하지. 당연히 차기 계승권자인 왕자들의 입지도 흔들릴 수밖에 없을 테고.”
해리의 마지막 말에 제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왕자들의 입지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니. 그럼 저 어린아이가 궁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는 건가.
문득 자신의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먹으려 하지 않자 그 조그만 손으로 열심히 포장지를 다시 손바닥에 올려 주던 아이. ‘맛있어?’ 잔뜩 기대하며 묻던 목소리도, 수줍게 지어 보이던 미소도 모두 생각났다. 그 천사 같은 아이가, 고귀하게만 자랐을 그 아이가 하루아침에 끔찍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수잔의 말을 들을 걸 그랬군.”
맥주가 절반 정도 남은 캔을 집어 들며 해리가 탄식했다.
“아직 시기상조라고 하는 걸 내가 그렇지 않다고 우긴 거였거든. 절대 문제없을 거라고 큰소리쳤는데 수잔의 말이 맞았어. 네게 이런 일은 아직 무리였어.”
이건 전적으로 내 실수야. 해리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남은 맥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빈 캔을 와작 소리 나게 구긴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넌 이번 일에서 빠지도록 해, 제이.”
“…….”
“텍사스로 돌아가. 내일 가장 빠른 비행기 시간을 알아볼 테니 바로,”
“해리.”
제이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해리를 불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던 해리가 응? 하고 고개를 들었다.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뭐…?”
해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요. 작전을 제대로 끝마칠 때까지 텍사스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제이. 하지만,”
“오늘 일은 실수였어요.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없을 겁니다. 맹세해요.”
단호한 제이의 말에 다시 의자에 앉은 해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자신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올레그 일로 잠깐 마음이 약해졌나 봐요.”
이젠 아니에요.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올레그를 생각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죠. 올레그 몫까지 제가 하겠습니다. 기회를 주세요.”
“허, 그거 참.”
해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뭐야?”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왕자를 만났단 이야기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초콜릿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그것만큼은 자신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다.
사흘 뒤,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던 에이두르가 돌연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다. 이튿날 에이두르와 함께 시위대를 이끌던 튀미와 프리들뢰르가 식당에서 말다툼 끝에 서로를 칼로 찌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튀미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프리들뢰르는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다. 우두머리를 잃은 시위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다행스럽게도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에 통감하며 총리가 사퇴를 선언했다.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총리가 사퇴를 발표하는 그때, 제이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이프를 쥐게 된 프리들뢰르와 튀미의 마지막 표정이 잔상처럼 떠올랐다.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에이두르의 눈빛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제이는 그들의 표정 위로 아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렸다. 그럼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면서, 다시 한 번 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을 듯한 용기가 생겨났다.
***
“그래서 결국 사인을 했다고?”
해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당신과 얘기가 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이는 부러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간 과장되게 목이 잠긴 소릴 내긴 했으나 아주 백퍼센트 연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자던 도중에 해리의 전화를 받고 깬 거였으니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미쳤다고 네게 그런 일을 맡기겠어?”
도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며 해리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진정해요, 해리.”
제이는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어차피 한 달이고, 리우지엔이 나설지 안 나설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진정하고, 그렇게 걱정되면 칩이나 좀 보내줘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하자 해리가 “칩이라니? 무슨 칩?” 하고 묻는다.
“당연히 지디스 칩이죠.”
“왕자에게 붙이려고 그러는 거야? 이미 장착하고 있을 텐데.”
“네. 그런데 그건 Pk(Psychokinesis)와 Tp(Telepathy) 둘 다 적용되는 거라서요.”
“그렇겠지. 그것도 아주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철통처럼 막아내는 고사양의 물건일 거야. 그래서, 자네가 필요한 건 뭔데.”
“Pk만 차단되는 걸로요.”
제이의 요청에 해리는 글쎄, 하고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소용없을 텐데. 왕비가 정말 S등급이라면 칩은 아무 의미 없어.”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죠.”
해리는 영 탐탁지 않다는 듯 혀를 찼다. 이쪽이 이 일을 맡은 게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기에 제이는 아무 소리 않고 가만히 해리의 답변을 기다렸다.
“오케이, 보내 주지. 물건 값은 자네 보수에서 제할 거야.”
“그러세요.”
“이번에 돈 좀 벌었다 이거군.”
흥, 콧방귀를 뀌며 해리는 전화를 끊었다. 제이는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의 액정을 들여다봤다. 오전 4시 58분. 알람은 오전 5시에 맞춰 둔 상태였다. 해리 덕분에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깬 것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상적인 벨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베아테 덕분이었다. 그녀가 어제 저녁 제이의 벨소리를 바꿔 주었다.
침대에서 내려온 제이는 욕실로 향했다. 치약을 칫솔에 묻히며 그는 마른 입안을 혀로 훑었다. 오랜만에 그때의 꿈을 꿔서 그런지 아직도 입 안에서 초콜릿 향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양치를 끝낸 뒤에도 입안의 단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같은 층 복도 끝에 위치한 왕자의 방은 오스카의 사설 경호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밤사이의 일에 대해 제이에게 간략히 보고했다. 특별한 사항이 없음을 확인한 뒤 제이는 1층으로 내려갔다. 어제 약속한 대로 하칸이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나요, 제이?”
“네, 덕분에요.”
“그럼 지하부터 시작할까요?”
하칸은 주택의 평면도를 복사한 복사본을 제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젯밤 외출에서 돌아온 오스카에게 제이는 저택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평면도만 한 장 얻을 생각이었는데 오스카는 굳이 하칸을 불러 내일 아침 일찍 제이가 저택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끔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칸은 라일라의 남편으로 30년째 이 저택의 관리를 맡고 있었다.
“이 저택은 지어진 지 1200년 정도 됐습니다. 해풍 때문에 외관이 삭아 여러 번 수리를 하긴 했습니다만 내부는 아직도 굉장히 튼튼하죠.”
하칸의 말 대로였다. 지어진지 천년이 넘은 고택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택의 내부는 몹시 튼튼하고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관리를 잘 한 것도 있겠지만 이런 저택은 애초에 처음 지어질 때부터 고급 자재들을 이용해 정성스레 지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귀족 가문이 지은 집이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가 덴마크에 지배당한 13세기 무렵에 저택을 내놓았죠. 그 후로 많은 주인들이 이 저택을 거쳐 갔습니다. 선대 어르신, 그러니까 아스그림 님께서 이 저택을 사들이신 건 60여 년 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원래는 여름 별장용으로 구입하신 건데 스카르페딘 님께서 아예 이 저택으로 주거지를 옮기신 거지요.”
아스그림 오트켈손은 아이슬란드의 메이저 신문사 중 하나인 파이레피츠(Feirefitz)의 대표였다. 파이레피츠는 다른 메이저 신문사들이 정부 편에 서서 사회당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당시에 유일하게 진보당의 입장을 대변해주던 언론사였다. 아스그림은 외동딸인 할게르트가 파이레피츠를 이어받길 원했으나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할게르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엉뚱하게도 극단에 들어가 연극배우가 되어 버렸다. 결국 아스그림은 당시 국영 방송국 기자로 활동 중이던 스카르페딘 스텐판손을 사위로 들인 뒤 그에게 파이레피츠를 물려주었다.
스카르페딘은 영리한 사내였다. 파이레피츠의 새 주인이 된 그는 진보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오트켈손과는 다르게 보수의 입장을 아주 등한시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은 진보당을 꾸짖으며 사회당을 추켜세울 줄도 알았고 특히 국정 비리와 관련해서는 당을 가리지 않고 강도 높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파이레피츠7)는 그 이름에 걸맞게 흑과 백을 모두 다룸으로써 아이슬란드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로 십 수 년 동안 거론되었고, 이는 스카르페딘의 딸 라나 스카르페딘스도티르가 에시르의 왕세자비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같은 대학에 다니던 중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캠퍼스 커플로 소문이 났으나, 장차 에시르 왕비의 집안 배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여기가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뒤편에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나왔다. 하칸은 벽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힌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이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지하에는 세 개의 창고가 있었다. 하나는 와인 저장고로 쓰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농기구를 비롯한 각종 장비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과거에 장작 보관 창고로 쓰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비워진 상태였다.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도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꽤 넓은 두 개의 공간을 오스카는 각각 홈 짐과 홈 시어터로 꾸며 두었다. 하칸의 말에 따르면 오스카의 지인들이 종종 이곳 저택에서 여름휴가를 보낸다는 모양이었다.
올라올 때는 후원으로 이어진 돌계단을 이용했다. 아침 식사까지 시간이 좀 남아 제이는 하칸과 함께 후원과 정원도 둘러보기로 했다. 도주로로 이용될 수 있는 곳과 은신처로 사용될 수 있는 장소들을 찾아 평면도에 모두 표시했다. 그중 몇 군데는 오스카의 허가를 받아 폐쇄해 줄 것을 부탁하자 하칸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택 안에도 위험한 장소가 이렇게 많았군요.”
“전하가 계시는 동안은요.”
평상시라면 그저 평범한 빈 창고와 적당히 운치 있게 허물어진 돌담 벽에 불과할 뿐인 것들이었다. 하지만 리욘이 머무르는 동안에는 그를 해하기 위해 침입한 자들이 몸을 숨기고 빠져나갈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주차장을 살핀 뒤 제이는 하칸과 함께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한 뒤 먼지투성이의 옷을 갈아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마침 식사 준비를 마친 라일라가 다들 얼른 아침 식사 하시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속속 다이닝 룸으로 모여들었다. 제이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에이나르의 옆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오스카가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오며 제이에게 말했다.
“하칸에게 들었는데 안 쓰는 창고 몇 개를 폐쇄해 달라고 했다며.”
“가능하다면요.”
“아예 무너뜨리는 건 무리니 자물쇠를 바꿔 달도록 하지.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 사설 경호원들에게 점검하라고 함세. 그럼 되겠나?”
“네. 충분합니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빵과 스프레드, 훈제 햄과 베이컨 등이 놓여 있었다. 맛은 없어 보이지만 건강에는 좋을 것 같은 시리얼과 우유, 음료수들도 기호에 맞게 골라 먹을 수 있을 만큼 준비되어 있었다. 라일라가 커피포트에서 뽑아낸 서버를 들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잔에 직접 커피를 부어 주고 있을 때 리욘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이닝 룸 안으로 들어왔다.
“좋은 아침이에요, 라일라.”
리욘은 라일라의 뺨에 다정하게 키스한 뒤 베아테의 옆에 앉았다. 바구니에 담긴 토마토를 집어 들면서도 여전히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왕자를 보며 제이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제에 비하면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럴 때 빨리 앞으로의 경호방향에 대해 설명하고 협조 부탁할 부분에 대해서도 확답을 받아내야 했다.
아무래도 식사 도중에 이야기하는 것보단 끝나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게 좋겠지.
제이가 차분히 계획을 세우는 사이 라일라가 다가와 물었다.
“커피 드실라우?”
“네, 감사합니다.”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말하면 된다우.”
라일라는 제이의 잔에 넘치도록 커피를 따라 주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욘이 들고 있던 토마토를 자신의 접시 위에 내려놓고 식탁에 드러눕듯 팔을 괴며 말했다.
“우리 백인 아가씨 식사는 핫소스와 테스토스테론을 섞은 단백질 쉐이크 아니었나? 그게 몸매유지의 비결이라고 들었는데.”
…오늘도 얘기하긴 글렀나.
제이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오스카가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제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속이 영 안 좋군. 라일라, 미안하지만 난 아침 식사는 됐어요.”
그런 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닝 룸을 빠져나갔다. 도망치듯 사라지는 오스카를 보자 역시 어제의 그 외출도 저녁 식사 자리를 피하기 위한 핑계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나오는 제이였다.
하긴, 오스카의 입장에선 곤란하기도 할 거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싫어하는데도 억지로 불러들인 건 본인이니까. 아마 왕자도 제 숙부에게 대놓고 내보내라 마라 명령을 할 순 없으니 이런 식으로 눈치를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오스카 입장에선 그게 더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딱 잘라 내보내라고 하면 오스카도 딱 잘라 불가능하다고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난 제노스가 싫다고 외치고 있는 수준이니. 그저 못 보고 못 들은 척하며 자리를 피하는 게 오스카 입장에선 가장 최선이긴 했다.
“어때? 이런 음식들 먹어도 괜찮은 거야?”
여전히 식탁 위에 반쯤 드러눕다시피 한 자세로 리욘이 물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뭐, 하고 대답했다.
“지금은 딱히 몸매 관리가 필요 없는 시기라서요.”
무심히 받아치는 제이의 말에 베아테가 풋, 하고 웃었다. 리욘이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또 무슨 시비를 걸 세라 에이나르가 얼른 제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는 따로 운동하는 거 있나요.”
“운동은 그냥 골고루 다 하는 편입니다.”
“하긴 특수 부대 훈련 과정에 다 있겠군요. 무술 같은 것도 하죠? 대부분의 특수 부대에서는 유도와 유술을 익히는 것 같던데.”
“블라스트도 기본적으로 유도와 유술을 배우긴 합니다. 그래야 시스테마를 익힐 수 있으니까요.”
“시스테마? 그건 뭔가요?”
에이나르가 처음 들어본다는 듯 되물었다.
“러시아 특수 부대에서 만들어낸 특공 무술.”
툭 던지듯 리욘이 답했다. 그가 이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줄 몰랐던 제이는 약간 당황해서 “아, 네. 맞습니다.” 하고 말했다.
“러시아 특수 부대에서 만든 특공 무술입니다. 블라스트에는 아무래도 러시아 출신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시스테마라는 게 애초에 동서양 무술의 장점을 따 와서 결합한 형태라 우리 쪽과 잘 맞기도 하고요.”
“오, 그렇군요. 특수 부대에서 직접 자신들에게 맞는 무술을 개발하기도 하는군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에이나르가 시리얼을 덜어 자신의 볼에 담으며 말했다.
“저택 지하실에 홈 짐이 갖춰져 있어요. 웬만한 운동기구는 다 있으니까 운동하고 싶을 땐 거기 가서 하면 될 거예요.”
“봤습니다. 그런데 그거 쓰는 사람이 있나요?”
“오스카는 절대 안 써.”
라일라가 택도 없다는 듯 손을 저었다.
“전하도 안 쓰시,”
“안 써.”
에이나르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리욘이 답했다. 제이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리욘을 바라보았다. 운동을 상당히 많이 한 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시간에 만든 몸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히 운동을 해야만 만들 수 있는 몸이었다.
“그럼 전하는 따로 운동하시는 건 없는 겁니까?”
“학교에서 하는 걸로 충분한데 뭘 또 따로 운동을 해.”
질색하는 리욘의 옆에서 베아테가 “맞아요. 우린 학교에서 온갖 스포츠를 다 배우거든요.” 하고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테니스부터 시작해서 펜싱, 발레, 크리켓에 승마까지.”
“여름엔 수영을 하고 겨울엔 스키를 타지.”
“아, 리욘은 학교 대표로 수영대회에 나간 적도 있어요.”
“승마대회에도 나가셨죠.”
에이나르가 얼른 끼어들었다. 어디든 나갔다 하면 메달을 따오셨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에이나르를 보며 제이는 아, 그래서, 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따로 한 운동은 없다더니 몸만들기 제일 좋은 운동 두 가지를 학교에서 몇 년 동안이나 열심히 해 오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데에는 승마만한 게 없고 상체의 근력을 발달시켜주는 운동에는 수영만한 게 없다. 거기다 대회에 나갈 정도였다면 준비 기간 동안 근력 운동도 엄청나게 했을 것이다. 한창 성장기에 그렇게 몸매가 바로 잡혔으니 앞으로 한 삼 년은 걷기 운동만 해도 지금의 몸매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휴가 1년 만에 체력은 물론 근육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결국 스포츠센터에 등록해야만 했던 제이로서는 무척 부러울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길 하면 왕자는 분명 에스트로겐 운운하며 비아냥거릴 게 분명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제이는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
아침 식사가 끝나자 제이는 다시 저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1층은 저택 한 가운데의 메인 살롱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두 개의 전실과 챔버와 다이닝 룸이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한 개의 전실과 가족용 거실, 응접실과 오스카의 개인 서재가 있었다. 그 외에 방이 몇 개 더 있었는데 모두 고용인의 숙소로 쓰이고 있었다. 2층에는 집주인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손님들을 위한 방이 있었다. 2층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서재가 있었는데 메인 살롱과 맞먹는 크기의 공간을 마치 도서관처럼 꾸며둔 상태였다. 그 외 욕실은 1층에 두 개, 2층에 세 개가 있었으나 2층 방에는 기본적으로 샤워부스가 달려있어 사실상 2층 욕실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했다.
저택 안을 모두 둘러본 제이는 다시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혼자 식탁에 앉아 평면도에 이것저것 표시를 하고 있자니 에이나르가 다가오며 물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요?”
“저택 구조를 좀 살펴보고 있습니다.”
“아아,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제이는 자신의 맞은 편 의자를 가리켰다. 에이나르는 자신이 도울 일이 있다는 사실이 기쁜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제이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은데요.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죠?”
“아, 네. 평소엔 열 명 정도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택 크기가 워낙에 커서요. 청소하는 사람만 네 명인가 그럴걸요. 이번에 전하가 이곳으로 오시면서 라일라와 하칸만 빼고 다 휴가를 보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요.”
에이나르의 말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가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빈틈 또한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관리할 자신이 없다면 아예 잠시 내보내는 편이 나았다.
“에이나르는 아이슬란드 출신인가요?”
“어머니가 아이슬란드 사람입니다. 아버지는 에시르 사람이고요.”
“전하와 같군요.”
“그렇죠. 에시르에서는 흔한 경웁니다. 아무래도 주변 북유럽 국가에서 에시르로 많이들 모이니까요. 특히 스웨덴과 아이슬란드 출신이 많죠.”
에이나르는 국왕의 비서관으로 일하고 있는 부친 덕분에 일찌감치 진로가 정해진 케이스였다고 한다.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차기 국왕의 보좌관으로 낙점이 된 상태였다. 그의 모친이 라나 왕비와 같은 아이슬란드 출신이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유효하게 작용했다. 덕분에 국립대학에 다니는 내내 왕실의 장학금을 받았으며 졸업하자마자 왕자궁 비서실 소속이 되어 반 년째 리욘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중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진 스바르트의 왕궁으로 출퇴근을 했겠군요.”
“그렇죠. 전하께서 졸업하시기 전에는 스위스에도 몇 번 다녀왔고요.”
“그럼 왕비도 실제로 본 적이 있나요?”
“본 적이 있긴 한데, 손에 꼽을 정돕니다. 왕비는 왕궁 안의 사람들이 자길 꺼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거든요. 웬만해선 왕비궁 바깥으론 나오질 않고 있어요. 부득이하게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할 경우엔 항상 지디스 칩을 두세 개씩 장착하고 나오죠.”
하지만 리우지엔이 S등급 능력의 소유자라면 칩 따윈 장식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물론 그녀가 ‘난 여러분의 머릿속을 절대 들여다 볼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벌인 퍼포먼스라면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제노스가 등급에 따라 다른 능력치를 나타낸단 사실이 민간에 알려진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니까. 그나마도 대부분은 A, B, C 등급까지만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정도라면 지디스 칩으로 어떻게든 방어가 되니 딱 그 정도까지만 알게끔 한 것이다. 지디스 칩으로도 방어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게 분명했다. 그래서 S등급의 존재 자체는 거의 기밀로 취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봤자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전제가 따라붙지만.
“왕비에 대한 왕궁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별론가 보죠?”
“왕궁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의원들이죠. 그냥 궁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딱히 그런 것도 없어요. 왕궁 안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지디스 칩을 다 장착하게 되어있는데 번거롭다고 그냥 안 달고 다니는 사람도 많아요. 왕비가 다른 요직 의원들 다 놔두고 일개 하인인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막말로 들여다본다고 해서 무서울 것도 없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그 사람들의 왕비에 대한 감정은 그럼 호에 가까운 건가요?”
“반반이라고 생각해요. 전(前) 왕비 전하를 따랐던 사람들이나 리욘 왕자님이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 왕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반대로 현 왕비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긴 해요. 프란츠 왕자가 왕이 되길 바라는 사람도 있고요.”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자도 후자도 모두 다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중국은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 중 유일하게 제노스에 대한 대접이 후한 나라다. 십 수 년 전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의 존재가 알려지고 그들의 국적 찾기에 전 세계인의 이목이 주목되었을 때도 중국은 적극적인 유치에 나섰다. 많은 텔레키네시스 환자들 중에서도 아시아인의 능력이 각별하게 뛰어나단 사실이 그들의 중화사상에 불을 지핀 것이다. 중국인들은 자랑스러운 중화인민을 외치며 중국 국적을 선택한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뉴스에서는 그들의 입국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줬으며 외교부 장관 주체의 환영 만찬회가 성대하게 열리기도 했다. 그 무렵엔 TV만 틀었다 하면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이 나왔다. 온갖 종류의 버라이어티와 토크쇼에서 그들을 불러 염동력과 정신 감응 능력을 선보이게 한 까닭이었다. 몇 달 후엔 행성의 아이들이란 이름의 아이돌 그룹도 나왔다. 4명의 텔레키네시스 환자로 구성된 이 아이돌 그룹은 염동력을 이용한 화려한 무대 퍼포먼스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들을 시작으로 텔레키네시스 환자 출신의 배우, 가수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리우지엔이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중국 내에서 텔레키네시스 환자 열풍이 가라앉은 다음에야 TV에 얼굴을 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던 리우지엔은 몇 번의 방송출연으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랐고 연이어 드라마와 영화에 캐스팅되어 인기 여배우의 반열에 올랐다. 4년간 세 편의 드라마와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녀는 돌연 휴식을 선언한 뒤 북유럽으로 여행을 떠났고 스웨덴과 덴마크를 지나 마침내 에시르에 도착했다. 에시르에 머무르던 중 공연 관계자의 초대를 받아 국립 극장을 찾은 그녀는 마침 같은 공연을 보러 온 루카스 국왕과 만나게 되었고 몇 번의 만남 끝에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그녀가 극장에서 우연히 떨어뜨린 지갑을 하필 루카스 국왕이 발견했고, 직접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연은 몹시 로맨틱하다는 평이 자자했다. 너무 로맨틱해서 다분히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물론 그들 중 상당수는 리욘 왕자를 지지하고 있었다.
2세대, 여성, 아시아인. 세 가지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여 슈퍼 프로바이더로 분류되는 리우지엔은 연구소가 문을 닫은 1998년에 스무 살이 되었다. 초경을 시작한 이후로 난자는 꾸준히 제공했지만 몸이 약해서 임신을 한 적은 없다는 것이 그녀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 물론 이것은 그녀의 일방적인 주장이며 진실 여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IART 연구소에서 이루어진 관련 실험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이 폐기되었고 일부는 애틀랜타 질병 센터 안의 기밀로 보관되고 있어 관계자가 아니면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리우지엔의 주장대로라면 그녀는 슈퍼 프로바이더가 확실하겠군요. 그렇다는 건 염동력과 정신 감응 능력이 S급일 거라는 얘기고요.”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가 “아마도요.” 라고 대답했다.
“아깝군요. 이쪽 바닥에 뛰어들었다면 지금쯤 이 저택 지하의 창고를 모두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의 돈을 벌었을 텐데.”
“하지만 한 나라의 왕비가 되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더 엄청날 테니까요.”
“그건 그렇죠.”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 왕비와 프란츠 왕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유가 뭐죠?”
“그녀가 가진 능력이죠. 프란츠 왕자도 그녀의 능력을 이어 받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역사상 가장 막강한 왕권을 가진 왕이 탄생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 기대를 하는 거죠.”
“국민들은 보통 왕권이 지나치게 막강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에시르의 국왕 자리는 조금 특별하니까요. 북유럽 국가 전체를 통치하는 통수권자의 자리잖아요? 국왕이 막강한 왕권을 지니게 되면 그 힘을 우리 국민들에게 휘두르는 게 아니라 다른 북유럽 국가에게 휘두를 거라고 믿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이익은 당연히 에시르 국민들이 누리게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에시르는 확실히 민주주의 국가와는 거리가 먼 것 같군요.”
제이의 말에 에이나르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혹시 이거 알아요, 제이?” 하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행동으로는 옮겨지지 않는 국가 형태란 말이 있죠. 결국 국민들은 오늘 하루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눈앞에 있고 내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창고에 있으면 그만인 겁니다. 그 조건을 충족시켜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쓸데없는 말썽이 일어나지 않게끔 하는 게 모든 왕들의 목표고요. 전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죠. 사실 가장 어려운 게 바로 그거니까요.”
제이는 적당히 맞장구쳤다. 사실 그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이나르는 아니었다.
“맞아요… 그게 진짜로 어려운 거죠.”
무거운 목소리 끝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음 세대의 왕을 보필해야 하는 자의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이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을 수용한 직후 IART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염동력 파장을 분석하고 발생하는 자기장의 종류를 알아내어 교류 차단 칩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IART의 연구원들은 텔레키네시스 환자의 정신 감응 시도를 차단하고 염동력 사용시 발생하는 자기장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칩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 연구개발팀의 팀명을 따 지디스 칩이라 이름 붙여진 이 칩은 1998년 텔레키네시스 환자들이 사회로 몰려나옴에 따라 민간에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본 공급가가 비쌌고 심지어는 차단율에 따라 금액이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 까닭에 일반인들이 쉽게 구입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돈을 지불하고 지디스 칩을 구매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덕분에 텔레키네시스 환자가 밀집된 몇몇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지디스 칩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물론 국가 원수를 비롯한 고위급 정치인들은 나라를 불문하고 의무적으로 지디스 칩을 장착해야만 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교류 차단율 90% 이상을 웃도는 최고가의 물건만을 취급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자그마치 차단율 100%에 육박하는 고사양의 칩만을 취급하는 곳이 바로 블라스트였다. IART 출신의 연구원들을 대거 영입한 해리는 차단율 100%의 칩을 만들어내기 위해 비용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완벽한 차단율을 자랑하는 지디스 칩 개발에 성공했다. 해리는 이 칩들을 블라스트의 중역들과 훈련 교관들에게 무상 지급하는 한편, CIA를 비롯한 몇몇 정보기관에 비싼 값을 받고 팔았다.
조금 전에 제이에게 도착한 지디스 칩이 바로 그 물건이었다. 특히나 이 칩은 정신 감응 능력의 파장은 수용하고 염동력만 제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라 까다로운 공정만큼이나 가격도 더 비쌌다.
제이는 칩이 들어있는 상자를 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리욘이 점심 식사도 거른 채 종일 그곳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그림자의 위치가 바뀐 까닭인지 제이가 도착했을 때 리욘은 잔디밭이 아닌 해먹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발끝을 까딱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이 딱 봐도 기분이 제법 좋은 듯했다. 아마 엊그제 바꾼 약 덕분일 거라고 에이나르는 말했다. 요 이틀간 컨디션이 유난히도 좋아보였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약이 잘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제이는 리욘이 누워있는 해먹에 가까이 다가갔다.
“전하.”
제이의 부름에 리욘이 고개를 들었다. 제이는 가볍게 목례하며 슬쩍 그가 보고 있는 책의 제목을 눈으로 훑었다. Life on the Mississippi.
“실례지만 지금 지디스 칩 장착하고 계십니까?”
리욘은 대답 대신 자신의 왼 손목에 채워진 가죽 스트랩의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제이는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칩을 꺼내 리욘에게 건네며 말했다.
“안에 들어 있는 칩만 이걸로 바꾸십시오.”
“왜 그래야 하지?”
“그건 염동력과 정신 감응 능력을 모두 다 제어하니까요. 이건 염동력만 제어할 수 있도록 개조된 칩입니다.”
제이의 말에 리욘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말은, 내 생각을 네가 읽을 수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내가 그걸 낄 거라고 생각해?”
리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제이는 시선을 반쯤 내린 채 차분한 어조로 “약속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전하께서 먼저 절 찾으시는 경우 외에는 절대 읽지 않겠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실컷 들여다 본 뒤에 절대로 읽은 적 없습니다 하면 그만인 것을.”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믿어.”
리욘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기는 그를 제이는 아무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후에야 제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유사시엔 절 부르셔야 하는데 그러려면,”
“아니. 널 부를 일은 없을 거다.”
“전하.”
제이는 새어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리욘을 향해 말했다.
“왕이 되실 분이잖습니까.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시는 게,”
“헤이.”
제이의 말을 자르며 리욘은 낮게 일갈했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제노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난 절대 왕은 안 될 거야. 그딴 건 그 중국인 계집의 아들에게나 하라고 해.”
그런 뒤 리욘은 몸을 일으켜 해먹에서 내려왔다. 빠른 걸음으로 후원을 빠져나가는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이는 아무 말도 않았다. 왕자가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뒤에도 그는 오랫동안 혼자 그곳에 서 있었다.
해리가 보낸 상자 안에는 두 개의 칩이 들어 있었다. 해리가 혹시 모를 고장에 대비해 하나 더 챙겨 보냈다는 그 칩을 제이는 베아테에게 주었다.
“왜 하필 전가요?”
“오스카나 에이나르는 여차할 상황이 발생해도 어느 정도 자기 방어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베아테 양은 그게 힘들 테니까요.”
“제이가 보호하기로 되어있는 사람은 리욘 아닌가요? 제 신변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베아테 양이 위험에 처하면 그게 결국 전하의 안위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제 입장에선 그런 일이 생기기 전에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 하니까요.”
제이는 솔직하게 말했다. 베아테는 그런 제이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를 풀었다. 작은 펜던트 안에 장착된 칩을 갈아 끼우며 베아테는 말했다.
“리욘은 안 낄 거예요. 걘 제노스라면 치를 떨거든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건 리욘에게 직접 물어 보시는 게 맞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었다. 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죠, 했다.
“당신은 괜찮나요?”
“난 상관없어요. 그리고 여차할 땐 기존의 걸로 갈아 끼우면 되잖아요?”
달칵, 소리 나게 펜던트의 뚜껑을 닫으며 베아테가 말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 끝에 매달린 미소를 보여 제이는 생각했다. 맹랑하달까. 영리하기보단 영악한 구석이 있는 아가씨라고.
“그럼 전 이만 올라가볼게요. 저녁식사 때 봐요.”
“쉬십시오.”
제이는 베아테를 2층으로 올려 보낸 뒤 자신도 응접실을 나섰다. 1층에 있는 오스카의 서재를 찾아가 문을 두드리자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제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스카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자네였나. 당연히 라일라나 에이나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방해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오스카는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신의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는 오스카에게 짧게 고개를 저은 뒤 제이는 말했다.
“베아테 양은 에시르로 돌려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여기보단 집이 훨씬 더 안전할 텐데요.”
“그렇기야 하지.”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가 그런데 왜? 라는 표정을 짓자 오스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그게 말일세.” 하고 한숨을 쉬었다.
“소르스테인 공작 입장에선 그렇다네. 절대로 지금의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야.”
“기회라니… 무슨 기회 말입니까?”
“이번 일만 무사히 넘기면 결국 전하는 왕세자로 책봉이 될 걸세. 그럼 베아테 양은 왕자의 약혼녀에서 왕세자의 약혼녀가 되는 거지. 그 다음엔 어떻게 되겠나?”
“왕세자비가 되겠죠.”
“그래, 큰 문제가 없다면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전하가 왕세자가 되면 어떻게든 문제는 생길 수밖에 없어.”
“죄송하지만 이해가 잘 안되는데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제이는 말했다. 리욘이 왕세자가 되면 베아테와 관련된 문제는 어떻게든 생길 수밖에 없다니. 인과를 알 수 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하자니 오스카는 의자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걸세. 왕자의 약혼녀와 왕세자비는 그 이름이 갖는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네. 그럴 수밖에. 왕세자비는 결국 왕비가 될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베아테가 제2 왕자의 약혼녀로는 적합하지만 과연 왕세자비로도 적합한지에 대해선 아직 아무런 검증을 거치지 않았단 소리지. 전하께서 왕세자로 책봉이 되면 누군가는 이 건에 대해 이야기를 꺼낼 거야. 운이 좋으면 베아테는 자리를 지킬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이 희박하네. 소르스테인 공작은 직위에 비해 궁 안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한 편이거든. 그래서 소르스테인 가의 딸이 제2 왕자의 약혼녀가 될 수 있었던 거지만 왕세자비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오스카의 이야기를 듣던 제이의 표정이 굳었다. 설마, 하고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오스카가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르스테인 공작은 어떻게든 이번 기회에 베아테를 왕세자비로 만들고 싶은 거야. 불가능한 얘긴 아니지. 젊은 남녀가 한 달이나 아무것도 없는 별장에서 같이 지내야하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두 사람은 이제 겨우 열아홉 살밖에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제이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그대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IART에선 여자들의 초경이 시작되자마자 ‘교배’가 시작되었으니까. 그곳에선 스무 살이 되도록 임신 한 번 하지 않은 여자가 더 희귀한 존재였다. 리우지엔처럼.
사정을 알고 나자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제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그런 거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 거였다면 내가 눈치가 없었던 거구나.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혹시라도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때 다시 말하게. 중요한 건 전하의 안전이니 자네가 돌려보내야 한다면 돌려보내야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전하도 전하지만 베아테 양이 걱정돼서 했던 말이니까요.”
그럼, 하고 제이는 돌아섰다. 문을 열고 서재를 나서던 그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오스카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전하는 여자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딱히 그런 것도 아냐. 열일곱 살 때까진 여자랑만 잤으니까.”
도대체 몇 살 때부터 섹스를 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기까진 묻지 않았다. 물어 볼 수도 없는 내용이었거니와 본인도 딱히 남 말할 처지가 아님을 인지한 까닭이었다.
***
저녁 식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 정각에 이루어졌다. 책을 읽느라 종일 식사를 거른 리욘은 일찌감치 다이닝 룸으로 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슬슬 오전에 복용한 약의 효과가 떨어져가는 건지 낮과는 달리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제이는 아주 잠깐 왕자에게 칩을 주는 걸 내일로 미룰까 고민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왕자가 기분이 좋을 때 말을 걸어도 자신이 말을 거는 순간 험악해질 게 분명했다. 오늘 낮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예정대로 저녁 식사가 끝난 후 늦은 밤에 다시 왕자의 방을 찾았다. 제이가 노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리욘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마크 트웨인을 좋아하시나 보죠.”
제이의 말에 리욘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낮에도 미시시피 강의 추억을 읽고 계셨던 게 생각나서요.”
“아아.”
리욘은 중얼거리며 책을 덮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천재니까. 특히 미시시피 3부작은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읽어줘야 하는 책들이지. 넌 어때?”
“뭐가 말입니까?”
“마크 트웨인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느냐고.”
“네.”
제이는 짧게 대답했다. 어떻게? 라는 표정을 짓는 리욘에게 제이는 심상한 어조로 말했다.
“수업 시간에 배웠으니까요. 마크 트웨인과 H. 제임스는 남북전쟁이 미국 문학사에 끼친 영향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들이었죠.”
“수업 시간이라면, 정규 수업을 받았다는 얘긴가?”
“물론입니다. 애틀랜타 주의 교과서로 배웠죠.”
“그렇군.”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곧 리욘은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괴며 “그래서,” 하고 말을 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책을 읽은 감상은?”
“재미있었습니다. 특유의 유머와 사회에 대한 풍자가 인상적이었죠.”
제이는 십여 년 전 수업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뭐지?”
“허클베리 핀의 모험입니다.”
“이거?”
리욘이 테이블 위의 책을 집어 들며 되물었다.
“지금 앞에 있어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아닙니다.”
사실 그랬다.
“그럼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도 알려줄 수 있겠군.”
“그런 부분은 딱히 없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인데 좋아하는 부분은 따로 없다?”
“말 그대로 마크 트웨인의 작품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 그렇게 말씀 드린 것뿐입니다. 십년 전에 읽은 책이라 자세한 대목들은 기억이 안 나기도 하고요.”
리욘은 그렇군,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책을 펼친 그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어느 한 페이지에서 손이 멈추었고 리욘은 말했다.
“난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해.”
이윽고 그는 목소리까지 바꿔 가며 책 속의 대화를 읽기 시작했다.
“저 왕들이 하는 짓이 놀랍지 않아, 허크? / 아니, 안 놀라운데. / 왜 안 놀라워? / 왕들은 원래 그러니까. 왕은 다 똑같아. / 하지만 허크, 이 왕들은 진짜 악당들이야. 진짜 악당들하고 똑같잖아. / 내 말이 그 말이야. 내가 아는 한 왕들은 대부분 악당이야.”
거기까지 읽은 뒤 리욘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자신이 읽었던 대화의 마지막 문장을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내가 아는 한 왕들은 대부분 악당이야.”
제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칩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칩, 이걸로 바꿔 끼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안 바꾼다고 했을 텐데.”
책을 덮으며 리욘이 짜증스레 말했다.
“대신에 베아테 양과 함께 있을 땐 그 전의 걸로 교체하셔도 됩니다.”
“그건 또 왜지?”
“…….”
제이가 아무 말도 않자 리욘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베아테와 내가 섹스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맙소사. 리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는 이내 하아, 하고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숨을 내뱉었다.
“정말 끔찍하군.”
“칩, 이걸로 바꿔 끼우십시오.”
“나가.”
“밤 열한시 이후로는 기존의 것으로 교체하셔도 됩니다. 대신 내일 제 방으로 연결되는 인터폰을 설치하도록 할 테니 위험한 일이 있으시면 꼭 누르십시오.”
제이는 왕자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끝까지 말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빤히 쳐다보더니 곧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풀었다. 시계에 있는 작은 스위치를 눌러 안에 내장된 지디스 칩을 빼낸 뒤 제이가 준 칩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다시 스위치를 누르자 찰칵 소리와 함께 칩이 시계 안에 장착되었다.
리욘은 시계를 다시 자신의 손목에 채운 뒤 제이를 향해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네. 그렇게 하면 되는,”
팍!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제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곧 왼쪽 눈썹 위에서부터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정말 안 읽고 있었나 보군.”
자신이 던진 책에 맞아 눈썹 위가 찢어진 제이를 보며 리욘은 태연히 말했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읽지 않습니다.”
제이는 발끝에 떨어진 책을 집어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진짜 그런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지금 건 내가 책을 던질 거란 걸 알면서도 일부러 맞은 걸 수도 있으니.”
리욘은 제이가 올려놓은 책을 집어 들며 “일단은 알겠어.” 하고 말했다.
“칩 갈아 끼웠으니 이만 나가 봐.”
제이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왕자의 방을 나섰다.
“괜찮아요, 제이?”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에이나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맙소사, 피가 나잖아요.”
“괜찮습니다. 약간 긁힌 정도라.”
“긁힌 게 아니라 찢어진 거예요.”
상처가 꽤 깊은 것 같다며 에이나르는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제이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제이는 짧게 인사한 뒤 손수건을 받았다. 엉망이 된 얼굴을 대충 닦은 뒤 아직도 피가 나고 있는 상처를 손수건으로 꾹 누르는 순간이었다. 귓가에 울리는 선명한 웃음소리에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앞에 서 있는 에이나르를 쳐다봤다.
“왜, 왜 그래요? 많이 아파요? 의사를 부를까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에이나르에게 제이는 “아니, 아닙니다.” 하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에이나르는 아니다. 심지어 그는 듣지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싹 온 몸에 한기가 들었다. 제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복도에는 자신과 에이나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바로 옆에서 들려온 것만 같은 선명한 웃음소리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에이나르에게는 들리지 않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들리는 웃음소리를 가진 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