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2)

1945년 8월 11일, 북태평양 베링해에 지름 70m 가량의 소행성이 추락했다. 세계 2차 대전의 종식을 불과 며칠 앞둔 날이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소행성은 바다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해상 곳곳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었고, 이 해일로 인해 알래스카 반도의 일부가 침몰됐으며 폭스 제도와 알류샨 열도가 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다름 아닌 러시아였다.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된 기쁨도 잠시, 캄차카 반도의 대부분이 바닷물 속에 잠기는 끔찍한 참사를 겪어야 했다. 쿠릴 열도의 여덟 개 활화산은 두 달간 번갈아 가며 용암을 쏟아 냈고 그 여파로 일본 전역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한반도 일부와 해상에 인접한 중국의 주요 도시들도 상당히 큰 규모의 재해를 입었다.

그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정확히 6년 후였다. 최초의 접수 사례는 1951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지역의 보건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6살 일례나가 지속적인 환청을 호소한다고 기록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인접한 마을 곳곳에서 환청에 시달리고 있다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몇몇 아이들의 주변에선 폴터가이스트 현상2)이 함께 목격되기도 했다. 결국 1956년부터 세계 보건 기구의 주도 아래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고 3년간의 조사 기간 동안 같은 증상을 겪고 있는 환자의 수는 총 1100여명 가량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모두 1945년에서 1947년 사이의 출생자들로 60% 이상이 러시아 출신이었다. 30%는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아메리카 지역의 아이들이었고 나머지는 소수의 아시아인들이었다. 모두 1945년 소행성 추락으로 직, 간접적인 피해를 입은 지역들이었으며 증상을 보인 아이들 중 80% 이상이 남아였다. 여아의 수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는데 심지어 조사 기간 도중에 사망한 경우도 제법 있었다.

환청으로 인해 본인이 받는 고통도 극심했지만 빈번하게 발생하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으로 인해 주변의 피해 상황도 만만치가 않았다. 마침내 1961년, 세계 보건 기구는 해당 증상을 공식적인 ‘질병’으로 분류하고 텔레키네시스 신드롬(Telekinesis Syndrome)이라 명명하고 각국 정부와의 공조로 ‘환자’들을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 통제 예방 센터에 강제 수용하기에 이른다. 훗날 제노스라 불릴 이 환자들을 수용하게 된 질병 통제 예방 센터는 IART(International Agency for Research on Telekinesis syndrome)라는 이름의 연구소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연구에 착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몇 가지 연구 결과를 발표하게 된다. 텔레키네시스 신드롬의 대표적인 증상은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이며, 이 증상은 여성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었다. 요즘 식으로 바꿔 말하면 여성들의 능력치가 더 높았다는 이야기다.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도 주로 여성들이었다. 남성들은 대부분 한 가지 능력만을 갖고 있었다. 간혹 두 가지 능력을 모두 가진 이들이 있긴 했으나 매우 드문 경우에 속했다. 그들은 옥시토신 수치가 일반 남성에 비해 30%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통상 일반인 여성들의 옥시토신 수치에 근접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주기적으로 특정 호르몬을 분비해 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호르몬은 여성의 난소에서 분비되는 난포 호르몬, 즉 에스트로겐과 구조가 거의 흡사했다.

문제가 된 호르몬의 정체를 밝혀낸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영국의 물리학자 헤럴드 홉킨스였다. 그가 개발한 막대렌즈가 내시경의 해상도를 크게 향상시킨 덕에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에스트로겐과 구조가 흡사한 호르몬을 지닌 몇몇 남성들의 직장 윗부분 얇은 근막 위로 혹처럼 붙어 있는 작은 자궁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2년, 세계 보건 기구는 텔레키네시스 신드롬의 증상에 남성 임신 가능이라는 항목을 추가하게 된다.

보고서를 읽던 에이나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추가된 마지막 항목의 한 부분에 머물러 있었다. 남성 임신 가능.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오늘따라 유독 이 단어가 생경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옆에 앉아 있는 남자 때문일 것이다. 좁은 차 안이었고 남자는 차에 오른 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운전석이라도 개방돼 있으면 기사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해 봤을 텐데, 아쉽게도 이 차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에 엄청난 두께의 방탄유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이 숨 막히는 어색함을 견디며 버틸 수도 없었다. 비크까지는 아직도 차로 한 시간가량을 더 달려야 했다. 에이나르는 들고 있던 보고서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음, 저기.”

줄곧 창밖만 쳐다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자 에이나르는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도로 고개를 숙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제, 제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음, 그러니까 여기 아지스크(아시아인을 일컫는 노르드어)라고 돼 있는데, 그게 그러니까 저기… 실례되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아지스크로는 안 보여서요.”

“혼혈입니다.”

남자는 짧게 말했다. 한참을 더듬거리며 어렵게 물어본 에이나르가 무안해질 정도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남자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잠시 텀을 두고 덧붙였다.

“3세대 중에 순수 아지스크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일단 블라스트 내에서 아지스크로 분류된 사람은 대부분이 저 같은 혼혈입니다.”

“아, 그렇군요.”

에이나르는 부러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럼 리우지엔 왕비가 그 드물고 귀한 아지스크 중에 한 명이란 얘기겠군요.”

“리우지엔은 2세대입니다.”

남자의 말에 에이나르는 네? 하고 눈을 크게 떴다.

“3세대 중에 여자는 없으니까요.”

“아… 아아, 맞다. 참 그랬지.”

분명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도 순간적으로 깜박 잊고 말았다. 내가 어지간히도 긴장했구나 하고 생각하자 에이나르는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 에이나르의 상태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남자는 건조한 말투로 설명했다.

“2세대 중에는 순수 아지스크가 그렇게 드물지 않습니다. 물론 여자는 굉장히 드물지만요.”

공식적으로 기록된 첫 2세대, 즉 텔레키네시스 신드롬 환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최초의 2세는 1967년생이다. 물론 그전에 연구소에 등록되지 않은 환자가 바깥에서 아이를 낳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다.

2세대의 특징은 남녀의 성비가 극단적이라는 사실이었다. 1세대에는 그래도 8:2 정도의 성비를 유지하였으나 2세대로 넘어오면서 전체 출생자 중 여아의 비율이 7% 이하로 대폭 낮아졌다. 여아는 사산아가 유독 많았으며 2차 성징을 전후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인은 대부분 뇌신경질환이었고 우울증과 정신 분열증에 의한 자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환자와 비환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환자와 환자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능력차이가 뚜렷했다. 전자의 경우는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의 미미한 능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으나 후자는 부모 세대를 웃도는 능력치를 보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특히 부모가 양쪽 다 아시아인일 경우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 두 분야 모두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여기에 더해 성별이 여자일 경우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왔다. 이들의 능력을 잘만 개발할 경우 엄청난 전력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2세대, 아시아인, 여성.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극소수의 환자를 IART에선 슈퍼 프로바이더(Super Provider)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름 그대로 더욱 강력한 능력을 지닌 유전자의 공급원으로 쓰였다. 이들이 공급을 담당한 건 물론 난자, 즉 모체였다. 만약 1998년에 프랑스의 유력지가 연구소 안에서 자행된 끔찍한 참상을 폭로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들은 지금까지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수한 개량종을 만들어 내기 위한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 역할이 3세대까지 이어졌다면….

멍하니 생각하던 에이나르는 순간 흠칫하여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단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옆에 앉은 남자가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에이나르는 떨리는 손으로 무릎 위에 놓인 종이 뭉치를 꽉 움켜쥐었다. 지금이라도 먼저 사과할까. 실례를 저질렀다고. 하지만 고의는 아니었다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하면 용서해 줄까. 아니, 그런데 만약에 이 남자가 내 생각을 안 읽었다면? 그럼 괜한 긁어 부스럼이 아닌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민하던 에이나르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발견한 순간 안도했다. 그 시계 안에 내장된 지디스 칩의 존재를 깨달은 까닭이었다.

죽다 살아난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도 잠시, 에이나르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종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교류 방해 장치인 지디스 칩이 작용하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블라스트에서 제공한 자료들 사이에서 제노스의 정신 감응 능력 등급표를 찾아냈다.

표에 따르면 같은 정신 감응 능력자의 생각을 읽는 게 가능한 사람은 C등급이었다. 여기서 상대방의 생각에 직접적으로 개입까지 할 수 있으면 B등급이었고 정신 감응 능력이 없는 사람의 생각도 읽을 수 있으면 A등급이었다. S등급은 정신 감응 능력이 없는 사람의 생각에도 직접 개입할 수 있으며 근거리에선 교류방해 칩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다.

내친 김에 에이나르는 염동력 기준도 살펴보았다. 정지한 물체에만 영향을 주어 변형시키거나 움직이는 능력은 C등급(PK-ST), 정지한 물체는 물론 움직이는 물체에도 영향을 주어 그 상태를 바꾸는 능력은 B등급(PK-MT)에 해당했다. 여기서 살아있는 존재, 즉 생물체에도 직접 영향을 주어 변화를 일으키는 게 가능하면 A등급(PK-LT)이었는데 중요한 건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시야 안에 있는 대상에 한해서만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고 있는 좀도둑과 맞닥뜨렸다고 가정할 때, C등급은 그 좀도둑의 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 놓거나 선반 위에 놓여 있는 물건을 떨어뜨려 좀도둑의 발등을 찧는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다. 화가 난 좀도둑이 냉장고 안의 맥주병을 집어 들어 던졌을 때 그 맥주병을 공중에서 멈추게 하거나 다시 냉장고로 원위치 시킬 수 있으면 B등급이고 흥분해 날뛰는 좀도둑의 팔을 부러뜨릴 수 있으면 A등급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S등급의 경우엔 이 모든 상황을 현장이 아닌 CCTV로 지켜보며 좀도둑의 목을 꺾는 게 가능하다. 다만 대상과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영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상황에선 교류방해 칩에 ‘먹힐’수도 있었다.

확실히 S등급 제노스 한 명만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든든할 것 같았다. 하지만 블라스트에 소속된 제노스 중에서도 S등급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몸값이 어마어마한 건 둘째 치고 접선 자체가 힘들었다. 허나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같이 일하는 입장에선 솔직히 S등급보다 A등급이 더 나았다. 그리고 에이나르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는 다행히도 정신감응능력과 염동력이 모두 A등급이었다. A등급도 3세대 중에서는 드문 경우에 속했다.

“그런데.”

남자가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에이나르는 후다닥 보고 있던 등급표를 다른 서류들 사이에 끼워 넣으며 대답했다.

“네, 뭡니까?”

“무슨 일을 맡기려는 건지 대충이라도 말해 주면 안되겠습니까.”

“아, 얘기 못 들으셨…나요?”

“메일을 보내 준다고 해서 기다렸는데 오늘 아침까지도 안 오더군요.”

당연히 안 갔겠지. 안 보냈으니까.

에이나르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일을 거절할 때에 대비해서 일단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고 그 뒤에 자세한 내용을 알려 줄 심산인 거다. 그래서 에이나르도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비크까지 오는 동안 절대로 구체적인 일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아마 가 보면 아실 겁니다.”

에이나르는 최대한 조심스레 말했다. 대체 얼마나 엄청난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꽁꽁 숨기는 거냐, 대충이라도 알아야 뭘 할 거 아니냐고 투덜거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남자는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남자를 보며 에이나르는 또 한 번 무릎 위의 종이 뭉치를 뒤적였다. 자신이 정말 제대로 데려가는 게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에이나르는 종종 뉴스에서 전쟁 지대를 누비는 블라스트 소속 용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탄창이 주렁주렁 매달린 조끼를 입고 커다란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공격해 오는 무리들뿐만 아니라 투항해 오는 무리들을 향해서도 망설임 없이 기관총을 난사해 대는 모습이 가히 살인 기계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무리들이었다. 회사에서 발급해 준 살인 라이선스가 그들의 학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무자비한 블라스트의 용병들 위에 제노스가 있었다. 일반 용병들이 돈을 위해 사람을 죽였다면 제노스는 사람을 죽이기 위해 블라스트에 들어갔다는 말이 있다. 오죽했으면 제노스로만 구성된 특수 부대의 명칭이 제노사이드3)였겠는가.

그러니 에질스타디르로 가서 블라스트 소속의 제노스를 만나, 그를 차에 태워 비크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에이나르가 제발 살려달라고 오스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질스타디르에 도착해서도 블라스트에서 보낸 참고용 자료들은 팽개쳐 두고 휴대폰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보내기에 바빴다. 이걸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다들 잘 지내라고.

“마지막이라니? 왕자가 결국 널 잡아먹겠대?”

“그게 아니라 드디어 비서실에서 해고당한 거겠지.”

“죽으러 가는 거냐.”

“선물 사 와, 에이나르.”

속도 모르고 놀려 대는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사정 설명도 못하고 한숨만 내쉬는데 빨간 양철 지붕을 올린 목조 주택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나왔다. 처음엔 그 남자가 아닌 줄 알았다. 잠깐 놀러온 친구거나 하우스 메이트일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여태껏 에이나르가 봐왔던 블라스트 소속의 용병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했으며 머리를 짧게 깎았거나 아예 밀어 버렸다. 콧수염이나 턱수염 둘 중에 하나는 꼭 기르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남자는 키가 크다는 것 외에는 어떤 항목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체형은 날씬한 편이었고 머리는 시청 직원처럼 단정했다. 수염도 기르지 않았고 선글라스는커녕 안경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 보였다. 분명 스물여섯이라고 들었는데 절대 그 정도로 보이지 않았다. 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자신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래서 아예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쳐다만 보고 있었더니 남자가 먼저 차로 다가와 창문을 두드렸다.

“누굴 만나러 왔습니까.”

그는 영어가 아닌 노르드어로 물었다. 까만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새벽의 어두운 숲 같다고 에이나르는 생각했다. 동시에 제노스(xenos)4)라는 호칭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건 그들의 외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남자를 가까이에서 보자마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역시 제노스구나─ 라고. 그건 그의 이질적인 외모 때문일 수도 있었고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 때문이건 간에 그들은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곳 아이슬란드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어떠한 곳에 가더라도 아마 그러할 터였다.

***

차는 아이슬란드의 남쪽 끝으로 향했다. 1번 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새 좌측으로 바다가 보였다. 검게 물든 모래사장을 보며 제이는 말했다.

“비크로군요.”

“와 본 적 있나요?”

“두 번 정도.”

이대로 디르홀레이까지 가는 건가 했는데 차는 검은 모래 해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오래전에 지어진 커다란 저택이 한 채 서 있었다.

“내리시죠.”

에이나르가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제이는 약간 머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이 저택의 주인은 오스카 스카르페딘손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 사람이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당사자라면 의뢰 내용이 생각보다 더 까다롭고 골치 아플 수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저택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키가 큰 중년 남자가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어서 오게.”

제이는 남자가 내미는 손을 붙잡으며 역시, 라고 생각했다. 오스카 스카르페딘손이 맞았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가이자 에시르의 전 왕비 라나 스카르페딘스도티르의 남동생.

“제이, 맞나? 제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네.”

“그래, 제이. 와줘서 고맙네.”

오스카는 정중한 미소로 인사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는 곧장 1층에 있는 자신의 서재로 제이를 안내했다.

“편하게 앉게.”

제이는 오스카가 권하는 대로 그의 책상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는 동안 불편하진 않았나 모르겠네.”

미리 준비해두었던 잔에 얼음을 넣고 위스키를 따르며 오스카가 말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제이는 그가 건네는 잔을 받으며 슬쩍 그의 생각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칩을 장착하고 있는 듯했다.

“갑작스레 놀랐겠지만, 내가 이틀 전에 해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제노스가 필요하다고 했더니 자네를 추천하더군.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이 모두 A등급이라고? 그런 귀한 능력을 가진 요원이 우리 아이슬란드에 머물고 있었다니 그것도 큰 행운이지. 참, 아이슬란드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3년 정도 됐습니다.”

“왜 하고많은 나라 중에 아이슬란드를 택한 거지?”

지난 3년간 이곳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추궁당하는 기분이 드는 건 질문하는 사람이 오스카 스카르페딘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조용한 게 마음에 들어서요.”

오스카는 제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곳이지.”

그는 가볍게 입술만 적신 뒤 위스키가 든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부탁할 건 요인 보호일세.”

제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보호 대상은 에시르의 제2 왕자고.”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경호 대상은 오스카 본인이거나 그의 부친인 스카르페딘 스텐판손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리욘… 왕자 말입니까?”

“그래. 맡아줄 수 있겠나? 기한은 길지 않아. 앞으로 한 달 정도일세. 만약 자네가 이 일을 수락한다면 자세한 이야기는 계약서 작성 후에 나누고 싶네만.”

…해리가 메일을 안 보낸 게 아니라 못 보낸 거였군.

위스키 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리는 아마 처음부터 자신에게 전달할 메일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내용 유출을 염려한 오스카가 자세한 의뢰 내용에 대해선 직접 메일을 주겠노라 약속한 뒤 고의로 발송을 하지 않았을 테니. 그러니 해리도 혼자서 대충 예상만 했겠지. 아마도 오스카나 그의 부친을 경호하는 일일 거라고. 확실히, 그 정도면 조금 까다롭긴 해도 크게 위험한 일은 아니다. 아마 보수도 나쁘지 않을 거고. 하지만 보호 대상이 왕자라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제이는 위스키 잔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만약 해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그는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을 것이다. 리욘의 경호를 맡는다는 건 결국 리우지엔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리우지엔의 능력치에 대해선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정신 감응 능력과 염동력이 모두 S등급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2세대, 여자, 아시아인이라는 슈퍼 프로바이더의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슈퍼 프로바이더들의 랭크는 항상 예외 없이 S등급이었다. 일대일로 대치하게 된다면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이?”

오스카가 나직한 목소리로 제이를 불렀다. 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말없이 유리잔 속에서 녹아가는 얼음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제이는 위스키 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계약서 주시죠.”

오스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제이를 바라보았다. 일단 얘기는 꺼내 봤지만 정말로 수락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계약서 안 써 두셨습니까?”

“아, 그래. 계약서 말이로군. 써 뒀지. 써 뒀고 말고.”

서랍에서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낸 오스카는 만년필과 함께 그것을 제이에게 내밀었다. 계약서에는 계약 기간과 금액만 적혀 있었다. 이건 아마 해리와 사전에 이야기를 끝낸 부분일 것이다. 나머지 상세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제이는 말없이 만년필의 캡을 열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사인했다는 걸 알면 해리는 분명 화를 낼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왕자가 제노스를 필요로 한다는 건 일반 경호원으론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자신이 못하는 건 다른 제노스들도 못 했다.

“여기 있습니다.”

제이는 사인을 끝낸 두 장의 계약서 중 한 장을 오스카에게 돌려주었다. 오스카는 아직 잉크도 채 마르지 않은 제이의 사인을 바라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이제 슬슬 나머지 여백을 채워 봐야겠지.”

계약서를 책상 서랍 안에 넣은 오스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사실 별일도 아닐세.” 하고 말했다.

“이틀 전에 카이옌의 장례 미사가 있었지. 그게 끝나자마자 리욘, 아니 제2 왕자 전하께서 제3 왕자인 프란츠의 방으로 가서 총을 쐈지 뭔가.”

제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잠시만요. 그러니까, 2왕자가 3왕자의 방으로 가서 총을 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그것도 형님의 장례 미사가 끝나자마자?”

“그렇게 바로는 아니었을 걸세. 삼십 분 정도는 지난 시점이었을 거야.”

“그런데 별일도 아니라고요?”

“별일도 아니지. 아무도 죽지 않고 다치지도 않았으니까.”

“…….”

“전하는 프란츠가 안고 있던 커다란 곰 인형을 쏜 것뿐이라네.”

심지어 아이가 안고 있는 인형을 총으로 쏜 것이란다. 제이가 알기로 프란츠 왕자는 올해 4살이 되었다.

“…법정으로 가게 되면 살인 미수냐 아동학대냐에 따라 형량이 갈리겠군요.”

“절대 살인 미수는 아닐세.”

오스카는 딱 잘라 말했다.

“처음부터 그 곰 인형을 향해 쏜 거야. 자넨 모르겠지만 전하의 사격솜씨는 왕실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라네. 애초에 그건 경고용일 뿐이었어. 굳이 누군가를 다치거나 죽게 할 필요가 없었단 말일세. 물론 왕실에서는 단순 오발 사고로 처리했지만 말이야.”

“제2 왕자가 왕실 안에서 총을 들고 다니다 하필 제3 왕자의 방 안에서 오발 사고를 낼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오발 사고가 왕자의 짓이라곤 아무도 말 안 했네.”

아무렴 그렇겠지. 제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짧게 한숨 쉬었다. 늘 이런 일이 발생하면 억울한 건 총기 소지가 허락된 자들뿐이었다. 보나마나 제일 경력이 짧은 경호원이 뒤집어썼겠지. 그래도 어딜 가든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보상금을 얻었을 테니 경호원 입장에선 그리 나쁜 거래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번 일로 왕비가 굉장히 분노했네.”

“놀랍지 않은 얘기로군요.”

“제2 왕자는 미친 게 분명하다고, 저런 미치광이를 왕세자로 책봉할 셈이냐고 내내 폐하께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는군.”

왕비 입장에선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었다. 물론 오스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폐하께서는 일단 왕자 전하를 영국으로 보냈네. 왕비도 진정을 시켜야 했고 전하도 좀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야. 별로 이상할 건 없지. 전하는 매해 여름 방학이면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다 오곤 하셨으니까. 물론 전하의 경호원들도 모두 그곳으로 따라갔지.”

하지만 정말 왕자가 영국으로 갔다면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였을 리가 없다. 아마 대역을 구해 평소 왕자를 경호하던 경호팀들과 함께 영국으로 보냈으리라. 그리고 왕자는 다른 곳으로 빼돌려 또 다른 전문 요원을 붙여 철저히 보호할 생각인 거겠지. 흔히들 쓰는 방식이었다.

제이는 자신의 계약서에 적힌 계약 기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늘 날짜로부터 다음 달인 8월 말까지로 명시되어 있었다.

“왕립 사관학교 입교식이 다음 달 말인가 보군요.”

“그렇다네.”

“예정대로 입교해도 괜찮은 겁니까?”

“거긴 오히려 안전해. 외부인 통제가 가장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는 장소 중 한 군데니까. 일단 그 학교 건물 자체가 하나의 요새라고도 할 수 있겠지.”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시르 왕립 사관학교는 사실상 학교라기보다는 군대에 더 가깝다는 걸 제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말 딱 한 달 동안만 무사히 버티면 된다는 소리였다. 운이 좋으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갈 거고, 운이 나쁘면 한 달 내내 여기저기로 장소를 옮겨가며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왕비도 바보가 아니라면 섣불리 공격에 나서진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난 직후에 왕자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누구라도 제일 먼저 왕비를 의심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로 일이 심각해진다. 왕자가 문제가 아니라 에시르와 중국의 외교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는 그냥 전하만 지키면 되는 거야.”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오스카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만난 지 30분 만에 제이는 눈앞의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전하를 만나 봬야지. 에이나르가 안내할 걸세.”

오스카는 서재의 문을 열며 에이나르를 불렀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또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오스카는 혀를 차며 책상으로 돌아왔다. 그가 책상에 붙어있는 차임벨을 누르기 전에 제이는 자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알아서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에이나르에게 안내받는 게 좋을 걸세. 아마 응접실이나 다이닝 룸에 있을 거야.”

제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서재를 나섰다. 에이나르를 찾아 응접실로 갔으나 그는 그곳에 없었다. 다이닝 룸에도, 연결된 주방에도 이른 저녁 식사 준비에 한창인 노파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구슈?”

감자 껍질 깎는 손을 멈추지 않으며 노파가 물었다. 제이는 다이닝 룸을 나서려다 말고 바른 자세로 서서 대답했다.

“새로 온 경호원입니다.”

제이의 인사에 노파는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나르가 모시러 갔던 그 양반이로군.” 하고 아는 체를 했다.

“난 라일라라고 한다우. 리욘은 2층 서재 아니면 제 방에 있을 거야. 2층 제일 끝 방이 그 애 방이라우.”

말투로 봐선 왕자와 꽤 친밀한 사이인 듯했다. 왕자가 이 저택에 자주 머물렀으리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낱 고용인이 이렇듯 친근하게 왕자를 부르는 건 조금 의외였다. 어쩌면 왕자는 생각보다 유연한 사고를 지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제이는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서재는 텅 비어 있었다. 제이는 곧장 복도 끝에 위치한 왕자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 끝에는 마주보는 두 개의 방의 있었는데 어느 쪽이 왕자의 방인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겁도 없이 활짝 열어둔 문 안쪽으로 커다란 침대가 보였기 때문이다.

침대 위에는 장신의 남자가 엎드려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어 확인은 힘들었지만 제이는 그가 왕자임을 확신했다. 6피트를 훌쩍 넘는 큰 키도, 다부진 체격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금발이 그러했다. 리욘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던 제이는 잠시 후 조심스레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스카나 라일라가 아무 언질이 없었던 걸 보면 지금이 왕자의 제대로 된 취침 시간은 아닐 터였다. 아마도 잠깐 낮잠을 자는 중이겠지. 방문을 활짝 열어둔 걸 보면 자신을 기다리던 중에 잠이 든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 옆으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리욘이 베개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의 침대 옆에 서 있는 제이를 보자마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 왔지?”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깬 건 아닌지 리욘의 회색 눈동자는 안개 낀 새벽의 항구마냥 탁했다.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계속 거기 서서 내가 자고 있는 모습을 지켜본 거야?”

악취민데. 중얼거리며 리욘은 몸을 일으켰다. 힘겹게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고 앉은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벗어.”

예상치 못한 명령이었다. 물론 경계가 삼엄한 고용처에선 가끔 몸수색을 하는 경우가 있긴 했다. 특히 전쟁 중 기지에 투입될 경우 아군으로 위장한 적군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전 몸수색은 필수였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도 아니고, 만에 하나 자신이 왕비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 제노스라면 몸수색 정도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다. 굳이 옷을 벗겨 봐야 할 필요가 있나 망설이고 있자니 리욘이 한숨을 내쉬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난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해.”

그러니 성가시게 굴지 말고 빨리 벗으라는 투였다.

“일단 몸을 봐야하니까.”

그제야 제이는 속으로 아, 하고 중얼거렸다. 몸수색을 하려는 게 아니라 내 몸 상태를 보고 싶다는 거였나. 그런 거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요구였다. 앞으로 자신의 신변을 통째로 맡길 경호원이니 몸 상태를 비롯해 모든 능력치에 대해 한 번씩 점검을 해보고 싶겠지.

제이는 자신의 바버 재킷을 벗어 침대 헤드에 걸쳤다. 안에 입고 있던 얇은 검정색 티셔츠도 벗어서 헤드에 걸친 뒤 허리띠를 풀고 청바지를 벗었다. 청바지는 침대헤드에 걸치지 않고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상태로 제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정도면 됐냐는 뜻이었다. 리욘은 그런 제이를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더니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굉장한걸.”

아마도 몸 여기저기에 난 흉터와 상처를 보고 한 말인 듯했다.

“하드한 고객들이 많았나보군.”

“아무래도 그렇죠.”

정확히는 고객들이 하드하다기보다는 그 고객들을 노리고 덤벼드는 자들이 하드했던 거지만 어차피 그 얘기가 그 얘기였다.

“옷 입고 있을 땐 말라 보였는데 의외로 몸이 좋군. 그런데 사진으로 보던 거랑은 좀 다른데.”

사진이라면 아마도 어제 해리가 메일로 보낸 자신의 이력서 사진을 말하는 것일 테다. 제이가 기억하기로 거기에 붙어있는 사진은 자신이 22살에 갱신한 국제 운전면허증 사진과 동일했다.

“어릴 때 찍은 거라서요.”

“그래?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돈데.”

리욘은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컵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로 마신 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그는 “상관없어.” 하고 말했다.

“난 지금 쪽이 좀 더 취향이니까.”

아마 사진보단 실물이 좀 더 믿음직스럽단 뜻이겠지. 나름대로 해석해 가며 그의 말을 이해하고 있자니 리욘의 물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와.”

제이는 손에 들고 있던 청바지에 자신의 한쪽 다리를 꿰었다. 곧바로 리욘이 저지했다.

“아니, 그대로.”

제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이대로 오라니. 바지를 벗은 상태로 오라고?

내키지 않았으나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뭐, 그냥 무기라도 숨겼는지 확인해볼 생각인 거겠지. 지나치게 무방비한 고용인보단 차라리 이렇게 깐깐한 고용인이 일하기엔 편하다. 최소한 몸 사릴 줄은 안다는 얘기니까. 제이는 상황을 최대한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이번엔 왕자가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침대 위로 올라오란 소리였다. 제이의 머릿속에 과부하가 걸렸다. 이 상황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몸수색을 하려면 그냥 지금 이렇게 서 있는 상태로 하는 게 나을 텐데.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을 텐데.”

우두커니 침대 옆에 서 있기만 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짜증스레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이는 자신의 청바지를 손에 든 채 조심스레 침대에 걸터앉았다. 리욘이 그의 손에서 청바지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치더니 제이의 턱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쪽을 봐.”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수상해지고 있었다. 제이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왕자가 그를 붙들어 침대 위에 쓰러뜨린 뒤였다. 곧바로 입술이 겹쳐졌다. 자신의 혀에 리욘의 혀가 얽히는 순간 제이는 황급히 그의 가슴팍을 팔로 밀어냈다.

“잠시만요.”

“싫어.”

리욘은 짧게 대꾸한 뒤 다시 제이에게 키스했다. 젖은 입술이 반복해서 부딪쳤다 떨어졌고 그때마다 제이는 왕자를 불렀다. 그러나 왕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제이의 입 안으로 깊숙이 혀를 밀어 넣을 뿐이었다. 제이는 속수무책이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걷어찰 수도 없었고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할 수도 없었다. 염동력으로 움직임을 제어해 보려 했으나 지디스 칩을 장착하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왕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고객들이 이쪽은 별로 안 건드렸나 봐.”

문득 리욘이 입술을 떼며 말했다.

“네…?”

제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이 미소 지었다. 한쪽 눈꼬리에만 작게 주름이 잡혔다.

“입술이 부드럽다는 얘기야. 키스도 서툴고.”

순간 제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황급히 리욘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전하, 뭔가 오해가 있는,”

제이는 미처 말을 끝맺지 못한 채 크게 숨을 삼켰다. 리욘의 손이 속옷 안으로 들어온 탓이었다. 이제 정말로 안 되겠다 싶어 자신의 엉덩이로 향하는 그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려는 순간이었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제이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고개를 돌리자 활짝 열린 문 밖에서 에이나르가 사색이 되어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보면 몰라? 문 닫고 나가.”

리욘이 짜증스레 내뱉었다. 혹시나 에이나르가 정말로 문을 닫고 가 버릴까 제이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다행히 제이의 표정을 읽은 에이나르가 구르듯 방 안으로 달려 들어와 리욘을 붙잡았다.

“뭐하는 짓이야?”

“전하야말로 뭐하는 짓입니까. 아, 아무리 몸이 달았어도 그렇지 경호원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시면….”

“무슨 소리야?”

리욘이 에이나르의 팔을 뿌리치며 역정을 냈다.

“이건 내가 부른 녀석이야. 경호원 같은 게 아니라고.”

“티노라는 이름의 남창을 말씀하시는 거면 제가 방금 돌려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뭐?”

리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동안 에이나르를 가만히 쳐다본 그는 이번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래에 깔려 있는 제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이건 누군데.”

“말씀 드렸잖습니까, 경호원이라고. 제이입니다. 오늘부터 전하의 경호를 맡게 된….”

에이나르는 잠시 말을 멈췄다. 숨을 한 번 고른 뒤, 왕자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노스입니다.”

에이나르의 말에 리욘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어느덧 왕자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제노스… 그러니까 텔레키네시스 능력자입니다.”

에이나르는 어렵사리 그 단어들을 내뱉었다. 리욘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아래에 누워 있는 제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이내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쳤군.”

리욘은 그대로 제이의 몸 위에서 내려왔다. 그가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하는 사이 제이는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청바지를 집어 들었다. 청바지를 다 입고 침대 헤드에 걸려있는 티셔츠를 집어 드는 제이를 향해 에이나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뭐.”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단 왕자님 쪽이 더 안 괜찮아 보인다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에이나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이런 거 물어서 미안한데요, 제이… 그, 거기까지는 안 간 거죠? 그러니까 제이, 내 말은 그게, 혹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갔던 거면, 그러니까 그게,”

“삽입은 안 했습니다.”

다행히, 라고 제이는 티셔츠를 입으며 덧붙였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에이나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주저앉는 순간 욕실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이는 침대 헤드에 걸린 재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에이나르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하가 토하고 계신 것뿐입니다.”

그게 제일 신경 쓰이는데요─라고는 차마 말 할 수가 없었다. 제이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재킷을 걸친 뒤 왕자의 방을 나섰다.

***

저택의 저녁 식사 시간은 오후 여섯 시였다. 계절을 감안하면 꽤 이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라일라가 저녁 8시면 잠자리에 들거든요.”

제이와 함께 다이닝 룸으로 향하며 에이나르가 설명했다.

“대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준비해 두고 들어가니까요. 잠들기 전에 출출하다 싶으면 언제든 이곳으로 오면 됩니다.”

다이닝 룸에는 두 사람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식탁에 앉아 따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젊은 여자는 인기척이 들리자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제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한쪽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여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제이의 옆에 있는 에이나르로 옮겨갔다. 에이나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이에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베아테 소르스테인이에요.”

베아테가 손을 내밀며 말하자 에이나르가 옆에서 얼른 소개했다.

“전하의 약혼녀이십니다.”

곧바로 베아테가 덧붙였다.

“곧 파혼할지도 모르지만요.”

제이는 베아테의 손을 붙잡으며 짧게 인사했다.

“제이입니다.”

저야말로 곧 해고당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악수를 끝낸 베아테가 조금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아지스크라고 해서 작고 예쁜 동양인이 올 줄 알았는데.”

“실망시켜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실망했단 얘기가 아니니까. 그런데 좀 걱정되긴 하네요. 리욘이 좋아할 타입이라.”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런 타입의 ‘남자’야. 베아테.”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다이닝 룸 입구로 향했다.

“성별 모호 에일리언은 해당 안 된단 소리지.”

리욘은 비틀거리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가까운 의자 위에 주저앉은 그는 옆자리의 베아테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설령 내 취향이라고 해도 베아테 네가 걱정하는 포인트를 잘 모르겠는데. 네 목표는 왕비가 되는 거 아니었던가? 그럼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스바르트의 왕궁으로 달려가서 중국 여자의 치마폭에 감싸여 울고 있는 프란츠를 달래야지.”

“약 부작용 중에 헛소리도 있나요?”

베아테는 리욘의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에이나르를 향해 물었다. 뭔가 대답하려는 에이나르를 가로막으며 리욘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약 부작용 하니까 말인데, 에이나르. 저 약 너무 졸려.”

“좀 더 약한 걸로 지어 올까요?”

“뭐든 상관없으니 어떻게 좀 해 봐. 속도 안 좋아.”

“음… 전하. 약을 먹고 바로 술을 마시면 누구라도 속이 안 좋습니다.”

에이나르가 조심스레 내놓은 의견에 제이는 약간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왕자의 구토가 꼭 자신이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에일리언 취급하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면전에서 구토를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어차피 에일리언 취급은 익숙하기도 했고.

“그나저나 외숙부는?”

“아, 조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친구 분과 저녁 약속이 있으시다고요.”

“약속이라.”

리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에이나르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헛기침을 하는 사이 식탁 위로 음식들이 하나둘씩 차려지기 시작했다. 빵가루를 입힌 해덕(Haddock)5) 튀김과 호밀빵에 발라 먹는 양고기 파테처럼 익숙한 아이슬란드 요리도 있었고 프리카델레르라고 하는 덴마크식 미트볼과 히비드랍스코브라고 불리는 덴마크식 스튜처럼 낯선 요리도 있었다. 아이슬란드인 아버지와 덴마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라일라 덕분에 저택의 식탁 위에는 종종 덴마크 요리가 올라온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맛은 기가 막혔다.

맛있는 음식들과 더불어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정확히 오 분 동안은 그랬다.

“한 사람 죽일 때마다 얼마씩 받지?”

포크로 훈제 송어의 살을 짓이기며 리욘이 물었다.

“리욘.”

베아테가 낯을 찌푸리며 작게 약혼자의 이름을 불렀다. 에이나르도 당황한 표정으로 제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제이와 함께 에질스타디르의 자랑인 라가르플리오트 호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글쎄요. 일당으로 계산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 일당에 하루 동안 죽인 사람 수를 나누면 되겠군.”

제이의 대답에 리욘이 뭐가 문제냐는 듯 말했다.

“음, 죄송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서요.”

하루에 수백 명을 죽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의뢰 기간 내내 사람은커녕 개미새끼 한 마리 구경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평균을 내기가 어렵다고 하자 왕자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일당은 얼마지?”

“3년 전에는 보통 하루 2200달러에서 2600달러 사이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전쟁 중인 군사 지역에 파견됐을 때의 몸값이고 PSD(요인 경호팀)으로 일할 때는 통상 그 두 배 정도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물론 이번 오스카와의 계약으로 자신의 몸값이 역대 최고가를 갱신했다는 이야기도. 가뜩이나 제노스를 에일리언 취급하는 왕자였다. 그 에일리언이 한 달 간 자신을 경호하는 대가로 받아 가는 돈의 액수를 알게 되면 경멸의 정도가 극에 달할 것이다.

“2600달러라. 내가 기억하기론 3년 전에 우리 해군 하사급 한 달 치 월급이 2400달러 조금 못 된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돈으로 2200크론 정도였을 겁니다.”

“그럼 맞군.”

리욘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시 제이를 향해 물었다.

“너를 한 달 동안 고용할 돈이면 우리 군의 1개 소대를 한 달 간 움직일 수 있어. 네가 그 정도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하나?”

“그건 의뢰인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제이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 정도 값어치를 한다고 생각하면 그 돈을 주고 절 고용하면 되는 거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고용하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그럼 넌?”

리욘이 웃으며 되물었다.

“어차피 돈은 받았겠다, 그 값어치만큼 할 수 있으면 하는 거고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제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런 제이를 보며 리욘은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중국인 계집은 당장 날 어떻게 하지 못해. 물론 그건 너도 잘 알겠지. 그 말은 네가 그 돈을 받아가며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 식사가 끝나면 에질스타디르로 돌아가도록.”

“죄송하지만 그건 제 고용주가 허락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침착하게 대답하는 제이를 보며 리욘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 뒤뜰과 이어진 다이닝 룸의 후문을 열고 라일라가 들어왔다.

“오늘은 스퀴르(Skyr)6)가 아주 잘 만들어졌어.”

그녀는 흡족한 표정으로 쟁반 위의 스퀴르를 식탁에 앉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제이에게 스퀴르가 가득 담긴 컵을 건네며 그녀는 뒤늦게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경호원 양반이 그 뭐야, 제노슨가 하는 그거라면서? 그럼 오늘 내가 준비한 잼이 뭔지 한번 알아 맞혀 볼라우?”

제이는 컵을 받아든 채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난처한 표정을 깨달은 에이나르가 얼른 손을 저으며 “그건 힘들어요, 라일라.” 하고 말했다.

“라일라가 하고 있는 목걸이에는 지디스 칩이 장착 돼 있잖아요. 그게 있으면 제노스들은 생각을 읽을 수가 없어요.”

“그래? 그럼 보통 사람이랑 하나도 다를 게 없겠구먼.”

“그렇지는 않아요, 라일라. 제노스들은 그거 말고도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요.”

베아테가 뻑뻑한 스퀴르를 스푼으로 휘저으며 말했다.

“제노스는 남자도 애를 낳을 수 있어요. 아주 특별한 능력이죠.”

“그것도 일부입니다. 모두가 다 가능한 건 아니라서요.”

제이의 말에 베아테가 “그래요?” 하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럼 제이는 어때요?”

여전히 스퀴르를 휘저으며 베아테가 물었다. 제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신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대답을 찾아내야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순간 간드러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다이닝 룸 안을 뒤흔들었다.

First thing, first, I’m a white chick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