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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88)화 (288/317)

후작이 그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나로 가득 차 있는 신비한 공간. 그리고 성전.

미아블레 후작이 두 마리의 드래곤을 번갈아 확인한 뒤 작게 중얼거렸다.

“소공작은…… 이들이 블랑셰의 후속이라고 믿는 겁니까?”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을까요? 블랑셰는 동물이라고 했으니까요.”

미아블레 후작은 제 손아귀에서 계속 웅웅거리는 레갈리아를 꼭 쥔 채로 숨을 삼켰다.

이온은 아직도 주저함이 남아 있는 그를 위해 욤뇽이를 안은 채로 어미 드래곤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전에 마기에 잠식되어서 몸이 검게 얼룩덜룩해져 있던 어미 드래곤은 어느새 하얀 몸체를 되찾은 채였다.

그것을 보며 이온은 심장이 살짝 뛰는 것을 느꼈지만, 겨우 가라앉히며 앉아서 두 손으로 왕관을 쥐고 있는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그 왕관, 혹시 후작님께 건네줄 수 있겠어?”

“끼.”

이건 내 건데.

외마디가 대충 그런 의미처럼 들렸다. 거부의 의미임을 안 이온은 난감함에 후작을 돌아보았다.

“후작님, 차라리 여기 와서 레갈리아를 보여 주는 게 어떨까요.”

“…….”

후작은 영 내키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지만, 일단 이온의 곁으로 걸어왔다.

그러고 여전히 웅웅 떨고 있는 레갈리아를 어미 드래곤의 앞에 내밀자, 어미 드래곤이 가늠을 하는 듯이 눈으로 그것을 이리저리 살폈다.

잠시 뒤 레갈리아 주변으로 둥글고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생기더니 두둥실 떠올랐다.

이후 생겨난 변화에 후작이 눈을 크게 떴다.

“……!”

조그마한 장식품에 불과해 보였던 레갈리아가 본래의 크기만큼 커졌다.

그러니까, 황실에서 쓰는 레갈리아만큼이나.

이후 어미 드래곤의 품에 있던 왕관 역시 동일한 과정을 거쳐 쑥 커졌다.

사람 머리는 통과할 것처럼 생겼던 본래 왕관의 모습은, 어미 드래곤에 딱 맞을 것만 같이 생겼다.

이온은 게으르게 배를 대고 바닥에 누워 있던 어미 드래곤이 허공에 떠오른 왕관과 레갈리아를 올려다보는 신비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미아블레 후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새 주인을 찾은 것처럼 본래의 모습을 내보이는 왕관과 레갈리아를 보던 그는, 문득 어미 드래곤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어미 드래곤이 무엇인가를 재촉하듯이 울음소리를 냈다.

“끼이.”

미아블레 후작은 기묘한 끌림을 느끼며 허공에 떠오른 왕관을 마법으로 끌어 내려 제 두 손에 넣었다.

“……커지는 걸 보니 정말 저희 가보가 맞는군요.”

미아블레 가문은 오랜 기간 성전의 지기로서, 블랑셰의 뜻을 받들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사제 집안이었다.

그러나 선조들의 뜻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만큼 시간이 지난 지금은 가문의 일원인 미아블레 후작마저 그런 건 허황한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보니 그 전설이 사실은 전설이 아님을, 현실임을 받아들였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는, 이내 고개를 들어 무언가 기다리는 기색인 어미 드래곤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후작은 어미 드래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 위에 왕관을 씌워 주었다.

와중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끼이.”

어미 드래곤이 손을 뻗어 레갈리아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마치 신나는 일을 만난 소녀처럼 한 바퀴 도는가 싶더니, 이내 천장에 뚫려 있던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

이온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탑에서 나온 이상한 존재가 비와 천둥 번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귀족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황궁이 불탄 것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돼 있던 터라 아직까지는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저런 존재가 밖으로 불쑥 튀어나가면 그때는 더 큰 소문이 날 터였다.

하지만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녀석은 빠르게 지상으로 올라갔다.

미아블레 후작이 그것을 확인하고는 이온과 품에 안겨 있던 욤뇽이까지 순간 이동을 시켜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밖으로 나가니 통로에 누워 있을 때보다 더 거대해진 어미 드래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의 열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몸체와 활짝 펼친 날개…….

성전 터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늘을 높게 날아오른 그것을 올려다보는 순간, 황성 내에 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이이이이이…….”

마치 누군가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가 깊게 울려 퍼짐과 동시에 주변에 하얀빛이 퍼졌다. 너른 황성을 뒤덮는 빛을 올려다본 미아블레 후작이 중얼거렸다.

“결계…….”

사라졌던 내황성의 결계가 복구되었다.

본래 황궁이 있어야 할 자리 위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온은 제 품에 여전히 안겨 있는 흰빛의 드래곤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너도 저런 마법을 쓸 줄 알아?”

“끼이.”

긍정의 의미로 욤뇽이가 얼굴을 비벼 왔다. 이온은 그런 녀석을 꼭 안았다. 그러는 사이 후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어미 드래곤을 경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성에 있는 다른 이들도 드래곤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조금씩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온이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이 전설의 동물 블랑셰와 성전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겠다고.

* * *

며칠 뒤.

예상한 대로 버니언은 황성에 나타난 경이로운 존재에 들떠서 제가 성군이 될 조짐이라며, 성전의 부활에 대해 선포했다.

‘성군이라.’

이온은 그 소식을 들으며 어이없기도 했으나 버니언의 재수 없는 면상이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니 적당히 넘겼다. 어차피 오래가지도 못할 것, 지금을 즐기라고 내버려 둬도 되지 않겠나.

대신 이온은 착실하게 제 계획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다.

저택 정문이 보이는 창가에 서 있던 이온은 피에트로 후작을 태운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1층으로 내려갔다.

북부의 귀족들은 그곳에 틀어박혀서 거의 나오지 않는 터라, 이온도 피에트로 후작을 가까이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꼬장꼬장한 늙은이라는 평판이 있는 피에트로 후작은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그렇게 평범하지 않아 보였다.

깔끔하게 올린 포마드의 머리와 한 치 흐트러짐 없는 백색 슈트, 그리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주름 하나 없는 구두, 꼬장꼬장함의 상징처럼 보이는 짧은 지팡이까지.

그를 보는 순간 상대가 그리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이온은 저절로 긴장해 버렸다. 그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옆에 서 있는 크레이거 공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가 작게 속삭였다.

“혼자서 괜찮겠느냐.”

염려가 담긴 말에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잠시 뒤 절도 있는 걸음으로 저택 앞으로 걸어오는 피에트로 후작이 크레이거 공작을 보면서 살며시 고개 숙였다.

“저택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어서 오시게. ……이렇게 따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

크레이거 공작이 뒤에 덧붙인 말에 피에트로 후작은 의미 모를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온은 그에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숙였다.

“대공 전하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크레이거가의 장남, 이온 크레이거입니다.”

‘대공 전하’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피에트로 후작의 얼굴에 잠시 암운이 거쳤다가 지나갔다.

그도 카밀루스의 상태가 어떤지 알고 있는 것일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온은 그렇지만 딱히 티 내지 않고 먼저 다가가 후작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응접실로 가시지요.”

“고맙습니다, 소공작.”

듣기로 피에트로 후작은 상당히 호전적인 성향의 귀족이라고 들었다.

비단 카밀루스가 있었던 아이오딘만이 아니라 북부 대부분이 몬스터들이 넘쳐나는 척박한 환경이다.

그 때문에 황실로서도 몇몇 지역에는 자위대 성격의 기사단 구성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피에트로 후작령이다.

그런 것을 따져 보자면 북부의 실력자라는 평가가 괜히 붙은 것은 아닐 터.

이온은 피에트로 후작과 응접실에서 마주 앉은 뒤, 차가 준비되는 동안 내내 저를 향한 그의 지긋한 눈빛 앞에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여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응접실에 둘만 남았을 때, 먼저 입을 연 건 의외로 피에트로 후작이었다.

“대공께서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까지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아까 지나가다가 가볍게 한 인사를 기억하고 묻는 말이었다.

이온은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일단 대답했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내내 아이오딘에 계셨을 대공께서 친교를 쌓아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이 피에트로 후작가의 은인이십니다.”

“은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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