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춥고, 비위생적이었다.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그의 지적에 이온이 페드로를 확인했다. 당신도 뭐라 말을 해 줬으면 한다는 의미가 담긴 눈과 마주치자 페드로가 다소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에렌스트 경의 옷으로 감싸긴 했으나 확실히 아직 씻기지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에렌스트 경의 말대로 불타도 살아 움직이는 저 몬스터가 더 날뛴다면…… 하지만 카밀루스가 돌아오지 않아 계속 시간이 지연된다면 빠져나가는 길이 요원해질 수 있었다.
“…….”
“페드로.”
어떤 말을 선뜻 내뱉지 못하는 페드로를 보면서 이온이 이름을 불렀다.
페드로는 확실히 갈등하고 있었다.
카밀루스가 태후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뒤 이 아이를 신경 쓰고 있음을 은연중 드러냈었다.
그 때문에 이 아이를 완전히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만약 카밀루스를 기다리다가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당연히 편치 못하리라.
주저하던 페드로가 에렌스트 경과 이온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여러 상황을 생각하면, 탑을 그만 빠져나가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뒤에서도 작게 소리가 울렸다.
“끼이이.”
마치 그게 맞는다는 듯이.
이온은 새하얀 드래곤을 내려다보며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욤뇽이 앞으로 걸어간 이온이 어미 드래곤을 감싸안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도 정말 카밀루스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몰라? 데려다줄 수 없는 거야?”
“끼이.”
“네 주인이잖아! 게다가 넌…… 어쨌든 나보다 아는 것도 훨씬 많잖아.”
“도련님.”
죄 없는 생명체를 다그치는 모습에 에렌스트 경이 팔을 붙잡자 이온이 손을 확 쳐 냈다.
“여기 카밀루스를 찾으러 왔어. 그런데 그냥 돌아가자고? 심지어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것도 확실한데!”
“…….”
이온의 날카로운 반응에 에렌스트 경도, 페드로도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온은 그런 그들의 심경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저주를 풀어 주기로 했어. 이대로 그냥 사라져 버릴 리가 없다고. 그게, 그게 카밀루스의…… 제일 염원이었었는데.”
이대로 마리엘이랑 사라지고 끝일 리가 없다.
그래서는 안 됐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이온 하나뿐인 듯했다.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들에서 그것을 느끼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어째서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건지 이온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가고 싶으면 가. 나 혼자서라도 이곳에 있을 거니까.”
그러자 에렌스트 경이 이온의 어깨를 붙들어 저를 마주 보게 했다.
“도련님, 냉정해지세요. 지금은…….”
이곳은 빠져나가야 할 때입니다.
그렇게 뒷말을 이으려 하는데, 차가운 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이온의 손이 에렌스트 경의 뺨을 친 것이었다.
“알렉사이.”
에렌스트 경의 이름을 부르는 이온의 초록빛 눈엔 살며시 눈물이 고였다.
“나한테 카밀루스를 버리는 선택지는 없어. 난 이곳에 남아 그를 기다릴 거야. 기사인 네가 내 곁을 지킬지 떠날지는 네 스스로 결정하면 그만인 일이야. 나에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 너에겐 없어.”
“…….”
단호한 의지를 내비친 이온이 이번엔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페드로도 가고 싶다면 가요. 강요하지 않을 테니까.”
이온도 알았다. 이곳에서 카밀루스를 한없이 기다린다고 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그렇지만 기억 속에서 카밀루스는 이 탑에서 언제나 자신을 기다려 주었었다.
이온이 몇 달 동안 오지 않았을 때에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그가 나타나기만을 바랐다.
자신을 만나자마자 눈물 지으며 껴안아 오던 어린 시절의 카밀루스를 알게 된 이상, 이온이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포기하기엔 일렀다.
이온이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바닥에 앉아 버리자, 에렌스트 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럴 때 이온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그는 페드로를 돌아보았다.
“먼저 내려가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고 이온에게 질문을 던졌다.
“공작가에 이 일을 알리는 것은 문제없겠지요, 도련님?”
“…….”
정말 카밀루스가 돌아오지 않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한 말이었다. 이온은 그것까지는 막을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을 받은 에렌스트 경이 페드로에게 부탁했다.
“공작 저로 돌아가거든 지금의 상황을 공작 각하께 알려 주십시오.”
“……그러지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페드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전히 울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얼떨결에 받은 아이이고, 저와 피로 연결되지도 않았으나 유난히 작고 가벼운 갓난쟁이를 보니 마음속에 책임감이 솟았다. 지금은 자주 보지 못하는 제 아이들의 핏덩이 시절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아주 오래된 기억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린 페드로는 그만 상념을 떨쳤다.
“대공께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한마디를 뱉고는 탑을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아이 울음소리도 사라지자 탑 안엔 빗소리가 들이닥쳤다. 이온이 제게 엉겨 오는 욤뇽이를 안는 모습을 보며 에렌스트 경이 창 쪽으로 다가가 바깥을 살폈다.
“…...온 황성의 기사들이 저 몬스터 하나를 잡겠다고 다 몰려든 모양이군요.”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혼란스럽네.”
한숨 섞인 말을 이온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아파서 끙끙대는 어미 드래곤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를 빼낸 뒤로 검게 물들었던 몸이 조금씩 개선되는 중이었다. 이온은 천천히 마기를 밀어 내는 어미 드래곤을 보며 미약하나마 안도했다.
“혹시 아이를 지키려고 마기를 못 밀어 내고 있었던 거야?”
“끼이이.”
어미 드래곤이 작게 울었다. 아마도 그렇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이온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고통스러웠을 텐데 이렇게 버텨 준 어미 드래곤이 대견했다. 그에 이온이 꼭 안아 주었다. 그러자 어미 드래곤 역시 위로하듯이 이온을 몸으로 감싸 안았다.
따뜻한 품속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카밀루스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못한다는 두려움에서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 기대어 잠들고 싶어질 만큼.
정말, 카밀루스가 오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불안감의 씨앗이 가슴속에 은밀히 심겼을 때였다.
이온은 제 눈앞에 살며시 떠오른 창을 확인하고는 눈을 흠칫 떴다.
[조건을 충족해 플레이어의 상태 이상 ‘저주’가 해제됩니다.]
[플레이어가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한 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였습니다. (3/3)]
[조건 1: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과 혈육을 제외한 제삼자로부터의 정보 습득 (완료)]
[조건 2: 주마등(사망 확률 90% 이상일 때 발동)의 재생]
[조건 3: □□의 저주 풀기]
[플레이어가 과거의 기억을 되찾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저주의 해제, 기억의 되찾음.
오랜 기간 염원해 왔던 두 가지 일이 한꺼번에 밀려온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머릿속으로 밀고 들어온 것은 안도의 감정이었다.
‘역시 카밀루스가 살아 있…….’
그렇지만 채 생각을 마무리하기 전이었다.
카밀루스가 생존해 있고, 자신 또한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의 감정을 누릴 새도 없이 엄청난 양의 기억들이 한순간에 몰아닥치며, 이온의 머리가 핑 돌기 시작했다.
뒤죽박죽으로 엉키면서 떠오르는 과거의 편린들 속에서 이온이 소리를 질렀다.
“아, 아……!”
지극한 두통이 확 밀려오면서 멀미가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온이 단숨에 과부하가 걸려 버린 머리를 움켜쥐었다.
“도련님? 도련님!”
갑작스러운 일에 바깥은 살피던 에렌스트 경이 이온에게 달려왔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이었다.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순서 없이 조각나 있는 기억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플레이어의 기억을 재생 중입니다.]
결국 시스템이 봉인해 두고 있던 기억이란 그의 전생이 아니라 이온 크레이거의 과거였다.
제일 먼저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찾은 것은 탑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나마도 아직은 순서가 없어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