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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43)화 (243/317)

“틀림없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럼 그 딱 한 번이 언제였는지 말해 줄 수 있나.”

버니언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한 번 더 짚어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굳이 아스타틴의 입을 막지는 않았다.

“황제 폐하께서 마나 수용력을 높여 주는 약을 구하라 명하셨을 때와 시기가 겹치는데, 공교롭게도 그 길드장 역시 같은 약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제야 버니언은 카밀루스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래, 그때 그 약…… 빼앗겼다고 했지?”

카밀루스는 비뚜름한 웃음을 비치며, 아스타틴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어떻게 생겼던가.”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이목구비도 머리 색 같은 것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체구나 키가 무척 작았습니다. 그리고 옆에 실력이 뛰어난 호위가 있었지요.”

“그때 빼앗긴 거, 병 모양이나 약물 색깔 같은 게 기억이 나나?”

“납니다.”

아스타틴의 대답에 버니언은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때, 이온이 품에서 미리 준비해 왔던 것을 꺼내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탁.

일부러 소리를 내어서.

아스타틴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버니언은 순간 영문 몰라 하는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뒤늦게야 테이블 위에 올려진 붉은색 약물이 든 병을 발견한 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시점에, 왜 이게 이온의 품에서 나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의 얼굴이었다.

“…….”

혼란스러워하는 버니언은 내버려 두고, 이온이 아스타틴을 돌아보았다.

“이거 아닙니까, 아스타틴 경?”

“……이온?”

버니언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온을 바라보았다. 신음처럼 제 이름을 내뱉는 상대에게 굳이 눈을 맞추지 않고 이온은 아스타틴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스타틴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대답이 나오자마자 버니언이 벌떡 일어나며 뇌성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왜 말이 안 되지?”

카밀루스의 반문에 버니언은 제 앞의 세 사람을 둘러보며 이를 갈았다.

“셋이 짜는 거 아니야? 이, 이온이, 이온이 그럴 리가…….”

이온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를 마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얼마 전 시종장을 내치신 그 사건의 전말을 알려 드릴까요, 폐하?”

“…….”

“폐하의 말씀이 정확했습니다. 바스커스 후작과 솔친 후작을 이간질한 수법과 비슷했으니까. 편지 빼돌리기 말입니다.”

“이온, 이온…….”

어느새 두 주먹을 꽉 쥔 그가 육안으로 보일 만큼 손을 바들바들 떨었고, 그 여파로 어깨까지 들썩였다.

이온은 문득 궁금해졌다. 믿었던 사람의 배신 중에서 무엇이 가장 충격적이었을까.

아마 이 순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버니언은 이미 벼랑 끝으로 몰려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특히 태후의 일탈이 알려진 이후로 술독에 빠져 있는 데다, 신경증까지 겹쳐졌다고 알려진 그다.

그래서 이전보다 이온에게 더 집착적으로 매달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은 믿을 만하다는 근거도 없이.

하지만 그가 가장 믿지 말았어야 하는 인물은 태후도, 카밀루스 클로델도 아니고 구혼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이온 크레이거였다.

“쓸모없이 분탕질을 즐기는 제가 할 만한 일이지요.”

이온이 말을 마치자 버니언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저히 현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 거짓말이지? 네가 솔친 후작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 같은 황실파인데.”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크레이거 가문과 언제나 한 묶음으로 묶이는 것은 아니라고?”

버니언은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카밀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니언에게 다가갔다. 갑자기 그가 제게 걸어오자 버니언은 무의식중에 뒷걸음을 쳤다.

“뭐야, 너……?”

“나와 그 내기를 할 때 약속한 게 있었지. 기억하나?”

“…….”

“소공작의 저주에 대해서 아는 정보를 내놔야지. 유세를 떨었으니 멍청하게 마리엘에게 속은 정보가 아니었으면 좋겠기는 한데.”

“네놈이, 마리엘인 줄 어떻게 알지?”

버니언은 카밀루스에게 원하는 답을 내놓기에 앞서 제가 궁금한 것에 대한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러자 카밀루스의 파란 눈의 온도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너야말로 더 아는 게 있나?”

버니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직 혼란을 담은 그의 눈이 이온을 향했다가 카밀루스에게 되돌아왔다.

카밀루스는 그가 무언가 알고 있음을 확신하고는 정확히 하나의 사건을 짚었다.

“얼마 전에 네 침실을 불태웠을 때.”

“…….”

“그때 들은 걸 전부 말해.”

그러나 버니언은 카밀루스의 이런 태도가 같잖다는 양 내뱉었다.

“내가 왜?”

그에 카밀루스가 지긋한 시선으로 노려보자 버니언이 큭, 하고 웃었다. 그는 카밀루스가 알고 싶어 안달 내는 무언가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듯싶었다.

“어차피 난 함정에 빠진 거잖아. 이온이 그 빌어먹을 새끼라는 걸 애초부터 너도 알고, 둘이 짜고 친 것일 텐데 내가 굳이 내기의 보상을 너한테 내줄 의무가 있나?”

“이온을 좋아한다고 떠들어 대더니 그런 거 하나로 적대하는 건가?”

선후 관계에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카밀루스는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대신 버니언이 그간 이온을 쫓아다니는 전적을 거론하자 발끈한 버니언이 카밀루스의 멱살을 와락 잡았다.

“아니, 씨발, 너만 이온을 위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러면서 주먹을 내지르는 버니언의 손목을 카밀루스가 중간에 잡아 꺾어 버렸다.

이온은 보다가 놀랐지만, 카밀루스는 이제는 보는 눈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버니언을 끌어당기며 버니언과 제가 서 있는 위치를 바꿨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대로 버니언의 머리를 테이블 위에 처박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밀루스가 버니언의 등을 제 몸으로 지그시 누르며 완전히 제압한 모습이 되었다.

이온은 안쪽에서 일어난 소음에 혹시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카밀루스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안쪽에 있는 아스타틴조차 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리 아스타틴과 이야기된 게 있었던 건가?’

제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이온은 카밀루스가 준비한 또 다른 경우가 있음을 알아챘다.

한편, 버니언은 제 눈앞에 이온에게 건네려던 반지가 든 유리 상자가 있는 걸 보고 난 뒤에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설마 다른 이들 앞에서도 카밀루스가 이런 행동을 할 줄 몰랐던 그는 목을 떨기 시작했다.

“뭐, 뭐야……! 너 감히…….”

“넌 방금 사람답게 대우받을 마지막 기회를 알아서 걷어찬 거야.”

“뭐?”

카밀루스가 제 입술을 버니언의 귓가에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네가 그간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난 너한테 나름의 연민을 가지고 있었어, 버니언.”

“무슨 개소리를…….”

“그래, 반성을 모르는 너한테는 개소리지. 하지만 진심으로 그랬다. 너나 나나 모두가 선황의 피해자일 뿐이니까.”

이온은 카밀루스가 버니언에게 건네는 말을 들으면서 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리고 버니언 역시 카밀루스에게 제압당해 얼굴이 새빨개진 와중에도 마음속에 박히는 무언가가 있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기가 죽고 나서도 너와 내가 싸울 수밖에 없도록 선황이 판을 깔아 둔 거라는 사실쯤은 너도 이미 눈치를 챘겠지.”

“…….”

“그래서 가급적 거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지만 매번 날 번민하게 한 것도 결국 너야.”

카밀루스 자신은 선황에게 학대를 받았고, 버니언은 제게 한 번도 닿지 않은 선황의 애정에 완전히 비뚤어져 버렸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어딘가 삐걱거리게 한 자는 결국 선황이었다.

카밀루스가 대공으로서의 지위를 휘두르고 싶지 않았던 이유에는 그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가 봐도 버니언은 오브라이언이라는 대제국을 이끌 만한 재목은 전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기연민에 빠져 반성을 할 줄을 몰랐다.

8년 전의 일에 대한 사죄도 없이 좋아한다면서 이온을 따라다니는 행태가, 솔직히 카밀루스의 눈에는 역겹게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해를 못 하겠지만, 적어도 네가 네 방식대로 이온을 꽤 위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

“아무리 봐도 넌 그냥 누굴 사랑할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일 뿐이야.”

카밀루스가 어딘지 그림자가 드리운 눈으로 버니언을 내려다보았다. 미간을 좁힌 그가 결론을 내렸다.

“발전조차 기대할 수 없지.”

그러자 이를 악물고 있던 버니언이 몸을 바둥거렸다. 하지만 카밀루스가 꼼짝도 하지 않자 그가 신경질을 부리며 원망의 말을 흘려냈다.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이온이랑 결혼할 수 있었어!”

이 순간에도 자신과 결혼 운운하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카밀루스가 하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들은 버니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진 이온이 실소를 흘렸다.

그 소리를 들은 버니언의 눈이 순간적으로 이온을 향했으나, 카밀루스는 보지 말라는 듯 손으로 그의 머리를 지그시 누르며 반박의 말을 쏟아 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내가 아니었어도 너는 이온이랑 결혼 못 했어. 이온은 너처럼 비뚤어진 사람이 전혀 아니거든.”

버니언이 카밀루스의 밑에서 사나운 욕설을 갈기며 더 몸부림쳤다. 그럴수록 카밀루스는 버니언이 듣기 싫어할 말들을 더욱 깊이 귀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앞으로 네가 황제로서 자격을 갖출 일도 없겠지. 자신의 상처가 제일 큰 줄 알고 주변의 무엇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이 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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