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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35)화 (235/317)

크레이거 공작이 그런 아들을 걱정스레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은 게냐, 이온?”

그러고 쫓아오려고 하는 그를 손짓으로 말리고 이온은 반쯤 도망치듯이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 밖으로 나왔는데도 기침이 점점 심해져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서둘러 홀을 가로질렀다.

응접실의 문이 아직 닫혀 있는 걸 확인한 이온은 기침 소리를 듣고 1층으로 급히 내려온 에렌스트 경의 부축을 받아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거의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눕고, 혼자가 되자 뒤늦게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핑 돌았다.

‘재니스, 마리엘…….’

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원래도 죽여야 하는 것들이지만.

이 불행의 시작을 만들었을 그들을, 정말로 용서하고 싶지 않아졌다.

* * *

“이온, 이온?”

누군가 자신을 살며시 흔들고,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이온이 눈을 살며시 떴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둠에 잠긴 밤이었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뒤 저도 모르는 사이 거의 정신을 잃듯이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던 이온은 가늘게 눈을 떴다가, 제 침대맡에 앉아 있는 카밀루스를 발견하고 잠기운을 다소간 거두어 내었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이온은 몽롱한 눈을 비볐다.

“응…… 무슨 일이야?”

물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카밀루스를 두 팔로 안았다. 그러자 평소와 같은 카밀루스의 체향이 코로 훅 끼쳤고, 그 역시 이온의 몸을 마주 껴안아 왔다.

낮에, 잠들기 전 아버지와의 대화 때문인지 힘겨웠던 이온은 가슴이 괜스레 먹먹해져 팔에 힘을 더해 그에게 더욱 매달렸다.

그러자 일어나자마자 이온이 저를 안아 주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카밀루스가 작게 웃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오늘따라 귀엽네…….”

그러면서 머리를 쓰다듬는데, 역시 다정한 손길이 좋아 이온은 그에게 더 깊게 기대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고 싶은 마음에 이온이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한창 기침하다가 잠든 탓에 아직 칼칼한 목으로 침을 삼키며 나직이 물었다.

“이 밤에 갑자기 왜 깨운 거야.”

“혹시 몰라 말해 두고 가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 나중에 페드로가 찾으면 네가 알려 주기도 해야 하고.”

“……어디 가?”

품에 안겨서 눈을 슬쩍 감았던 이온이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고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을 품에서 살짝 떼어 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태후를 살피러 가야 할 거 같아. 설마 자느라 낮에 노아기사단 단장이 찾아왔다는 것도 잊어버린 건 아니지?”

“아…….”

아직 잠에 잠겨 있던 머리가 순간적으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이온은 이번에야말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잠을 완전히 달아나게 한 뒤, 흐물흐물했던 몸을 세워 침대에 걸터앉았다.

태후를 보러 간다면 당연히 내황성으로 향한다는 소리일 텐데, 카밀루스의 옷차림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이온은 상체에 셔츠만 걸친 그를 보면서 대충 어떻게 가려는지 예상했다.

“몰래, 다녀오려고?”

카밀루스는 한 번 짧게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지금 태후궁에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한다고 하니 말이야.”

“……그러다 누구한테 들키면.”

“그럴 리가 있어? 재니스나 마리엘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상에야 별일 없을 거야. 정말로 태후의 상태만 보고 올 예정이니까.”

“잠깐, 잠깐, 카밀루스.”

대답을 듣던 이온은 손을 흔들다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머리가 좀 뻑뻑하게 돌아가는 탓에 정리가 잘 안 됐지만, 일단 이렇게 아무 말도 안 듣고 카밀루스를 보낼 수는 없었다.

다행히 카밀루스는 훌쩍 일어나 가 버리지 않고 이온이 다음 말을 꺼내길 기다려 주었다. 그에 이온은 차분히 생각한 뒤 겨우 적절한 질문을 찾아 입 밖으로 냈다.

“낮에 정확히 무슨 말을 들었는데?”

“네 들은 데까지만이라도 아마 예상은 했겠지만…… 태후가 걸렸다는 저주가 네 저주랑 아마 동일한 거 같다는 얘기였어.”

그의 말대로 여기까지는 충분히 유추하고 있었다. 이온만이 아니라 크레이거 공작 역시 같은 생각을 했을 만큼 명확한 이야기였으니까.

“현재 태후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고 하더군. 일단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고, 배 속의 아이는 사라진 상태인 거고.”

“……응.”

“그리고 발견됐을 당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그 약병이 있었다는데, 보니까 보라색 물약이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었어.”

이온은 그에 제 집무실 서랍에 있는 보라색 약물이 든 약병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도 마기와 마나가 동시에 녹아든 그것은 혼자서 보글보글 끓고 있을 터였다.

역시 그게 제 저주를 일으킨 원인인 걸까. 태후가 그 상태가 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 추측한 대로 그와 같은 약물을 먹고 자신이 저주에 걸려 이 상태가 됐다는 걸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 때문에 카밀루스도 태후에게 찾아가려는 것일 터였다. 태후의 상태를 확인하면, 이온의 저주에 대해 분명 더 많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버니언은 그냥 놔두라고 관심 끄고 있다는데 칼은 그대로 두면 정말로 죽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더군. 어쨌든 그에 대해서 대충 말로 설명을 다 듣기는 했지만 직접 봐야 할 거 같아.”

“……그런데 카밀루스, 그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물론 아니지. 그렇지만 그자가 가져온 약병 같은 것은 신뢰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먼저 그에게 말했던 것은 아니니까.”

이온은 그래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가 마지못해 동의의 표시를 했다.

“그렇긴 하지. 그럼 차라리 페드로도 데려가면 안 돼? 아니면 날…….”

“이온, 넌 절대 안 돼.”

“…….”

카밀루스의 단호한 말에 이온은 불만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구기며 솔직하지 못한 카밀루스에 대한 불만을 얘기했다.

“너도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러니까 나도, 페드로도 안 데려가려는 거잖아.”

“이온.”

“만약에 네가 잘못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건데?”

밤이라 그런지 표현이 다소 격하게 나왔다.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가 작게 한숨 짓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왜 잘못되긴 왜 잘못돼.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응?”

다정한 목소리로 카밀루스가 계속해서 이온을 달랬다. 그에 이온은 눈길을 피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욤뇽이를 찾는 것이었으나 요즘엔 이온과 카밀루스 방을 전전하며 자는 녀석은 당장은 보이지 않았다.

하여 다시 카밀루스를 마주 보자 그가 이온의 늘어져 있는 왼손을 꽉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난 오히려 나보단 네가 위험할까 봐 더 걱정이야.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올 테니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려.”

“…….”

이온이 불퉁한 표정으로 아무 말 하지 않자 카밀루스가 푹 웃으며 물었다.

“화났다고 대답도 안 해 줄 거야?”

그에 이온이 얕게 한숨을 지었다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자기 전에 계속 생각했던 말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를 마주 보았다.

“카밀루스.”

“응?”

다정한 눈빛을 잃지 않고 저를 보는 카밀루스를 이온이 다시 껴안았다. 그의 머리를 끌어 안아 가슴에 기대게 한 이온이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는 영문 몰라 하면서도 어색함 없이 대꾸해 왔다.

“나도 사랑해. 근데 이번엔 이런 식으로 못 가게 하려고?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그게 아니라…….”

이온이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몰라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제가 의도하지 않게 음성에 약간의 물기가 섞여 버렸다. 그것을 금세 알아차린 카밀루스의 눈에 곧장 의문이 떠올랐다.

“이온?”

그러고 품에서 떨어져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에, 이온은 오히려 그를 더 꽉 안았다.

“나 다 알아. 네가 날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고 있는지. 날 위해서라면 정말 네 목숨을 바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카밀루스는 이온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무어라 대답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온이 사과의 말을 입에 올렸다.

“저번에 화내서 미안해.”

카밀루스가 저번 일이 뭔가 싶어 기억을 더듬는 기색을 보이자 이온이 덧붙였다.

“저번에, 네가 날 기만한 거냐고 물었던 거 말이야.”

“......그거 벌써 끝난 일 아닌가? 그딴 건 마음에 안 담아 둬도 돼. 그리고 내가 숨기는 거 때문에 네가 그런 마음 들었던 거면, 그건 내 탓이 맞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그렇게 말하는 카밀루스의 나직한 속삭임에도 이온은 왠지 목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받치는 느낌이었다.

이렇게나 다정한 너인데.

한순간이라도 그를 의심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사랑 앞에선 겁쟁이가 된다는 말은 이온에게도 똑같이 통하는 것인 터라, 이전에 그에게서 들었던 다짐을 다시 한번 확인받았다.

“언젠가 나한테, 전부 말해 줄 거지? 네가 가지고 있는 비밀들.”

“그래, 때가 되면.”

과연 그 때가 언제인지, 이온은 알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릴게.”

카밀루스는 이번에야말로 이온의 품에서 떨어져 그의 뺨을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네가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어딜 갈 수 있겠어. 그러니까 안심해도 돼. 어디서 무슨 일이 있든 돌아올 거니까.”

“……응.”

“그럼 서둘러 다녀올게.”

이온이 끄덕이자마자 미련 두지 않겠다는 의도인지 카밀루스는 곧장 사라졌다. 그리고 그 직후, 이온의 방 창문에 커다란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온은 그것이 카밀루스의 독수리임을 눈치채고는 조금 안심했다. 그가 그래도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 * *

독수리를 미리 날려 보내 침실의 상황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일단 침실과 연결된 작은 드레스룸에 들어섰다.

워낙 깊은 밤이라 방에 창문이 나 있기는 해도 무언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두움이 침식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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