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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14)화 (214/317)

“넌 자존심도 없어?”

이온의 음성에 저절로 짜증이 실렸다. 툭 뱉어 낸 그 말에 잠시 입을 움직이던 걸 멈추었던 카밀루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대꾸해 왔다.

“……내가 네 앞에서 그런 걸 내세워 봤자 뭐 해.”

이온의 입에서 하, 하고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잡힌 손을 통해 카밀루스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카밀루스의 눈이 흔들리고 있는 게 고스란히 보였으나 이온은 목구멍으로 울컥 올라오는 참지 않고 전부 쏟아 버렸다.

“내가 일방적으로 화낸 거잖아. 그럼 적어도 타이르기라도 해야지. 나한테 이런 식으로 계속 휘둘릴 거야?”

“…….”

“너 진짜 사람 돌게 한다.”

말하는 이온도 괜한 트집 잡기라는 걸 알았다.제게서 이런 말을 들으면 카밀루스가 상처받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러나 늘 필요 이상으로 제게 휘둘리는 그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이온이 그에게 원하는 건 한쪽이 일방적으로 참고 희생하는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그렇지만 이런 그의 반응을 보니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제가 고민했던 것이 그야말로 너무 쓸데없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그랬다.

평소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어디가 모자란 건 절대 아닌데, 이온의 앞에 서기만 하면 모든 요소를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다. 머릿속에서 이온이 좋아하면 좋은 거, 이온이 싫어하면 나쁜 거로 이분화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근데 그 와중에 이온이 아파하면 좋은 짓이든 나쁜 짓이든 가리지 않고 한다는, 절대 양보 안 하는 이상한 신념이 있어서 더 골 아팠다.

이런 놈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진 이온이 왼손을 지끈거리는 제 이마에 얹었다. 입 밖으로 저절로 푸념이 흘러나왔다.

“그간 내가 갈팡질팡하는 거 보면서 비웃었을 놈도 아니긴 하지, 넌……. 착해 빠져서.”

“내가 너한테 어떻게 그래.”

“그래. 바보니까 못 하지.”

이런 놈이 저를 기만할 의도로 뭔가를 숨겼으리라고 여기는 생각 자체가 완벽한 오류였던 거다.

이온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다시 숨이 차올라 힘겹게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자 기색을 알아차린 카밀루스가 이번엔 손을 잡아 주었다.

진짜로 이쪽의 눈치를 보게 됐는지 평소보다 미약한 힘이 흘러들어 왔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잔뜩 예민해진 몸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라, 이온은 다시 눈을 감았다.

잠들었던 이틀 동안 꾸었던 꿈이 눈꺼풀 안에 아직 어른거렸다.

“꿈에서 너인데 네가 아닌 사람을 봤어.”

“무슨 뜻이야?”

자각몽이라 그런지 유난히 생생했었다. 그렇지만 결론이 기억 안 난다. 그래서 나는 ‘문’을 통과했던가, 안 했던가.

‘그 문은 결국 탑의 문이었을까.’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이온은 시답잖은 대화를 이어 갔다.

“꿈속에서는 반대로 내가 황성 탑에 갇혔는데, 네가 구하러 온 거 있지? 근데 네가 재니스의 결계 때문에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거야.”

“……개꿈이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카밀루스가 무슨 표정인지 알 길 없었지만, 그의 손이 이온의 손을 더 꽉 잡는 게 느껴졌다.

제게 실려 오는 힘에 기묘한 안정감을 찾은 이온이 도로 눈을 감았다. 몽롱함에 취해 떠오르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너 진짜 멋대가리 없더라. 그래서 깼어.”

“현실의 내가 더 나아서 다행인 건가. 그래서 네가 잠에서 깬 거면……?”

그 질문을 듣자 이온은 어째선지 꿈속에서부터 열심히 억눌러 놨던 가슴속의 슬픔이 울컥 솟음을 자각했다. 그 순간 눈꺼풀 아래가 물기로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곧 닫힌 틈으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왜 슬픈 건가 생각해 보면, 답은 이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넌 날 사랑하고 있더라.”

“그것도…… 다행이다.”

“질리지도 않나 봐.”

이온이 우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되어 일부러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었을 때였다. 카밀루스가 이온의 눈가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닦아 주더니 진지한 고백을 읊었다.

“사랑해.”

그에 이온이 눈을 떴고, 그를 마주 보았다.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카밀루스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한 번 더 속삭여 왔다.

“사랑해, 이온.”

처음 듣는 말이 아닌데 어째서인지 그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 줘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카밀루스가 알맹이 없는 변명을 해 왔다.

“아직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지만 하나만 알아줘. 널 위해서였어. 어쩔 수가 없었어. 그때 나한테 남은 방법이 그거 하나뿐이었으니까.”

아직 실체를 알리기엔 어렵다. 하지만 믿어 달라.

상대가 카밀루스만 아니었다면 이온은 전혀 듣지도 않았을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제가 거의 유일하게 무조건 믿는 사람의 말이었다.

게다가 카밀루스의 너무 간절한 어조 때문인지, 호소력 있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그가 정말로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졌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며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건 대답해 줄 수 있는 거지? 내 기억 상실은 그거의 부작용이라고 추측하는 거야?”

“아마도.”

그렇구나.

이온은 다시 한번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카밀루스는 아마도 이 몸에 다른 이의 영혼이 들어찼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을 테니 저런 식으로 대꾸하는 것일 터다.

그렇다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입은 대체 누구의 것인가.

마지막에 배신자가 되는 사람은.

상대를 더 철저하게 속인 이는.

아마도 자신일 거라고, 이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른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바짝 말라 갈라질 지경인 안쪽이 쓰라렸다. 제 가슴만큼이나.

이온은 다시금 눈시울이 뜨거워지려는 것을 열심히 눈을 깜빡여 진정시켰다. 그러고 굳이 제가 넘보지 않아도 될 영역에 발을 들였다.

“그 시전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이상한 마법에 네 목숨을 걸었었어? 정말로?”

“……맞바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탑에서 막 나왔을 때라면 카밀루스가 정말로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을 시기다.

그런 때에 마법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마저 걸어야만 했던 그 예의 마법이 무엇이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분명해지는 사실은 그만큼 카밀루스가 이온 크레이거를 사랑했다는 거였다.

가지고 있는 제 전부를 털어 냈을 정도로.

그렇게 간절히 사랑했던 거였다.

그래서 카밀루스가 뒤이어 덧붙인 말이 이온에게는 더 아팠다.

“하지만 그때 그런 거, 지금도 후회는 안 해.”

차라리 후회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몹시도 못되고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걸 알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저절로 눈에 원망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온의 눈빛을 카밀루스는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그가 이온의 눈꼬리에 배어난 물기를 다시금 닦아 주며 미소했다.

“덕분에 가장 중요한 걸 얻었으니까…….”

카밀루스에게 그 마법은 정말 마지막 동아줄이었던 모양이다.

제아무리 썩어서 삭아 버렸더라도, 그것을 잡고 기어 올라가다가 추락하는 걸 알고 있더라도 필사적으로 잡을 수밖에 없는.

그만큼 간절했다는 소리겠지.

다 짐작을 하면서도 이온은 심술을 부렸다.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네가 네 목숨을 가볍게 생각할 때마다 화가 나 미치겠으니까.”

제 속마음을 숨기고, 그를 위하는 척하면서.

그래도 카밀루스의 다음 말을 듣고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안 해. 더는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어.”

‘할 수 없다.’라는 말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이온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려는 안도의 한숨을 꾹 참으며 그를 향한 꾸짖음을 이어 갔다.

어쨌든 여기서 멈출 수는 없기는 했기 때문에.

“네가 무모해질 때마다 나는 무서워. 만에 하나 네가 진짜로 죽어 버릴까 봐.”

“이온…….”

“남겨진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한데, 너는 그런 걸 왜 생각하질 않아? 왜?”

이온의 연이은 질책에 카밀루스는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다가 우물쭈물 대꾸해 왔다.

“그, 마나석 만드는 건 나한텐 그렇게 치명적인 것까지는 아니라서…… 드래곤 녀석도 대기를 시켜 놨었고.”

한마디로 자기는 꽤 안전한 환경에서 했다는 말인데, 이후로 이틀이나 고장 나 있던 카밀루스를 똑똑히 봤던 이온은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또 하겠다는 뜻?”

이온의 매서운 추궁에 카밀루스는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하, 하고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인정할게.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몰랐어. 내가 너무 무감했던 것 같다.”

그제야 이온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었다. 두 팔을 뻗자 카밀루스가 순순히 그의 팔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이온은 그를 와락 껴안았다.

“나도 사랑해, 카밀루스.”

이온의 고백에 카밀루스의 귀 끝이 붉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민망함을 숨기는 듯이 그 역시 이온의 몸을 깊이 끌어안아 이온의 시야를 가렸다.

가슴 깊이 끌어당겨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던 그가 숨 막힌다는 투덜거림을 듣고 나서야 겨우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어느 정도 유해지자, 카밀루스가 손으로 제 두 무릎을 짚고서 크게 한숨을 쉬었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또 양심 고백 할 게 있는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기, 이온, 그리고 할 말이 하나 더 있는데.”

이온은 그에 상체를 살며시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었다. 지쳐서 그런지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리 뻣뻣하지는 않아서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저주 강화 때문에 기절하는 건 문제이긴 해도, 아직 몸에 큰 변화는 없음을 깨달은 이온은 내심 안심하며 카밀루스에게 가볍게 대꾸했다.

“뭐 또 잘못했어?”

“응…….”

이번엔 무슨 사고를 쳤길래?

이온은 심부름할 돈으로 빵 사 먹은 어린아이처럼 의기소침해져 있는 카밀루스를 보면서 미간을 살짝 좁혔다.

“화 안 내고 들을 테니까 말해 봐.”

“그, 이번에 네가 쓰러진 건 네 저주가 강해져서 그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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