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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203)화 (203/317)

“……후작이 왜? 이전에도 교류가 있었어?” 

카밀루스가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온이 눈동자 굴러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아닐까 싶을 만큼 눈동자를 이리저리 옮기며 혼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이온의 어깨를 감싼 손을 꽉 잡아 왔다. 정신 차리라는 듯이.

“일단 방으로 돌아가자. 손목도 살펴야겠어.”

“아, 응.”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이온이 카밀루스에게서 벗어나고자 몸을 꿈틀거렸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 없이 놓아준 카밀루스가 이온이 갈아입을 옷이 놓인 쪽으로 걸어갈 때까지 뒤돌아서 있었다.

이온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그를 힐끗하며 입술을 괜히 우물거렸다. 그러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는데 손목이 아파 저도 모르게 잇새로 탄식을 흘렸을 때였다.

“많이 아파, 이온?”

곧바로 카밀루스가 물어 오는 것에 이온이 그를 살짝 곁눈질했다가 머리를 저었다.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실수한 거니까.”

어쩌면 퍽 냉정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이온은 제 말투가 순간 놀랄 만큼 딱딱했다는 걸 느끼고는 저 스스로 움찔했다.

카밀루스도 왜인지 선을 긋는 것 같은 그의 태도를 알아챘는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놀라게 해서 미…….”

그리고 습관적으로 사과하려는 그의 말허리를 이온이 끊어 버렸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라 했지?”

“…….”

카밀루스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런 그를 힐끗했던 이온이 하인들을 부르려 왼손으로 종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로 성큼 다가온 카밀루스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종이 짤랑, 하고 작게 울리긴 했지만 카밀루스가 종의 몸체를 잡는 바람에 밖에 들릴 만큼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이온이 뭐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작게 중얼거리듯 이야기했다.

“옷 입는 건 내가 도와주면 안 돼? 다른 사람이 네 몸 보는 거 싫은데.”

“대공께서 내 시중을 들겠다고?”

“지금 상황에서 신분 운운할 건 아닌 거 같은데. ……연인으로서 청하는 거니까.”

덧붙이는 말에 이온이 더는 뭐라고 하지 못하고 왼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대신 종을 내려놓고, 이온이 갈아입을 옷가지를 주워 제 팔에 걸쳤다.

이온은 제 속옷까지 펼쳐 보는 그를 보고 민망함을 느끼며 말 그대로 카밀루스의 시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카밀루스가 혹시나 흥분하면 어쩌나 하는 망상도 잠시 뇌리를 스쳤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속옷을 입을 때 자연스럽게 제 몸에 닿는 그의 손이나 지나치게 가까워진 몸 때문에 이온이 움찔대는 경우는 있었지만.

그리고 카밀루스가 마침내 이온의 드레스셔츠를 펼쳐 걸쳐 주었을 무렵이었다. 이온은 제 가슴에 닿을 것 같은 그의 손끝에 숨을 꾹 참았다.

긴장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 귀 끝이 빨개진 것을 보고, 이온의 등에 제 몸을 바짝 붙이고 있던 카밀루스가 속삭였다.

“너, 너무 날 의식하고 있는 거 같은데.”

“……셔츠를 이렇게 뒤에서 입혀 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또 넘어질까 봐 그러지.”

누가 들어도 핑계인 게 분명한 그 말에 이온이 카밀루스를 슬쩍 흘겼다. 그러고 괜히 울컥해서 투덜거리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황태후랑도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었어?”

그러자 카밀루스가 눈썹을 슥 들어 올렸다. 곧 입술 사이로 작게 실소를 흘린 그였다.

“역시, 좀 토라졌다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나?”

“…….”

이온은 괜히 실언을 했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에 쓸데없이 섬세한 손길로 셔츠 단추를 잠가 주며 카밀루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신경 쓸까 봐 말을 못 했어.”

“……말을 안 한 게 더 신경 쓰여. 대체 그 여자 치마는 왜 들친 거야?”

“기왕이면 소문에 실체가 붙는 게 나으니까.”

“그럼, 태후가 진짜로 너에게 반했어?”

그녀가 왜 그런 행위까지 허락했느냐는 말에 카밀루스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에게서 들려올 말이 무얼지 궁금해 빤히 쳐다보는 이온을 내려다보며 카밀루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럼?”

“황태후, 몰래 귀족 남자 하나를 사귀는 모양이던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발언에 이온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느릿하게 눈꺼풀을 여닫았다. 그러다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깃든 말투로 대꾸했다.

“그게 무슨…….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

황태후궁에도 많지는 않지만 적당한 소식통이 있었다. 그런데 황태후의 남자라니, 그런 큰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는 게 이온은 당황스러웠다.

카밀루스는 이온의 셔츠 단추를 마저 잠가 내리며 평연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태후가 그 남자를 극구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 그가 다치는 게 싫은 모양이지. 도와주는 대신 누군지 말해 달라고 했지만 끝내 함구하더군.”

“설마 불륜인 거야?”

“그래. 그리고 임신을 했었어.”

“그렇게까지라고……?”

임신했다는 걸 알아차릴 정도면 배가 어느 정도 나왔다는 소리일 터이다. 이 정도로 숨겼다면 정말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온이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카밀루스가 여유롭게 농을 걸어 왔다.

“축하를 받아야 할까? 조만간 내 애 하나가 생길지도 몰라. 그리고 아버지의 여자를 탐한 패륜아가 되게 생겼네.”

“……그 농담, 되게 재미없는데.”

이온이 노려보자 카밀루스가 시선을 피하더니 팔을 꿰라며 얼른 겉옷을 내밀었다.

“어쨌든 황태후, 생각보다 그렇게 만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더군.”

“그러게, 거래가 이상하게 성립해 버렸네.”

이온은 제 겉옷까지 단정히 정리해 주는 다정한 손길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그렇게 최악은 아닐지도 몰랐다. 만약 황태후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버니언은 황태후를 확실하게 버려야만 하는 상황으로 몰릴 테니까.

그 과정에서 카밀루스를 추문에 어떻게 안 휩쓸리게 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된다.

“주의해. 황태후가 거기서 더 뭔 짓을 하려고 한다면 그대로 당해 버릴지도 몰라. 물론 칼부림을 한다거나 하진 않을 테지만…….”

“정치적으로 뭔가 하려고 한다면 나락은 나 혼자만 가는 건 아니지. 태후 또한 같이 나락을 가 버릴 테니.”

이온의 지적에 카밀루스가 여기서 뭔가 파생되어 봤자 별거 있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도 그렇다. 게다가 그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난 황태후 상대를 찾아내기만 하면 문제가 없어. 최선을 다해 알아봐 줄 거잖아, 그렇지? 내가 불륜남이 되는 건 싫을 테니.”

이온이라는 믿는 구석이.

제 머릿속을 들추어 본 것처럼 이온이 방금 하던 생각을 정확히 꿰뚫은 그가 살며시 눈웃음마저 지어 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소공작.”

그러면서 이온의 옷소매에 달린 단추까지 전부 정리해 준 카밀루스가 옆으로 서더니 팔을 내밀었다.

그렇게 에스코트해 이온을 방으로 데려간 그가 우선 치유 마법으로 손목을 봐주었다. 살짝 부었던 것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이온이 아파하자 카밀루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뼈에 이상이 생긴 모양인데.”

그의 중얼거림에 이온은 괜스레 입술을 삐죽이며 원망하는 소리를 냈다.

“……너 때문이야.”

사실은 따뜻한 곳에 몸을 담갔다가 갑자기 찬 데로 나온 자신의, 그러니까 겨우 그 정도로도 현기증이 이는 제 몸의 연약함 때문이었지만 이온은 그냥 근거 없이 그를 탓했다.

그러자 연인의 투정을 귀엽게만 보는 카밀루스가 웃음소리를 내더니 이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충 상황을 넘기려 했다.

그의 애정 어린 손길에 그래도 마음이 조금 풀린 이온이 에렌스트 경이 부르러 간 의사가 오기까지의 막간을 이용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후작에게 편지가 왔다고 했지? 내용 보여 줄 수 있어?”

이온의 말에 카밀루스도 그제야 생각났다는 양 외마디 감탄사를 흘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하지만 내용은 평범해.”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온 그가 별 저항감 없이 이온에게 미아블레 후작에게서 온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를 쓰는 본 후작은 선황대 첫 번째 황후의 아우인, 조세프 미아블레라고 합니다.

편지로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되어 무척 송구스럽습니다. 대공께서 내내 수도의 크레이거 가문에 의탁하고 계신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미리 찾아뵙지 못한 데 대한 선처를 바랄 뿐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실 때쯤엔 전하께서 소식을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급히 수도에 들를 일이 있어 대략 일주일 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하여 만약 대공께서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다면 직접 인사를 드리고 싶군요.

―오랜 세월 아이오딘을 지켜 온 대공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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