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욤뇽이가 제가 지닌 이 기억을 보여 주는 이유가 대체 무언지 알 수 없었다. 그 의문을 입에 담으려 한 찰나였다.
뒤에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드래곤 새끼.”
“꾸!”
욤뇽이도, 이온도 방 안을 가로질러 들려온 그 소리에 흠칫했다. 특히 욤뇽이는 제 기억의 구슬을 가로채듯 꽉 안더니 이온의 품에 딱 달라붙았다.
마나 주입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는지 또 영상이 뚝 끊겼다. 이온이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침실로 건너가는 커넥팅 도어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곳에서 카밀루스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 주인한테 혼날까 봐 바들바들 떠는 욤뇽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온이 탁자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카밀루스를 눈으로 좇았다.
“언제…… 일어났어?”
딱히 소용이 없는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기척을 죽이고서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하여 작게 묻자 맞은편에 앉은 카밀루스가 출출하기라도 한지 상자에서 쿠키를 하나 꺼내 오독, 씹은 뒤 답했다.
“네가 여기 문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그래? 깊이 잠든 줄 알았는데.”
“원래 옆자리 비면 금방 깨. 특히 너랑 잘 땐.”
“…….”
다시 말하면 그와 같이 잠든 도중에는 도망치기 힘들다는 거다. 나중에 참고해야겠다.
이온이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카밀루스가 욤뇽이에게로 시선을 옮기는 게 보였다.
아마 영상의 일부를 본 듯, 카밀루스는 꽤 기분 나빠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대체 이온한테 뭘 보여 주는 거야? 설마 이온이랑 날 이간질하려고?”
“꾸꾸우!”
난 그런 짓 안 해!
욤뇽이가 그리 항변하듯이 곧장 화난 얼굴로 날개를 파르르 떨며 외쳤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했다.
“귀여운 척 그만하고 이온한테서 그만 떨어져. 여기 탁자 위로 올라와.”
그러자 욤뇽이가 고개를 들어 이온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금세라도 눈물을 글썽일 것만 같은 애잔한 표정은 덤이었다.
물빛 눈의 동공을 흔들며 자기 안 가냐고 묻는 얼굴을 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이온은 저도 모르게 욤뇽이의 통통한 몸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러고 빤히 카밀루스를 보자, 카밀루스가 날 선 한마디를 했다.
“네가 그러니까 그 녀석이 점점 더 버릇이 없어지는 거야.”
“그렇지만 혼나고 싶은 사람은 없을걸? 벌세우려고 했잖아.”
이온의 항변에 카밀루스가 하, 하는 한숨을 쉬었다. 제 연인이 저런 약삭빠른 녀석에게 넘어갔구나 하는, 탄식이었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굳이 안 통할 설득을 해서 시간을 버리기보다는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갔다.
“어쨌든, 그럼 그거 나도 같이 봐.”
이온은 품 안에 들어온 욤뇽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도 돼?”
그러자 눈을 굴려 카밀루스의 눈치를 한 번 살폈던 욤뇽이가 주인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흠칫하더니,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어째 내키지 않는데도 카밀루스의 눈빛이 무서워서 일단 끄덕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승낙은 승낙이니 이온도 이쯤에서 물러났다.
곧 기억의 구슬에서 다시금 영상이 떠올랐다.
짧은 시간 내에 세 번이나 봐서 그런지, 아니면 카밀루스가 앞에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 볼 때까지만 해도 잔뜩 긴장했던 이온은 다행히 이번엔 상대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진 채였다.
물론 그렇다고 긴장이나 탑이라는 걸 인식한 이후로 느꼈던 약간의 울렁거림이 완전히 가신 것은 결코 아니기는 했다.
특히나 카밀루스가 비치는 부분에서는 또다시 입술을 지분거리고 있었다.
마나석 언급이 나오는 부분이 나오자 이온이 살며시 물었다.
“이거 너 맞지? 실제 있었던 일도 맞는 거야?”
영상이 재생된 이후로 카밀루스는 별다른 말 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가 이온의 질문에 잠깐의 틈을 두었다가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맞아.”
욤뇽이가 조작을 했을 리가 없긴 했지만, 대답을 들은 이온의 낯빛이 가라앉았다.
설마 탑에 갇힌 상태에서 얌전히 키워졌을 거라고는 애초부터 기대도 안 했다. 그렇지만 맥락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나석을 만들기 위해 카밀루스는 아마 수없이 이런 식으로 피를 뽑혔던 것 같았다.
어쩌면 어린아이를 가둬 둔 본래의 이유가 바로 이런 짓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그에 이온이 가만히 카밀루스를 바라보며 뒷말을 기다렸으나 그는 자세한 설명은 하고 싶지 않은지 별로 궁금하지 않은 다른 말로 얼버무렸다.
“딱히, 죽겠다 싶은 위기가 온 적은 없었어. 그냥 기운이 없었던 것뿐이지.”
“그걸 말이라고…….”
이온이 잔소리를 하려고 하자 카밀루스가 빨리 영상을 보라면서 눈짓했다. 그러한 태도가 상당히 불만스러웠지만,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하니 일단 보는 데 집중했다.
이어진 장면에선 욤뇽이가 새파란 구슬 하나를 카밀루스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구슬 색은 비슷했지만 기억의 구슬과는 다르게 더 진한 파란색에, 바깥으로 은은한 연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그게 욤뇽이의 일부 마나를 뭉친 마나 구슬이라고 했다. 그것을 어린 카밀루스가 입에 삼키며 중얼거렸다.
〈너, 작아졌네…….〉
욤뇽이의 모습이 직접적으로 비치지는 않으니 어떤 상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 제 품의 욤뇽이가 작아진 것과 비슷한 현상이 있어났음을 알아챈 이온이 녀석을 슥 내려다보았다.
욤뇽이가 그에 순진하게 눈을 깜빡깜빡하는 걸 보며, 이온은 기특함에 녀석의 작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때도, 지금도 잘했다는 의미였다.
어쨌든 그렇게 마나 구슬을 카밀루스에게 먹인 욤뇽이는 어린 카밀루스의 옷깃을 살짝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힘겹게 일어나 욤뇽이가 끄는 대로 걸음을 터벅터벅 옮겼다.
곧 계단 앞에 선 카밀루스가 벽을 짚으며 한마디 했다.
〈나 힘든데, 다음에 놀아 주면 안 돼?〉
〈꾸욱.〉
하지만 욤뇽이가 계속 가자고 보챈 모양이었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아예 계단에 걸터앉으며 벽에 지친 몸을 기댔다.
〈어차피 난 이 탑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해, 바보야.〉
〈꾸?〉
왜냐고 묻는 욤뇽이의 순진한 반응에 카밀루스가 제 팔다리에 채워진 금제를 보였다.
〈이거 때문에. 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온몸에 고통이 덮쳐와……. 더는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누가 막 뜨거운 쇠꼬챙이로 안쪽을 휘저은 것처럼 그래.〉
아마 카밀루스는 몇 번 탈출을 시도한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시점엔 완전히 체념해 버린 것 같았다.
〈내 능력으론 절대 풀 수가 없어.〉
목소리가 꽤 덤덤했다.
〈꾸, 꾸.〉
욤뇽이가 오른쪽 발 위에 채워진 금제를 만지작거리자 카밀루스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듯이 욤뇽이의 손을 떼어 냈다.
〈너도 안 될걸. 웬만큼 강한 마법사들도 못 풀 거라고 했으니까.〉
〈꾸…….〉
〈그 정도로 강력하니 날 어디다 안 묶어 두고 탑 안에선 돌아다니게 그냥 놔두는 거야. 어차피 이 안에선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잖아.〉
외롭기 때문일까. 어린 카밀루스는 말이 좀 많았던 것 같았다. 말도 못 하는 욤뇽이를 데리고 이렇게 저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나마, 낫지. 조금, 조금은…… 자유로운 거니까.〉
자유.
탑 안에서의 한정된 자유. 구속된 가운데 아주 약간만 허락된 자유. 그걸 진짜 자유라고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여기선 별도 잘 보여. 마탑에서 오는 누나들이 가끔 별자리도 알려 주는데…… 찾다 보면 시간도 잘 가고.〉
물론 어린 카밀루스도 제게 주어진 자유의 모순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어진 중얼거림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은데.〉
〈……꾸우.〉
욤뇽이의 처진 울음소리를 들은 카밀루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곧 손으로 욤뇽이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니까 너 혼자 가.〉
결국 욤뇽이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러고 아래층으로 다 내려갔을 때쯤 카밀루스를 올려다보았다.
카밀루스는 움직일 힘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완전히 늘어진 채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뒤로 욤뇽이는 끝도 없는 나선형 계단을 내려갔다. 황성의 탑이 높은 만큼 한참을 움직인 뒤에야 탑의 문이 있는, 이온에게도 낯이 익은 1층에 도달했다.
그리고 이 영상의 핵심은 바로 그 직후에 있었다.
휙휙 주변을 둘러보던 욤뇽이가 한 일을 보고, 그때까지 조금 침울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카밀루스와 이온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욤뇽이는 이런 기억을 생각해 내고 꺼낸 자신이 아주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