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도 발톱을 드러낼 때가 됐다.”
그에 페드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카밀루스에게도 다 들릴 정도로 숨을 크게 삼켰다.
“대공…… 설마, 드디어 결심을 하신 겁니까?”
“내가 결심하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렇지만 늘 이온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붓는 카밀루스였기 때문에 페드로는 황도에 온 뒤로 내내 초조했었다.
혹시 그의 목적이 이온의 저주를 푸는 게 전부인 것은 아닌지, 그렇게 제가 해야 할 일이 끝나면 다시 북부로 돌아가 그곳에서 조용히 틀어박혀 살려고 하는 게 아닌지 하는 의심마저 들던 참이었다.
솔직히 이럴 거면 왜 수도에 이렇게 길게 머물러야 하는지 몰라 불만이 쌓이고도 있었다.
그런데 카밀루스는 그 일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처럼 말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양.
“이젠 얼마 남지 않았어. 이온의 계획 때문에 시기가 상당히 앞당겨졌다. 내 예상보다 판도가 훨씬 복잡해질 가능성 역시 있고. 그러니 이쪽은 더 단순하게 나가야지.”
정확하게 황위를 넘보겠다고 못 박는 선언은 아니었지만 그 말로도 충분했다. 페드로는 그가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는 의지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안심했다.
애초에 선황의 아무런 흠결 없는 적장자인 카밀루스가 이렇게 모든 걸 빼앗긴 채 산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페드로는 그가 지금껏 고통스럽게 살아온 만큼 반드시 본인의 자리를 찾기를 바랐다.
하여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공.”
그러자 카밀루스가 그에게 손가락을 까닥여 가까이 오게 하고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상세히 알려 주었다.
카밀루스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이야기에, 페드로는 오랜만에 의욕이 솟은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이 펴는 것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일침을 놓았다.
“중요한 일이니까 너무 흥분해서 일을 그르치면 곤란해, 아저씨.”
“제가 이래 봬도 사는 동안 대공보다 밥을 두 배 정도 먹었는데 그런 잔소리는 좀 심한 거 아닙니까?”
페드로의 반박에 카밀루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손을 살래살래 저어 그를 내보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페드로에게 일거리를 쥐여 준 카밀루스는, 그러나 방 안에 혼자 남자 서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방문에 달려 있는 잠금장치를 죄다 단단히 잠그는 것이었다.
카밀루스가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아저씨.”
큰 일거리를 줬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오늘 저녁까지 페드로는 이 방에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혼자서 할 일 또한 아니니 나머지 기사들도 역시 그동안은 제게 신경을 쓸 수 없겠지.
문이 잠겨 있는 걸 알아챈다 해도 늦은 시각일 테니 소란을 피우기는 어려울 터.
‘이번엔 정말로 따귀를 때리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밀루스는 뒤돌아 창문 근처로 갔다.
넓은 방 안과 커넥팅 도어로 이어지는 작은방의 창문과 출입문 등 문의 형태를 띤 모든 것을 전부 다 닫아걸었고, 누군가 안을 엿보지 못하도록 커튼까지 꼼꼼히 쳤다.
그때 작은방의 어딘가에서 뒹굴면서 자고 있던 드래곤 녀석이 카밀루스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 다가왔다.
“뀨우?”
카밀루스는 녀석이 제 어깨에 앉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의 서랍 이곳저곳을 뒤져 제가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냈다.
단도와 흰 끈, 그리고 수건. 마지막으로 하녀들이 일할 때 쓰려고 가져다 놓은 듯 작은 창고 같은 곁방에 처박혀 있던 나무 들통까지.
딱 봐도 수상쩍은 조합에 욤뇽이가 물빛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카밀루스의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카밀루스는 제게 닿는 녀석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결국 고개를 돌렸다가, 욤뇽이의 눈동자에서 의아스러움 내지는 두려움을 읽고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죽으려는 것은 아니니 호들갑 떨 것 없어. 어차피 넌 날 주인으로 따르긴 해도 좋아하진 않잖아.”
“꾸우…….”
“구경할 거면 어디 가서 고자질하지 말고 옆에서 가만히 있어. 내일 아침까지. 알겠나? 안 그러면 이제 너한테 내 마나 같은 건 헌납 안 해.”
대체 뭘 할 거냐는 표정으로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욤뇽이에게 적당한 경고를 남긴 카밀루스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 통을 내려놓은 카밀루스는 침대 헤드 쪽의 기둥에 흰 천의 한쪽 끝을 단단히 묶으면서 욤뇽이에게 물었다.
“너, 마나 구슬 만들 수 있지?”
질문을 들은 욤뇽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르는 척하다가 카밀루스의 눈총을 받고는 입 속에서 파란색 빛을 띠는 구슬 하나를 앙, 하는 소리와 함께 토해 냈다.
그러고는 그 구슬을 짧은 두 팔로 소중하게 꼭 안는 것에 카밀루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정 위험할 거 같으면 그걸 나한테 먹여.”
“꾸!”
제 마나를 달라는 소리에 욤뇽이가 눈을 치켜올리며 싫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카밀루스는 한숨을 쉬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알겠어. 만약 쓰게 되면 그거의 두 배는 줄 테니까.”
“꾸우?”
대체 뭘 하려고 그래?
욤뇽이가 영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 질문을 던졌으나 카밀루스는 단지 이 상황과 딱히 연관성이 없는 듯한 한마디를 했을 따름이었다.
“너도 이온이 아픈 건 싫지?”
“꾸우우…….”
이번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녀석의 모습에 카밀루스가 얼핏 웃음기를 띠었다.
“그럼 내 말을 따라야 해.”
그러면서도 긴장이 되는지 카밀루스가 깊은숨을 들이켰다.
이론은 알고, 또 그 과정을 수없이 지켜보기도 했지만 자신이 직접 해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8년 전보다 강해졌으니 결과물은 훨씬 좋을 것이리라고.
카밀루스는 흰 끈의 끝에 제 왼쪽 손목을 묶고 수건을 입 속에 쑤셔 넣고는 그게 재갈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물었다.
“꾸우……?”
마침내 묶인 왼손에 단도를 단단히 쥔 카밀루스 앞에서 욤뇽이가 몸을 기웃기웃했다.
카밀루스는 처신 잘하라는 듯이 녀석의 머리를 툭툭 친 뒤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칼을 쥔 왼손의 손등에 하얗게 뼈가 불거졌을 때, 카밀루스는 제 오른 손목을 그곳에 가져다 대었다.
파악!
칼끝이 손목을 깊이 파고들어 베어 낸 순간 선연한 붉은색의 피가 튀어 올랐다.
“꾸우! 꾸!”
피를 보고 놀란 욤뇽이가 소리치자 카밀루스가 그러지 말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카밀루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지기 시작하자 욤뇽이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물빛 눈동자에 옆에 놓아둔 들통에 카밀루스가 다량의 피를 쏟아 내는 장면이 비쳤다.
그렇지만 카밀루스는 이를 악물고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몸에서 피가 빠지는 이 감각은 사실 그에겐 꽤나 익숙한 것이었다.
〈어차피 넌 이 정도로 죽지 않는 괴물이라는 걸 이미 몇 번이나 증명했잖니.〉
환청처럼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왔다.
애써 기억 속에 묻어 놨던 재니스의 웃음기 어린 입꼬리가 떠올라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설마 이런 짓을 스스로 하게 될 줄은 자신도 예상치 못했다. 이런 고통은 더 이상 저를 찾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자처할 이유도 없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너한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것이든 감내할 수 있다. 그것이 설령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그 시간을 돌이키게 하는 일이라 하여도.
문득 가늘게 뜬 눈에 새하얀 드래곤이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매달고 저를 쳐다보는 모습이 비쳤다. 녀석은 제 마나를 뭉친 파란 구슬을 들고서 진짜로 제가 모아 둔 마나의 결정체를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며 갈등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카밀루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녀석이 아니었다.
이제는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도 휘청거리는 시야에 다른 존재가 하나 더 끼어들었다.
주변이 흐릿하게 보이는 가운데, 유독 혼자서만 선명한 무언가가.
그것은 수년 전 처음 접한 어느 사자(使者)의 메시지였다.
[급격한 마나 소모로 인하여 플레이어가 정신을 잃을 수 있습니다.]
[본 행위로 플레이어가 원하는 결괏값을 얻을 확률을 계산 중…….]
[……]
[현재 ‘이온 크레이거’가 사망할 확률은 27%입니다.]
[본 행위 이후 ‘이온 크레이거’가 사망할 확률이 기존보다 15% 감소할 수 있습니다. ※확정치는 아님.]
……신의 영역을 범한 죄인을 단죄하기 위해 불러내어진.
지난 몇 년 동안 수백, 수천 번을 봤지만 여전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하는 그 메시지들을 확인한 카밀루스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듯 눈을 꽉 감았다.
카앙…….
떨리는 손에서 이내 칼이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