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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81)화 (181/317)

“마리엘이랑 힘을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힘을 공유하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본인이 마법을 거의 못 쓰는 터라 겉핥기로만 알고 있는 페드로가 전혀 생소한 카밀루스의 말에 서둘러 설명을 요구했다.

그에 카밀루스는 머뭇거렸다. 지난번 마리엘이 약병을 건네어주다가 스치듯 접촉했을 때와 방금 전 재니스와 접촉했을 때, 카밀루스는 둘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한마디로 파동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사람의 몸에 흐르는 마나는 그 운용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문에 똑같이 운용하더라도 미묘하게 다른 흐름을 지니게 된다.

그를 감지하는 것은 순전히 감각적인 부분이라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그 흐름이 같아 보였다. 마리엘이 마기에 잠식된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러 경우의 수가 있겠지만 가장 흔한 건 역시 계약 마법으로 목숨을 비롯한 모든 걸 연결해 놓는 것이겠지. 실제로 두 사람이 매번 같이 다니지 않나.”

“개념은 알겠는데,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뭡니까?”

“그게 마리엘이 마기에 잠식되고도 버틸 수 있는 이유일지도…… 재니스를 숙주로 삼아서 말이야.”

말하면서도 카밀루스는 어딘지 꺼림칙했다. 그렇게 따지면 재니스는 마리엘에게 평생을 희생하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가 될 수 있나.

마탑주로서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을 가진 재니스였다. 약점을 잡힌 게 아니고서야 타인에게 그런 희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현재의 추측 이상은 딱히 내놓을 게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사실이면 두 사람의 관계가…….”

“교수와 조수의 관계가 바뀐 셈이지.”

“…….”

이 주객전도의 상황을 어찌 해석해야 할지 페드로도 난처한 모양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어색해지려는 찰나, 때마침 황태후궁 앞에 도착해 페드로가 얼른 앞으로 나아가 대공의 방문을 알렸다.

그러나 건물을 올려다보던 카밀루스는 황태후궁의 문이 채 열리기 전에, 건물의 주인과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버니언을 상대하느라 늦게 도착해서인지 황태후가 2층 복도에 나와 카밀루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카밀루스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웃어 보였다. 그러자 황태후가 흠칫 놀라 얼른 부채를 펴 본인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 뒤돌아서 안쪽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그 이상한 반응에 카밀루스는 내심 의문스러워했다.

‘날 정말로 기다렸나?’

고작 그 약병 하나가 그녀의 호기심을 그토록 자극했나.

그러한 생각은 잠시 후 밖으로 나온 태후궁 시녀장의 인사말과 함께 더는 잇지 못하게 되었다.

“어서 오십시오, 비렌시움 대공 전하.”

이전 두 차례 방문했을 때와 달리 묘하게 친절해 보이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카밀루스는 기분 좋은 예감을 받았다.

모든 게 계획대로 잘 흘러갈 것 같았다.

* * *

저택의 깊은 안쪽에서 나직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온은 그런 아버지의 집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는 중이었다.

문밖에서 어렴풋이 듣고 있는 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크레이거 공작이 아마 누군가에게 보낼 편지의 내용을 불러 주며 하인에게 쓰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슬슬 싸늘하게 느껴지는 공기에, 이온이 겉에 걸친 망토의 매무새를 꼼꼼히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계속 안으로 들어갈 타이밍을 재고 있던 이온은 심호흡하다가 침을 잘못 삼켜 기침 소리를 냈다.

“흡, 쿨럭…….”

컨디션이 안 좋을 때는 목구멍도 제 마음대로 안 돼서 가끔 이런 식으로 원하지 않을 때 기척을 내 버린다.

작은 소리였지만 안쪽에는 충분히 들릴 법해 저도 모르게 흠칫하는데, 역시나 안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그쳤다.

예상대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기이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크레이거 공작은 제 아들이 내내 서 있었던 것을 이제야 눈치챈 것에 당황한 표정이었다.

“예서 가만히 뭐 하고 있는 게냐?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얼마 전 일 때문에 이온은 아직 아버지를 평소처럼 대하기 영 껄끄러워 말소리를 흐렸다.

“그게, 아버지 일하시는 중인 것 같아서…….”

방해하면 안 되니까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리에 크레이거 공작이 미간을 좁혔다.

겨울이라 외풍 때문에 공기가 제법 찼다. 그는 제 아이가 얇은 망토를 걸치고서 떨고 있던 것을 심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공작이 이내 하인을 돌아보며 짧게 명했다.

“가 보거라.”

하인이 물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온은 제가 괜스레 아버지의 일을 방해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여 방에 들어가기 전에 눈치를 살피는 겸 공작에게 물었다.

“편지 쓰는 중이셨으면 제가 대신 써 드릴까요?”

“…….”

그에 크레이거 공작이 이온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이게 아닌가?’

사실 글씨를 쓰거나 책을 읽는 것과 같이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 따위는 자신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종종 있었다. 그 때문에 문맹을 자처하는 이들이 종종 있었지만, 크레이거 공작은 그런 방면으로는 꽤 트인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제 아들한테 편지를 쓰게 하는 건 싫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공작이 이온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들어오너라, 이온.”

말과 함께 크레이거 공작이 자연스럽게 이온을 제 집무실로 들였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책 냄새가 진하게 나는 안쪽으로 들어가자 과연 탁자 위엔 잉크와 편지지 등이 남아 있었다. 짐작했던 대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글씨를 써 두었을 편지지는 어디론가 치운 뒤였다. 이온이 내용을 보게 되는 걸 꺼리는 모양이었다.

기침 소리가 들린 후부터 틈이 있었던 건 그런 사정이었던 터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숨기면 오히려 궁금해지는 터라 이온은 소파에 앉으면서 공작에게 넌지시 물었다.

“누구한테 편지 쓰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그러자 마찬가지로 맞은편에 몸을 내린 크레이거 공작이 탁자 한편에 있던 다기들 중에서 새 잔을 이온의 앞에 두며 여상히 답했다.

“그래, 이제 슬슬 공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말이다.”

“네?”

하지만 그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이온이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속으로 그런 질문을 하며 멍한 표정을 지어 버렸다. 그는 아버지의 말을 작게 곱씹었다.

“공국으로 돌아가요?”

그야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자치령인 공국의 일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눈을 뜬 뒤로부터 언제나 황도에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배제해 놓고 있었던 부분이다.

이온이 설명을 요구하듯 공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크레이거 공작의 입에서 나온 것은 지극히 원론적인 이야기였다.

“공국의 일을 너무 미뤄 두었다. 그리고 이젠 선황과의 약속도 모두 지켰다 봐야겠지.”

선황과의 약속.

솔직히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이온은 이 정도로 발목을 잡힐 일인가 싶었지만, 그것이 제 친우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였던 부인의 명운을 좌우한 데 대한 속죄 의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람마다 신념의 기준점이란 늘 다른 것이니.

아마 크레이거 공작도 스스로의 충성이 과했다는 것을 알 터였다. 따라서 그의 마음에 따라 그 과함을 얼마든지 거두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명분만 사라진다면, 얼마든지.

그렇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이온은 선뜻 그러시냐고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런데.”

“아쉬운 게냐, 이온?”

질문을 받은 이온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밖에 안 떠올랐다.

그럼 카밀루스랑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그 질문을 떠올리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공작은 제가 느끼는 혼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온의 표정을 들여다보다가 앞에 놓인 잔에 조금 식은 차를 따라 주며 달래는 소리를 했다.

“걱정 말거라. 당장 갈 것은 아니고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단다.”

그렇지만 단지 시간이 남았다는 그 말이 이온에게 만족스럽게 들릴 리는 없었다.

“저한텐 할 일도 남아 있어요, 아버지.”

“물론이다. 우리 아들의 저주도 풀어야 하니.”

공작은 이온을 배려하는 척 그리 말했지만, 동문서답이었다. 예의 저주를 푸는 일이 끝나면 바로 돌아가겠다는 소리였으니까.

물론 아버지만 공국으로 보내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그가 이온을 가문의 후계로 생각하는 이상 당연히 설득은 쉽지 않을 터였다.

제가 황도를 떠난다는 건 너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서 그런가, 눈앞이 암담해지기까지 했다.

이온은 제 두 손을 무릎 위에서 모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제가 지금 할 말이 무엇인지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예고도 없이 맞이한 상황이지만 멍청하게 아무 말도 못 한 채 지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내 이온의 입이 열렸다.

“제 저주를 푸는 일 말고도요.”

그의 초록빛 눈이 크레이거 공작을 똑바로 마주했다.

“대공을, 아니, 카밀루스를…… 돕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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