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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58)화 (158/317)

* * * 

나선형의 계단은 아주 깊은 지하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것을 단지 내려다보는 행위만으로도 마치 제가 깊은 수렁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느낄 만큼.

‘현기증’이라는 증상을 시각화하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계단의 끝에 고여 있는 어둠에 시선을 향한 이온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용기를 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보았다.

한 발짝씩 뻗는데, 신기하게도 구름을 밟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동안 워낙 익숙해져 있어서 느끼지 못했는데, 아마 병색에 잠긴 몸은 그자체로 무거운 족쇄가 채워져 있는 상태와 같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이곳이 꿈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든가.

‘자각몽…….’

이온은 계단만 유난히 선명하게 보이는, 어두컴컴한 주변을 돌아보았다.

꿈을 꾸고 있다고 확실히 자각하고 있는 데다 스스로 움직일 수 있고, 그 안에서 생각도 할 수 있다니 무척이나 독특했다.

이온은 꿈 자체를 그리 많이 꾸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나마도 이렇게 꿈을 ‘경험’하거나 ‘통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지치기라도 한 걸까. 몇 계단 내려오지도 않아 그것이 굉장히 쓸데없는 짓처럼 느껴져 금방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계단을 내려가기도 싫어진 그는 그냥 층계에 걸터앉아 있었다.

꿈속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조용해서 소름마저 끼치는 곳이었다.

그대로 시간이 조금 지나니 이유 없이 무서워진 이온은 제 무릎을 끌어안고 팔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두근, 두근…….

다행히 스스로의 맥박 소리는 제대로 들려왔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진짜로 절망스러웠을 텐데…….

그리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둠과 정적 속에서 무섬증과 함께 불안감, 압박감 등 새로운 감정들이 조금씩 마음에 피어날 무렵이었다.

제 어깨를 감싸는 보드랍고 따뜻한 감각에 팔 사이에 묻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그러자 다정한 체온이 점점 저를 더 깊게 안아 왔다.

그에 제 등을 받쳐 주는 이 존재가 누군가 싶어 이온이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이를 본 이온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카밀루스……?

검은 머리에 파란 눈, 그리고 이 익숙한 생김새는 카밀루스가 틀림없었다.

이온은 그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 어두운 공간이 자아내는 공포감이, 그의 숨을 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밀루스를 보는 순간 급격하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이온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껴안았다. 꿈이라서 그런지 제가 맡아 왔던 그의 체향은 맡아지지 않았지만, 심지어는 제가 껴안은 이 몸이 현실에서 알고 있던 그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지만 이온은 개의치 않고 말을 쏟아 냈다.

- 왜 이제야 왔어?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데, 내가 얼마나 널 기다렸는데…….

기다림의 시간은 실제로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그런 투정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아마 이 나선형 계단이 주는, 저 밑에 고인 어둠이 두려워 그런 것 같았다.

묵묵히 이온을 감싸안아 주던 그의 팔심이 조금씩 강해지더니 한참 만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밀루스의 목소리는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 돌아가자, 이온.

- 집으로?

- 그래, 집으로…… 너에게 가장 익숙한 곳으로.

그 말을 듣던 이온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 싫어.

- 왜?

왜냐고?

이유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이곳은 무서웠지만 집으로 가면 그에게, 카밀루스에게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물론 어떤 큰일이냐고 하면 그것 역시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냥 그럴 것 같았다.

카밀루스는 도리질을 하는 이온을 안타깝게 내려다보다가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 괜찮아, 무섭지 않을 거야.

- 그게 아니라…….

이온은 갑자기 울컥해 눈가에 쌓였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젖은 뺨을 훑으며 그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나, 엄청 강하잖아.

그에 이온은 잠깐 얜 꿈속에서도 이러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덕분에 현실감이 찾아왔는지 근거 없이 찾아왔던 두려움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온의 눈앞에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것이 나타났다.

문.

그리고 세상에 빛과 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시스템의 비밀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자마자 그런 메시지를 본 이온은 목이 답답해 저절로 밭은 숨을 토해 내고 말았다.

“하아, 하…….”

그러고 나서야 뒤늦게 제 손목을 붙잡은 강한 악력에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새벽인지 창암한 빛이 비치는 그곳에는 예상대로의 인물이 있었고, 이온은 저도 모르게 안심해 버려 도로 눈을 감았다.

그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꿈에 네가 나왔어, 카밀루스…….”

자각몽이라 그런지 깨어나고 나서도 꿈의 내용이 선명히 기억났다. 제 눈아래에 펼쳐졌던 끝없는 계단도, 그때 제가 느낀 감정도.

그중에서도 꿈에 나타난 카밀루스의 모습을 자세히 더듬던 이온은, 이상하게 들릴 걸 알면서도 헛소리 같은 말들을 이어 갔다.

“그런데 이상하지, 너랑 조금 달랐어. 얼굴도, 하는 말도 비슷한데…… 그래서 네가 분명할 텐데 너한테서 나는 향기도 조금 다르고, 널 안았더니 평소의 느낌이 안 났어.”

눈을 감았는데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카밀루스는 천천히 이온의 손목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그래서, 결론은? 내가 아니었어?”

이온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너였던 거 같아. 어리광 부리고 싶었거든.”

“……그래.”

카밀루스는 조금 지친 목소리로 그리 대꾸하더니 이온의 어깨를 안아 제게 기대게 했다.

이온은 제 어깨에 닿은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몸이 무젖은 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을 보니 방금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이온은 평소보다 훨씬 창백한 안색이 된 카밀루스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 또 기절했어?”

카밀루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온은 그에 오히려 제가 달래는 입장이 되어 카밀루스를 다독였다.

“놀랐겠다.”

그러자 카밀루스가 마른세수를 하더니 탄식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뭐 이런 거지 같은 저주가 다 있지……. 조금 나아졌나 싶어 안심하면 또 이러잖아.”

“괜찮아.”

“안 괜찮아.”

“…….”

카밀루스의 단호한 대꾸에 이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이온이라도 한마디만 더 잘못 꺼냈다가는 카밀루스가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에 눈치를 보고 있으니 카밀루스가 얼굴을 슬쩍 일그러뜨리더니 손으로 이온의 밀빛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그러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그보다 먼저 노크 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러 왔다. 이 새벽에 누군가 싶었지만 이온은 일단 카밀루스에게서 멀어지며 대답했다. 소리가 크게 안 나와 목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누구야?”

상대는 본인의 무례함을 인지하기는 했는지 한 박자 늦게, 무척이나 공손한 말투로 대꾸해 왔다.

“소공작, 잠을 깨웠다면 죄송합니다. 혹시 대공께서 여기 계신지요.”

그에 이온이 카밀루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곧 그가 원하는 답을 내 주었다.

“네, 여기 계십니다. ……들어와도 돼요.”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렇게 열린 문 틈으로 몸을 들인 페드로는 카밀루스를 본 순간 표정을 굳혔다.

그래도 이온에게는 공손히 허리를 숙인 그가 다시 한번 양해를 구해 왔다.

“실례했습니다, 소공작. 제가 잠을 방해한 게 아니었으면 좋겠군요.”

“보다시피, 깨 있어서 그건 상관없지만…….”

무슨 일이냐고 굳이 묻지 않아도 이온은 그가 어째서 화가 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카밀루스를 힐끗했지만, 그는 뻔뻔한 얼굴로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고생했나 보네, 페드로.”

그리고 그 말은 페드로의 화에 기름을 들이부은 모양이었다. 그가 눈으로 온갖 험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차마 꺼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야, 대공께서 황성에서 갑자기 사라지셨으니까요……? 한참을 근처를 찾아 헤매도 코빼기도 안 보이고, 되돌아오지도 않으시니 별수 있습니까?”

물음에 카밀루스가 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4시간 동안 그랬으니 초조하긴 했겠어.”

“하, 대공……?”

페드로가 어이없다는 듯이 허리에 손을 올렸지만 카밀루스는 눈을 피해 버렸다. 아마 변명거리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이온은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며 그를 만류하는 자세를 취했다.

“페드로, 진정해요. 그게, 카밀루스는 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서요.”

무슨 소리냐는 질문을 담은 눈길이 제게 닿자 이온이 말을 주워섬겼다.

“그게, 제가 잠을 자다가 기절을 해서 급하게 온 거라…… 미리 말할 시간이 없었을 거 같아요. 게다가 제가 방금 깨어나기도 했고요.”

그에 페드로가 이온과 카밀루스를 번갈아 보았다가, 다시 이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 다음 순간 그의 말투는 조금 수그러들어 있었다.

아프다는 사람 앞에서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소공작께서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대공께서 힘내 주셨는걸요.”

이온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일단락되나 싶었지만, 물론 그건 오산이었다. 페드로가 다시 카밀루스를 바라보며 한 가지 의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공, 소공작께서 잠을 자다 기절한 걸 그 멀리서 어떻게 아시죠?”

……어?

차마 생각지 못했던 그 질문에 이온은 망했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건 옆에 있던 카밀루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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