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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9)화 (11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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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은 예의상 들고 온 방문 선물을 건넨 뒤 안드레아 부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오늘의 초대는 공식적으로는 솔친 후작 본인이 아닌 그 아들인 안드레아가 이온 크레이거를 초대하는 자리였다.

안드레아와 이온은 나이 차이가 8살 정도 나는 탓에 또래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연회장에서 종종 마주치던 사이이고 겉으로나마 꽤 친분을 유지했던 터라 그렇게 어색하지는 않았다. 최근엔 아니라지만, 원래는 같은 황실파의 가문이었으니.

테이블 위에 차와 다기들이 세팅하고 하녀들이 나가고, 안드레아의 아내도 담소를 즐기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둘만 남은 방에서 안드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이온. 초대장을 보내고 3일이나 답변이 없어서 안 오려는 건 줄 알았지 뭐야?”

서로 웃으면서 마주 보고는 있었지만 말에 뼈가 있었다. 이온은 혹시 날 무시하려고 했냐는 의미가 담긴 그 물음을 듣고 칼칼하다는 듯이 잠깐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안드레아가 먼저 움찔했다. 손님이 손님이니만큼 미리 준비해 두었어야 했던 손수건이 근처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다행히 그는 눈치 빠르게 근처의 종을 흔들었고, 얼마 안 가 하녀가 손수건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을 받고 몇 번 기침을 한 이온이 뒤늦게 대답했다.

“미안해요, 형. 요즘 눈도 내리고 추워졌잖아요. 그래서 내내 누워 있었는데…… 그사이에 초대장이 왔더라고요?”

그리 말하며 이온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안드레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온의 몸이 약한 것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온이 3일간 대답이 없었던 것은 의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쪽이 먼저 안달을 내도록.

그도 그럴 것이, 사교계에 데뷔할 때만 해도 다들 앝보았던 이온은 몇 년이 지나자 크레이거 공작만큼 까다로운 상대로 정평이 나 있었다. 실제로도 가문의 일을 무난히 잘 처리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단지, 공작위를 계승받기 위해서는 공작가의 격에 맞는 좋은 혼처를 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하자가 있을 뿐이지.

그 때문에 안드레아는 은근히 미심쩍어하는 투로 물었다.

“그래……? 대공께서 네 치료를 위해서 저택에 머문다고 들었는데 아직 몸이 안 좋은가 봐?”

“정식으로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계속 힘들 거 같아요. 대공께서도 일시적인 증상 개선 외에는 어려워하시는 것 같고요.”

“존경하는 크레이거 공작님의 후계자가 이렇게 아프니 우리 아버지께서도 항상 걱정이 크셔.”

자연스럽게 현 솔친 후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온은 살짝 미소 지었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겠구나 싶어 일단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여러 허브들이 블렌딩되었는지 향긋한 향이 코로 올라왔다. 잠시 향을 음미하고 목을 축였다. 방금 전 기침하느라 긁혔던 목이 조금 따끔해지는 것을 느끼며 이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후작께서는 잘 지내고 계세요? 얼마 전의 일로 상심이 크시다고 들어…… 걱정이 되던데요.”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돼. 크레이거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 후작가도 버텨 온 역사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무너지겠니?”

안드레아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이야기하는 양 자연스럽게 제 찻잔을 들었다.

아직 여유를 부리는 그를 보며 이온은 생각했다.

‘앞으로가 더 문제일 텐데?’

바스커스 후작과와 분쟁이 붙은 원인인 대운하는 솔친 후작가의 주수입원이자, 부수적인 수입들을 뒷받침해 주던 중요한 존재였다. 그 때문에 솔친 후작가에서 먼저 연락한 것일 텐데…….

그러나 이온은 그런 속내는 차치해 두었다. 사실 솔친 후작가를 제가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긴 했어도, 현 황제의 지지 세력 대열에서 제외되었으니 이젠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거기까진 저도 상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혹시 도울 일이 있나 싶어서요.”

“도울 일이라…… 그러고 보니 아버지께서 네가 오면 건네고 싶은 게 있다고 했던 건 기억이 나는군.”

역시나 후작이 직접 등장할 모양이다. 이온은 후작이 줄 것이 선물이든, 사업서이든 관심 밖이었던 터라 슬슬 발동을 걸었다.

“그보다, 안드레아 형…….”

이온이 말소리에 곤란함을 섞었다. 들고 있던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를 맡다가 고개를 갸웃한 그가 나직이 물었다.

“여기 혹시 홍차가 섞여 있나요?”

“……!”

질문을 받자마자 안드레아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한때 교류가 있었던 만큼 그도 이온이 못 먹는 몇 가지 음식이 있으을 기억했다. 홍차가 그중 하나였다.

사실 이 사실을 아는 건 친분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크레이거가의 영식이 홍차를 못 마신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귀족들은 다양한 종류의 홍차를 즐기고, 심지어 고급 차를 마시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그 문화를 함께하지 못하는 이온 크레이거를 한때 은근히 무시하는 이들도 존재했었다.

그런데 오늘의 귀빈인 이온의 그런 상황을 기억도 못 하고 대접을 했다면 그건 분명 엄청난 결례로 지적될 만했다.

“아니, 단순 허브티일 거야. 혹시 입맛에 안 맞니?”

안드레아가 설마, 하며 묻는 말에 이온은 다시 차를 조금 입에 대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저도 처음엔 그냥 허브티인 줄 알았는데, 마시다 보니 그런 맛이 나네요. 아시다시피 제가 홍차는 미량만 마셔도 몸이 안 좋아지는데…….”

말하면서 이온이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내리눌렀다. 그러고 왼손으로는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남들보다 낯빛이 훨씬 하얀 탓에 한두 번 기침만으로 얼굴에 금세 홍조가 피어올랐다. 안드레아는 이온의 앞에 놓인 찻잔을 제 앞으로 가져오면서도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내가 따로 챙기라고 했는데.”

그러나 약간 목소리에 주저함이 있는 것을 보니 집안의 누군가가 실수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은 듯했다. 이온는 그런 사정 따위 모르는 척했다.

“하지만 홍차 맛이랑 냄새가 조금 나는 거 같은데요.”

사실 이온조차 그런 건 전혀 느끼고 있지 못했지만 거짓말은 태연히 나왔다. 차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살짝 마셔 보기도 하는 안드레아의 눈이 사정 없이 흔들렸다.

“나는, 전혀 모르겠는걸…….”

“제가 못 마시다 보니 그쪽으로는 좀 민감한 편이라서요.”

이온의 말이 끝나자마자 안드레아는 종을 흔들었다. 딸랑딸랑! 조급함이 담긴 손길이었다. 뜻밖의 두 번째 호출에, 하녀가 아까보다 좀 더 빨리 달려왔다.

“예, 도련님.”

“혹시 소공작의 차에 홍차가 섞여 있는 건가? 내가 오늘 손님은 홍차는 못 마시니 다른 티로 준비하라고 미리 말해 뒀잖아.”

안드레아는 당황한 듯 말이 빨라졌다. 아마 자신이 떳떳하다고 믿고 있을 하녀는 고개를 숙이고 담담히 대답했다.

“예, 그래서 특별히 신경 써서 블렌딩한 순한 허브차로 준비했습니다.”

그에 이온이 손을 움켜쥐고 가슴을 두드리며 말소리를 흐렸다.

“그런데 꼭 홍차를 마실 때처럼 심장이 빨리 뛰어서…….”

이온은 호흡을 빨리하다 보면 머리가 좀 멍해지는데, 그러기 전에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여태껏 자리에 앉아 있던 안드레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 이온? 혹시 오는 동안 무리한 건 아니고?”

가까이 온 그가 등을 두드려 주며 묻는 말에는 제발 후작가에서 실수한 게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듬뿍 묻어났다. 이온은 그 마음을 아주 잘 알지만 고개를 저었다.

“오는 동안은 괜찮았어요.”

이온의 대답에 응접실에 들어온 하녀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귀빈이 아프다는데 차마 당신이 잘못 파악한 거라고 함부로 지적할 수 없는 상황인 터였다. 하여 먼저 입은 못 열고, 혹시나 찻잎을 섞다가 저도 모르게 실수했을까 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소란이 점점 커지려고 하자, 응접실 문을 열고 솔친 후작이 들어왔다. 그는 얼굴이 발개진 이온과 그를 돌보고 있는 안드레아를 보고는 서둘러 근처로 다가왔다.

“안드레아? 이게 무슨 일이지?”

“그게, 소공작의 차에 홍차가 섞인 것 같다고 해서…….”

어떻게 해야 하죠, 아버지? 안드레아는 그런 의미를 담은 눈빛을 솔친 후작에게 보냈다.

하지만 솔친 후작이라고 해서 밑에 사람을쥐 잡듯 잡는 것 외에는 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여 옆의 하녀를 다그치려던 찰나였다. 응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을 에렌스트 경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송구하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소공작을 살피겠습니다.”

“아, 아, 그래. 어서.”

안드레아가 이온에게서 떨어지자 에렌스트 경이 그의 앞에 다가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에렌스트 경이 이온을 오랜 시간 모셔 왔음에도 그 역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이온이 진짜 아플 때의 안색과 그렇지 않을 때의 안색이었다.

게다가 이온이 지금 아픈 척하는 것은 미리 말을 맞춰 둔 것도 아닌 터라, 에렌스트 경도 그가 연기하는 것인 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미안, 알렉…….’

이온은 눈에 눈물을 살짝 끌어 올리며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에렌스트 경에게 속으로 사과의 말을 했다.

에렌스트 경은 워낙 연기엔 소질이 없어서, 계획 공유를 안 한 건 이온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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