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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116)화 (116/317)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제게 던져진 질문 앞에서 카밀루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페드로는 그의 입 속에 준비되어 있을 대답이 나오기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정치 얘기를 하는 건지 사랑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대공.”

카밀루스에게서 결국 회피성 발언이 흘러나오자 페드로가 표정을 굳혔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다시금 카밀루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책상 안쪽에 선 카밀루스가 도로 등을 보였으나, 페드로는 집요하게 그의 옆으로 가서 섰다.

페드로는 애써 자신의 쪽을 돌아보지 않는 카밀루스의 옆모습에 대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현재 그에게 가감 없이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으므로, 멈출 수 없었다.

“대공께선 선황의 장례식이 끝나고 이곳 크레이거가에 들어선 순간 대공국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걷어차신 겁니다. 설마, 모르시진 않겠죠?”

“……알아.”

실상 카밀루스는 이온 하나 때문에 거의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전에 지나가듯이 가볍게 말하긴 했지만, 페드로는 정말로 그가 황도에 오자마자 황실을 장악할 거라고 믿었다. 버니언 퍼렌도 클로델이 황제로 있는 이상, 카밀루스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카밀루스는 그러지 않았다. 분란 대신 평화를 선택했다. 그럼 카밀루스는 적어도 이후의 행보를 지금과 달리 했어야 한다. 선황이 그에게 남겨 두고 간 북부로 향해서 대공국의 군주로서 권력관계를 빠르게 정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두 가지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입지를 좁혔다.

페드로가 보기에 그의 이런 행보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죠. 대공이든, 아니면 대공의 정적이든.”

카밀루스의 말마따나 이건 사랑 얘기 같은 게 아니었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였으니까.

묵묵히 듣고 있던 카밀루스가 문득 눈을 옆으로 굴렸다. 평소와 달리 웃음기 하나 없는 페드로의 얼굴을 보고는, 그 역시 목소리를 낮춰 반문했다.

“나한테 황위에 오르라는 의미인가?”

방금 페드로의 발언을 누군가가 버니언의 앞에 가서 똑같이 지껄였다면, 그게 누구든 상관없이 처형장으로 바로 끌려갔을 터였다. 설령 현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라 할지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대공께서 자신의 사람을 그보다 더 확실히 지킬 방법이 있습니까?”

“나는…….”

“대체 무엇이 두려우신 겁니까?”

막말로 카밀루스는 지금 당장 버니언에게 달려가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다. 한데 왜 저런 한심한 황제를 두고 보는지 페드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페드로의 물음에 카밀루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두려운 게 아니야. 나한텐 야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더 간절하고, 꼭 이루어야 하는 것.”

“대공.”

그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온의 저주를 풀어 주고, 그의 건강을 되찾아 주는 것.

대공이라는 그의 지위를 생각하면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하찮고 개인적인 소망이었다. 그러나 카밀루스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런 일을 해 버리면 이온의 곁에 있을 수가 없으니.”

한마디로 일을 벌였을 때 뒷수습할 시간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에 페드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은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해도 되지 않느냐는 듯.

하지만 카밀루스에게 이온의 건강 문제는 무언가의 다음에 해도 되는 일 같은 게 아니었다. 삶의 최우선 과제였다.

한시라도 빨리 이온을 그 연약한 몸에서 해방해 주고 싶었다. 황도로 돌아와 이온와 재회한 후, 여전히 아픈 그를 보면서 그 열망은 더 커졌다.

누군가는 죽지는 않으니 된 것 아니냐고, 그러니 좀 더 시간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카밀루스의 입장에선 그런 일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다가도 단지 피로하다는 이유만으로 쓰러지고, 남들은 수시로 걸리는 사레 한 번에도 운신조차 못 할 정도로 괴로워하는 이온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한시도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신 앞에 맹세했다. 내 모든 걸 바쳐서, 이온을 살려 놓겠다고.”

“……신을, 믿으십니까?”

카밀루스의 중얼거림에 페드로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국들과 달리 오브라이언 제국은 신을 섬기지 않는 나라였다. 그리고 카밀루스 또한 한 번도 신과 관련한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페드로의 예상을 깨고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으면 안 되니 믿어야 해.”

그러고 답답한 숨을 트기 위해 제 앞에 있는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황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사이에 입김이 살며시 보일 정도로 공기가 꽤 차가워졌다. 그래 봤자 황도의 겨울 추위는 아이오딘의 여름 더위에도 못 미칠 테지만.

카밀루스는 문득 무언가가 난간을 짚은 제 손 위에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시선을 내렸다. 작은 눈꽃이 그곳에서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카밀루스가 등 뒤의 페드로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혼잣말을 했다.

“……모든 걸 허상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 * *

“이 망할 새끼야!”

챙그랑!

버니언이 고함과 함께 근처 탁자 위에 있던 장식용 접시를 집어 던졌다. 몇 대 전 황후가 직접 빚었다는 유물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이 깨져 버린 순간이었다.

버니언의 들끓는 분노를 마주한 아스타틴은 서둘러 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합니다, 폐하.”

이어 고개를 조아리자마자 버니언이 아스타틴 앞에 다가가 섰다. 조금 전, 제가 명했던 일들이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답을 듣고 버니언은 눈이 돌아 버린 뒤였다.

그가 손으로 아스타틴의 턱을 툭툭 치며 빈정거렸다.

“너, 전에 분명히 어디 뒷골목에서 그 라치크의 길드장 새끼를 봤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아직도 진척이 없는 거지?”

“그 이후에는 직접 나서지 않는 것 같아…….”

아스타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버니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심을 다해 찾지 않는 것은 아니고? 너 이 새끼 전부터 의심이 됐었는데 사실은 그 길드장 놈이랑 뒤에서 시시덕거리고 있는 거 아니야!”

“기사의 명예를 걸고, 절대 아닙니다.”

아스타틴이 강하게 부정했으나 버니언은 믿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번엔 의도적으로 자기를 엿 먹이려고 보고를 누락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아스타틴을 매도해 갔다.

주변의 시종들은 살벌한 분위기에 몸을 사리고자 한 발짝씩 멀어지거나 절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무릎 꿇은 아스타틴의 바로 옆에 선 노아기사단의 단장, 칼 나르바에스만이 뒷짐을 진 채 아무것도 없는 앞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 부하가 무릎 꿇은 자세로 모욕적인 언사를 당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이를 막아 줄 방도가 없었다. 상대는 오브라이언의 황제였으므로.

그렇지만 버니언이 수많은 말들을 쏟아 내고 한숨 돌릴 무렵, 아스타틴의 곤욕을 보다 못한 그가 여전히 앞에 시선을 둔 채로 넌지시 한마디 했다.

“폐하, 아스타틴은 15년도 넘게 황가에 충성해 왔습니다. 선황께서 저희 노아기사단, 그중에서도 아스타틴은 특별히 아끼셨던 것을 기억하실 텐데요. 의심이라니, 당치 않으십니다.”

“……뭐?”

분위기에 맞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버니언이 다시금 눈을 치켜떴다. 자연스럽게 분노의 화살이 칼에게로 옮겨 갔다.

“지금 부하라고 내 앞에서 저자를 두둔하는 건가? 그 길드장 새끼를 찾으려고 내가 무슨 짓까지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 테고.”

그가 말한 ‘무슨 짓’이란 하도 꼬리가 안 잡히는 나머지, 꼴사납게 제국 내 전 길드에 경고장을 보낸 일을 가리킴이었다. 말이 경고장이지 널 못 찾겠으니 알아서 나와 자수하라는 내용이었고,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정보를 내놓으라는 수배 공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그 새끼한테 난 너한테 졌다고 대놓고 광고한 거다.

하지만 그렇게 제 체면을 구겨서라도 길드장 자식을 찾아야 했다. 그래야 제가 잘난 줄 아는 카밀루스 놈의 콧대를 꺾고, 이온을 제 걸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 짓을 해 가며 제가 도와준 게 무색하게 이미 한 주가 지나 버린 지금에까지 아스타틴이 아무 소식도 못 가져온 것이었다. 하여 버니언으로서는 그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들어 아스타틴에게 역정을 내는 것인데, 칼 단장이 시건방지게 훈계하려 들자 버니언은 더욱 화가 났다.

그가 돌연 시종에게로 손을 뻗어 제 검을 건네받더니, 그것의 손잡이로 칼 단장의 턱밑을 찔렀다.

버니언이 고개를 들어 올린 칼의 눈을 마주하며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혹시 딴생각 품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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