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그러나 이는 클로델 황가의 영광을 위함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 아스타틴 딜런 올림
마지막까지 편지를 읽은 카밀루스가 작게 코웃음을 쳤다. 잠시 후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는 카밀루스의 손안에서 인 푸른 불꽃에 의해 화르륵 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낮 동안 나가 있다가 이제 막 들어와 앞에서 함께 편지를 읽고 있던 페드로가 한마디 했다.
“예상대로 같은 편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딜런 부단장은.”
페드로와 달리 오늘은 바쁜 일정들을 모두 미뤄 두고 내내 저택 안에 있었음에도 왠지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 묻은 채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카밀루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이용만 할 수 있으면.”
“현 황제의 눈을 가리고 감시자를 찾아낼 수만 있으면 말이죠.”
“그래.”
자신의 의도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페드로의 말을 간단히 긍정한 카밀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뒤돌아 발코니의 문 앞에 섰다. 무료한 표정의 그는 이젠 노을마저 사그라든 크레이거 공작가의 후원을 내다보며 물었다.
“그보다 마리엘에 대한 보고는 언제쯤 올라오는 거지?”
평소 같지 않게 약간 날이 선 물음이었다. 제 상관의 기분이 상당히 저조하다는 걸 눈치챈 페드로는 어깨를 굳히고 뒷짐을 지었다.
아침에 이온과 싸운 일 때문인 듯한데, 이럴 때는 몸을 사려야 한다는 걸 그도 알았기 때문이다.
페드로가 사무적으로 답했다.
“생각보다 진척이 잘되지는 않더군요. 마탑 내에서도 그자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다들 마탑주를 늘 따라다니는 조수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다만 특기할 만한 게 있긴 했습니다.”
카밀루스가 그게 뭐냐고 질문하듯 곁눈질을 하는 것에, 페드로는 제 동료들과 함께 알아본 이야기를 꺼냈다.
“마기의 영향이겠지만 흑마술을 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탑 분위기 때문인지 드러낸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탑 마법사들의 대부분이 마리엘을 쫓아내자고 주장 중이라고 하더군요.”
여기까지 들은 카밀루스는 그게 뭐가 특별한 거냐는 양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야 마기에 잠식되었기 때문이겠지?”
“그렇습니다, 대공.”
마탑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법에 미친 연구자들이지만, 마탑이 제국의 역사와 함께할 정도로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만큼 그 나름대로의 선은 있었다. 그들은 몬스터들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마기를 꺼렸고, 심지어는 배척했다.
마기에 대해 일부 연구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지 그것을 적극 활용하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러니 몸의 반이 이미 마기에 잠식되어 있는 마리엘 같은 존재를 마탑의 마법사들이 반길 리는 없었다.
그런데 이 정도는 굳이 알아보지 않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인 터였다. 따라서 페드로가 말하고 싶은 부분도 결국은 다음의 것이었다.
“그리고 마리엘을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 중 몇몇은 마리엘이 마기에 완전히 잠식되면 틀림없이 리치가 될 거라고 믿는다더군요.”
카밀루스가 그제야 몸을 돌려 페드로를 바라보았다.
“리치? 어째서지?”
“마탑 내에는 마리엘이 네크로맨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리치와 네크로맨서. 카밀루스는 언뜻 연관되어 보이지 않는 두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간을 모았다.
둘 다 시체를 제어하는 공통점이 있다는 건가?
너무 억지로 엮는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억지의 정도로 따지면 마리엘이 네크로맨서라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순수 마법사 자체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흑마법사 계열인 네크로맨서는 그중에서도 더 특이하고 희귀한 존재다. 제국 내에 있다는 소문조차 거의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애초에 그런 자라면 마탑에서 쉽게 받아들였을 리 없다. 그것도 그들의 수장인 마탑주의 조수로서.
카밀루스의 목소리에 의문이 담기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근거가 있는 얘기인가?”
“근거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마탑주도 매번 무시하고 있는 모양이고요.”
“……그자의 성격을 보면 대응 방법이야 알 만하지.”
얼마 전 뻔뻔한 낯짝으로 제 앞에서 반말을 지껄였던 재니스를 떠올린 카밀루스의 눈엔 서늘한 빛이 서렸다.
그 뒤 카밀루스는 도로 발코니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별로 유익한 이야기가 없으니 더 알아보라는 간접적인 신호였다. 페드로로서도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다만 그들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페드로가 작게 헛기침을 하여 목을 푼 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대공, 한 가지 의문인 것이 있습니다.”
“말해.”
“왜 황성 탑에는 가 보시지 않습니까? 이 일의 중심은 그곳일 텐데요.”
이는 카밀루스가 황실 도서관을 드나들거나 마리엘에 대해 알아보라 이르기 훨씬 전부터 가졌던 의문이었다.
이온의 저주는 시기상으로 보면 황성의 이름 없는 탑에서 얻었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런 핵심적인 장소를 굳이 배제하는 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는 걸 카밀루스가 모를 리는 없다.
“제아무리 경계가 삼엄하다 해도 내황성의 결계도 대공을 막지는 못하니 충분히 숨어들 수 있지 않습니까? 단순히 금지라서 가지 않는 것은 아니실 테고요.”
변죽을 울리고 있지만, 어린 시절이 떠올라 못 가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카밀루스는 대답을 고르는 듯 약간의 틈을 둔 뒤 입을 열었다.
“유감스럽지만, 이미 갔었어.”
“……언제요?”
카밀루스의 행적을 낱낱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던 페드로가 놀라 대꾸했다. 그에 카밀루스는 새끼 드래곤 녀석이 제게 분홍색 약물이 든 약병을 가져온 날을 떠올렸다.
그날, 카밀루스는 녀석을 방으로 돌려보내고 내황성으로 향했다.
페드로의 말대로 그에게 황성 탑이 서 있는 금지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평소 모습을 드러내 놓고 행동할 때에야, 굳이 분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으니 규칙에 따라 황성 내 마법 사용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계까지 제가 시전한 것으로 바꾼 마당에 카밀루스를 제약할 것은 실제론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정작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건 따로 있었다.
기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썩힌 그곳 앞에 서는 일은 아주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카밀루스는 황성 탑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설 때마다 제 온몸의 피가 바짝 마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무너진 성전 터를 지나 그곳으로 향하는 통로 앞에 선 순간엔 입 안이 건조해지고, 손끝이 떨리고, 숨이 찼다.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릿속 깊숙이 각인되어 버린, 학습된 공포였다.
어릴 적, 탑에 있는 동안 카밀루스는 누군가는 죽어야 만들 수 있다는 마나석을 연에 수십 개씩 뽑혔다. 그리고 몸속에 넘치는 마나를 수용한 돌연변이로서, 재니스의 온갖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실험을 당해야만 했다.
마탑 소속 중에서도 극소수의 마법사들이 그곳을 드나들며 수시로 빈사 상태에 빠지는 카밀루스를 치료하기를 반복했다.
그쯤 되면 평범한 사람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테지만 카밀루스는 달랐다. 괴물 같은 마나 수용력은 곧 그의 질긴 생명력과 같았다. 그 때문에 약간의 치료만으로도 매번 살아서 눈을 떠야 했다.
카밀루스를 치료하러 와 주는 마법사 중에는 그를 애잔해하는 눈빛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결코 카밀루스를 탑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받을 길 없는 카밀루스가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금제를 벗을 방법은 없었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지옥길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살아남는구나, 너?〉
웃으며 말하는 재니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카밀루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나도 아쉬우니, 죽지 않을 만큼만 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폐하께서도 널 살려 둘 만큼의 애정은 있으신 모양이니.〉
……이렇게 살아가도록 두는 게 애정 때문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애정은 말라 버린 게 틀림없다고.
카밀루스는 그 공포스러운 기억들을 애써 억누르며 성인인 제 허리까지 올라온 잡초들을 헤치고 탑의 입구로 걸어갔다.
황성의 북쪽에 위치한, 괴괴한 탑.
황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높고, 그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내린 그 탑은 폐쇄된 채 수년간 방치된 탓인지, 복잡하게 자라난 넝쿨로 잔뜩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도 그곳에 묻힌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먹고 자랐을 그 넝쿨들은 과연 문을 열 수 있을까 싶게 끈끈히 탑에 달라붙은 채였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예상보다 훨씬 강한 결계였어.”
카밀루스의 뇌리에 탑을 둘러싼 복잡한 이중 결계가 선명히 떠올랐다. 페드로는 그의 말에 조금 놀란 듯했다.
“대공께서 뚫지 못할 정도였습니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말하면 파괴해서 없앨 수는 있었지만, ‘해체’ 식은 따로 보이지 않는 결계였다.
마법적 통찰력은 지식을 기본으로 하기에, 자신이 더 강하다고 해도 무조건 모든 마법의 해체 식이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예의 결계를 보면서 역시나 재니스에 대한 제 평가를 수정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부수면 안 되는 결계였어.”
왜 부수면 안 되는지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그야말로 감의 영역이었으니까.
다만 결계에 손끝을 댔을 때 흘러들어 오는 느낌이 일반적이지 않았고,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었다.
게다가.
……스스스슷!
풀잎이 흔들리는 스산한 소리에 돌아보니 때마침 주변에서 새 떼들이 날아올랐다.
한순간 제 머리 위의 하얀 달을 새까맣게 가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그것들을 보면서 카밀루스는 저 중에 틀림없이 누군가가 보낸 감시용 새가 섞여 있을 것이라 여겼다. 하여 차라리 새들을 추적하려 한 순간이었다.
카밀루스의 몸이 쿵, 하고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추락감에 당황한 것도 잠시, 카밀루스는 곧 상황을 파악했다.
높은 천장과 미약한 촛불에도 화려한 빛을 띠는 샹들리에, 그리고 위층으로 향하는 넓은 계단…….
제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크레이거 공작 저의 홀이었다.
이 강제 소환이 다름 아닌 제 마법에 의한 것임을 깨달은 카밀루스는 바로 2층으로 뛰어오를 수밖에 없었다.
별안간 나타난 그 때문에 놀란 저택의 하인들조차 무시한 채 그는 노크도 없이 이온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이온!〉
자다가 정신을 잃은 이온을 깨우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