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집요하게…….’
포기한다 어쩐다 했던 사람이 해 놨다고는 볼 수 없는 흔적들이었다.
역시 지키지도 못할 말뿐인 말이었던 거다. 이온 크레이거 없이는 하루도 못 살 거면서, 질척거리면 더 미움받을까 봐 그런 말을 했을 게 분명하다.
이온은 뒤돌아 아직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카밀루스를 확인했다가 근처에 있는 옷걸이에서 그의 셔츠를 찾아 어깨에 걸쳤다.
다리까지 내려오는 셔츠의 벌어진 틈으로 제 것으로 더럽혀진 허벅지와 붉은 흔적들이 비쳤다. 그 안쪽은 전혀 건드리지도 않은 덕에 멀쩡하니 사실 별 의미 없는 것들인 터라 살펴봐 봤자였다.
품이 넉넉해 헐렁한 셔츠의 단추를 천천히, 그리고 꼼꼼히 잠갔다. 그러는 동안 밀려오는 비참함으로 인해 손이 살며시 떨렸다. 자신이 초래한 일이지만 카밀루스에게 이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에 속이 상했다.
이온은 현기증에 약간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새벽의 복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문 닫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오늘 불침번을 서고 있던 하인이 이쪽을 보는 게 느껴졌다.
남의 방에서 맞지 않는 셔츠를 입고 맨발로 나온 도련님의 모습을 보고서 굳어 있는 그에게 태연히 다가간 이온이 명했다.
“별관에서 씻을 테니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예, 예, 도련님…….”
대답하면서도 눈치를 보던 그가 곧장 1층으로 내려갔다. 이온은 그 뒷모습을 잠시 눈으로 좇다가 별관으로 이어지는 길로 향했다. 가는 길은 어둡고 춥기까지 해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으나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 오기 전에 먼저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 이온은 잠시 후 뒤따라 달려온 하인들이 급히 곳곳에 불을 켜고 뜨거운 물을 보충해 주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옷을 벗겨 주겠다는 걸 사양하고는 그대로 김이 올라오는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러자마자 움츠러들었던 혈관이 이완되는 기분이 들었다.
욕탕 벽에 기대어 늘어지려 하는데, 몇몇 이들의 심상치 않은 눈초리가 이쪽으로 쏟아졌다. 온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순흔들이 뭘 뜻하는지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일이 있으면 종을 울릴 테니 모두 나가.”
이온의 근처에 작은 종을 두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온은 닫히는 문을 힐끗 확인하고는 제 몸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젖은 셔츠의 단추를 살짝 풀어 가슴을 내려다보는데, 역시나 선명한 키스 마크들이 여러 개 남아 있었다. 이온은 그 가운데 솟아오른 곳을 살짝 만져 보았다가, 얼얼함에 미간을 좁혔다. 카밀루스가 내내 빨아 대 팅팅 부어 있던 탓이었다.
이온은 그 외의 곳도 살피다가 문득 코끝과 눈가가 시큰해짐을 느꼈다. 그에 물로 얼른 얼굴을 씻어 보았지만 잠시 후 입 안에 짠맛이 퍼졌다.
이온이 몇 번이나 그의 손과 입 안에 쏟아 내는 동안에도 카밀루스는 제 욕망을 분출하지 않았다. 잔뜩 달아오른 것을 안달 나게 제 몸에 대고 비볐으나 그마저도 이온을 고조시키기 위한 행위였을 따름이다.
보다 못한 이온이 괴로울 테니 입으로 도와주겠다고 하는데도 거절했다.
〈너한테 그런 더러운 짓은 안 시켜.〉
예의 더러운 짓을 본인도 해 놓고 그런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온의 가슴을 제일 날카롭게 파고든 말은 그것이었다.
〈자격 없는 짓은 안 할 테니까…….〉
그러고 그는 진짜로 터질 것 같은 상태에서도 사정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친 정신력이라고 할 만했다.
본심이야 전혀 달랐겠지만, 이온은 그 모습에서 공포마저 느꼈다.
저주만 풀린다면, 진짜로 이온의 말 한마디에 카밀루스가 떠나 버릴 것 같았다. 아니, 말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냥 먼발치에서 다른 누군가와 웃으며 대화만 나누고 있어도 알아서 사라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이온은 제 앞에서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는 그의 속마음을 훤히 알아 버렸다. 그건 이온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일으켰다.
지독한 다정함이 사람을 무섭게 할 수도 있구나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목에 피가 고인 것처럼 답답함이 올라와 이온이 목구멍으로 침을 넘겼다. 그러고는 문득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손의 움직임에 따라 물소리가 작게 울렸다. 이온은 깊은 안쪽으로 손가락을 옮기며 벽에 몸을 바짝 기댄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중지에 여린 살이 닿았다. 하여 끝을 살짝 밀었다.
〈내 생각 하면서 자극해 본 적 있어?〉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하게 될 것 같았다.
이온은 스스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낯설었다. 게다가 앞이라면 모를까 뒤쪽을 건드리게 될 줄은 몰랐다.
“웃, 으…….”
이전엔 생각지도 못한 곳에 이물감이 들자 이상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불편한데, 대체 이보다 몇 배는 큰 걸 어떻게 넣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침대 위에서 했던 생각은 철회하지 않을 거다.
차라리 네가 분풀이라도 하면서 날 가졌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가 좀만 덜 다정했더라면, 날 덜 배려했더라면.
그래서 난폭하게 제 다리 사이를 엉망으로 만들었어도 이온은 그를 전혀 원망하지 않았을 터였다.
“카밀루스, 흣…….”
허억, 헉, 숨이 차올랐다. 그렇지만 여전히 자극은 부족했다.
무의식중에 카밀루스가 내내 괴롭혀 댄 곳에 손을 댔다. 동그랗게 익은 열매가 이온의 손가락 사이에서 뭉그러졌다. 순간 찌릿한 감각이 배 안쪽에 일자 그는 옅게 신음을 흘렸다.
“읏…….”
수면 아래에서 이온의 작은 엉덩이가 들썩였다. 그 사이에서 중지의 손톱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고, 곧 검지 또한 그렇게 되었다.
두 손가락을 벌리자 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온은 물속에서의 둔한 감각으로 말랑한 살을 눌렀다. 곧 예상치 못하게 그의 입에서 달콤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 응……!”
가슴 위의 손 역시 쥐고 있던 것을 거세게 비틀었다. 이온은 양쪽에서 전해지는 자극에 가는 허리를 바르르 떨었다. 순간 머릿속이 뿌예지면서 작은 혈관들을 당기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배 속에서 시작해 말초 신경으로 퍼졌다.
카밀루스가 이럴 때 나타나서 저를 안아 주고 키스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이온은 기쁘게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설령 온몸이 부서져 내리더라도, 자신을 마음껏 가지라고 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욕탕의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온은 숨을 삼키며 손가락을 더, 더 깊은 동굴로 밀어 넣었다.
그 행위에 몰두해 갈수록 자괴감이 올라왔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침대 위에서 겪은 몇 번의 절정도, 카밀루스를 가지고 싶다는 근본적인 욕구를 채워 주진 못했으니까.
그의 친절은 자신의 미련을 만든다.
차라리 왜 좋아한다고 말해 주지 않느냐고 원망의 소리를 쏟아 내면서 강제로 제 씨를 쏟아부었더라면 가슴은 아팠겠지만 이런 허기짐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체면이나 뒷일 따위 생각하지 말고 천박하게 그의 위에 올라탈 걸 그랬다.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벌려 주겠다는데 거부하지는 않았을 테니.
그랬더라면 아마 그 커다란 손으로 양쪽 엉덩이를 붙잡고 흔들었겠지. 마찰열에 헐어 버릴 만큼 거세게, 몇 번이나.
이온의 두 눈에 또다시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눈물이 흘러들었고, 그와 동시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숨이 찼다.
점점 간절해진 손길을 따라 물도 철벅거렸다. 그렇지만 카밀루스가 만져 주었을 때처럼 눈앞이 핑 도는 쾌감은 일지 않았다.
끝내 제힘으로는 안 된다는 걸 인정한 이온은 손을 물렸다. 그러고 물기에 손을 닦는데 수면 위로 무언가 똑 떨어졌다.
붉은색이 묽게 퍼지는 것을 보고 손을 올려 코를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벅찬 숨 또한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이온은 제가 너무 오랫동안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중간에 머리가 몽롱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몸이 힘들다는 징후였던 모양이다.
이온의 양손이 욕탕 밖 바닥을 짚었다. 기운이 없는 팔과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겨우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도 한동안 똑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떨리는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피와 눈물을 지켜보았다.
“읍, 흑…….”
물 밖으로 나오면서 몸에 달라붙은 젖은 셔츠가 차게 식어 체온을 빼앗은 탓에, 오한이 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진 이온은 하인들이 두고 간 가운 쪽으로 기어가 그것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종을 울리지 않은 채 몸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이대로 나가서 쓰러지고, 하인들 중 누군가가 크레이거 공작에게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손님이 쫓겨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피 쏠린 머리가 무거웠다. 이마를 짚으며 사망 확률을 확인하니 확실히 위험 수위였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34%입니다.]
지금 몸 상태면 35퍼센트가 되자마자 그대로 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럼 괜찮을까? 어차피 정신을 잃으면 카밀루스가 나타날 테니까?
하지만 그 전에 나타나면 더 좋을 텐데.
그러고 날 안아 주면, 그러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이쪽의 허락 없이 욕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