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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의 병약한 도련님이 되었습니다 (85)화 (85/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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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몸은 상태가 계속 왔다 갔다 하는 통에 도무지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황성에 있을 때는 적당히 괜찮았는데, 마차가 덜컹거려서 그런지 이온은 그 안에서 오는 내내 멀미를 해 댔다.

결국 황성에 다녀온 후유증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탓에 이온은 침대에 누웠다.

사실 하루 종일 주머니에 껴 있느라 답답했을 욤뇽이랑 겸사겸사 놀아 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쫓아 들어오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하여 이온은 이불 안쪽에서 꿈틀대고 있는 욤뇽이의 감촉을 느끼며, 에렌스트 경에게 건네받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침대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정히 속삭여 왔다.

“이온, 일은 쉬었다 해도 되지 않겠느냐?”

이온도 그렇다고는 생각했지만, 아버지를 빨리 내쫓기 위해서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괜찮아요, 이건 오늘 꼭 봐 놔야 해서…….”

말끝을 흐리며 아버지를 쳐다보는데, 집에 오자마자 할 말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자리를 비키지 않았다. 뭘 가리는지 모르겠지만 머뭇거리는 공작의 모습에 이온이 결국 먼저 물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괜찮은 게냐?”

“뭐가요?”

“황궁에서 있었던 일 말이다……. 그런 약속을 해 버렸으니.”

몹시 의문스러운 말이라 이온이 공작을 빤히 바라보다가, 괜히 빙빙 돌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전 아버지가 대공을 믿어서 조용히 계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

“아버지도 알고 계신 거죠? 대공이, 아니 카밀루스가 절 위해 뭐든 한다는 거요. 싫어하지만 그건 인정하고 계시잖아요.”

그러자 크레이거 공작의 손이 이온의 부드러운 밀빛 머리를 쓰다듬었다.

“왜인 것 같으냐?”

거기에 이유를 붙일 게 또 있나……?

애초에 카밀루스는 8년간의 북부 추방으로 이온을 향한 제 희생을 몸소 증명했다. 그 정도면 이쪽을 원망할 법했지만 돌아와서도 그 태도엔 변함이 없었다. 이온은 그 모습을 보고서 크레이거 공작이 조금은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 이상의 이유는 딱히 안 필요한 것 아닌가 싶어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이 먼저 반응했다.

“누구냐.”

“각하, 대공 전하이십니다.”

버틀러의 목소리에 공작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문이 열리는데, 과연 카밀루스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들 부자를 쫓아오지 않기에 이후에 버니언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카밀루스는 어째서인지 조금 다급해 보이는 기색으로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

“우선, 이 집 하인들을 좀 부려도 되겠습니까?”

공작은 벌써 자신을 지나쳐서 제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앉는 카밀루스를 눈으로 좇으며 대꾸했다.

“편하신 대로 쓰시라고 이미 배치를 해 드린 것으로 압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페드로, 깨끗한 천이랑 대야를 가져오라고 해.”

“아, 예.”

카밀루스가 겉옷을 벗고 의자의 등받이에 걸치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이온이 보던 서류를 협탁에 밀어 놨다.

“뭔데?”

“…….”

어쩐지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는 카밀루스는 대답 없이 이온을 가만히 들여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기색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공작이 근처로 돌아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에 카밀루스는 드레스 셔츠의 손목 부분을 고정해 두고 있던 커프스 버튼을 뺀 뒤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공작의 몸을 살피려고 합니다.”

“이후에 뭐 들은 이야기라도 있으신 겁니까?”

카밀루스가 그를 곁눈으로 돌아보며 단호히 잘랐다.

“괜한 희망 고문은 하기 싫으니 이따 얘기하지요, 공작.”

“……알겠습니다.”

공작은 궁금증을 거두지 못한 기색이었으나 뒤로 물러났다. 마침 하인이 천이랑 대야를 가져와 카밀루스의 지시대로 대야는 의자에 바짝 붙여 놓고, 천은 협탁에 올려 두었다.

그것을 확인한 카밀루스가 옆에 있는 페드로에게 손으로 내밀었다.

“단도 있나?”

뜬금없는 단도 타령에 페드로는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곧 크레이거 공작의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발견한 그가 귀엣말을 해 왔다.

“대공…… 그건, 아무리 그래도 공작가의 영식인데…….”

전장에서 난 상처도 아니고, 병을 치료하다가 흉터라도 남으면 이온 크레이거의 앞날에 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페드로가 게다가 틈만 나면 기침을 해 대고 픽픽 쓰러지는 사람인데 몸에 상처를 내는 건 좀 그렇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카밀루스는 신경이 바짝 곤두서서는 손을 흔들었다.

“칼.”

전례 없는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페드로가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이온을 바라보았다. 이온은 하는 수 없이 끼어들었다.

“혹시 피가 필요한 거야?”

그러자 카밀루스가 표정을 풀더니 애써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이온의 작은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응, 이온. 나 믿지? 나, 엄청 강하잖아.”

저번에 무적은 아니라고 해 놓고서는.

이온은 카밀루스가 뭐 때문에 이렇게 다짐을 받는지 몰라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그 한마디에 머뭇거리던 페드로가 카밀루스에게 단도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카밀루스는 칼집을 벗겨 내고 날카로운 날을 살폈다.

이번엔 아직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공작이 나섰다.

“전하.”

뒷말을 잇기 전이었지만 카밀루스가 그가 끼어드는 걸 경계했다.

“피가 튈 수 있으니 물러나십시오.”

뭘 하려고 하길래 피까지 튄단 말인가. 미리 대야나 천을 준비해 둔 것도 심상치 않아 보였던 공작은 한 번 더 때가 아님을 피력했다.

“송구하나 제 아들이 지금 머리가 아파서 쉬고 있었…….”

“물러나라는 말, 들어주지 않을 건가?”

카밀루스가 입에 담은 내용 자체는 부탁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지만, 목소리에는 강압이 들어 있었다. 그의 뒤에 선 공작이 눈썹을 실그러뜨렸다.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탓에 말이 날카롭게 나갔다는 것을 그제야 인식한 카밀루스가 긴 탄식을 내뱉었다.

“……영식에게 해되는 일은 아니라고 맹세하지.”

“알겠습니다.”

공작이 멀찍이 물러났다. 카밀루스는 그에 이온에게 조금 웃어 보이더니 단도를 제 왼손에 거꾸로 잡았다. 그리고 예리하게 갈린 날이 내리그어진 순간, 이온과 페드로에게서 동시에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밀루스!”

“대공!”

카밀루스가 베어 낸 것은 본인의 손목이었다. 얼마나 힘껏, 그리고 깊게 그었는지 곧바로 피가 쏟아졌다.

동맥을 제대로 그었는지 대야에 툭툭 떨어지는 붉은 피를 보고 경악한 이온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페드로도 참지 못하고 옆으로 달려오려는데 카밀루스가 외쳤다.

“가만히 있어!”

이온의 초록빛 눈이 사정 없이 떨렸다.

“카, 카밀루스…….”

왜 이러는 거야?

그런 생각을 읽었을 텐데 카밀루스는 단지 단도를 바닥에 내려 두고 멀쩡한 왼손으로 이온이 덮고 있는 이불 위를 다독였다.

그는 마땅한 대답을 내놓는 대신 놀라서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하는 이온을 달랬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쉬이.”

“너…….”

“진정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온은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충격적인 장면에 입이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카밀루스가 실례하겠다며 이온의 몸을 덮은 이불을 거두어 냈다. 이온은 카밀루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꼼짝도 못 했다.

페드로는 쏟아지는 피의 양이 만만치 않은 것을 확인하고 심각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공, 대공!”

“조용.”

제 상황에 맞지 않게 카밀루는 지나치게 침착했다. 그에 더 불안해진 페드로가 당장 그를 끌어낼 기세로 다가왔다.

“대공, 피가 너무 납니다. 당장 지혈을 해야……!”

“집중해야 하니까 조용히 하란 말 안 들리나!”

페드로는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 단호한 카밀루스의 태도에 결국 발을 다시 물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위의 혼란을 억지로나마 일단락한 카밀루스가 이온의 배 위에 손을 올리며 속삭여 왔다.

“미안해. 잠시만 실례할게, 이온.”

“…….”

이 와중에 예의를 지키는 그의 태도에 이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자 상의 단추를 풀다 말고 카밀루스가 하지 말라는 듯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지로 입술을 눌렀다.

“난 정말 괜찮으니까, 긴장하지 말고.”

“아, 알았어…….”

대답하면서도 이온이 벌써부터 카밀루스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불안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는 달래는 소리를 하지 않고 카밀루스는 머리에 현기증이 이는 것을 애써 참아 내며 파헤쳐 낸 이온의 옷깃 사이로 손을 넣었다.

조금 서늘한 이온의 배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집중하듯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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