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브라이언 새 황제의 대관식이 끝난 후, 연회가 열렸다. 태후는 당분간은 선황의 서거를 슬퍼하겠다며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없어도 연회장은 떠들썩했다.
오늘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대귀족들의 등장이 주목받기도 하였을뿐더러, 8년 만에 대공이 되어 수도로 돌아온 카밀루스의 이야기가 모두의 입에서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정작 카밀루스는 무슨 연유인지 아직 연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바쁜 일이라도 있나.’
그를 신경 쓰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온 역시 눈으로 자꾸만 찾고 있었다.
“찾으시는 이라도 있으십니까, 소공작?”
“아.”
그러다 들린 질문에 이온은 서부 지역에서 왔다는 한 백작과 자신이 대화 중이었음을 상기해 냈다. 이온이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잠깐 머리가 아파서 집중력이 흐트러졌군요.”
실제로도 이온의 얼굴은 꽤 창백했다.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은 밀빛 머리와 초록색 눈이 그에 처연한 느낌을 더해 주는지라 백작은 급하게 주워섬긴 변명에 여지없이 넘어갔다.
“소공작이 저주로 몸이 많이 안 좋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여서 말입니다만 이걸…….”
아니, 상황을 잘 이용한다고 해야 할지.
이온은 제게 내밀어진 작은 병을 보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약?”
“보통 약은 아닙니다. 제가 마탑에 있는 마법사 하나를 아는데, 그가 주었지요. 이걸 마시면 몇몇 저주는 감쪽같이 풀리기도 한다더군요.”
그러면서 건네기에 이온은 일단 받아 들었다. 온도가 그리 뜨거운 것도 아닌데 투명한 병 안에 담긴 분홍빛 액체가 보글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분명 여타의 약보다 영험해 보이긴 했지만, 만약 효과가 있더라도 일시적일 것이다.
‘□□를 죽이는 게 아니면…….’
저주를 풀 방도는 없다.
오랜 기간 저를 괴롭힌 저주가 대체 어떤 저주인지부터 알아내기 위해 아버지를 포함한 여러 사람이 백방으로 수소문해 봤지만 단서조차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 기분이 가라앉아 버린 이온은 이 사람과의 자리를 빠르게 파하고 싶어 괜히 말소리에 기침을 섞었다.
“……신경 써 주셔서, 쿨럭, 고맙습니다.”
그러자 백작이 눈에 띄게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모쪼록 소공작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렇게 덧붙이는 말을 들으면서 이온은 그 역시 같은 생각이구나 싶었다. 하여 주저하지 않고 얼른 본론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부탁하고 싶으신 거라도?”
기브 앤 테이크. 어차피 다 속셈은 비슷할 텐데 빨리 화제를 끝내자는 이온의 제안에 백작이 활짝 웃었다. 역시나 말 잘 통한다는 눈빛이었다.
[상태 이상: 호의]
[리오넬리 오데사가 플레이어에게 옅은 호의를 느낍니다.]
[플레이어가 리오넬리 오데사를 회유하는 것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식적인 미소와 함께 몇 마디 간단히 나눈 뒤 이온은 곧 뒤돌아서서는 아버지를 찾았다. 다른 이들과 섞여 있는 공작의 옆으로 가자 그가 무리에서 빠져나오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온, 안색이 좋지 않구나.”
마침 시스템도 사망 확률을 조정 중이었다. 수치가 슬그머니 올랐다.
[현재 플레이어가 사망할 확률은 24%입니다.]
아까 자고 일어났을 때는 상쾌한 기분이었는데, 카밀루스가 다시 결계를 펼친 이후 더 머리가 아팠다. 두통이 심해진 걸 보니 억누르는 힘이 이전보다 강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위를 돌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아직 연회의 주인이 등장하지 않아 홀은 다소 어수선한 상태였다.
“그래도 새 황제가 올 때까진 버텨야 하겠죠?”
공작이 지나가던 서번트에게 물을 건네받아 그에게 일단 마시게 했다. 이온이 조금 낫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던 미간을 풀자 공작이 구석으로 그를 이끌고 갔다.
“정 힘들면 돌아가도 된단다. 성문 밖에 에렌스트 경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곳엔 아비가 있으니 괜찮아.”
부드럽게 달래는 목소리였다. 이온은 다른 이들이 자신 쪽을 힐끗대는 걸 곁눈으로 확인하다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몰라요. 아버지한테 그런 편지까지 보냈으니…….”
몸이 좋지 않아 자리를 비운 걸 자기를 피하는 거라고 착각하면 곤란했다. 버니언은 그런 사소한 일로 충분히 발작할 만한 위인이었으니.
얼마 전 이온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를 써 둔 그 편지를 상기시켜 주자 공작의 얼굴 한편이 일그러졌다.
“설마 진지한 청혼이었겠느냐?”
이온과 공작 둘 다 농담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 집요해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전 걱정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좀……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쉬운 분이 아니다 보니.〉
에렌스트 경의 경고를 생각하면 불길한 것은 사실인지라 마냥 무시하기엔 꺼림칙한 구석이 있었다.
이온은 아들 걱정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공작의 팔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어쨌든 얼굴도장은 찍고 가야 문제가 안 생길 것 같아요.”
“네 뜻이 정 그러면 어쩔 수는 없다만.”
“대신 잠깐만 쉬고 올게요.”
대꾸하며 연회장의 2층을 올려다보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온이 잡은 자신의 팔을 굽혔다.
“그럼 이 아비가 에스코트를 해 주마.”
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홀에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처음에 막 이 몸에 들어왔을 때는 크레이거 공작이 아픈 것도 안 알아주는 계부 같은 아버지인 줄 알았으나, 겪고 보니 아들에게 꽤 끔찍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정한 안내를 받으며 올라가는데, 문득 가는 길에 카밀루스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 마탑주의 결계를 부쉈으니 이제 대공께서 마탑을 지배하게 되시는 건가요……?”
라든가.
“아무리 그래도 황가의 핏줄인데 그런 것은 좀.”
“……사생아는 어차피 황위 계승은 못 하잖아요.”
라든가 하는.
뻔히 듣고 있을 텐데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공작에게 결국 이온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선황께서 갑자기 비렌시움 대공 작위를 내리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여기저기서 다 화제가 되다 보니 카밀루스를 신경 안 쓰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북부에서 온 첫날부터 마탑주의 결계를 깨 제 실력을 과시했으니, 그에게 다른 복심이 있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로 인해서 오브라이언의 정국은 한동안 잔뜩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리라.
한데 크레이거 공작의 반응은 의외로 심드렁했다.
“다 뜻이 있으셨겠지. 지금의 황제가 걱정이 되었을 수도 있고.”
걱정……?
‘대공이 되면 더는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인가?’
이온은 공작이 선택한 단어가 상황과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하지만 대공을 그렇게나 미워했는데, 갑자기 그럴 합당한 이유가…….”
그러다 이전에 보았던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넌 네 어미를 참 닮았다.〉
선황제가 북부행을 결정한 카밀루스에게 건넸던 그 한마디.
“대공의 친모 때문일까요?”
그런데 그 말을 중얼거리자마자 공작이 갑자기 날을 세웠다.
“이온!”
놀란 이온이 그를 올려다보자 공작도 스스로의 말에 흠칫한 듯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2층으로 올라오고도 어느 정도 걸어온 뒤라서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들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방금 전 그 외침으로 몇몇 사람들이 난간 너머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공작은 그 시선을 느끼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가 이온의 어깨를 감싸 다독였다.
“그런 말은 앞으로 다신 입에 올리지 말거라.”
“……알아요. 저도 아버지 앞에서만 하는 말이에요.”
공작이 왜 이렇게 예민한가.
근 몇 년간 본 적 없던 모습에 당황한 사이, 돌연 퀘스트가 발동됐다.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 알아내기]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서 듣거나 단서를 찾는 등의 행위를 통하여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어머니의 정체를 알아내십시오.
이름 및 직위 등 일정한 인물로 특정할 수 있는 정보를 얻어야 퀘스트가 완료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본 퀘스트 완료 시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적의, 카밀루스 발데라스 클로델의 호의를 포함하여 불특정 다수의 호의 및 적의가 상승합니다.]
무심코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이온은 잠시 멍해졌다. 순간 아버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아버지를, 믿으니까요.”
목소리에서 맥이 빠진 것을 알아챈 공작이 아들을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온, 괜찮은 게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온은 왠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급히 숨을 삼켰다.
“네, 흡, 네…….”
그러고 기침을 쏟아 내는데, 그간 발작하기 전에 보였던 증세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자 공작이 재빨리 2층에 있는 방들 중 문이 열려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쉬는 게 좋겠다. 마침 이 방이 비었구나.”
그러고 이온을 그곳에 배치된 탁자 앞 의자에 얼른 앉혔다. 연신 괜찮냐고 묻는 크레이거 공작 앞에서 이온은 마구 끄덕이며 목에 걸린 마나석을 꼭 쥐었다.
기색이 심상치 않자 공작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닫고 다시 이온의 앞으로 돌아왔다.
“혹시 모르니 아비가 같이 있어야겠다.”
하지만 이온은 됐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괘, 괜찮아요. 쥐고 있으면 효과가 더 좋으니까…… 나아지고, 있어요.”
그러고 하아, 깊게 숨을 들이켠 뒤 주머니를 뒤졌다. 그곳에서 수년 전 공작이 걱정된다며 사 주었던 작은 방울을 내밀며 그가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정말 안 좋으면 이 방울을 흔들게요. 소리가 크니까 누군가는 꼭 들을 거예요.”
“……이온.”
“아버지야말로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되잖아요. 곧 버니언, 아니 황제가 올 거예요.”
“…….”
현실적인 설득에 공작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힘들면 꼭 방울을 흔들라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한 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이온이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이 닫히자 참았던 깊은숨을 한꺼번에 토해 냈다. 소리를 듣고 숨어 있던 욤뇽이가 주머니에서 기어 나왔다.
“꾸?”
녀석은 이온을 살피다가 급한 상황임을 알아채고 이전처럼 이온의 입술에 뽀뽀를 했다.
[화이트 드래곤으로부터 ‘응축된 마나’를 건네받았습니다.]
[상태 이상 ‘충만한 마나’가 일시적으로 강화됩니다. 유지 시간 90분.]
다행히 머릿속을 들쑤시던 두통이 조금 가라앉았다.
“……고마워, 욤뇽아.”
중얼거린 이온은 숨을 가라앉힌 뒤 방금 전 발생한 문제의 퀘스트 내용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의 눈이 한곳에서 멈췄다.
[……제멜 드루실라 크레이거의 적의…….]
퀘스트가 발동된 시점이나 완료 시 발동되는 효과를 생각하면, 한 가지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베일에 싸인 카밀루스의 어머니와 크레이거 공작이 어떤 관계로 얽혀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나쁘게…….’
누군가 그녀의 정체를 아는 것만으로도 적의를 쌓을 정도로.
지난 8년간 크레이거 공작은 그저 이온 크레이거를 사랑하는 아버지,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온은 그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가 무언가를 숨기리라고는 전혀 상정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뭔가 있어.’
……생각해 보면 의심할 만한 구석은 충분히 존재했다.
8년 전, 크레이거 공작은 카밀루스를 ‘혐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혐오는 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심지어 그때의 카밀루스는 탑에서 막 빠져나온 직후였는데…….
이온은 제가 놓친 부분을 되짚어 보다가 머리를 치는 얼얼한 충격에 한동안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