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너 이게 무슨 미친 짓이야.
연우는 도망가려는 헬리를 붙잡고 잘게 흔들었다.
[왜애.]
눈을 피한 드래곤은 꼬리를 흔들며 딴청을 피웠다. 헛웃음을 흘린 연우가 드래곤의 입가를 문질렀다.
너 입에 깃털 묻었어.
[뭐?]
짜리몽땅한 앞발로 입가를 더듬어보던 드래곤은 헤헤, 웃으며 연우의 눈치를 봤다.
빨리 치워. 남의 집에서 무슨 민폐야.
서늘한 시선에 꼬리를 말던 드래곤이 곁눈으로 차헌을 가리켰다. 황금빛 눈과 마주친 차헌은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외면했다.
[차헌이가 시켰어.]
“야!”
차헌의 가족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둘을 바라봤다. 허공을 노려보는 한연우나, 허공에 소리를 지르는 차헌이나 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그 소문이 사실인 거 아니야?”
“무슨?”
“에스퍼가 마수를 몰고 다닌다는….”
차헌의 조부모 때부터 대대로 이 구역에 살아왔지만, 한 번도 마수를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차헌이 오자마자 마수가 나타난다고? 차헌은 희게 질린 얼굴로 휘파람새를 쳐다보는 가족들 앞에 얼음벽을 세웠다.
“그래서 내가 안 온다고 했잖아.”
“강차헌. 일반인한테 이상한 오해 심지 마.”
볼이 꼬집힌 차헌은 달짝지근한 향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아래에서 라플레시아가 피고 있었다. 라플레시아가 만개하는 순간 그 속에서 나비들이 날아올랐다. 이 미친 드래곤이. 차헌이 흠칫거리며 물러나자, 인기척을 느낀 라플레시아가 천천히 덩굴을 뻗었다.
“차헌아!”
그 광경을 목격한 황유선의 외침에 나비들의 앞을 막아선 연우가 차헌을 당겨 제 뒤로 숨겼다. 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끌어안는 차헌의 손을 도닥이곤 천장을 배회하는 휘파람새의 꼬리를 잡아당겼다.
‘삐?’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가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나비를 발견했고,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휘파람새가 콰직거리며 나비를 씹어먹는 소리에 차헌을 포함한 온 가족들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것만 빼면 평화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떨어지는 나비의 날개를 붙잡자 차헌이 질겁했다.
“그걸 왜 손으로 잡아요!”
분진이 묻은 손을 탁탁탁 털어준 차헌은 꿈실거리는 라플레시아의 꿀을 얼렸다. 얼어붙은 꿀을 채취하자 화려한 꽃잎들이 순식간에 시들기 시작했다. 시든 라플레시아를 뿌리째 뽑은 연우가 드래곤 레어로 던져버리던 순간 비명이 들렸다.
“끄악!”
얼어붙던 라플레시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덩굴을 사방으로 뻗고 있었다. 곧바로 공간을 접은 연우는 가족들 앞을 막아서며 덩굴을 짓밟았다. 꿈틀거리는 덩굴을 잘라낸 연우는 쓰레기를 버리듯 던전에 라플레시아를 옮긴 뒤, 흐트러진 방석을 정리했다.
그런 연우 뒤로 휘파람새를 처리하는 차헌이 보였다. 습관적으로 실리를 대궁으로 변환시켰던 차헌은 주변을 둘러보다 크기를 작게 줄였다. 겨우 손가락에 걸릴 만한 크기로 변한 실리를 조준한 차헌이 화살을 날렸다. 추락하는 사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낚아챈 연우는 그 즉시 레어로 던져버렸다.
마수가 나타나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집을 정리하던 연우는 거실을 장식한 트로피를 눈으로 헤아렸다.
아버님이 아쉬워하실 만도 하네.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다음에 기회가 있을까. 아쉬운 눈으로 트로피를 쳐다보던 연우는 한쪽에 놓인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차헌이 오만상을 쓰고 과녁을 노려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가라앉은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웃음을 터트렸을 깜찍한 모습이었다.
“정리 끝났으니까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
“뭐?”
“앞으로 안부는 전화로 전할게요.”
차헌은 사진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연우를 일으켜 세우며 가족들에게 인사했다. 그 순간 가족들 앞을 지키고 있던 강도진이 달려와 차헌을 붙잡았다.
“어딜 가! 치료하고 가!”
“네?”
이끄는 손길에 소파에 앉자 황유선이 구급상자를 들고 달려왔다. 차헌의 손등과 볼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휘파람새의 꽁지깃에 스친 흔적이었다.
소독약을 듬뿍 적시던 황유선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고, 상처를 소독하던 강도진은 호통을 터트렸다.
“이래서 네가 에스퍼로 사는 게 싫었어!”
연고를 발라주고 반창고를 요령 있게 잘라 붙여준 강도진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 더운 게 뭐라고, 그거 조금만 참았으면 평범하게 살아갔을 거 아니냐. 아까 저런 것들 상대할 필요도 없이.”
걱정이 가득 담긴 중얼거림에 포션을 쥐고 있던 연우는 천천히 물러섰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차헌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일반인이 에스퍼를 진심으로 걱정할 수도 있구나.
미간이 간지러워 긁적이자 어느새 손목을 타고 올라온 드래곤이 손등에 고개를 문질렀다. 살짝 웃어준 연우가 팔찌로 변한 드래곤을 문지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기….”
차헌의 누나였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린 강지현은 연우의 손가락을 가리켰다. 라플레시아의 진액이 튄 곳이 부어올라 있었다.
“같이 치료받으시죠?”
“네? 아뇨.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찮다는 거절에도 강지현은 연우를 데리고 구급상자 앞에 앉았다.
“그쪽도 다쳤어요? 어디 봐,”
“어디 다쳤는데요? 여기? 다른 데는 괜찮아요?”
강도진의 말을 끊으며 끼어든 차헌은 연우의 손가락은 물론 몸 여기저기를 훑어내렸다. 괜찮다는 말에도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두피까지 확인한 차헌이 가방을 뒤적거렸다.
“비켜, 이놈아. 연고 좀 바르게!”
“에스퍼한테 연고 발라서 뭐 하게요. 효과 없어요.”
“안 바른 것보다는 나을 거 아니냐!”
차헌을 밀어낸 강도진이 화상 연고를 쭉 짜냈다. 봉긋 솟아오른 연고 위에 붕대가 감겼다. 밴드만 붙여주시면 된다는 말에도 강도진은 붕대를 고정한 다음에야 손을 놓아주었다.
“조심 좀 하지.”
뚱한 타박에 붕대를 내려보고 있던 연우가 작게 코를 훌쩍였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뭐야, 형 울어요?”
아니라고 웅얼거렸지만, 각인 이후 차헌의 감각은 더욱 예민해져 있었다. 눈물로 흐려진 연두색 눈동자를 보던 차헌은 강도진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빠 때문에 형 울잖아요!”
“뭐, 뭐? 이… 이 자식이! 결혼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어디 아빠한테 소리를 질러!?”
“결혼 안 했거든요!”
“그럼 저건 뭐야? 그, 뭐, 뭔 증명서가 왔던데.”
“각인 인증서에요. 그거랑 결혼이랑은 다른 거예요.”
“강지현 뭔 소리야. 차헌이 결혼했다며.”
“찾아보니까 에스퍼한테는 각인이 곧 결혼이라던데?”
각인이 곧 결혼. 중얼거린 차헌이 연우를 바라봤다.
들었죠? 그러니 우리 결혼해요. 라며 밑도 끝도 없는 청혼을 할까 봐 두려워 눈물도 쏙 들어갔다.
“있어 봐, 그러니까 결혼은 아니고 각인이라는 것만 한 거다?”
황유선의 물음에 차헌이 뚱한 표정으로 돌아앉았다. 아직 안 했다며 꿍얼거린 차헌이 연우의 손을 찾았다. 깍지를 껴오는 손을 밀어낸 연우는 자세를 고치며 부모님을 바라봤다.
“제가 먼저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렇게 인사드려서 죄송해요.”
“말을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중에 결혼 날짜 잡히면 한 번에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너는 결혼 생각이 있으면 우리랑 미리 상담했어야지. 대뜸 결혼할래요, 하면 그래 해라! 하는 부모가 어디 있겠냐.”
“그랬다가 형한테 차이면 어떡해요. 준비된 상태에서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차…일 생각이 있긴 했니? 수락할 때까지 고백하던 차헌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연우는 할 말을 잃은 채 그를 쳐다봤다. 연우와 눈이 마주치자 수줍게 웃는 차헌의 모습에 강도진이 그를 향해 돌아앉았다.
“나중에 자식을 낳아보면 알겠지만, 내 마음이 그래. 안 그래도 어린 나이인 데 부모한테 허락도 없이 결혼했다는 말에 내가 너무 욱해서 그랬어요.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저 같아도 화를 냈을,”
“형이랑 저는 애 못 낳아요.”
“그래? 에스퍼인데도 애를 못 낳아?”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의 순수한 질문에 당황한 연우는 차헌을 쳐다봤다. 차헌도 당황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남…자가 애를 어떻게 낳아요.”
“그건 다행이다. 아빠가 둘 다 에스퍼면 자식도 에스퍼로 각성할 확률이 높다고 하더라고. 손자 걱정은 안 해도 되네.”
한숨을 쉰 황유선이 연우의 등을 도닥였다.
“차헌이가 에스퍼가 된 다음 상태가 안 좋아서 많이 걱정했는데, 한연우 씨 만나고서는 웃더라고. 나는 그걸로 됐어요. 우리 아들 잘 부탁해요.”
조용히 웃어주는 얼굴에 연우가 또다시 바닥을 내려봤다. 연우의 눈가를 손으로 덮어준 차헌이 휴지를 찾았다.
“형이 어른한테 좀 약해요.”
강도진과 황유선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봤다. 제 눈물은 훈련복으로 대충 닦아내던 아들이 휴지를 곱게 접어 연우의 눈물을 닦아주는 모습에 두 사람은 조용히 눈을 맞췄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한숨을 쉬는 순간 짝! 하는 박수 소리가 들렸다.
“자,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
강지현의 재촉에 인사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현관이었다. 쭈뼛거리며 다가온 부모님이 다음에 또 놀러 오라며 보따리를 쥐여주었다. 아까 갈비찜을 맛있게 먹길래 좀 챙겼다는 말에 강지현이 콧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두 분이 말을 좀 험하게 해서 그렇지 차헌이도 그렇고 연우 씨, 아니, 제부도 많이 걱정했어요. 제부라고 불러도 되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지현과 차헌이 똑같은 얼굴로 방긋 웃었다. 이제 진짜 가라며 떠날 때까지 지켜보던 세 사람에게 인사한 연우는 공간을 접어 집으로 향했다.
가만히 호숫가를 지켜보고 있자 차헌이 안겨 왔다.
“기분 많이 상했어요?”
“괜찮다니까. 말했잖아. 헬리나 연화가 나한테 상담도 없이 결혼했다고 알리면 기분 나빴을 거라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그리고 각오한 것보다 좋게 끝났고.”
“그래도요…. 우리 가족이 형한테 너무 함부로 대한 것 같아서…. 형네 가족은 저한테 잘 대해주잖아요.”
웅얼거린 차헌이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쓸어주던 연우는 몸을 돌려 차헌을 끌어안았다. 쿵쿵 뛰는 심장에 물든 연우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언제 대답할지 고민하고 고민했는데, 차헌의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지금이 적기였다. 크게 숨을 고른 연우는 고개를 들어 차헌과 눈을 맞췄다.
“왜 너희 가족, 우리 가족 분리해? 내 가족이 네 가족이라며. 이젠 아니야?”
“…네?”
눈을 끔벅거리던 차헌의 얼굴에 천천히 환희가 번졌다.
“형, 그럼!”
차헌의 입을 틀어막은 연우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기 전 얼음이 소복하게 솟아올랐다.
“왜 맨땅에 앉아요.”
“헌아.”
“흐어, 네.”
두 손으로 얼굴을 덮은 차헌이 방방 뛰다가 연우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호수에서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박자에 맞춰 일정하게 뛰어오른 물고기 두 마리가 하트를 그리며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펑, 하고 피어오른 꽃들이 사방에 흩날렸다.
“드래곤 짓이에요?”
“그런가 봐.”
날뛰는 꽃잎을 보고 있자 신기하게도 긴장이 가라앉았다. 연우는 차분한 얼굴로 반지 상자를 꺼냈다.
“형….”
꽃잎과 함께 나부끼는 얼음 결정 한가운데 선 연우는 천천히 반지 상자를 열었다. 차헌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연두색 보석으로 장식된 반지를 내려보았다. 아니, 보석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난 차헌은 연우의 마나를 응축해 옅은 초록색과 황금색이 섞인 마나 결정을 뚫어지도록 바라봤다.
“와, 형 이제 이것도 만들 수 있어요? 아니, 왜 비밀로 했어요?”
“계속 실패하다가 이제 겨우 성공해서 그래.”
“그럼 이제 형 마나 코어 완전히 안정된 거예요?”
“응. 네 덕분이야. 차헌아, 이제 좀 진정하고 앉아 봐.”
“아, 넵.”
다시 앉자 연우가 반지를 꺼내 들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내가 너한테 많이 부족한 건 아는데,”
“형이 어디가 부족해요. 형만큼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형에 비하면 저는 진짜 아무것도,”
“차헌아.”
“넵.”
“나 청혼 좀 마저 해도 될까?”
“네….”
홀린 듯 다가오는 차헌의 손을 붙잡은 연우는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나랑 결혼해줄래?”
“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한 차헌이 연우에게 안겨들었다. 뻐근하게 벌어지는 팔 안으로 묵직한 무게가 들어찼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반지를 바라보는 차헌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자 화창한 하늘에 무지개가 그려졌다.
앞으로 시작될 신혼 생활을 알리는 축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