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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외전)-8화 (137/143)

8화

[연우야, 나 배 아파.]

그럴 줄 알았다. 게임기를 내려놓은 연우는 서늘한 눈으로 드래곤을 쳐다봤다. 드래곤은 몸을 웅크린 채 조금씩 기어 오고 있었다. 그러게 그만 먹으라고 할 때 그만 먹지. 드래곤을 안아 든 연우는 멀쩡해 보이는 차헌을 살폈다.

“너는 괜찮아?”

“네. 그리고 저도 그만 먹으라고 했어요.”

은근한 고자질에 드래곤이 눈만 치켜뜬 채 차헌을 노려보다가 축, 늘어졌다. 연우는 싸울 힘도 없는지 끙끙거리기만 하는 드래곤의 배를 길게 쓸어내렸다. 체한 건가? 동물 병원에 가야 하나?

차헌은 눈썹을 늘어트린 채 걱정하는 연우를 지켜보다 드래곤을 덜렁 들어 올렸다.

[이거 놔! 연우랑 같이 있을 거야!]

“차가운 거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 난 거 아니에요? 따뜻한 물에 넣어보게요.”

바둥거리는 드래곤을 들고 화장실로 이동한 차헌이 따뜻한 물을 틀었다. 연우가 뒤따라가 보자 어느새 조용해진 드래곤이 물줄기 아래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들어오지 말라고 손짓한 차헌은 뜨끈한 물에 손을 집어넣고 드래곤의 몸을 주물렀다. 한참 동안 주물럭거리던 차헌은 인상을 쓰며 연우를 불렀다.

“얘 열나는데요.”

“뭐?”

차헌이 얼음을 만들어 와르르 쏟아붓자 치-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솟아올랐다.

텁텁해진 공기를 휘저으며 시야를 확보한 연우가 드래곤을 살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헬리 좀 잡고 있어 볼래?”

연우는 차헌이 드래곤을 붙잡는 것과 동시에 레어로 이동했다. 축 늘어져 있던 드래곤은 몸을 키우며 둥지에 똬리를 틀었다.

“헬리. 혹시 탈피할 것 같아?”

[모르겠어. 아직 그만큼 안 자랐는데?]

드래곤의 말대로 그때와 비교해서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꽉 끼던 예전과 달리 둥지가 여유 있어 보이기도 했고. 진짜 배탈 난 건가? 좀 자고 일어나겠다는 드래곤에게 포션이라도 먹고 자라며 권하던 연우는 느닷없이 차헌에게 끌어안겼다.

“아, 저 문지기 다른 마수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다가온 종복들에게 둘러싸인 차헌은 연우의 목덜미에 이마를 박았다. 동굴이라 대부분 종복이 곤충형 마수였다. 괴로워하면서도 드래곤의 종복이라 공격하지 않는 모습이 대견했다.

[자기들 마음대로 따르는 거라서 못 바꿔.]

드래곤이 꼬리를 흔들자 주변을 맴돌던 종복들이 하나둘씩 흩어졌다. 연우는 허리에 매달린 차헌을 데리고 드래곤이 집이라고 부르는 창고로 향했다. 얼마 전까지 다섯 채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여섯 채로 늘어 있었다.

“형. 진짜 이 집만 팔아도 삼대는 먹고 살겠는데요.”

“그 정도야?”

그러니 이상원이 눈에 불을 켜고 혼자서 드래곤을 잡겠다고 뛰어들었구나. 한숨을 쉰 연우는 집 안에 꽉꽉 들어찬 던전 부산물을 둘러보았다. 산책하러 다녀오겠다 하더니 산책만 한 게 아니라 배도 채우고 왔나 보다. 던전 부산물이 이만큼 나올 정도면 얼마나 많은 마수를 사냥했는지 안 봐도 뻔했다.

잠이 든 드래곤을 두고 집으로 돌아오자, 차헌이 연우의 이마를 짚었다.

“왜?”

“쟤랑 형이랑 연결되어 있다면서요. 형은 괜찮아요?”

“나랑은 상관없을걸?”

이전에 탈피했을 때 연우는 아무렇지 않았었다. 아무리 계약 관계라지만, 설마 드래곤이 아프다고 같이 아프겠냐 했는데….

설마가 사람 잡았다.

새벽에 잠에서 깬 연우는 어질한 시야에 눈을 깜박였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셨다. 몸을 덮고 있는 이불도 거추장스러워 걷어내던 중 허리가 잡힌 채 끌려갔다. 서늘한 온기와 익숙한 체향을 느끼기도 전에 연우는 본능적으로 차헌에게 달라붙었다.

“…형 열나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태를 확인하던 차헌이 연우의 이마를 짚었다. 뜨끈한 열기에 드래곤을 향해 욕을 쏟아붓던 차헌은 베개를 끌어와 이능을 사용했다. 서늘한 베개에 이마를 묻은 연우가 살겠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어디 가?”

“목마를 것 같아서 물 떠오려고 했는데, 왜요? 어디 아파요?”

차헌을 빤히 바라보던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불까지 서늘하게 식혀준 차헌이 서둘러 부엌으로 달려가던 중, 용희가 연화의 방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한연우 씨 어디 아파요?”

“조금.”

“도와줄 거 있으며 말해요.”

“없어.”

고개를 젓는 차헌을 삐뚜름하게 쳐다보던 용희가 가이딩을 넓게 펼쳤다.

“마나 좀 가라앉혀줄래요? 언니한테 피해 가요.”

가이딩을 피해 뒤로 물러서던 차헌은 주위를 맴도는 얼음 결정을 발견했다. 손에 든 물병도 얼어붙어 있었다. 물병을 내려놓으며 진정하는 차헌을 보던 용희는 팔다리를 넓게 벌려 연화의 방문을 막아섰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네. 혹시 언니도 아프면 어떡해요.”

하품하는 용희를 뒤로한 차헌은 제 몸을 내려보았다. 분명 형과 저도 연결되어 있는데 열이 펄펄 끓는 연우와 달리 자신은 멀쩡하기만 했다. 저도 함께 아프면, 아니, 제가 대신 아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물에 마나 포션을 탄 차헌은 힘없이 늘어진 연우를 받쳐 안았다. 입가에 물병을 대어주자 힘없이 꼴깍인 연우가 졸리다며 눈을 깜박였다. 얼마 줄어들지 않은 양을 확인한 차헌이 제 입에 물병을 기울였다. 물을 머금은 채 입을 대자 연우가 조금씩 받아마시며 꼴깍,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차헌의 오랜 불안이 들끓었다. 닿은 입술이 잘게 떨렸다. 이러다 형이 정신을 못 차리는 건….

“나 괜찮아.”

차헌의 걱정이 전해졌는지 눈을 뜬 연우가 차헌의 볼을 쓰다듬었다.

“네 말대로 헬리가 아픈 거랑 연관이 있나 봐.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자는 것 같은데, 탈피하는 중인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연우가 차헌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성장하기 전에 탈피해서 몸에 무리가 오는 것 같다며 조곤조곤 알려주던 연우가 굳어있는 차헌에게 팔을 벌렸다. 차헌은 안겨드는 대신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형 나랑 각인해요.”

“응?”

당황한 연우는 잠옷을 벗기려 드는 차헌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느새 차헌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왜, 왜 울어.”

“나, 형 아픈 거 못 보고 있겠어요. 각인하면 감각을 나눌 수 있다면서요.”

“아니, 차헌아. 잠시만.”

차헌은 반쯤 벗겨진 연우의 잠옷을 내버려 둔 채 팔을 교차해 상의를 벗어 던졌다. 맞닿은 입술로 퍼붓는 마나에 입이 벌어졌다. 차헌이 혀를 밀어 넣으면 넣을수록 몸이 개운해지고 있었다.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지자 연우는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차헌을 붙잡았다.

“나랑 각인하기 싫어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연우는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하…기 싫으면 너랑 그런 짓을 안 했겠지. 지금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이능을 써서 도망갔을 거고. 조금만 진정해 봐. 응?”

차헌이 씨근덕거리는 숨을 가라앉힐 때까지 기다려주던 연우는 그의 손을 끌어 제 가슴 위에 올려두었다. 쿵, 쿵, 심장 박동이 이상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두 개의 마나 코어가 각자의 박자로 마나를 만드는 소리였다.

“형 마나 코어가 불안정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랑 각인해서 안정시키면 되는 거잖아요.”

“나도 알고 있어. 근데… 그러다 만에 하나 잘못되면 어떡해.”

“그전에 형이 잘못되면요.”

차헌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연우를 붙잡았다. 연우 혼자 아픈 걸 두고 보고 있느니 같이 아픈 게 나았다. 그러다 같이 죽으면 더 좋고.

“차헌아. 형 봐.”

볼을 붙잡은 연우는 말간 눈으로 차헌을 응시했다.

“나도 너 아픈 거 보기 싫어.”

차헌이 들을 준비가 될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리던 연우는 안겨드는 그의 등을 도닥거렸다. 예전에는 죽는 게 두렵지 않았다. 연화의 끝을 알았을 때부터 은연중에 자신이 대신 죽어야겠다, 다짐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차헌을 밀어낼 때도 두려움보다는 드디어 죽는구나, 는 생각으로 눈을 감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차헌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게 되었고, 연화가 어떤 식으로 망가졌는지 전해 들었다. 사랑하는 두 아이가 그렇게 사는 모습을 두 번 다시 보기 싫었다.

“그러니 최대한 안정된 다음에 각인하고 싶어.”

머뭇거리던 연우는 붉어진 얼굴로 덧붙였다.

“나도 너랑 그… 닿고 싶고, 하고 싶지….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언제까지요?”

“어? 어…. 적어도 드래곤이 성장한 다음에…?”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연우를 꼭 끌어안았다. 차헌의 불안을 확인할 때마다 죄책감이 심장을 조여댔다. 연화를 지키기 위해 차헌을 이용했던 과거가 후회로 변해 연우를 짓누르고 있었다.

“미안해.”

“다른 말로 해주세요.”

연우는 훌쩍거리는 차헌의 볼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자신은 미래를 바꾸려 차헌을 제멋대로 휘둘렀는데, 차헌은 제게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런 애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랑해.”

중얼거리자 차헌이 고개를 꺾으며 입을 맞춰왔다. 누르는 힘에 연우의 몸이 천천히 뒤로 넘어가자, 차헌의 몸이 겹쳐왔다. 달뜬 숨을 섞으며 입을 맞추던 때 연우가 악, 하는 비명을 질렀다. 깜짝 놀라 내려보자 드래곤이 옆구리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연우야아, 나 너무 간지러워.]

드래곤의 눈동자가 눈물로 어룽져 있었다. 차헌은 꼬리로 이곳저곳을 가리킨 뒤 여기가 너무 아프다며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드래곤을 노려보다 한숨을 삼켰다. 아프다고 우는 애한테 너 때문에 형도 아픈 거 안 보이냐고 따질 수도 없고.

옷을 챙겨입은 차헌이 드래곤에게 포션을 던졌다. 염력으로 뚜껑을 딴 드래곤은 온몸에 포션을 문질러 바르면서도 아프다며 연우에게 파고들었다.

아픈 와중에도 다급하게 레어로 이동한 연우가 밤새 포션을 발라주고 먹여주다 지쳐 잠들었을 때였다.

[연우야.]

뭔가 손등을 짚고 있었다.

[일어나.]

아니, 꼬집고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 연우는 좁쌀 같은 발톱과 손을 쳐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네발로 서 있던 드래곤이 천천히 두 발로 일어섰다.

“헬리!”

연우의 외침에 졸고 있던 차헌이 퍼뜩 일어났다. 뭔데요, 하는 물음에 드래곤이 차헌을 향해 가슴을 활짝 내밀었다. 감격에 겨워 축하하는 연우와 달리 이를 악문 차헌은 드래곤의 뿔 사이를 거세게 문질렀다.

“다음에도 너 때문에 형이 아프면….”

[네가 내 심장을 뽑지만 않았어도 정상적인 속도로 자랐을 거야! 그랬으면 연우가 안 아팠겠지!]

앙칼진 외침에 입을 다문 차헌이 집으로 가자며 연우를 바라봤다. 드래곤을 손에 올리고 어화둥둥 하는 연우를 바라보던 차헌이 케이크라도 사 오겠다며 나섰다. 발이 생겼다며 온 방을 쏘다니던 드래곤이 연우의 손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너 다른 생각 하는 거면 미리 말해줘. 너 잘못되면 차헌이랑 연화가 나 가만 안 둔댔어.]

“다른 생각?”

[또 죽어서 미래를 바꾸겠다던가… 하는 생각 말이야.]

“안 그래. 어제 차헌이랑도 얘기했어.”

그럼 됐다며 고개를 끄덕인 드래곤은 뿔로 연우를 쿡 찔렀다.

[빌고 싶은 소원도 없지?]

소원이라…. 중얼거리며 뿔 사이를 문질러주던 연우는 블루베리 케이크를 들고 돌아오는 차헌을 맞이했다. 신이 나서 차헌에게 들러붙던 드래곤은 블루베리를 하나 물고 연우에게 차닥차닥 걸어왔다.

[연우야. 있잖아. 우리 계약은 내가 성장할 때까지였지만, 앞으로 계속 같이 살아도 돼?]

“당연하지. 다리가 났다고 혼자 살 생각이었어?”

서운하다며 눈썹을 늘어트리는 연우에게 찰싹 달라붙던 드래곤은 차헌의 손에 잡혀 멀리 날아갔다.

얼마 뒤, 차헌이 드래곤의 알을 습득해 자신의 파트너에게 선물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평생 한연화의 오빠로 불리던 연우가 드래곤 마스터라는 새로운 호칭으로 불리게 될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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