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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외전)-7화 (136/143)

7화

수풀을 해치고 들어가자 샘물이 보였다. 돌담으로 장식된 샘물은 들어가서 몸을 씻어도 될 만큼 큼지막했다. 흐르는 물줄기 앞에 연우를 앉혀놓은 차헌이 얼음꽃을 피워 주변에 이물이 없는지 파악했다.

깨끗한 물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차헌은 연우의 손을 끌어 먹물을 씻어냈다. 먹물은 아무리 문질러도 끈적거리기만 할 뿐, 지워지지 않았다. 인상을 쓰고 있던 차헌은 주변을 둘러보다 땅에 널브러진 미역을 낚아챘다.

소금기가 날아가도록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 바위에 대고 비비자 보글보글 진액이 올라왔다. 그것들을 소중하게 모은 차헌이 연우의 손에 문지르자 까만 먹물이 씻겨나가며 회색빛 거품이 올라왔다.

“뭐로 씻은 거야?”

“미역 거품이요. 눈 감아요.”

어쩐지 바다 비린내가 나더라. 얌전히 눈을 감자 차헌이 속눈썹에 거품을 올려두었다. 연우는 깔끔하게 씻겨나간 먹물을 확인한 뒤 맑은 물로 얼굴을 헹궜다.

“발목은 왜 이래요?”

발목? 내려보자 굵은 밧줄에 쓸린 듯 생채기가 나 있었다. 아까 문어에게 잡혀 모래 속으로 끌려갔을 때 난 자국이었다. 차헌은 끈적한 점액이 남아있는 발목을 문질러보다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닌 상처를 걱정하고 있는 차헌을 보고 있자 가슴 한쪽이 간질거렸다.

이래서 차헌이 신경 쓰였나 보다. 저도 몰랐던 상처를 발견하고, 걱정해주는 이런 모습에서 나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게 되니까.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손을 뻗자 차헌이 얌전히 안겨 왔다. 말없이 차헌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연우는 귀 뒤에서 끈적하게 묻어나오는 먹물을 발견했다.

“너 이거 씻어야겠다.”

“묻었어요?”

열심히 미역을 문지른 연우는 귀 뒤에 묻은 먹물을 지워주다 말고 훈련복을 들쳤다.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린 먹물은 등까지 묻어 있었다.

“혀, 형?”

갑자기 훈련복을 벗기는 손짓에 차헌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면서도 지퍼를 내리며 연우를 도왔다.

“너 등에도 다 묻었다.”

“많이 묻었어요?”

“가만히 있어 봐.”

차헌이 그랬듯 닦아주려던 연우는 마음을 바꿨다. 행동에 제약이 생긴 정도가 아니면 대충 처리하고 나가서 정리하는 게 어떻냐는 말에 차헌이 시무룩한 얼굴로 옷을 챙겨입었다.

“왜? 불편해?”

“그건 아닌데…. 그…, 아니에요.”

“왜 말을 하다 말아. 뭔데?”

“아니, 오늘은 형이랑 같이 씻을 수 있을 줄 알았단 말이에요.”

다그친 끝에 듣게 된 대답에 연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방금 같이 씻지 않았나?

“그때, 백두 길드랑 던전 돌았을 때도 형이 같이 씻자고 했다가 그냥 나갔잖아요. 그래서 혹시, 설마, 오늘은 하고 기대했는데, 그냥 저 혼자 기대한 거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요.”

“같이 씻는 게 기대된다고? 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연우의 표정에 차헌이 허탈하게 웃었다. 벌써 두 번이나 그렇고 그런 짓을 했는데 차헌을 올려보는 연우의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형답다고 좋아해야 하나 이걸….

함께 씻으며 이런 짓 저런 짓을 할 기대로 부푼 아래를 내려보던 차헌은 자그만 희망을 담아 연우를 쳐다봤다.

“뭐… 불편하면 씻고 나올래? 나 헬리 좀 도와주고 올게.”

허망한 웃음을 흘리는 차헌을 두고 돌아선 연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쉬는 동안 몸을 안 움직여서 그런가,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돌아가면 대련 훈련부터 해야겠다고 다짐한 연우가 모래바람이 이는 쪽으로 공간을 접었다.

모래 폭풍 한가운데 위치한 드래곤은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조개를 꼬리로 후려치고 있었다. 입을 벌린 조개껍데기 사이로 거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품이 모래에 닿는 순간 칙,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처음 보는 마수였다. 생긴 건 앵무조개인데 속살은 바리조개의 색이라 호기심을 느낀 연우를 드래곤이 막아 세웠다.

[조심해. 거품이 산성이야.]

“비단조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너도 처음 봐?”

어느새 다가온 차헌도 연우와 함께 거품을 뱉는 조개를 살폈다. 비단조개라면 거품 색이 탁해야 하는데, 이 거품은 빛을 받아 무지개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뽀고로로 거품을 뱉던 조개는 다가오는 연우를 향해 위협적으로 입을 벌렸다.

[감히.]

딱, 딱, 소리를 내며 경계하는 조개를 날려버린 드래곤이 씩씩거렸다. 차헌 역시 얼음 화살을 날렸지만, 드래곤의 꼬리에 맞자마자 기절한 조개와 달리 얼음을 맞은 조개는 사납게 입을 벌렸다.

수중계 마수가 얼음에 강한 편이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타격이 없다고? 수상하게 여긴 연우가 차헌을 당겨 뒤로 숨겼다.

“헬리.”

[괜찮겠어?]

마른침을 삼킨 연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쉽게 잡을 방법이 있는데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견뎌보려 했지만, 드래곤이 입을 벌리고 그 안에서 불이 터져 나오는 순간 참지 못하고 공간을 접었다. 몸을 돌려 차헌에게 기댄 연우는 느리게 숨을 쉬며 그 품에서 안정을 찾았다.

“아직 힘들죠?”

“응….”

긴장으로 굳은 손을 꼭꼭 주물러준 차헌은 체온을 전해주려 연우를 끌어안았다. 조개를 처리한 드래곤은 다가오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기웃거렸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리 와.”

차헌과의 훈련 덕분에 이제 뜨거운 커피 정도는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뜨거운 걸 만지는 것과 불을 직접적으로 보는 건 별개였는지, 아직도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거….]

풀이 죽은 채 손목에 감기는 드래곤의 머리를 문질러주자, 드래곤이 선물이라며 진주 꾸러미를 내밀었다. 받아드는 순간 쯔적, 하는 소리와 함께 진주가 갈라졌다.

깜짝 놀란 연우가 진주를 던지고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차헌이 얼음벽을 세웠다. 그런데도 둘의 훈련복은 진주에서 순식간에 터져 나온 진액으로 질척해졌다. 놀라 굳어있던 것도 잠시, 발밑에 엉긴 진액에 연우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결국 넘어진 연우와 달리 버티고 있던 차헌은 진주와 진액을 확인했다.

“새로운 종인 것 같은데….”

“헬리. 멀쩡한 사체 있어?”

[박살 낸 거 있는 데 그거라도 챙겨올까?]

부탁한 연우는 진액 속에서 멀쩡한 진주를 골라 챙기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신종 마수가 나타나면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된다. 그럼 드래곤의 흔적은 어떡하지? 윤석현이라면 들어오자마자 눈치챌 텐데. 입술을 말아 물고 있던 연우는 휘청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차헌 역시 진주를 찾아다니다 크게 넘어진 뒤 일어나려고 애를 쓰다 주저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드래곤을 보고 있자, 심각한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형, 괜찮아요?”

“나는. 이게 쿠션 역할을 해서 별로 안 아프네.”

문제는 훈련복에 묻은 진액이었다. 엉금엉금 기어 진액 뭉치에서 벗어난 연우가 주변을 얼리고 있는 차헌을 뽑아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에구, 그대로 있어.]

드래곤은 모래인지 사람인지 구별되지 않는 두 사람을 염력으로 들어 올려 바닷물에 담갔다 빼기를 반복하며 모래를 털어냈다. 그동안 흩어져 있던 진액이 구물구물 모여들며 형태를 만들었다.

“본체는 이쪽이었나 보네요.”

따라쟁이라고 불리는 바다 슬라임을 해치운 차헌은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었다. 연우는 따가운 눈을 어쩔 줄 몰라 하다 차헌의 손을 잡고 다시 샘물로 이동했다.

“이쯤 되면 보스가 나타나야 하는데, 왜 안 나타나지.”

“드래곤 보고 도망간 거 아니에요?”

연우는 몸집을 키운 채 헤엄치는 드래곤을 보다가 말없이 수긍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다 수색하자는 말에 동의한 둘은 샘물에 발을 담근 채 서로에게 몸을 기댔다. 물장구를 치는 차헌과 잠시 장난을 치던 연우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있잖아, 협회장이 준 집 얘기 꺼낸 거. 아쉬워서 그래?”

“네?”

“괜찮다고 했지만, 같이 살기 불편해서 말 꺼낸 거 아니야?”

“아니에요. 불편은 무슨, 저는 마구간에 살아도 형이랑 살 건데요.”

마구간이라니. 연우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차헌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바닷가 왔으니까 생각나서 물어본 거였어요.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어차피 사는 공간도 분리되어 있는데.”

“아니, 그냥. 고마워서. 연화 하나도 불편할 텐데 나한테 딸린 식구가 몇이야.”

“형 가족이면 내 가족이나 마찬가진데 그게 왜 불편해요. 신경 쓰이면 얼른 결혼이나 해요. 그럼 진짜 가족 되는 거니까 형이 신경 안 써도 되잖아요.”

이 상황에 청혼할 줄이야.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웃음을 흘리고 있자, 차헌이 몸을 바짝 붙여왔다.

“형한테 1순위는 평생 한연화일 거라는 거 각오하고 있어요. 각오하고 있다고 괜찮다는 건 아니고. 그걸로 섭섭해하기는 할 건데, 그때마다 형이 좀 잘 달래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니 형은 계속 한연화를 지켜요. 형은 내가 지킬 테니까.”

그렇다고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고. 볼을 비비는 차헌의 온기와 다정한 말에 가슴속에서 풍선이 부풀어 올랐다. 숨을 쉬기도 힘들 만큼 커진 풍선에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팔을 뻗은 연우는 차헌을 힘껏 끌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애가 나를 왜 좋아하는 걸까.

“땅굴 파지 말고 나한테 뽀뽀나 해줘요.”

볼을 내미는 차헌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 연우는 눈물에 반짝거리는 눈으로 약속했다.

“네가 섭섭해할 때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달래줄게. 그러니 너도 불만이 있으면 나한테 꼭 얘기해 줘. 내가, 내가 진짜 잘할게.”

다짐하듯 입술에 꾹, 뽀뽀하는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은 차헌이 입을 벌렸다.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 혀를 붙잡아 진득하게 키스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던 센터 직원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죠?”

“센터장님이 극구 사양하셔서 두 분만 보내긴 했는데, 안에서 무슨 일 일어난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이 들어간 건 하급 던전이었고, 차헌의 실력으로는 두 시간이면 공략을 끝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초조해하는 직원들을 진정시키던 윤석현이 시간을 확인했다.

다섯 시간. 후발대를 들여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때 게이트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윤석현이 달려가 차헌과 연우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저기 혹시 한연우 에스퍼는 보면 닳는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차헌은 날을 세우며 윤석현을 경계했다. 노골적인 태도에 쓰러진 연우를 걱정하던 직원들이 큼, 흠, 헛기침하며 눈짓을 교환했다.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떨떠름한 얼굴로 차헌을 쳐다보던 윤석현은 아! 단말마를 지르며 눈을 붙잡았다. 차헌의 훈련복은 물론 연우의 훈련복에도 하얀 액체가 굳어 있었다.

“와! 설마! 센터장님!”

진주와 수거해온 조개 마수 사체를 꺼내던 차헌은 따가운 질타에 훈련복을 확인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억울하게도 아니었다. 비슷한 짓을 하긴 했지만…. 애틋한 얼굴로 연우를 바라보는 차헌의 시선에 윤석현의 표정이 점점 썩어들었다.

“이거. 바다 슬라임의 본체 같은데 확인해보시고 던전은 확인하지 마세요.”

“해달라고 해도 안 할 겁니다.”

“그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말하지 마세요! 안 궁금하다고!!”

안 궁금하다면 다행이고. 사뿐사뿐 떠나는 차헌의 뒤로 눈을 씻게 물을 가져오라는 윤석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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