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125화 (125/143)

125화

“재판 기록 4793 촬영 시작합,”

“하-암.”

“아, 하품 소리 들어갔잖아요. 고개라도 돌리고 하든가.”

새로 녹화를 시작한 윤석현이 두어 걸음 물러나 차헌을 돌아보았다. 눈 밑이 퀭했다. 하루종일 집에 처박혀 있었다더니 잠도 안 자고 뭐 했대? 호기심이 동한 윤석현이 손을 슥 뻗자, 얼음벽을 세운 차헌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대로 잠이 들 기세라 윤석현이 놀라서 얼음벽을 두드렸다.

“아니, 나야 증인으로 불려왔다지만 센터장님은 아니잖아요. 이럴 거면 왜 나오셨대?”

안 가고 싶었는데 연우가 보고 오라고 쫓아냈다. 다른 길드장 전부 참여하는데 너만 참여 안 하면 센터가 뭐가 되겠냐고.

사람이 이상한 곳에서 착실하다니까. 입을 삐죽인 차헌은 재판석을 슥 훑어봤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협회 직원들의 기세가 얼마나 흉흉한지 사태와 관련 없는 사람들도 눈치를 볼 정도였다. 미래가 정해진 대로 흘러가도록 애쓰는 것에 사활을 걸었던 협회였다. 그걸 건드리려 한 이상원이나, 팔아먹은 우규정이나 가만두지 않겠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한숨 쉬는 차헌을 힐끔거리던 윤석현 역시 소파에 몸을 묻고 핸드폰을 내려보았다. 차헌도, 윤석현도 관심이 없으니 기록용 카메라만이 재판장을 내려보았다.

“재판 시작합니다.”

이능력자의 재판은 비능력자의 재판과 다른 점이 많았다. 일단 검사, 변호사가 없었다. 판사의 자리에는 협회장. 협회장의 좌우에는 제비뽑기에 걸린 길드장들이 앉았다. 오늘은 라운드 길드장과 버베나 길드장이 뽑혔다. 그들의 왼편에는 배심원들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투표에 따라 판결이 나뉠 것이다.

“정영환 에스퍼 소환합니다.”

희미한 빛과 함께 재판석에 나타난 정영환에 윤석현이 잉? 소리를 내며 몸을 세웠다. 그렇게 건장하던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도 저렇게 조져놨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과거의 정영환은 끌어내는 그 순간까지 당당했다. 저렇게 초라해질 줄 몰랐는데. 눈썹을 치켜올린 차헌은 눈을 빛내는 정영환을 가만히 응시했다.

정영환은 자리에 앉으라는 말에도 자신이 센터의 부흥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그 노력을 알아달라며 사방에 호소하고 있었다. 협회에 휘둘리지 않고 길드에 짓눌리지 않는 강인한 센터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긴, 아무리 정부의 기관이라지만 협회와 분리되어 있는데 그동안 협회의 간섭이 심하긴 했다. 청하 길드의 견제도 그랬고.

그래서 미래를 조금 비틀려고 했던 것뿐 이상원을 해치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이능을 잃은 자신도 피해자라는 호소가 재판장에 우렁우렁 울렸다. 잘했다고 박수라도 보내줘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협회장이 허공에 선을 그었고 곧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 알겠고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정영환 에스퍼가 소환된 건 일단은, 미성년자 에스퍼 관련법을 위반해서입니다. 강차헌 에스퍼와 제대로 된 계약서도 쓰지 않고 훈련에, 실전에, 뭐. 직접적으로 학대를 하신 건 없지만, 방관하셨던 건 사실이다. 그죠?”

차헌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정영환이 이쪽을 올려보았다. 뭐라고 열심히 뻐끔거리는데 협회장의 이능 덕분에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입 모양을 보니 대충 네가 뭐라고 말해달라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착각을 하는 거지? 차헌이 입을 여는 순간 그의 죄는 더 무거워질 뿐이다.

“확인해보니 사관학교도 뭐, 이건 다녔다고 해야 하나요? 제대로 이능 숙지도 못한 에스퍼를 센터에 데리고 온 것부터 학대입니다, 학대.”

그런 에스퍼를 센터장에 앉혀둔 건 어디에 누구시더라. 차헌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협회장을 보고 있을 때, 배심원들의 머리 위로 자그만 등이 떠올랐다. 배심원들이 유죄라고 생각한다면 빨간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초록불이 들어올 것이다.

“잠시만요.”

차헌이 손을 들자 센터장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의 구원자가 되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아… 아, 잠시 잊었네요. 그, 일단 판결을 내리기 전에 임시 센터장인 강차헌 에스퍼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전 센터장, 그러니까 정영환 에스퍼가 진 빚은 어떡하냐, 는 질문이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봅니까?”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백두 길드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옆에 앉은 무영 길드장 역시 긴 팔을 쭉 들어 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 앞으로 오세요.”

협회장의 손짓에 두 사람이 달려가자 살랑거리는 바람이 소리를 차단했다. 세 사람을 지켜보는 센터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게 보였다. 그러게, 빌린 돈은 재깍재깍 갚아야지. 혀를 끌끌 차는 동안 얘기가 끝났는지 바람이 흩어졌다.

“정영환 에스퍼는 판결을 받기 전에 각 길드장에게 빌린 돈이 얼마인지 계산부터 정확하게 해봅시다.”

차헌이 작게 주먹을 쥐었다. 백두 부길드장은 환호성을 지르다 차헌에게 양 엄지를 날렸다. 빚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갚으려면 깨나 고생할 것이다. 갚다 갚다 못해 백두 길드의 실험체가 될지도 모르지. 그러게, 누가 센터 재건하라고 준 돈으로 사치하라 그랬나.

정영환이 사라지자, 문이 열리며 직원들이 들어왔다. 직원들의 손에는 사지가 결박된 이진희가 들려있었다.

“혓바닥 아래에 구속구가 숨겨진 걸 발견했어요. 아니지, 숨겨놓은 게 아니라 아예 박아놨더라고요.”

윤석현은 속이 좋지 않다며 헛구역질을 했다. 곱게 키운 눈에게 그딴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며 몸서리친 윤석현은 이진희의 손목을 묶고 있는 구속구를 가리켰다.

“보여요? 이진희가 자체 개발한 거라는데, 무영 길드가 만든 것보다 훨씬 지독하니까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요. 구속구를 착용한 대상과 접촉한 사람들의 이능도 차단해요.”

그래서 내가 이능을 못 썼던 거야. 윤석현이 분해서 중얼거리는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린 차헌은 일정한 꼬임이 반복되는 구속구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쓰레기 같으니.”

“왜요?”

“못 들었어요? 저 인간 8구역 대참사 피해자래요. 그때 한연화 에스퍼가 못 막았다고 저 지랄 떨었다잖아요. 그때 한연화 에스퍼가 열한 살인가 그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배재영 에스퍼랑 무리를 키워왔나 봐요. 언젠가 복수를 하겠다고.”

아. 어디서 봤는지 알겠다. 배재영이 빌려준 반지였다. 냉기 저항 아이템은 무슨. 손에 얼굴을 묻은 차헌이 이를 악물었다. 드래곤이 없었다면 이능을 잃은 연우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휘날리는 얼음결정을 낚아챈 차헌이 손을 들었다. 저것들이 살아있는 동안 처제는 물론 형도 계속해서 위험에 빠질 것이다. 미쳤다고 그걸 두고 봐.

“판결은 제가,”

차헌이 일어나기도 전에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벌떡 일어난 로터스 길드장 발아래, 땅이 얕게 패여 있었다.

“박성광 에스퍼. 법정 내 이능 사용 금지입니다.”

“죄송합니다.”

깍듯하게 사과한 로터스 길드장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이진희를 바라봤다.

“모두 아시듯, 한연화 에스퍼의 보호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 마구니는 물론, 마구니를 따르는 모든 이의 판결이 역시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온화하게 말을 마친 로터스 길드장은 차헌을 쏘아보았다.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말라는 시선에도 차헌은 협회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일단 증인의 말부터 들어보죠. 증인 정은영 에스퍼를 소환합니다.”

재판석이 길어지며 나타난 정은영은 보기 힘들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도 못해 몇 번이나 헛발질하다 바닥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어딘가 낯이 익다 했더니, 몇 번 본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연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자, 너무 겁먹을 필요 없습니다. 이진희 에스퍼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그 무리에서 본인이 어떤 일을 했는지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마,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이 사람이 뭘 했는지도 몰라요.”

가느다란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하던 정은영은 눈물을 터트렸다. 숨이 넘어갈 듯 서럽게 우는 목소리에 협회장이 안경을 치켜올리자 수십 장의 사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진희와 배재영, 그리고 정은영이 함께 어울리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은영 에스퍼가 보기에도 아무것도 모른다기에는 너무 자주 어울린 것 같지 않습니까? 배재영 에스퍼야 같은 구역이니 그렇다 쳐도, 이진희 에스퍼와는 접점이 없을 텐데요.”

사진을 보며 훌쩍거리던 정은영은 온몸이 결박된 이진희를 힐끔 쳐다보았다. 방청석에 앉아있는 차헌도. 여기저기 시선을 주며 한참을 머뭇거리던 정은영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욕하는 거에 어울려 준 것뿐이에요.”

“누구를?”

“하…한연우요, 아니, 한연우 에스퍼요.”

“아, 단지 한연우 에스퍼를 욕하기 위해, 한연우 에스퍼를 해치려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진짜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속상해서,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다들 그 정도는 하잖아요!”

정은영은 배심원을 쳐다보며 호소했지만, 배심원의 시선은 서늘하기만 했다. 사고로 가족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은 정은영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가 한연우를 욕하고, 한연화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며 뭉뚱그리는 태도에 대놓고 혀를 차는 배심원도 있었다.

“정은영 에스퍼의 말대로라면 사고를 겪은 모든 사람이 배재영 에스퍼나 이진희 에스퍼와 함께 어울려야 했을 텐데, 그들과 어울린 건 정은영 에스퍼가 유일했습니다. 끝까지 모른다고 하시니…. 백두 길드장? 자백제가 준비되어있나요?”

복귀한 백두 길드장이 환한 얼굴로 자백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정은영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니,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자백제를 드신 이후 확인하도록 하죠. 이제… 보자, 이상철 에스퍼 소환하겠습니다.”

“올까요?”

윤석현의 물음에 차헌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차헌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는 걸 눈치챈 토벌대들은 이상원이 얼마나 이기적인 인간이었는지 털어놓았다. 같이 고생했는데 실적은 8 대 2로 나누었고, 이상원이 8 자기들이 2였다며 울분을 토했다. 아이템을 획득해도 차례가 공평하게 돌아가기는 무슨, 이상원이 죄다 쓸어갔다고.

차헌이 가상 던전 훈련을 받을 때 마수를 풀어놓으라 시킨 것도 이상원의 지시였다는 직원의 자백에도 이상철은 아들을 감쌌다. 그렇게 단단한 애정을 깨트린 건 한연화의 책이었다. 이상원의 죽음에 안도하는 협회 직원의 태도를 수상하게 여긴 이상철은 각종 뇌물과 협박 끝에 자신의 아들이 어떻게 죽는지 알아냈다.

모두를 구한 것도, 역경과 시련을 이겨낸 것도 아닌,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다 죽었다는 걸 확인한 이상철은 그대로 잠적했다. 협회의 소환에도 응하지 않는 걸 보면 아들과의 연을 끊어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영웅으로 살아갈지, 아들을 끌어안고 같이 몰락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음, 이건 잠시 보류하도록 하고. 정영환 에스퍼의 판결부터 마무리 짓겠습니다.”

정영환은 소환되자마자 차헌에게 뭐라 뻐끔거렸다. 차헌은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지금 말고 예전, 시간을 돌리기 전에는 정영환과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왜 나에게 아무런 훈련도 시켜주지 않는지, 왜 나를 던전에 밀어 넣는지, 왜 나를 이용하는지, 내가 정말 이상원의 대항마가 되길 원했다면 왜 이상원이 나를 괴롭힐 때 도와주지 않는지.

차헌은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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