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연우야, 나 이제 배불러.]
그렇겠지. 마나 코어 하나도 배부를 텐데 샐리맨더 마석도 몇십 개나 먹어 치웠으니까. 연우는 손을 뻗어 발아래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드래곤의 배를 쓰다듬었다. 소화될 때까지 얌전히 누워있던 드래곤이 끅, 작게 트림하자 콧구멍으로 연기가 터져 나왔다.
[봤어?!]
연우가 대답하기도 전에 몸집을 줄인 드래곤이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드래곤은 입을 한껏 벌리고 뻐끔거리다가 몇 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한번 힘차게 입을 벌렸다.
그 순간 화륵, 하고 드래곤의 입에서 불길이 튀어나왔다. 라이터의 화력보다 작은 화력이었지만, 불은 불이었다.
[연우야!]
드래곤은 감격에 가득 찬 목소리로 연우의 이름을 외치며 주변을 빠른 속도로 기어 다녔다.
“인제 그만.”
한두 번은 흐뭇하게 들어주던 연우가 드래곤을 붙잡았다. 붙잡힌 채로 꼬리를 바둥거리면서도 좋아하던 드래곤이 연우의 손아귀를 벗어나던 때였다.
“어?”
드래곤의 꼬리가 두 개로 갈라져 있었다.
“뭐야.”
당황한 연우가 갈라진 꼬리를 붙잡았다. 쯔즈즉, 하고 떨어지는 감촉에 연우가 화들짝 놀라며 드래곤과 눈을 맞췄다.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연우와 달리 드래곤은 태연한 얼굴로 꼬리를 흔들었다.
[나 탈피하려나 봐.]
“뭐?”
[흠. 내가 좀 많이 자라긴 했지.]
드래곤이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내밀고 있을 때, 연우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벗겨지는 허물을 붙들었다. 잘 먹이고 잘 재우면 자라는 줄 알았더니 탈피도 한다고?
[당연하지?]
드래곤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 뒤 연우의 손목에 감겨 팔찌로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우는 작게 침음을 흘렸다. 외형을 바꿔도 탈피에 영향을 받는 건지, 팔찌는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너덜너덜하게 변해 있었다.
[흠. 아무래도 탈피가 끝나고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언제 끝나는데?”
사람은 키워봤지만, 드래곤은 처음인 연우를 위한 드래곤의 속성 강의가 시작되었다. 드래곤의 탈피는 에스퍼의 각성열과 증상이 비슷하다고 했다. 각성열을 앓을 때 가이드가 있으면 도움이 되듯, 던전 마나가 있어야 안전하게 탈피를 할 수 있다고.
“그럼 탈피가 끝나고 나가는 게 좋겠네.”
연우가 동의하자 폴짝 뛰어내린 드래곤이 본 모습으로 변했다. 배가 불러서 그런가 드래곤은 벌렁 드러누운 채 눈을 끔벅거렸다. 뒹구는 드래곤을 뒤로하고 연우는 동굴을 둘러보았다.
같은 동굴이지만, 드래곤이 원래 살던 동굴과는 달리 습도도 높고 여기저기 박쥐 똥도 떨어져 있어 쾌적하지 못한 환경이었다. 여기서 탈피를 하다간 분명히 무언가에 감염될 게 분명했다. 작게 혀를 찬 연우가 드래곤에게 손을 내밀었다.
“헬리, 이리 와.”
[나 졸려.]
“네 레어 좀 알아보고 돌아가게, 일어나.”
[저건 어떡하게?]
연우는 엉망이 된 이상원을 쳐다보며 고민했다. 책 속의 차헌은 드래곤에게 당한 사람들의 시체를 하나하나 모아 함께 빠져나갔었다. 책대로 진행하려면 이상원의 시체를 챙겨 나가야 했지만, 시체에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정신계 에스퍼 몇몇을 생각하니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 챙겨놨다가 나중에 쓸 일이 있으면 그때 써야겠다. 생각을 끝낸 연우는 보존 기능이 있는 압축 아이템을 꺼내 이상원 위로 펼쳤다.
“아, 맞다.”
손목에서 실리를 빼내던 때였다. 실리가 반갑다는 듯 빠르게 깜박거렸다. 왜 이제 왔냐며 투정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실리를 가방에 챙겨 넣은 연우가 아이템을 작동시켰다.
연우는 작게 줄어든 이상원의 시체를 우규정이 담겨있는 가방과 함께 잘 챙긴 다음, 드래곤을 붙잡고 공간을 접었다.
드래곤은 졸린다고 칭얼거리면서도 새로운 던전에 도착할 때마다 여긴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긴 저래서 마음에 안 든다며 퇴짜를 놓았다. 연우는 참을성 있게 공간을 넘어 다니며 던전을 둘러보았고, 그렇게 몇 번을 이동한 다음에야 둘의 마음에 쏙 드는 던전을 고를 수 있었다.
[여기가 좋아.]
연우는 동굴 안을 탐색하는 드래곤을 지켜보다 마나 포션을 꺼내 마셨다. 연속해서 공간을 접었더니 무리가 왔는지 마나 코어가 거세게 뛰고 있었다. 연우는 천천히 호흡하며 던전 마나를 흡수했다.
마나 코어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연우는 저린 손을 주무르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담하긴 했지만, 드래곤이 터를 잡으면 금방 커질 것이다.
[그럼 이제 여기가 우리 집~]
드래곤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동굴을 둘러보다가 꼬리로 연우의 몸을 감아 종유석 위에 올려놓았다.
[거기서 눈 감고 10초만 세.]
얌전히 눈을 감자 등 뒤로 일렁이는 열기가 느껴졌다. 연우는 무언가 녹아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에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드래곤과 이상원의 싸움을 지켜볼 때부터 떨리던 손끝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동굴형이라 더 그런 거겠지. 연우는 불안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려놓은 뒤 깊게 심호흡했다. 드래곤은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이 던전은 당장이라도 빠져나갈 수 있다. 반복해서 중얼거리는 연우에게 드래곤이 다가와 손끝을 살짝 깨물었다.
[괜찮아?]
연우가 고개를 끄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드래곤이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가자 거대한 둥지가 있었다. 주변의 광석을 녹여 만들었는지 둥지는 주변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천천히 기어들어 간 드래곤은 꼭 끼는 둥지가 불편하지도 않은 지 혀를 날름거리며 하품했다.
[저기는 연우 집.]
“내 집?”
드래곤이 꼬리로 가리키는 곳에는 한쪽 벽이 뚫린 네모난 구조물이 있었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는 뭔가 괴상한데…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나도 여기 살아?”
[그럼 나 혼자 두고 가려고 했어?]
연우는 삑삑거리는 드래곤을 올려보았다. 드래곤이 작은 사이즈였다면 탈피하는 동안 누가 홀랑 잡아먹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탈피하면 얼마나 더 커질까,부터 걱정되었다. 걱정을 안 하려야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래곤은 강해져 있었다. 그러나 드래곤이 곁에 있기를 바라니 탈피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맨몸으로 온 것도 아니고 가방 안에 침낭도 있고, 먹을 것도 챙겨왔으니까.
하지만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전화를 조금만 늦게 받아도 걱정에 미쳐버리는 사람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양보해야지.]
웃음을 흘린 드래곤이 몸집을 줄이며 연우의 볼에 머리를 문질렀다.
[나 없다고 울지 말고?]
“너야말로.”
작게 미소 지은 연우가 보고만 하고 찾아오겠다며 약속했다. 고개를 끄덕인 드래곤은 졸려서 안 되겠다며 꾸물꾸물 둥지로 들어갔다.
연우는 감각을 펼쳐 동굴을 탐사했다. 던전에 도착하자마자 대부분의 마수가 겁을 먹고 도망갔지만, 몇몇 마수는 드래곤의 힘에 경외심을 느낀 채 스스로 종복이 되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훌륭한 경비원이 되어줄 지네 마수와 두더지 마수를 확인한 연우는 숨을 참으며 공간을 접었다.
“들려?”
[…나 잘래.]
큐브에 도착한 연우가 작게 속삭이자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한 연우는 챙겨뒀던 꽃가위를 꺼내, 곧바로 호수 안으로 들어갔다. 131번 큐브의 유일한 마수인 카시노 옥잠은 수면 위를 떠다니다 연우를 피해 도망가기 시작했다.
연우는 연구를 위한 최소한의 줄기만 남겨놓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카시노 옥잠을 잘라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 닥치는 대로 잘라놓고 보니 한 뼘도 되지 않은 줄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무했지만 보고서를 쓰기 위해서라면 이거라도 챙겨야 했다.
연우는 호수에서 빠져나와 물기를 짜내다 말고 위험 구역 한쪽에 놓인 큐브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익숙한 파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공간을 접어 큐브로 향하자 아니나 다를까 차헌이 연우를 맞이했다.
“아니, 네가 여기 왜 있어?”
“와. 형은 보자마자 그것부터 물어봐요? 다른 할 말은 없어요?”
“아니, 여기가 오며 가며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곳이 아니잖아.”
“내가 뭐 형 보러 온 줄 아나. 카시노 옥잠 연구하러 왔거든요.”
꿍얼거리던 차헌이 손을 뻗어 연우의 훈련복을 쥐었다.
“그래서 뭐… 싫어요?”
연우는 꾸물거리는 손가락을 내려보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 이렇게 귀여운 게 다 있지. 손에 든 물건만 아니었다면 볼을 꼬집어봤을 것이다.
연우가 카시노 옥잠 줄기와 꽃가위를 갈무리해 내려놓자 차헌이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그 며칠 못 봤다고 연우도 차헌의 품이 매한가지로 그리웠었다. 홀린 듯 다가가던 연우가 흠칫, 멈춰 섰다.
“왜요?”
“잠시만, 나 샤워부터 하고.”
한 발짝 물러나자 입을 삐죽이고 있던 차헌이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연우는 진흙에 젖은 전투화를 벗으며 축축한 훈련복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연우가 갈아입을 옷을 챙겨 화장실로 가는 동안 차헌은 땅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뺨을 두들겼다.
저 형은 진짜 샤워할 생각밖에 없어! 정신 차려!
씻고 나오자, 차헌이 상을 차리고 있었다. 식탁 위로 가지런히 음식을 내려놓던 차헌은 연우를 보며 도끼눈을 떴다.
“왜?”
“내가 형 이러고 살 줄 알았어요.”
차헌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물과 우유만 들어있었고 옆에 놓인 선반에는 시리얼만 놓여 있었다. 혀를 끌끌 찬 차헌은 연우의 손을 잡고 식탁으로 향했다.
“형 진짜 저런 것만 먹고 살다간 영양실조로 한 번에 훅 가요. 적어도 빵이라도 먹고 살아요.”
차헌은 제가 한 번씩 와서 검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아.”
“아?”
입을 벌리자 유부초밥이 들어왔다. 한입에 먹기 너무 큰 사이즈라 적당히 베어먹었는데, 차헌이 나머지 조각을 입에 넣었다.
“괜찮아요?”
잘게 찢어 마요네즈와 버무린 크레미는 유부초밥과 제법 잘 어울렸다. 맛있다고 답하자마자 다음 유부초밥이 다가왔다. 제가 먹을 수 있다며 거절해도 차헌은 계속해서 연우의 입가로 유부초밥을 날랐다.
“뭐가 제일 맛있어요?”
포기하고 유부초밥을 받아먹던 연우가 연어를 다져 올린 유부초밥을 가리켰다. 앞으로 참고하겠다며 차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더 먹으라며 유부초밥을 내밀었다.
“나 진짜 많이 먹었어. 더는 못 먹어.”
“한 개만 더요.”
작게 한숨을 쉰 연우가 입을 벌리자 차헌이 연어가 올라간 유부초밥을 쏙 넣어주었다. 질린 표정으로 하염없이 씹는 연우를 두고 차헌이 식탁을 정리했다. 제가 하겠다며 거절해도 차헌은 머리카락부터 말리라며 연우에게 수건을 건네줄 뿐이었다.
몇 분간 물소리가 이어지다가 뚝 끊기더니 차헌이 양손에 컵을 들고 다가왔다. 컵에는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뭐야?”
“코코아요.”
연우가 마른침을 삼키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차헌은 연우의 손을 끌어 제품에 가두었다.
“못 견디겠으면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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