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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96화 (96/143)

96화

“물론 우리도 그냥 두고 보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 안심하게.”

센터장의 말에 잔을 들어 올린 차헌은 가만히 얼음을 내려보았다. 그 시선에 차헌이 술을 꺼린다고 오해한 것인지 센터장이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스퍼 적으로 미성년자인 거지, 법적으로는 강차헌 에스퍼도 성인이지 않은가. 편히 마시게. 그냥 어른한테 술 배운다고 생각하고.”

어른은 무슨. 작게 코웃음 친 차헌은 잔을 내려놓았다. 센터장의 말대로 위스키에는 그 어떤 불순물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뭘 탔으면 좋았을걸. 지금 이 자리에서 확 신고해버리게.

“어떤 방식으로 두고 보실 건데요?”

차헌의 질문에 센터장이 바라던 질문을 들었다는 듯 짙게 웃었다. 어차피 제 약점이 연우인걸 아는 사람이고, 그걸 숨길 생각도 없었다. 차헌이 바라는 건 오직 연우의 안전이었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센터장의 꼭두각시 노릇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

보란 듯 여기저기 찔러보고 다녔으니 이쯤 되면 몸이 달대로 달았겠지. 센터장이 조급해져야 차헌이 원하는 조건을 제시하기도 수월했다.

“그거야 강차헌 에스퍼가 하기 나름이지.”

센터장이 원하는 건 예전과 똑같았다. 차헌이 센터와 계약해 이상원의 대항마가 되어줄 것. 청하 길드와 뛰어난 능력을 등에 업은 이상원은 세력을 키우며 센터장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차헌이 센터의 두 번째 토벌대장이 된다면 이상원에게 몰린 세력이 어느 정도 분산될 것이고, 센터장은 더 안정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될 것이다.

차헌이 이상원처럼 사특한 마음을 먹고 제 자리를 넘볼 수 있으니, 말 잘 듣는 개가 되도록 방치하고 외면한 것이다. 이능에 미숙한 차헌이 실수를 저질러야 자신의 개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센터장이 착각하고 있는 건, 차헌의 목에는 이미 목줄이 걸려있다는 거다. 그 사람은 제가 줄을 죄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속이 답답해 위스키를 들이켜자, 속이 타들어 갈 듯 따끔거렸다. 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거야? 인상을 쓴 차헌이 옆에 놓인 안주를 와그작대며 먹는 동안 센터장은 직원을 불러 새로운 술을 주문했다. 차헌의 입맛에 맞는 술이 나올 때까지 새로 주문하는 센터장의 모습에 이가 갈렸다.

이런 데 쓰는 돈으로 구역들 훈련장이나 신경 쓸 것이지. 센터의 재정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건 이후, 막대한 보험금을 지급하며 재정난에 휩싸였다. 토벌대도 공격대도 없는 상황에서 수익이 들어올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한두 달이다.

월급이 밀리자 몇몇 각성자들은 계약을 파기했고, 이외 공동 구역 각성자들과 C 구역 각성자들은 던전 공략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 그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과 센터를 일으켜보겠다고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던지….

혀끝에 닿는 와인은 달콤하기 그지없었지만, 입안에는 쓴맛만 감돌고 있었다. 모든 일의 원인이 연우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연우가 센터장에게 드래곤에 대한 소식을 흘리지만 않았어도 예지대로 라운드 길드가 연합팀의 선봉을 맡았을 것이다.

미래가 뒤틀리지 않았더라면 세상이 혼란으로 물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형도 살아있었겠지.

…그만 마셔야겠다. 술기운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차헌이 잔을 내려놓자 부지런히 안주를 주문하던 센터장이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자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금 당장은 이상원과 똑같은 대우는 해줄 수 없겠지만, 내년 차헌이 성인이 된다면 새로 입사하는 각성자들을 붙여 토벌대를 만들어주겠단다. 얘기를 듣고 있자니 지겨워서 하품이 나왔다.

제대로 된 교육을 시행하겠다, 페어 가이드를 붙여주겠다, 토벌대를 만들어주겠다, 매년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이 얘기를 과거로 돌아온 지금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차헌이 가만히 미소 짓자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고 착각한 센터장 역시 흐뭇하게 웃었다.

“강차헌 에스퍼가 원한다면 한연우 에스퍼도 토벌대에 포함해주지.”

“아뇨, 그건 됐어요.”

제 기분 탓인 건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노리는 건지 던전에 들어갈 때마다 연우의 주변을 맴도는 마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이능을 쓰는 연우가 멋있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함께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 벌써 얘기를 들었나? 하긴 이능 불안정자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는 건 조금 꺼려지긴 하지.”

센터장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바라는 것이 있냐며 물었다. 탁자 아래 놓인 가방을 보고 있던 차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제가 센터랑 계약한다면, 한연우 에스퍼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요.”

“통제권이라니?”

“툭하면 형 붙들고 이래라저래라하지 말라는 소리예요. 오늘처럼 형 갖고 저를 협박할 생각도 하지 말고요. 형 동생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찔리는 게 있는지 센터장은 말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잠시 계산해보던 센터장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차헌 에스퍼가 계약만 한다면 얼마든지.”

“말로만 끝낼 게 아니라 글로 남겨주시죠. 뒤통수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차헌의 말에 불편한 듯 헛기침을 뱉던 센터장이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소파에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미성년자인 몸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윤석현은 길드를 만들라고 조언해줬지만, 연우가 센터를 떠날 마음이 없는 이상 길드를 세워 봤자다. 이능 불안정자로 분류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으나, 일단은 제 옆에 연우를 두고 감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는 저를 두고 죽지 못하도록.

“그럼 바로 계약을,”

“아뇨. 좀 더 생각해보고요.”

지금 계약해봤자 미성년자 어쩌고 하면서 자신을 제멋대로 휘두를 게 뻔했다. 이번에도 연우가 아니었다면 뭐가 잘못된 지도 모르고 그대로 휘둘렸겠지.

아. 작게 한숨 쉰 차헌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연우가 보고 싶었다. 제가 공간계 능력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면 이런 고민을 할 것도 없이 바로 보러 갔을 텐데.

잠시 눈을 감고 있던 차헌이 증서를 확인했다. 협회의 인증을 받지 않은 약식의 계약서였지만, 센터장의 직인이 찍혀있으니 효력은 확실했다. 이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내빼지 못할 것이다.

“그럼 저는 협회가 내준 과제를 해야 해서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짐을 챙겨 일어난 차헌은 타워를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가만히 있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차헌은 연우의 대답에 안도감을 느끼며 쪼그려 앉았다.

-얘기 다 끝났어?

“네. 지금 어디예요? 형한테 줄 거 있는데.”

-또 뭐 샀어?

끝이 올라가는 목소리에도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화끈거리는 볼을 문지르던 차헌이 가방 속 물건을 확인했다.

“제가 산 건 아니고, 형이 산 건데. 직원이 실수로 놓고 포장했대요.”

-잠시만.

물건을 찾는 건지 뒤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야? 내가 갈게.

“타워 앞이요. 형이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그냥 제가,”

“차헌아.”

형 집으로 가겠다는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돌아보자 연우가 서 있었다. 차헌이 손을 뻗으니, 환상이 아니라는 듯 연우가 손을 마주 잡아 왔다.

“너 술 마셨어?”

어떻게 형이 여기 있지? 타워와 연우의 집은 거리가 꽤 된다. 연우가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형이 어떻게 여기… 있어요?”

“응? 아, 근처에서 장 보고 있었거든.”

연우의 말대로 손에는 마트 로고가 그려진 봉투가 들려있었다. 분명 집에 있는 것 같았는데? 의문을 가지는 동안 연우가 거리를 좁혀 다가와 차헌의 이마를 짚었다.

“너는 각성열 끝난 지가 언젠데 벌써 술을 마셔.”

걱정 섞인 타박에 차헌은 말없이 연우의 손바닥에 이마를 문질렀다.

“센터장님이 억지로 먹인 건 아니지?”

차헌이 아니라고 대답하니까 이마를 도닥인 연우가 손을 내밀었다. 얌전히 제 손을 올려놓자, 연우가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다가 차헌의 반대쪽 손을 눈짓했다.

“내 물건은?”

“아.”

자연스레 깍지를 끼려던 차헌이 머쓱한 얼굴로 따로 구분해둔 종이가방을 내밀었지만, 이내 손에 힘을 주고 버텼다. 이걸 돌려주면 연우는 집으로 돌아갈 게 뻔했다. 이제 언제 볼지도 모르는 데 이대로 보내기가 너무 아쉬웠다.

“왜?”

“데려다주면 안 돼요?”

그러라고 선뜻 답한 연우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데려다준다고 해봤자 포탈을 통과하면 코앞인 거리였다. 하지만 연우와 함께 밤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쪽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마음과 함께 취기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 몸으로 술을 마신 게 처음이라 그런가….

어질거리는 시야에 걸음을 멈췄는데 연우가 다가왔다.

“많이 힘들어?”

“조금요.”

어리광을 부리듯 대답하는 말에 부축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안 데려다줘도 되니까 바로 집에 가.”

“싫어요. 형 위험 구역에 가고, 저는 과제 하다 보면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차헌이 이대로 못 간다며 버티고 있자, 연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긁었다.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보내줘야 하는 게 어른스러운 반응이겠지만, 지금의 차헌은 스무 살밖에 되지 않은 애송이었다. 이 나이라면 이 정도 고집은 부릴 수 있는 거 아닌가? 술도 취했는데 같이 있어 줄 수 있지 않나?

“음…. 나 짐을 싸던 중에 나온 거라서.”

안 되나?

잠시 고민하던 연우가 포탈을 눈짓했다.

“괜찮으면 우리 집 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차헌은 연우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둘러 포탈에 몸을 실었다. 문을 여는 연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자 낯선 듯 익숙한 공간이 차헌을 맞이했다. 연우의 원룸을 둘러보던 그 순간,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 뭐야, 너 왜 울어.”

당황한 연우가 차헌의 볼을 감싸 쥐었다. 차헌은 눈물을 참아보려고 이를 악물었지만, 결국 볼을 타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술에 취해서 그렇다. 술에 취해 억눌렀던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다. 차헌은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연우를 붙잡았다.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응?”

“형이 그때 왜 던전에 들어갔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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