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형,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센터에서 방출되는 거예요?"
"그러진 못할걸?"
이능 불안정자로 판정 나려면 이능이 튀는 게 육안으로도 보여야 했다. 연우가 판정 불가를 받았다는 소식에 놀라 달려온 센터장 역시, 연우의 이능을 확인한 뒤 단순 기계 결함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설사 정말 연우의 이능에 문제가 있더라도 센터는 연우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마나 제어구를 채우고도 붙잡고 있겠지.
"아…. 그럼 그냥 계속 센터에 남아있는 거예요?"
“계약 기간엔 남아 있어야지. 너는? 어디로 갈지 정했어?”
차헌을 센터에 묶어둘 계획을 짜고 있으면서 어디로 갈지 물어보다니. 기만이나 마찬가지인 질문에 연우는 차헌을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요. 형 상태 봐가면서 결정하게요.”
“…내 상태?”
“네. 형한테 말 안 했…었나? 길드장이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제가 괜히 길드를 차리겠어요? 아무튼, 형이 이능 불안정자로 판정 나면 감시는 제가 맡을 거예요.”
그러니 상태가 조금이라도 이상해지면 제게 귀띔해달라며 차헌이 입을 삐죽였다. 아직도 자신이 미성년자라는 게 적응이 안 된다며 투덜거리기까지 한다. 그리고 슬쩍 몸을 가까이 붙인 차헌이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보고 있자 괜히 입이 말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올린 연우가 손을 올려놓으니,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 차헌의 손가락이 단단히 깍지를 꼈다.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지금은 협회가 내준 과제부터 해야 해요. 사관학교 새끼들 일 대충대충 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마지막 말을 씹어뱉듯 중얼거린 차헌이 타워를 올려봤다. 협회는 무소속 상태인 차헌을 에스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차헌이 아직 미성년자인 이유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사관학교 이수 과정 때문이었다.
아무리 차헌이 늦게 각성했다지만, 500시간도 교육받지 못한 에스퍼에게 임무를 맡길 수 없다며 협회는 차헌의 활동 신청서를 거절했다. 분명 센터한테 뒷돈 받은 게 분명하다고 길길 날뛰던 차헌에게 협회는 몇 가지 과제를 내주었다.
“그래도 처음부터 다니라고 안 한 게 어디야.”
“그랬으면 지금 무영 길드랑 계약하고, 무영 아카데미 갔죠.”
사관학교 그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는 게 없다며 차헌이 이를 갈았다. 성을 낸 것도 잠시, 차헌은 조심스럽게 연우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인파를 피해 타워로 들어가던 차헌이 에스퍼증을 꺼내는 연우를 쳐다봤다.
“형은 뭐 살 거예요?”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망설임 없이 미리 골라두었던 가게로 향했다.
“혹시 이거 남아있나요?”
카탈로그를 보여주자 고개를 끄덕인 가게 사장이 다른 것도 함께 보겠냐며 두 손 가득 안대를 들고나왔다. 폭신폭신한 재질로 만들어진 양털 모양 안대부터 검은색 무지 안대까지 종류가 다양했지만, 연우는 연화의 취향에 맞춰 안대를 고른 뒤 포장을 부탁했다.
“아, 그리고 이것도요.”
사장님이 포장하러 들어간 사이, 가게를 둘러보던 차헌이 다가왔다.
“동생 선물이에요?”
“응. 곧 생일이라서.”
온화하게 웃던 연우는 차헌의 입매가 굳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작게 속삭였다.
“매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생일 선물이 들어오니까, 나중에는 생일 선물을 아예 안 받았거든. 내 것도 안 받겠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싸웠는데 이번에는 줄 수 있겠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지 연우의 입꼬리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차헌은 그런 연우에게 체중을 실으며 몸을 기댔다.
“그전에는 생일 선물이라고 해봤자 미역국이 끝이었거든. 드디어 돈을 모아서 선물다운 선물을 해주려는데 계속 거절하니까 많이 서운했지….”
사실 선물이라기보다는 부적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다. 연화는 이딴 쓸데없는 것 좀 사지 말라고, 이럴 돈이 있으면 오빠나 잘 먹고 살라며 화를 냈다. 연우는 거기에 지지 않고 너 덕분에 잘 먹고 잘살고 있으니 받기나 하라며 라운드 길드가 떠나가라 싸웠다.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온 연우가 쓰게 웃으며 포장된 아이템을 받은 다음 차헌을 바라봤다.
“너는 뭐 사야 해?”
“피어싱 챙겨왔어요?”
“응.”
지금도 목에 걸고 있다. 꺼내 보이자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척척 걸어 아이템 가게로 향했다. 구부러진 피어싱 바를 교체하는 동안 차헌은 연우가 챙겨온 냉결 저항 피어싱을 꺼냈다.
환불하기 위해선 에스퍼증이 필요했다. 연우는 얼른 꺼내라는 듯 차헌에게 눈치를 줬다. 차헌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에스퍼증을 꺼냈다.
“이거랑 이것도요.”
차헌의 손짓에 가게 사장님이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해독, 해주 아이템을 꺼냈다. 그래, 차헌도 이제 저런 게 필요할 때가 되었지. 고개를 끄덕이던 연우는 차헌의 손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차헌이 귀를 뚫을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의자에 앉은 건 연우였다.
“설마!”
“알죠? 한 번 사용한 아이템은 환불 못하는 거.”
연우의 표정에 기구를 소독하던 사장님이 차분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안 아프고 따끔하고 끝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게 돈이 얼만데! 침착하게 차헌을 말리는 연우와 달리 차헌은 두 번 다시 환불이라는 말을 못 하게 만들겠다며 사정없이 연우의 귀를 주물렀다. 얼마나 귀를 주물렀는지 귓불이 얼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멍이 하나, 둘, 뚫리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고 차헌을 붙잡고 있던 연우는 다 끝났다는 사장의 말에 숨을 토해냈다. 눈물이 옅게 맺힌 눈으로 차헌을 노려보던 연우에게 사장님이 연고를 발라주며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화끈거리는 귀에 연우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 차헌이 다가와 냉기를 흘려주었다.
“미리 말이라도 해주면 안 돼?”
“했으면 형이 얌전히 귀를 뚫었을까요?”
당연히 안 뚫었지. 온몸의 신경이 피어싱으로 몰린 기분에 연우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 연우에게 사장님이 다가와 거울을 들려주었다.
이미 오른쪽 귀에 네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도 차헌은 만족하지 못한 듯 몸을 굽혀 진열장을 바라보았다. 이게 하나에 가격이 얼만데. 센터에 갚아야 할 돈도 있는 애가. 화끈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일어난 연우가 차헌을 붙잡았다.
“나 아파서 더는 못해.”
아직도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잠시 턱에 힘을 주고 있던 차헌이 연우의 귀에 손을 올려두었다. 부어오른 귓바퀴에 손이 닿자 연우가 아픈지 흠칫거렸다. 차헌은 손끝에 조금씩 냉기를 흘려보냈다. 어느 정도 통증을 가라앉히고 가게를 나서는데, 차헌이 볼일 다 봤다는 듯이 타워 밖으로 향했다. 연우가 당황하며 차헌을 다급히 붙잡았다.
“너는? 너도 살 거 있다며.”
“…아, 맞다.”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인 차헌이 향한 곳은 무기점이었다. 현재 무소속 상태인 차헌은 무기와 아이템을 따로 조달받을 곳이 없어 자급자족해야 했다. 무기점에 도착하자마자 차헌의 시선을 잡아끈 건 실리와 비슷한 은색 팔찌였다.
차헌을 맞이한 사장님은 팔찌에 가벼운 방어 옵션이 붙어있고, 축소화된 무기는 참으로 달아 사용할 수 있다며 가벼운 시험을 보였다. 손톱만 하던 참은 마나를 불어넣자 레이피어로 변했다.
다른 참도 있다며 소개하는 사장님의 영업에 차헌은 어느새 활과 검 모양의 참이 달린 팔찌를 결제했다.
다른 가게에 들러 본격적인 소모품 쇼핑을 하고 나오던 때였다. 센터장의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헌과 연우에게 다가왔다.
“뭔데요?”
차헌이 연우를 보호하며 따지듯 묻자 상냥하게 미소 지은 비서는 라운지 입장이 가능한 카드를 내밀었다.
“센터장님이 뵙기를 요청하십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공손히 물러나는 비서를 보던 차헌이 가지가지 한다며 혀를 찼다.
“형은요? 같이 갈래요?”
“음. 나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내일 당장 출발인데 짐도 안 쌌어.”
“아….”
아쉬운 듯 연우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차헌이 라운지 카드를 내려봤다. 이대로 연우를 돌려보내기는 아쉬웠지만, 센터장과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긴 했다.
“그리고 지금 너를 부르는 이유가 좀… 뻔하지 않아? 내가 같이 가면 너한테 손해일 것 같은데.”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차헌은 타워 바깥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연우의 뒤를 따르면서도 입안 여린 살을 이로 잘근거렸다.
“형, 있잖아요.”
“왜?”
초조한 자신과 달리 연우는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연우의 태도에 차헌은 한숨과 함께 질문을 삼켰다.
뭐, 지금 이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그때랑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되지. 자기 위안을 한 차헌은 내일 도착하면 전화 달라는 인사를 마지막으로 연우를 배웅했다.
그렇게 타워로 돌아가려던 순간, 허둥허둥 뛰어온 직원이 차헌을 붙잡았다.
“아, 저기, 한연우 에스퍼님 일행분 맞으시죠?”
맞다고 대답하자, 직원이 포장할 때 실수로 빠진 물건이 있었다며 죄송하다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차헌은 괜찮다고 답하며 종이가방을 받아 들었다. 이 핑계로 한 번은 더 볼 수 있겠네. 제가 산 물건과 헷갈리지 않도록 차헌이 가방 속 물건을 확인했다.
어? 보조계가 이런 물건이 필요한가…?
왠지 모를 위화감에 몸이 멈칫했다. 그때, 차헌을 찾아온 비서가 다시 한번 공손히 안내했다. 계속해서 가방을 내려보던 차헌이 라운지로 이동하자 센터장이 손짓했다.
“그간의 정이 있는데 인사도 없이 보낼 수는 없어 따로 자리를 마련했네.”
차헌의 앞에 잔을 내려놓은 센터장이 얼음을 채우고 위스키를 따랐다. 차헌이 말없이 술잔을 내려보고 있는데, 센터장은 은 머들러를 꺼내 휘저으며 아무런 것도 섞지 않았다며 안심시켰다. 그럼에도 차헌은 술잔을 들지 않았다. 한동안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센터장이 운을 띄웠다.
“한연우 에스퍼 말인데.”
연우의 예상대로였다. 자신들이 연우를 붙잡고 있다는 걸 숨기지 않은 채, 차헌과 연우의 관계성에 대해 떠들던 센터장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을 내려놓았다.
“강차헌 에스퍼도 알다시피 한연우 에스퍼가 이능이 좀 불안정한 편이지 않나? 이번에는 검사 결과가 측정 불가로 뜨던데, 그 상태로 위험 구역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군.”
지겹지도 않나.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리를 꼰 차헌이 한심하다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툭하면 연우를 데리고 자신을 협박하는데, 한연우를 건드릴 수 없는 건 센터도 마찬가지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