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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73화 (73/143)

73화

[연우야! 가방에 담요!]

연우는 얼어붙은 손을 움직여 담요로 몸을 감쌌다. 체온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몸을 웅크린 연우가 손으로 아린 귀를 덮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차헌과 배재영의 마나가 느껴졌지만,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다. 속눈썹까지 얼어붙었는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무릎에 닿은 입김이 그대로 얼어붙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마나 코어를 확인했다. 드래곤이랑 계약한 덕분인지 던전 마나가 파고드는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연우는 숨을 고르며 차헌을 향해 공간을 접었다.

“형!”

허공에서 나타나는 분홍색 덩어리를 발견한 차헌이 손을 뻗어 끌어안았다. 차헌은 담요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는 것과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진정하세요, 접니다.”

배재영이 차헌의 창을 부드럽게 막아 세우고 연우의 상태를 확인했다. 손끝까지 새파랗게 얼어붙은 연우와 달리, 빙결계 이능력자인 차헌의 상태는 멀쩡해 보였다. 배재영은 손바닥에 마나를 담아 차헌의 어깨를 두드린 뒤 보조 가방에서 두툼한 재킷을 꺼냈다.

“강차헌 에스퍼도 앞으로 재킷이나 담요 같은 거 챙겨 다녀요. 우리 이능 때문에 동료들이 다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요. 한연우 에스퍼, 정신 차려요.”

저체온증이 온 건지 연우는 턱을 세차게 떨면서도 훈련복을 벗고 있었다. 배재영은 그런 연우를 붙잡고 차헌과 함께 재킷을 입혔다. 그리고 냉기 저항 아이템을 꺼내 연우의 손가락에 끼우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할게요.”

배재영은 차헌에게 순순히 반지를 넘겨줬다. 차헌이 떨리는 손으로 연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고, 두툼한 담요로 연우를 둘둘 싸맸다. 그러는 동안 길을 찾기 위해 천장을 올려보고 있던 배재영이 입을 열었다.

“규모가 큰 던전은 아니에요.”

“던전이라고요?”

경악에 찬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얼어붙어 삐걱거리는 목으로 끄덕였다. 어느새 배재영은 채찍을 말아쥐고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래도 게이트에 휩쓸린 것 같은데…. 저희 셋이서 공략이 가능할까요?”

배재영의 물음에 코를 훌쩍인 연우가 감각을 넓혀 주변을 살폈다. 폭발적으로 뻗어나가는 마나에 연우가 깜짝 놀랐다. 연우의 반응에 머릿속에서 드래곤이 흐흥, 웃었다.

[나랑 계약하길 잘했지?]

너 때문에 게이트가 발생한 건 아니고?

[아니야!]

연우는 아니라고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배재영 에스퍼 말대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네요.”

축구장 크기의 두 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던전이지만, 눈보라가 너무 심하게 몰아치고 있어 공략이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는데, 보조 가방을 확인해보던 배재영 역시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토벌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배재영이 차헌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헌을 노린 마수들이 던전을 넘어올 게 분명했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면 토벌대를 기다리는 것보다 뭐라도 시도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배재영의 말에 연우도 차헌도 동의했다.

“일단, 11시 방향에 동굴이 하나 있어요. 거기를 베이스캠프로 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요.”

두말하지 않고 앞장서는 차헌을 붙잡은 연우가 허공을 바라봤다. 배재영 역시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차헌은 휘이이, 하는 거친 바람에 날리는 담요를 감싸 안으며 창을 쥐었다. 채찍을 움켜쥔 배재영이 손을 뻗어 연 꼬리 같은 것을 낚아챘다. 얼음 조각이 자잘하게 붙어있는 꼬리가 움직일 때마다 휘익, 휙, 하는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배재영이 꼬리를 힘껏 당기자 공작새와 똑 닮은 마수가 땅으로 추락했다.

“파라 버드는 꽁지깃이 약점이에요. 할 수 있겠어요?”

배재영이 날뛰는 파라 버드의 목을 밟아 고정한 채,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꽁지깃을 가리켰다. 잠시 지켜보던 차헌이 꽁지깃을 낚아채어 목을 밟았다. 곧이어 배재영이 파라 버드의 파훼법을 알려주기도 전에 창으로 파라 버드의 문양을 내리찍었다.

그 한 번의 공격으로 창이 깨져버렸다. 차헌이 아쉬운 얼굴로 손목을 내려보았다. 차헌은 실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문지르다 얼음 단검을 만들었다. 휙, 날아간 단검이 허공을 맴도는 파라 버드의 문양을 맞췄다.

몇 번 더 단검을 날려 감을 익힌 차헌이 사방으로 단검을 던져댔다. 그때마다 쿵, 쿵, 떨어지는 파라 버드의 사체를 연우가 수습했다. 잠시 차헌의 모습을 지켜본 배재영이 연우에게 물었다.

“저거, 한연우 에스퍼가 알려준 거예요?”

그럴 리가. 연우 역시 꽁지깃을 붙잡아 무력화시킨 다음 처리하는 방식만 알고 있었다. 연우가 고개를 젓자 배재영이 감탄을 터트렸다.

“확실히 S급은 감이 다르긴 한가 봐요. 저랑 속성이 똑같은데, 저는 하나도 모르겠거든요.”

차헌을 향한 칭찬에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던 연우가 또다시 쿵, 떨어지는 파라 버드를 붙잡고 이능을 사용했다. 연우는 파라 버드의 사체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귀를 틀어막은 채 팔찌를 노려봤다.

[연우야, 나 그거 하나만. 딱 하나만.]

마석을 본 드래곤이 드러누울 기세로 떼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격계가 두 명이나 있는데 보조계가 나서야 하나, 고민을 하던 연우가 파라 버드의 꽁지깃을 낚아챘다.

안타깝게도 연우에게는 파라 버드를 땅으로 추락시킬 힘도 없었고, 날아다니는 파라 버드의 문양을 노릴 정밀함도 없었다. 연우는 가볍게 숨을 고른 뒤, 꽁지깃을 잡은 채로 좌표를 잡았다. 파라 버드 위에 올라탄 연우가 문양을 내리찍자 날개가 힘없이 바스러졌다.

파라 버드와 함께 땅으로 떨어진 연우가 마석을 회수하자 드래곤이 행복한 신음을 흘렸다.

“형, 이리 와요.”

연우의 머리 위를 맴도는 파라 버드를 확인한 차헌이 얼음벽을 쌓아 올려 이글루 비슷한 집을 지었다. 연우는 드래곤을 노리는 파라 버드의 꽁지깃을 잡고 저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발을 뻗어 이글루를 향해 공간을 접었다. 이글루 안으로 이동한 연우가 상황을 지켜봤다.

“앗, 죄송.”

이전에 같이 던전을 공략한 경험 덕분인지 차헌과 배재영이 대놓고 연우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다 움칠움칠 놀라고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남은 파라 버드의 수를 헤아려보던 연우는 동굴의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잠시 손목을 내려보던 연우가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동굴을 기준으로 강차헌 에스퍼는 이쪽,”

“차헌이!”

“그래, 차헌이 너는 이쪽, 배재영 에스퍼는 저쪽을 정리하고 동굴에서 만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것,”

“형이 왜 방해예요? 추우니까 그냥 먼저 가서 쉬고 있어요.”

“그렇게 하죠.”

연우가 가리키는 쪽으로 배재영이 달려가자, 차헌이 연우의 손을 붙잡았다.

“음? 너는 이쪽이라니까?”

“알고 있어요. 형 데려다주고 갈 거예요.”

괜찮다고 해도 차헌은 연우와 함께 동굴로 향한 뒤 얼음꽃을 피워 주변을 탐색했다. 차헌은 다른 마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얼음벽을 쌓아 입구를 막고 나서도 계속해서 연우를 돌아보며 발을 떼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면 바로 달려갈게.”

“이상한 게 없어도 와요.”

마지못해 차헌이 떠났다. 연우는 둘의 기척이 멀리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팔찌를 움켜쥐었다.

“너 이거 어떻게 알았어.”

[와,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담요 없었으면 너 거기서 얼어 죽었어!]

“담요가 필요할 걸 어떻게 알았냐고.”

아무리 추궁해도 드래곤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팔찌라며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챙겨둔 마석으로 회유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팔찌를 노려보던 연우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단둘이 있으면 뭔가 얘기해 줄 것 같아서 위험을 무릅쓰고 무리와 떨어져나왔건만, 수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연우는 찬찬히 동굴을 둘러보았다. 그때와 다른 형식의 동굴이라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을 일은 없어 보였다. 공략까지 몇 시간이 걸릴지,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그동안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청결한 편이 좋겠지.

연우는 동굴 안쪽을 살피며 보조 가방을 열었다. 드래곤의 식탐 덕에 먹을 것이 제법 들어있었지만, 무기는 없었다. 공격계 에스퍼가 둘이나 있으니 그건 괜찮겠지.

가방 정리를 끝낸 연우는 동굴 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먹어도 되는 물인지는 모르지만, 손바닥만 한 작은 샘도 솟아오르고 있어 베이스캠프로는 적격이었다. 세 사람이 머물 공간을 정리한 다음, 연우는 적당한 자리에 돌을 둥글게 배치했다.

설원형 던전이니 불을 피워야 했지만….

피어오르는 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함께 들어온 둘은 빙결형이고, 연우는 냉기 저항 아이템을 끼고 있으니 불을 피우지 않아도 괜찮겠지.

애써 모닥불이 있어야 할 자리를 외면한 연우가 바깥을 살폈다. 눈보라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감각을 펼쳐 차헌의 마나를 확인해야 했다. 배재영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지 마나가 간헐적으로 느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잠시 후, 파라 버드를 처리한 두 사람이 눈을 털어내며 동굴로 들어왔다. 연우가 정리해둔 동굴을 둘러본 배재영이 감탄하며 보조 가방에서 휴대용 버너를 꺼냈다. 작은 컵을 향해 이능을 사용한 배재영은 얼음을 녹인 뒤, 쥐고 있으라며 연우에게 뜨거운 물을 권했다.

“그러다 화상 입어요.”

하얗게 질린 연우가 주춤주춤 물러나는 동안, 차헌이 배재영에게 컵을 받아든 다음 알맞게  식혀 연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비벼 열을 만든 다음 꽁꽁 언 연우의 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뒤늦게 느껴지는 통증에 연우는 손끝을 내려봤다. 냉기 저항 아이템 덕분에 추위는 느껴지지 않지만, 동상까지는 막아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연우는 굳은 손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가방 안의 물건을 공유했다.

차헌의 가방 안에는 각종 포션이, 배재영의 가방 안에는 각종 비상 용품이 가득했다. 연우도 가방 가득 들어있는 먹을 것을 꺼냈는데, 입구를 바라보고 있던 차헌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갔다.

해치우지 못한 파라 버드가 남아있나, 했는데 차헌이 낚아챈 건 눈송이 슬라임이었다. 눈송이 슬라임은 거미 같은 가느다란 팔다리로 차헌의 손을 밀어내며 자신과 비슷한 눈송이를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이유를 확인했음에도 연우는 굳은 표정으로 슬라임을 노려봤다. 빙결계와 상극인 눈송이 슬라임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죽여요?”

“물에 녹여야 하는데….”

연우의 중얼거림에 두 빙결계 에스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을 내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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