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멀쩡한 발을 내려보던 연우는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그때 그 사건이 제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다는 건 알겠다.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트라우마가 안 남는 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픽픽 쓰러질 수는 없었다. 이겨낼 방법이 있을까. 손끝을 내려보던 연우는 기묘한 감각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은백색 거미줄이 손목에 늘어지는 걸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공간을 접었지만, 발이 땅에 닿기가 무섭게 튕기듯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연우가 훈련복에 들러붙은 거미줄을 단검으로 내려찍었으나, 거미줄은 끊어지지 않고 칼날에 엉겨들기만 했다.
“형. 잠시만요.”
경고한 차헌이 창을 만들어 거미를 겨냥했다. 차헌은 연우가 웅크리는 걸 확인한 뒤 거미를 향해 창을 던졌다.
거미가 창을 피해 도망가자 차헌은 연달아 창을 던져 거미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얼음벽을 세워 퇴로를 막은 차헌이 거미의 입을 향해 창을 던졌다. 도망갈 곳이 사라지자 거미는 여덟 개의 다리를 스프링처럼 움직여 바닥에 뛰어내렸다.
거미가 땅에 착지하자 차헌은 알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연우를 찾았다. 거미는 차헌의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을 다니면서도 계속해서 연우의 손목을 노렸다.
그때마다 연우는 이능을 사용했지만, 훈련복에 달린 거미줄 때문에 속절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차헌이 달려와 거미줄을 끊어내려 했지만, 거미줄은 얼어붙기만 할 뿐 끊어지지는 않았다.
“이거 어떻게 끊어요?”
차헌의 질문에 연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화염 거미의 거미줄을 끊기 위해서는 불이 필요했다. 하지만 제가 죽으면 죽었지, 불을 피울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연우는 훈련복에 엉겨든 거미줄을 보다가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형?”
“안 끊어지는 거야.”
팔뚝에 붙은 거미줄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생겨 단추에 손이 닿지 않았다. 훈련복을 끌어 올려 아래쪽 단추는 풀었지만, 위쪽 단추에는 손이 닿지 않았다. 몇 번 더 시도해보던 연우는 거미를 경계하고 있던 차헌을 불렀다.
“왜요?”
“이것 좀 풀어줄래?”
뜯어도 좋고. 그 말에 차헌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헌이라면 훈련복을 쉽게 뜯어버리겠지만, C급인 연우에게는 훈련복을 뜯어버릴 만한 악력이 없었다. 풀기 쉽도록 고개를 들어줬지만, 차헌은 뭔갈 잘못 들었다는 듯 귀를 후비고 있었다.
“빨리.”
연우가 재촉하자 차헌은 단추에 손을 올려두었다. 연우는 단추가 풀리는 것과 동시에 끈이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땅으로 무너져내렸다. 매달려있는 동안 뻣뻣하게 굳은 팔을 푸는 연우의 어깨에 온기가 닿았다. 차헌의 훈련복이었다.
“형은, 카메라, 와.”
차헌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연우의 손을 붙잡고 소매에 집어넣었다. 연우가 거절하기 전에 지퍼를 올려버린 차헌은 귀를 문지르며 돌아섰다.
연우는 소매를 정리하다 말고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쳐다봤다. 카메라랑 훈련복이 무슨 상관이지? 괜히 신경이 쓰여 목티를 만지작거리던 연우는 차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메라 때문이라면 내가 아니라 쟤가 입어야 할 것 같은데. 저러다 진짜 풍기문란으로 잡혀가는 거 아냐?
“벗지 마요!”
뒤통수에 눈이 달렸나. 지퍼를 내리던 연우는 차헌의 호통에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리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저기 있다.”
연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차헌이 다시 창을 집어던졌다. 천장을 붙들고 있던 다리에 창이 명중하자, 세 번째 다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날리는 진액에 차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토할 것 같아요.”
힘없이 중얼거린 차헌은 연우의 주변에 방어벽을 만들었다. 다리를 잃은 거미는 전보다 집요하게 연우를 노리고 있었다. 공격하는 사람은 난데 왜 형을 노리냐며 소리를 지른 차헌이 거미의 꽁무니를 향해 창을 던졌다.
내가 아니라 이걸 노리는 것 같은데.
연우는 거미줄을 피해 공간을 접으며 팔찌를 내려봤다. 차헌의 공격에 네 개의 다리를 잃은 거미는 계속해서 손목을 향해 거미줄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 전 제가 헛걸 본 게 아니었다. 갑자기 생긴 팔찌의 정체는 언젠가부터 곁을 맴돌던 보석뱀이 분명했다.
에스퍼가 마수를 공격해 마석을 얻는 것처럼, 마수도 에스퍼를 공격해 마나 코어를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수는 성장하기 위해 다른 마수를 공격하기도 했다.
화염 거미의 공격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팔찌라는 걸 확인한 연우가 팔찌를 잡아당겼다. 그대로 화염 거미에게 던져주려 했지만, 팔찌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연우는 팔찌와 씨름하다 몸을 굴려 거미줄을 피했다.
“아오!”
소리를 지른 차헌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징그럽다고 온갖 난리를 칠 땐 언제고 거미가 계속 창을 피하니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모양이었다.
연우는 바위를 쥐고 거미가 매달려있는 천장을 향해 이능을 사용했다. 배 위로 바위가 떨어지자 네 개의 다리로 힘겹게 버티던 거미가 땅으로 추락했다. 동시에 차헌이 창을 날렸다.
다섯 개의 다리를 잃은 거미는 허공을 향해 입을 딸깍였다. 사방에서 불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연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쥐어봐도, 불꽃 위로 드래곤의 환상이 나타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형!”
차헌은 연우를 향해 달려갔다. 연우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었다. 얼음벽을 세워 불길을 막은 차헌은 연우의 볼을 다독였다. 초점이 돌아오지 않은 눈에는 계속해서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연우의 볼을 토닥이던 차헌은 언젠가 봤던 최동원의 모습을 떠올렸다. 설마 발작은 아니겠지? 떨리는 손으로 보조 가방을 연 차헌은 연우의 입에 마나 포션을 흘려 넣었다. 효과가 돌기를 기다렸지만, 연우의 눈동자는 여전히 흐릿했다.
불꽃이 거세지자 연우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쁜 숨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차헌은 미친 듯이 떠는 연우를 껴안고 주변을 살폈다. 동굴 구석에 설치된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차헌은 바로 얼음을 만들어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야? 왜 이래?”
훈련 중단을 요청하기 위해 버튼을 누르면 초록색이 노란색으로 변한다고 했었다. 직접 버튼을 눌러봤지만, 여전히 색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버튼을 눌러봐도 마찬가지였다.
“아, 아파….”
몸부림치는 연우를 끌어안은 차헌은 창을 들어, 그대로 버튼을 내려찍었다. 우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동굴 벽이 흔들렸다. 다시 한번 내려치자, 순간적으로 동굴 벽이 갈라지며 검은색 공간이 나타났다.
출구를 확인한 차헌은 연우를 조심히 눕혀두고 실리를 도끼로 변형시켰다. 두 손으로 힘껏 내리찍으니 이명과 함께 동굴 벽이 무너져내렸다. 검은색으로 반질거리는 벽을 향해 차헌은 망설임 없이 도끼를 들어 올렸다. 그때, 스피커에서 노이즈가 터졌다.
-강차, 치직, 강차헌 에스퍼. 잠시,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다급한 직원의 목소리와 함께 검은 벽에 문이 생겼다. 차헌은 연우를 부축해 문으로 향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빠져나갈 문 뒤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모여있는 가이드를 확인한 차헌은 문에 몸을 비집어 넣었다.
“잠시.”
그런 차헌의 앞을 막아선 이상원은 뒤를 향해 손짓했다. 가이드가 다가오자 차헌은 연우를 끌어안으며 경계했다.
“나갈 테니까 비켜요.”
“음? 두 분 다 못 나와요. 아까 말했잖아요. 훈련도 실전처럼.”
이상원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쓰러진 연우를 살폈다. 핏기 없는 안색을 확인한 이상원은 재차 가이드에게 손짓했다.
“그러게, 가이드를 데려가라니까…. 그나저나, 강차헌 에스퍼는 던전에서 폭주하는 에스퍼가 나오면 이런 식으로 대처할 건가요?”
“비키라고요.”
“대답해야죠. 강차헌 에스퍼는 던전에서 부상자가 나오면 못 하겠다고 포기할 건가요?”
그렇다고 대답하면 비켜줄게요. 이상원은 비릿하게 웃으며 옆으로 비켜섰다. 형이 이걸 예상했구나. 차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연우의 말을 떠올리다가 망설임 없이 다리를 뻗었다.
졸업장이고 나발이고, 아주 잠시라도 저 인간과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라운드 길드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도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무영 길드장이 센터장을 쥐어패서라도 꺼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더 이상 졸업장은 필요 없었다. 벗어나는 순간 센터를 향해 침도 뱉지 않겠다고 다짐한 차헌은 검은 반구에서 벗어났다.
아니, 나려 했다.
밖으로 걸어가는 차헌을 막는 손이 있었다. 차헌을 붙잡은 연우는 굴러떨어지듯 차헌의 품을 벗어났다. 차헌의 부축을 받으며 한참 동안 쿨럭이던 연우는 검은 반구 안으로 향했다.
“형!”
“저는 계속하겠습니다.”
이상원은 색색거리는 연우의 목소리에 흐-음, 콧소리를 흘리다가 차헌을 바라봤다.
“강차헌 에스퍼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차헌은 연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이상원은 신경질적으로 물러났다.
문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검은 반구는 다시 동굴의 형상으로 바뀌었다.
“형…. 지금 제정신이에요?”
차마 연우에게 미쳤냐는 말을 할 수 없었던 차헌은 비틀거리는 연우를 부축했다. 연우는 차헌의 손을 밀어내고 구석으로 달려가 헛구역질했다.
“이 몸으로 계속하겠다고요?”
“…말했잖아, 성공해야 한다고. 증거도 획득해야 하고, 이번에 실패하면 그걸로 물고 늘어질 사람이 너무 많아. 그리고 거의 다 죽였는데 포기하면 아깝잖아.”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연우는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물 대신 포션을 쥐여주던 차헌은 허공을 응시했다.
공간이 비틀리는 감각과 함께 화염 거미가 나타났다. 연우의 말대로 창이 꽂힌 화염 거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연우의 말 중에 틀린 말 하나 없었다. 센터장을 신고하려면 증거가 필요했고, 이대로 포기한다면 이상원을 포함한 A 구역 사람들은 가상 던전 하나 통과 못 했다며 비아냥거릴 것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성공하든 실패하든 차헌은 2주 뒤 센터를 나갈 것이다. 이왕이면 연우의 바람대로 성공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이상원은 대놓고 차헌이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런 이상원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분명 훈련에 성공해도 갖은 핑계를 대면서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깝긴 하지만 이 이상 훈련을 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일단 입부터 노려야겠다.”
차헌은 연우를 내려보다 삐딱하게 섰다. 연우의 어깨가 쉼 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러면서 뭘 계속하자고. 한숨을 쉰 차헌이 버튼 쪽으로 걸어가자 연우가 놀라 달려왔다.
“말했잖아, 성공해야 한다고.”
“제가 실패하고 싶다면요?”
그 말에 연우는 무슨 말을 하냐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계속되는 연우의 설득에 차헌은 실리를 풀어 연우의 손에 올려놓았다.
“형이 해요. 형이 계속하겠다고 했으니 형이 죽여요. 못하겠으면 이대로 나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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