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이거 진짜예요?”
달려간 차헌은 동굴의 벽을 두드렸다. 차헌의 주먹이 벽에 닿을 때마다 벽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있었다.
“저번에 공동 구역에서 봤던 홀로그램 장치랑 똑같은 거야. 상처는 안 나겠지만, 통증은 똑같으니까 부딪히지 않게 조심해.”
연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을 보며 걷던 차헌이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렸다. 재빨리 중심을 잡은 차헌이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연우는 카메라와 버튼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기 보여?”
차헌이 들어온 입구에는 동굴형 던전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버튼이 초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던전 곳곳에 배치된 초록색 버튼을 가리키자 그것을 바라본 차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련을 포기하고 싶을 때나, 무언가 문제가 생겼을 때,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을 직원을 호출하는 비상탈출 버튼이었다.
여기저기 보이는 버튼과 카메라 덕분에 몰려오는 불안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 여기는 던전이 아니야, 여기는 센터 내의 훈련장이야,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어. 중얼거린 연우는 돌멩이를 주워 이능을 사용했다. 툭, 원하는 지점에 떨어진 돌멩이를 확인한 연우는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강차헌 에스퍼.]
버튼을 살피고 있던 차헌이 대답하자 상태를 점검하던 스피커 속 목소리는 연우를 호명했다.
[카메라에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입구 쪽 카메라에 이상이 생겼다고 전한 직원은 그 옆의 카메라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다른 카메라로 둘의 모습을 확인한 직원은 가이드 없이 들어갔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며 경고하고는 치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묵했다.
“이제 뭐 하면 돼요?”
“일단 위를 볼래?”
그 말에 차헌의 고개가 꺾였다.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천장에서 엉켜있는 선이 느껴질 것이다.
“던전의 중심에서 뻗어 나온 줄기들을 따라 이동하면 돼.”
그 줄기의 끝에서 게이트가 열렸다. 중심의 마나 농도가 짙을수록 줄기의 수는 늘어났고, 줄기가 많을수록 던전의 크기도 큰 편이었다. 줄기의 수가 많을수록 생성되는 게이트도 많아져서 가끔 다른 게이트에서 들어온 토벌대가 던전에서 만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디로 가면 돼요?”
“던전 마나의 농도가 제일 짙은 곳으로.”
던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중심으로 향한 뒤 그곳에서 나타나는 던전 보스를 해치워야 했다. 연우의 설명에 천장을 살피던 차헌이 올바른 길을 찾아냈다. 연우는 그대로 걸어가려는 차헌을 붙잡으며 실리를 눈짓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차헌의 손에서 하늘빛 활이 만들어졌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차헌의 뒤를 따르던 연우는 틱, 틱, 거슬리는 소리에 감각을 펼쳐 주변을 살폈다.
“잠깐.”
연우가 부르는 소리에 차헌이 돌아봤을 때였다.
“으, X발!”
차헌의 손이 연우의 허리를 낚아채는 것과 동시에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차헌의 마나를 담은 얼음벽이 하늘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며 어두컴컴하던 동굴을 밝혔다. 그 덕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회색의 매끈한 키틴질을 두른 동굴 벌레들이 둘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주둥이 아래로 길게 늘어진 이빨이 부딪힐 때마다 틱, 틱, 거리는 소리가 동굴에 웅웅 울려 퍼졌다.
네 개의 다리로 긴 몸통을 끌고 다니는 동굴 벌레의 꼬리에는 동그란 폭탄이 달려있었다. 그 모습 때문에 폭탄 벌레라는 별칭으로 자주 불리기도 했다. 다행히 이 마수는 퇴치법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편이었다.
“저건 동굴 벌레인데,”
“벌레인 건 나도 알아요!”
정수리에 차헌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잘게 떨리는 목소리에 제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도닥거리던 연우가 작게 물었다.
“벌레를 싫어해?”
“혐오해요.”
입술을 말아 문 연우는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동굴 벌레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그래서 그런 거였군. 책 속에서의 차헌은 곤충형 마수를 만날 때마다 그 일대를 다 얼려버렸다. 그 이유가 독이라던가, 번식을 막기 위해서인 줄 알았는데 그냥 벌레를 혐오해서였군.
“저기, 차헌아.”
연우는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는 차헌의 팔을 두드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동굴 벌레에서 도망가려면 이능을 써야 하는데, 자신을 애착 인형처럼 끌어안고 있는 차헌의 팔 때문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
“아, 형, 저 진짜 못 보겠어요.”
연우가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차헌은 팔에 힘을 주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차헌을 떼어내는 것을 포기한 연우는 고개를 들어 얼음벽 너머의 동굴 벌레를 바라보았다. 눈을 대신하는 기다란 더듬이와 그 아래 퇴화하여 흔적만 남은 눈, 기다란 주둥이 끝에 달린 날카로운 이빨은 평범한 벌레와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좀 크긴 했다.
제일 작은 벌레가 연우의 팔뚝보다 조금 더 큰 정도이니 차헌이 기겁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연우는 등으로 차헌을 밀며 조금씩 뒤로 걸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차헌이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끌어안는 바람에 갈비뼈가 눌려 숨이 가빠왔다.
힘 좀 빼라고 차헌의 팔을 두드린 연우는 아까보다 더 크고 빠르게 울리는 틱, 틱, 틱, 소리에 얼음벽을 확인했다. 얼음벽 뒤에는 수십 개의 다리가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징그러워.
더듬이로 얼음벽을 두드리던 동굴 벌레가 키이이, 하는 소리를 내며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모여든 동굴 벌레들이 더듬이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다른 동굴 벌레들은 얼음벽에 몰려들어 짧은 다리로 얼음벽을 내려쳤다.
그 소리에 소스라친 차헌이 연우에게 파고들었다. 내 덩치로 너를 품는 게 가능하겠냐. 연우는 혀를 차면서도 쉬지 않고 차헌의 팔을 두드리며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더듬이로 대화를 나누던 동굴 벌레들이 킥, 키익, 소리를 내며 지시를 내렸다. 일사불란하게 스사사삭, 소리를 내며 물러나는 동굴 벌레의 발소리가 울려 퍼지자 차헌은 연우를 빈틈없이 껴안았다. 덕분에 허공에 뜨게 된 연우는 차헌의 손등을 찹찹 내려쳤다.
“차헌아. 도망가야 하니까 내려줘.”
차헌이 마지못해 힘을 풀었다. 발에 땅이 닿은 순간 연우가 그를 붙잡고 솟아오른 석순을 향해 공간을 접었다. 도착하자마자 차헌은 연우를 끌어안으려 했지만, 단호하게 떼어낸 연우는 천장의 종유석을 가리켰다.
“저거 맞출 수 있겠어?”
연우의 허리를 향해 허우적거리던 손이 연우의 손을 따라 천장으로 향했다. 그 끝에는 주먹보다 조금 큰 종유석이 매달려있었다.
“저거요?”
“응.”
“너무 작은 거 아니에요?”
얘는 무기도 그렇고 왜 이렇게 큰 걸 좋아하지?
벌레들의 소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정신이 드는지 차헌은 더 큰 종유석을 찾아 천장을 살폈다.
“보지 마.”
차헌에게 경고한 연우는 아래를 살폈다. 둘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챈 동굴 벌레들은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대열을 맞추고 있었다.
“왜요?”
심각한 연우의 표정에 차헌이 고개를 빼고 아래를 내려봤다. 보지 말라니까. 그런 차헌의 눈을 가린 연우는 점점 커지는 동굴 벌레의 폭탄을 지켜봤다.
“내가 신호하면 저걸 맞춰서 떨어트리는 거야.”
“알았어요.”
잠시 기다리자 얼음벽이 솟아오른 쪽으로 꼬리를 돌린 동굴 벌레들은 서로 호흡을 맞춰 폭탄을 튕기기 시작했다. 꼬리를 아래로 내려칠 때마다 폭탄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바닥을 두드리는 진동이 거세지기를 기다리던 연우는 종유석을 손짓했다.
“지금.”
연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헌이 시위를 당겼다. 쐑, 날아간 화살이 종유석에 명중하는 것과 동시에 얼음 화살이 터지며 동굴이 우릉, 울렸다. 그 소리를 들은 동굴 벌레의 더듬이가 바짝 솟아올랐다. 동굴 벌레가 허공을 더듬어보며 퇴로를 만들려 했지만, 그 전에 종유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종유석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제풀에 놀란 동굴 벌레가 폭탄을 터트렸고, 위태로울 정도로 부풀어있던 동굴 벌레의 폭탄이 한 번에 와르르 터졌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질척한 소리에 귀를 틀어막은 차헌이 연우를 찾았고, 그런 차헌을 반쯤 끌어안고 있던 연우가 발밑의 석순이 흔들리는 걸 느끼고 안전한 장소를 찾아 근처를 살폈다.
그 순간 연우의 눈에 폭탄의 여파로 날아가는 마석이 보였다. 홀로그램이 아니야? 실감 나는 훈련을 위해 진짜 마수를 집어넣는 경우가 종종 있긴 했다. 문제는 허공을 장식하는 마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는 거다.
멀리 공간을 접은 연우는 차헌을 내버려 두고 현장으로 돌아갔다. 연우는 폭탄 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동굴 벌레의 사체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분명 허공으로 흩어져야 할 홀로그램 마수들이 사체가 되어있었다. 헛웃음을 흘린 연우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 렌즈를 찾았다. 홀로그램 마수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을 테니, 이후에 조치가 있을 것이다.
잠시 기다려봤지만, 버튼의 색은 훈련정지를 뜻하는 빨간색으로 변하지 않았다. 버튼을 노려보던 연우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 옆에 있는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들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연우는 동굴 벌레의 사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제가 처리한 마수의 가격은 제가 받는다. 차헌이 처리했으니 이 마석은 차헌의 것이었다. 손바닥에 소복이 모인 마석은 손톱보다 작았지만, 이정도 양이라면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다.
마석을 줍는 내내 헛웃음만 나왔다. 졸업장을 주기 싫은 센터장이나, 실리를 빼앗고 싶은 이상원이 방해할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가상 던전은 던전과 비슷한 환경에서 홀로그램 마수를 상대하는 훈련이었다. 그러니까 각성자가 얼마나 빨리 감각을 되찾는지, 던전 마나를 이겨내고 이능을 사용해서 마수를 처리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파악하는 훈련이란 말이다. 결코 던전과 똑같이 만들어놓고 진짜 마수를 풀어놓는 훈련이 아니었다.
센터장이고 이상원이고 제정신인 거 맞나? 이거 협회에 신고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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