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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의 주인공이 공이 된 이유-33화 (33/143)

33화

“후발대 지원할 거예요?”

훈련이 끝나고 팀원을 불러 모은 박서현이 작게 속삭였다.

탐색대가 게이트를 발견하면 토벌대가 꾸려진다. 투입된 토벌대가 던전의 길을 찾아 닦아놓으면 공격대가 투입되어 마수를 몰살했고, 이후에 후발대가 들어가 던전 부산물을 챙겨나오면 공략이 마무리되었다.

반대로 게이트가 발견되지 않으면,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면서 위험 구역이 생겼다. 망가진 게이트에서 끝없이 기어 나오는 마수를 처리하고,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 건 까다롭기만 할 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능력자들은 던전 후발대에 속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던전 마나의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라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마코앵무새를 돌려보낸 훈련소장이 손뼉을 쳤다.

게이트가 발견되었다고 알린 훈련소장은 후발대 실습을 나갈 지원자를 뽑는다며 이능력자들을 둘러보았다. 다음 주에 던전에 들어가기 위한 가상 던전 훈련을 시행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결정하라는 훈련소장의 말에 팀원끼리 모인 이능력자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았다.

연우의 팀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흔히 쓰레기통이라고 불리는 위험 구역은 하는 일에 비해 위험수당도 낮고 대우도 좋지 않다. 그렇다고 후발대에 지원하기에도, 던전 마나로 폭주를 겪는 에스퍼들이 한둘이 아닌지라 선뜻 나서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었다.

“으음. 신청한다고 무조건 합격하는 건 아니니까, 일단 지원이라도 해볼까요?”

고민하던 최동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희서가 오래간만에 환한 얼굴로 웃었다. 그와 반대로 최동원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가이드야 던전 마나에 영향을 안 받는다지만, 에스퍼는 아니었다. 조희서는 제대로 된 가이딩도 해주지 않으면서 무조건 후발대에 지원을 해야 한다며 마구잡이로 우겨댔다. 박서현의 팔에 매달려있던 조희서는 지원해보기로 결정되자마자 배재영에게 달려갔다. 이를 악물고 있던 최동원이 길게 한숨을 뱉었다.

“한연우 에스퍼 의견은?”

“저도 괜찮아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다들 합격했었으니까.

가상 던전 훈련에 통과한 팀원들은 이번을 시작으로 조희서가 무영 길드에 합격하기 전까지 질리도록 후발대 일을 해왔었다. 그 덕분에 돈을 좀 벌었는데, 지금은…. 텅텅 비어있는 거나  다름없는 통장 잔고를 떠올린 연우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렇게 줄 알았으면 아끼지 말고 좀 펑펑 쓸걸!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참아가며 쫌쫌따리 모았던 돈이 제법 됐었다. 연화가 벌어들이는 돈과는 비교도 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각난 섬을 살 정도는 됐었는데….

혀를 찬 연우는 조금 긴장한 기색인 최동원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짐을 챙겼다.

“한연우 에스퍼.”

호명에 고개를 돌리자 걱정스러운 얼굴의 서유진이 서 있었다. 서유진은 연우의 배를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마른침을 삼킨 연우는 애써 웃으며 마나가 담긴 손을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홀로그램이잖아요.”

괜찮다고 웃어 보았지만, 이쪽을 살피는 시선엔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괜히 죄책감이 들어 정말 괜찮다고 손사래를 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훈련에서 늪지 악어의 꼬리에 얻어맞고 날아가던 연우는 붙잡으려는 서유진의 손을 피해버렸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모습이었는데도 서유진은 불쾌해하는 대신 마나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며 연우를 달랬었다.

접촉하는 순간 원치 않는 기억들이 떠오를 것 같아 연우는 자기도 모르게 서유진의 손을 피해버렸다. 그런데도 서유진은 제가 실수해서 연우를 받지 못했다며 자책했다. 그 모습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양심뿐만 아니라 머리도 쿡쿡 울렸다. 서유진이 다가올 때마다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 이상 다가가면 안 된다는 경고 같아 슬며시 거리를 벌리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서유진은 가까이 다가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정말 괜찮다고 장담한 연우는 도망치듯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런 연우의 뒤에 따라붙은 서유진은 혹시 모르니 치료실에 가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치료실은 왜요? 형 어디 아파요?”

하루종일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마나에 익숙해지려 애를 써서일까. 등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나에 나른한 숨이 흘러나왔다. 연우가 저도 모르게 차헌에게 기대자, 차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우를 끌어당겼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잠시 기대있던 연우는 정신을 차리고 서유진에게 인사했다. 수고하셨다는 인사에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던 서유진은 입을 살짝 벌리고 연우와 차헌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일 있었냐고요.”

연우는 제 어깨를 흔드는 차헌의 손을 떼어낸 뒤 자신의 배를 짚었다. 여기저기 꾹꾹 눌러봐도 느껴지는 통증은 없었다.

“진짜 정말 괜찮아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빠르게 인사한 연우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차헌에게 붙잡혔다. 진짜 괜찮냐는 서유진의 표정과 설명을 요구하는 차헌의 표정에 연우는 이마를 짚으며 훈련복을 끌어 올렸다.

“형!”

훈련복을 끌어 내리는 손짓에 고꾸라질뻔한 연우는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짧은 순간이지만, 멍이나 상처가 없다는 걸 확인했을 서유진을 향해 방긋 웃었다.

“저도 에스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도 한 두 번이어야 호의로 느껴진다. 홀로그램에 얻어맞았다고 다치는 에스퍼가 어디 있다고. 그제야 수고하셨다며 인사를 한 서유진의 뒷모습을 보던 연우는 잔뜩 구겨진 얼굴로 훈련복을 정리했다.

“아니, 형은 무슨 옷을 훈련장 복도에서 벗어요.”

“자꾸 무시를,”

하니까요. 끝말을 삼킨 연우는 대신 한숨을 흘렸다. 가끔 낮은 등급의 에스퍼에게 과잉 반응을 보이는 에스퍼들이 있었다. 자신이 개미 앞의 코끼리라도 된 것처럼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 했다. 이런 쪽이 낮은 등급이라고 무시하는 에스퍼들보다 더 피곤했다. 그들은 하찮은 이능을 가졌다며 코웃음 쳤지만 그래도 에스퍼 취급은 해줬다.

반대로 서유진 같은 부류는 후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민들레 홀씨 같은 취급을 하며 어떻게든 보호하려고만 했다. 마치 게이트 앞을 기웃거리는 일반인에게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이능력자들처럼. 자신보다 급이 낮은 이능은 이능 취급도 안 한다는 뜻이지.

혀를 찬 연우는 잔뜩 주름진 미간을 문질렀다. 과거의, 아니 미래의? 아무튼 그때의 자신이 왜 저 재수 없는 놈의 사탕 취향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친해졌는지 의문이었다.

“훈련하다가 무슨 일 있었어요?”

마수가 나타날 때마다 자신을 보호하려던 서유진의 뒷모습을 떠올린 연우는 짧고 굵게 한숨을 쉬었다. 차헌은 앞을 향해 척척 걸어가는 연우의 뒤를 쫓았다. 공동구역 앞에서 기다려도 연우가 보이지 않기에 마중을 나왔는데 표정이 심상찮았다.

집에 가야 해결된다던 그 일은 잘 해결되었냐고, 오늘은 왜 그쪽에서 훈련하지 않았냐고, 새로 합류한다던 에스퍼가 저 사람이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보려 했지만, 차헌은 그 대신 연우를 제품으로 끌어당긴 뒤 구석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서류를 든 직원들이 차헌의 눈치를 보면서도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도 뿔이 난 연우의 표정을 살핀 차헌이 손끝을 움직였다. 그러자 바닥을 타고 흘러간 마나가 직원의 발치에서 피어올랐다. 펼쳐지는 얼음벽을 뒤로한 차헌은 엉뚱한 곳으로 걸어가는 연우의 어깨를 슬며시 잡아당겼다. 얼음벽을 두드리는 직원들을 노려본 차헌은 연우를 포탈로 이끌었다.

자료실에서 다른 자료를 마저 찾아보려 했던 연우는 A 구역으로 향하는 포탈을 보고 차헌을 붙잡았다. 차헌의 훈련장만큼 편하게 훈련할 수 있는 곳도 없었지만, 다른 구역에서 훈련을 금지한다던 훈련소장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훈련 시간은 끝났지만, 혹시 모른다.

“왜요?”

사정을 설명하자 차헌의 미간에 금이 갔다. 홍채 인식을 하다 말고 입을 뻐끔거리던 차헌이 A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과 빠져나가는 포탈을 번갈아 봤다. 어디로 가야 할지 갈등하는 차헌을 두고 포탈을 빠져나온 연우는 눈썹을 긁적였다.

이제 A 구역에 갈 필요가 있나? 듣자 하니 친한 척 달려드는 무리도 있다고 하고, 따돌림을 받는 것 같지도 않고, 마나도 제법 안정된 모양이니 굳이 차헌과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고민하던 연우는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오는 차헌의 표정에 고민을 접었다. 아니,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저기서 여기로 포탈을 빠져나온 것뿐이다. 그런데 왜 부모님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표정을 짓냐고.

연화도 저런 표정은 안 지었다.

“왜 말도 없이 나가요.”

A 구역 훈련소장이, 아니, 훈련소장뿐만이 아니다. 센터가 애를 얼마나 방치했으면 다른 구역 에스퍼한테 이러냐. 한숨을 삼킨 연우는 차헌을 끌고 포탈 앞에서 벗어났다.

“일단 사정이 이러니까 적당한 핑계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할 것 같은데….”

“핑계가 왜 필요해요? 형이 저한테 마나 다루는 법 가르쳐주고 있잖아요.”

그 말에 연우는 입만 웃었다. C급이 S급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듣는 순간 비웃기만 하겠지.

“훈련장이 안되면 숙소에서 하는 건요?”

되겠냐. 이마를 짚은 연우는 A 구역 훈련소장을 향해 욕을 날렸다. 숙소에서 이능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안 알려줬냐. 알려줬는데 까먹은 건 아니겠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차헌을 올려보던 연우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혹시 몰라 숙소에서 이능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재차 경고한 연우는 소매를 잡고 칭얼거리는 차헌을 달랬다.

“생각해보세요, 강차헌 에스퍼. 이제 막 활을 잡은 사람이 금메달리스트에게 활 쏘는 법을 알려준다고 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러니까요.”

눈높이가 맞는 설명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지 차헌의 얼굴에는 의문만 가득했다.

“뭐가 그러니까 라는 건데요? 형이랑 저는 다르잖아요. 저는 얼마 전에 각성했고, 형은 아니잖아요.”

“저는 C급이고, 강차헌 에스퍼는 S급이잖아요.”

“그런데요.”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에 연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다른 S급들이 이미지 메이킹을 얼마나 하던지, S급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이능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늦게 각성한 차헌이 이능을 다룰 줄 모른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사람이 많았지.

그런 차헌이 C급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게 알려지면 조롱하는 손가락질만 늘어날 게 분명했다. 노골적인 설명에도 차헌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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