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좀 쉬었다 할까요?”
배재영의 말에 연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동원 또한 죽겠다는 목소리로 제발요. 중얼거리다가 무릎부터 주저앉았다. 박서현도 아닌 척, 태연한 척 얘기를 나누고 있지만, 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저기….”
수줍게 손을 내미는 조희서를 보던 연우가 가볍게 한숨을 흘렸다. 대자로 퍼져 고개만 간신히 들어 올린 최동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훈련을 할 때면 조희서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저 멀리 떨어져 방관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배재영의 코앞에 앉아 황홀한 눈으로 마나볼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경고에 엉덩걸음으로 조금 물러난 조희서는 훈련이 끝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배재영이 감사 인사와 함께 가이딩을 받자,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던 조희서를 박서현이 불러세웠다.
“아… 필요하세요?”
떨떠름한 얼굴로 마나볼을 힐끔거리는 게 고작 이런 걸 하고 가이딩을 요구하냐고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도 박서현은 상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끼리는 대충 적응했는데, 조희서 가이드만 아직이잖아요. 이런 식으로라도 마나를 익혀놔야죠.”
그 말에 박서현을 빤히 바라보던 조희서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웃어주는데, 같은 팀원에게 가이딩을 해주는 게 아니라 적선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쪽들도?”
“됐습니다.”
최동원의 말에 연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딩도 해주는 사람 기분에 달렸는지 가이딩을 받아도 불쾌하기만 했다. 가이딩을 받고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니 차라리 가만히 누워 마나 코어가 마나를 만들어내기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음. 조금 쉬고 계세요.”
“같이 갈까요?”
따라붙는 조희서를 데리고 C 구역을 돌아다니는 배재영을 보며 연우는 작게 감탄했다. 분명히 같은 훈련을 했는데 낡고 지친 이쪽과 달리 배재영은 여전히 활기찬 얼굴이었다.
“이렇게 해볼래요?”
지치지도 않는지 배재영은 C 구역을 돌아다니며 무기를 쥐는 방법이나 마나를 다루는 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관학교 동기, 선우건이 생각났다.
오지랖이 심하게 넓어 탈락하는 동기를 두고 보지 못하고 통과될 때까지 도와주던 녀석이었다. 그런 선우건을 보며 이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은 더 없을 거라 그랬는데…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선우건이 속한 A 구역을 떠올리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강차헌이 생각났다. 자기 구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고 그렇게 서운하다는 티를 낼 줄 몰랐는데. A 구역에서 따돌림당하는 걸 알면서도 돌려보낸 것에 서운함을 느낄 수는 있겠지. 하지만 C 구역에 머무르는 기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C 구역에서도 배척당하게 될 것이다. 이제 어느 정도 이능을 다루게 되었으니까 강차헌도 A 구역에 적응할 것이다. 적응 못 한다고 해서 S급을 C 구역에 배정해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됐다. 이만하면 사람이 할 도리는 한 거다, 생각하면서도 입안이 썼다. 한연화랑 겹쳐 보이는 것만 아니면 벌써 신경을 껐을 텐데.
한숨을 삼키는데 얍! 하는 소리와 함께 마나볼이 날아왔다. 손을 뻗어 낚아채자 서늘한 마나가 연우의 손끝을 휘감았다. 같은 빙결계라 그런가 파동이 제법 비슷했다. 서늘한 기운 속에서 청아함과 포근함이 느껴지지 않는 마나가 흩어지는 걸 보며 연우는 머릿속에서 차헌을 밀어냈다.
“저기… 얼음이 많이 불편했어요?”
다가온 배재영의 얼굴이 시무룩했다. 그 사이에 누군가 불평을 토해낸 모양이었다.
“저는 누가 얼음을 만들어놨길래 저렇게 하면 되나 보다. 하고 만들어놓은 거였거든요.”
물음에 대답한 건 박서현이었다. 연우와 눈을 맞춘 박서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불편했던 건 아니고 없던 게 있으니까 눈에 거슬리는 거 있잖아요. 그 정도였어요.”
박서현의 말에 배재영이 과장된 손짓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훈련소장님이 미리미리 적응해두는 게 좋겠다며 마나를 남기고 오라고 하셨거든요. 볼 때마다 치워져 있어서 매일매일 설치하는 것도 힘들었는데 불편했다면 안 할 걸 그랬어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네가 범인이었구나.
훈련장 한쪽 구석에 소담하게 솟아오르는 차헌의 둥지는 치우기라도 편했지, 훈련장 한가운데 떡 하니 솟아오른 얼음 뭉치는 농도 짙은 마나까지 머금고 있어 치울 때마다 곤욕을 치렀다. 강차헌만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 있든 말든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이제 다시 시작해볼까요.”
배재영의 말에 몸을 일으킨 연우는 마나볼에 마나를 담아 이능을 사용했다. 최동원이 마나볼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내는 것과 동시에 연우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마나 코어가 힘들어 죽겠다고 쉬라고 항의를 하고 있었다. 더부룩한 압박감을 견뎌보려던 연우는 결국 손을 흔들었다.
“가서 좀 쉬고 와요.”
박서현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지친 얼굴로 쓰러지듯 누운 연우는 마나 코어가 안정되고 난 뒤 몸을 일으켰다.
훈련의 강도가 높아져서 그런지, 차헌과 단둘이 연습할 때는 밤을 새워도 끄떡하지 않던 마나 코어가 툭하면 죽겠다고 잉잉거리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연우는 훈련장 구석보다는 휴게실에서 휴식하는 걸 택했다. 위험 구역으로 발령받지 않은, C 구역 이능력자였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훈련장으로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연우에게 얼음을 치우라고 닦달하던 에스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조심히 빠져나온 연우가 휴게실로 들어가기 위해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한연우 에스퍼!”
부름에 고개를 든 연우는 곧바로 미간을 좁혔다.
눈이 마주친 직원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연우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한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한연우 에스퍼?”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연우는 걸음을 조금 더 빨리했을 뿐이었다.
“저기, 잠시만요!”
마음 같아서는 공간을 접어 도망가고 싶었지만, 트집을 잡을 게 분명했다. 지정된 장소에서만 이능을 사용하라는 말을 못 들었냐, 라고 시작해서 사람을 탈탈 턴 다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던데 한연화 에스퍼도 당신처럼 이능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게 아니냐며 꼬투리를 잡겠지.
그렇게 꼬투리를 잡은 뒤에는 한연우 에스퍼 말을 어떻게 믿냐, 확인을 해봐야겠으니 한연화 에스퍼와 면담하게 해달라고 난동을 부릴 게 안 봐도 눈에 선했다.
거의 뛰듯 훈련장으로 달려가던 연우는 앞에서 다가오는 다른 직원을 보고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와~ 한연우 에스퍼. 이런 데서 만나네요?”
C 구역 에스퍼를 C 구역에서 보는 건데 무슨 인사가 저래. 우연을 가장한 만남이 무척이나 반갑다는 듯 가증스럽게 웃고 있는 직원을 보던 연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뒤로 빠져 피해 보려고 해도 어느새 따라붙은 직원이 연우를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요즘 훈련은 어때요? 할 만해요?”
예전에는 저 질문이 반가웠던 적이 있었다. 내가 힘든 걸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관심이 기꺼워 살갑게 대했지. 하지만 그 관심의 끝은 언제나 연화를 향해 있었다. 그 뒤로 찰거머리 같은 직원들을 뗀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내가 언제?
지끈거리는 두통에 머리를 꾹꾹 누르던 연우는 다가오는 직원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보란 듯 무시하고 들으란 듯 한숨을 푹푹 쉬어도 직원들은 잠깐 당황했을 뿐, 뻔뻔한 웃음을 잃지 않은 채 연우를 둘러쌌다.
“식사는 하셨어요?”
“어디 불편해 보이시는데 치료실로 부축해드릴까요?”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 보려고 다가오는 직원들을 내려보던 연우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명백한 거부 의사에도 직원들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연우가 뿌리치고 나간다면 그것도 문제가 된다. 일부러 일반인 직원들을 골라 보낸 게 분명했다. 아무리 C급이라도 에스퍼는 에스퍼니까.
“아, 혹시 이거 확인해보셨을까요?”
바스락거리는 서류 봉투 소리에 연우는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기숙사 우편함에 가득 쌓인 봉투는 우편함이 터질 때까지 방치했다. 연화에게도 신경 쓰지 말라고 단단히 경고해 둔 뒤였다.
“하하. 한 번 읽어라도 보시지.”
연우가 무시해도 직원들은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태도를 예상했다는 듯 더욱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어떤 서류일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연우는 성인이 되는 것과 동시에 연화의 법적 보호자 자격 심사에 응시했다. 심사 통과 후 연화의 이능으로 헛짓거리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서명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연화의 보호자가 될 수 있었다.
헛짓거리를 한 게 누군데. 속으로 이를 갈던 연우는 보호자로 인정받자마자 인형처럼 앉아있는 연화에게 달려갔었다.
그 이후로 연화의 능력을 사겠다며 접근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연우의 손을 끌어내 어떻게든 쥐게 만들려는 저 서류에도 비슷한 내용이 쓰여있을 게 뻔했다.
“저희가 동생을 걱정하는 한연우 에스퍼 마음을 모르겠어요? 한연화 에스퍼에게 해가 될 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한 번 읽어라도 보세요.”
“맞아요. 한연우 에스퍼도 보면 마음에 드실 거예요.”
얼씨구. 말은 잘한다.
동의하는 순간 연화의 이능을 사적으로 썼다는 이유로 보호자 자격을 박탈할 거면서.
센터에 입사했을 때부터 언젠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불쾌했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장이 살살 녹는 기분이 들었다.
한숨을 삼킨 연우는 몸에 힘을 뺐다. 훈련 종료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았고, 그냥 이러고 있으면 지쳐서 떨어나가겠지.
하는 연우의 예상을 깨트린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뭔데요.”
눈을 살금 뜨자 차헌이 삐딱하게 서서 연우와 직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언제 또 한 명 더 들러붙었는지, 어느새 세 명이 된 직원들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채 연우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누구도 차헌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설마 자신들에게 말을 걸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는 반응이었다.
“비켜요.”
연우도 설마, 하던 찰나에 성큼성큼 다가온 차헌은 직원과 연우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옆에 섰다. 정확하게는 차헌을 보고 놀란 직원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서자, 그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뭐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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