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게 우연일 수 있나……?’
하진은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어릴 때지만, 다섯 살을 넘긴 나이였을 텐데 저렇게 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진은 복잡한 심경은 잠시 미뤄둔 채 마저 기록을 읽었다.
[……
피해 수습 중 연속적으로 던전 발생. 매뉴얼에 따라 민간인 대피에 힘쓰던 중, 한수영 가이드의 돌발행동 발생.]
한수영.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익숙한 이름 옆에 어울리지 않는 명칭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가이드셨다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충격받은 하진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이미 내용을 읽었지만, 이하성이라는 이름만 알 뿐, 한수영이 누군지는 모르는 차진우가 심상치 않은 하진의 반응에 더욱 그의 곁에 붙었다.
방해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잡지는 않았으나 어깨에 닿는 온기만으로도 하진은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진은 심호흡하며 다음 문장을 읽었다.
던전 발생 장소로 향한 어머니가 갑작스레 던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그 뒤를 아버지가 쫓았으나 어머니가 몬스터에 의해 사망했다는 문장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하진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죽음은 교통사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록은 하진의 기억과 달랐다.
그러나 하진은 쉽사리 기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에스퍼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가이드인 어머니가 던전에 들어간 것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기록에는 그 이유가 적혀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손을 쓴 게 분명해…….’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어머니의 죽음이 중요한 단서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진은 차진우가 짚어준 페이지를 넘어가 빠르게 훑었으나 그 이후로 이하성에 관한 기록은 던전 공략에 관한 걸 제외하고 다른 건 발견하지 못했다.
하진은 기록물을 덮었다. 이제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단서는 없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는 하진이 힘이 빠져 비틀거리자 차진우가 황급히 부축해왔다.
안아 들려는 것을 거절하고 잠시 기대어 눈을 감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기엔 기억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았고, 너무 오래전의 일이었다.
다만, 하진은 자신이 그나마 붙잡고 있었던 기억들이 모조리 거짓인 것만 같아서 그게 너무 공허했다. 허탈하기도 하고, 그럼 대체 무얼 하며 살아온 것인가 하는 회의감까지 느껴지려 할 때였다.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 등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하진의 등을 토닥였다. 모래로 쌓은 인간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기도 했고, 아기를 처음 안는 것처럼 어색하기도 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닿는 온기와 다정함에 텅 빈 것만 같았던 가슴에 무언가 차오르는 듯했다.
하진은 그대로 억지로 버티며 세우고 있던 몸에 힘을 풀며 차진우에게 아주 기대었다. 서른을 넘기고 무슨 어리광인가 싶어 징그러웠으나 이번만큼은 그런 생각은 접어두었다.
그냥 잠시만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하진……!”
갑자기 몸에 힘을 풀어버리는 행동에 당황한 차진우는 이내 허리를 끌어안는 두 팔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하진은 눈까지 감고서 한참을 차진우의 품에 안겨 있었다. 두 다리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면 잠든 건지 헷갈릴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무엇 하나 해결된 건 없었으나 하진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몸을 떼어냈다.
그는 어리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나 차진우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따름이었다.
물론 하진이 슬픈 것은 싫지만, 그가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은 그에게 가이딩을 받는 것과는 또 다른 충족감을 주었으니 말이다.
“그만 돌아가죠.”
차진우는 아쉬움을 삼키고 하진과 함께 자료실을 나섰다. 이제 이곳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일이 없다는 아쉬움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하진은 알파 팀에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과 기록이 다르다는 것도.
“기억은 왜곡된다고 하지만, 이건 왜곡 수준을 넘어 아예 다릅니다. 둘 중 하나는 거짓인 겁니다.”
최면을 걸고 세뇌로 사람을 조종할 수도 있는데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이라고 없겠는가.
“그리고 저는 높은 확률로 제 기억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하성의 행보와 엮어서 생각하면 그편이 더 가능성 있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고, 그게 이하성이 반정부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때가 몇 살이었는데요?”
“일곱 살이었을 겁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흐릿하게 기억에 남아 있으니 그즈음일 것이다. 하진의 대답에 이도윤이 잔뜩 성난 목소리를 냈다.
“그 어린 형한테 손을 댔다고?!
가능성 큰 가정일 뿐이지만, 어린 하진을 건드렸다는 말 자체에 화가 난 이도윤은 눈앞에 이하성이 있다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진은 그런 이도윤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보통은 상황이 어떻든 누군가의 가족을 욕하는 건 꺼리기 마련인데 이들은 정말 하진만이 중요하다는 듯 거리낌 없이 그의 몫까지 화를 냈다.
이들에게 자신이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꽤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체감할 때면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
“아직 하진 씨의 말이 끝나지 않았으니 진정하도록.”
차진우의 만류에 씩씩거리며 분을 가라앉힌 이도윤은 앞으로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물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을 생각인 거예요? 빨리 그 자식을 잡아야 할 것 아니에요.”
하진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어깨가 처진 것 같아 질문한 이도윤은 다른 세 사람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쏘아보는 것뿐인데 눈빛이 창끝이라도 되는 것처럼 뾰족뾰족했다.
노려보는 거야 아무런 상관없지만, 하진의 어깨가 처진 것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것만은 이도윤도 태연할 수 없었다.
“아! 물론 형이 편한 대로 하는 거죠! 나는 그냥 내가 도울 게 있을까 싶어서!”
이도윤의 노력에도 하진의 처진 어깨는 좀처럼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진은 이도윤이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는 걸 알았지만, 이번만은 맘처럼 태연한 척할 수 없었다.
이도윤의 탓은 아니었다. 다만 맞닥뜨린 문제에 이도 저도 못 하는 자신이 답답했을 뿐이다.
하진은 점점 더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도윤에게 흐릿하게 웃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할게요.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표정 관리도 못 하는 상황에서 계속 얼굴을 비쳐 봤자 분위기만 악화시킬 거라는 판단에 하진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도윤이 재촉한 건 아니지만, 방금 제 입으로 뱉은 대로 제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우유부단했다간 이하성과 마주한 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진이 2층으로 올라가고 거실에는 알파 팀만이 남았다.
“잘하는 짓이다. 안 그래도 걱정이 많은 형한테 그러고 싶냐?”
이도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한승호에게 사고뭉치 취급받는 것에 자존심 상했으나 어찌 되었든 제 발언을 기점으로 하진의 기분이 안 좋아진 것은 맞았다.
그가 하진이 올라간 2층 계단을 미련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아…….”
이도윤이 진한 한숨을 흘렸다.
한편 방으로 돌아온 하진은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한 차례 샤워를 마쳤다. 걱정은 수용성이라고 했던 직장 동료의 말이 기억나 느긋하게 욕조에 물까지 받아놓고 몸을 지지고 나왔다.
그러나 침대에 앉는 순간 다시 이하성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샤워 한 번에 날아갈 걱정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하진은 괜히 전 동료를 탓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걱정까지 끼쳐가며 고민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애초에 협회가 제대로 처리했어야 하는 문제고, 그들 사이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그 순간, 하진은 성질이라도 내듯 퍽 소리가 나게 드러누웠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내가 왜 이걸 고민하는 거지?”
하진은 머리를 때리는 듯한 충격에 입가를 가렸다.
“이하성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법이 판단하는 건데…….”
범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법이 있고, 경찰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하성은 이유가 뭐든 범죄자다. 그것도 국가적으로 위협인 범죄자.
사형당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판단하고 집행하는 것은 나라가 할 일이었다. 제가 뭐라고 끝을 낼 거라고 진지하게 굴었단 말인가.
하진은 이 당연한 사실을 잊은 자신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와선 다 쓸모없어졌지만, 어쨌거나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평범하게 살아온 자신이 그런 간단하고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니.
‘……나도 모르게 권력에 취해 있었던 건가?’
하도 떠받들어주니 정말로 자신이 뭐라도 된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수치심이 밀려와 하진은 베개로 얼굴을 덮고 꾹 눌렀다. 숨이 막혔지만, 하진은 지금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걸 참는 게 고작이었다.
잘난 듯이 권력에 물들어 오만방자하게 구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구분해댔던 과거가 떠오르자 콱 접시 물에 코라도 박고 싶어졌다.
“으으…….”
베개를 떼어낸 하진의 얼굴이 빨갰다. 하진도 그걸 느끼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창피해 죽을 것 같고 자신에게 실망한 것과는 별개로 속은 시원해졌다. 어떻게 보면 다른 이들에게 그 처리를 미룬 것뿐이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이게 당연한 거였다.
하진은 가슴을 갑갑하게 짓누르던 돌덩이를 치운 것 같은 기분에 모처럼 속 시원한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과거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이하성의 목적은 무엇인지 알아낸 건 아무것도 없고, 해결한 것도 없었으나 오늘은 모처럼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벨토리 공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