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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95화 (95/136)

95화

그가 죽은 달만 살펴볼 수도 없는 게 사건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는 자료다 보니 아무리 시간순으로 적혀 있다고 해도 서로 얽혀 있는 사건들이 있어 섣불리 넘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첫 장부터 살피다 보니 이제 겨우 자료의 절반을 넘긴 것이다. 하진은 몰래 끼워두었던 작은 종이 책갈피를 손에 쥐고 다시 집중해서 자료를 살폈다.

‘분명 있을 거야…….’

디지털 자료는 관리가 쉬운 만큼 접근하기가 쉬워 찾을 수 없었던 것일 테지만, 종이 자료는 섣불리 손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진은 그 작은 희망에 모든 걸 걸고 눈이 빠질 만큼 작은 글씨들을 읽어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이하성과 관련된 일련의 사건은 발견할 수 없었다.

너무 진득하니 앉아 있다가는 하진이 무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았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자주 드나들었던 데다가 오래 있기까지 했으니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는 게 좋을 듯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애써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속에 묻어나는 아쉬움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차진우는 손목에 찬 것을 반납하고 하진을 따라 걸었다.

“내일 자료실로 갈 건가요?”

그런 거라면 자신도 함께하겠다고 말했지만,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자료실에 들르기 시작한 건데, 너무 자주 가면 수상쩍어 보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진이 유난스럽게 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는 조금도 의심할 거리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같이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괜히 관심도 없는 곳까지 들쑤시고 다니는 거였다. 그리고…….

“이번엔 병동으로 가볼까 합니다. 그쪽에서 제 가이딩에 관심을 보여서요.”

하진의 가이딩을 받은 이들이 마치 만병통치약으로 온몸 구석구석을 씻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고 병동 관계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대체 하진의 가이딩이 어떠한 작용을 하기에 정체불명의 약으로 망가진 에스퍼의 몸과 파장을 깨끗하게 고쳐낼 수 있었는지 연구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하진은 그들의 러브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마침 이제 더는 자료실을 찾을 핑계도 떨어졌는데, 병동 연구를 도우면서 에스퍼들에 관해 조사한다며 자료실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반면에 차진우는 하진이 연구 대상이 되는 게 그리 탐탁지 않은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진의 계획에 토를 달거나 반대하고 싶진 않지만, 위험하지 않은 게 맞는지는 확인하고 넘어가야 했다.

“신체에 직접적으로 실험을 가하는 행위는 없겠죠?”

“……무슨 당연한 말씀을.”

하진이 살짝 어이가 없다는 음성으로 대답했는데도 그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라면 살짝 머리가 돌아가는 에스퍼인 차진우는 완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는 결국 기어코 자신이 따라 들어가 제 눈으로 직접 지켜보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실험이라고 하기에 무언가 거창한 걸 생각했건만, 하진이 하는 일은 그저 그들이 원할 때 가이딩하는 게 다였다.

“별거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아닌 척 안도하는 차진우를 목격한 하진이 작게 속삭이자 그가 민망한 듯,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하진이 다시 작게 속삭였다.

“이따 돌아갈 때 뭐 사갈까요?”

협회에 온 지도 시간이 꽤 되었고, 곧 저녁 시간이니 돌아갈 때였다. 더군다나 맛있는 걸 사가겠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하진은 그들이 잘 먹을 만한 음식을 고민했으나 차진우는 일말의 고민도 없었다.

“그 녀석들은 하진 씨가 돌멩이에 케첩만 묻혀줘도 맛있게 씹어먹을 겁니다.”

그 말에 하진이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으나 차진우는 진심이었다.

고작 돌멩이 좀 씹어먹는다고 죽을 인물들이 아니었다.

물론 정말로 먹어본 적은 없으니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설사 소화시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진이 걱정하는 게 싫어서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오늘의 마지막 실험 결과를 확인한 하진은 차진우와 병동을 벗어났다. 치료받으러 온 것도 아닌데 병동을 빠져나오니 괜히 후련했다.

두 사람, 정확히는 하진만의 고심 끝에 햄버거를 구매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세 사람이 달려 나와 하진의 품에 안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기다렸잖아요! 팀장이랑만 재미 보고!”

가장 시끄러운 두 사람이 역시나 시끄럽게 반겨줬다. 백자안은 두 사람과 달리 입을 열지 않고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마치 하진은 자신이 그를 버리고 간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하필 차진우가 봉투를 전부 들려는 것을 만류하고 각자 양손에 하나씩 쥔 상태다 보니 다짜고짜 안기고 드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묵직한 무게를 받아내며 하진은 뒤로 넘어가려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분명 그들이 힘 조절을 한 것일 텐데도 이 정도도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가려는 허리가 원망스러웠다.

‘젠장, 다시 운동해야지 원.’

그나마 끌어 올려뒀던 체력과 근육이 납치당한 시간 동안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다짐한 것과 달리 하진에게 운동할 틈 같은 건 생기지 않았다.

하루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다가 틈이 날 때면 자료실을 들락거리며 눈이 빠지게 글자들을 읽어대니 운동할 시간이 있을 리 없었다.

“찾았다……!”

드디어 이하성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진은 코앞에 다가온 진실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잠시 눈을 감았다.

저번에 이어 이전 연도의 기록을 읽고 있던 차진우가 하진의 반응에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하진의 시선은 기록물에 고정된 채 움직일 생각을 안 하였다.

가족이 없고, 고아원에서 에스퍼로 발현하자마자 협회로 온 차진우는 하진의 기분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는 그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하진은 맨 위에 적힌 ‘이하성 기록’이라는 글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조금만 시선을 내리면 원하던 진실이 적혀 있을 것이다. 과연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하진은 느리게 눈을 뜨고 고개를 내려 글자를 읽었다.

[20xx.10.09

협회 소속 알파 팀 팀장, S급 에스퍼 이하성. 던전 내 폭주로 사망 확인.]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짧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사망 확인이라는 글자를 읽은 순간, 하진은 헛숨을 삼켰으나 이내 심호흡하며 진정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가라앉히고서야 냉정하게 생각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너무 단출하게 적혀 있어. 뭐지? 오히려 수상쩍은데…….’

하진은 두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하나는 협회가 작정하고 기록까지 속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하성의 죽음에 관해 자세히 알려진 게 없어 제대로 적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더 살펴봐야겠어.’

하진은 뒷장을 더 살폈다. 그러나 사망 확인 이후로 이하성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하마터면 기록물을 찢을 뻔하고서야 하진의 손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하진은 소리 없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진정하려는 노력과 달리 속은 그렇지 못했다.

‘고작 이게 다인 건가?’

하진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정말이지 화가 나려 했다. 그간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서인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고작 한 줄로 끝이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일부러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이 감정의 이유가 후자라면 자신이 너무 구질구질하지 않은가.

해준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아버지가 남긴 건 유언이 전부였다. 나이가 두 자릿수가 되기도 전에 죽은 사람을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났다. 게다가 현실임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그 손에 죽을 뻔했다.

‘……병신도 이런 병신이 없지.’

하진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아버지였다.

아무리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멀다지만, 둘은 누가 봐도 가족인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닮았다.

남으로 오해해 위협한 것도 아니고 아들인 걸 알면서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여전히 큰 충격으로 남았다.

그러니 하진은 이하성의 초라한 기록에 분노해선 안 됐다.

“하진 씨, 이하성의 또 다른 기록을 찾았습니다.”

차진우의 목소리에 하진이 번쩍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이런 생각은 길게 할수록 좋을 게 없었다.

하진은 펼쳐두었던 기록물을 덮었다.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고선 차진우의 곁에 다가가 그에게서 다른 기록물을 건네받았다.

“전년도 기록이 아니네요?”

하진의 물음에 차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공략에 대한 기록만 간간이 보이기에 그해는 넘겼습니다.”

하진은 차진우의 판단을 믿었다. 던전 공략에 관해선 차진우의 경력을 따라갈 순 없었다. 그러니 그가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하진이 다시 살펴본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하진에 차진우가 말을 이었다. 그는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입이 열리기까진 조금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길 보면 던전 발생으로 인한 사고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하진의 시선이 차진우의 손끝이 가리키는 글자를 읽었다.

[20xx.03.05

서울시 xx구 도심에서 던전 발생. 알파 팀, 베타 팀을 비롯한 구조팀 투입. 그러나 사망자 103명, 부상자 235명 발생.

……]

하진에게는 익숙한 날짜였다. 어머니의 기일과 같았다. 심지어 던전이 발생한 장소마저도 하진이 살았던 동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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