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여태껏 집에만 박혀 있다가 갑자기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하면 협회장이 눈치챌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신이 어디에 있든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가이딩입니다. 에스퍼들을 가이딩하겠다고 하면 협회에서도 반길 테고, 그로 인해 제가 어디를 돌아다니든 이상할 게 없어지니까요.”
자신의 존재가 익숙해지면 자신이 어디를 돌아다니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심지어는 협회장이 직접 무궁화 2등급으로 올려주지 않았는가.
하진의 설명에 알파 팀은 머리로는 이해했다. 그가 협회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가이딩을 베푸는 게 가장 적합하다는 것도, 그러려면 다른 에스퍼들을 가이딩해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은 거였다.
매번 달랠 때면 알겠다고 세상 축 처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물러서다가도 다음 날이 되면 또 가지 말라고 매달린다. 오늘로 벌써 네 번째였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올 때 맛있는 거 사올게요.”
어린애 취급은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으나 어떻게든 자신들을 달래려 부러 목소리까지 부드럽게 내는 하진의 행동이 좋아서 자꾸 매달리게 되는 것도 있었다.
“이제 그만. 이럴수록 하진 씨의 귀가만 늦어질 뿐이다.”
차진우가 세 사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평소였다면 입을 삐죽 내밀어도 얌전히 물러났을 이들이 오늘만큼은 눈을 뾰족하게 뜨고는 차진우를 노려보았다.
“왜 팀장만 하진 형이랑 다니는 거야?”
한승호의 으르렁거림에 차진우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저번에 너희를 데려갔다가 싸움 날 뻔한 걸 그새 잊은 건가? 말리는 놈 하나 없이 싸우려고 덤벼들더니 어떻게 억울할 수가 있지?”
그 말에 다시 한승호의 입이 꾹 다물렸다. 차진우의 말대로 처음엔 그들도 하진과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
알파 팀은 절대 하진을 혼자 둘 수 없었고, 하진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견이 일치한 만큼 상황이 수월하게 흘러갔더라면 좋았을 텐데, 첫날부터 한승호가 하진의 손을 잡은 에스퍼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도윤은 하진을 껴안으려는 에스퍼를 들이받아 버렸고, 백자안은 하진을 유혹하려는 에스퍼를 말로 다져버렸다.
그 탓에 하진은 하는 수 없이 세 사람을 떼어놓고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진의 목적은 어디든 돌아다녀도 이상할 게 없는 자연스러움이지, 어딜 가도 사람들이 피하고 드는 게 아니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이젠 그리 가이딩으로 바쁘지도 않을 거였다. 대충 상황만 살펴보고, 실험 결과에 따라 가이딩만 더 해주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에스퍼들과 협회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환호하며 좋아했다.
협회는 하진이 에스퍼들을 가이딩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그들을 임무에 돌리기 시작했다. 더는 던전 관리를 미뤄둘 수 없기도 했지만, 협회장 입장에서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늘은 꽤 높은 등급의 던전을 처리하고 돌아온 베타 팀을 가이딩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들이 모여 있다는 장소로 향하자 베타 팀이 밝은 얼굴로 하진을 맞이했다. 물론 그러다가 차진우를 발견하곤 벌레 씹은 얼굴을 했지만.
“이하진 가이드, 정말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베타 팀의 팀장, 김수혁이 그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차진우가 잽싸게 하진의 어깨를 끌어안아 실패하고 말았다.
허공을 움켜쥔 김수혁이 입꼬리를 내리며 차진우를 노려보았다.
“필요 없는 사람까지 굳이 데리고 오셨군요.”
대놓고 필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데도 차진우는 오히려 작게 웃기까지 했다.
“하진 씨는 아직 혼자 돌아다니는 걸 불안해하거든.”
하진과 특별한 사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선을 긋는 모습에 한 방 먹은 김수혁이 이를 악물고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이하진 가이드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주변 공기가 약간 찌릿할 정도의 신경전에 하진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인사는 이만하고, 가이딩을 시작하죠.”
김수혁의 뒤쪽에 앉은 베타 팀 사람들이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걸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진에게 받았던 가이딩을 잊지 못한 것이지만, 하진은 가이딩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고 이해한 상태였다.
하진은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상대가 마치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팬처럼 손을 벌벌 떨면서 마주 잡아 왔다.
그런 반응이 사뭇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하진은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상대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시작했다.
‘이 정도 반응이면 양반이지.’
차라리 팬보이 같은 반응은 귀여운 축에 속했다. 하진은 불과 며칠 전에 만난 이를 잊을 수 없었다.
참다못한 이도윤이 들이받았던 상대, 그는 하진의 얼굴을 볼 때부터 마치 금단증상을 겪는 사람처럼 벌벌 떨더니 결국은 하진을 끌어안으려다가 이도윤에게 바디어택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거기서 멈췄다면 이도윤도 현재 차진우와 함께 하진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도윤은 감히 하진을 변태 같은 눈으로 쳐다보고 함부로 안으려 들었다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뻗쳐 상대를 사정없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는 바람에 집에 남게 되었다.
아무튼, 하진은 눈을 질끈 감고 제 손을 꼭 잡은 이를 부드럽게 가이딩했다.
“흐아아…….”
하진의 손을 잡은 에스퍼, 박형준은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가이딩에 눈물까지 훌쩍였다.
그의 손을 놓치기 싫어 눈물을 닦지 못한 채 몇 번 움찔거리더니 그냥 흐르도록 두는 걸 하진이 대신 닦아주었다.
“허억……!”
숨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놀라는 박형준에 하진이 당황하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그러자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붕붕 젓는 박형준이었다.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앞에 앉은 하진에게 그 바람이 닿을 정도였다.
“괘, 괘, 괜찮…….”
끝까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는 걸 본 하진은 빠르게 가이딩을 끝내기로 했다.
한지우의 흔적을 지워내기 위해 일전에 가이딩으로 씻어낸 덕에 하진은 수월하게 베타 팀을 가이딩할 수 있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차진우와 눈싸움하고 신경전을 벌이던 김수혁의 가이딩까지 마친 하진은 아쉬워하는 이들을 뒤로했다.
남겨진 이들을, 그중에서도 김수혁을 한 번 힐긋 바라봐준 차진우는 당연하다는 듯 하진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를 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가 물었다.
“이번에도 자료실로 갈 겁니까?”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은 자료실에 한 번 들어가면 해가 질 때까지 박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위해 다른 팀 에스퍼들을 가이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살펴봐야 할 곳들이 많으니까요.”
처음엔 요즘 같은 시대에 어째서 디지털 자료가 아닌 종이 자료인지 의문을 가졌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자료실 담당 직원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협회가 창설된 해에는 디지털 문화의 발달이 느렸던 때라 종이에 기록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좋게 포장해서 전통인 거지, 그냥 꼰대 문화가 이어진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직원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뒤늦게 따로 저장해둔 디지털 문서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디지털 자료에서는 이하성의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디지털 자료이니 자료를 없애기 더 쉬울 거라고 예상은 했으나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음에 허탈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게 종이, 실물 자료였다. 협회가 설립된 지도 50년이 넘은 만큼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막막함에 한숨을 터트리는 하진을 보며 차진우가 나섰다.
“저도 돕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차단기를 차고 들어가야 할 텐데요.”
종이 문서가 가득한 곳이다 보니 훼손의 위험이 있었다. 특히 에스퍼는 출입이 금지되거나 정말로 들어가고 싶으면 능력을 봉인하는 차단기를 착용하고서 들어가야만 했다.
단순히 능력을 봉인하는 것이지만, 전투 현장에서 살아가는 에스퍼들에게는 예민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게 하진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하진이 혼자가 되는 것에 예민한 건 하진보다도 에스퍼들이 더했다. 그를 혼자 둘 바에야 차라리 무능력자가 되어서라도 곁에 있는 게 나았다.
“물론 괜찮고말고요.”
차진우는 기꺼이 손목에 차단기를 차고 함께 자료실로 들어갔다. 며칠 좀 들락날락했다고 하진은 퍽 익숙하게 책장들을 지나쳐갔다.
그러고는 한 책장 앞에서 멈춰 서더니 차진우를 돌아보았다.
“이 많은 곳을 다 뒤져보면 좋겠지만, 그 사람이 사라진 연도를 기점으로 살펴보는 중입니다. 그해 연도 자료는 제가 살펴보는 중이니 차진우 씨는 전년도를 살펴봐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차진우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넘기는 것을 본 하진은 자신의 몫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불과 일 년 치에 불과한데도 무슨 자료가 이렇게 많은 것인지, 하진은 며칠째 이하성이 죽은 연도의 자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