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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92화 (92/136)

92화

하진은 조금씩 흥분하려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진정하자. 신중해야 해.’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가 협회를 속이고 죽음을 가장한 것인지, 아니면 협회가 먼저 죽이려고 했던 것인지…….

무엇보다 협회는 이하성의 생존을 알고 있는지, 이하진이 이하성의 아들인 것까지 알고 있는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질문은 차고 넘쳤다.

그러나 함부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하진은 스스로 알아낼 생각이었다. 고심하던 하진의 시선이 알파 팀에게 향했다.

‘그래도 이 사람들한텐 말을 해둬야겠지.’

이미 한승호에게는 이하성의 존재를 들키기도 했고, 이들에게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충동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진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 알파 팀을 거실에 불러 앉혔다.

“할 말이 있습니다.”

그 말에 협회장 앞에서도 태연했던 이들이 바짝 굳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씻지도 않고 부른단 말인가. 설마하니 떠나려는 건 아닐 거다. 그건 이미 협회장실에서 해결한 일이니까.

그럼 대체 뭘까. 알파 팀은 설마 자신들이 무언가 섭섭하게 하거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일이 있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잔뜩 긴장한 채 하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게…… 후우, 사실 여러분이 절 구하러 왔던 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이 자리에서 하진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단번에 이해한 사람은 그 당시 이하성과 마주했던 한승호밖에 없었다.

한승호는 손을 벌벌 떨면서도 제 손으로 끝을 내야 한다고 하던 하진을 떠올리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리겠어.’

하진의 아버지건 뭐건 상관없었다. 이미 이하성은 그의 눈앞에서 하진을 죽이려고 했다. 게다가 하진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다야 이미 피로 범벅인 자신의 손이 낫지 않겠는가.

한승호가 홀로 다짐하는 사이 하진의 설명이 이어지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를 만난 일, 그리고 그 아버지가 반정부 측에서도 간부로 보였던 것까지 말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일은 제외하고.

“그래서, 아버지에 대해, 아니 이하성이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할 생각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말을 마친 하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들은 알파 팀은 그제야 하진이 왜 협회장실에서 그렇게까지 행동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요?”

“……네?”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에 하진이 당황하자 곧바로 한승호가 역성을 들었다.

“야, 넌 뭘 그딴 걸 캐묻냐? 하진 형이 알아서 하겠지.”

그러나 이도윤은 오히려 미간을 구기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싫은 거라고. 하진 형이 뭘 하려고 하든 상관없어. 그러니 혼자 할 생각만은 하지 말아요.”

마지막 말은 정확히 하진을 향한 말이었다. 이도윤의 말을 듣고 설득이 되었는지 한승호도 이해한 얼굴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하진은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말하려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자신을 납치한 것인지,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낱낱이 조사하고…….

“그러고 나면…….”

그러나 다음에 나올 말은 혀끝에서도 맴돌지 못했다. 하진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으나 마치 목구멍이 꽉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버지를 저지하거나 최악의 경우 자신의 손으로 끝낼 거라는 말을 어떻게 쉽게 뱉을 수 있겠는가.

그 순간을 목격했던 한승호만이 하진이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

그는 몇십 년 만에 만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에 괴로워하는 하진을 보며 이하성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그러나 지금 당장에 무언가를 할 순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하진이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진은 포기하려는 이유를 찾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한승호가 볼 땐 정반대였다.

그는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기 위한 이유를 찾고 있었다. 무언가 이유가 있었기를, 자신을 납치한 것마저도 그가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니 하진이 이하성을 포기하는 그 순간이 온다면, 그 끝은 자신이 맺을 것이다.

속으로 다짐한 한승호는 그때까지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하진을 만류하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됐어. 지금 생각이 안 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뭐 하러 그렇게 머리를 싸매. 밥이나 먹자.”

이상함을 감지했던 다른 세 사람이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제일 먼저 백자안이 하진에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저번에 말씀하셨던 대로 요리하는 거 옆에서 봐주시면 안 돼요?”

백자안의 말에 그제야 생각에서 벗어난 하진이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몸을 일으켰다. 무언가에라도 집중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 같아서였다.

백자안이 하진을 데리고 부엌으로 사라졌음에도 진작에 따라붙었어야 할 한승호와 이도윤이 거실에 남아 있었다. 차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시선을 피해 보았지만, 그런 얕은수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한승호는 하진의 개인사를 자신이 함부로 말해도 되는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제 손으로 아버지의 목을 조르며 온몸을 떨던 하진을 상기하자 더는 숨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승호는 결국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형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형을 죽이려고 했어.”

털어놓으면서도 하진의 이야기를 자신이 함부로 말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에 한승호는 자꾸만 부엌을 힐끗거렸다.

“뭐?!”

“조용히 해……!”

한승호의 일갈에 이도윤이 분을 터트리려던 것을 겨우 참아냈다. 혹시나 들었을까 싶어 황급히 시선을 부엌 쪽으로 돌리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다행히 하진은 요리에 집중하고 있었는지 안에서는 도란도란한 대화 소리와 칼질하는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후우…….”

“그래서, 그다음은?”

차진우가 다시 시선을 모았다. 목소리는 전혀 흥분하지 않은 것처럼 고저가 없었으나 꽉 쥔 주먹 위로 불거진 핏줄과 힘줄이 그가 참고 있음을 나타냈다.

한승호는 작은 한숨과 함께 다음 말을 이었다.

“형한테 손을 댄 건 아니야. 내가 그 타이밍에 끼어들었으니까. 나중에는 형이 직접 가이딩으로 재워버리기도 했고…….”

그러나 이다음이 중요했다. 한승호는 다시 한번 부엌을 힐긋거렸다.

“그런데 형이 자기가 끝내야 한다며 그 사람, 죽이려고 했어.”

그 사람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하진이 무슨 이유로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새삼스레 윤리적인 이유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누구보다도 더러운 게 자신들 아닌가.

한승호가 한 말대로라면 조금 전 하진이 망설였던 말은 그의 아버지를 막아서겠다는, 즉 자기 손으로 끝내겠다는 말이라는 뜻이었다.

세 사람은 소리 없이 분노했다. 분노의 대상은 차고 넘쳤다.

하진을 죽이려고 했다는 그 아버지부터 하진을 납치한 서주안과 그에 가담한 한지우, 그리고 그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알지 못했던 협회와 자신들에게까지 그 화가 뻗어 나갔다.

하진이 그런 마음을 먹은 것 자체가 자신들의 죄인 것만 같았다. 한승호는 마치 그 생각을 안다는 듯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만약 형이 끝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끝을 내는 건 내가 할 거야.”

“맡겨놨어? 나한테 오면 내가 끝낼 거야.”

“둘 다 그만, 누가 됐든 상관없다. 하진 씨가 충격받지만 않게 해.”

차진우가 길게 이어지려는 유치한 싸움을 막아냈다. 그 말이 맞았기에 말다툼을 이어가려던 두 사람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가 얼추 마무리되자 이도윤이 뻐근한 목을 스트레칭하며 부엌을 살폈다.

“백자안 형도 들었겠지?”

공간이 분리된 것도 아니니 하진은 듣지 못했어도 평소 백자안이라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승호가 콧방귀를 거하게 뀌며 대답했다.

“들었겠냐? 형이랑 둘이 있어서 좋다고 헤벌쭉하고 있을 텐데.”

한승호의 말대로 백자안은 하진과의 단둘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란히 서서 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어깨가 부딪히기도 하는 것을 백자안은 기껍게 받아들였다.

하진은 손을 움직이고 요리에 집중하고 있으니 기분이 나아졌는지 평소와 달리 더 많은 말을 늘어놓았고, 백자안은 한 마디, 한 음절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집중했다.

그러니 한승호의 예상대로 거실에서 세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새우 꼬리에 그건 왜 떼는 건가요?”

백자안의 질문에 하진이 손에 쥔 새우를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내보이며 설명했다.

“새우 물총이라는 건데 물주머니라서 이걸 떼지 않으면 기름에 들어갔을 때 기름이 튀어요. 위험하니까 지금처럼 튀김을 하려고 할 땐 떼는 게 좋습니다.”

하진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꼬리에 달린 물총을 제거하자 백자안이 작게 박수 치며 감탄했다.

“형은 어떻게 그런 것도 다 아세요? 대단해요!”

별것도 아닌 걸로 박수까지 받으니 하진은 민망했다.

“누구나 아는 건데요.”

민망함을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는 시도는 곧바로 치고 들어온 백자안의 태클에 무산되었다.

“모두가 아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몰랐고요.”

초롱초롱한 눈빛을 이기지 못한 하진은 결국 시선을 치우기 위해 백자안에게도 새우를 건넸다.

처음 비린내를 묻히는 건 한 사람이면 족하다고 손을 대려던 백자안을 만류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입을 다물게 하지 않으면 고작 꼬리에 달린 물총 하나 뗀 걸로 일류 셰프 취급을 받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다.

“백자안 씨도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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