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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91화 (91/136)

91화

협회장은 최악의 대답이 아닌 것에 안도하며 숨을 얕고 길게 뱉었다.

“그런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있더군요.”

‘젠장, 말은 한 번에 끝마치란 말이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하진을 보며 협회장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아주 훌륭했다. 그 대상이 자신만 아니었더라면 제 밑에서 일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하진은 그런 협회장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무력하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한 번에 알파 팀을 불러내야 했던 사정을 알아볼 수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거라고요. 당시에는 상황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등급이 높다고 한들 가이드에 불과한 제가 어떻게 그러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

“그건…….”

협회장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말이야 맞는 말이라지만, 즉 하진이 원하는 건 일부라 할지라도 ‘권력’이었다.

얌전히 명령에만 따르지 않고 이것저것 재고, 따질 수 있는 권력.

상황이 이렇지만 않았더라면 단칼에 그럴 수는 없다고 잘라냈을 말이었으나 이미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겠다고 해버렸다.

협회장은 간사한 마음이 들었다. 뭐든지 해주겠다고 했으면서 막상 자신의 권위를 일부 떼어가려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었다.

원래 사람이란 게 제 손에 쥔 건 모래 한 알이라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생물 아니겠는가.

“으음, 그래도 그건 좀…….”

비단 개인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자그마한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진이 어떻게 사용하려 들지 모른다고 협회장은 합리화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었다면 하진은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진은 이 정도면 충분히 기회를 줬다고 생각했다.

누누이 말하지만, 이 자리에서의 갑은 하진이었다. 협회장이 싫다고 한다 한들, 그걸 좋게 어르고 달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게 힘들다면 저는 떠나겠습니다.”

“아닛, 뭐, 뭐라고?!”

하진은 강수를 두었다. 정말로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하진이 알아내야 할 정보는 이곳에 있으니까. 그러나 굳이 소탐대실하겠다고 하니 이 정도 충격을 줄 수밖에.

하진이 들은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틈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협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

이 순간, 협회장의 머릿속에는 하진을 보내선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다.

“기, 기다리게! 어딜 간단 말인가!”

협회장이 하진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칼같이 끼어든 백자안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감히 제 앞을 막은 행동에 협회장이 눈을 무섭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으나 오히려 금방이라도 턱밑에 칼을 들이밀 것 같은 서늘한 눈빛에 움찔 물러서고 말았다.

‘결국은……!’

협회장이 그렇게도 경계하던 상황이었다.

가이드에게 홀려 에스퍼가 자신을 적대하는 상황. 가이드라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도 있는 에스퍼이기에 그 고삐인 가이드를 잘 잡고 있으려 했다.

‘그런데 이 망할 놈들이 내 계획을 망쳐버렸어!’

협회장은 에스퍼들의 보호를 받으며 조금의 미련도 없이 자리를 뜨려는 하진을 목소리로나마 붙잡으려 들었다.

“대체 어딜 간단 말인가! 이대로 떠나면 도망자 신세밖에 안 된다는 걸 모르는 겐가?!”

하진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도 협박하려는 태도가 정말이지 일관성이 있었다. 이 정도는 해야 협회장씩이나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할 뻔했다.

그러나 돌아선 하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감탄이 아니라 협회장을 향한 비수였다.

“왜 제가 이 나라에 머무를 거라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능력이라면 어느 나라에서건 쌍수 들고 환영할 텐데요.”

협회장이 눈을 홉뜨고 숨을 삼켰다. 하진의 말대로 어떻게 그 생각을 미처 잊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당장에 하진을 S급 가이드로 발표했을 때만 해도 세계 각지에서 하진과의 만남을 요청한 나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하진을 꼬셔서 데려가려는 속셈이 훤히 보여서 그의 적응을 핑계로 전부 쳐내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진이 스스로 찾아가면 거부할 나라가 과연 있기나 하겠는가.

‘게다가 금붕어 똥처럼 S급 에스퍼,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강한 네 명이 덤으로 따라갈 텐데 거부하면 병신이지……!’

협회장은 그제야 자신과 하진의 관계 축이 그에게 기울어진 지 오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멍청하게도 아직 그는 자신이 위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 안 돼……. 이대로 보내면 협회는 정말로 망하고 말아.’

협회장은 생각할 것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박았는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다행히 하진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무릎까지 꿇은 협회장을 발견한 하진이 멈칫한 틈을 타 협회장은 고개까지 푹 숙이며 빌었다.

“내가! 내가 잘못했네! 내가 노망이 나 손에 쥔 걸 놓지 못했네……!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제발 협회를 버리지 말아 주게나. 제발!”

“아니…….”

약간 겁을 줄 생각은 있었지만,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박는 모습을 볼 생각까진 없었던 하진이 당황했다.

놀란 마음에 제 옆에 선 알파 팀을 살피는데 그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나만 놀란 건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알파 팀의 반응 덕에 하진도 빠르게 진정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별다른 것도 없었다.

이미 TV를 통해 선거철이 되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비는 정치인들을 봐오지 않았던가.

‘그래. 마음 약해질 필요는 없지.’

하진은 당황하고 놀란 마음을 다잡았다.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놀라 굳은 어깨를 풀고 표정을 가다듬은 다음, 하진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놀란 것치곤 제법 냉정한 말이었다. 협회장은 이미 마음이 떠난 것처럼 구는 하진에 절망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하진은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협회장과 눈을 마주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도 안전을 보장하셨지만, 얼마 되지 않아 제가 납치당했지요. 그리고 처음 돌아왔을 때도 보상으로 뭐든지 들어주신다고 하셨지만, 그 약속까지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거기서 하진의 말은 멈췄으나 협회장은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그가 무엇을 더 말하려다 말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더는 자신을, 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숨겨져 있었다.

협회장은 이 순간, 하진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끝장이라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는 미약한 희망을 놓지 못했다.

‘아직, 아직 희망은 있다.’

하진이 정말로 미국이든 중국으로든 넘어갈 생각이었다면 진작 떠났을 터였다. 굳이 자리에 멈춰 서서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가 뭐 있겠는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협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마지막 기회였다.

여기서 하진의 마음에 들지 못하면 그는 정말로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이다.

“……무궁화 2등급에 이하진 가이드를 지정하겠네.”

‘그게 뭐지?’

무궁화 2등급이 뭔지 모르는 하진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건 그뿐인지 알파 팀의 반응은 사뭇 놀란 듯했다.

‘반응을 보니 나쁜 제안은 아닌가 보네.’

드디어 협회장이 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했다. 그러는 사이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무궁화 2등급이면 협회장 바로 다음가는 권력을 쥘 수 있네. 물론 이하진 가이드가 원한다면 협회장 자리까지도 주겠네.”

“그건 괜찮습니다. 협회장은 뭐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하진에겐 협회장 다음가는 권력이라는 무궁화 2등급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찌 보면 차고 넘친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거야 협회장이 자초한 일이니, 하진이 알 바는 아니었다.

협회장은 하진의 말에 희망에 찬 얼굴로 되물었다.

“그, 그럼 협회에 남아주는 건가?”

“세 번까지만 참겠습니다.”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었다. 당돌한 경고에 인상을 쓸 법도 한 말에도 하진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협회장은 그저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숙이는 광경은 아무리 그 상대가 협회장이라고 해도 양심을 아프게 했다. 하진은 애써 티 내지 않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그래요. 이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아무나 부르면 되네.”

하진은 알파 팀과 함께 협회 건물을 나섰다. 그러자 건물이 멀어지기 무섭게 한승호가 입을 열었다.

“와, 무궁화 2등급이라니. 영감탱이가 진짜 쫄았나 본데?”

“그게 그렇게 대단합니까?”

하진이 맹하니 물었다. 협회장 다음가는 권력이라고 해도 소시민으로 살았던 하진이 얼마나 체감할 수 있겠는가.

“형이 지금 당장 연구동으로 가서 기밀 연구 자료를 요구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줄걸?”

그제야 권력의 크기를 체감한 하진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기밀 연구에 접근할 수 있을 정도면 하진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찾는 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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