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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90화 (90/136)

90화

하진이 할 일을 마치고 나자 협회가 바빠졌다. 가이딩을 받은 에스퍼들의 검진도 해야 하고, 완치가 확정된 이들이 하진을 만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것을 방어하기도 해야 했다.

연구동이나 의료동도 다를 바 없었다. 하진이 사태를 해결했다고 한들, 연구를 멈춰선 안 되었다. 오히려 하진의 가이딩에는 무슨 특별함이 있기에 치료가 가능했는지 알아내야 하는 과제가 추가되어 더욱 바빠졌다.

그나마 이제는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사이에 하진은 협회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이가 되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그때와는 다른 화제성이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S급 가이드라는 특이성과 희귀성에 집중받았다면, 지금은 이하진이라는 가이드 자체에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특히나 그날 밤 그와 함께 있었던 이들은 하진에 대한 호감에 이래저래 말을 얹었다. 처음엔 그들도 이렇게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마음속에 피어난 작은 호감이 괜히 하진을 향한 근거 없는 헛소문에 잠자코 있을 수만은 없었다.

최악의 사태를 피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싫은 내색 없이 시종일관 신사적인 태도였던 하진을 저도 모르게 변호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가이드의 갑질에 당해본 적이 있는 이라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엔 심드렁했다.

그러나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그 사이 애프터서비스를 위해 협회에 들른 하진과 마주치는 이들이 늘어나며 그 말을 믿게 된 이들이 많아졌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예? 아뇨. 뭐 힘든 일이라고요.”

“괜찮습니다.”

들은 대로 하진은 상대가 누구든 신사적인 태도로 대했다. 심지어는 협회의 잘못으로 그런 일을 겪고도 괜한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 되냐며 오히려 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까지 했다.

“저 사람은 진짜 다르구나…….”

하진을 겪어본 이들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의 이미지는 더욱 좋아졌다. 그리고 협회 내에 부는 새로운 바람을 인지한 협회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진을 불렀다.

그는 협회장의 호출이 생각보다 빨랐다고 생각했으나 알파 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진의 의도는 모르지만, 그들은 하진이 막 돌아왔을 때는 뭐든 해줄 것처럼 굴었던 이가 에스퍼를 치료하고 나자 연락도 없던 것에 이를 갈고 있었다.

“형, 가자. 가서 뭔 얘기를 하는지 들어나 보자고.”

한승호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은 그날 에스퍼들을 치료했던 밤 이후로는 굳이 알파 팀을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협회장을 상대하러 가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서 오시게.”

물론 협회장 또한 이들이 한데 모여 우르르 올 걸 예상하였다. 하지만 그는 병실에서와는 달리 당당하게 하진을 맞이했다.

아마 그간 하진의 행보를 보고받았기 때문일 터였다. 하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무슨 수를 써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머리가 터지게 고민했다.

그런데 하진이 알아서 에스퍼들을 치료하고, 연구에도 도움을 주고 있으니 안일해진 것이다.

협회장은 느긋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하더니 직접 일어나 차를 준비하는 정성까지 보였다. 그러자 등을 돌린 틈을 타 알파 팀에서도 감정 표현이 뚜렷한 한승호와 이도윤이 인상을 썼다.

그들의 눈에도 보인 것이다. 협회장의 마음이 며칠 전과는 다르게 변한 것을 말이다.

아무리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 변화를 목격하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진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손가락질로 협회장을 가리키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저걸 그냥 두고 볼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있나.’

물론 하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하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제게 맡기라는 신호를 보냈고, 다행히 그 뜻을 알아들은 한승호와 이도윤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커피는 오랜만에 타서 맛이 있을지 걱정이군.”

“협회장님께서 직접 타 주셨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협회장은 하진의 말에 매우 흡족해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이하진 가이드가 그리 말해주니 내 마음이 편하구먼.”

그러나 말과 달리 하진은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역시나 그 사실을 모르고 넘어갈 리 없는 협회장이 대놓고 미동 없는 잔에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어째 마시지는 않는군?”

하진은 머쓱한 미소로 대답했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을 떠올리니 긴장이 되어서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군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협회장이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구석엔 방심과도 같은 안심이 남아 있었다.

그는 하진이 떠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떠날 마음이었다면 그렇게 열심히 일할 필요가 뭐 있었겠는가.

“그래요. 해결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있었지.”

그렇게 대답하며 협회장도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 좋게 웃던 얼굴을 감추고 진중해진 협회장은 하진이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마지막 쐐기를 박듯, 한 마디를 남겼다.

“다시 한번 사과해야겠지. 정말 미안합니다, 이하진 가이드. 이번 사태는 협회의 책임이, 그중에서도 나의 책임이 가장 크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네.”

자연스럽게 사건을 마무리 짓는 듯한 말에 한승호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협회장에게 하진의 곁에 있는 알파 팀은 그리 무서운 존재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더 무서워질 수도 있는 존재들이지만, 하진의 성정을 믿기에 협회장은 서슬 퍼런 시선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이하진, 생각보다 무른 사람이었군. 흥, 하긴 제까짓 게 아무리 냉정하다고 한들 정치판 늙은이들만 하겠어?’

협회장은 부드러운 미소로 속내를 감췄다. 역시나 하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제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비단 저뿐만 아니라 협회의 모든 가이드들이 당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진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특히나…… 한지우 가이드 같은 경우가 두 번씩이나 생겨선 안 되겠죠.”

협회장은 하진이 아픈 구석을 자비 없이 찔러오자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그렇지.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협회의 이름과 함께 하는 모든 가이드들에게 이런 일은 없을 걸세.”

“다행입니다.”

하진은 마치 그거면 되었다는 듯 미소 지었다. 엄청난 배상액이라도 기꺼이 건네줄 각오가 되어 있었던 협회장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가는 대화에 어리둥절하면서도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좋아할 때가 아니었다. 하진은 김이 한풀 꺾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보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 보죠.”

“음?”

얘기가 끝난 줄로만 알았던 협회장이 당황했다. 그러자 하진이 오히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설마 이게 제가 요구하는 보상일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시겠죠?”

너희가 잘못해서 일을 벌여 놓고 앞으로는 말로만 그렇지 않겠다고 하는 게 보상이라는 거냐? 하진의 시선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협회장은 겨우 부드럽게 만들었던 분위기를 망칠까 싶어 서둘러 입을 열어 웃음소리를 만들었다.

“하, 하하! 당연히 이하진 가이드에 대한 보상은 따로 생각하고 있었네. 화제 전환이 갑작스러워서 당황한 걸 오해했나 보구먼.”

‘애쓴다…….’

한승호가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하진을 상대하는 협회장은 미처 발견할 정신이 없었다.

흠, 헛기침으로 틈을 만들어 협회장이 침착함을 되찾았다. 감탄스러울 정도로 빠른 진정이었으나 하진은 별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의 갑은 본인이었다.

“그럼 이하진 가이드가 바라는 보상이 뭔가? 말해보게.”

“제가 원하는 건 하나입니다. 자유, 그거 하나면 됩니다.”

모호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모호한 만큼 위험했다. 자유랍시고 협회를 떠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협회장은 구겨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며 대답했다.

“정확히 어떤 자유를 말하는 건지 물어도 되겠는가?”

협회장은 부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이 나오지만 않기를 바라며 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진은 아예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협회장의 기대를 배반했다.

“제가 없는 동안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제가 안일해서 일이 이렇게 된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 옆에 있는 알파 팀의 잘못일까요?”

자신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알파 팀이 몸을 움찔 굳혔다. 하진은 탓하는 게 아니라는 듯 양옆에 앉은 백자안과 한승호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놓았다.

“아니죠. 그럼 협회의 잘못일까요?”

하진의 시선이 협회장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그는 마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으로 하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조차 삼킬 수 없이 시선을 마주하던 순간 하진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것도 아니죠. 작정하고 사람을 납치한 놈들이 따로 있는데 왜 잘못을 애먼 데서 찾겠습니까.”

몇 초 되지 않는, 그야말로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찰나였다. 그러나 협회장은 하진이 협회를 탓하며 그대로 에스퍼들을 끌고 나가버리는 상상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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