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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87화 (87/136)

87화

물론 하지 않으면 그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잘 알았다. 다만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따라주지 않아서 문제였다.

아무리 그들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도 그게 어디 폭주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정도겠는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베타 팀이어도 그렇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하진의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혀가 닿으며 가이딩이 퍼지는 순간이 얼마나 황홀한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하진에게 제발 하지 말라고 매달리고 싶어졌다.

그런 질척하고 음습한 마음을 하진은 단순한 질투로 받아들였다. 하진이라고 해서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한들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과 돌아가며 키스해야 한다고 하는데 좋기만 하겠는가.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사람이 죽는다는데…….”

그러나 하진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 버렸다. 게다가 다른 방안이 있다면 모를까, 해결할 수 있는 이가 자신뿐인데 그걸 회피할 성격이 못 되었다.

그러한 설득에도 한승호는 여전히 싫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하진의 결정에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건 다른 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하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숨의 의미는 어떻게 설명해야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었지, 절대 화가 난 게 아니었는데 알파 팀은 하진의 기분이 상한 줄 알고 황급히 말을 바꾸며 기분을 맞추려 들었다.

“아닙니다. 하진 씨 뜻대로 하십시오.”

“잘못했어요, 형…….”

비록 백자안이나 한승호는 여전히 입도 벙긋하지 않았지만, 하진의 눈치를 살피는 건 마찬가지였다.

“네? 아니, 잠깐만요.”

오해가 생긴 듯해 하진이 수습에 나섰다.

“화난 게 아닙니다.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는 거였을 뿐이에요.”

“정말……?”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불쌍하게 눈을 뜬 이도윤이 되물었다. 그러자 하진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확고히 대답한 하진은 조금은 머쓱한 듯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번만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그냥 아무 감정도 담기지 않은 인공호흡에 불과하니까…….”

머뭇머뭇 흘러나온 음성에 이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거…… 우리한텐 감정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돼?”

솔직히 이도윤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기껏해야 하진이 놀라는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가 자신들을 아낀다고 하더라도 감정의 무게가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저 말도 무의식중에 나온 말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다는 건 그의 무의식 속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이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데 하진이 보인 반응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얼굴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빠르게 붉어진 하진이 저를 보지 말라는 듯,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게 아닌가.

“어? 어어?”

그 반응에 이도윤은 물론이고 함께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하자 하진이 얼굴을 가린 채 입을 열었다.

“……감정이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하진이 그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광경에 다들 하나같이 말을 잃고 말았다.

갑자기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세상 가장 진귀한 것을 손에 쥐여준다고 해도 이보다 기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뇌가 정지하는 것 같은 자극에 알파 팀이 아무 말도 없으니 민망함에 잠겨 죽을 것 같은 하진이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서 한 번 봐줄 겁니까, 말 겁니까?”

쑥스러움에 괜히 투덜거렸으나 말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진, 큼, 하진 씨 뜻대로 하세요.”

그나마 차진우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지만, 그런 그도 순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바람에 부끄러워지긴 했으나 어쨌거나 알파 팀의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럼 내일이라도 당장 가이딩 시작하겠습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간 하진이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려 하자 한승호가 다급히 붙잡았다.

“잠깐! 대신 우리랑 같이 가.”

가이딩 건은 그렇게 넘어간다지만, 그렇다고 흑심으로 가득할 에스퍼들에게 하진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한승호가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자 나머지 세 명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하진 씨를 혼자 보내는 건 저희로선 불안하니까요.”

하진도 그 마음은 알았다. 본인조차도 믿음이 없는데 저들이라도 뭐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막상 다른 에스퍼를 가이딩하는 걸 저들이 얌전히 지켜볼 수 있느냐는 거다.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하지 않은 관계이지만, 그들의 애정은 그 관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하진도 마음도 편하지 않았었고.

“……괜찮겠습니까?”

뭐가 괜찮은 건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혼자 가는 것보단 나아.”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다면 괜찮지만, 그럼 한 사람만 같이 가는 걸로 하죠.”

그러자 한목소리로 의견을 낼 땐 언제고, 금세 태도를 바꿔선 자신이 가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에 결국 하진이 가위바위보를 제안했고, 승자가 정해졌다.

제가 내밀었던 주먹을 꽉 쥔 채 하늘을 향해 들어 보인 이도윤이 팔랑거리며 하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회를 잡지 못한 이들은 불만스러워 보였으나 애초에 방식을 제안한 게 하진이었기에 얌전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형! 내가 이겼어요!”

“축하합니다.”

하진이 가볍게 짝짝 박수를 치자 이도윤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그렇기에 하진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는 애네.

함께 갈 사람까지 정해지자 하진은 서둘러 움직이려 했다. 남은 이들이 마치 버림이라도 받은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 차라리 빠르게 해치우고 돌아오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올 거죠?”

백자안이 불안하다는 듯 하진의 소매를 쥐었다. 하진은 별말을 다 듣는다는 듯 작게 웃었다.

“이도윤 씨까지 같이 가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제가 같이 가고 싶었는데…….”

백자안은 그제야 아쉬운 마음에 쥐고 있던 소매를 놓았다. 백자안의 손자국이 그대로 남았으나 하진은 구태여 손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식사를 건너뛴 그에게 당부의 말을 남기기 바빴다.

“식사 차려주기로 했는데 늦어지겠네요. 다음에 해줄 테니까 혹시라도 굶을 생각하지 말고 챙겨 먹어요.”

하진이 돌아올 때까지 먹지 않고 기다릴 생각이었던 백자안이 그 말에 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불쌍하게 쳐다보았지만, 하진은 단호했다.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걸 기다리겠다는 건가.

“꼭 먹어야 합니다. 백자안 씨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다요.”

“알겠습니다.”

차진우가 대표로 대답한 것을 들으며 하진이 멀리서 발에 불이 붙은 듯 뛰어오는 하성진 대리에게 다가갔다.

“가장 급한 사람들부터 알려주십시오.”

* * *

“연구동에서 급하게나마 새로운 억제제를 만들었지만, 사실상 능력이 전개되는 것만 막았을 뿐이지 폭주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방사 가이딩으로 에스퍼를 진정시킨 다음에 점막 가이딩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폭주 에스퍼가 있는 곳에 도착하고, 하성진 대리는 각각의 독방이 있는 곳으로 하진을 데려가면서도 쉬지 않고 주의사항을 읊었다. 하진은 그 주의사항을 머릿속에 새겼다.

“후, 이곳입니다. 문을 열면 바로 있는 건 아니고, 복도를 지나야 독방에 도착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성진이 아까부터 챙겨왔던 가방을 내밀었다.

“안에 파장 측정 기계와 연구동과 의료동에서 합작으로 만들어낸 채혈기가 있습니다. 손끝을 찔러 피를 내고 검사하면 체내에 남은 약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후에 자세한 검사는 거쳐야 하지만요.”

“알겠습니다.”

사용법까지 빠르고 간략하게 전해 들은 하진은 가방을 받아 들고 커다란 문고리에 손을 올렸다. 힘주어 열어젖힌 후 들어서는 하진의 뒤에서 하성진의 당부가 들려왔다.

“첫째도 둘째도 이하진 가이드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부디 조심하시고 가이딩을 마친 후여도 안심하지 마세요.”

“이제 나도 인사 좀 해도 되나?”

이도윤은 제가 하려고 했던 당부의 말을 모조리 하성진이 하는 바람에 얼굴이 뚱했다.

이도윤이 끼어들자 하성진이 슬쩍 옆으로 비키며 멀어졌다. 이도윤은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하진의 손을 잡고, 끌어안는 자유를 누리며 당부했다.

“안에 있는 새끼가 형 덮치려고 하면 가이딩으로 재워버리고 나한테 말해요. 내가 죽여, 아니 처리할게.”

‘처리하는 게 뭐 다른 표현이라고 뿌듯해하는 거람.’

그러나 하진은 타박하는 대신 이도윤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고 문을 열었다.

쿠궁-

하진이 들어서자 두꺼운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하진은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폭주할 것을 대비해 만들어진 독방으로 향하며 이 복도를 걸을 때, 과연 에스퍼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감히 예상하건대 무척 외로웠겠지.

하진을 만나기 전의 알파 팀도 이 복도를 걸었을 것이다. 그동안 맞는 가이드가 없었다고 했으니 아마 이 길이 익숙할 터였다.

‘다시는 이런 곳에 들어가게 두지 않겠어.’

하진은 빠르게 발을 옮겼다. 복도는 꽤 길었다. 드디어 도착한 문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그가 들어왔던 입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다시 앞을 바라본 하진은 주저하지 않고 닫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빠르게 방사 가이딩을 퍼트렸다.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득히, 그러나 잠들지는 않을 정도로 농도를 조절했다.

그러자 한쪽에 웅크린 채 짐승처럼 신음하며 괴로워하던 에스퍼가 잠잠해졌다.

움직임이 멎고, 바닥에 엎어진 에스퍼는 마치 전력 질주로 마라톤을 마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가, 가이드……?”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힘들어하면서 어떻게든 하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려는 몸짓이 애처로웠다. 그는 파장 측정기를 꺼내어 수치가 어느 정도 떨어질 때까지 방사 가이딩을 멈추지 않았다.

파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에스퍼 또한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을 때 하진이 입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금부터 가이딩할 테니 부디 얌전히 있으세요.”

에스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하진이 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식은땀으로 축축한 양 뺨을 아무렇지 않게 쥔 하진은 망설이지 않고 다가가 입을 맞췄다.

기대감이 서린 에스퍼에게는 미안하지만 한시라도 빠르게 가이딩을 마치고 돌아가야 했기에 하진은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허억!”

살짝 혀가 닿으며 방사 가이딩과는 차원이 다른 질의 가이딩이 들어가자 에스퍼가 순간 흥분하며 하진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이런 반응 정도는 예상했던 하진은 강하게 가이딩을 때려 넣었고, 그를 옭아매듯 끌어안았던 에스퍼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묵직한 무게를 받아 조심스레 바닥에 눕힌 하진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든 이를 끌고 갈 수는 없으니 밖으로 나가 에스퍼를 챙기도록 일러야 했다.

‘생각보다 비효율적이야.’

하진은 남이 들으면 기함할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는 진심이었다. 치료해야 할 에스퍼가 S급만 해도 알파 팀과 방금 치료한 이를 제외해도 15명은 남았다.

심지어 A급 중에서도 한지우에게 가이딩받은 이들이 있다고 했으니 몇 명이 더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일단 급한 사람들 먼저 찾아간다.’

마음 같아선 한 공간에 모아놓고 방사 가이딩으로 다 재워버린 다음 인공호흡 하듯 치료하고 싶었으나 폭주 전조 현상이 시작되었거나 이미 폭주 중인 이들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진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뛰듯이 걸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자 어느새 도착한 직원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렇지 않아도 잠든 에스퍼를 챙겨야 할 이가 필요했는데 잘된 일이었다. 하진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근처에 있는 직원에게 일렀다.

“가이딩은 순조롭게 마쳤고, 지금 잠들어 있으니 데려가십시오.”

“예!”

들것을 가지고 직원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진은 그대로 하성진에게 눈짓했다. 이도윤은 챙기기도 전에 하진에게 다가와 착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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