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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83화 (83/136)

83화

분명 알파 팀이 최근 협회의 근황을 차단했던 걸로 아는데 어디서 들은 정보란 말인가. 하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검사받을 때 말해주더군요.”

그랬다. 당시 협회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알파 팀은 괜히 하진에게 헛소리하지 못하도록 그의 곁을 지켰다.

에스퍼가 작정하고 경계하니 다가서지 못하던 의료진은 유일하게 그들이 없는 타이밍을 노렸고, 그 수작이 먹혀든 것이다.

그 사실을 하진에게 직접 전해 들은 알파 팀은 의료진을 향한 분노를 키웠다.

“이 새끼들이…….”

하진은 순간 자신에게 사실을 전해준 의료진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않은 자신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좀 해보라고 일거리를 떠민 게 괘씸했다.

‘그리고 설마 일반인을 때리겠어.’

그저 무섭게 쳐다보며 겁을 주고 마는 선에서 그칠 것이다. 물론 일반인에게는 그것조차도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의 공포라는 걸 하진은 몰랐다.

“그럼 일단은 가이딩으로 수치만 낮추겠습니다. 그건 괜찮겠죠?”

하진이 정승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알파 팀의 가드가 너무 단단해서 시간이 꽤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승윤은 이때다 싶어 하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무리 알파 팀의 기세가 무섭다고 해도 그도 에스퍼였다.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준다는데 거절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좋은 티를 내면 저 미친놈들이 화를 낼 테니 적당히 표정 관리를 할 생각이었다.

“흡!”

그런데 손에서부터 부드럽게 밀려오는 가이딩을 맛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표정 관리고 뭐고, 그저 멍청하게 입을 헤, 벌리고 가이딩에 온몸을 맡기게 되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은 가이딩이 정승윤의 몸을 한 바퀴 돌면서 끝이 났다.

“아……!”

정승윤은 멀어지는 하진의 손을 잡아채려 했으나 옆에서 눈을 까뒤집을 기세로 지켜보고 있던 한승호가 번개처럼 빠르게 낚아채는 바람에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덕분에 몸은 다 나았네요. 감사합니다.”

작은 미소와 함께 건네진 감사 인사는 어떤 의미에선 축객령이었다.

정승윤은 옆에만 있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 걸 반쯤은 알파 팀의 등쌀에 밀려 나가게 되었다.

한승호와 이도윤에게 양쪽으로 어깨동무를 당한 채 현관까지 떠밀린 정승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만 보면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멀리 떠나야 하는 사내 같았다.

“우리 형은 착해도 너무 착하지.”

그때 한승호에게서 뜬금없는 말이 나왔다. 하진이 있을 곳을 바라보던 정승윤의 시선이 한승호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 한승호가 살벌하게 읊조렸다. 마치 하진이 들을 것을 걱정하듯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니까 그냥 고마워서 보답한 거뿐이니까 혹시라도 질척댈 생각은 말자.”

말만 예쁘게 했지 협박이었다. 평소였다면 전투 능력원이 아닌 정승윤은 아니꼬워도 순순히 받아들였을 테지만, 하진을 향한 마음은 그런 식으로 눌러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하진 가이드가 당신들 소유물도 아닌데 무슨 권리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정승윤의 말에 이도윤이 혀를 차며 한 걸음 멀어졌고, 한승호의 무표정에 사나운 미소가 자리 잡았다.

이도윤이 평소 그를 짐승, 간혹 짜증 날 때면 짐승 새끼라고 부르는 것이 단번에 이해가 가는 미소였다.

“아아, 그렇지. 하진 형이 물건은 아니지. 그럼 나하고 한번 해보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지?”

정승윤의 표정이 굳었다. 다른 에스퍼들이었다면 좋다고 달려들었을 상황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치료 계열 이능력을 가진 에스퍼였다.

공격적인 부분에서 당연히 밀렸다. 에스퍼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몸은 튼튼하겠지만, 그 몸도 한승호가 더 튼튼할 게 분명했다.

“아니, 잠깐…….”

그제야 자신이 누구에게 대놓고 맞섰는지 깨달은 정승윤이 상황을 바꿔보려 애썼으나 하필이면 옆에 있는 사람은 이도윤이었다.

한승호에 비해 얌전하다는 평을 받지만, 그건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일 뿐이었다. 오히려 이도윤은 한승호의 소란에 기대어 제 잘못을 감출 줄 아는 영악한 성격이라 까다롭기는 더 까다롭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그나마 상식이라는 게 있다는 평을 받는 차진우였다면 희망을 품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 일이 아니라며 관심도 주지 않고 있었다.

정승윤의 뒷덜미를 타고 땀이 한 방울 흘렀다. 그는 속으로 욕설을 뱉었다. 앞에는 한승호에 뒤는 이도윤이라니. 잘못 건드려도 한참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설마 나하고 싸울 생각은 아니겠지?”

가이드 다음으로 중요한 치료 계열 에스퍼였다. 전투 상황에서는 가이드보다도 중요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정승윤은 눈이 반쯤 돌아서는 여전히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한승호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그런 말을. 내가 깡패냐?”

한승호는 마치 전부 농담이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에도 정승윤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안심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도윤이 여전히 미친놈을 보듯 한승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의 불길함은 빗나가지 않았다. 한승호는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듯 정승윤의 어깨에 제 팔을 걸치고는 꽉 힘을 줬다.

“윽!”

숨이 막힐 정도는 아니지만, 그 힘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던 정승윤이 반사적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한승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똑똑히 경고했다.

“근데 내가 걸어오는 싸움은 또 안 피하거든. 네가 먼저 걸었다?”

제 할 말을 마친 한승호는 정승윤을 놓아주었다. 잔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정승윤을 보며 실실 웃는 모습은 깡패가 아니라고 한 말의 신뢰성을 뚝뚝 떨어트렸다.

“그럼 얼른 꺼져.”

현관 밖으로 정승윤을 내쫓은 한승호는 미련 없이 문을 닫고 서둘러 하진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을 닫고 나오는 차진우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하진 형은?”

“씻고 나온다고 하니 거실로 내려가자.”

뜨끈한 물로 전신을 씻어낸 하진은 상쾌한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제 몸뚱이를 제 맘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에 새삼스럽게 감사하며 거실로 들어서자 한승호와 이도윤만이 그를 반겼다.

“이제 괜찮은 거지?”

“아프면 언제든 그 자식 불러요. 단, 우리랑 있을 때만.”

하진은 질투가 섞인 투정을 받아주며 차진우를 찾았다. 설마 가이딩도 제대로 못 했는데 임무를 나간 것은 아니겠지?

“차진우 씨는요?”

“쳇, 팀장만 찾는 거야?”

한승호는 질투에 혀를 차면서도 하진의 물음을 무시하지 못하고 착실히 대답했다.

“밥 차리고 있어.”

“혼자서요?”

하진은 그저 자신이라도 손을 보태려고 한 말이었으나 타박으로 받아들인 두 사람이 우물쭈물 변명했다.

“우리보곤 손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는데 뭐.”

하진은 순간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뻔했다.

“크흠, 저도 돕고 오겠습니다.”

하진은 자신이 움직이자 자연스레 따라오려는 두 사람을 소파에 앉혀두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샤워 시간이 길지 않았던 탓에 차진우는 한창 준비 중이었다.

“하진 씨? 쉬고 계셔도 되는데요.”

“같이 하면 빨리 할 수 있잖습니까. 냉장고에 있는 반찬만 데우면 되는 일이고요.”

“잠깐……!”

차진우가 냉장고 문을 여는 하진을 막아 세우려 했으나 그보다 하진이 조금 더 빨랐다. 차진우를 의아하게 여기던 하진은 냉장고 안을 보고서야 왜 자신을 말리려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왜 반찬을 데우는 게 아니라 새로 요리를 하려고 했는지도 말이다. 생각해보니 어제도 굳이 셋이서 새로 요리했었다.

그저 하진에게 정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냉장고가 이렇게 텅 비어 있을 줄은 몰랐다. 물도 정수기로 마시는 탓에 냉장고 속엔 몇 가지 재료나 양념 소스만 남아 있었다.

“이게…… 뭐죠?”

반찬이 떨어질 때면 알아서 채워주지 않았던가? 설마 하진이 없는 사이에 대우가 달라지기라도 한 건가? 하진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자 차진우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큼, 그동안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보니…….”

먹을 사람이 없으니 음식을 채워놓지 않은 것이었다. 하진은 그 말에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식사는요? 잠은?”

하진이 자리를 비운 게 한 달이 넘는데 그동안 알파 팀 또한 마찬가지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식사나 잠을 대체 어떻게 해결했단 말인가.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차진우가 어떻게든 순탄히 넘겨보려 했으나 하진은 순순히 넘어가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결하셨는데요?”

하진은 이럴 게 아니라며 거실에 있던 한승호와 이도윤까지 불러 식탁에 앉혔다.

이미 거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던 그들은 하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제가 없는 동안 어떻게 식사와 잠을 해결했습니까?”

하진의 추궁에 차진우가 입을 열었다.

한승호나 이도윤이 말하는 것보단 차라리 자신이 말하는 편이 나았다. 두 사람이 하진을 속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다만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니 저 둘보단 깔끔하게 말하는 자신이 하는 게 나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식사는 전투 식량으로 나온 에너지 바로 해결했고, 수면은 한 번씩 협회에 돌아올 때면 숙직실이나 독방에서 해결했습니다.”

“협회에 며칠에 한 번씩 돌아오셨는데요?”

이 정도면 충분히 깔끔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으나 하진은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상세한 것마저 털어버리려는 하진에 차진우가 결국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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