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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한 게 최곱니다-82화 (82/136)

82화

“치사해.”

하진은 손등을 앙앙 깨물긴 하지만 그 이상은 하지 않는 한승호를 보며 안심했다.

“형, 떨어져. 나중에 해준다잖아.”

이도윤이 끈질기게 하진에게 붙어 있는 한승호를 뒤로 잡아당겼다. 역시나 이능력이 신체 강화여서 그런지 손쉽게 한승호를 떼어냈다.

약 성분을 없애기 위해선 하진과 입을 맞출 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막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당장에는 하지 않을 거라고 하니 조금이라도 붙어 있는 꼴을 볼 순 없었다.

무 뽑히듯 쑥 뽑혀 나간 한승호가 하진의 앞에서 힘으로 밀린 게 창피한지 거칠게 이도윤을 떨쳐냈다.

“놔, 새끼야!”

“형이 미친개처럼만 안 굴면 되거든?”

“뭐?”

서로 아옹다옹 작게 다투기 시작하더니 점점 그 다툼이 커지려는 기미가 보였다. 자신의 방에서 싸우다니. 하진은 제 방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목이 마른데 누가 물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내가 가져다줄게.”

한승호가 다투던 중에도 잽싸게 뛰쳐나갔다. 하진은 같이 뛰쳐나갈 줄 알았던 이도윤이 얌전히 자신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를 알겠다는 듯 이도윤이 피식 웃었다.

“왜 나는 같이 안 뛰어가나 신기해요?”

“으음, 조금은요.”

순순히 인정하는 하진에게 이도윤이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나는 승호 형처럼 단순 무식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렇다기엔 둘이 너무 잘 노는데…….’

이도윤의 말을 순순히 믿기엔 하진이 그간 봐온 모습들이 있었다. 사소한 걸로도 다퉈대는 두 사람의 정신 연령과 수준은 다른 누가 봐도 비슷하다고 생각할 거였다.

그리고 그런 하진의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챈 이도윤이었다.

“아니, 이 형이 안 믿네? 승호 형이 유치하게 구니까 내가 말린 거지, 나도 원래는 소란스러운 거 싫어하거든요?”

“그렇군요…….”

정말 설득력 없는 말이었다. 하진이 그저 습관적으로 대답하자 이도윤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형, 물 가져왔어!”

자신이 얼마나 차분하고 진지한 사람인지 알려주려 했던 이도윤의 계획은 물을 가지고 온 한승호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저 형은 무슨 물을 주전자에다가 가져와?”

이도윤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하진도 그에 공감했다. 어쩐지 평소의 한승호치고는 시간이 걸려서 물을 쏟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승호는 커다란 주전자와 컵을 내려놓았다. 하진의 얼굴보다도 큰 주전자였다. 이런 크기에다가 물을 받았으니 오래 걸리는 게 당연했다.

“움직이기 힘드니까 두고 마시라고 많이 가져왔어.”

그가 칭찬해 달라며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간 것은 칭찬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와, 형 진심이야? 팀장이 치료 에스퍼 데리러 갔잖아. 그러면 다 낫는데 뭐 하러?”

한승호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의 몸이 굳어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움직임을 가까이에 있는 하진이나 예리한 이도윤이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으하하학! 형 진짜야? 미치겠네!”

“닥쳐……!”

진심으로 창피한지 한승호가 이도윤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빛과 같은 속도로 그 손을 피하는 이도윤이었다.

“아학! 으흐흑, 미치겠다. 아 진짜 바보야?”

하진도 웃기긴 했으나 이도윤이 저렇게 웃음을 멈추지 못하자 그는 입꼬리조차 올릴 수 없었다. 자신은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귀여워서 웃음이 나오려는 거였다.

‘저러다 진짜 싸우겠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본 하진이 한승호를 콕 집어 불렀다.

“한승호 씨.”

“어…….”

그는 하진 또한 자신을 바보 멍청이로 보겠지 싶어 시무룩했다. 한승호는 생각이 단순하긴 해도 멍청하진 않았다. 그런데 그 단순함이 하진과 엮이는 순간 이런 작은 실수를 만들어냈다.

“물 좀 먹여줄래요?”

한승호는 시무룩한 와중에도 컵에 물을 따라 조심스레 하진을 일으켜 세워 입안으로 흘려주었다. 목이 많이 말랐는지 하진은 한 컵을 다 마시고도 모자랐는지 한 컵을 더 마셨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살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습니다. 목이 많이 말라서 한 컵으론 부족했을 텐데 많이 떠와서 다행이네요. 사실 매번 물 마시러 내려가기 귀찮았거든요.”

아무리 한승호라고 해도 저게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다 티가 났으나 그래서 오히려 더 좋았다.

“혀엉…….”

하진의 몸만 괜찮았다면 꽉 끌어안았을 것을, 한승호는 애꿎은 주먹만 꽉 쥐어 안고 싶은 충동을 참아냈다. 순식간에 형성된 둘만의 분위기에 실컷 웃어대던 이도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진 씨, 에스퍼 데려왔……. 무슨 상황이지?”

마침 치료 에스퍼를 데리고 돌아온 차진우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물었다. 그 질문은 무슨 사고라도 친 거냐는 추궁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셨군요. 뒤에 계신 분이 치료 에스퍼십니까?”

“아…… 네. 정승윤이라고 합니다.”

정승윤은 말로만 들었던 하진을 처음 마주했다. 첫인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예쁘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저렇게 생겼는데 등급까지 S급이니 에스퍼들이 미쳐서 날뛸 법도 하다고 내심 인정했다.

“누워서 인사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전신에 근육통이 느껴져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이라서요.”

“정승윤 에스퍼, 치료를 부탁합니다.”

정승윤은 재촉에 하진의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사내의 방인데도 냄새도 나지 않고 오히려 향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맡아졌다. 그는 티 나게 킁킁대지 않도록 신경 쓰며 하진의 손을 잡았다.

“그럼 치료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그는 힐긋 하진의 얼굴을 살폈다. 가까이서 보니 더 예뻤다. 홀린 듯이 기다란 속눈썹을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황급히 시선을 피하자 하진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치료를 빌미로 가이딩을 받아보려 했던 정승윤은 좋은 신호인 건가 싶어 가슴이 두근거렸다.

운 좋게 폭주 위험군 초기에 머물고 있지만, 그도 한지우에게서 가이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능력이 능력이다 보니 자주 불려 다니는 탓에 협회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한지우에게 많은 가이딩을 받은 몸이었다. 그런데도 위험군 초기이니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정승윤이 이능력을 사용하자 마치 몸 안에 살랑바람이 부는 것 같더니 하진을 괴롭히던 근육통이 싹 사라졌다.

“치료는 끝났으니 한번 움직여 보시겠어요?”

하진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상시와 같은, 아니 오히려 평소에 작게 느껴지던 뻐근한 증상까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하진은 입을 작게 벌리며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평소에 좀 좋지 않았던 곳까지 다 나았습니다.”

하진의 말을 놓치지 않고 정승윤이 겸손을 떨었다.

“마음에 드시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마음에 들 뿐만 아니라 하진은 가볍기 그지없는 몸 상태에 여전히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정승윤에 대한 고마움이 마음 깊은 곳에서 퐁퐁 솟아났다.

‘이래서 에스퍼들이 가이드에게 목을 매는 건가?’

조금이나마 그들의 마음이 이해 가기까지 했다. 하진은 제대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부탁드려서 당황스러우셨을 텐데요.”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이 이건데요, 뭘.”

정승윤은 대가로 가이딩을 부탁하려다가 말았다.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등 뒤에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알파 팀이 있어서였다.

저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하진이 먼저 해주겠다고 하는 게 아닌 이상 지금은 물러나는 게 나았다.

‘이걸로 좋은 인상은 남겨뒀으니 나중에라도 나 먼저 해주겠지.’

게다가 능력 덕에 협회의 내부에 가장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 정승윤은 협회가 조만간 하진에게 에스퍼들의 가이딩을 부탁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협회는 발 빠르게 움직일 것이다. 지금도 폭주 직전 상태에 괴로워하는 에스퍼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가이딩을 받을 수 있을 터이니 지금은 물러날 때였다. 같은 S급이라고 해도 전투 능력이 아닌 정승윤은 알파 팀 세 명을 상대하기 버거웠다.

“그럼 저는 이만…….”

“아, 이왕 오신 김에 가이딩이라도 받고 가시죠.”

“정말요?”

“형?!”

정승윤이 저도 모르게 반색했다가 한승호의 기겁하는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하진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그럽니까?”

“왜냐니! 가이딩은 우리한테만 해주는 거 아니었어?!”

이도윤이나 차진우도 한승호처럼 호들갑을 떨지 않을 뿐, 하진을 바라보며 말을 철회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하진은 그럴 수 없었다.

“처음 협회에 왔을 땐 그런 조건이긴 했죠.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습니까.”

“뭐가 다른데!”

“한지우 씨한테 가이딩받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 아니에요. 지금 다들 폭주 전조 때문에 위험하다던데.”

하진의 말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낀 차진우가 슬쩍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하진 씨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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